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卷第二十七
百濟本紀 第五 威德王·惠王·法王·武王
威德王 ※
諱昌 ※ 聖王之元子也 聖王在位三十二年薨 繼位
元年 冬十月 高句麗大擧兵 來攻熊川城 敗衄 ※而歸
六年 夏五月丙辰朔 日有食之
八年 秋七月 遣兵侵掠新羅邊境 羅兵出擊敗之 死者一千餘人 ※
十四年 秋九月 遣使入陳朝貢
十七年 高齊後主 拜王爲使持節侍中車騎大將軍帶方郡公百濟王
十八年 高齊後主 又以王爲使持節都督東靑州諸軍事東靑州刺史
十九年 遣使入齊朝貢 秋九月庚子朔 日有食之
二十四年 秋七月 遣使入陳朝貢 冬十月 侵新羅西邊州郡 新羅伊湌世宗 帥兵擊破之 十一月 遣使入宇文周朝貢
二十五年 遣使入宇文周朝貢
二十六年 冬十月 長星竟天 二十日而滅 地震
二十八年 王遣使入隋朝貢 隋高祖詔 拜王爲上開府儀同三司帶方郡公 ※
二十九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三十一年 冬十一月 遣使入陳朝貢
三十三年 遣使入陳朝貢
三十六年 隋平陳 有一戰船 漂至耽 ※牟羅國 其船得還 經于國界 王資送之甚厚 幷遣使奉表 賀平陳 高祖善之 下詔曰 『百濟王旣聞平陳 遠 ※令奉表 往復至難 若逢風浪 便致傷損 百濟王心迹淳至 朕已委知 相去雖遠 事同言面 何必數遣使 來相體悉 自今已後 不須年別入貢 朕亦不遣使往 王宜知之』
三十九年 秋七月壬申晦 日有食之
四十一年 冬十一月癸未 星孛于角·亢
四十五年 秋九月 王使長史王辯那 入隋朝獻 王聞隋興遼東之役 遣使奉表 請爲軍 ※
道 ※ 帝下詔曰 『往歲高句麗不供職貢 無人臣禮 故命將討之 高元君臣恐懼 畏服歸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我使者而還之 高句麗頗知其事 以兵侵掠國境 冬十二月 王薨 羣臣議諡曰威德
[교주:27권1] 王
夫餘陵山里出土花岡石製舍利嵌銘文 및 本書 卷27 惠王 卽位年條 「昌王」.
[교주:27권2] 昌
三國遺事 王曆篇 「威德王(名昌 又明)」.
[교주:27권3] 衄
原本 「衂」. 「衄」의 俗字.
[교주:27권4] 人
「死者一餘人」, 本書 卷4 眞興王 23年條 「殺獲一千人」.
[교주:27권5] 公
隋書 卷80 百濟傳 「百濟王」 추가.
[교주:27권6] 耽
原本 「躭」은 「耽」의 俗字. 以下 同.
[교주:27권7] 遠
原本 「達」.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達」.
[교주:27권8] 軍
三國史節要 「鄕」.
[교주:27권9] 道
隋書 卷81 百濟傳 「導」. 「道」와 「導」는 相通.
[역주:27권1] 위덕왕(威德王)
백제 제27대 왕. 이름은 昌. 1994년 부여 陵山里에서 발견된 花崗石製舍利嵌에 새겨진 銘文에는 昌王으로 나온다. 이는 백제의 왕이 생존시에는 이름으로 불리운 것을 보여주는 예가 된다. 재위기간은 554 ~ 598년이다. 성왕의 아들 여창은 신라가 濟羅 동맹을 깨고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자 신라 공격을 주장하였고, 성왕이 신라에 대한 공격군을 일으키자 최일선에 나가 싸웠다. 그러나 554년 管山城전투에서 백제군이 패배하여 성왕은 전사하였고, 餘昌도 겨우 목숨을 扶持하여 돌아왔다. 즉위 후 그는 중국의 남북조에 等距離 외교를 전개하였고, 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자 발빠르게 수에 접근하는 외교적 기민성도 발휘하였다.(위덕왕대의 정치에 대해서는 梁起錫, 〈百濟 威德王代 王權의 存在形態와 性格〉, 《百濟硏究》 21, 1990 참조)
[역주:27권2] 창(昌)
위덕왕의 이름. 위덕왕의 이름에 대해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昌 또는 明으로 나온다. 그러나 ‘明’은 성왕의 이름이므로 이는 착오인 듯 하다. 한편 《周書》 百濟傳과 《隋書》 百濟傳에는 昌으로,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조에는 餘昌으로 나온다.
[역주:27권3] 성왕의 맏아들
위덕왕의 계보에 대해 본 기사와 《三國遺事》 王曆篇 威德王條 및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5년조에는 모두 성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周書》 백제전에는 『隆死子昌立』이라 하여 위덕왕을 隆(武寧王)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隆은 무령왕이므로 창을 융의 아들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
[역주:27권4] 성왕이 재위 32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본 기사와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후 곧바로 여창이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흠명기 18년(557)조에는 『春三月 百濟王子餘昌嗣立 爲威德王』이라 하여 성왕이 전사한 3년 뒤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어 위덕왕의 즉위까지 3년간의 空位시기가 있게 된다. 그러나 〈百濟花崗石製舍利嵌〉에 새겨진 銘文에는 『百濟昌王十三䄵 太歲在丁亥』가 나온다. 이것에 의하면 창왕의 즉위년은 '乙亥年(555)'이 되는데 이는 본서의 연표로는 위덕왕 2년이 된다. 본서의 紀年은 卽位年稱元法을 따르고 있는데 舍利嵌의 명문이 踰年稱元法에 의해 기년을 정한 것이라고 하면 昌王(威德王)이 실제로 즉위한 해는 본서의 554년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일본서기》의 '3년 空位'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성왕이 전사한 후 위덕왕의 즉위과정은 용이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는 관산성 전투가 백제와 신라의 향후 정치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점, 이 전쟁에서 성왕과 고위 귀족들이 전사하고 위덕왕도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점, 성왕의 사후 신라정벌을 반대하였던 耆老들 이 패전의 책임을 신랄하게 추궁하여 위덕왕은 出家修道하려고까지 생각하였다고 하는 점(《日本書紀》 欽明紀 15년조) 등에서 미루어 알 수 있는 바이다.
[역주:27권5] 고구려가 … 패하여 돌아갔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19 고구려본기 陽原王 10년조에 나온다.
[역주:27권6] 군사를 보내 .. 죽은 자가 1천여 명이었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조에 보인다. 진흥왕 23년은 562년이어서 본 기사의 연대와는 1년의 차이가 난다.
[역주:27권7] 진(陳)나라
중국 南北朝시대 南朝 최후의 왕조. 557년 ~ 589년까지 존속하였다. 시조 陳覇先이 梁의 侯景의 난을 평정한 뒤 실권을 잡고 557년에 梁의 景帝로부터 위를 물려받아 陳이라 일컬었다. 573년 宣帝때 北齊·北周와 자주 싸웠으나 武王에게 패하여 淮南땅을 모두 잃었으며, 隋의 文帝에 의해 망하였다. 백제가 진나라에 사신보낸 것은 《陳書》 권4 廢帝紀 光大 元年(567) 9월조에 나온다.
[역주:27권8] 고씨의 제나라[高齊]
중국 南北朝시대의 北朝의 하나인 北齊. 高洋이 東魏의 孝靜帝를 물러나게 하고 스스로 帝位에 올라 鄴(현재의 중국 河北省 邯鄲磁縣)에 도읍을 하고 국호를 齊라 하였다. 남조의 南齊에 대하여 北齊라고도 하고, 高氏가 건국하였기 때문에 高齊라고도 한다. 6대 27년만에 北周의 武帝에게 멸망하였다.
[역주:27권9] 후주(後主)
북제의 제5대 왕으로 溫公 緯를 말한다. 재위기간은 565~576년이다.
[역주:27권10] 시중(侍中)
北齊의 관직. 관품은 正三品이었다(《十通分類總纂》 9 職官類 下 北齊職品 참조).
[역주:27권11]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북제의 장군호의 하나. 본 기사의 車騎大將軍은 《北齊書》 卷8 後主紀 武平 원년 2월 癸亥條에는 驃騎大將軍으로 나온다. 官品은 從一品었다.
[역주:27권12] 대방군공(帶方郡公)
다음 帶方郡公의 郡公은 北齊(高齊)의 爵制의 하나이다. 北齊의 爵制는 王公侯伯子男의 6等爵制였는데, 郡公의 관품은 開國郡公일 경우는 從一品이고, 散郡公일 경우는 正二品이었다(《十通分類總纂》 9 職官類 下 北齊職品 참조).
[역주:27권13] 고씨의 제나라[高齊] 후주(後主)가 … 백제왕으로 삼았다.
백제가 北齊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한 것은 이보다 3년전인 위덕왕 14년으로서(《北齊書》 卷8 後主紀 3년 天統 3년 10월조) 남조 陳에 사신을 보낸 해와 동일하다. 위덕왕이 같은 시기에 남조의 陳뿐만 아니라 북조의 北齊에도 사신을 보낸 것은 종래 南朝중심의 외교에서 南北朝에 대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한 것으로 생각된다. 後主가 위덕왕을 책봉한 기사는 《北齊書》 권8 後主紀 武平 元年(570) 2월조에 나온다.
[역주:27권14] 도독동청주제군사(都督東靑州諸軍事)
북제가 백제 위덕왕에게 내린 爵號. 중국에서 軍事를 독찰하는 데는 都督諸軍事 監諸軍事督諸軍事의 세 종류가 있는 데 이것은 지위의 고하를 나타내는 것이다. 譚其驤 主編, 《中國歷史地圖集》 제4책, 1991, 65~66쪽의 齊의 地圖에는 山東지역에 靑州와 南靑州가 나오나 東靑州는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東靑州의 정확한 위치비정은 어렵다. 여기서는 현재의 중국 山東省지역으로만 추정해 둔다. 都督東靑州諸軍事는 東靑州의 軍事관계를 총괄하는 職을 말한다.
[역주:27권15]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
東靑州刺史는 동청주를 지배하는 民政官이다. 자사는 본래 管內의 郡縣을 독찰하고 一州의 행정의 大綱을 장악하며, 지방의 最高司法官廳의 기능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나 後漢末 曹操집권 시대부터 三國西晉시대로 되면 刺史로서 將軍職을 띠고 병마권을 겸하는 자가 나오게 되었다. 그 결과 東晉南朝시대로 되면 자사로서 장군직을 띠고 병마를 擁하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으며, 때로는 二州 이상의 諸軍事를 겸하는 자도 있었다. 刺史가 兵民兩方의 大權을 장악한 것은 권력의 지방분산의 의미를 가진다. 자사가 병마를 옹하고 장군직을 띠면 부여된 將軍號에 따라 某將軍府를 열고 府에 관리를 두었다. 결국 將軍府는 자사의 幕府였다(和田淸, 《支那官制發達史》, 1942, 98~100쪽 및 金翰奎, 〈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界秩序와 古代韓國의 幕府制〉,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일조각, 1985 참조). 北齊에서 刺史의 官品은 三等上州刺史는 正三品, 三等中州자사는 從三品, 三等下州자사는 正四品이었다(《十通分流總纂》 9 職官類 下 북제직품 참조). 그러나 東靑州자사가 어느 관품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중국 왕조가 백제왕에게 將軍號외에 刺史職을 除授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이 기사를 토대로 하여 백제가 위덕왕대까지 北中國지역을 지배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方善柱, 〈百濟軍의 華北進出과 그 背景〉, 《白山學報》 11집, 1971 참조). 都督과 刺史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南齊書》 권16 백관지에 『魏晉世州牧隆重 刺史任重者爲使持節都督 輕者爲持節督 起漢從帝時 御史中丞馮赦討九江賊 督揚徐二州軍事…晉太康中 都督知軍事 刺史治民 各用人 惠帝密 乃幷任 非要州則單爲刺史 州朝置別駕 治中 議曹 文學祭酒 諸曹部從事』라 한 기사 참조.
[역주:27권16] 북제(北齊)
중국 남북조시대의 北朝의 하나. 高齊라고도 한다. 앞의 주석 8 참조. 백제가 이때 北齊에 사신을 보낸 것은 《北齊書》 권8 後主紀 武平 3년(572) 是歲條에 나온다.
[역주:27권17] 진(陳)나라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의 하나. 陳覇先이 梁의 景帝로부터 禪讓을 받아 세웠다. 앞의 주석 7 참조. 백제가 이때 陳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陳書》 권5 宣帝紀 太建 9년(577) 추7월조에 나온다.
[역주:27권18] 세종(世宗)
신라 眞智王·眞平王代의 장군. 진평왕 원년(579)에 상대등이 된 弩里夫와 동일인으로 보인다. 본서 권4 주석 165 참조.
[역주:27권19] 이찬(伊湌) 세종(世宗)이 … 이를 쳐서 깨뜨렸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眞智王 2년조에 보이는데, 『命伊湌世宗出師 擊破之於一善北 斬獲三千七百級』이라 하여 백제군을 격파한 곳과 斬獲한 인원수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주:27권20] 우문씨(宇文氏)
北周의 시조 宇文覺의 姓을 칭한 것이다.
[역주:27권21] 주(周)나라
중국 남북조시대의 北朝의 하나. 宇文覺이 西魏恭帝로부터 禪位를 받아 세웠으며 長安에 도읍하였다. 존속기간은 577 ~ 581년 이다. 北齊를 쳐서 북조를 통일하였으며, 남조의 陳나라도 정벌하려 하였으나 황제가 죽어, 實權은 새 황제의 황후의 아버지인 楊堅(隋文帝)에게 돌아가 결국 망하였다. 宇文氏가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宇文周라고도 하고, 또 北周 혹은 後周라고도 한다.
[역주:27권22] 우문씨(宇文氏)의 주(周)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周書》 권49 열전 百濟傳에 『建德六年 齊滅 昌始遣使獻方物』로 나온다. 建德은 북주 武帝의 연호로 572~577년까지 사용되었다. 건덕 6년은 577년으로 백제 위덕왕 24년이다.
[역주:27권23] 우문씨(字文氏)의 주(周)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周書》 권49 열전 百濟傳에 『宣政元年 又遣使來獻』로 나온다. 宣政은 북주 宣帝의 연호로 1년만 사용되었다. 선정 원년은 578년으로 백제 위덕왕 25년이다.
[역주:27권24] 수(隋)나라
중국 南北朝 시대의 북조의 하나. 北周의 외척 楊堅(隋文帝)이 靜帝의 禪位를 받아 세운 나라. 수도는 大興(현재의 중국 陝西省 西安市)이었다. 존속기간은 581~618년이다. 589년에 남조의 陳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여 集權的 大帝國이 되었다. 3대 恭帝에 이르러 唐의 高祖인 李淵에게 망하였다.
[역주:27권25] 수(隋)나라 고조(高祖)
隋文帝를 말한다. 재위기간은 581 ~ 605년이다. 이름은 楊堅이며 그의 딸은 北周 宣帝의 황후요 靜帝의 어머니였다. 581년에 靜帝로부터 讓位를 받아 隋를 세웠다. 후에 아들 煬帝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역주:27권26]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
중국 隋나라의 문산계. 隋나라 開皇 年間(589~600)의 上開府儀同三司는 從三品官이었다.
[역주:27권27] 대방군공(帶方郡公)
郡公은 隋의 爵制의 하나이다. 隋나라 開皇 年間의 爵制는 國王·郡王·國公·郡公·縣公·侯·伯·子·男의 9等制였다(《十通分類總纂》 8 권50 職官類 歷代王侯封爵 및 권 64 職官類 隋官品令 참조). 따라서 위덕왕에게 주어진 帶方郡公은 4等爵이라고 할 수 있다.
[역주:27권28] 『백제왕이 이미 진나라를 … 왕은 마땅히 알지어다』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실려 있다.
[역주:27권29] 각(角)
28宿의 하나. 동방에 위치하였으며, 兵을 주관하였다. 《晉書》 권11 지1 천문 상에 『東方 角二星爲天關 其間天門也 其內天庭也…左角爲天田 爲理 主刑…右角爲將 主兵』이라 한 기사 참조.
[역주:27권30] 항(亢)
28宿의 하나. 동방에 위치하였으며 奏事와 獄訟을 맡았다. 지금의 乙女座의 일부이다. 《晉書》 권11 지1 천문 상에 『亢四星 天子之內朝也 總攝天下奏事 聽訟理獄錄功者也』라 한 기사 참조.
[역주:27권31] 45년
위덕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甲戌立 理四十四年』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있다.
[역주:27권32] 장사(長史)
중국에서의 長史는 秦代에 邊戍를 맡은 郡의 경우 장관인 郡丞을 長史로 삼아 병마를 관장하게 한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長史는 軍府官이 되었으나 隋代에 와서 郡官이 되었다. 王府에도 長史가 있어 府事를 처리하였는데, 당의 경우 王府에 속한 장사의 관품은 從4品下이었다. 백제의 경우 長史의 존재는 《魏書》 권100 열전 백제전 및 《南齊書》 권58 열전 백제전에도 보인다. 이때의 장사는 王府의 官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金翰奎, 〈南北朝時代의 中國的 世界秩序와 古代韓國의 幕府制〉, 《韓國古代의 國家와 社會》, 일조각, 1985 참조). 이들은 주로 중국과의 외교업무에 종사하였다. 고구려의 경우 《梁書》 고구려전에 『安(광개토왕: 역주자)始置長史司馬參軍官)』이 보이고, 신라의 경우 주의 장관인 都督의 屬官으로 나온다(본서 권40 잡지 職官 下 外官條).
[역주:27권33] 왕변나(王辯那)
위덕왕대의 인물. 왕씨라는 성씨에서 미루어 볼 때 중국계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長史의 직에 있었다. 王辯那가 수나라에 사신으로 간 시기에 대해 《隋書》에는 月이 없다. 본 기사의 '九月'은 《資治通鑑》 권178 隋紀 文帝 開皇 18년 '秋九月'조에 의거한 것이다.
[역주:27권34] 요동(遼東)에서 전쟁 [遼東之役]
隋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일차적인 관문이 遼東이기 때문에 이를 '遼東之役'이라 표현한 것이다.
[역주:27권35] 왕년에 고구려가 … 쳐들어와 약탈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과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영양왕 9년조에 실려 있다. 본 기사와 수서의 기사 사이에는 약간의 出入이 있는데 《隋書》를 기준하여 異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안은 위덕왕 45년조 기사에 나오는 것이다. 往歲爲高麗(往歲高句麗), 厚其使而遣之(厚我使者而還之), 高麗(高句麗), 侵掠其境(侵掠國境).
惠王 ※ 諱季 明 ※
王第二子 昌王薨 卽位
二年 王薨 諡曰惠
王第二子 昌王薨 卽位
二年 王薨 諡曰惠
[교주:27권10] 王
三國遺事 王曆篇 「一云獻王」.
[교주:27권11] 明
三國史節要 「威德」.
[역주:27권36] 혜왕(惠王)
백제 제28대 왕. 성왕의 아들. 본 기사에는 이름은 季로 나오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季' 또는 '獻王'으로 나온다. 《일본서기》 권19 흠명기 16년조에는 '惠'로 나온다. 재위기간은 568~569년이다. 그런데 《隋書》 권81 열전 百濟傳과 《翰苑》 百濟條에는 惠王의 존재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위덕왕 다음에 法王(宣)이 왕위를 이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혜왕이 단명으로 죽게 되어 그의 在位 사실이 중국에 곧 바로 전해지지 않아 누락된 것이 아닐까 한다.
[역주:27권37] 명왕(明王)
성왕을 말한다.
[역주:27권38] 명왕(明王)의 둘째 아들이다.
혜왕이 明王(聖王)의 둘째 아들이고 위덕왕의 동생이라는 것은 《日本書紀》 欽明紀 16년조에는 『百濟王子餘昌遺王子惠(王子惠者威德王之弟也)』라 한 기사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혜왕이 위덕왕의 아들로 나오는데 이는 착오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역주:27권39] 창왕(昌王)
威德王을 말한다. 위덕왕이 생시에 창왕으로 불렸다는 것은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花崗石製舍利嵌에 위덕왕이 昌王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에 확인된다.
[역주:27권40] 창왕(昌王)이 죽자 왕위에 올랐다
《日本書紀》 권22 推古紀 5년조(위덕왕 44년)에는 『百濟王遣王子阿佐朝貢』이라 하여 위덕왕이 왕자 아좌를 일본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듬해 위덕왕이 죽자 왕의 동생인 혜왕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70세에 가까운 노령이었다(李道學, 〈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 《韓國史硏究》 45, 1984, 19쪽의 주67 참조). 이처럼 왕자 아좌가 일본으로 파견된 직후에 위덕왕이 사망하고, 노령의 혜왕이 즉위하였다고 하는 것은 관산성 패전 이후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實權귀족들의 政略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역주:27권41] 시호를 혜(惠)
《日本書紀》 권19 欽明紀 16년조에는 『百濟王子惠』라 하여 惠를 생존시의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惠를 諡號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검토를 요한다.
法王 諱宣 或云孝順 惠王之長子 惠王薨 子宣繼位 隋書以宣爲昌王之子 冬十二月 下令禁殺生 收民家所養鷹鷂放之 漁獵之具焚之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大旱 王幸漆岳寺祈雨 夏五月 薨 上諡曰法
二年 春正月 創王興寺 度僧三十人 大旱 王幸漆岳寺祈雨 夏五月 薨 上諡曰法
[역주:27권42] 법왕(法王)
백제 제29대 왕. 이름은 宣이다. 재위기간은 599~ 600년.
[역주:27권43] 선(宣)
법왕의 이름. 孝順이라고도 하였다.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名孝順 又宣』으로,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는 餘宣으로 나온다.
[역주:27권44] 수서(隋書)에는 선을 창왕(昌王)의 아들
동일한 내용이 《翰苑》 百濟條에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법왕이 혜왕의 아들이라는 것은 본 기사 외에 《三國遺事》 왕력편에도 나온다. 따라서 법왕을 창왕(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한 중국측 기록은 잘못이라 할 것이다.
[역주:27권45] 왕흥사(王興寺)
법왕이 창건한 절. 현재의 충남 夫餘郡 窺岩面 新九里 王興寺址에서 ‘王興’ 2字가 陽刻된 기와가 발견되어 절터의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다. 《三國遺事》권3 興法篇 法王禁殺條에는 『百濟第二十九主法王 諱宣…明年 庚申 度僧三十人 創王興寺於時都酒批城(今夫餘) 始立裁而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曆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라 하여 始工은 법왕이 했지만 완성은 무왕대에 이루어졌다는 것과 왕흥사의 다른 이름이 미륵사라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왕이 완성한 彌勒寺는 益山의 미륵사이기 때문에 본 왕흥사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법왕이 왕흥사를 창건하게 된 것은 '王興'이란 명칭에서 보듯이 왕권의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武王 ※
諱璋 法王之子 風儀英偉 志氣豪傑 法王卽位翌年薨 子嗣位
三年 秋八月 王出兵 圍新羅阿莫山城 ※
一名母山城 ※
羅王眞平遣精騎數千拒戰之 我兵失利而還 新羅築小陁·畏石·泉山·甕岑四城 侵逼我疆境 王怒 令佐平解讎帥步騎四萬 進攻其四城 新羅將軍乾品·武殷帥衆拒戰 解讎不利 引軍退於泉山西大澤中 伏兵以待之 武殷乘勝 領甲卒一千 追至大澤 伏兵發急擊之 武殷墜馬 士卒驚駭 不知所爲 武殷子貴山大言曰 “吾嘗受敎於師 曰 ‘士當軍無退’ 豈敢奔退 以墜師敎乎” 以馬授父 卽與小將箒項 揮戈力鬪以死 餘兵見此益奮 我軍敗績 解讎僅免 單馬以歸
六年 春二月 築角山城 秋八月 新羅侵東鄙
七年 春三月 王都雨土 晝暗 夏四月 大旱 年饑
八年 春三月 遣扞 ※率燕文進 入隋朝貢 又遣佐平王孝隣入貢 兼請討高句麗 煬帝許之 令覘高句麗動靜 夏五月 高句麗來攻松山城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歸
九年 春三月 遣使入隋朝貢 隋文林郞裴淸 ※奉使倭國 經我國南路
十二年 春二月 遣使入隋朝貢 隋煬帝將征高句麗 王使國智牟入請軍期 帝悅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郞席律 來與王相謀 秋八月 築赤喦城 冬十月 圍新羅椵岑城 殺城主讚德 滅其城
十三年 隋六軍度遼 王嚴兵於境 聲言助隋 實持兩端 夏四月 震宮南門 五月 大水 漂沒人家
十七年 冬十月 命達率苩 ※奇領兵八千 攻新羅母山城 十一月 王都地震
十九年 新羅將軍邊品等 來攻椵岑城復之 奚論戰死
二十二年 冬十月 遣使入唐 獻果下馬
二十四年 秋 遣兵侵新羅勒弩縣
二十五年 春正月 遣大臣入唐朝貢 高祖嘉其誠款 遣使就冊爲帶方郡王 ※百濟王 秋七月 遣使入唐朝貢 冬十月 攻新羅速含·櫻岑·歧岑·烽岑·旗懸·冗 ※柵等六城取之
二十六年 冬十一月 遣使入唐朝貢
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 來詔諭我及高句麗平其怨 秋八月 遣兵攻新羅王 ※在城 執城主東所殺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二十八年 秋七月 王命將軍沙乞 拔新羅西鄙二城 虜男女三百餘口 王欲復新羅侵奪地分 大擧兵 出屯於熊津 羅王眞平聞之 遣使告急於唐 王聞之乃止 秋八月 遣王姪福信 入唐朝貢 太宗謂與新羅世讎 數相侵伐 賜王璽書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 朕祗承寵命 君臨區宇 思弘正道 愛育黎元 舟車所通 風雨所及 期之遂性 咸使乂安 新羅王金眞平 朕之蕃臣 王之鄰國 每聞遣師征討不息 阻兵安忍 殊乖所望 朕已對王姪福信及高句麗新羅使人 具勑通和 咸許輯睦 王必須忘彼前怨 識朕本懷 共篤鄰情 卽停兵革” 王因遣使奉表陳謝 雖外稱順命 內實相仇 ※如故
二十九年 春二月 遣兵攻新羅椵峯 ※城 不克而還
三十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三十一年 春二月 重修泗沘之宮 王幸熊津城 夏旱 停泗沘之役 秋七月 王至自熊津
三十二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三十三年 春正月 封元子義慈爲太子 二月 改築馬川城 秋七月 發兵伐新羅 不利 王田于生草之原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三十四年 秋八月 遣將攻新羅西谷城 十三日拔之
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 三月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 ※嶼 擬方丈仙山
三十七年 春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王率左右臣寮 遊燕於泗沘河北浦 兩岸奇巖怪石錯立 間以奇花異草如畫圖 王飮酒極歡 鼓琴自歌 從者屢舞 時人謂其地爲大王浦 夏五月 王命將軍于召 帥甲士五百 往襲新羅獨山城 于召至玉門谷 日暮解鞍休士 新羅將軍閼川將兵 掩至鏖擊之 于召登大石上 彎弓拒戰 矢盡爲所擒 六月 旱 秋八月 燕羣臣於望海樓
三十八年 春二月 王都地震 三月 又震 冬十二月 遣使入唐 獻鐵甲雕斧 太宗優勞之 賜錦袍幷彩帛三千段 ※
三十九年 春三月 王與嬪御泛舟大池
四十年 冬十月 又遣使於唐 獻金甲雕斧
四十一年 春正月 星孛于西北 二月 遣子弟於唐 請入國學
四十二年 春三月 王薨 諡曰武 使者入唐 素服奉表曰 『君外臣扶餘璋卒』 帝擧哀玄武門 詔曰 『懷遠之道 莫先於寵命 飾終之義 無隔於遐方 故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 棧山航 ※海 遠稟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慜悼 宜加常數 式表哀榮』 贈光祿大夫 賻賜甚厚
諱璋 法王之子 風儀英偉 志氣豪傑 法王卽位翌年薨 子嗣位
三年 秋八月 王出兵 圍新羅阿莫山城 ※
一名母山城 ※
羅王眞平遣精騎數千拒戰之 我兵失利而還 新羅築小陁·畏石·泉山·甕岑四城 侵逼我疆境 王怒 令佐平解讎帥步騎四萬 進攻其四城 新羅將軍乾品·武殷帥衆拒戰 解讎不利 引軍退於泉山西大澤中 伏兵以待之 武殷乘勝 領甲卒一千 追至大澤 伏兵發急擊之 武殷墜馬 士卒驚駭 不知所爲 武殷子貴山大言曰 “吾嘗受敎於師 曰 ‘士當軍無退’ 豈敢奔退 以墜師敎乎” 以馬授父 卽與小將箒項 揮戈力鬪以死 餘兵見此益奮 我軍敗績 解讎僅免 單馬以歸
六年 春二月 築角山城 秋八月 新羅侵東鄙
七年 春三月 王都雨土 晝暗 夏四月 大旱 年饑
八年 春三月 遣扞 ※率燕文進 入隋朝貢 又遣佐平王孝隣入貢 兼請討高句麗 煬帝許之 令覘高句麗動靜 夏五月 高句麗來攻松山城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歸
九年 春三月 遣使入隋朝貢 隋文林郞裴淸 ※奉使倭國 經我國南路
十二年 春二月 遣使入隋朝貢 隋煬帝將征高句麗 王使國智牟入請軍期 帝悅厚加賞錫 遣尙書起部郞席律 來與王相謀 秋八月 築赤喦城 冬十月 圍新羅椵岑城 殺城主讚德 滅其城
十三年 隋六軍度遼 王嚴兵於境 聲言助隋 實持兩端 夏四月 震宮南門 五月 大水 漂沒人家
十七年 冬十月 命達率苩 ※奇領兵八千 攻新羅母山城 十一月 王都地震
十九年 新羅將軍邊品等 來攻椵岑城復之 奚論戰死
二十二年 冬十月 遣使入唐 獻果下馬
二十四年 秋 遣兵侵新羅勒弩縣
二十五年 春正月 遣大臣入唐朝貢 高祖嘉其誠款 遣使就冊爲帶方郡王 ※百濟王 秋七月 遣使入唐朝貢 冬十月 攻新羅速含·櫻岑·歧岑·烽岑·旗懸·冗 ※柵等六城取之
二十六年 冬十一月 遣使入唐朝貢
二十七年 遣使入唐 獻明光鎧 因訟高句麗梗道路 不許來朝上國 高祖遣散騎常侍朱子奢 來詔諭我及高句麗平其怨 秋八月 遣兵攻新羅王 ※在城 執城主東所殺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二十八年 秋七月 王命將軍沙乞 拔新羅西鄙二城 虜男女三百餘口 王欲復新羅侵奪地分 大擧兵 出屯於熊津 羅王眞平聞之 遣使告急於唐 王聞之乃止 秋八月 遣王姪福信 入唐朝貢 太宗謂與新羅世讎 數相侵伐 賜王璽書曰 『王世爲君長 撫有東蕃 海隅遐曠 風濤艱阻 忠款之至 職貢相尋 尙想嘉猷 甚以欣慰 朕祗承寵命 君臨區宇 思弘正道 愛育黎元 舟車所通 風雨所及 期之遂性 咸使乂安 新羅王金眞平 朕之蕃臣 王之鄰國 每聞遣師征討不息 阻兵安忍 殊乖所望 朕已對王姪福信及高句麗新羅使人 具勑通和 咸許輯睦 王必須忘彼前怨 識朕本懷 共篤鄰情 卽停兵革” 王因遣使奉表陳謝 雖外稱順命 內實相仇 ※如故
二十九年 春二月 遣兵攻新羅椵峯 ※城 不克而還
三十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三十一年 春二月 重修泗沘之宮 王幸熊津城 夏旱 停泗沘之役 秋七月 王至自熊津
三十二年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三十三年 春正月 封元子義慈爲太子 二月 改築馬川城 秋七月 發兵伐新羅 不利 王田于生草之原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三十四年 秋八月 遣將攻新羅西谷城 十三日拔之
三十五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 三月 穿池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 ※嶼 擬方丈仙山
三十七年 春二月 遣使入唐朝貢 三月 王率左右臣寮 遊燕於泗沘河北浦 兩岸奇巖怪石錯立 間以奇花異草如畫圖 王飮酒極歡 鼓琴自歌 從者屢舞 時人謂其地爲大王浦 夏五月 王命將軍于召 帥甲士五百 往襲新羅獨山城 于召至玉門谷 日暮解鞍休士 新羅將軍閼川將兵 掩至鏖擊之 于召登大石上 彎弓拒戰 矢盡爲所擒 六月 旱 秋八月 燕羣臣於望海樓
三十八年 春二月 王都地震 三月 又震 冬十二月 遣使入唐 獻鐵甲雕斧 太宗優勞之 賜錦袍幷彩帛三千段 ※
三十九年 春三月 王與嬪御泛舟大池
四十年 冬十月 又遣使於唐 獻金甲雕斧
四十一年 春正月 星孛于西北 二月 遣子弟於唐 請入國學
四十二年 春三月 王薨 諡曰武 使者入唐 素服奉表曰 『君外臣扶餘璋卒』 帝擧哀玄武門 詔曰 『懷遠之道 莫先於寵命 飾終之義 無隔於遐方 故柱國帶方郡王百濟王扶餘璋 棧山航 ※海 遠稟正朔 獻琛奉牘 克固始終 奄致薨殞 追深慜悼 宜加常數 式表哀榮』 贈光祿大夫 賻賜甚厚
[교주:27권12] 王
三國遺事 卷2 武王條 「武王(古本作武康非也 百濟無武康)」.
[교주:27권13] 城
「阿莫山城」, 本書 卷4 眞平王 24年條 및 本書 卷45 貴山傳 「阿莫城」.
[교주:27권14] 城
本書 卷34 康州 天嶺郡條 「雲峯縣 本母山縣(或云阿英城 或云阿莫城)」.
[교주:27권15] 扞
原本 「杵」. 本書 卷40 職官 下에 의거 수정.
[교주:27권16] 淸
「裵淸」, 日本書紀 卷22 推古 22年條 「裵世淸」. 唐 太宗의 이름 「世民」의 缺刻避諱.
[교주:27권17] 苩
三國史節要·東國通鑑 「芍」. 以下 同.
[교주:27권18] 王
三國史節要 「公」. 浩 「公」.
[교주:27권19] 冗
本書 卷4 眞平王 46年條 「穴」.
[교주:27권20] 王
本書 卷4 眞平王 48年條 「主」.
[교주:27권21] 仇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27권22] 峯
本書 卷4 眞平王 50年條 및 三國史節要 「岑」.
[교주:27권23] 島
原本 「㠀」은 「島」의 本字.
[교주:27권24] 段
「賜錦袍…三千段」, 舊唐書 卷199 上 百濟傳 「賜彩帛三千段幷錦袍等」.
[교주:27권25] 航
原本 誤刻.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27권46] 무왕(武王)
백제 제30대 왕. 이름은 璋이다. 재위기간은 600 ~ 640년. 그런데 《三國遺事》 권2 紀異篇 武王條에는 『武王(古本作武康非也 百濟無武康)』이라 하여 무왕이 武康王으로도 기록된 것을 전하면서 찬자인 一然은 무강왕으로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三國遺事》 王曆篇 무왕조에는 무왕의 이름이 '武康'으로 나오고 있다. 또 《六朝古逸觀世音應驗記》에는 『百濟武廣王遷都…以貞觀 十三年(639)…』이라 하여 무광왕이 보인다. 정관 13년은 백제 무왕 40년에 해당되므로 무왕은 무광왕으로도 표기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武康王의 '康'은 武廣王의 '廣'과 字形이나 音韻上에서 통하므로 무강왕=무광왕=무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무강왕은 생시의 이름으로 왕을 칭한 것이라 할 것이며, 《삼국유사》의 撰者가 무강왕의 존재를 부인한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역주:27권47] 장(璋)
무왕의 이름. 《三國遺事》 王曆篇에는 『或云武康 獻丙或小名一耆篩德』으로, 같은 책 권2 紀異篇 武王條에서는 『武王名璋』이라 하면서 어릴 때 마를 캐어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薯童이라 한 것도 전하고 있다. 한편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120 열전 백제전에는 『夫餘璋』으로 나온다.
[역주:27권48] 법왕(法王)의 아들
무왕의 계보에 대해 본 기사와 《三國遺事》 권2 紀異篇 法王禁殺條,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 《翰苑》 백제조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온다.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에는 『昌死子璋立』이라 하여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착오라고 할 것이다. 한편 《三國遺事》 권2 紀異篇 法王禁殺條의 細注와 武王條에는 池龍과 貧母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무왕의 출자에 대해 이렇게 이설이 많은 것은 무왕의 출생과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이 순탄하지 못한 것을 반영한다. 그리고 《三國遺事》 무왕 조에서 무왕의 아버지가 '池龍'으로 나오는 것은 그가 왕족출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익산에서 薯童으로 생활하였다는 것은 그가 몰락한 왕족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 1988, 192~194쪽 참조).
[역주:27권49] 법왕이 즉위한 이듬해에 죽자 아들이 왕위를 이었다.
법왕이 재위 2년만에 죽은 것과 또 池龍으로 표현되는 몰락 왕족의 아들인 서동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은 당시 실권귀족들 중심의 정치운영과 일정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왕권강화를 도모하던 법왕을 제거한 실권귀족들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익산에서 마를 캐며 생활하여 정치적 기반이 없던 서동을 옹립한 것으로 보인다(노중국, 앞의 책, 192~194쪽 참조).
[역주:27권50] 아막성(阿莫城)
오늘날의 전북 남원시 雲峰面이다. 본서 권34 잡지 地理1 康州 天嶺郡條에는 『雲峰縣 本母山縣(或云阿英城 或云阿莫城) 景德王改名 今因之』라 하여 母山城으로도 나온다.
[역주:27권51] 우리 군사가 이득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4년조에 나오는데, 이 싸움에서 貴山과 箒項이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주:27권52] 건품(乾品)
신라 진평왕대의 장군. 본서 권45 열전 貴山傳에는 '波珍湌 乾品'으로 나온다. 泉山 싸움에서 백제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역주:27권53] 무은(武殷)
신라 진평왕대의 장군. 화랑인 貴山의 아버지. 아막성 전투에 참여할 당시의 관등은 급간이었으나 뒤에 아간까지 승진하였다(본서 권45 열전 貴山傳 참조).
[역주:27권54] 귀산(貴山)
신라 진평왕대의 阿湌 武殷의 아들. 沙梁部人이다. 신라의 화랑으로서 친구 箒項과 함께 圓光法師로부터 世俗五戒를 받았다. 후일 백제와의 모산성 전투 때에는 少監으로 출전하였는 데 臨戰無退의 정신을 발휘하여 전사하였다. 전사 후 그는 奈麻의 관등을 추증받았다. 상세한 것은 본서 권45 열전 貴山傳 참조.
[역주:27권55] 스승
귀산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쳐 준 圓光법사를 말한다.
[역주:27권56] 군사는 … 물러남이 없어야 한다.
원광법사가 화랑인 귀산에게 준 世俗五戒의 하나인 '臨戰無退'를 말한다.
[역주:27권57] 추항(箒項)
신라 沙梁部人. 花郞인 귀산의 친구. 귀산과 친우가 되어 圓光法師로부터 世俗五戒를 받았으며, 백제와의 母山城 전투 때에는 少監으로 출전하였다가 귀산과 더불어 전사하였다. 전사 후 그는 大舍의 관등을 추증받았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4년조 및 권45 주석 91 참조.
[역주:27권58] 해수는 … 말을 타고 혼자 돌아왔다.
백제 장군 解讎가 泉山 전투에서 신라군에게 크게 패배한 것을 말한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4년조에는 동일한 내용이 간략하게 나오고, 권45 열전 귀산 전에는 상세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27권59] 각산성(角山城)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본서 권45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의 전북 井邑郡 內藏面 葛峴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1983, 382쪽).
[역주:27권60] 신라가 동쪽 변경을 쳤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27년조에 나온다.
[역주:27권61] 흙이 비처럼 내려[雨土]
보드라운 모래흙이 바람에 날리었다가 비처럼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역주:27권62] 왕효린(王孝隣)
백제 무왕대의 귀족. 좌평의 직에 있었다. 수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고구려를 칠 것을 요청하였다. 王氏는 王孝隣이 佐平의 관등에 오르고 있고, 長史 王辯那가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고 있는 사실(위덕왕 45년: 598)에서 미루어 볼 때 제1급의 귀족 가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왕씨는 《隋書》 권81 백제전에 나오는 '大姓八族'에는 들지 못하였다.
[역주:27권63] 양제(煬帝)
중국 隋나라의 제2대 황제. 이름은 廣 또는 英. 재위기간은 604~618년이다. 아버지 文帝를 죽이고 604년에 즉위하였다고 한다. 즉위 후 大運河를 비롯한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켰고, 세번이나 대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침입하였다가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618년 국내의 반란으로 楊州 別宮에서 살해되었다.
[역주:27권64] 양제(煬帝)가 … 고구려의 움직임을 엿보도록 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보이는데 이 기사에 이어 『然璋內與高麗通和 挾詐以窺中國』이 첨가되어 있다. 《수서》의 이 귀절은 무왕의 二重外交를 보여주는 것이다.
[역주:27권65] 송산성(宋山城)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역주:27권66] 석두성(石頭城)
본서 권37 잡지 地理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이 석두성은 본서 권23 백제본기 온조왕 22년조에도 보이는데 漢城 시기의 석두성은 현재의 경기도 漣川郡 朔寧面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본서 권23 주석 71 참조). 그러나 백제가 남천한 이후의 석두성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역주:27권67] 고구려가 … 남녀 3천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본서 권20 신라본기 嬰陽王 18년조에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역주:27권68] 문림랑(文林郞)
隋나라의 文散階의 하나. 隋代에는 그 品을 알 수 없으나 唐나라의 경우는 從9品上이다. 《通典》 職官에는 『文林郞 隋置散官 蓋取北齊文林官 徵文學之士以充之義 大唐因之』라 되어 있다.
[역주:27권69] 배청(裵淸)
중국의 隋나라 煬帝代의 인물. 왜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隋書》 권81 倭國傳에는 『文林郞 裵淸』으로, 《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6년조에는 裵世淸으로 나온다. 裵淸의 원래의 이름은 裵世淸이었으나 '世'가 당나라 太宗의 이름이기 때문에 후일 避諱하여 裵淸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직함에 대해 본 기사와 《隋書》에는 文林郞으로, 《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6년 추8월조에는 鴻臚寺掌客으로 나온다.
[역주:27권70] 배청(裵淸)이 … 우리 나라 남쪽 길을 지나갔다
《隋書》 권81 倭國傳에는 『明年(大業4년: 譯註者) 上(煬帝: 譯註者)遣文林郞裵淸使於倭國』으로 나온다. 그런데 《日本書紀》 권22 推古紀 16년조에는 『大唐使人裵世淸下客十二人從妹子至於筑紫…妹子臣奏之曰臣參還之時唐帝以書授臣然經過百濟國之日百濟人探以掠取…』라 하여 백제가 裵淸을 수행한 왜국 사신 妹子臣을 수색하여 隋나라가 倭國에 보내는 國書를 掠取한 것으로 나온다.
[역주:27권71]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상서성에 두어진 관직의 하나. 품계는 분명하지 않다.
[역주:27권72] 석률(席律)
중국 수나라 양제 때의 사람. 구체적인 활동은 알 수 없다.
[역주:27권73] 석률(席律)을 보내 … 서로 모의하게 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과 같은 책 권3 煬帝紀 上 大業 7년(611) 2월조에도 나온다.
[역주:27권74] 가잠성(椵岑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나온다. 위치는 신라 한주 介山郡의 옛 지명인 皆次山郡과 같은 곳으로 보이는데 현재의 경기도 安城郡 竹山面에 비정할 수 있다(金泰植,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 交涉과 征服〉, 《百濟의 中央과 地方》(百濟硏究論叢 5집),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1977, 77쪽). 이를 현재의 충북 괴산 지방으로 보는 견해(井上秀雄, 《삼국사기》, 118쪽)도 있다.
[역주:27권75] 찬덕(讚德)
신라 진평왕대의 사람. 王都 牟梁部 출신이다. 진평왕 33년(611)에 가잠성 현령이 되었으나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상세한 내용은 본서 권47 열전 奚論傳 참조.
[역주:27권76] 가잠성(椵岑城)을 포위하여 … 그 성을 함락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33년조와 본서 권47 열전 奚論傳에 나온다.
[역주:27권77] 6군(六軍)
隋나라가 612년에 고구려를 공격할 때의 軍의 편제. 6軍은 본래 周대의 군대 편제인데 여기서는 수나라 천자의 군대라는 의미이다.
[역주:27권78] 요하(遼河)
중국 東北區 大興安嶺에서 시작하여 남동으로 흘러 요동만으로 들어가는 강. 遼水·大遼水라고도 하였다. 길이는 1,310km이다.
[역주:27권79] 왕은 … 양단책(兩端策)을 썼다.
동일한 내용이 《隋書》 권81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리고 612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에 대해서는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嬰陽王 23년조에 상세히 나온다.
[역주:27권80] 모산성(母山城)
阿莫城이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전북 남원시 雲峰面이다. 본서 권34 잡지 地理1 康州 天嶺郡條에는 『雲峰縣 本母山縣(或云阿英城 或云阿莫城) 景德王改名 今因之』라 한 기사 참조.
[역주:27권81] 달솔(達率) 백기(苩奇)에게 … 공격하게 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38년(616)조에 보인다.
[역주:27권82] 변품(邊品)
신라 진평왕대의 장군.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0년(618)조에는 이때 邊品이 北漢山州 軍主의 직에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역주:27권83] 해론(奚論)
신라 진평왕대의 인물. 해론의 武勇談은 본서 권47 열전 해론전에 상세히 보인다.
[역주:27권84] 해론(奚論)이 전사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진평왕 400년(618)조에 나온다.
[역주:27권85] 당(唐)나라
중국의 왕조의 이름. 李淵(唐高祖)이 隋나라 恭帝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한 때로부터 哀帝가 朱全忠에게 망하기까지 20대 290년간 지속하였다. 수도는 長安(현재의 중국 陝西省 西安市)이다. 존속 기간은 618~907년이다.
[역주:27권86] 과하마(果下馬)
등에 타고서 과실나무 가지 밑을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작은 말.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濊條에 『又出果下馬 漢桓時獻之(臣松之按 果下馬高三尺 乘之可於果樹下行 故謂之果下 見博物志魏都賦)』라 하여 果下馬는 濊의 특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27권87] 당(唐)나라에 보내 과하마(果下馬)를 바쳤다.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러나 《冊府元龜》 권970 外臣部 朝貢3에는 이 일이 武德 7년(624) '九月'의 일로 나온다.
[역주:27권88] 늑노현(勒弩縣)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 나오는 靳▼(奴+寸)城의 誤記라고 하면 신라 漢州 槐壤郡의 옛 지명인 仍斤內와 음이 비슷하므로 현재의 충북 槐山郡 槐山邑에 비정할 수 있겠다(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384쪽).
[역주:27권89] 신라의 늑노현(勒弩縣)을 쳤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5년(623)조에 나온다.
[역주:27권90] 고조(高祖)
唐나라를 세운 사람. 이름은 李淵. 字는 叔德. 唐公을 襲封하고 隋나라에서 벼슬하여 太原留守가 되었다. 마침내 隋나라를 대신하여 帝를 칭하고 국호를 唐이라 하였다. 長安에 도읍하고 群雄을 평정하여 중국 천하를 통일하였다. 在位는 9년이었다.
[역주:27권91] 대방군왕(帶方郡王)
郡王은 당나라의 封爵制의 하나로서 종1품이다(《新唐書》 권46 志36 백관1). 따라서 帶方郡王도 종1품의 封爵이라 할 수 있다.
[역주:27권92] 고조(高祖)는 … 백제왕(百濟王)으로 삼았다.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역주:27권93] 속함성(速含城)
오늘날의 경남 咸陽郡 함양읍에 비정된다. 본서 권34 잡지 지리1 康州 天嶺郡條에 『天嶺郡 本速含郡 景德王改名 今咸陽郡』이라 한 기사 참조.
[역주:27권94] 앵잠성(櫻岑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현재의 경남 咸陽郡 水東面 上栢里 일대(속칭 앵구밭)에 비정된다. 본서 권37 주석 333 참조.
[역주:27권95] 기잠성(歧岑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현재의 경남 陝川郡 大幷面으로 비정한 견해가 있다. 본서 권37 주석 334 참조.
[역주:27권96] 용책성(冗柵城)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6년(624)조에는 穴柵城으로 나온다. 본서 권37 잡지 지리 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신라 康州 闕城郡(경남 山淸郡 丹城面)의 옛 지명인 闕支郡과 같은 곳으로 보는 견해(全榮來, 〈百濟 南方境域의 變遷〉, 《千寬宇先生還曆기념사학논총》, 1985, 154쪽)도 있다.
[역주:27권97] 용책성(冗柵城) 등 여섯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6년(624)조에 나온다. 이 전투의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권47 열전 訥催傳에 보인다. 그리고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武德7년(624) 기사에 『又相與新羅 世爲讐敵 數相侵伐』이라 하여 양국 사이의 잦은 전투를 압축하여 기록하고 있다.
[역주:27권98] 명광개(明光鎧)
黃漆을 발라 광채가 나는 갑옷.
[역주:27권99] 명광개(明光鎧)를 바치고 … 호소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역주:27권100] 산기상시(散騎常侍)
중국의 관제. 秦代에는 散騎와 中常侍를 설치하였는데 魏 黃初年間(221 ~ 226)에 散騎를 中常侍에 합하여 散騎常侍로 불렀다(《十通分類總纂》 8 職官類 上 권51 散騎常侍條 및 《十通分類總纂》 9 職官類 下 권54 唐官品條 참조). 隋대에는 散騎常侍를 폐하였으나 당 태종 정관 원년(627)에 復置하였고, 高宗 顯慶 2년(657)에 左散騎常侍와 右散騎常侍로 나누었다. 관품은 正3品下이며, 過失을 규찰하고 顧問에 대비하였다. 《新唐書》 권47 지37 백관2 門下省條 참조.
[역주:27권101] 주자사(朱子奢)
당 고조대의 인물. 문학자로서 뛰어났다. 백제에 사신으로 와서 고구려와의 화호를 권하였다. 자세한 것은 《舊唐書》 권189 상 열전 朱子奢傳과 《新唐書》 권198 열전 朱子奢傳 참조.
[역주:27권102] 고조는 … 그 원한을 풀도록 달랬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20 고구려본기 榮留王(建武王) 9년조와 같은 책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9년조 및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과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보인다. 그런데 당이 사신을 보내어 백제와 고구려가 원한을 풀 것을 설득한 시기에 대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高祖代의 일로,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는 『太宗貞觀初 詔使者平其怨』이라 하여 태종대의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新唐書》백제전에는 朱子奢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역주:27권103] 왕재성(王在城)
현재의 위치는 미상이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8년(626)조에는 主在城으로 나온다.
[역주:27권104] 성주 동소(東所)를 붙잡아 죽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8년조에 보인다.
[역주:27권105] 왕은 … 남여 300여 명을 사로잡았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49년(627)조에 보인다.
[역주:27권106] 왕은 신라가 빼앗은 땅을 …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
이 기사가 보여주는 내용은 본서 신라본기 진평왕 49년조에는 보이지 않고, 다만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만 나온다.
[역주:27권107] 복신(福信)
백제 무왕의 조카. 〈唐劉仁願紀功碑〉와 《日本書紀》 권26 齊明紀 6년조에는 鬼室福信으로 나온다. 따라서 복신의 성은 鬼室이라 할 수 있다. 복신에 대해서는 본서 권28 주석 110 참조.
[역주:27권108] 동쪽 번병[東藩]
동쪽의 藩國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백제를 지칭한다.
[역주:27권109] 바다 귀퉁이[海隅]
우리나라를 卑下하여 칭하는 말이다.
[역주:27권110] 왕이 대대로 군장(君長)이 되어 … 원수짐이 옛날과 마찬가지였다.
이 부분은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다만 문장 중에 글자를 고치거나 생략 또는 덧붙이기 한 곳도 있다. 《舊唐書》 기사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안은 무왕 37년조의 기사에 나오는 것이다. 徽猷(嘉猷), 嘉慰(欣慰), 朕自祗承(朕祗承), 高麗新羅使人(高句麗新羅使人), 璋因遣使(王因遣使).
[역주:27권111] 가봉성(椵峯城)
본서 권47 열전 및 奚論傳에는 椵岑城으로 나온다. 가잠성은 현재의 경기도 安城郡 竹山面에 비정된다. 본권 주석 74 참조.
[역주:27권112] 신라의 가봉성(椵峯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50년(628)조에 보인다.
[역주:27권113] 웅진성(熊津城)
부여로 천도하기 이전의 백제의 왕도. 현재의 충남 공주시이다. 자세한 것은 본서 권26 주석 6 참조.
[역주:27권114] 맏아들 의자(義慈)를 … 태자로 삼았다.
무왕의 재위기간은 42년간이다. 그런데 무왕은 재위 33년이라고 하는 늦은 시기에 의자를 태자로 책봉하고 있다. 그 배경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일본서기》 권23 舒明紀 3년조에 『三月 百濟義子王入王子豊章爲質』이라는 기사이다. 이 기사의 舒明 3년은 631년으로 무왕 32년에 해당되므로 의자왕은 무왕으로 고쳐 보아야 할 것이며, 豊章도 무왕의 아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위의 기사에 의할 때 무왕은 왕자 풍장을 왜에 보낸 이듬해에 맏아들 의자를 태자로 책봉한 셈이 된다. 여기에는 아마도 의자의 태자 책봉을 지지하는 세력과 풍장을 지지하는 세력과의 사이에 어떤 갈등이 있었지 않았을까 추론된다.(이 문제에 대해서는 鄭孝雲, 〈7世紀代의 朝日關係의 硏究(上) -白江戰에의 倭軍派遣 動機를 중심으로-〉, 《考古歷史學志》 5·6합집, 1990 참조)
[역주:27권115]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쳤으나 이롭지 못하였다.
이 내용은 본서 신라본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역주:27권116] 신라의 서곡성(西谷城)을 공격하여 13일만에 함락하였다.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2년조에는 西邊을 공격한 것으로 나온다.
[역주:27권117] 왕흥사(王興寺)
왕흥사는 법왕 2년에 건립이 시작되었으나(본서 권27 백제본기 법왕 2년조), 준공이 이루어진 것이 이 때였다. 이는 《三國遺事》 권3 興法篇 法王禁殺條에 『創王興寺於時都泗比城 始立栽而昇遐 武王繼統 父基子構 歷數紀而畢成 其寺亦名彌勒寺』이라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왕흥사의 건립에 34년이라고 하는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은 법왕의 사망과 무왕의 즉위 및 왕권강화 과정과 연관된다. 즉 법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왕흥사 창건 사업을 시작하였지만 단명으로 죽고 서동으로 불리우는 무왕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무왕 초기는 실권귀족들의 영향이 강하였기 때문에 왕흥사 건립을 재추진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후 무왕이 왕권의 기반을 확립하게 되면서 건립이 재추진되어 이때 낙성을 본 것이 아닐까 한다. (金周成, 〈백제 武王의 寺刹건립과 권력강화〉, 《한국고대사연구》 6, 1992 참조)
[역주:27권118] 행향(行香)
香爐를 쥐고 佛會中을 繞行하는 불교의식을 말한다. 제왕이 行香할 때에는 자신은 輦을 타고 繞行할 뿐이고 타인이 향로를 쥐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근세에 와서는 入朝 焚香 叩拜하는 것도 행향이라고 한다(李丙燾, 《國譯 三國史記》, 1977, 417쪽 주 2).
[역주:27권119] 궁궐 남쪽에 못을 파고
이때 만들어진 못이 別宮의 苑池로 현재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있는 宮南池로 추정된다. 이 궁남지의 현재의 면적은 13,772평이나 옛날에는 수면이 2만여평이 되었다고 한다. 이 궁남지는 史蹟 제1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근래 궁남지를 발굴한 결과 백제시기의 木簡이 출토되었다. 이 宮南池를 日本의 일본의 池泉庭園의 원류로 보는 견해도 있다(井上秀雄 譯註, 앞의 책, 394쪽).
[역주:27권120] 방장선산(方丈仙山)
蓬萊·瀛州와 더불어 三神山의 하나이다. 발해 동쪽에 큰 溝壑이 있고 그 가운데 다섯 개의 산이 있는데 세째 산을 方壺 또는 方丈이라고 하였다. 중국의 옛 설화에는 삼신산에는 仙人과 不死藥이 있고, 황금과 백은으로 궁궐을 만들었다고 한다.
[역주:27권121] 사비하(泗沘河)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을 흘러가는 白馬江을 말한다.
[역주:27권122] 거문고[琴]
거문고에 대해서는 본서 권32 잡지 樂志 참조. 백제의 악기에 대해 《舊唐書》 권29 志9 音樂2에는 箏·笛·桃皮·篳篥·箜篌 등의 이름이 보이고, 《北史》 권94 열전 백제전에는 鼓角·箜篌·箏·竽·箎·笛의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역주:27권123] 대왕포(大王浦)라 하였다.
비슷한 내용이 《三國遺事》 권2 紀異篇 南夫餘·前百濟條에 보인다.
[역주:27권124] 갑옷입은 군사 500명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善德王知幾三事條에는 처음에 500명이 왔고, 후에 또 1,200명이 왔다가 모두 전사한 것으로 되어있다.
[역주:27권125] 독산성(獨山城)
본서 권37 잡지 지리4에는 三國有名未詳地分의 신라측 지명으로 나온다. 이 獨山城은 신라·백제 사이의 전투 지역으로서 桐岑城(현재의 경북 구미시 인의동에 비정됨)과 같이 倂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현재의 경북 星州郡 禿用山城으로 비정할 수 있다. 독용산성에 대해서는 대구대학교, 《星州 禿用山城 地表調査報 告書》, 1992 참조. 한편 본서 권3 신라본기 奈勿麻立干 38년(393)조에 보이는 獨山은 현재의 경북 迎日郡 神光面에 있는 獨山에 비정되므로 본 기사의 독산과는 다르다.
[역주:27권126] 옥문곡(玉門谷)
7세기 전반에 신라와 백제간의 전투가 잦던 곳.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5년조, 같은 책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8년(648) 4월조 및 권41 열전 김유신전 上에도 나온다. 그 위치에 대해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善德王知幾三事條에는 富山下 女根谷(현재의 경북 경주시 건천읍)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백제군이 신라 왕도인 경주와 至近의 곳인 여근곡에 와서 군사를 매복하였다는 것과 백제장군 于召가 南山嶺石上에 숨었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본서 백제본기와 신라본기 및 열전의 내용을 종합할 때 백제 장군 于召가 獨山城을 치기 위해 옥문곡에 와서 매복해 있었다 하고, 신라 장군 김유신이 大梁城(현재의 경남 陜川) 밖에서부터 백제군을 유인하여 옥문곡에 복병을 두었다가 크게 격파했다고 하므로 옥문곡의 위치는 경북 星州와 경남 陜川 사이의 어느 지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현재의 경남 가야면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金泰植,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交涉과 征服〉, 《百濟의 中央과 地方》, 충남대 백제연구소, 1997, 75~82쪽).
[역주:27권127] 알천(閼川)
신라 善德女王代의 장군.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善德王知幾三事條에는 角干 閼川으로 나온다. 그는 우지암에서 열린 6명의 大臣회의의 한 구성원으로 참여하였다(《삼국유사》 권1 紀異篇 眞德王條). 본서 권5 주석 19 참조.
[역주:27권128] 우소(于召)가 옥문곡(玉門谷)에 이르러 … 사로잡혔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여왕 5년조와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善德王知幾三事條에 보인다. 그런데 선덕여왕지기삼사조에는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 來藏於彼 竝取殺之 百濟將軍于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殪 又有後兵一千二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子遺』라 하여 백제 군사가 두 차례에 걸쳐 공격해 왔다가 모두 패배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주:27권129] 망해루(望海樓)
무왕 35년(634)에 만들었다고 하는 方丈仙山이 있는 宮南池 가에 축조한 樓인 듯하다. 신라의 雁鴨池와 臨海殿은 이것의 모방일 것이다(李丙燾, 앞의 책, 417쪽 주5 및 李基白, 〈望海亭과 臨海殿〉, 《신라사상사연구》, 일조각, 1986 참조).
[역주:27권130] 단(段)
중국에서의 度量衡의 단위. 포목 한 필의 반을 말한다.
[역주:27권131] 태종이 … 3천 단(段)을 하사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그런데 《冊符元龜》 권970 外臣部 朝貢3 唐太宗 貞觀 11년 12월조에 『百濟王夫餘璋遣太子隆來朝幷 獻鐵甲雕斧帝優勞之』라 하여 당에 사신으로 간 사람을 夫餘璋(무왕)의 태자인 隆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본서 무왕 33년조에는 원자인 의자가 태자로 책봉되고 있으므로, 《책부원귀》에 보이는 隆은 무왕의 태자가 아니라 왕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왕의 왕자로 隆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도리어 隆은 의자왕의 태자로 나온다(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4년조).
[역주:27권132] 국학(國學)
본 기사의 국학은 당나라 태종이 자주 국자감에 行幸하였다고 한 사실에서 미루어 볼 때 국자감을 말하는 것이다. 당나라의 최고교육기관인 國子監은 國子學·太學.四門學·律學·書學·算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중 국자학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은 『文武三品以上子孫若從二品以上曾孫及勳關二品縣公京官四品帶三品勳封之子』였다. 《新唐書》 권44 志34 選擧志 上 참조.
[역주:27권133] 국학(國學)에 입학할 것을 요청하였다.
동일한 내용이 본서 신라본기 선덕여왕 9년조와 《新唐書》 권44 志34 選擧志 上과 《資治通鑑》 권195 唐紀16 貞觀 14년(640) 2월조에 보인다. 선덕여왕 9년조의 기사는 『是時 太宗大徵天下名儒爲學官 數幸國子監 使之講論…增築學舍千二百間 增學生萬三千二百六什員…於是 高句麗·百濟·高昌·吐蕃 亦遣子弟入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新唐書》에는 唐의 국학에 자제의 입학을 요청한 나라 중에는 신라가 빠져있다.
[역주:27권134] 42년
무왕의 재위기간. 그러나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庚申立 理四十一年』으로 나와 1년의 차이가 있다.
[역주:27권135] 외신(外臣)
중국은 황제의 통치권내에 있는 신하를 內臣이라 하고, 주변의 이민족의 경우 外臣이라 하였다(栗原朋信, 《上代日本對外關係の硏究》, 吉川弘文館, 동경, 1978, 27-32쪽).
[역주:27권136] 부여장(扶餘璋)
백제 무왕의 이름이다.
[역주:27권137] 주국(柱國)
勳의 하나. 훈에는 上柱國과 柱國이 있었다. 중국의 경우 上柱國은 본래 戰國시대에 楚나라의 벼슬이름으로 拔群의 戰功을 세운 功臣에게 수여하였다. 그후 上柱國·柱國은 明代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勳位가 되었다. 高麗의 경우 상주국은 正二品이었고, 주국은 從二品이었다. 《고려사》 권77 志37 百官2 勳條 참조.
[역주:27권138] 광록대부(光祿大夫)
당의 文散階의 하나. 당의 文散階는 모두 29등급으로 되어 있는데 光祿大夫는 從2品이었다(《新唐書》 권46 志36 百官1 吏部條).
[역주:27권139] 먼 나라를 위무하는 도는 … 광록대부(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동일한 내용이 《新唐書》 권220 열전 백제전에 나온다.
[역주:27권140] 부의(賻儀)
喪家에 부조로 보내는 돈이나 물건. 香奠·香料라고도 한다. 《舊唐書》 권199 상 열전 백제전에는 『賻物二百段』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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