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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歷史/三國史記

列傳 第一 金庾信 上

by 柳川 2019. 12. 25.

列傳 第一 金庾信 上

金庾信 王京人也 十二世祖首露 不知何許人也 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 登龜峯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 號曰加耶 後改爲金官國 其子孫相承 至九世孫仇 ※ 或云仇次休 於庾信爲曾祖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祖武力 爲新州道行軍摠管 嘗領兵獲百濟王及其將四人 斬首一萬餘級 父舒玄 官至蘇判·大梁州都督安撫大梁州諸軍事 按庾信碑云 『考蘇判金逍衍』 不知舒玄或更名耶 或逍衍是字耶 疑故兩存之

初 舒玄路見葛文王立宗之子肅訖宗之女萬明 心悅而目挑之 不待媒妁而合 舒玄爲萬弩郡 ※守 將與俱行 肅訖宗始知女子與玄野合 疾之囚於別第 使人守之 忽雷震屋門 守者驚亂 萬明從竇而出 遂與舒玄 赴萬弩郡 舒玄 庚辰之夜 夢熒 ※鎭二星降於己 萬明亦以辛丑之夜 夢見童子衣金甲 乘雲入堂中 尋而有娠 二十月而生庾信 是眞平王建福十二年 隋文帝開皇十五年乙卯也 及欲定名 謂夫人曰 “吾以庚辰夜吉夢 得此兒 宜以爲名 然禮不以日月爲名 今庚與庾字相似 辰與信聲相近 況古之賢人有名庾信 盍以命之” 遂名庾信焉 萬弩郡 今之鎭州 初以庾信胎 藏之高山 至今謂之胎靈山

公年十五歲爲花 ※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 眞平王建福二十八年辛未 公年十七歲 見高句麗·百濟·靺鞨侵軼國疆 慷慨有平寇賊之志 獨行入中嶽石崛  ※戒告天盟誓曰 “敵國無道 爲豺虎 以擾我封埸 略無寧歲  ※是一介微臣 不量材力 志淸禍亂 惟天降監 假手於我” 居四日 忽有一老人 被褐而來曰 “此處多毒蟲猛獸 可畏之地 貴少年爰來獨處 何也” 答曰 “長者從何許來 尊名可得聞乎” 老人曰 “吾無所住 行止隨緣 名則難勝也” 公聞之 知非常人 再拜進曰 “僕新羅人也 見國之讐 痛心疾首 故來此 冀有所遇耳 伏乞長者憫我精誠  ※之方術” 老人默然無言 公涕淚懇請不倦 至于六七 老人乃言曰 “子幼而有幷三國之心 不亦壯乎”  ※授以秘法曰 “愼勿妄傳 若用之不義 反受其殃” 言訖而辭 行二里許 追而望之 不見 唯山上有光 爛然若五色焉

建福二十九年 鄰賊轉迫 公愈激壯心 獨携寶劒 入咽薄山深壑之中 燒香告天祈祝 若在中嶽誓辭 仍禱 “天官垂光 降靈於寶劒” 三日夜 虛角二星 光芒赫然下垂 劒若動搖然

建福四十六年 己丑秋八月 王遣伊湌任 ※里 波珍湌龍春·白龍 蘇判大因·舒玄等 率兵攻高句麗娘臂城 麗人出兵逆擊之 吾人失利 死者衆多 衆心折衄 無復鬪心 庾信 時爲中幢幢 ※ 進於父前 脫胄而告曰 “我兵敗北 吾平生以忠孝自期 臨戰不可不勇 盖聞 ‘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迺跨馬拔劒 跳坑出入賊陣 斬將軍 提其首而來 我軍見之 乘勝奮擊 斬殺五千餘級 生擒一千人 城中兇懼無敢抗 皆出降

善德大王十一年壬寅 百濟敗大梁州 春秋公女子古陁炤娘 從夫品釋死焉 春秋恨之 欲請高句麗兵 以報百濟之怨 王許之 將行 謂庾信曰 “吾與公同體 爲國股肱 今我若入彼見害 則公其無心乎” 庾信曰 “公若往而不還 則僕之馬跡 必踐於麗·濟兩王之庭 苟不如此 將何面目以見國人乎” 春秋感悅 與公互噬手指 歃血以盟曰 “吾計日六旬乃還 若過此不來 則無再見之期矣” 遂相別

後庾信爲押梁州軍主 春秋與訓信沙干 聘高句麗 行至代買縣 縣人豆斯支沙干 贈靑布三百步 旣入彼境 麗王遣太大對盧盖金館之 燕饗有加 或告麗王曰 “新羅使者 非庸人也 今來 殆欲觀我形勢也 王其圖之 俾無後患” 王欲橫問 因其難對而辱之 謂曰 “麻木峴與竹嶺 本我國地 若不我還 則不得歸” 春秋答曰 “國家土地 非臣子所專 臣不敢聞命” 王怒囚之 欲戮未果 春秋以靑布三百步 密贈王之寵臣先道解 道解以饌具來 相飮酒酣 戱語曰 “子亦嘗聞龜兎之說乎 昔 東海龍女病心 醫言 ‘得兎肝合藥 則可療也’ 然海中無兎 不奈之何 有一龜 白龍王言 ‘吾能得之’ 遂登陸見兎言 ‘海中有一島 淸泉白石 茂林佳菓 寒暑不能到 鷹隼不能侵 爾若得至 可以安居無患’ 因負兎背上 游行二三里許 龜顧謂兎曰 ‘今龍女被病 須兎肝爲藥 故不憚勞 負爾來耳’ 兎曰 ‘噫 吾神明之後 能出五藏 洗而納之 日者 小覺心煩 遂出肝心洗之 暫置巖石之底 聞爾甘言徑來 肝尙在彼 何不廻歸取肝 則汝得所求 吾雖無肝尙活 豈不兩相宜哉’ 龜信之而還 纔上岸 兎脫入草中  ※龜曰 ‘愚哉 汝也 豈有無肝而生者乎’ 龜憫默而退” 春秋聞其言 喩其意 移書於王曰 『二嶺 本大國地分 臣歸國 請吾王還之 謂予不信 有如皦日』 王迺悅焉

春秋入高句麗 過六旬未還 庾信揀得國內勇士三千人 相語曰 “吾聞 見危致命 臨難忘身者 烈士之志也 夫一人致死當百人 百人致死當千人 千人致死當萬人 則可以橫行天下 今國之賢相 被他國之拘執 其可畏不犯難乎” 於是 衆人曰 “雖出萬死一生之中 敢不從將軍之令乎” 遂請王 以定行期 時高句麗諜者浮屠德昌 使告於王 王前聞春秋盟辭 又聞諜者之言 不敢復留 厚禮而歸之 及出境 謂送者曰 “吾欲釋憾於百濟 故來請師 大王不許之 而反求土地 此非臣所得專 嚮與大王書者  ※逭死耳” 此與本 ※眞平王十二年所 ※ 一事而小異 以皆古記所傳 故兩存之
庾信爲押梁州軍主 十三年爲蘇判 秋九月 王命爲上將軍 使領兵伐百濟加兮城·省熱城·同 ※城等七城 大克之 因開加兮之津
 ※正月 歸未見王 封人急報 百濟大軍來攻我買利浦城 王又拜庾信爲上州將軍 令拒之 庾信聞命卽駕 不見妻子 逆擊百濟軍走之 斬首二千級 三月 還命王宮 未歸家 又急告 百濟兵出屯于其國界 將大擧兵侵我 王復告庾信曰 “請公不憚勞遄行 及其未至備之” 庾信又不入家 練軍繕兵 向西行 于時 其家人皆出門外待來 庾信過門 不顧而行 至五十步許駐馬 令取漿水於宅 啜之曰 “吾家之水 尙有舊味” 於是 軍衆皆云 “大將軍猶如此 我輩豈以離別骨肉爲恨乎” 及至疆埸 百濟人望我兵衛 不敢迫乃退 大王聞之甚喜 加爵賞
十六年丁未 是善德王末年 眞德王元年也 大臣毗曇·廉宗 謂女主不能善理 擧兵欲廢之 王自內禦之 毗曇等屯於明活城 王師營於月城 攻守十日不解 丙夜 大星落於月城 毗曇等謂士卒曰 “吾聞落星之下 必有流血 此殆女主敗績之兆也” 士卒呼吼 聲振 ※地 大王聞之 恐懼失次 庾信見王曰 “吉凶無常 惟人所召 故紂以赤雀亡 魯以獲麟衰 高宗以雉雊興 鄭公以龍鬪昌 故知德勝於妖 則星辰變異 不足畏也 請王勿憂” 乃造偶人 抱 ※載於風鳶而颺之 若上天然 翌日 使人傳言於路曰 “昨夜 落星還上” 使賊軍疑焉 又刑白馬 祭於落星之地  ※曰 “天道 則陽剛而陰柔 人道 則君尊而臣卑 苟或易之 卽爲大亂 今毗曇等以臣而謀君 自下而犯上 此所謂亂臣賊子 人神所同疾 天地所不容 今天若無意於此 而反見星怪於王城 此臣之所疑惑而不喩者也 惟天之威 從人之欲 善善惡惡 無作神羞” 於是 督諸將卒奮擊之 毗曇等敗走 追斬之 夷九 ※
冬十月 百濟兵來圍茂山·甘勿·桐岑等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拒之 苦戰氣竭 庾信謂丕寧子曰 “今日之事急矣 非子 誰能激衆心乎” 丕寧子拜曰 “敢不惟命之從” 遂赴敵 子擧眞及家奴合節隨之 突 ※戟 力戰死之 軍士望之 感勵爭進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眞德王 ※和元年申 春秋以不得請於高句麗 遂入唐乞師 太宗皇帝曰 “聞爾國庾信之名 其爲人也如何” 對曰 “庾信雖少有才智 若不籍天威 豈易除鄰患” 帝曰 “誠君子之國也” 乃詔許 勑將軍蘇定方 以師二十萬 徂征百濟 時庾信爲押梁州軍主 若無意於軍事 飮酒作樂 屢經旬月 州人以庾信爲庸將 譏謗之曰 “衆人安居日久 力有餘 可以一戰 而將軍慵惰 如之何” 庾信聞之 知民可用 告大王曰 “今觀民心 可以有事 請伐百濟 以報大梁州之役” 王曰 “以小觸大 危將奈何” 對曰 “兵之勝否 不在大小 顧其人心何如耳 故紂有億兆人 離心離德 不如周家十亂同心同德 今吾人一意 可與同死生 彼百濟者不足畏也” 王乃許之
遂簡練州兵赴敵 至大梁城外 百濟逆拒之 佯北不勝 至玉門谷 百濟輕之 大率衆來 伏發擊其前後 大敗之 獲百濟將軍八人 斬獲一千級 於是 使告百濟將軍曰 “我軍主品釋及其妻金氏之骨 埋於爾國獄中 今 爾 ※將八人 見捉於我匍匐請命 我以狐豹首丘山之意 未忍殺之 今 爾送死二人之骨 易生八人 可乎” 百濟仲常一作忠常佐平言於王曰 “羅人骸骨 留之無益 可以送之 若羅人失信 不還我八人 則曲在彼 直在我 何患之有” 乃掘品釋夫妻之骨 櫝而送之 庾信曰 “一葉落 茂林無所損 一塵集 大山無所增” 許八人生還
遂乘勝入百濟之境 攻拔嶽城等十二城 斬首二萬餘級 生獲九千人 論功增秩伊湌 爲上州行軍大摠管 又入賊境 屠進禮等九城 斬首九千餘級 虜得六百人 春秋入唐 請得兵二十萬來 見庾信曰 “死生有命 故得生還 復與公相見 何幸如焉” 庾信對曰 “下臣仗國威靈 再與百濟大戰 拔城二十 斬獲三萬餘人 又使品釋公及其夫人之骨 得反鄕里 此皆天幸所致也 吾何力焉”


[교주:41권1] 亥
   「仇亥」, 三國遺事 王曆篇 「仇衝王」. 燾 「亥」를 「充」의 誤刻으로 봄.
[교주:41권2] 太
原本 「大」.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大」. 榮·朝·權·烈·燾 「大」.
[교주:41권3] 惑
原本 「或」. 鑄字本에 의거 수정. 燾 「或(惑)」.
[교주:41권4] 郞
「公年…花郞」, 三國遺事 紀異 金庾信條 「年至十八壬申 修劍得術爲國仙」.
[교주:41권5] 齊
「齋」와 相通.
[교주:41권6] 僕
原本 「催」. 文意로 보아 수정. 鑄字本 「㒒」.
[교주:41권7] 授
原本 「受」.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1권8] 乃
原本 「万」.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1권9] 末
原本 「永」.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求」. 榮·朝·北·權·烈·燾·浩 「永」.
[교주:41권10] 主
「中幢幢主」, 本書 卷4 眞平王 51年條 「副將軍」.
[교주:41권11] 謂
原本 「請」. 三國史節要(卷8-13面)에 의거 수정.
[교주:41권12] 圖
原本 「啚」. 「圖」의 略字.
[교주:41권13] 記
原本 「言」. 文意 및 朝鮮史學會本에 의거 수정. 榮·烈·浩 「紀」, 燾 「言(書)」.
[교주:41권14] 書
「眞平王十二年所書」, 本書 卷5 善德王 11年條의 誤記.
[교주:41권15] 火
原本 「大」.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大」. 榮·烈 「大」.
[교주:41권16] 巳
原本 「丑」.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丑」. 朝·權·浩 「丑」, 北·燾 「丑(巳)」.
[교주:41권17] 天
原本에는 없으나 三國史節要(卷9-2面)에 의거 추가.
[교주:41권18] 火
原本 「大」. 文意로 보아 수정.
[교주:41권19] 祝
三國史節要(卷9-2面) 「呪」.
[교주:41권20] 族
「夷九族」, 本書 卷5 眞德王 元年條 「誅毗曇 坐死者三十人」.
[교주:41권21] 劒
原本 「釰」.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1권22] 太
原本 「大」. 本書 卷5 眞德王 元年條와 卷31 年表 眞德王 2年條에 의거 수정. 朝·北·權·燾·浩 「大」.
[교주:41권23] 裨
原本 「稗」. 鑄字本에 의거 수정.



[역주:41권2] 왕경인(王京人)
신라의 지방인과 구별하는 뜻으로 왕도에 살고 있는 경주사람을 지칭한 말이다. 김유신 가문은 경주 6부 중 沙喙部人이었음이 〈丹陽赤城碑〉를 통하여 밝혀졌다. 왕경인은 京位를 가질 수 있었고 골품제에 편입될 수 있었다(李文基, 〈金石文資料를 통하여 본 新羅의 六部〉, 《歷史敎育論集》 2, 1981, 120∼122쪽; 武田幸男, 〈新羅の骨品體制社會〉, 《歷史學硏究》 299, 1965, 10∼12쪽).
[역주:41권3] 12세조(世祖)
이를 북한본, 이병도본, 이재호본, 신호열본 등에서는 12代祖로 번역되어 있다. ‘世’와 ‘代’는 한자의 原義 上 같은 의미이나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족보상에서 자손을 가리킬 때에는 시조를 1세로 하여 世로 표기하여 왔다. 선조를 칭할 경우에는 몇 대조, 후손을 칭할 경우에는 몇 세손으로 칭하는 관습이 생겼다. 그러나 문집에서는 통용된 사례도 있다(鄭求福, 〈史學史에 있어서의 時代區分과 各時代의 特徵〉, 《韓國史의 時代區分에 관한 硏究》,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참조).
‘世’와 ‘代’를 구분하여 씀에 있어서의 차이는 시조를 1세로 기록하고 자신까지 계산하며 ‘代’의 경우는 자신을 계산하지 않고 아버지부터 1대로 계산함으로써 세대수에 있어서 1대의 차이가 있다. 즉 시조의 12世孫이 자신의 시조를 칭할 경우 11대조가 된다. 조선조의 ‘世’ ‘代’ 관념에 따른다면 수로왕이 김유신의 12대조라 할 경우 김유신은 수로왕의 13世孫이 된다. 그러나 12世祖의 경우도 김유신 자신을 1세로 계산하지 않은 듯하므로 의미상에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三國遺事》 권2 紀異篇 駕洛國記條에는 김유신보다 1대후인 문무왕이 制書에서 자신의 15대 시조라고 하여 1대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역주:41권4] 수로(首露)
서기 42∼199. 가락국의 시조. 《三國遺事》 권2 紀異篇 駕洛國記條에 의하면 부인은 阿踰陁國 公主인 許黃玉이라고 한다. 그는 지혜가 뛰어나 신라의 파사왕 23년(102)에 음즙벌국과 실직곡국의 영토분쟁을 해결하였다는 기사가 보이고 있다(본서 권1 신라본기 참조). 수로왕릉은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있다. 수로왕이라 칭한 이유에 대하여는 『여러 알 중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는 뜻』(『始現故諱首露』 《三國遺事》 권2 紀異篇 駕洛國記條)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고, 이는 ‘聳出’, ‘湧出, ’‘增高’를 뜻하는 우리 고어의 ‘수리’·‘술’·‘솔’에 해당하는 말로, ‘高位’, ‘首位’, ‘神聖’을 뜻을 가진다고 하는 설(李丙燾, 〈首露王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참조)이 있다.
[역주:41권5] 어떤 사람 … 모른다[不知何許人]
이는 부모가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신호열본에서는 『어느 곳 사람인지 알 수 없다』로, 북한본에서는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로, 이병도본에서는 『(근본이) 어떤 사람이지 모른다』로 번역하였으나 이재호본의 번역을 따랐다. 이 표현은 본서 권48 열전 百結先生傳에도 나온다.
[역주:41권6] 구봉(龜峰)
《三國遺事》 권2 紀異篇 駕洛國記條에서는 ‘龜旨’로 쓰여 있다. 이에서 ‘龜旨’는 산봉우리의 이름으로 거북이 엎드린 듯한 산의 형상에서 나왔다(『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故云也』)라고 註를 달고 있다. 十朋은 거북이를 뜻한다.
[역주:41권7] 가락(駕洛) 9촌(九村)
가락국을 세운 김해 지방의 아홉 마을. 《三國遺事》 권2 紀異篇 駕洛國記條에는 수로왕이 나타나기 이전 이 지역에 我刀干·汝刀干·彼刀干·五刀干·留水干·留天干·神天干·五天干·神鬼干 등 9干이 있어 이들 酋長이 1百戶 7만5천 명을 통솔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바 駕洛 9村이라 함은 이들 9간이 다스리던 각각의 촌명을 총칭한 것이다.
[역주:41권8] 나라를 열고 이름을 가야(加耶)라 하였다
加耶·伽耶·伽倻·加羅·加良·駕洛·伽落·狗耶·南加羅·南加耶 등으로도 표기되는데 넓은 의미로는 고대 낙동강 中·下 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諸國에 대한 총칭이라 할 수도 있으나 좁은 의미로는 지금의 김해지역에 위치하였던 加耶(金官加耶)를 지칭한다. 김해는 본래 駕洛國이었는데 혹 加耶라 하기도 하였으며 뒤에 金官國으로 고쳤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金海都護府 연혁조.
[역주:41권9] 금관국(金官國)
가야연맹 가운데 하나인 본가야(김해)를 지칭하는 국호. 진흥왕 19년(532)에 신라에 의해 병합되었다. 본서 권1 신라본기 脫解尼師今 즉위년조, 婆娑尼師今 23년(102)조, 法興王 19년(532)조와 본서 지리지 金海小京條에 金官國이라는 국명이 더 나오고 있으나 탈해·파사 이사금의 경우는 모두 수로왕과 관련된 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나머지 두 경우는 멸망 당시의 국호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韓條에는 ‘拘邪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늦어도 3세기까지는 그 국호가 가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拘邪國’은 가야국의 중국식 표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금관국은 건국 초기부터의 국명이 아니라 후기의 국명이라 하겠다(金泰植, 〈加耶의 社會發展段階〉, 《韓國古代國家의 形成》, 민음사, 1990).
[역주:41권10] 후에 금관국(金官國)으로 고쳤다
금관국으로 칭해진 때는 680년 이후라는 고증이 있으나(末松保和 《任那興亡史》, 1949, 237쪽) 김해가야가 멸망한 후인 6세기부터 7세기 초로 보고 있다. 이는 김해가야가 멸망한 후 신라에서는 南加耶로 칭하였고, 《日本書紀》권20 敏達紀 4년(575)조에 ‘素那羅’, 推古紀 8년(600)조에는 ‘南加羅’가 나오며 繼體紀 23년(529) 4월조에 ‘金官村’의 이름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에서 국명을 금관국으로 고쳤다는 사실은 확증하기 어렵다(金泰植, 〈大加耶의 世系와 道設智〉, 《震檀學報》 81, 1996, 8∼10쪽).
[역주:41권11] 구해(仇亥)
加耶의 제10대 왕으로 마지막 왕. 521년에 즉위했다가 532년(법흥왕 19년)에 나라를 들어 신라에 항복하였다. 이후 加耶왕족은 신라의 진골에 편입되었고 新金氏라 칭하였다. ‘亥’자는 ‘充’자의 오각으로 보는 설도 있으나(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을유문화사, 1977, 613쪽) 이는 이곳 이외에도 본서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조와 권34 잡지 지리지1 良州 金海小京조에도 나오고 있으므로 그대로 보아야 할 듯하다.
[역주:41권12] 구차휴(仇次休)
구해의 별칭. 《三國遺事》의 王曆과 권2 紀異篇 駕洛國記條에서는 ‘仇衝’ 또는 ‘仇衡’으로 표현하고 있다.
[역주:41권13]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중국의 전설시대 황제 중의 한 사람. 黃帝의 손자이며 이름은 摯. 金德으로 왕이 되었다 하여 金天氏라 하였다.
[역주:41권14] 헌원(軒轅)
중국 상고의 전설적인 인물인 皇帝 軒轅를 가르킨다. 그가 軒轅에 살았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
[역주:41권15] 남가야(南加耶)
남쪽 가야라는 뜻. 이는 가야 중 금관국을 의미한다. 이는 고령의 대가야를 기준으로 남가야라고 칭한 듯하다.
[역주:41권16] 성씨가 같았다
加耶系 金氏는 王族金氏와는 구별되어 ‘新金’으로 표현되었음이 昌原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銘序〉와 〈皇龍寺刹柱本記〉에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新羅 三姓 支配族의 성씨보다는 후에 성씨를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대의 인물인 武力대에 金姓을 가진 것 같지는 않으며 유신의 탁월한 전공과 母인 萬明夫人이 葛文王 立宗의 孫女이며 왕족인 肅訖宗의 女란 점에서 왕족이었으며 妹인 文姬가 春秋의 妃 文明王后가 된 사회적 배경에서 金姓을 갖게 된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三品彰英, 〈骨品制社會〉, 《古代史講座》 7, 1963). 또한 유신의 父 舒玄은 그 성명이 ‘金逍衍’으로 金庾信碑銘에 전하고, 또 유신이 王京人 등으로 기재될 수 있었던 배경, 또 고구려 멸망 후 귀족 安勝을 받아들여 金姓을 賜姓하는 예 등을 종합하여 舒玄대에 金氏 姓을 취득하였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李純根, 〈新羅時代 姓氏取得과 그 意味〉, 《韓國史論》 6, 1980, 20∼21쪽).
[역주:41권17] 무력(武力)
김유신의 할아버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김구해의 막내 아들. 법흥왕 19년(532) 신라에 투항하여 진골신분이 되었다. 진흥왕 12년(551)경 단양 적성전투에 참여하였고, 동왕 14년(553)에는 新州가 설치되자 아찬으로 그 군주에 임용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옥천의 관산성 전투에 新州의 군대를 이끌고 참여하여 백제 성왕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 駕洛國記에는 ‘茂力’으로 표기하였는 바 이는 同音異字의 표기이고 김유신조에서는 ‘虎力’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고려 혜종의 이름인 ‘武’자의 음을 피휘하기 위하여 달리 쓴 것으로 생각한다. 〈단양적성비〉·〈황초령진흥왕순수비〉·〈마운령진흥왕순수비〉 등에는 ‘另力’으로 기록되고 있다(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2, 1992, 63쪽). 《三國遺事》에는 그의 관등을 伊干으로 기록하고 있다.
仇衡(衝)王과 김무력의 관계에 대하여는 가락국기 世系나 본서 권4 신라본기 법흥왕 19년(532)조에는 모두 부자 관계(차남 혹은 삼남)로 되어 있으나, 한편 가락국기 首露王廟에 대한 기사에는 仇衝王 이후의 계보가 仇衝王 - 世宗 - 率友公 - 庶云으로 되어 있어 김무력의 존재가 몰각되어 있다. 가락국기 世系에 의하면 世宗은 茂力(金武力)의 형이며, 한편 庶云은 김무력의 子인 金舒玄이다. 이에 대하여 이 系譜가 가야의 멸망 후 시조 首露墓의 司祭者를 기록한 것으로, 구형왕이 죽은 뒤 그 장남인 세종이 뒤를 이었으나 다시 그가 죽은 뒤에는 그 아우인 김무력이 뒤를 이어 率友(支)公이라 불려진 것이 아닐까, 또한 率友公 이 金國公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村上四男, 〈金官國の世系と率支公〉, 《朝鮮學報》 21·22합집, 1961: 《朝鮮古代史硏究》, 1978, 372∼384쪽; 李基東·李基白, 《韓國史講座-古代篇》, 1982, 163∼164쪽).
[역주:41권18] 신주도행군총관(新州道行軍摠管)
新州는 신라가 진흥왕 14년(553)에 한강 하류지역을 백제로부터 탈취한 후에 설치한 주이다. 道는 이 지역 또는 방향의 뜻이며, 행군은 출정군대를 뜻한다. 총관은 총지휘관이라는 의미다. 총관은 당나라 군사의 편제명칭에서 따온 것이다.
[역주:41권19] 백제왕(百濟王)
백제 聖王을 가리킨다.
[역주:41권20] 장수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의 기록에는 佐平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주:41권21] 1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조에는 士卒 29,600명으로 달리 기록되어 있다.
[역주:41권22] 서현(舒玄)
金庾信의 아버지. 加耶의 末王인 仇亥의 孫子. 庶云 또는 逍衍이라고도 표기하였다. 《三國遺事》 권2 紀異篇 駕洛國記條에 인용된 문무왕의 制書에는 『庶云迊干』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仇衡(仇亥)王의 孫인 率友公의 子로 되어 있어 본서 열전과 차이가 있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51년(629)조에 대장군으로 고구려를 정벌한 기록이 보인다.
[역주:41권23] 소판(蘇判)
신라의 제3관등인 迊湌의 별칭. 본서 권38 주석 13 참조. 그러나 서현의 관직은 제1관등인 각간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어(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즉위기사 및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庾信條) 본 기사와 다르다.
[역주:41권24] 대량주도독(大梁州都督) 안무대량주제군사(安撫大梁州諸軍事)
大梁州는 大良州라고도 기록하며, 현재의 경남 합천이다. 도독은 주의 장관으로 元聖王 원년(785)에 摠管을 개칭한 것이다. 당시 진평왕대에는 주의 장관은 군주였으므로 그 당시의 명칭은 ‘下州軍主’ 또는 ‘大耶州軍主’라고 표기되었어야 옳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梁山郡 名宦條에 『良州摠管 金舒玄』을 싣고 있는 바 이는 잘못된 것이다. 본서 권34 주석 418 참조. 『안무대량주제군사』는 당군이 들어온 후의 직함으로 생각되므로 이는 후대에 덧붙여진 관직이 아닐까 한다.
[역주:41권25] 유신의 비
본서 권28 백제본기 말미에 붙인 사론에 보이는 薛因宣撰 金庾信碑를 지칭한다.
[역주:41권26] 김소연(金逍衍)
본권 본 기사에서는 이를 字인지 개명한 것인지 모른다고 하였으나 그 음이 유사하므로 舒玄과 逍衍은 同名의 異寫로 생각된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15쪽).
[역주:41권27]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
葛文王은 왕위계승권이 없는, 왕에 준하는 존재로서, 왕과의 일정한 인척관계로 책봉되었는데, 남자에 한하여 주어졌다(李基白, 〈新羅時代의 葛文王〉, 《新羅政治社會史硏究》, 一潮閣, 1974).입종은 신라 법흥왕의 동생이며, 진흥왕의 아버지이다. 〈울주 천전리서석〉과 〈울진 봉평신라비〉에 보이는 『徙夫智葛文王』은 입종갈문왕으로 비정된다.
[역주:41권28] 숙흘종(肅訖宗)
진흥왕의 동생. 〈창녕진흥왕척경비〉에 나오는 △△葛文王에 해당하는 이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백, 위의 책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3쪽).
[역주:41권29] 만명(萬明)
김유신의 어머니. 肅訖宗의 딸. 『만명이 서현과 야합하였다』는 본문의 기사를 만명이 진흥왕의 姪女, 진지왕의 從妹, 진평왕의 堂姑母 뻘이 되는 등 신라 왕실의 딸이므로, 신라의 보수적인 골품세력이 신라왕실과 가락왕손 간의 동등한 입장에서의 혼인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이렇듯 일종의 묵인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丁仲煥, 〈金庾信(595∼673)論〉, 《歷史와 人間의 對應 -韓國史篇-》, 高柄翊先生回甲紀念史學論叢刊行委員會編, 1985, 17∼18쪽).
[역주:41권30] 만노군(萬弩郡) 태수(太守)
만노군은 현재의 충북 진천군이다. 萬奴郡은 본래 고구려의 今勿奴郡(본서 권37 한산주조에는 今勿內郡으로 되어 있어 同音異寫인 듯하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6 鎭川條에는 『今勿奴郡 一名 萬奴郡 或云 首知 或云 新知』라고 기록하고 있다. 본서 권35 주석 27 참조)이다. 太守는 군의 행정관이다. 본서 권40 주석 252 참조.
[역주:41권31] 형혹성(熒惑星)
火星으로 이 별이 나타나면 전쟁이 일어나고 이 별이 없어지면 군사가 흩어진다고 믿어 왔다.
[역주:41권32] 진성(鎭星)
土星으로 그 1주기는 28년이다. 이는 『塡星』으로도 표기된다. 이 별은 ‘信’을 상징하며 이 별이 있는 곳에는 나라가 길하며 있지 않을 때에 있거나 이미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나라는 땅을 얻게된다고 설명하고 있다.(《史記》 권27 天官書 및 《漢書》 권26 天文志 塡星조 참조)
[역주:41권33] 서현이 경진일(庚辰日) 밤에 … 20개월만에 유신을 낳았다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庾信條에서는 본 기사와 다른 김유신의 탄생설화를 싣고 있다. 즉 보장왕에게 사형당한 卜術家 楸南이 고구려에 앙갚음하기 위하여 김유신으로 탄생하였다는 설이 실려 있고,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 및 같은 책 권2 萬波息笛條에는 33天의 하나가 신라에 내리어 유신이 되었다는 설이 실려 있다.
[역주:41권34] 건복(建福) 12년
진평왕 6년에 연호를 鴻濟에서 建福으로 고쳤으므로 건복 12년은 진평왕 17년(595)이다. 김유신전에서는 연대를 신라 독자의 연호로 기록하고 있다. 북한 번역본에는 건복이란 연호가 진평왕 원년부터 사용한 것으로 오해하고 건복 17년으로 고쳐 쓰고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역주:41권35] 개황(開皇)
隋나라 文帝의 연호. 581년으로부터 600년까지 20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1권36] 예기(禮記)에 … 이름을 짓지 않는다
《禮記》 曲禮 上篇에 이름짓는 법(取名之法)에 의하면 1. 國名 2. 日月名 3. 隱疾名 4. 山川名으로는 이름을 짓지 않는다는 기록이 있다(李基東, 〈歷史篇〉《韓國學基礎資料選集-古代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86쪽). 이병도본, 북한본, 이재호본에서는 ‘禮’를 『禮法』으로 번역하였고, 신호열본에서는 『禮經』으로 번역하였다.
[역주:41권37] 유신(庾信)
중국 北周 사람. 성은 庾. 이름은 信이다. 그는 동시대의 徐陵과 함께 詩文으로 이름났다. 후에 驃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 등의 중직을 역임하였으므로 ‘庾開府’로 통칭되었다. 문집으로 《庾子山集》을 남겼다. 《周書》 권41, 열전 33과 《北史》 권83 열전 71에 그의 전이 실려 있다.
[역주:41권38] 태령산(胎靈山)
현재의 충북 진천군 吉祥山. 진천읍 상계리에서 김유신이 태어났고 그 뒷산에 태를 묻었다고 하며, 이에는 당시에 축조된 태령산성이 있다. 신라 때에 이 산 아래에 사당을 건립하고 국행제를 지내왔다고 한다(《新增東國輿地勝覽》 권16 진천현조 참조).
[역주:41권39] 나이 15세에 화랑(花郞)이 되었는데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庾信條에서는 18세에 검술을 익혀 國仙이 되었다고 하였다. 화랑은 여러 명이 있었는데 국가에서 공인하는 화랑의 총대표를 국선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李基東, 《신라골품제사회와 화랑도》, 일조각, 1984), 국선은 후대의 기록이라는 설도 있다(三品彰英, 《新羅花郞の硏究》, 三省堂, 1943). 본서 권4 주석 141 참조.
[역주:41권40] 용화향도(龍華香徒)
화랑 김유신이 거느린 낭도집단의 명칭. 龍華란 먼 후일에 나타난다는 미륵불을 의미하며, 향도는 이를 신앙하는 신자 집단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를 해석하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1) 香徒는 본시 道·俗의 신앙단체로, 花郞徒와는 성질을 달리하나 郞徒 중에는 흔히 승려도 있고 또한 유신 자신도 가끔 佛神에게 燒香祈禱한 것으로 보아 佛敎 특히 護國佛敎信仰에 철저하였으므로 그의 徒衆을 그렇게 명명하였거나, 혹은 郞徒와 香徒가 모두 두레의 일종으로 혼동한 것인 듯하다는 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15쪽), 2) 彌勒을 받드는 徒衆으로 낭도집단이었다는 설(金祥基, 〈花郞과 彌勒信仰에 대하여〉, 《李弘稙紀念韓國史學論叢》, 1969: 《東方史論叢》, 1974, 60쪽; 이기동, 〈 역사편〉, 《韓國學基礎資料選集-古代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86쪽), 3) 香徒는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조직된 종교적인 結社였는데, 신라시대에는 花郞徒를 향도라고 하였고, 이 龍華香徒는 바로 金庾信이 영도하는 花郞徒의 이름이었다는 설(金哲埈·崔柄憲, 《史料로 본 韓國文化史》, 一志社, 1986, 197쪽), 4) 미륵불을 신앙하는 예불집단이라는 설(金煐泰, 〈彌勒仙花攷〉, 《佛敎學報》 3·4, 1966, 141쪽), 5) 신라에 있어 미륵존이 화랑도의 일종의 수호신처럼 숭배되고 있었던 설(三品彰英, 《新羅花郞の硏究》, 1943, 73쪽) 등이 있다.
[역주:41권41] 중악(中嶽)
신라에서 신성시한 산 중 중앙에 있는 산의 별칭. 경주시 西面 斷石山에 비정된다(鄭永鎬, 〈金庾信의 百濟 攻略路 硏究〉, 《史學誌》 6, 1972, 31∼32쪽; 金庠基, 〈花郞과 彌勒信仰에 대하여〉, 《東方史論叢》, 1974, 62∼64쪽).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 山川條에는 『斷石山 一云月生山 府西二十三里 諺傳 新羅金庾信 欲伐麗濟得神劒 隱入月生山石窟 鍊劒試斷大石 壘積如山 其石尙存 創寺其下 名曰 斷石』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통일 이전의 신라의 三山(奈歷·骨火·穴禮) 중 서쪽에 위치한 穴禮(淸道郡 鳥禮山)에 비정하는 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15쪽)도 있다.
본문의 中嶽과는 관계가 없으나 통일 이후의 五岳 가운데 中岳은 父岳(팔공산)이라 하였으나, 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영토의 확대 과정에 따라 새로이 정한 것이었다(李基白, 〈新羅五嶽의 成立과 그 意義〉,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205∼207쪽). 본서 권32 주석 44 참조.
[역주:41권42] 노인
이를 山神으로 보는 설이 있다. 산신의 古形은 女神인데 노인으로 나타난 것은 후대적인 산신개념에 따른 변모를 겪은 것이라 한다(조동일, 〈說話篇〉, 《韓國學基礎資料選集-古代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944쪽).
[역주:41권43] 열박산(咽薄山)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구 斗西面과 斗東面에 걸쳐 있는 열박재를 말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경주부 산천조에는 『咽薄山 在府南三十五里 諺傳金庾信携寶劍入深壑 燒香告天 祈禱兵法處』라고 하여 경주의 남쪽 35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음을 통하여 그 위치를 비정할 수 있다. ‘咽’자는 ‘인’, ‘연’, ‘열’의 세 가지 발음이 있는데, 이를 북한본, 이재호본에는 인박산으로 읽었으나 본서에서는 현재 이 지방에서 부르는 명칭에 따라 열박산으로 읽었다.
[역주:41권44] 천관(天官)
별 중에 큰 별을 말한다. 《史記》 권27 天官書에 실린 《索隱》의 註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천문에 5官이 있는데 官이라 함은 星官을 말한다. 이는 사람의 존비를 뜻하는 官位와 같다는 뜻에서 天官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道家의 三官神, 즉 天官·地官·水官 중의 하나로 보는 설도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17쪽).
[역주:41권45] 허성(虛星)
동양의 전통적인 별자리인 28宿 중 북방(玄武)에 있는 별자리. 이에는 두 개의 별이 있다. 이 별은 인간의 생명과 벼슬살이의 운명을 맡았다고 생각해 왔다.
[역주:41권46] 각성(角星)
28宿의 첫째 별자리. 동쪽 하늘에 있는데 오늘날 金星이다. 이 별은 인간의 형벌과 군사를 맡았다고 믿어왔다.
[역주:41권47] 임말리(任末里)
이곳에 단 한번 나오는 인명. 낭비성 전투에 대해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51년(629)조에서는 대장군 용춘·서현, 부장군 유신만이 나오며 任末里·白龍·大因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역주:41권48] 용춘(龍春)
太宗武烈王의 아버지. 진지왕의 아들. 진평왕의 사위. 龍樹라고도 한다. 진평왕 44년(622) 伊湌으로 內省의 私臣이 되어 大宮, 梁宮, 沙梁宮 三宮을 모두 관장하였으며, 선덕여왕대에 황룡사 9층탑을 창건할 때 이를 감독하였다(《三國遺事》 권4 塔像篇 皇龍寺九層塔條 참조). 후에 그의 아들인 김춘추가 왕위에 올라 文興大王으로 追贈되었다.
[역주:41권49] 낭비성(娘臂城)
현재의 충북 淸州市 上黨區 山城洞 소재 上黨山城. 충북 청원군 北二面 土城里와 光岩里 및 釜淵里의 경계에 있는 해발 250m의 산정에 위치한 산성(城周743m)을 백제의 娘子谷城 즉 낭비성(혹은 娘城, 臂城)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李元根, 〈百濟 娘臂城考〉, 《史學志》 10, 1976, 14쪽).
[역주:41권50] 중당당주(中幢幢主)
中幢의 부대장.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는다. 본서 권40 잡지 직관지 하에 실려 있는 仲幢은 문무왕 11년(671)에 설치되었다고 하였으므로 이와는 다른 부대로 생각된다. 아니면 본 열전의 대본이었던 金庾信行錄에서 잘못 기록된 것인지도 모른다.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51년(629)조의 기록에는 김유신의 이 당시 직함을 ‘副將軍’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주:41권51] 옷깃을 들면 … 그물이 펼쳐진다[振領而裘正 提綱而網張]
일을 풀어가는 데에 핵심을 잡는다는 뜻. 《宋史》 職官志의 『提綱而衆目張 振領而群毛理』를 수정한 문구로서 함축성이 더욱 높은 표현이다.
[역주:41권52] 들락날락하면서[出入]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평왕 51년(629)조의 기록에는 『三出三入』으로 표현되어 있다.
[역주:41권53] 선덕대왕 11년
仁平 9년(641)이다. 본서 권31 연표 하를 보면 동왕 3년에 仁平으로 개원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의 연호가 사용된 기간 중 김유신 열전에서 이 연대만을 연호를 쓰지 않고 왕의 재위 연대로 기록하고 있다. 신라에서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진덕왕 4년(650)부터이다.
[역주:41권54] 대량주(大梁州)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1년 8월조의 기록에는 大耶城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41권55] 춘추공(春秋公)
太宗武烈王의 이름에 붙인 존칭. 《三國遺事》 권1 紀異篇에서도 ‘太宗春秋公’으로 표제하였다. 이와 같은 예로는 《三國遺事》와 본서에서 김유신을 ‘庾信公’ 또는 ‘公’으로 표현한 것을 들 수 있다.
[역주:41권56] 고타소랑(古陀炤娘)
김춘추 딸의 이름. 남편은 品釋이고 대야성이 백제군에 함락될 때에 남편과 함께 죽었다.
[역주:41권57] 품석(品釋)
태종 무열왕의 사위.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642) 8월조에 관등이 伊湌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41권58] 따라 죽었다
본서 권47 열전 竹竹傳에는 대야성의 함락기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품석이 먼저 자신의 처자를 죽이고 자살하였다고 하였으며, 또한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장왕 2년(642)조에서는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백제장군 允忠이 죽였다고 달리 기록하고 있다.
[역주:41권59] 한으로 여겨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조의 기록에는 『춘추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하여 본 기사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주:41권60] 나는 공과 한 몸이고
이는 매부 처남 간의 사이를 가깝게 표현한 것이다.
[역주:41권61] 압량주(押梁州)
州의 治所는 현재의 경북 慶山市이다. 본서 권34 주석 253 참조.
[역주:41권62] 두사지(豆斯支)
이곳에 단 한번 나오는 인명. 代買縣人인 두사지는 김춘추 일행이 代買縣(현재의 위치 미상)에 도착했을 때 이미 京位 제8등급인 沙干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선덕왕 11년(642) 당시에 지방민인 두사지가 沙干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믿을 수는 없다. 오히려 두사지는 김춘추 일행에게 靑布 300步를 바친 공로에 의해서 나중에 사간을 수여받았다고 생각된다(이문기, 〈金石文資料를 통하여 본 新羅의 六部〉, 《역사교육논집》 2, 1981, 119쪽).
[역주:41권63] 청포(靑布) 300보(步)
청포는 명주를 말하며, 보는 길이의 단위이다. 1보는 중국에서는 8尺(《禮記》 王制편), 6尺, 5尺설이 있다. 고구려의 자는 1尺은 22.44cm인 漢나라 척이 사용되었으며, 신라와 백제에서는 35cm 내외의 東魏尺이 사용되었고, 통일신라에서는 唐尺을 사용하여 1자의 길이는 29.7cm임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이는 모두 현전하는 유적을 통한 것이므로 營造尺이라 할 수 있다. 통일신라에서는 1보 6척이 상용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李宇泰, 〈韓國古代의 尺度〉, 《泰東古典硏究》 창간호, 1984 참조). 삼국시대의 營造尺 이외에 量田尺이나 布帛尺이 영조척과 달랐는지 달랐다면 그 길이가 얼마였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5년(665)조에서는 『絹布 舊以十尋爲一匹 改以長七步廣二尺爲一匹』이라는 기록이 보여 포목 한 필은 10尋(80尺)이었다가 42척으로 줄인 것을 보여준다.
본 記事는 문무왕 이전이므로 300보는 1800척 220필이 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조선초 세종대의 포백척에 대한 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세종대의 布帛尺으로 三陟에 전하여지고 있던 자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46.73cm로 추정되고 있다. 세종대에는 도량형의 정비가 있었는데 생활에 실제로 사용된 자에는 營造尺, 布帛尺, 量田尺이 있었는데 각각의 길이가 달랐다. 자의 기준인 周尺 1척의 길이는 20∼22cm이다(朴興秀, 《度量衡과 國樂論叢》, 1980 참조).
[역주:41권64] 태대대로(太大對盧)
고구려 제1관등인 大對盧 위에 특별히 더 가한 직명이다. 대대로에 대하여는 본서 권40 주석 343 참조.
[역주:41권65] 개금(蓋金)
연개소문을 가리킨다. 금은 훈독하였을 것이다. 감교 원문편에서는 ‘盖’로 되어 있으나 이는 ‘蓋’의 속자이다. 본서 권49 주석 11 참조.
[역주:41권66] 마목현(麻木峴)
조령의 동북쪽 약 4km 지점에 위치하여 조령과 죽령 사이의 가장 낮은 지점에 해당되는 鷄立嶺으로서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4 延豊縣 山川條에서는 鷄立嶺이 俗云 麻骨岾이라 하였고, 본서 권45 열전 溫達傳에도 鷄立嶺과 竹嶺을 나란히 언급하고 있어 본 기사와 상통한다. 현재에도 鷄立嶺 주변에는 많은 성지가 남아 있어, 당시 계립령이 상당히 중요한 교통로의 하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주:41권67] 죽령(竹嶺)
태백산맥의 큰 고개길. 영주시와 단양군 사이의 고개길이다.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조에는 마목현은 언급치 않고 ‘竹嶺’만 기록하였다.
[역주:41권68] 거북과 토끼의 이야기[龜兎之說]
후대에 널리 알려진 동물담이 본서에 실려 있는 희귀한 예이다. 후대에는 소설 토끼전이나 판소리 수궁가로 전해지면서 더욱 많은 변모를 겪었다(조동일, 〈설화편〉, 《韓國學基礎資料選集-古代篇-》,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969쪽).
이 설화는 釋迦의 前生譚인 쟈타카(Jataka) 本生譚에 수록되어 있는 『鶴과 蟹의 이야기』 혹은 『용과 원숭이의 이야기』에서 파생된 것으로 후대 토끼타령, 鼈主簿傳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은 이미 정설로 되어 있다(尹榮玉,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攷〉, 《東洋文化》 14·15 합집, 1974, 13쪽).
[역주:41권69] 토끼의 간을 얻어
이 이야기는 佛經에도 수록되어 있다. 인도에서는 악어의 아내가 원숭이의 간을 먹고 싶다고 했고, 六度集經 등의 불경 漢譯에서는 악어가 자라로 바뀌었다(印權煥, 〈토끼傳 根源說話硏究〉, 《亞細亞硏究》 25, 1976). 일본에서는 토끼 대신 원숭이가 등장한다. 같은 유형이 후대에는 소설 토끼傳, 판소리 수궁가 등으로 개작되었는데, 거북이 자라로 바뀌고, 용왕의 딸이 아닌 용왕 자신이 병들었다고 한 점이 달라졌다(조동일, 앞의 글 〈설화편〉, 969쪽).
[역주:41권70] 바다 가운데 섬 하나가 있는데
이는 설화적인 내용으로 어느 섬을 지칭하는 지는 알 수 없다.
[역주:41권71] 용감한 군사 3천 명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642)조에는 『결사대 1만 명』으로 나온다.
[역주:41권72] 만 번 죽고 겨우 한 번 살 수 있는[萬死一生]
거의 살아 남을 수 없는 대단히 위험한 상황을 말한다. 《文選》에 실린 司馬遷의 報任少卿書에 『夫人臣出萬死不願一生之計 赴國家之難』과 《後漢書》 권19 열전 제9 耿恭傳 『出於萬死一生之望』, 《史記》 권89 열전 제29 張耳陳餘傳 『將軍瞋目張膽 出萬死不願一生之計』 등에 보인다.
[역주:41권73] 본기(本記)
‘記’자는 言자 획만 보이나 이는 좌측으로 편중되어 있어 ‘記’자로 봄이 타당하다. 이병도는 이 자를 ‘書’자의 오각으로 보았고, 李康來는 이를 ‘記’로 석독하였다(이강래, 〈三國史記 分註의 性格-新羅本紀를 중심으로-〉, 《全南史學》 3, 1989, 30쪽). 그리고 이 本記는 《三國遺事》에 인용된 《國史》의 本記와 같다고 하는 설과 《舊三國史》의 본기를 의미한다는 설이 있다(김석형, 〈구삼국사와 삼국사기〉, 《력사과학》, 1981 4호 및 정구복, 〈고려초기 三國史의 편찬에 대한 일고〉, 《國史館論叢》 45, 1995).
[역주:41권74] 진평왕 12년
이는 선덕왕 11년(642)의 誤記이다.
[역주:41권75] 같은 사건이나 내용이 조금 다르다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642)조에는 춘추가 본국 왕에게 몰래 소식을 전하여 왕이 유신으로 하여금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그 군대가 한강을 이미 넘어 고구려 국경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돌려보냈다고 하여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역주:41권76] 상장군으로 삼아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3년(644)조에는 ‘大將軍’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주:41권77] 가혜성(加兮城)
여기에 처음으로 나오는 지명으로 현재의 경북 고령군 우곡면이다. 본서 권34 주석 415 및 416 참조.
[역주:41권78] 성열성(省熱城)
여기에 처음으로 나오는 지명으로 현재의 경남 의령군 부림면 신반리로 추정한다. 성열은 본서 권34 잡지 지리1의 江陽郡 宜桑縣의 古名인 辛爾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본서 권32 잡지 악지 악조에 우륵을 省熱縣人이라 하였다. 본서 권42 주석 425, 426 참조.
[역주:41권79] 동화성(同火城)
여기에 처음으로 나오는 지명으로 현재의 경북 구미시 인의동 일대(舊 漆谷郡 仁同面)이다. 본서 권34 잡지 지리1의 星山郡 壽同縣의 古名이 斯同火이다. 이는 본서 권4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 10월조에 보이는 桐岑城과 같은 곳이 아닌가 한다. 본서 권34 주석 431, 432. 권37의 주석 322 참조.
[역주:41권80] 가혜진(加兮津)
이는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高靈縣 開山江 加勿倉津인 듯하다. 이는 현재의 경북 高靈郡 牛谷面 桃津洞일대를 가리키는 듯하다.
[역주:41권81] 매리포성(買利浦城)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7 靈山縣 山川條에 買浦津이 있는데, 이는 縣南 23里 지점에 있다고 한다. 《大東輿地圖》에 나와 있는 買浦의 위치로 보아, 買利浦城은 지금의 南海大橋가 지나는 咸安郡 漆西面 龍城里 부근에 있었던 듯하다. 현재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金泰植,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交涉과 征服〉, 《百濟의 中央과 地方》, 忠南大學校百濟硏究所, 1997, 65쪽).
[역주:41권82] 봉인(封人)
국경을 수비하는 관리를 말한다.
[역주:41권83] 상주(上州)
신라가 경주일원에서 벗어나 영토를 현재의 경상도 지역인 서북 서남지역으로 확장하면서 서북지역에 설치한 행정구역이다. 진흥왕대에 上州와 下州를 설치하였다. 〈창녕신라진흥왕척경비〉에서는 상주와 하주의 행정책임자로 行使大等의 직이 보이고 있다. 문무왕 5년 上·下州를 나누어 삽량주를 만들 때까지 그 명칭은 존속한 듯하다. 上州의 治所는 지금의 경북 尙州이다.
[역주:41권84] 3월에 돌아와 … 복명하고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4년(645)조에는 이 부분이 빠져있다.
[역주:41권85] 미음[漿水]
이를 북한본에서는 ‘슝늉’으로 번역하였고, 이재호본과 신호열본에서는 ‘장수’, 이병도본에서는 ‘장물’로 번역하였다.
[역주:41권86] 유신이 … “우리 집 물은 옛 맛 그대로구나!”라고 하였다
이는 열전에만 보이는 기록이다.
[역주:41권87] 비담(毗曇)
선덕왕대의 인물. 선덕왕 14년에 이찬으로서 상대등 직에 있었다. 선덕왕 16년(647)에 염종과 함께 선덕왕을 축출하는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점령할 뻔 하였으나 김유신군에 의하여 진압되어 처형되었다.
[역주:41권88] 염종(廉宗)
관등과 직책은 알 수 없다. 비담의 난에 참여한 중심인물이었다. 본서 권5 신라본기 善德王 16년조에 여자 임금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고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단지 화백회의의 구성원인 대등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역주:41권89] 여자 임금[女主]
女王을 낮추어 칭한 말. 《東國通鑑》 등에서는 善德女主, 眞德女主라고 써서 폄하하였다.
[역주:41권90]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 왕을 폐하려 하니
이 난은 선덕왕의 임종 직전에 일어나 10일 만에 김유신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비담의 난의 성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여러 학설이 있다. 1)상대등의 왕위추대운동이라는 설과(이기백,〈상대등고〉,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101쪽), 2) 화백회의의 국왕에 대한 퇴위요구에 김유신 등이 여왕을 옹립함으로서 발단된 것으로 선덕여왕측이 일으킨 것이라는 설(井上秀雄, 《新羅史基礎硏究》, 1974, 440∼441쪽), 3) 나물왕계의 씨족회의의 결의 즉 선덕여왕의 폐위 내지는 비담의 국왕추대에 불만을 품은 가야 출신 김유신이 선덕여왕을 옹호함으로서 일어난 것이라는 설(李基東,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1984, 84쪽), 4) 권력의 핵에서 밀려난 銅輪系의 반진지왕계 운동이라는 설(申瑩植, 〈武烈王權의 成立과 活動〉, 《韓國史論叢》 2, 1977: 《韓國古代史의 新硏究》, 1984, 116쪽), 5) 여왕이 재위하여 이웃 나라의 침입을 자주 받음으로써 선덕왕의 임종에 즈음하여 진덕여왕이 후계자로 정해진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는 설(朱甫暾, 〈毗曇의 亂과 善德王代 政治運營〉, 《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상-고대편·고려시대편, 1994, 214∼5쪽) 등이 있다.
[역주:41권91] 명활성(明活城)
현재 경북 경주시 보문단지 남쪽 천군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 내성은 석축이며 나성은 토축이다. 둘레는 약 6,000m. 왜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으로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다고 한 점에서 그 이전에 쌓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눌지왕 15년(431)에 왜인이 이 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자비왕 16년(473) 7월에 이 산성을 개수하였고, 동왕 18년(475)부터 소지왕10년(488)까지 국왕이 이에 거처하였다. 진흥왕 15년(554)에 다시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906보였다. 진평왕 15년(593)에 다시 개축하였는데 둘레가 3,000보였다. 1988년 慶州 明活山城碑가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이것은 진흥왕 12년(551)의 개축시에 세워진 비석으로 알려지고 있다(閔德植, 〈신라의 경주 명활산성비에 대한 고찰〉, 《東方學志》 74, 1992 참조).
[역주:41권92] 월성(月城)
신라의 궁성. 현재 경북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토성이다. 半月城, 新月城이라고도 한다. 또는 왕이 계시는 곳이라 하여 在城이라고도 하였다. 둘레는 1,423보 2,400m이고 동서 길이 900m 남북 길이 260m이다. 파사왕 22년(101)에 이를 쌓아 금성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겼다. 유례왕 7년(290) 홍수로 성이 무너져 이듬 해에 보수했으며 소지왕 9년(487)에 왕이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역주:41권93] 한밤 중[丙夜]
삼경을 甲, 乙, 丙, 丁, 戊의 五夜로 나눈 것 중의 세번째 시간, 즉 하오 11시부터 다음날 상오 1시까지를 말한다.
[역주:41권94] 여왕[女主]
여자인 군주를 폄하하여 지칭한 것이다. 본서 신라본기에는 ‘女主’라던가 ‘女王’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남자 왕과 같이 모두 某王으로 칭하였다.
[역주:41권95] 붉은 새[赤雀]
赤雀은 鳳凰이다. 《詩經》 大雅篇 文王序의 주석에서는 봉황의 새끼라고 하였다.
[역주:41권96] 기린을 얻다[獲麟]
麒麟은 어진 동물로 성스러운 임금대에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春秋》 魯나라 哀公 14년 봄에 『西狩獲麟』이라 썼다. 공자는 이제 周運이 쇠하였다 탄식하고 여기에서 《春秋》의 집필을 끝냈다.
[역주:41권97] 장끼[雉雊]가 울었어도
雊는 장끼 울음을 말한다. 이는 불길함을 말한다. 《書經》 高宗 肜日篇에 『雉至鼎耳而鳴』이라 하였다.
[역주:41권98] 용이 싸웠으나
春秋時代의 鄭國에 홍수가 났을 때에 龍이 時門 밖의 洧淵에서 격투를 하자, 國人들이 이를 잡아 맬 것을 청하자 子産이 이를 허락치 않고 말하기를, ‘우리가 싸울 때에 용이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용이 싸우는데 우리가 관여하랴’ 하였다(《春秋左氏傳》 昭公 19년).
[역주:41권99] 자연의 이치[天道]
‘天道’를 직역하면 하늘의 도리이지만 이는 자연의 섭리를 말한다.
[역주:41권100] 9족(族)
고조, 증조, 조, 부, 본인 아들, 손자, 증손, 현손까지를 말하기도 하고, 또는 父族의 넷, 즉 고모의 자녀, 자매의 자녀, 딸의 자녀, 본인의 자녀와 모족의 셋, 즉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모의 자녀, 처족의 둘 즉 장인, 장모를 말하기도 한다. 신라사회가 본족중심의 혈통사회가 아니었음으로써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역주:41권101] 9족(族)을 죽였다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원년(647)조에는 사형에 처하여진 자가 30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비담의 9족만이 아니라 난에 참가한 자의 숫자를 의미한 듯하므로 실제로 9족이 문자 그대로 처형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역주:41권102] 비령자(丕寧子)
신라 선덕여왕, 진덕여왕대의 장수. 백제와의 茂山城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본서 권47 열전에 그의 傳이 있다. 자세한 것은 권47 주석 72 참조.
[역주:41권103] 집종[家奴]
후대의 私奴을 의미한다. 본서 권47 열전 丕寧子傳에서는 ‘奴’로 표현하고 있다.
[역주:41권104] 진덕왕 태화(太和) 원년
태화는 신라 진덕왕대의 연호. 본서 권5 신라본기에서는 진덕왕 원년(647)에 개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본서의 권31 연표 하와 《三國遺事》 왕력에서는 眞德王 2년(648)에 개원한 것으로 되어 있어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본 열전에서는 태화 원년이 무신년으로 기록하여 진덕왕 2년의 개원설을 따르고 있으며 신라본기의 서술이 잘못인 듯하다. 이 연호는 진덕왕 4년(650)에 중국 연호인 永徽를 공식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폐지되었다.
[역주:41권105] 장군 소정방에게 …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 때(648) 唐 太宗은 金春秋의 請에 겉으로 허락하였을 뿐이고, 蘇定方에게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정작 蘇定方에게 출동령을 내린 것은 다음 高宗 顯慶 5년(660)이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21쪽).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2년(648)에서는 군사출동의 약속을 받았다고 쓰여 있을 뿐이다. 따라서 『소정방에게 명하여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역주:41권106] 주(紂)
폭군으로 유명한 殷나라 마지막 왕. 帝乙의 아들로 말재주가 뛰어났고, 듣고 봄이 매우 민첩하였으며, 재주와 힘이 보통이 아니어서 맨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을 정도이었다. 지식은 능히 간함을 거절할 수 있을 정도였고, 말은 자기의 잘못을 꾸며댈 수 있었다. 음탕한 음악을 좋아하고 부인을 사랑하여 妲己의 말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었다. 세금을 많이 거두어 유락비용에 썼고, 사치에 빠져 백성이 원망하고 제후가 반란을 일으키자 불에 지지는 가혹한 형벌을 가하였다.(《史記》 권3 殷本紀 참조)
[역주:41권107] 주(周)나라의 10명의 신하가 …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書經》 泰誓篇에 周나라 武王이 ‘殷의 紂는 億兆의 사람이 있으나 그들은 離心離德이요, 나는 亂臣 10人이 있는데, 마음을 같이하고 덕을 같이한다’라는 글에서 나온 말이다. 이 때의 ‘亂’자는 어지러움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이른바 난신 10인은 周公旦, 召公奭, 太公望, 畢公, 榮公, 太顚, 閎夭, 散先生, 南宮适, 邑姜으로 전해진다.
[역주:41권108] 대량성(大梁城)
현재의 경북 합천군에 있던 성. 본서 권34 주석 418번 참조. 본서 권5 신라본기 선덕왕 11년조에는 大耶城으로 되어 있다.
[역주:41권109] 옥문곡(玉門谷)
이는 전후의 전투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현재의 경북 합천군 伽倻面 舊源里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다(金泰植, 앞의 논문 〈百濟의 加耶地域 關係史〉, 79쪽). 《三國遺事》 권1 紀異篇의 善德王知幾三事條에 나오는 女根谷은 본서에서는 옥문곡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본서 권5 선덕왕 5년(636)조의 신라의 장군 閼川과 弼呑이 백제의 장군 于召를 격파한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경주시 건천면의 옥문곡은 여러 가지 상황으로 보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곳에서의 전투는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8년(648) 4월조에 나오고 있다.
[역주:41권110] 목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1천 명[級]
秦나라에서 적병 1명의 머리를 잘라오면 벼슬 한 등급을 올려 준 데에서 ‘級’이 목을 벤 자의 숫자라는 뜻이 유래하였다. 『斬首數級』이라고 한 용례가 그것이다. 그러나 본서에서 사용된 ‘級’자 만을 가지고 모두 참수하였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斬獲’은 ‘斬首’와 ‘生獲’을 포함한 것으로 판단된다.
[역주:41권111] 군주(軍主) 품석
軍主는 주의 장관. 품석은 김춘추의 사위. 당시의 관등은 이찬이었다. 품석은 大耶州城 군주로 선덕왕 11년(642) 8월 백제의 침입을 받았을 때 처자와 함께 항복하였는데 백제 장군 允忠이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잘라 왕도(부여)에 가져갔다.
[역주:41권112]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
원문은 『狐豹首丘山』으로 여기서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심정을 말한 것이다. 《禮記》 檀弓上에 『樂樂其所自生 禮不忘其本 古文人有言曰 狐死正首丘仁也』라 하였다.
[역주:41권113] 한 잎이 떨어지는 … 보탬될 바 없다[一葉落 茂林無所損 一塵集 大山無所增]
이는 김유신이 처음으로 말한 격언인 듯하다.
[역주:41권114] 진례성(進禮城)
현재의 충남 錦山지방. 본래 백제의 進仍乙郡이었다(본서 권36 주석 142 참조). 進禮城은 신라본기 경명왕 4년조에 다시 보이는데 이때의 진례성은 지금의 김해지방에 있었던 곳이다(《新增東國輿地勝覽》 권32 金海都護府 古跡條 참조). (나말의 진례성에 대해서는 池內宏, 〈新羅末の進禮城に就いて〉, 《東洋學報》 7, 1917과 金侖禹, 〈新羅末의 仇史城과 進禮城考〉, 《史學誌》 22, 198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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