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傳 第三 金庾信 [下]
列傳 第三 金庾信 下
子三光·元述·孫允中·允文·玄孫巖 ※
附
子三光·元述·孫允中·允文·玄孫巖 ※
附
麟德元年甲子三 ※月 百濟餘衆 又聚泗沘城反叛 熊州都督發所管兵士攻之 累日霧塞 不辨人物 是故不能戰 使伯山來告之 庾信授之陰謀 以克之
麟德二年 高宗遣使梁冬碧·任智高等來聘 兼冊庾信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 乾封元年 皇帝勑召庾信長子大阿湌三光 爲左武衛翊府中郞將 仍令宿衛
摠章元年戊辰 唐高宗皇帝 遣英國公李勣 興師伐高句麗 遂徵兵於我 文武大王 欲出兵應之 遂命欽純·仁問爲將軍 欽純告王曰 “若不與庾信同行 恐有後悔” 王曰 “公等三臣 國之寶也 若摠向敵場 儻有不虞之事 而不得歸 則其如國何 故欲留庾信守國 則隱然若長城 終無憂矣” 欽純 庾信之弟 仁問 庾信之外甥 故尊事之 不敢抗 至是告庾信曰 “吾等不材 今從大王 就不測之地 爲之奈何 願有所指誨” 答曰 “夫爲將者 作國之干城 君之爪牙 決勝否於矢石之間 必上得天道 下得地理 中得人心 然後可得成功 今我國以忠信而存 百濟以慠慢而亡 高句麗以驕滿而殆 今若以我之直 擊彼之曲 可以得志 況憑大國 明天子之威稜哉 往矣勉焉 無墮乃事” 二公拜曰 “奉以周旋 不敢失墮”
文武大王旣與英公 破平壤 還到南漢州 謂羣臣曰 “昔者百濟明襛王在古利山 謀侵我國 庾信之祖武力角干 爲將逆擊之 乘勝俘其王及宰相四人與士卒 以折其衝 又其父舒玄 爲良州摠管 屢與百濟戰 挫其銳 使不得犯境 故邊民安農桑之業 君臣無宵旰之憂 今庾信承祖考之業 爲社稷之臣 出將入相 功績茂焉 若不倚賴公之一門 國之興亡未可知也 其於職賞 宜如何也” 羣臣曰 “誠如王旨” 於是 授太大舒發翰之職 食邑五百戶 仍賜輿杖 上殿不趨 其諸寮 ※佐 各賜位一級
摠章元年 唐皇帝 旣策英公之功 遂遣使宣慰 濟師助戰 兼賜金帛 亦授詔書於庾信 以褒奬之 且諭入朝 而不果行 其詔書傳於家 至五世孫失 ※焉
咸寧 ※四年癸酉 是文武大王十三年 春 妖星見 地震 大王憂之 庾信進曰 “今之變異 厄在老臣 非國家之災也 王請勿憂” 大王曰 “若此則寡人所甚憂也” 命有司祈禳之 夏六月 人或見戎服持兵器數十人 自庾信宅泣而去 俄而不見 庾信聞之曰 “此必陰兵護我者 見我福盡 是以去 吾其死矣” 後旬有餘日 寢疾 大王親臨慰問 庾信曰 “臣願竭股肱之力 以奉元首 而犬馬之疾至此 今日之後 不復再見龍顔矣” 大王泣曰 “寡人之有卿 如魚有水 若有不可諱 其如人民何 其如社稷何” 庾信對曰 “臣愚不肖 豈能有益於國家 所幸者 明上用之不疑 任之勿貳 故得攀附王明 成尺寸功 三韓爲一家 百姓無二心 雖未至太 ※平 亦可謂小康 臣觀自古繼體之君 靡不有初 鮮克有終 累世功績 一朝隳廢 甚可痛也 伏願殿下知成功之不易 念守成之亦難 疏遠小人 親近君子 使朝廷和於上 民物安於下 禍亂不作 基業無窮 則臣死且無憾” 王泣而受之
至秋七月一日 薨于私第之正寢 享年七十有九 大王聞訃震慟 贈賻彩帛一千匹·租二千石 以供喪事 給軍樂鼓吹一百人 出葬于金山原 命有司立碑 以紀功名 又定入民戶 以守墓焉
妻智炤夫人 太宗大王第三女也 生子五人 長曰三光伊湌 次元述蘇判 次元貞海干 次長耳大阿湌 次元望大阿湌 女子四人 又庶子軍勝阿湌 失其母姓氏 後智炤夫人 落髮衣褐 爲比丘尼 時大王謂夫人曰 “今中外平安 君臣高枕而無憂者 是太大角干之賜也 惟夫人宜其室家 儆誡相成 陰功茂焉 寡人欲報之德 未嘗一日忘于心 其餽南城租每年一千石” 後興德大王封公爲興武大王
初法敏王 納高句麗叛衆 又據百濟故地有之 唐高宗大怒 遣師來討 唐軍與靺鞨 營於石門之野 王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 營於帶方之野 時 長槍幢獨別營 遇唐兵三千餘人 捉送大將軍之營 於是諸幢共言 “長槍營獨處成功 必得厚賞 吾等不宜屯聚 徒自勞耳” 遂各別兵分散 唐兵與靺鞨 乘其未陣擊之 吾人大敗 將軍曉川·義文等死之
庾信子元述爲裨將 亦欲戰死 其佐淡凌止之曰 “大丈夫 非死之難 處死之爲難也 若死而無成 不若生而圖後效” 答曰 ※ “男兒不苟生 將何面目以見吾父乎” 便欲策馬而走 淡凌攬轡不放 遂不能死 隨上將軍出蕪荑嶺 唐兵追及之 居烈州大監阿珍含一吉干 謂上將軍曰 “公等努力速去 吾年已七十 能得幾時活也 此時是吾死日也” 便橫戟突陣而死 其子亦隨而死 大將軍等 微行入京
大王聞之 問庾信曰 “軍敗如此 奈何” 對曰 “唐人之謀 不可測也 宜使將卒各守要害 但元述不惟辱王命 而亦負家訓 可斬也” 大王曰 “元述裨將 不可獨施重刑” 乃赦之 元述慙懼 不敢見父 隱遁於田園 至父薨後 求見母氏 母氏曰 “婦人有三從之義 今旣寡矣 宜從於子 若元述者 旣不得爲子於先君 吾焉得爲其母乎” 遂不見之 元述慟哭擗踴而不能去 夫人終不見焉 元述嘆曰 “爲淡凌所誤 至於此極” 乃入太 ※伯山
至乙亥年 唐兵來 攻買蘇川城 元述聞之 欲死之 以雪前恥 遂力戰有功賞 以不容於父母 憤恨不仕 以終其身
嫡孫允中 仕聖德大王 爲大阿湌 屢承恩顧 王之親屬 頗嫉妬之 時屬仲秋之望 王登月城岑頭眺望 乃與侍從官 置酒以娛 命喚允中 有諫者曰 “今宗室戚里 豈無好人 而獨召疎遠之臣 豈所謂親親者乎” 王曰 “今寡人與卿等 安平無事者 允中祖之德也 若如公言 忘棄 ※之 則非善善及子孫之義也” 遂賜允中密坐 言及其祖平生 日晩告退 賜絶影山馬一匹 羣臣觖望而已
開元二十一年 大唐遣使敎諭 ※曰 “靺鞨渤海 外稱蕃翰 內懷狡猾 今欲出兵問罪 卿亦發兵 相爲掎角 聞有舊將金庾信孫允中在 須差此人爲將” 仍賜允中金帛若干 於是大王命允中·弟允文等四將軍 率兵會唐兵 伐渤海
允中庶孫巖 性聰敏 好習方術 少壯爲伊湌 入唐宿衛 間就師 學陰陽家法 聞一隅 則反之以三隅 自述遁甲立成之法 呈於其師 師憮 ※然曰 “不圖吾子之明 達至於此也” 從是而後 不敢以弟子待之 大曆中還國 爲司天大博士 歷良·康·漢三州太 ※守 復爲執事侍郞·浿江鎭頭上 所至盡心撫字 三務之餘 敎之以六陣兵法 人皆便之 嘗有蝗蟲 自西入浿江之界 蠢然蔽野 百姓憂懼 巖登山頂 焚香祈天 忽風雨大作 蝗蟲盡死 大曆十四年己未 受命聘日本國 其國王 知其賢 欲勒留之 會大唐使臣高鶴林來 相見甚懽 倭人認巖爲大國所知 故不敢留乃還 夏四月 旋風坌起 自庾信墓 至始祖大王之陵 塵霧暗冥 不辨人物 守陵人聞其中若有哭泣悲嘆之聲 惠恭大王 聞之恐懼 遣大臣 ※ 致祭謝過 仍於鷲仙寺 納田三十結 以資冥福 是寺 庾信平麗·濟二國 所營立也
庾信玄孫新羅執事郞長淸 作行錄十卷 行於世 頗多釀辭 故刪落之 取其可書者 爲之傳
【論曰】 唐李絳對憲宗曰 “遠邪佞 ※ 進忠直 與大臣言 敬而信 無使小人參焉 與賢者遊 親而禮 無使不肖預焉” 誠哉 斯言也 實爲君之要道也 故書曰 『任賢勿貳 去邪勿疑』 觀夫新羅之待庾信也 親近而無間 委任而不貳 謀行言聽 不使怨乎不以 可謂得六五童蒙之吉 故庾信得以行其志 與上國協謀 合三土爲一家 能以功名終焉 雖有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 微中國之書 則泯滅而無聞 若庾信 則鄕人稱頌之 至今不亡 士大夫知之可也 至於蒭童牧豎 亦能知之 則其爲人也 必有以異於人矣
[교주:43권1] 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檢校太師守太保 門下侍中判尙書吏禮部事 集賢殿大學士 監修國史 上柱國 致仕 臣 金富軾 奉
「輸忠定難…金富軾奉」, 原本 缺刻. 本書 目錄에 의거 보충.
[교주:43권2] 金
原本 缺刻. 本書 卷41에 의거 보충.
[교주:43권3] 子三光·元述·孫允中·允文·玄孫巖
「子三光…附」, 原本 缺刻. 本書 目錄에 의거 보충.
[교주:43권4] 三
「甲子三」, 原本 缺刻. 本書 卷6 文武王 4年條와 三國史節要에 의거 보충. 榮·烈 「春三」.
[교주:43권5] 寮
原本 「察」. 文意로 보아 수정. 鑄字本 「察」.
[교주:43권6] 失
原本 「去」.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3권7] 寧
燾 「寧(亨)」.
[교주:43권8] 太
原本 「大」.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3권9] 曰
原本 「田」. 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3권10] 太
原本 「大」. 文意로 보아 수정. 三國史節要(卷10-45面)·鑄字本 「大」. 榮·朝·權·烈 「大」.
[교주:43권11] 棄
原本 「弃」. 「棄」의 古字.
[교주:43권12] 諭
原本 「翰」. 鑄字本에 의거 수정. 北 「翰(諭)」, 舜 「論」.
[교주:43권13] 憮
原本 「撫」. 三國史節要(卷12-27面)에 의거 수정.
[교주:43권14] 太
原本 「大」.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교주:43권15] 臣
三國史節要(卷12-28面)에는 「金敬信」 추가.
[교주:43권16] 佞
原本 「侫」. 「佞」의 俗字.
[역주:43권1] 인덕(麟德)
唐 高宗의 연호. 664∼665의 2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3권2] 은밀한 모책(謀策)
김유신의 지혜가 출중함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에서 수식된 문장인 듯하다.
[역주:43권3] 건봉(乾封)
唐 高宗의 연호. 666∼667년의 2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3권4] 대아찬(大阿湌)
신라의 제5등의 관등. 본서 권38 주석 15 참조.
[역주:43권5] 삼광(三光)
김유신의 장남으로 666년에 당나라 숙위학생으로 들어갔다가 2년 후에 돌아왔다. 같은 해의 기록인 본서 권6 문무왕 6년조(666)에서는 그의 관등급을 奈麻(제11등)로 기록하고 있어 본전의 기록과 다르다. 그런데 2년 후의 문무왕 8년(668) 6월 12일에 숙위학생인 沙湌(제8등) 三光이 당나라 장수 유인궤를 따라 당나라 고종의 고구려정벌 칙지를 가지고 당항진에 도착하였다. 신문왕 3년(683)에 파진찬에 올랐고, 뒤에 이찬에까지 올랐다. 본서 권47, 裂起전에 執政 官僚로 언급되어 있다(신형식, 〈김유신가문의 성립과 활동〉, 《梨花史學硏究》 13·14 합집, 1983).
[역주:43권6]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
?∼669. 당나라의 장수. 河北省 離狐人. 자는 懋功, 본성은 徐氏, 수나라 말에 李密에 붙었다가 武德初年(620)경에 자기의 소속 군현의 호구를 들어 당나라 고조에 투항하자 高祖는 純臣이라 칭하고 黎州(현재의 중국 泗川省) 漢源縣을 摠管하게 하고 英國公에 봉하고 李姓을 하사하였다. 특히 乾封원년(667) 80세의 노장으로 요동대총관에 임명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킴에 큰 공을 세웠다.(《新唐書》 권98 열전18 및 《舊唐書》 권67 열전17 李勣傳 참조)
[역주:43권7] 공등(公等) 세 신하
金庾信과 金欽純, 金仁問을 말한다. 문무왕 8년 6월 21일에 김유신은 대당대총관에 김흠순, 김인문은 대당총관에 임명되었다.
[역주:43권8] 영공(英公)
英國公 李勣을 말한다.
[역주:43권9] 남한주(南漢州)
漢山州를 지칭한다. 치소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었다. 이는 신라본기에는 보이지 않는 명칭이다.
[역주:43권10] 고리산(古利山)
충북 沃川의 環山이다(정영호, 〈金庾信의 백제공격로 연구〉, 《사학지》 6, 1972, 50쪽).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에는 管山城으로 나온다.
[역주:43권11]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
太大角干이라고도 한다. 본서 권38 주석 40 참조.
[역주:43권12] 함녕(咸寧) 4년
咸寧은 당 고종의 연호인 咸亨(670∼673)을 지칭한다. ‘亨’자는 고려 靖宗의 諱이므로 피휘하기 위하여 ‘亨’자를 ‘寧’자로 代字한 것이다(鄭求福, 〈高麗朝의 避諱法에 관한 연구〉, 《李基白先生古稀紀念 韓國史學論叢》 상, 1994, 661쪽 참조).
[역주:43권13] 음병(陰兵)
神兵을 말하는 것으로 설화적인 내용이다. 음병의 이야기는 《三國遺事》 권1 紀異篇의 味鄒王 竹葉軍조에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는 ‘異兵’으로 표현되었고 『乃知先王陰隲有功』이라는 설명도 보인다.
[역주:43권14] 어른[元首]
왕을 의미한다.
[역주:43권15] 견마(犬馬)
신하 자신을 칭한 겸사이다.
[역주:43권16] 등용하여 … 의심치 않으셨기[用之不疑 任之勿貳]
이는 《書經》 권2 大禹謨章에 나오는 『任賢勿貳 去邪勿疑』라는 전고를 약간 변형한 것이다.
[역주:43권17] 삼한(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3국을 통일한 것을 말한다. 삼국을 三韓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자료이다. 이 무렵 이런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로는 神文王 6년(686)에 세워진 청주시 〈운천동사적비〉를 들 수 있다(盧泰敦, 〈三韓에 대한 認識의 變遷〉, 《韓國史硏究》 38, 1982, 137∼138쪽 참조).
[역주:43권18] 처음에는 정치를 …잘 마치는 이는 드물었습니다[靡不有初 鮮克有終]
《詩經》 권18 湯章에서 나온 말이다.
[역주:43권19] 금산원(金山原)
慶州市 忠孝洞에 있는 松花山으로 비정된다(朴日薰, 〈金庾信墓와 金仁問墓〉, 《考古美術》 9-11호, 1968, 484∼485쪽). 그러나 이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이병도, 〈金庾信墓考〉, 《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文集》 및 《國譯 三國史記》, 637쪽).
[역주:43권20] 민호(民戶)를 고정 배치하여 묘를 지키게 하였다
이는 신라에서도 守墓人 제도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고구려에서는 明臨荅夫가 죽자 그의 묘를 지키는 수묘인을 20호를 두었고(본서 권16 고구려본기 신대왕 15년), 〈광개토대왕릉비〉에 역대 왕릉과 자신의 능에 수묘인을 둔 사실이 보이고 있다(김현숙, 〈광개토왕비를 통해 본 고구려 수묘인의 사회적 성격〉, 《한국사연구》 65, 1989 참조).
[역주:43권21] 해간(海干)
신라의 제4관등인 波珍湌을 말한다. 본서 권38 주석 14번 참조
[역주:43권22] 군승(軍勝)
김유신의 庶子. 그 어머니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역주:43권23] 태대각간
신라의 非常位의 하나. 太大舒發翰이라고도 하였다. 본서 권38 주석 38 참조. 김유신에게 이 관등이 주어진 것을 신라본기에서는 문무왕 8년(668) 12월 22일에 주어졌다고 기록하였고 열전에서는 이때에 식읍 500호를 주었다는 기록이 더 쓰여 있다.
[역주:43권24] 남성(南城)
이는 남산성을 지칭하며 南山新城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에는 전국의 조세를 거두어 비축하는 창고가 있었던 듯하다.
[역주:43권25] 흥덕대왕(興德大王)
신라의 제42대 왕. 826년∼836년 재위하였다. 본서 권10 주석 105 참조.
[역주:43권26] 흥무대왕(興武大王)
김유신에게 추봉된 왕호.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庾信조에는 제54대 경명왕(917∼924) 때에 추봉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본서 신라본기에는 기록이 없으며 열전의 흥덕왕대로 기록한 것이 옳은 듯하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37쪽).
김유신을 흥무대왕에 책봉한 것은 그 후손들이 혜공왕 6년(770)에 사회적 불만으로 金融의 난에까지 가담하였다가 처형되었으나 신원운동에 의하여 신원되고 그의 가계가 다시 대두하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처사는 中代에 있어서의 무열왕계의 전제주의적 경향과는 판이한 일이다. 신라 下代에 있어서 귀족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어 귀족연합 혹은 귀족연립적인 사회를 이룬 예의 하나이다(이기백, 〈신라 혜공왕대의 정치적 변혁〉, 《사회과학》 2, 1958: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한 것은 갈문왕의 변화된 형태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역사학보》 58, 1973: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재수록).
김유신을 흥무대왕에 책봉한 것은 그 후손들이 혜공왕 6년(770)에 사회적 불만으로 金融의 난에까지 가담하였다가 처형되었으나 신원운동에 의하여 신원되고 그의 가계가 다시 대두하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처사는 中代에 있어서의 무열왕계의 전제주의적 경향과는 판이한 일이다. 신라 下代에 있어서 귀족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어 귀족연합 혹은 귀족연립적인 사회를 이룬 예의 하나이다(이기백, 〈신라 혜공왕대의 정치적 변혁〉, 《사회과학》 2, 1958: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한 것은 갈문왕의 변화된 형태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이기백, 〈신라시대의 갈문왕〉, 《역사학보》 58, 1973: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974 재수록).
[역주:43권27] 법민왕(法敏王)
법민은 문무왕의 이름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름을 왕호로 사용한 예를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무령왕을 묘지석에서 斯麻王이라 한 점이나 영류왕을 건무왕이라 칭한 점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역주:43권28] 고구려의 반란한 무리[叛衆]
이를 義勇軍이라고 본 견해도 있으나(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36쪽), 부흥군이라 하여야 옳을 듯 하다. 669년에 신라에 투항한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 안승이 4천호를 이끌고 신라에 투항 한 것을 지칭한 것이다. 본서 권22 주석 140 참조.
[역주:43권29] 석문(石門)
황해도 瑞興 서북 雲磨山에 石門寺가 있고, 절 이름이 지명에서 따온 듯하므로 그 부근이 아닐까 추측된다(이기동, 〈歷史篇〉, 《韓國學基礎資料選集-古代篇-》, 1987, 89쪽). 본서 권7 주석 76 참조.
[역주:43권30] 의복(義福)
신라 태종 무열왕대의 진골 출신 장군. 본서 권5 태종 무열왕 8년(661)조에 下州將軍이 되고 문무왕 원년(661) 上州 摠管이 된 아찬 義服, 동왕 8년(668)에 誓幢 摠管이 된 宜福도 같은 사람으로 생각된다. 그는 백제 유민이 661년 2월에 사비성을 공격하여오자 下州將軍으로 참전하였으나 신라군은 제대로 공격도 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대당군과 서당군이 먼저 떠나고 하주군대가 뒤에 떨어졌는데 3월에 賓骨壤(현재의 전북 정주시 고부면)에서 백제군을 만나 패퇴하였다. 그 후 그는 668년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영국공 李勣을 따라 중국에까지 갔다 왔으며 당나라 군대와 싸운 석문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역주:43권31] 춘장(春長)
신라의 장군. 668년 고구려정벌에 가담하였고 의복과 함께 당나라 군사와 싸운 석문 전투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8년(678) 3월에 대아찬으로 중시직을 맡았다가 이듬해 봄 정월에 병으로 사직하였다.
[역주:43권32] 대방(帶方)
현재의 지명은 확인할 수 없다. 황해도 平山으로 추측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36쪽). 평산은 석문전투가 있었던 서흥 남쪽에 인접한 군이다.
[역주:43권33] 장창당(長槍幢)
문무왕 12년(672)에 설치하였다가 효소왕 2년(693)에 緋衿誓幢으로 개칭되면서 9서당의 하나가 되었다. 신라인으로 구성된 부대이다. 본서 권40 주석 120 참조.
[역주:43권34] 효천(曉川)
?∼672. 7세기 신라의 장군. 문무왕 12년(672) 당나라 고간(高侃)과 李謹行 군대와 石門(황해도 瑞興)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관등은 대아찬이었다.
[역주:43권35] 의문(義文)
?∼672. 문무왕 12년(672) 당나라 고간과 이근행의 군대와 石門 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관등은 沙湌이었다.
[역주:43권36] 원술(元述)
김유신의 둘째 아들로서 문무왕 12년 당나라 군대와의 石門 전투에서 裨將으로 참여하였다가 曉川, 義文, 山世, 能申, 斗善, 安那含, 良臣 등 7명의 장군이 전사할 때에 함께 죽지 않고 도망쳐 왔다. 이에 아버지 김유신은 왕에게 사형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아들의 취급을 받지 못하여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시골농장에 내려가 숨어 살다가 아버지가 죽은 후 돌아왔으나 어머니도 아들로 인정을 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있다가 문무왕 15년(675)에 買蘇川城에서 당나라 군대를 격파한 공을 세웠으나 벼슬을 받지 않았다.
[역주:43권37] 비장(裨將)
부대의 副將을 말한다. 본서 권44 열전 사다함전에는 그가 ‘裨將’으로 가라정벌에 참여하였다고 하였는데 같은 기사를 다룬 본서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562)조에서는 『副之』라고 하여 부장으로 참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역주:43권38] 상장군(上將軍)
장군 중에서 제일 높은 장군. 여기서 상장군이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혹시 春長이나 義福 중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한다.
[역주:43권39] 무이령(蕪荑嶺)
이곳에 처음 나오는 지명. 황해도 金川 靑石縣으로 추정한 견해도 있으나(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37쪽) 이보다 조금 북쪽의 瑞興에서 개성쪽으로 내려오는 길 중에 『牛耳嶺』이 보이고 있는 바 거리상으로나 위치상으로 이곳이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한다.(《靑丘圖》 15層15版 참조)
[역주:43권40] 거열주(居烈州)
현재의 경남 거창군.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조와 5년조 및 권8의 신라본기 신문왕 5년조에서는 居列城, 居列州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본서 권34 주석 400 참조.
[역주:43권41] 일길간 아진함(阿珍含)
일길간은 신라 제7관등인 一吉湌으로도 표기된다. 阿珍含은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2년(672)조에는 安那含으로 표기되었다. 아진함은 70세 노인으로 아군이 후퇴하는 시간을 얻기 위하여 치루어진 당나라와의 무이령 전투에서 죽었다.
[역주:43권42] 매소천성(買蘇川城)
매소천성이 본서 권35 잡지 지리3에 보이는 買省縣城과 같은 것이라면 현재의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 일대로 비정된다(본서 권35 주석 94참조). 그런데 매소천성은 본서 권7 신라본기 문무왕15년조에 나오는 買肖城이 아닐까 추측한다. ‘肖’의 음에는 ‘초’와 ‘소’ 두 가지가 있는데 종래 학계에서는 ‘초’로 읽어 왔는데 ‘매소천성’에 의하여 ‘소’로 읽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경기도 漣川郡 靑山面 大田里 산성에 비정된다. 이 산성은 토축에 석축을 보강한 흔적이 보이며 이곳에 4세기경의 백제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매소천은 한탄강의 옛 명칭으로 이해되고 있다(閔德植, 〈買肖城址考〉, 《孫寶基博士停年紀念 考古人類學論叢》, 1988 참조).
[역주:43권43] 윤중(允中)
김유신의 嫡孫. 성덕왕 24년(725)에 中侍가 되고 동왕 35(736)년에 장군에 임명된 允忠과 동일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允中(충)이 여러 번 왕의 恩惠를 입었다는 것은 단순한 왕의 사적인 후대가 아니라 공직에의 중용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 직은 아마도 侍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李基白, 〈新羅執事府의 成立〉, 《震檀學報》 25·26·27 합집호, 1964: 《新羅政治社會史硏究》, 1974, 163∼4쪽).:
[역주:43권44] 절영산(絶影山)
현재의 부산광역시 影島이다. 영도는 원래 절영도로 불리웠다. 절영도는 동평현의 치소 남쪽 8리에 있으며 목장이 있었다. 동래군의 領縣인 東平縣은 원래 신라의 大甑縣이었고, 경덕왕대에 개칭되었으며 고려조에 동래현의 속현이었다(《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동래현조 참조). 이는 조선후기까지 목장으로 유지되어 왔다. 후기의 절영도목장의 크기는 둘레가 30리이고 牧者가 73명 牧馬가 108필이었다(《海東地圖》 상, 서울대 규장각 영인본, 1995, 166쪽 東來縣條 참조).
[역주:43권45] 말갈발해
말갈족이 세운 발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국명으로 《舊唐書》 권199 하 열전150 상에서는 『渤海靺鞨』로 표현하였고 이는 대조영을 高麗 別種이라 하여 고구려인으로 파악하였다.
[역주:43권46] 윤문(允文)
김유신의 손자로 윤중의 아우.
[역주:43권47] 암(巖)
8세기 신라의 음양가. 김유신의 적손인 允中의 庶孫. 당나라에 숙위학생으로 유학하여 음양가로부터 인간의 길흉화복과 만물의 생멸변화를 미리 예측하는 천문, 지리, 역수 등을 배웠다. 스스로 《遁甲立成法》을 지어서 스승에게 보이니 그를 제자로 보지 못하였다. 당에서 귀국하여 司天大博士 직을 맡았고, 이어서 良州, 康州, 漢州 세 지방의 군 태수를 역임하고 집사성 시랑과 패강진 頭上이 되어 가는 곳마다 선정을 남겼다. 농한기에는 농민에게 육진병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779년에는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역주:43권48] 숙위(宿衛)
숙위학생을 뜻한다(신형식, 〈신라의 대당교섭상에 나타난 숙위에 대한 일고찰〉, 《역사교육》 9, 1966; 〈숙위학생고〉, 《역사교육》 11·12 합집, 1969, 註 22 참조).
[역주:43권49] 음양가(陰陽家)의 술법(術法)
원문은 『陰陽家法』으로 되어 있다. 이는 四時 方位 등으로 인간사의 吉凶禍福을 예정하는 術法을 총괄해서 말하는 것이다. 遁甲·六壬·擇日·占星 등속이 다 이에 속한다(차주환, 〈道敎篇〉, 《韓國學基礎資料選集-古代篇-》, 803쪽).
[역주:43권50] 하나를 들으면 세 가지를 미루어 알았다[聞之一則 反之以三隅]
이해가 대단히 탁월하다는 뜻. 《論語》 述而 제7에 나오는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에서 취한 전고이다.
[역주:43권51] 둔갑입성지법(遁甲立成之法)
金巖이 당나라에서 지은 음양가적 저술. 陰陽의 변화를 이용,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여 몸을 감추고 吉을 취하고 凶을 피하는 술수. 立成之法은 쉽지 않은 遁甲術을 급속히 이루는 방법을 말한다(차주환, 앞의 글 〈道敎篇〉, 803쪽).
[역주:43권52] 대력(大曆)
唐나라 代宗의 연호. 766∼779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3권53] 사천대박사(司天大博士)
천문을 관장하는 직. 천문을 담당한 직은 원래 천문박사였는데 후에 司天博士로 개칭하였다. 司天大博士는 司天博士 위에 두어진 직으로 생각된다. 본서 권39 주석 32 참조.
[역주:43권54] 패강진(浿江鎭) 두상(頭上)
浿江鎭은 황해도 平山에 本營을 두고 禮成江 이북, 大同江 이남의 수복지구를 다스리는 군사 및 행정의 최고 기관이며, 頭上은 그 장관직이었다(이기동, 앞의 글, 〈 歷史篇〉, 89쪽). 본서 권38 주석 284 참조
[역주:43권55] 육진병법(六陳兵法)
八陳兵法의 誤記인 듯하다. 八陳은 軍陳의 8가지 형식으로,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예를 들면 蜀漢의 諸葛亮이 지은 八陳은 洞當·中黃·龍騰·鳥飛(鳥翔)·虎翼·折衝·衡(連衡)·握機(握奇) 등이다(차주환, 앞의 글 〈道敎篇〉, 803쪽).
[역주:43권56] 일본국(日本國)에 사신으로 갔는데
金巖이 왕명을 받아 일본으로 사신을 간 것에 대하여는 《續日本紀》 권35 光仁紀 寶龜 10년∼11년조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43권57] 시조대왕(始祖大王)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味鄒王 竹葉軍조에서 一然은 김씨 왕들이 미추왕을 시조로 여긴다고 주석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신라의 시조 혁거세가 아니라 김씨의 시조인 味鄒王을 지칭한 듯하다.
[역주:43권58] 취선사(鷲仙寺)
이곳에 처음 나오는 절 이름.
[역주:43권59] 여름 4월에 … 명복을 빌게 하였다.
비슷한 내용이 《三國遺事》 권1 紀異篇 味鄒王 竹葉軍조에 나온다. 그리고 《三國遺事》 권1 金庾信조에는 봄에 부인의 묘가 있는 財買谷 골짜기 입구에 원찰을 세워 놀이하면서 명복을 빌었는데 이를 『松花房』이라 한다고 하였다.
[역주:43권60] 집사랑(執事郞)
執事省의 郞. 원래는 ‘史’였는데 경덕왕이 랑으로 고쳤고, 혜공왕 때에 다시 史라 하였다. 집사성에 설치된 다섯 관직 중 최하위 관직이었다.
[역주:43권61] 장청(長淸)
이곳에 처음 나오는 인물. 김유신의 현손. 혜공왕 6년(770) 金融의 난에 가담하였다는 이유로 김유신의 후손이 사형에 처해졌으나 신원되었는 바 金融이 바로 그 후손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장청은 김유신계가 몰락하고 있던 상황에서 복권을 위한 목적으로 《金庾信行錄》10권을 지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李基白, 〈金大問과 金長淸〉, 《韓國史市民講座》 1집, 1987 참조).
[역주:43권62] 행록(行錄) 10권
김유신의 현손인 장청이 지은 김유신의 일대기. 본서의 김유신 열전 3권의 기초 자료로 이용된 책이다. 이에는 김유신이 국가에 일생의 충절을 바친 점, 전쟁에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 귀족중심의 공동체의식을 강조하였으며, 위대한 조상으로 만들기 위하여 많은 미화가 가해졌다(이기백, 앞의 논문). 김부식은 이에는 꾸며진 것이 많다고 하여 삭제하였다고 한 점에서 본서의 열전보다 더욱 신이로운 설화가 많이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즉 《三國遺事》에 실려 있는 고구려 첩자 白石의 유인에서 구해준 세 호국의 여신의 이야기 등은 그 한 예라 할 수 있다.
[역주:43권63] 이강(李絳)
당나라 헌종대의 충신. 趙郡 贊皇人. 進士에 올라 宏辭科에 합격하여 감찰어사 겸 한림원학사로서 헌종에게 당대 헌종의 칭송비를 세우는 일을 반대하였고, 中官(宦官)의 등용을 반대하는 직언을 한 신하. 사론에서 그가 헌종에 대하여 하였다는 말은 《新唐書》의 그의 열전에서 인용한 것이다.(《新唐書》 권152 열전77 및 《舊唐書》 권164 열전114 李絳傳 참조)
[역주:43권64] 헌종(憲宗)
당나라 말기의 황제. 태종과 고종의 정치를 본받으려 하여 유신령을 내리고 안국사에 聖政碑를 세우려하다가 이강이 반대함에 그만두었다. 805년에서 819년까지 재위하였다.
[역주:43권65] 서경(書經)
유학의 5경 중의 하나. 《尙書》라고도 한다. 사론에서 인용한 구절은 《書經》 大禹謨에서 인용된 것이다. .
[역주:43권66] 육오동몽(六五童蒙)의 길(吉)함
《周易》 蒙卦(坎下·艮上)의 六五爻辭인데, 六五는 卦의 六爻 중 第五爻의 陰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제 5효는 柔順한 陰으로 5의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남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것이 童蒙 즉 어린이같이 하기 때문에 길하다는 것이다. 대개 신라의 인군과 신하가 서로 화합하여, 끝내는 삼국통일의 큰 사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을 말함이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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