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傳 第二 金庾信 [中]
(太和 ※)二年 ※秋八月 百濟將軍殷相 來攻石吐等七城 王命庾信及竹旨·陳春·天存等將軍 出禦之 分三軍爲五道 擊之 互相勝負 經旬不解 至於僵屍滿野 流血浮杵 於是屯於道薩城下 歇馬餉士 以圖再擧 時有水鳥東飛 過庾信之幕 將士見之 以爲不祥 庾信曰 “此不足怪也” 謂衆曰 “今日必有百濟人來諜 汝等佯不知 勿敢誰何” 又使徇于軍中曰 “堅壁不動 待明日援軍至 然後決戰” 諜者聞之 歸報殷相 殷相等謂有加兵 不能不疑懼 於是庾信等一時奮擊 大克之 生獲將軍達率正仲·士卒一百人 斬佐平殷相·達率自堅等十人及卒八千九百八十人 獲馬一萬匹·鎧一千八百領 其他器械稱是 及歸還 路見百濟佐平正福與卒一千人來降 皆放之 任其所往 至京城 大王迎門 勞慰優厚
永徽五年 眞德大王薨 無嗣 庾信與宰相閼川伊湌謀 迎春秋伊湌 卽位 是爲太宗大王
永徽六年乙卯秋九月 庾信入百濟 攻刀比川城克之 是時百濟君臣 奢泰淫逸 不恤國事 民怨神怒 災怪屢見 庾信告於王曰 “百濟無道 其罪過於桀·紂 此誠順天弔民伐罪之秋也”
先是 租未? ※級湌爲夫 ※山縣令 被虜於百濟 爲佐平任子之家奴 從事勤恪 曾無懈慢 任子憐之不疑 縱其出入 乃逃歸 以百濟之事 告庾信 庾信知租未?忠正而可用 乃語曰 “吾聞任子專百濟之事 思有以與謀而末 ※由 子其爲我 再歸言之” 答曰 “公不以僕爲不肖 而指使之 雖死無悔” 遂復入於百濟 告任子曰 “奴自以謂 旣爲國民 宜知國俗 是以出遊累旬不返 不勝犬馬戀主之誠 故此來耳” 任子信之不責 租未?伺間報曰 “前者 畏罪不敢直言 其實 往新羅還來 庾信諭我 來告於君曰 ‘邦國興亡 不可先知 若君國亡 則君依於我國 我國亡 則吾依於君國’” 任子聞之 嘿然無言 租未?惶懼而退 待罪數月 任子喚而問之曰 “汝前說庾信之言 若何” 租未?驚恐而對 如前所言 任子曰 “爾所傳 我已悉知 可歸告之” 遂來說兼及中外之事 丁寧詳悉 於是愈急幷呑之謀
太宗大王七年庚申夏六月 大王與太子法敏 將伐百濟 大發兵 至南川而營 時入唐請師波珍湌金仁問 與唐大將軍蘇定方·劉伯英 領兵十三萬 過海到德物島 先遣從者文泉來告 王命太子與將軍庾信·眞珠·天存等 以大船一百艘 載兵士會之 太子見將軍蘇定方 定方謂太子曰 “吾由海路 太子登陸行 以七月十日 會于百濟王都泗沘之城” 太子來告大王 率將士 行至沙羅之停
將軍蘇定方·金仁問等 沿海入伎 ※伐浦 海岸泥濘 陷不可行 乃布柳席 以出師 唐·羅合擊百濟滅之 此役也 庾信之功爲多 於是唐皇帝聞之 遣使褒 ※嘉之 將軍定方謂庾信·仁問·良圖三人曰 “吾受命以便宜從事 今以所得百濟之地 分錫公等爲食邑 以酬厥功 如何” 庾信對曰 “大將軍以天兵來 副寡君之望 雪小國之讐 寡君及一國臣民 喜抃之不暇 而吾等獨受賜以自利 其如義何” 遂不受
唐人旣滅百濟 營於泗沘之丘 陰謀侵新羅 我王知之 召羣臣問策 多美公進曰 “令我民 詐爲百濟之人 服其服 若欲爲賊者 唐人必擊之 因與之戰 可以得志矣” 庾信曰 “斯言可取 請從之” 王曰 “唐軍爲我滅敵 而反與之戰 天其祐我耶” 庾信曰 “犬畏其主 而主踏其脚 則咬之 豈可遇難 而不自救乎 請大王許之” 唐人諜知我有備 虜百濟王及臣寮九十三人·卒二萬人 以九月三日 自泗沘泛船而歸 留郞將劉仁願等 鎭守之 定方旣獻俘 天子慰藉之曰 “何不因而伐新羅” 定方曰 “新羅其君仁而愛民 其臣忠以事國 下之人事其上如父兄 雖小不可謀也”
龍朔元年春 王謂百濟餘燼尙在 不可不滅 以伊湌品日·蘇判文王·大阿湌良圖等爲將軍 往伐之 不克 又遣伊湌欽純一作欽春·眞欽·天存·蘇判竹旨等濟師 高句麗·靺鞨謂 新羅銳兵皆在百濟 內虛可擣 發兵水陸並進 圍北漢山城 高句麗營其西 靺鞨屯其東 攻擊浹旬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賊營 又雷雨震擊 賊等疑駭 解圍而遁 初庾信聞賊圍城曰 “人力旣竭 陰助可資” 詣佛寺 設壇祈禱 會有天變 皆謂至誠所感也
庾信嘗以中秋夜 領子弟立大門外 忽有人從西來 庾信知高句麗諜者 呼使之前曰 “而國有底事乎” 其人俯而不敢對 庾信曰 “無畏也 但以實告” 又不言 庾信告之曰 “吾國王 上不違天意 下不失人心 百姓欣然 皆樂其業 今爾見之 往告而國人” 遂慰送之 麗人聞之曰 “新羅雖小國 庾信爲相 不可輕也”
六月 唐高宗皇帝遣將軍蘇定方等 征高句麗 入唐宿衛金仁問 受命來告兵期 兼諭出兵會伐 於是文武大王率庾信·仁問·文訓等 發大兵向高句麗 行次南川州 鎭守劉仁願 以所領兵 自泗沘泛船 至鞋浦下陸 亦營於南川州 時有司報 “前路有百濟殘賊 屯聚瓮山城遮路 不可直前” 於是庾信以兵進而圍城 使人近城下 與賊將語曰 “而國不龔 致大國之討 順命者賞 不順命者戮 今汝等 獨守孤城 欲何爲乎 終必塗地 不如出降 非獨存命 富貴可期也” 賊高聲唱曰 “雖蕞爾小城 兵食俱足 士卒義勇 寧爲死戰 誓不生降” 庾信笑曰 “窮鳥困獸 猶知自救 此之謂也” 乃揮旗鳴鼓攻之 大王登高見戰士 淚語激勵之 士皆奮突 鋒刃不顧
九月二十七日 城陷 捉賊將戮之 放其民 論功賞賚將士 劉仁願亦分絹有差 於是饗士秣馬 欲往會唐兵 大王前遣大 ※監文泉 移書蘇將軍 至是復命 遂傳定方之言曰 “我受命萬里 涉滄海而討賊 艤舟海岸 旣踰月矣 大王軍士不至 粮道不繼 其危殆甚矣 王其圖之” 大王問羣臣 “如之何而可” 皆言深入敵境輸粮 勢不得達矣 大王患之咨嗟 庾信前對曰 “臣過叨恩遇 忝辱重寄 國家之事 雖死不避 今日是老臣盡節之日也 當向敵國 以副蘇將軍之意” 大王前席 執其手下淚曰 “得公賢弼 可以無憂 若今玆之役 罔愆于素 則公之功德 曷日可忘”
庾信旣受命 至懸鼓岑之岫寺齊 ※戒 卽靈室閉戶 獨坐焚香 累日夜而後出 私自喜曰 “吾今之行 得不死矣” 將行 王以手書告庾信 “出疆之後 賞罰專之 可也”
十二月十日 與副將軍仁問·眞服·良圖等九將軍 率兵載粮 入高句麗之界 壬戌正月二十三日 至七重河 人皆恐懼 不敢先登 庾信曰 “諸君若怕死 豈合來此” 遂先自上船而濟 諸將卒相隨渡河 入高句麗之境 慮麗人要於大路 遂自險隘以行 至於䔉壤 庾信與諸將士曰 “麗·濟二國 侵凌我疆埸 賊害我人民 或虜丁壯 以斬戮之 或虜幼少 以奴使之者久矣 其可不痛乎 吾今所以不畏死赴難者 欲藉大國之力 滅二城 以雪國讐 誓心告天 以期陰助 而未知衆心如何 故言及之 若輕敵者 必成功而歸 若畏敵 則豈免其禽 ※獲乎 宜同心協力 無不以一當百 是所望於諸公者也” 諸將卒皆曰 “願奉將軍之命 不敢有偸生之心” 乃鼓行向平壤 路逢賊兵 逆擊克之 所得甲兵甚多 至障塞之險 會天寒烈 人馬疲憊 往往僵仆 庾信露肩執鞭 策馬以前驅 衆人見之 努力奔走 出汗不敢言寒 遂過險 距平壤不遠 庾信曰 “唐軍乏食窘迫 宜先報之” 乃喚步騎監裂起曰 “吾少與爾遊 知爾志節 今欲致意於蘇將軍 而難其人 汝可行否” 裂起曰 “吾雖不肖 濫中軍職 況辱將軍使 ※令 雖死之日 猶生之年”
遂與壯士仇近等十五人 詣平壤 見蘇將軍曰 “庾信等領兵致資粮 已達近境 ” 定方喜以書謝之 庾信等行抵楊隩 見一老人 問之 具悉敵國消息 賜之布帛 辭不受而去 庾信營楊隩 遣解漢語者仁問·良圖及子軍勝等 達唐營 以王旨餽軍糧 定方以食盡兵疲 不能力戰 及得粮 便廻唐 良圖以兵八百人 泛海還國
時麗人伏兵 欲要擊我軍於歸路 庾信以鼓及桴 繫羣牛腰尾 使揮擊有聲 又積柴草燃之 使煙火不絶 夜半潛行至䕯河 急渡岸休兵 麗人知之來追 庾信使萬弩俱發 麗軍且退 率勵諸幢將士分發 拒擊敗之 生禽將軍一人 斬首一萬餘級 王聞之 遣使勞之 及至賞賜封邑爵位有差
龍朔三年癸亥 百濟諸城 潛圖興復 其渠帥據豆率城 乞師於倭爲援助 大王親率庾信·仁問·天存·竹旨等將軍 以七月十七日 征討 次熊津州 與鎭守劉仁願合兵 八月十三日 至于豆率城 百濟人與倭人出陣 我軍力戰大敗之 百濟與倭人皆降 大王謂倭人曰 “惟我與爾國 隔海分疆 未嘗交構 但結好講和 聘問交通 何故今日與百濟同惡 以謀我國 今爾軍卒在我掌握之中 不忍殺之 爾其歸告爾王 任其所之” 分兵擊諸城降之 唯任存城 地險城固 而又粮多 是以攻之三旬 不能下 士卒疲困厭 ※兵 大王曰 “今雖一城未下 而諸餘城保 ※皆降 不可謂無功” 乃振旅而還 冬十一月二十日 至京 賜庾信田五百結 其餘將卒賞賜有差
[교주:42권1] 中
「金庾信 中」, 原本 缺刻. 鑄字本에 의거 보충.
[교주:42권2] 和
「太和」, 原本에는 없으나 本書 卷41에 의거 추가.
[교주:42권3] 年
「二年」, 太和 元年을 本書 卷5 眞德王 元年條의 기사와 같이 眞德王 元年(丁未 647)부터 사용된 것으로 계산하면 백제장군 殷相의 침공은 太和 3年으로 수정되어야 하고 本書 卷31 年表대로 眞德王 2年이 太和 元年이라면 2年이 옳다.
[교주:42권4] ?
北 「押」.
[교주:42권5] 夫
朝·北·權 「天」.
[교주:42권6] 末
原本 「未」. 文意로 보아 수정. 鑄字本 「未」. 朝·權·烈·浩 「未」.
[교주:42권7] 伎
原本 「依」. 本書 卷28 義慈王 20年條와 三國史節要(卷9-28面)에 의거 수정. 鑄字本 「依」. 朝·權 「依」, 北·燾 「依(伎)」.
[교주:42권8] 褒
原本 「裒」. 文意로 보아 수정. 鑄字本 「裒」.
[교주:42권9] 大
原本 「太」. 本書 卷40 職官 下와 三國史節要(卷9-42面)에 의거 수정. 榮·朝·北·權·烈·燾·浩 「太」.
[교주:42권10] 齊
「齋」와 相通. 鑄字本 「齋」. 榮·燾 「齋」.
[교주:42권11] 禽
「擒」과 相通.
[교주:42권12] 使
原本 「便」.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42권13] 厭
原本 「肰」. 文意로 보아 수정. 三國史節要(卷10-4面) 「猒」. 朝·燾·浩 「肰」, 北 「肰(厭)」. 「猒」과 「厭」은 相通.
[교주:42권14] 保
「堡」와 相通.
[역주:42권1] [太和] 2년
원문에는 ‘太和’가 없으나 앞 권에 太和 元年 기사가 나오므로 추가하였다. 이병도는 ‘여기의 2년은 진덕왕 2년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 기록은 3년의 誤記가 아니면 진덕왕 즉위 익년에 고친 太和 연호의 2년으로써 한 것이 아닌가 추찰된다’고 하였다(《國譯 三國史記》, 625쪽). 진덕왕은 즉위 2년에 太和로 개원하였다. 즉 태화 2년은 진덕왕 3년이므로 이 해의 전쟁 기사는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 모두 같은 해인 649년(진덕왕 3년, 의자왕 9년)조에 기술되어 있어 본 열전과 일치하고 있다. 이재호본에서는 [진덕왕] 2년(648)으로 오역하였고, 북한본과 신호열본에서는 다른 언급이 없이 2년 가을로 번역하였다.
[역주:42권2] 장군 은상(殷相)
백제 의자왕 때의 장군. 그의 직책은 본서 권42의 뒷 기사에서 佐平 은상 등을 목베었다고 하였다. 본서 권5 신라본기 진덕왕 3년(649) 8월조 및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9년 8월조 참조. 그러나 백제본기에는 ‘左將’으로 나오고 있어 그의 직명은 백제본기가 사료적 신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역주:42권3] 죽지(竹旨)
생몰년 미상. 신라통일기의 진골 출신 장군. 《삼국유사》에는 그의 이름을 竹曼 또는 智官이라고도 한다고 적고 있다. 진평왕 말년 경에 화랑으로 활약하였다. 진덕왕 3년(649) 침입해온 백제군을 대장군 김유신과 함께 도살성 전투에서 크게 파하였다. 진덕왕 5년(651) 2월 파진찬으로 집사부 초대 중시에 임명되었고, 문무왕 원년(661) 백제 잔당의 소탕작전에 참여하였고, 고구려 원정시에는 天存, 天品과 함께 貴幢摠管이 되어 김유신을 도왔다. 동왕 8년(668)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는 京停總管이 되었고 동왕 10년(670) 백제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며 다음해(671)에는 당군을 가림성 전투에서 격파한 바 있다. 효소왕 때에 그의 낭도였던 得烏가 부역에서 구해준 은덕을 화랑 죽지를 사모하여 지은 향가 〈慕竹旨郞歌〉가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三國遺事》 권2 紀異篇 孝昭王代 竹旨郞조 참조).
[역주:42권4] 진춘(陳春)
신라의 진골 장군. 陳純이라고도 하였고, 문무왕 원년 7월 17일조의 眞純과 동일인인 것으로 보인다. 진춘은 진덕여왕 3년(649) 8월에 김유신 휘하의 장군으로서 道薩城 전투에 참여하여 백제의 장군 殷相의 공격을 막아냈고, 眞純은 문무왕 원년(661) 7월 17일에는 河西州 총관이 되어 고구려 공격에 참여하였으며, 陳春(또는 陳純이라고도 한다)은 동왕 8년(668) 6월 21일에는 京停摠管으로서 고구려 원정군에 다시 참여하였다. 재상으로 있던 陳純은 문무왕 16년(676) 11월에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원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주었다고 한 점에서 이 때 나이가 이미 70세가 넘은 것을 알 수 있다.
[역주:42권5] 천존(天存)
?∼679. 신라의 진골 출신의 장군. 진덕왕 3년(649)에 石吐城전투에서 백제군의 격파에 전공을 세웠고, 태종 무열왕 7년(660) 소정방의 군대를 맞이하기 위하여 왕을 모시고 南川停에 갔으며, 문무왕 원년(661) 7월 동왕 3년(663) 2월에 김유신의 동생 欽純과 함께 居列城(현재의 경남 거창)을 쳐서 전공을 세웠고, 다음 해 2월에는 이찬으로서 김인문과 함께 웅진에서 부여륭과 맹약을 체결하였다. 동왕 6년(666)에는 자기의 아들 漢林을 김유신의 아들 三光과 함께 인질로 당나라에 보내어 숙위케 하였다. 동왕 8년(668) 6월 고구려 정벌시에는 각간으로서 죽지와 함께 귀당총관이 되었고, 동왕 19년(679) 정월에 중시가 되었으나 그 해 8월에 죽었다.
[역주:42권6] 도살성(道薩城)
현재의 충북 槐山郡 道安面. 본래 고구려의 道西縣城이었다. 본서 권37 주석 364 참조. 天安으로 비정한 견해도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24쪽).
[역주:42권7] 영휘(永徽) 5년(654)
영휘는 당고종의 연호로 5년은 태종 무열왕 원년에 해당한다. 진덕왕 4년에 ‘비로소 중국의 영휘란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신라본기와 연표에 나온다. 열전의 이 시기 이후부터는 대부분 중국의 연호에 따라 연대가 표기되었다.
[역주:42권8] 재상(宰相)
재상이란 직함은 당나라에서는 3품이상의 평장사급에 붙인 통칭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毗曇, 廉宗과 정치적 권력투쟁을 벌인 김춘추에 의하여 처음으로 사용되어 이후 재상직은권력 장악의 중요한 관직이었다. 따라서 上大等, 侍中, 兵部令, 私臣 등의 職에 있는 사람이 겸해지기도 하였지만, 이 직에 있다고 하여 반드시 재상은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재상직이 上宰相(大相), 次宰相(二宰), 第3宰相 등으로 등급지워진 것도 신라 재상제도의 특징이다. 이는 7세기 후반에 생겨 신라말까지 유지되었다(木村 誠, 〈新羅の宰相制度〉, 《人文學報》, 東京都立大學, 1977 참조). 알천의 이 당시 관직은 上大等이었다.
[역주:42권9] 알천(閼川)
생몰년 미상. 진덕여왕대의 장군. 선덕왕 5년(636) 5월 이찬으로서 장군 弼呑과 함께 獨山城에 침입한 백제의 장군 于召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동왕 6년 7월에 大將軍이 되었으며, 진덕왕 원년(647) 1월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김춘추 김유신 세력에 의하여 진압되고 사형에 처해진 毗曇을 이어 上大等이 되었다. 진덕왕이 죽자 화백회의에서는 의장인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자신은 늙고, 덕이 없다고 사양하고 김춘추를 천거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는 《三國遺事》 권1 紀異篇 金庾信條에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또한 《三國遺事》 권1 紀異篇 진덕왕조에서는 남산 亏知巖에서 화백회의를 할 때에 나타난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 땅에 쳐 박살을 냈다고 그의 팔힘이 강함과 용맹함을 서술하고 있다.
[역주:42권10] 도비천성(刀比川城)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 있는 성. 본서 권34 잡지 지리 1 尙州 永同郡 陽山縣의 옛 이름인 助比川縣의 명칭과 같은 지명으로 생각한다. 현재의 永同郡 陽山面 飛鳳山城으로 비정하는 견해(성주탁, 〈조천성의 위치에 대하여〉, 《백제연구》 4, 충남대학교백제연구소, 1973)와 같은 면의 大王山城(일명 大陽山城)으로 보는 견해(鄭永鎬, 〈百濟助川城考〉, 《百濟硏究》 3, 1972)가 있다. 또한 그 전투의 치열한 상황은 본서 권47 열전 金歆運傳에 자세하고 거기에는 助川城으로 되어 있다.
[역주:42권11] 조미갑(租未?)
이곳에 처음 나오는 인명이다. 중종임신간본과 주자본의 《三國史記》에는 ?으로 되어 있다. 이 글자는 자전에 없는 글자이나 음은 ‘갑’으로 추정하였다. 북한본과 신호열본에서는 압(押)으로 이재호본에는 곤(坤)으로 번역하였다. 자형으로 보면 곤의 오기일 가능성이 있지만 이는 고유명사임으로 그대로 판독하고 음은 ‘갑’으로 읽었다.
[역주:42권12] 부산현령(夫山縣令)
夫山縣은 이곳에 처음 나오는 지명이나 고구려의 釜山縣과 같은 곳으로 보인다. 釜山縣은 현재의 평택시 振威面이다. 본서 권35 주석 57 참조. 이병도는 지금의 鎭海 부근으로 추정한 바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25쪽).
[역주:42권13] 임자(任子)
여기에만 나오는 인물이다. 백제 의자왕대의 집정자. 김유신과 내통하였다.
[역주:42권14] 백제를 병합할 모의를 급히 하였다
이것은 김유신 개인 차원이 아니라 신라 정부 차원에서 계획된 ‘심리전’이라고 본 견해도 있다(李萬烈, 〈三國〉, 《한국사대계》 제2권, 삼진사, 1973, 242쪽).
[역주:42권15] 태종대왕 7년 경신(660) 여름 6월
이는 태종 무열왕이 남천정에 도착한 때이고 정확한 날자는 6월 18일이다. 본서 권5 신라본기 에는 3월부터 백제를 치기 위한 군사 동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역주:42권16] 법민(法敏)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 문무왕의 이름. 태종 2년(655) 3월에 태자가 되었다가 태종이 죽자 즉위하였다. 본서 권6 주석 1 참조.
[역주:42권17] 남천(南川)
현재의 경기도 利川市이다. 南川州는 진흥왕 29년(568) 10월에 北漢山州를 폐하고 설치되었으며, 진평왕 26년(604) 7월에 南川州를 폐하고 다시 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본서 권35 주석 5 참조.
[역주:42권18] 김인문(金仁問)
629∼694.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당나라에 숙위학생으로 가서 당군을 끌어옴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열전은 본서 권44에 실려 있다. 자세한 것은 본서 권44 주석40 참조.
[역주:42권19] 유백영(劉伯英)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 휘하에서 백제 침공과 동년 12월에는 平壤道行軍摠管으로 고구려 침공에 출정하였다.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에는 백제 침공 때의 그의 직위를 모두 ‘左驍衛將軍’으로 기록하고 있다. 《新唐書》 권3 高宗本紀에서는 ‘左驍衛將軍’, 같은 책 권220 東夷傳 百濟條에서는 ‘左衛將軍’으로 기록하고 있고, 《資治通鑑》에는 ‘左驍衛將軍’으로 기록하고 있다.
[역주:42권20] 문천(文泉)
태종 무열왕대의 사람. 대감의 벼슬에 있었다. 당에 가 있었다가 소정방을 따라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여 소정방의 서신을 왕에게 전하고 문무왕의 서신도 다시 소정방에게 서신을 전하였다.
[역주:42권21] 진주(眞珠)
?∼662. 신라 7세기의 진골 장군. 성은 김씨였다. 선덕왕 8년 사찬으로서 北原小京(현재의 강원도 원주)의 仕臣이 되었고, 태종 무열왕 6년(659)에는 아찬으로서 兵部令이 되었다. 곧 이어 백제정벌군에 김유신과 함께 참여하였다. 문무왕 원년(661) 7월 고구려정벌 때에는 대장군 김유신 휘하에서 김인문과 김흠돌과 함께 大幢摠管이 되어 참전하였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662) 8월조에 『대당총관 진주와 남천주총관 眞欽은 병을 핑계삼아 한가로이 지내며 나라일을 돌보지 않았다』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일족까지 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문무왕 15년(675) 그의 아들인 숙위학생 風訓은 아버지의 죽음을 원망하여 설인귀가 신라에 쳐들어올 때에 향도가 되어 반역행위를 하였다. 그런데 眞珠는 문무왕 10년(670)에 대아찬으로 반역을 한성주 총관 藪世를 목을 베었다고 하였으니 이 眞珠는 同名異人인지 아니면 본서 찬자가 문무왕 2년 진주의 사형기사가 동왕 12년 기사의 두찬인지 확실하지 않다.
[역주:42권22] 큰 배[大船]
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조에는 ‘兵船’으로 쓰여 있다.
[역주:42권23] 사라(沙羅)의 정(停)
沙羅가 현재의 어디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태종 무열왕은 당나라 군대가 덕물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남천정에까지 갔다가 당군과 약속을 하고 5만의 군대를 보내 백제를 격파하게 할 때에 내려와 今突城에 머물렀다(본서 권5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7년조 참조). 停이라는 군단이 있는 지역이라면 남천정과 사벌정에 해당할 것이다. 본 열전의 이 기사는 대단히 간략히 서술되었으므로 문맥으로 보아 사라의 정을 어디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사벌정의 금돌성이 아닐까 한다. 금돌성은 현재의 경북 상주시 인동면 수봉리 백화산의 석성에 비정된다(鄭永鎬, 《尙州地區古蹟調査報告書》, 단국대 박물관, 1969 및 鄭永鎬, 〈金庾信의 百濟 攻擊路 硏究〉, 《史學志》 6, 1972 참조). 금돌성을 충북 괴산으로 추정한 설도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27쪽).
[역주:42권24] 기벌포(伎伐浦)
현재의 충남 舒川郡 長項邑 長岩洞일대이다.《三國遺事》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 나오는 ‘技伐浦’의 細註에 『助長岩 又孫梁 一作只火浦 又白江』이라고 있어 只火浦의 다른 표기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19 舒川郡 關防條에 ‘舒川浦營’의 細註에 『在郡南二十六里 水軍萬戶一人 高麗時 稱長岩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종임신간본 《三國史記》에는 ‘依伐浦’로 되어 있고, 이병도본에서는 ‘技伐浦’로 판독하였고, 이재호본에서는 ‘기벌포(伎伐浦)’로, 북한본에서는 ‘의벌포’로 번역하였다.
[역주:42권25] 양도(良圖)
7세기의 신라 진골 출신 장군. 관등이 대아찬에 이르렀다. 숙위학생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말에 능통하였다. 신라와의 연락관계로 당나라에 여섯 번이나 건너 갔었다. 문무왕 원년(661) 백제 부흥군 공격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동년 12월 중국말을 잘함으로써 평양에 온 소정방에게 식량을 운반하는 장군으로 출정하였다. 소정방이 당으로 돌아가자 해로로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귀환하였다. 중국 장안에서 죽었다. 본서 권44 열전 김인문전에 附傳되어 있다.
[역주:42권26] 유인원(劉仁願)
당나라의 장군. 중국 雕陰 大武출신. 대대로 무장직을 지냈다. 홍문관 학생을 거쳐 태종의 발탁을 받아 근시직인 內供奉에 올랐다. 644∼645년의 고구려 침략에 참여하여 그 전공으로 인하여 黎陽縣開國公에 봉해졌다. 660년 소정방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백제에 공격군에 장군으로 참전하였으며, 소정방이 백제를 멸하고 의장왕 등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에 돌아갈 때에 郎將으로서 웅진도독부를 맡아 관할하였다. 충남 부여에 〈唐劉仁願紀功碑〉가 전하고 있다.
[역주:42권27] “신라는 …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唐書에는 보이지 않는다. 《舊唐書》 권3 高宗本紀 上에 ‘責而宥之’했다고 간략히 기록하고 있다. 윗 표현은 통일 이후의 윤색으로, 바로 당시의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李昊榮, 〈新羅 三國統一에 관한 再檢討〉, 《史學志》 15, 1981, 28쪽).
[역주:42권28] 용삭(龍朔)
당나라 高宗 때의 연호. 661년부터 663년까지 3년간 사용되었다.
[역주:42권29] 품일(品日)
7세기의 신라 장군. 화랑 관창의 아버지. 진골 출신으로 관등은 이찬에 이르렀다. 그는 660년 백제를 공격할 때에 김유신, 김흠춘과 함께 좌장군으로 참전하였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군이 백제 계백장군에 의하여 진공이 좌절되어 신라군사가 사기가 저하되었을 때에 아들인 어린 官昌을 전투에 내보내 장렬하게 전사하게 하였고, 태종 무열왕 8년(661) 2월에 백제의 남은 군사들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으므로 大幢將軍으로 출정하였으나 3월 5일 豆良尹城(충남 청양군 정산면) 전투에서 패퇴하였다. 그 해 7월에는 당나라에서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上州總管으로 고구려 공격에 참여하였다. 동년 9월 27일에는 백제의 남은 세력을 雨述城(충남 대전광역시 대덕구)을 공격하여 1천 명을 목베었고, 문무왕 4년(664) 7월에는 고구려의 돌사성을 쳐서 함락시켰고 동왕 8년(668)에는 귀당총관의 한 사람으로 고구려 공격에 참전하였다.
[역주:42권30] 문왕(文王)
?∼665. 태종 무열왕의 셋째 아들. 진덕왕 2년(648)에 아버지의 명으로 당나라에 조공사로 갔다 왔고, 이때에 당나라에서 左武衛將軍의 벼슬을 받았다. 태종 무열왕 2년(655) 3월에 맏형 법민이 태자가 될 때에 이찬이 되었다. 동왕 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며, 5년에는 中侍職에 임용되었다. 동왕 8년(661) 2월 백제의 유민이 사비성을 공격해오자 이를 공격하는 전투에 迊湌 文王은 大幢將軍 品日의 副將으로 참전하였는데 여기서 그의 관등은 두찬인 듯하다. 문무왕 5년(665)에 죽으니 왕자의 예로써 장사를 지냈다.
[역주:42권31] 흠순(欽純)
7세기 신라의 장군. 金庾信의 동생. 欽春이라고도 한다. 어려서 화랑이 되었는데 인덕과 신의가 있어 크게 존경을 받았다. 태종 무열왕 7년(660) 백제의 공격에 장군으로 참여하였다. 황산벌에서 백제 장군 계백의 저지에 막혀 신라군이 사기를 잃었을 때 아들 盤屈을 불러 용맹을 보이라고 권유하여 나가 싸우다가 죽게 하였다. 이어 좌장군 품일도 그의 어린 아들 관창을 전사하게 하여 신라 군대의 사기를 앙양시켜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문무왕 2년(662) 8월에 18명의 장군을 통솔하여 內斯只城(대전광역시 유성구)에 남아 항거하는 백제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663년 2월에는 장군 天存과 함께 居列城(경남 거창)의 백제 군사를 공격하여 700명을 목베었다. 이어서 居勿城(전북 장수군 번암면), 沙平城(전북 임실군 신평면)을 함락시키고, 德安城(충남 논산군 은진면)을 공격하여 1,070명을 목베었다. 문무왕 8년(668) 6월 고구려정벌에서 그는 각간으로서 참전하였고, 곧 이어 나당 전투가 벌어지자 669년 5월 이 문제를 무마하기 위하여 파진찬 양도와 함께 당나라에 갔다가 양도는 감금되고 그는 다음해 정월에 귀국 길에 올라 7월에 신라에 돌아 왔다.
[역주:42권32] 말갈(靺鞨)
퉁구스 계통에 속하는 종족. 秦·漢代에는 肅愼, 北魏대에는 勿吉이라고 칭하여지다가 隋·唐代에 靺鞨이라 칭하여졌고, 宋·元·明대에는 女眞으로 칭하여졌다. 유목민족으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부족생활을 하여 왔다.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면 국가를 건설하였는데 金(1115∼1234)와 淸(1616∼1911)나라를 일으킨 종족이다. 고구려시대에는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를 고구려와 구별하여 병렬해 쓴 것은 그들이 국가를 가진 종족으로 파악한 것이 아니고 언어가 다르고 얼굴 모습이 고구려인과 달라 구별되었고 군대 편성을 따로이 하였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역주:42권33] 북한산성(北漢山城)
이는 당시 신라의 최북방 요새지였다. 현재 서울특별시의 북한산에 있는 석축 산성이다.
[역주:42권34] 문훈(文訓)
?∼667. 신라의 진골 출신. 문무왕 원년(661)에 河西州摠管이 되었고, 다음 해에 中侍職을 맡았다. 문무왕 5년(665)에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나 7년(667)에 죽었다. 그러나 동왕 8년조에 나오는 귀당총관 잡찬 文訓은 同名異人인 듯하다. 그가 동왕 15년(675)에 매초성 전투에서 당나라와 군대와 싸운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두찬일 가능성도 있다. 본서 권5 주석 25 참조.
[역주:42권35] 남천주(南川州)
현재의 경기도 이천 일대에 설치한 州. 진흥왕 29년(568) 10월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주를 설치하였다. 남천주는 진평왕 26년(604)에 폐지되고 북한산주가 설치되었다가 그 후 문무왕 원년(661) 이전에 다시 북한산주가 폐지되고 남천주가 설치되었다. 남천주가 언제 폐지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남천주 기사는 문무왕 2년 8월에 마지막으로 나오고 태종 무열왕 5년(658)부터 한산주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한편 문무왕 8년(668)에 漢城州라는 기록도 나오고 설인귀에게 보낸 문무왕의 답서 중에서는 667년 기사에 한성주의 기록이 보임으로써 문무왕 2년 이후 동왕 7년 사이에 남천주가 폐지되고 漢城州 또는 漢山州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역주:42권36] 주둔하고 있던[鎭守]
북한본, 이재호본, 신호열본에서는 鎭守를 마치 관직처럼 번역하였고, 이병도본에서만 『진수하던』으로 번역하였다. 당시 유인원의 직함은 『都護兼知留鎭』이었음을 〈劉仁願紀功碑〉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본서 권28 龍朔 2년 7월조에서도 『仁願·仁軌等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감교원문편 266쪽)라고 하여 주둔하여 지켰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역주:42권37] 행군이… 남천주(南川州)에 주둔하고 있었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 8월조에서는 대왕이 諸將을 영솔하고 始飴谷停에 이르러 머물렀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옳을 듯하다. 왜냐하면 다음 문장에 『有司의 급보에 의하면 前路에 백제군이 甕山城(현재의 대전광역시 大德區 鷄足山城)에 웅거하여 있다』고 하였으므로, 왕과 유신의 군대가 아직 南川州에 이르지 못한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유인원의 군대도 남천주에 주둔하였다는 표현도 그 사실성이 의심스럽다. 始飴谷停의 위치는 알 수 없다. 유인원도 이 때 南川停에 온 것이 아니라 始飴谷停에 와서 신라군과 같이 행군하였던 것 같다는 견해가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29쪽). 이는 《金庾信行錄》의 찬자가 두찬한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군이 옹산성을 지나간 점으로 보아 웅진에서 유인원 군대와 만나기로 약속하였던 듯 하다.
[역주:42권38] 옹산성(瓮山城)
지금의 대전직할시 大德區 鷄足山城으로 추측된다.
[역주:42권39] 공을 논하여 … 상이 주어졌고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661) 9월 27일조에 의하면 각간 이찬급의 총관에게는 劍이, 대아찬 이상의 총관에게는 창이 주어지고 그 이하에게는 1품이 진급되었다.
[역주:42권40] 대감(大監)
장군직 아래에 두어진 무관직. 나마로부터 아찬의 관등급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본서 권40 주석 71 참조. 중종임신간본 및 주자본 《三國史記》에는 ‘太監’으로 되어 있으나 본서 권40 직관조와 《三國史節要》에 의거하여 교감하였다. 그러나 기왕의 국역본에서는 모두 ‘태감’으로 번역하였다.
[역주:42권41] 영실(靈室)
이는 부처님을 봉안한 佛堂을 의미한다. 영험이 있는 방이라는 뜻에서 사용된 말인 듯하다.
[역주:42권42] 진복(眞服)
本書 신라본기에서는 모두 眞福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문무왕 원년 기사의 내용이 일치함으로 동일인의 다른 표기라고 생각된다. 眞福은 문무왕 원년(661)에 당나라에서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을 때 신라에서도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그 때 誓幢摠管이 되어 옹산성전투에서 백제 유민을 토벌하여 상을 받았고, 김유신을 따라 칠중하에 이르러 식량을 평양 근처에 와 있던 소정방에게 전해주는 일을 하였고, 동왕 5년(665) 2월에는 집사성 中侍가 되어 3년 1개월간 재임하였다. 동왕 8년(668) 6월에는 잡찬으로 大幢摠管이 되어 고구려 공격에 참여하였고, 신문왕 원년(681)에는 舒弗邯(角干)으로서 상대등에 올랐다.
[역주:42권43] 아홉 장군
여기에는 김인문, 진복, 양도의 세 사람이 나오고 있고,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조에도 아홉 장군이라는 표현은 보이나 나머지 다른 장군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원년 7월 17일조에 임용된 총관들 중 일부가 아닌가 한다.
[역주:42권44] 칠중하(七重河)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積城부근의 臨津江을 가리킨다(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 1월 23일조 참조). 《新增東國輿地勝覽》에 積城縣은 원래 고구려 七重縣이었다고 한다. 《靑丘圖》에도 七重城이 적성현 임진강 가에 표시되어 있다. 善德王代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이었다(兪元載, 〈三國史記 僞靺鞨考〉, 《사학연구》 29, 1979, 10∼11쪽).
[역주:42권45] 장새(獐塞)
지금의 황해도 遂安. 본서 권35 주석 201 참조.
[역주:42권46] 평양이 멀지 않았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조에는 장새로부터 평양까지는 36,000보였다고 한다.
[역주:42권47] 보기감(步騎監)
步騎幢의 군관. 본서 권40 주석 73 참조.
[역주:42권48] 열기(裂起)
김유신의 부하로 김유신이 화랑이었을 때에 그의 낭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권47 열전 열기전 참조.
[역주:42권49] 놀 때에 너의 뜻과 절의를 알았다
이는 김유신이 화랑시절에 낭도였던 열기와 더불어 생활하여서 그와 일찍부터 깊이 알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같다. 특히 ‘遊’라는 용어는 화랑도의 단체생활을 뜻하는 것으로서 《三國遺事》와 《三國史記》에 일반적으로 쓰여지고 있다(盧泰敦, 〈羅代의 門客〉, 《韓國史硏究》 21·22 합집, 1978, 16쪽).
[역주:42권50] 평양으로 가서
본서 권47 열전 裂起傳에는 이틀이 걸려 갔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역주:42권51] 양오(楊隩)
문무왕 2년 2월 6일에 김유신의 부대가 다다른 지역으로 평안남도 江東(현재의 평양시 강동군)으로 본 견해가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31쪽).
[역주:42권52] 군승(軍勝)
김유신의 庶子. 어머니는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역주:42권53] 군량을 보냈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662)조에는 출정시에 수레 2천여 량, 쌀 4천 석, 租 2만2천여 섬을 싣고 떠났다고 쓰여 있고 권47 열전 裂起傳에는 租 22,250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42권54] 정방은 … 당으로 돌아갔다
본서 권6 신라본기와 권22 고구려본기 권44 열전의 金仁問傳에는 눈이 많이 내렸으므로 싸울 수가 없어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주:42권55] 표하(䕯河)
임진강의 한 지류.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조에서는 ‘?川’으로 쓰여 있고, 권7의 문무왕 11년조의 설인귀에 보낸 답서 중에는 ‘瓢瀘河’로 쓰여 있다.
[역주:42권56] 만노(萬弩)
한 번에 수 많은 화살이 함께 발사되는 병기.
[역주:42권57]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았고, 1만여 명을 목베었다
본서 권44 열전 金仁問傳에는 이때에 위의 전과 이외에 5,0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술하고 있고 권6의 신라본기 문무왕 2년(662)조에는 『小兄 阿達兮 등을 포로로 잡았고, 무기 1만여 점을 노획하였다』고 다르게 기술하고 있다.
[역주:42권58] 상을 내려 식읍을 봉해주고 벼슬을 차등있게 하였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662)조에는 논공하여 本彼宮의 재물과 토지, 奴僕을 나누어 유신과 인문에게 주었다고 쓰고 있다.
[역주:42권59] 용삭(龍朔) 3년 계해
龍朔은 당나라 고종대의 연호로 661부터 663년까지 사용되었다. 계해년은 663년이다.
[역주:42권60] 백제의 … 장수들이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조에는 『백제의 옛 장수 福信과 승려 道琛이 왕자 扶餘豊을 세워 부흥운동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주:42권61] 두솔성(豆率城)
이곳에 처음 나오는 지명. 솔의 발음이 ‘률’(邦音), Lu(中國音)임을 보아, 豆率이 周留와 음이 비슷하다고 하여 周留城으로 추측되고 있다(이병도, 《國譯 三國史記》, 631쪽). 또한 김유신전에 나오는 전후의 내용으로 보아도 주류성의 기록인 듯하다.
[역주:42권62] 왜에 군사를 청하여 후원을 삼으니
왜병에 대한 기록은 본서 권6 신라본기에는 왜에 관한 기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으나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의 부흥관련기사에는 왜인이 4차례 전투에서 패배하고 400척의 병선이 불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42권63] 대왕이 친히 유신, … 죽지 등 장군을 인솔하고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 5월조 기사에서는 28장군, 또는 30장군을 인솔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주:42권64] 웅진주(熊津州)
현재의 충남 공주시 지역. 본서 권36 주석 2 참조.
[역주:42권65] 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 말미의 부흥관련 기사에서는 당나라에서 來援온 孫仁師의 군대와 유인원의 군대를 웅진에서 합쳐 육로로 주류성으로 진격하고, 수군은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내려가서 주류성을 공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에는 이 부분의 서술이 약간 소략하다.
[역주:42권66] 백제인과 왜인이 … 나오자 아군이 … 크게 이겼다
본서 권6 신라본기에서는 왜군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고 다만 문무왕 11년 설인귀의 편지에 대한 답서 안에서 왜병 1천 척이 백강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하였으며, 본서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의 말미 부흥관련 기사에는 왜병을 네 차례 격파하였다고 쓰고 있다.
[역주:42권67] 임존성(任存城)
현재 충남 예산군 대흥면의 鳳首山城. 임존성은 백제 멸망 직후부터 663년 말까지 백제부흥군의 주근거지였다. 본서 권36 지리지 熊州條에 『任城郡 本百濟任存城 景德王改名 今大興郡』이라고 쓰여 있다.
[역주:42권68] 임존성만은 …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조와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1년조의 부흥군 활동기록에는 任存城에는 遲受信이 저항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주:42권69] 11월 20일에 서울에 와서
본서 권6 신라본기 문무왕 3년(663)조에는 11월 4일 군사를 돌렸다 하니 충남 예산에서 경주까지 16일이 걸렸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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