본문 바로가기
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五八. 梁孝王世家

by 柳川 2019. 6. 23.

                               卷五八. 梁孝王世家

<양 효왕의 평생과 경제와의 갈등>
양()나라 효왕() 유무()는 효문제의 아들이고 효경제와 같은 어머니이고 어머니는 두() 태후이다.

효문제에게는 모두 네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이 태자로 이가 효경제이고, 둘째아들은 유무(), 셋째아들이 유참(), 넷째아들 유승()이었다.

효문제 즉위 2년에 유무를 대왕(), 유참을 태원왕(), 유승을 양왕()에 봉했다.

2년 뒤에 대왕을 회양왕()으로 옮기고 대() 땅을 모두 태원왕에게 주어 대왕()으로 불렀다. 유참은 즉위 17년인 효문제 후원 2년에 죽으니, 시호를 효왕()이라 했다. 아들 유등()이 뒤를 이으니 이가 대공왕()이다. 즉위 29년인 원광 2년에 죽고, 아들 유의()가 즉위하니, 이가 대왕()이다. (재위) 19년 한나라가 함곡관을 확대하여 상산()을 경계로 삼으면서 대왕을 청하()로 옮겨 왕으로 삼았다. 청하왕()은 원정() 3년에 옮겨졌다.

당초 유무가 회양왕이 된 지 10년에 양왕 유승이 죽었고 시호는 양회왕()이었다. 회왕은 (효문제의) 막내아들로서 다른 아들에 비해 더 사랑을 받았다. 그 이듬해에 회양왕 유무는 양왕으로 옮겨졌다. 양왕이 처음 양의 왕이 되니 효문제 12년이었다. 양왕이 처음 왕이 된 지 모두 11년이 지난 뒤였다.

양왕 14년에 입조했다. 
17년, 18년에도 잇따라 입조하여 머물렀다가 그 다음 해에 봉국으로 돌아갔다. 
21년에 입조했다. 
22년에 효문제가 세상을 떠났다. 
24년에 입조했다. 
25년에 다시 입조했을 때 주상이 아직 태자를 정하지 않고 있었다. 주상이 양왕과 술자리를 가졌는데 아무 생각 없이 “천추만세 후에는(내가 죽으면) 왕에게 (보좌를) 물려주겠소.”라고 했다. 왕이 사양했다. 진정으로 한 말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속으로는 기뻤고, 태후 또한 그랬다.

이해 봄에 오(), 초(), 제(), 조()나라 등 7국이 반란을 일으켰다. 오나라와 초나라가 먼저 양()나라의 극벽()을 공격하여 수만 명을 죽였다. 양 효왕은 수양()의 성을 지키면서 한안국()과 장우() 등을 대장군으로 삼아 오나라와 초나라를 막았다. 오나라와 초나라는 양나라에 막혀 서쪽으로 넘어 오지 못하고 태위 주아부()와 서로 3개월을 대치했다. 오나라와 초나라는 무너졌고, 양나라가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한나라와 비슷했다.(한나라 정부군이 죽이거나 잡은 결과와 비슷했다.)

이듬해 한나라는 태자를 세웠다. 이 무렵 양나라는 (한나라 조정과) 가장 가까웠고 공도 있고 나라도 컸으며 천하의 기름진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땅은 북으로 태산에 이르고, 서쪽으로 고양()에 이르렀는데, 40개 넘는 성은 모두 큰 현이었다.

효왕은 두 태후의 작은아들로 사랑을 받았고, 하사 받은 상은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효왕은 동원()을 지었는데 둘레가 300리가 넘었다. 수양성()은 70리로 넓혔다. 궁전을 크게 지어 복도로 연결했는데 궁에서 평대()까지 30리 넘게 이어져 있었다. 천자가 하사한 깃발을 앞세우고 나서면 수많은 수레와 말이 그 뒤를 따랐다. 동서로 치달으며 사냥에 나서면 천자를 방불케 했다. 나가고 들어올 때는 길을 치우게 하는 등 그 경비가 삼엄했다. 사방의 호걸들을 불러 모으니 산동의 유세객들이 모두 몰려들었다. 제나라 사람 양승(), 공손궤(), 추양() 등이었다.

공손궤는 괴이한 계책이 많아, 왕을 처음 만나 천금을 하사받았고, 관직이 중위()에 이르니 양나라에서는 그를 공손장군으로 불렀다. 양나라는 쇠노, 활, 창 등과 같은 병기 수십만 개를 만들었고, 창고에는 1억에 이르는 금전을 쌓아 놓았으며 옥기 등 보물이 도성보다 많았다.

29년 10월에 양 효왕이 입조했다. 경제는 사신에게 부절을 가지고 네 마리 말이 이끄는 수레를 타고 함곡관 아래에서 양왕을 맞이하게 했다. 조회를 마치자 글을 올리고 (도성에) 머물렀는데 태후가 친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왕이 입궁하자 경제와 같은 수레로 모셨고, 나갈 때도 같은 수레로 사냥을 나가 상림원()의 새와 짐승을 사냥했다. 양나라의 시중(), 낭관(), 알자()는 이름을 등록하여 모두 천자가 다니는 문으로 출입하니 조정 관리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11월에 주상이 율태자()를 폐위시켰다. 두 태후는 속으로 효왕을 후계자로 삼고자 했다. 대신들과 원왕() 등이 경제에게 관련된 일을 말하여 두 태후의 생각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로써 양왕을 후계자로 삼자는 말도 더 이상 없어졌다. 이 일은 비밀에 붙여져 세상은 알지 못했고, (양왕은) 인사를 올리고 봉국으로 돌아갔다.

이해 여름 4월에 주상이 교동왕()을 태자로 삼았다. 양왕은 원앙과 이 일을 거론한 신하들을 원망하여 양승, 공손궤 등에게 몰래 사람을 시켜 원왕과 그 일을 거론한 신하 10여 명을 찔러 죽이게 했다.

자객의 행적을 추적했지만 찾지 못했다. 이에 천자는 양왕을 의심하여 자객을 추적하니 과연 양왕이 사주한 것이었다. 이에 사신을 계속 보내 양을 조사하여 공손궤, 양승을 체포하려 했다. 공손궤와 양승은 양왕의 후궁에 숨어 있었다. 사신이 (양의) 대신들을 거세게 다그치자 양나라의 상 헌구표()와 내사() 한안국()이 양 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양왕은 양승과 공손궤에게 자살을 명령하고 그 시신을 내주었다. 주상이 이 일로 양왕을 원망하게 되었고, 양왕은 두려운 나머지 한안국을 시켜 장공주()를 통해서 두 태후에게 사죄하고 나서야 풀릴 수 있었다.

주상의 노기가 어느 정도 풀리자 글을 올려 조회를 청했다. 함곡관에 이르자 모란()이 양왕에게 삼베로 치장한 수레를 타고 두 명의 기병만 데리고 장공주의 후원에 숨어 있으라고 권했다.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양왕을 맞이했으나 왕은 이미 함곡관을 들어왔고, 마차와 말은 모두 함곡관 밖에 있는데 왕의 소재는 알 수 없었다.

두 태후가 울면서 “황제가 내 아들을 죽였구나!”라고 했다. 경제가 걱정하고 두려워했다. 이 때 양왕이 큰도끼를 지고는 대궐 아래로 와서 사죄하니 태후와 경제가 크게 기뻐하며 서로 울면서 전처럼 (관계를) 회복했다. 양왕의 시종관들을 모두 불러 함곡관을 들어오게 했다. 그러나 경제는 양왕을 점점 멀리 하여 같은 수레를 타지 않았다.

35년 겨울에 다시 입조하여 머물기를 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주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봉국으로 돌아갔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북쪽 양산으로 사냥을 나갔더니 누군가 소를 바쳤는데 발이 등 위쪽에 달려 있어 효왕이 싫어했다.

6월 사이 열병으로 엿새 만에 죽으니 시호를 효왕이라 했다.

효왕은 인자하고 효성스러워 태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면 먹지도 못하고 잠도 편히 자지 못했다. 늘 장안에 머무르면서 태후를 모시고자 했다. 태후 역시 그를 사랑하여 양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먹지 않으면서 “황제가 정말 내 아들을 죽였구나!”라고 했다. 경제는 슬프고 두려웠으나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장공주와 상의하여 양나라를 다섯 개 나라로 나누어 효왕의 아들 다섯 전부를 왕으로 삼고 딸 다섯에게도 전부 탕목읍()을 주었다. 그리고는 이를 태후에게 알리자 태후는 그제야 기뻐하며 황제를 봐서 억지로 음식을 먹었다.

 

 

 

양 효왕의 후손들

 

<양 효왕 자손들의 상황>
양 효왕의 큰아들 유매()가 양왕이 되니 이가 공왕()이다. 아들 유명()은 제천왕()에, 아들 유팽리()는 제동왕()에, 아들 유정()은 산양왕()에, 아들 유불식()은 제음왕()에 봉해졌다.

양 효왕이 죽기 전에 재산이 억만을 헤아렸지만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었다. 죽고 난 다음 창고에 보관된 황금이 40만이 넘었고, 다른 재물들도 이와 비슷했다.

양 공왕() 3년에 경제가 세상을 떠났다. 공왕은 재위 7년 만에 죽고 아들 유양()이 즉위하니 이가 평왕()이다.

평왕 유양 14년에 어머니를 진() 태후로 불렀다. 공왕의 어머니는 이태후()로 불렀다. 이태후는 평왕의 친할머니이다. 평왕이 왕후는 성이 임()이라 임 왕후로 불렀다. 임왕후는 평왕 유양에게 큰 총애를 받았다.

당초 효왕이 있었을 때 천금이나 나가는 뇌준()이란 그릇이 있었다. 효왕이 후손들에게 뇌준을 잘 보존하여 남에게 주지 말라고 훈계한 적이 있었다. 임 왕후가 이 일을 알고는 뇌준이 갖고 싶었다. 이에 평왕의 할머니 이 태후는 “선왕께서 명하시길 뇌준을 남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물건들은 백억이 나가도 마음대로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임 왕후는 그것이 더 갖고 싶어졌다. 평왕 유양은 바로 사람을 시켜 창고를 열고 뇌준을 갖고 오게 해서는 임 왕후에게 주었다.

이 태후가 크게 노하여 조정의 사신이 오자, 직접 이 일을 말하려 했으나 평왕 유양과 임 왕후가 이를 제지하려고 문을 잠그게 했다. 이 태후가 문을 열다가 손가락이 문에 끼었고, 끝내 조정의 사신을 만나지 못했다.

이 태후가 식관장(), 낭중() 윤패() 등과 간통한 적이 있었다. 이에 왕과 임 왕후는 이것을 가지고 사람을 시켜 넌지시 이 태후를 제지했다. 이 태후는 자신의 음란 행위도 있고 해서 그만 두었다. 그 뒤 병으로 죽었는데, 병이 났을 때 임 왕후는 문병도 가지 않았고, 죽은 뒤 상례도 갖추지 않았다.

(무제) 원삭 연간에 수양() 사람으로 유안반()이라는 자가 있었다. 그 아버지에게 모욕을 준 자가 회양 태수의 손님과 같은 수레를 타고 외출했는데 손님이 수레에게 내리자 유안반은 그 원수를 수레 위에서 죽이고는 도망쳤다. 회양 태수는 노하여 양나라의 2천석 급 관리를 나무랐다. 그 관리는 유안반을 서둘러 수배하는 한편 유안반의 친척을 잡아들이게 했다.

유안반이 양나라의 은밀한 일을 알고는 조정에다 이 변고를 알렸는데, 왕과 그 할머니가 뇌준을 다툰 진상을 모두 보고했는데, 당시 (양나라의) 승상 이하 관리들도 이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로써 양나라의 고위 관리들에게 해를 주기 위해서였다. 이 문서가 천자에게 알려졌고 천자는 관리들에게 넘겨 조사하게 하니 그런 일이 있었다. 공경들이 평왕 유양을 서인으로 폐출시키라고 청했다.

천자는 “이 태후는 음란한 짓을 저질렀고, 양왕 유양은 좋은 스승이 없어 의롭지 못한 일에 빠진 것이다.”라 하고는 양나라의 성 여덟 개를 없애고 임 왕후의 목을 베어 저자거리에 내걸게 했다. 양나라에는 아직 열 개의 성이 남아 있었다. 유양은 즉위 39년 만에 죽었고 시호를 평왕이라 했다. 아들 유무상()이 양왕으로 세웠다.

제천왕() 유명()은 양 효왕의 아들인데, 환읍후()로서 효경제 중원 6년에 제천왕이 되었다. 7년에 그 중위를 사살하자 조정의 담당관이 (제천왕을) 죽이길 청했다. 천자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유명을 서인으로 폐출시켜 방릉()으로 옮겼다. 그 땅은 조정의 군으로 편입시켰다.

제동왕() 유팽리()는 양 효왕의 아들로 효경제 중원 6년에 제동왕이 되었다. 29년에 교만하고 포악한 유팽리는 군주의 예를 무시하고 저녁 무렵 몰래 그 노복, 떠돌이 소년 수십 명과 함께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짓을 즐겼다. 죽임을 당한 사람이 100명이 넘었다. 나라 사람들이 이를 알고는 밤에 감히 나다니질 못했다. 피살자의 아들이 글을 올려 이를 알렸다. 조정의 담당관이 죽이길 청했으나 주상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서인으로 폐출시켜 상용()으로 옮겼다. 그 땅은 조장에 편입시켜 대하군()으로 삼았다.

산양()의 애왕() 유정()은 양 효왕의 아들로 효경제 중원 6년에 산양왕()이 되었다. 재위 9년에 죽었다. 아들이 없어 봉국은 해제되고 땅은 조정에 편입시켜 산양군()으로 만들었다.

제음()의 애왕() 유불식()은 양 효왕의 아들로 효경제 중원 6년에 제음왕()이 되었다. 1년 만에 죽었다. 아들이 없어 봉국은 해제되었고 땅은 조정에 편입되어 제음군()으로 만들었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양 효왕이 총애를 받으면서 기름진 땅에서 왕 노릇을 했지만 한나라 조정이 융성하고 백성은 부유했기 때문에 재물을 모으고 궁실을 늘려 천자에 버금가는 수레를 타고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분수에 넘치는 것이었다.”

 

<저소손의 보충>
저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신이 낭관()으로 있을 때 궁전의 늙은 호사가 낭관이 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바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양 효왕이 불만을 품고 옳지 못한 일을 하려한 것은 문제의 원인이 궁중에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태후가 여자 군주로서 작은아들을 아낀 까닭은 양왕을 태자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신들이 제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바로 말하지 않았고, 큰 국면은 살피지 않은 채 비위를 맞추고 사사로이 그 마음에 들어 상이나 받으려 했으니 충신들이 아니었다. 그 때 모두가 위기후() 두영()처럼 바른 말을 했더라면 어떻게 후환이 생겼겠는가? 경제가 양왕과 술자리에서 태후를 모시고 술을 마시면서 “내가 죽으면 왕에게 보위를 전하마.”라고 하자 태후가 기뻐했다. 두영이 그 앞에 있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한나라 법에 아들이나 적손에게 전하게 되어 있거늘 지금 황제께서는 어찌 하여 동생에게 전하여 고제의 약속을 어지럽히려 하십니까?”라고 했다. 이에 경제는 아무 말도 못했고, 태후는 속으로 언짢게 생각했다.

옛날에 주나라 성왕()이 어린 동생과 나무아래에 서 있다가 오동잎 하나를 따주며 “내가 너를 봉하리라.”라고 했다. 주공()이 이를 듣고는 나아가 “천자가 동생을 봉한 것은 아주 잘 한 일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성왕이 “내가 그냥 장난삼아 한 말일 뿐이오.”라고 하자 주공은 “군주는 잘못된 행동을 해서도 안 되지만 농담도 안 됩니다. 말을 뱉었으면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라고 했다. 이에 어린 동생을 응현()에 봉해했다. 이후 성왕은 평생 감히 농담을 하지 못했고, 말을 했으면 반드시 실행했다.

『효경()』에 “법도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법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라고 했으니 이는 성인들이 지키는 말씀이다. 당시 주상은 양왕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지 말았어야 옳다. 양왕은 위로 태후의 총애가 있고 보니 교만함이 날이 갈수록 더했고, 경제로부터 죽으면 자리를 전하겠다는 좋은 말을 여러 번 들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또 제후왕이 천자에게 조회할 때 한나라 법에 따르면 모두 네 번 뿐이었다. 도착하면 들어가 소현()이라 하여 잠깐 뵙는다. 정월 초하루 아침에는 가죽에 싼 벽옥()을 바쳐 정월을 축하하는데 법에 따라 만난다. 사흘 뒤 왕을 위해 술자리를 마련하고 금전이며 재물을 내린다. 이틀 뒤 다시 들어가 잠깐 뵙고 인사하고 떠난다. 장안에 머무는 기간은 모두 20일을 넘지 않는다.

소현이라는 것은 한가한 틈에 금문 안에서 만나 궁중에서 술을 마시는 것으로 일반 사대부는 들어가 할 수 없다. 당시 양왕은 서쪽으로 입조하여 반 년 가까이나 머물렀다. 들어가서는 천자와 같은 수레를 탔고, 나올 때도 같은 수레를 탔다. 또 허풍으로 큰소리를 치고는 실제로 주지 않아서 원망의 말을 내뱉게 만들고 반역을 꾀하게 만든 다음 걱정하니 이 얼마나 사리와 먼 일이 아닌가! 정말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물러나 사양할 줄 모른다.

지금 한의 예법에 따르면 정월에 축하하기 위해 조회를 오는 것은 왕 한 명과 제후 네 명이 전부이고, 10년에 한 번이다. 그런데 양왕은 매년 입조하여 오래 머물렀다. 속담에 ‘교만한 자식은 효도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잘못된 말이 아니다. 그래서 제후왕이라면 좋은 스승을 두고 충언하는 선비를 상으로 두는 것이다. 급암(), 한장유() 등처럼 과감하게 직언하고 극언하면 무슨 걱정과 피해가 있겠는가?

대개 듣자하니 양왕은 서쪽으로 입조해 두 태후를 배알했는데, 한가할 때 만나면 경제와 함께 태후 앞에 앉아서는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두 태후는 경제에게 “내가 듣기에 은나라의 도는 가까이해야 할 것은 가까이 하라는 것이고, 주나라의 도는 받들어야 하는 것은 받들라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다 한 가지일 것이오. 내가 죽으면 양 효왕을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경제는 자리에 무릎을 꿇고 몸을 곧게 피면서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다들 나가자 황제는 원앙과 경전에 밝은 대신들을 불러 “태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무슨 말씀이오?”라고 물었다. 다들 대답하길 “태후께서 양왕을 황제의 태자로 세우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상세한 것을 물으니 원앙 등은 “은나라의 도는 가까이해야 할 것은 가까이 하라는 것이란 말은 동생을 세운다는 것이고, 주나라의 도는 받들어야 하는 것은 받들라는 것이라는 말은 아들을 세운다는 것입니다. 은나라의 도는 질박하고, 질박함은 하늘을 본받는 것이니 가까이해야 할 것은 가까이 하라는 것이고, 그래서 동생을 세웁니다. 주나라의 도는 꾸미는 것이고, 꾸미는 것은 땅을 본받습니다. 받드는 것은 공경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장자를 세웁니다. 주나라의 도에 태자가 죽으면 적손을 세우고, 은나라의 도에 태자가 죽으면 그 동생을 세웁니다.”라고 했다.

황제가 “공들의 생각은 어떻소?”라고 하자 모두들 “지금 우리 한나라는 주나라를 본받고 있습니다. 주나라의 도는 동생을 세울 수 없고 아들을 세웁니다. 그래서 『춘추()』에서 송나라 선공()을 비난한 것입니다. 송 선공이 죽으면서 아들을 세우지 않고 동생에게 주었고, 동생이 나라를 받아서는 죽자 다시 형(선공)의 아들에게 주니 동생의 아들이 내가 당현히 뒤를 이어야 된다며 자리를 다투고는 형의 아들을 죽여 나라가 난리가 나고 화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춘추』에 ‘군자는 정확한 후계자를 중시한다. 송나라의 화는 선공이 그렇게 한 것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신이 태후에게 이를 아뢰기를 청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원앙 등이 들어가 태후를 만나서는 “태후께서 양왕을 세우고싶다고 하셨다는데 양왕이 죽으면 누굴 세우려 하십니까?”라고 했다. 태후가 “내가 다시 황제의 아들을 세우면 되지.”라고 했다. 원앙 등은 송 선공이 후계자를 제대로 세우지 않아 화라 발생하여 환란이 그 뒤로 5세 동안 끊이질 않았다면서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대의를 해친다고 태후에게 아뢰니 이에 태후는 마음을 풀고는 바로 양왕에게 봉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나 양왕은 그 논의가 원앙과 여러 대신들에게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는 원망하여 사람을 시켜 원앙을 죽이려 했다. 원앙이 고개를 돌려 “내가 소위 원장군이다. 그대가 잘못 안 것 아닌가?”라고 했다. 자객은 “아니다.”라며 원앙을 찌르고 검을 그대로 두는 바람에 검이 몸에 박혀 있었다. 그 검을 조사해보니 새로 만든 것이었다. 장안의 검을 만들고 가는 장인을 심문했더니 장인은 “양나라의 모 낭관이 이 검을 주조하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일이 발각되었고, 사람을 풀어 자객을 잡아들였다. 양왕 쪽에서 죽이려던 대신들만 열 명이 넘었다. 관리가 그 주모자를 추궁하자 모반의 단서가 드러났다.

두 태후는 먹지도 않고 낮밤으로 쉬지 않고 울었다. 경제가 몹시 걱정이 되어 공경대신들에게 물었더니 대신들은 경전에 능한 관리들을 보내 처리하게 하면 풀릴 것이라 했다. 이에 전숙(), 여계주()를 보내 처리하게 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경전에 통달하여 큰 국면을 잘 알았다. 돌아오는 길에 패창구()에 이르러 양왕의 모반 관련 문서를 모두 태우고는 빈손으로 경제를 대했다. 경제가 “어찌 되었는가?”라고 물으니 “양왕은 몰랐다고 하더이다. 일을 꾸민 자는 양왕의 총신 양승과 공손궤 무리들이었습니다. 이미 법에 따라 죽임을 당했고 양왕은 아무 일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경제는 기뻐하며 “서둘러 태후를 뵈어야겠다.”라고 했다. 태후가 이를 듣고는 일어나 앉아 식사를 하고 기운을 되찾았다.

그래서 경전에 통달하여 고금의 큰 예를 모르면 삼공이나 좌우의 가까운 신하가 될 수 없고, 식견이 모자란 사람은 대롱을 통해 하늘을 살피려는 것과 같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