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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歷史/三國史記

列傳 第十 甄萱 子神劒·龍劒·良劒·金剛·壻英規 附

by 柳川 2019. 12. 25.
列傳 第 甄萱 子神劒·龍劒·良劒·金剛·壻英規 附


甄萱 尙州加恩縣人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介 以農自活 後起家爲將軍 初萱生孺褓時 父耕于野 母餉之 以兒置于林下 虎來乳之 鄕黨聞者異焉 及壯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從軍入王京 赴西南海防戍 枕戈待敵 其勇氣恒爲士卒先 以勞爲裨將

唐昭宗景福元年 是新羅眞聖王在位六年 嬖竪在側 竊弄政柄 綱紀紊弛 加之以饑饉 百姓流移 羣盜蜂起 於是萱竊有覦心 嘯聚徒侶 行擊京西南州縣 所至響應 旬月之間 衆至五千人 遂襲武珍州 自王 猶不敢公然稱王 自署爲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

是時 北原賊 ※吉雄强 弓裔自投爲麾下 萱聞之 遙授良吉職爲裨將 萱西巡至完山州 州民迎勞 萱喜得人心 謂左右曰 “吾原三國之始 馬韓先起 後赫世勃興 故辰·卞從之而興 於是百濟開國金馬山 六百餘年  ※章中 唐高宗以新羅之請 遣將軍蘇定方 以船兵十三萬越海 新羅金庾信卷土 歷黃山至泗 ※ 與唐兵合攻百濟滅之 今 ※敢不立都於完山 以雪義慈宿憤乎” 遂自稱後百濟王 設官分職 是唐光化三年 新羅孝恭王四年也

遣使朝吳越 吳越王報聘 仍加檢校 ※保 餘如故 天復元年 萱攻大耶城不下 開平四年 萱怒錦城投于弓裔 以步騎三千圍攻之 經旬不解 乾化二年 萱與弓裔戰于德津浦
貞明四年戊寅 鐵圓京衆 心忽變 推戴 我太祖卽位 萱聞之 秋八月 遣一吉湌閔 ※稱賀 遂獻孔雀扇及地 ※山竹 ※
又遣使入吳越進馬 吳越王報聘 加授中大夫 餘如故
六年 萱率步騎一萬 攻陷大耶城 移軍於進禮城 新羅王遣阿湌金律 求援於太祖 太祖出師 萱聞之 引退 萱與我太祖陽和而陰剋 同光二年秋七月 遣子須彌 ※ 發大耶·聞韶二城卒 攻曹物城 城人爲太祖固守且戰 須彌强失利而歸 八月 遣使獻驄馬於太祖
三年冬十月 萱率三千騎 至曹物城 太祖亦以精兵來 與之确 時萱兵銳甚 未決勝否 太祖欲權和以老其師 移書乞和 以堂弟王信爲質 萱亦以外甥眞虎交質
十二月 攻取居昌等二十餘城 遣使入後唐稱藩 唐策授檢校 ※尉兼侍中判百濟軍事 依前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海東四面都統指揮兵馬制置等事百濟王 食邑二千五百戶 四年眞虎暴卒 萱聞之 疑故殺 卽囚王信獄中 又使人請還前年所送驄馬 太祖笑還之
天成二年秋九月 萱攻取近 ※城 燒之 進襲新羅高鬱府 逼新羅郊圻 新羅王求救於太祖 冬十月 太祖 出師援助 萱猝入新羅王都 時王與夫人嬪御出遊鮑石亭 置酒娛樂 賊至狼狽不知所爲 與夫人歸城南離宮 諸侍從臣 ※及宮女伶官 皆陷沒於亂兵 萱縱兵大掠 使人捉王 至前戕之 便入居宮中 强引夫人亂之 以王族弟金傅嗣立 然後虜王弟孝廉·宰相英景 又取國帑·珍寶·兵仗 子女百工之巧者 自隨以歸
太祖以精騎五千 要萱於公山下大戰 太祖將金樂·崇謙死之 諸軍敗北 太祖 僅以身免 萱乘勝取大木郡 契丹使裟姑·麻咄等三十五人來聘 萱差將軍崔堅 伴送麻咄等 航海北行 遇風至唐登州 悉被戮死
時新羅君臣以衰季 難以復興 謀引我太祖 結好爲援 甄萱自有盜國心 恐太祖先之 是故 引兵入王都作惡 故十二月日寄書太祖曰 “昨者國相金雄廉等 將召足下入京 有同鼈應黿聲 是欲鷃披隼翼 必使生靈塗炭 宗社丘墟 僕是用先着祖鞭 獨揮韓鉞 誓百寮如皦日 諭六部以義風 不意姦臣遁逃 邦君薨變 遂奉景明王之表弟 ※康王之外孫 勸卽尊位 再造危邦 喪君有君 於是乎在 足下勿詳忠告 徒聽流言 百計窺覦  ※方侵擾 尙不能見僕馬首 拔僕牛毛 冬初 都頭索湘 束手於星山陣下 月內 左將金樂 曝骸於美理寺前 殺獲居多 追擒不少 强羸若此 勝敗可知 所期者 掛弓於平壤之樓 飮馬於浿江之水 然以前月七日 吳越國使班尙書 ※ 傳王詔旨 知卿與高麗 久通歡好 共契鄰盟 比因質子之兩亡 遂失和親之舊好 互侵疆境 不戢干戈 今專發使臣 赴卿本道 又移文高麗 宜各相親比 永孚于休 僕義篤尊王 情深事大 及聞詔諭 卽欲祗承  ※慮足下 欲罷不能 困而猶鬪 今錄詔書寄呈 請留心詳悉 且㕙 ※迭憊 終必貽譏 蚌鷸相持 亦爲所笑 宜迷復之爲戒 無後悔之自貽”
三年正月  ※祖答曰 “伏奉吳越國通和使 班尙書所傳詔書一道 兼蒙足下辱示長書叙事者 伏以華軺膚使 爰致制書 尺素好音 兼承敎誨 捧芝檢而雖增感激  ※華牋而難遣嫌疑 今託廻軒 輒敷危 ※ 僕仰承天假 俯迫人推 過叨將帥之權 獲赴經綸之會 頃以三韓厄會 九土凶荒 黔黎多屬於黃巾 田野無非於赤土 庶幾弭風塵之警 有以救邦國之災 爰自善隣 於焉結好 果見數千里農桑樂業 七八年士卒閑眠 及至酉年 維時陽月 忽焉生事 至於交兵 足下始輕敵 以直前 若螳蜋 ※之拒轍 終知難而勇退 如蚊子之負山 拱手陳辭 指天作誓 今日之後 永世歡和 苟或渝盟 神其殛矣 僕亦尙止戈之武 期不殺之仁 遂解重圍 以休疲卒 不辭質子 但欲安民 此則我有大德於南人也 豈謂歃血未乾 凶威復作 蜂蠆之毒 侵害於生民 狼虎之狂 爲梗於畿甸 金城窘忽 黃屋震驚 仗義尊周 誰似桓·文之覇 乘間謀漢 唯看莽·卓之姦 致使王之至尊 枉稱子於足下 尊卑失序 上下同憂 以爲非有元輔之忠純 豈得再安於社稷 以僕心無匿惡 志切尊王 將援置於朝廷 使扶危於邦國 足下見毫釐之小利 忘天地之厚恩 斬戮君王 焚燒宮闕 葅醢卿士 虔劉士民 姬姜則取以同車 珍寶則奪之 ※載 元惡浮於桀·紂 不仁甚於 ※梟 僕怨極崩天 誠深却日 誓效鷹鸇之逐 以申犬馬之勤 再擧干戈 兩更槐柳 陸擊則雷馳電擊 水攻則虎搏龍騰 動必成功 擧無虛發 逐尹邠於海岸 積甲如山 擒鄒 ※城邊 ※ 伏尸蔽野 燕山郡畔 斬吉奐於軍前 馬利城邊 戮隨䎸於纛下 拔任存之日 邢積等數百人捐軀 破淸 ※之時 直心等四五輩授首 桐藪望旗而潰散 京山銜璧以投降 康州則自南而來 ※ 羅府則自西移屬 侵攻若此 收復寧遙 必期泜水營中 雪張耳千般之恨 烏江岸上 成漢王一捷之功 竟息風波 求淸寰海 天之所助 命 ※何歸 況承吳越王殿下 德洽包荒 仁深字小 特出綸於丹禁 諭戢難於靑丘 旣奉訓謀 敢不尊奉 若足下祗承睿旨 悉戢凶機 不惟副上國之仁恩 抑可紹海 ※之絶緖 若不過而能改 其如悔不可追”
夏五月萱潛師襲康州 殺三百餘人 將軍有文生降 秋八月 萱命將軍官昕 領衆築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擊之 退保大耶城 冬十一月 萱選勁卒 攻拔缶谷 ※ 殺守卒一千餘人 將軍楊志·明式等 ※降 四年秋七月 萱以甲兵五千人 攻義城府 城主將軍洪術戰死 太祖哭之慟曰 “吾失左右手矣” 萱大擧兵 次古昌郡甁山之下 與太祖戰 不克 死者八千餘人 翌日 萱聚殘兵 襲破順州城 將軍元 ※不能禦 棄城夜遁 萱虜百姓 移入全州 太祖以元 ※前有功宥之 改順州 號下枝縣
長興三年 甄萱臣龔直 勇而有智略 來降太祖 萱收龔直二子一女 烙斷股筋 秋九月 萱遣一吉湌相貴 以舡兵入高麗禮 ※江 留三日 取鹽·白·貞三州船一百艘焚之 捉猪山島牧馬三百匹而歸 淸泰元年春正月 萱聞 太祖屯運州 遂簡甲士五千至 將軍黔弼 及其未陣 以勁騎數千突擊之 斬獲三千餘級 熊津以北三十餘城 聞風自降 萱麾下術士宗訓·醫 ※訓謙·勇將尙達·崔弼等降於太祖
甄萱多娶妻 有子十餘人 第四子金剛 身長而多智 萱特愛之 意欲傳其位 其兄神劒·良劒·龍劒等知之 憂悶 時良劒爲康州都督 龍劒爲武州都督 獨神劒在側 伊湌能奐 使人往康·武二州 與良劒等陰謀 至淸泰二年春三月 與波珍湌新德·英順等 勸神劒 幽萱於金山佛宇 遣人殺金剛 神劒自稱大王 大赦境內 其敎書曰 『如意特蒙寵愛 惠帝得以爲君 建成濫處元良 太宗作而卽位 天命不易 神器有歸 恭惟 大王神武超倫 英謀冠古 生丁衰季 自任經綸 徇地三韓 復邦百濟 廓淸塗炭 而黎元安集 鼓舞風雷 而邇遐駿奔 功業幾於重興 智慮忽其一失 幼子鍾愛 姦臣弄權 導大君於晉惠之昏 陷慈父於獻公之惑 擬以大寶授之頑童 所幸者上帝降衷 君子改過 命我元子 尹玆一邦 顧非震長之才 豈有臨君之智 兢兢慄慄 若蹈冰淵 宜推不次之恩 以示 ※新之政 可大赦境內 限淸泰二年十月十七日昧爽以前 已發覺未發覺 已結正未結正 大辟已下 罪咸赦除之 主者施行』
萱在金山三朔 六月 與季男能乂·女子 ※福·嬖妾姑比等逃奔錦城 遣人請見於太祖 太祖喜 遣將軍黔弼·萬歲等 由水路勞來之 及至 待以厚禮 以萱十年之長 尊爲尙父 授館以南宮 位在百官之上 賜楊州爲食邑 兼賜金帛蕃縟·奴婢各四十口·內廐馬十匹 甄萱壻將軍英規 密語其妻曰 “大王勤勞四十餘年 功業垂成 一旦以家人之禍 失地投於高麗 夫貞女不事二夫 忠臣不事二主 若捨己君以事逆子 則何顔以見天下之義士乎 況聞高麗王公 仁厚勤儉 以得民心 殆天啓也 必爲三韓之主 盍致書以安慰我王 兼殷 ※於王公 以圖將來之福乎?” 其妻曰 “子之言是吾意也” 於是 天福元年二月 遣人致意 遂告太祖曰 “若擧義旗 請爲內應 以迎王師” 太祖大喜 厚賜其使者而遣之 兼謝英規曰 “若蒙恩一合 無道路之梗 則先致謁於將軍 然後升堂拜夫人 兄事而姉尊之 必終有以厚報之 天地鬼神 皆聞此言” 夏六月 萱告曰 “老臣所以投身於殿下者 願仗殿下威稜 以誅逆子耳 伏望大王借以神兵 殲其賊亂 則臣雖死無憾” 太祖從之
先遣太子武·將軍述希 領步騎一萬 趣天安府 秋九月 太祖率三軍 至天安 合兵進次一善 神劒以兵逆之 甲午 隔一利川 相對布陣 太祖與尙父萱觀兵 以大相堅權·述希·金山·將軍龍吉·奇彦等 領步騎三萬爲左翼 大相金鐵·洪儒·守鄕·將軍 ※順·俊良等 領步騎三萬爲右翼 大匡順式·大相兢俊·王謙·王乂·黔弼·將軍貞順·宗熙等 以鐵騎二萬 步卒三千及黑水鐵利諸道勁騎九千五百爲中軍 大將軍公萱 將軍王含允 以兵一萬五千爲先鋒 鼓行而進 百濟將軍孝奉·德述·明吉等 望兵勢大而整 棄甲降於陣前 太祖勞慰之 問百濟將帥所在 孝奉等曰 “元帥神劒 在中軍” 太祖命將軍公萱 直擣中軍 一軍齊進挾擊 百濟軍潰北 神劒與二弟及將軍富達·小達·能奐等四十餘人生降 太祖受降 除能奐 餘皆慰勞之 許令與妻孥上京 問能奐曰 “始與良劒等密謀 囚大王立其子者 汝之謀也 爲臣之義當如是乎” 能奐俛首不能言 遂命誅之 以神劒僭位爲人所脅 非其本心 又且歸命乞罪 特原其死 一云三兄弟 皆伏誅
甄萱憂懣發疽 數日卒於黃山佛舍 太祖軍令嚴明 士卒不犯秋毫 故州縣案堵 老幼皆呼萬歲 於是存問將士 量材任用 小民各安其所業 謂神劒之罪 如前所言 乃賜官位 其二弟與能奐罪同 遂流於眞州 尋殺之 謂英規 “前王失國後 其臣子無一人慰藉者 獨卿夫妻 千里嗣音 以致誠意 兼歸美於寡人 其義不可忘” 仍許 ※左丞 賜田一千頃 許借驛馬 ※十五匹 以迎家人 賜其二子以官 甄萱起唐景福元年 至晉天福元年 共四十五年而滅

【論曰】 新羅數窮道喪 天無所助 民無所歸 於是群盜投隙而作 若猬毛然 其劇者 弓裔·甄萱二人而已 弓裔 本新羅王子 而反以宗國爲讐 圖夷滅之 至斬先祖之畵像 其爲不仁甚矣 甄萱 起自新羅之民 食新羅之祿 而包藏禍心 幸國之危 侵軼都邑 虔劉君臣 若禽獼而草薙之 實天下之元惡大憝 故弓裔見棄於其臣 甄萱産禍於其子 皆自取之也 又誰咎也 雖項羽·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興 而況裔·萱之凶人 豈可與 我太祖相抗歟 但爲之歐民者也


[교주:50권28] 良
本書 卷50 弓裔傳 및 卷11 新羅本紀 眞聖王 4年條 「梁」. 榮·烈·舜 「梁」.
[교주:50권29] 摠
原本·誠庵本 「惣」. 「摠」의 撝字.
[교주:50권30] 沘
原本 「泚」. 誠庵本에 의거 수정. 鑄字本 「泚」. 榮·烈 「泚」.
[교주:50권31] 予
原本 「子」. 誠庵本·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50권32] 太
原本·誠庵本 「大」.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大」. 朝·北·權·烈·燾 「大」.
[교주:50권33] 郃
原本 「郤」. 誠庵本·三國史節要·高麗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郤」. 榮·朝·北·權·烈·燾·浩 「郤」.
[교주:50권34] 理
三國史節要·高麗史 「異」.
[교주:50권35] 箭
「遂獻…竹箭」은 高麗 太祖 3年(920) 기사이다. 高麗史節要·高麗史 참조.
[교주:50권36] 强
三國史節要·高麗史·高麗史節要(高麗 太祖 7年條) 「康」. 以下 同.
[교주:50권37] 太
原本·誠庵本 「大」. 三國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大」. 朝·權·烈·燾 「大」.
[교주:50권38] 品
本書 卷12 景哀王 4年條 「巖」. 燾 「品(嵒)」.
[교주:50권39] 寮
三國史節要·高麗史·高麗史節要 「僚」. 「寮」와 「僚」는 相通.
[교주:50권40] 獻
本書 卷11 新羅本紀 및 三國史節要(卷14-20面) 「憲」.
[교주:50권41] 多
原本 「灸」. 誠庵本·三國史節要·高麗史·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50권42] 至
原本 「主」. 三國史節要·高麗史에 의거 수정. 鑄字本 「主」.
[교주:50권43] 但
原本 「恒」. 誠庵本·三國史節要·高麗史에 의거 수정. 榮·朝·北·權·烈·燾·浩 「恒」.
[교주:50권44] 獹
原本 「▼(爿+盧)」. 誠庵本·三國史節要·高麗史에 의거 수정. 鑄字本 「▼(爿+盧)」. 榮·朝·權·烈 「▼(爿+盧)」.
[교주:50권45] 太
原本·誠庵本 「大」. 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50권46] 闢
原本 「鬪」. 誠庵本·三國史節要·高麗史節要·高麗史(太祖 11年條)에 의거 수정. 榮·北·培·烈·燾 「開」.
[교주:50권47] 衽
原本 「枉」. 誠庵本·三國史節要·高麗史節要·高麗史(太祖 11年條)·鑄字本에 의거 수정. 朝·北·權 「枉」, 燾 「枉(衽)」.
[교주:50권48] 螳蜋
「螳蜋」, 三國史節要 「螗螂」. 高麗史·高麗史節要에 의거하여 그대로 둔다. 「螗」 과 「螳」은 뜻이 다르며 「蜋」은 「螂」과 같은 뜻이다. 朝·烈·舜·浩 「蟷」.
[교주:50권49] 稛
原本·誠庵本 「稇」. 三國史節要·鑄字本·高麗史에 의거 수정. 허성도 勘校.
[교주:50권50] 獍
原本·誠庵本 「鏡」. 三國史節要·高麗史·高麗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교주:50권51] 造
高麗史·高麗史節要·三國史節要 「祖」.
[교주:50권52] 城邊
「城邊」, 三國史節要·高麗史·高麗史節要 「邊城」.
[교주:50권53] 州
原本·誠庵本 「川」. 三國史節要·高麗史·高麗史節要에 의거 수정. 榮·朝·北·權·烈·燾·浩 「川」.
[교주:50권54] 歸
原本에는 없으나 三國史節要·高麗史·高麗史節要에 의거 추가. 鑄字本 原本과 同. 榮·朝·北·權·培·烈·燾·浩 原本과 同.
[교주:50권55] 欲
三國史節要·高麗史·高麗史節要 「將」.
[교주:50권56] 東
「海東」, 三國史節要·高麗史·高麗史節要 「東海」.
[교주:50권57] 城
「缶谷城」, 三國史節要·高麗史節要·高麗史 「烏於谷城」.
[교주:50권58] 生
三國史節要 「出」.
[교주:50권59] 逢
三國史節要·高麗史·高麗史節要 「奉」.
[교주:50권60] 逢
上同.
[교주:50권61] 成
原本·誠庵本 「城」. 高麗史·高麗史節要·三國史節要·鑄字本에 의거 수정. 北 「城」.
[교주:50권62] 者
高麗史節要 卷1 太祖 17年條 「師」.
[교주:50권63] 惟
「維」와 相通.
[교주:50권64] 哀
原本 「衰」. 誠庵本·三國史節要·高麗史·高麗史節要에 의거 수정. 鑄字本 「衰」. 榮·朝·北·權·烈·浩 「衰」, 燾 「衰(哀)」.
[교주:50권65] 勤
「殷勤」, 三國史節要(卷14-35面) 「慇懃」. 「殷勤」과 「慇懃」은 相通.
[교주:50권66] 王
高麗史·高麗史節要 「三」.
[교주:50권67] 職
原本·誠庵本 「聀」. 「職」의 俗字.
[교주:50권68] 二
原本 「三」. 誠庵本에 의거 수정. 高麗史節要·鑄字本 「三」.



[역주:50권39] 견훤(甄萱)
867∼935. 후백제의 건국자. 재위 892∼935. 또는 889∼835. 상주 가은현 사람. 아버지 阿慈介는 농민출신으로 후에 장군이 되었다. 부인에는 상원부인과 남원부인이 있었다. 견훤은 장자로 동생에 能哀, 龍蓋, 寶蓋 小蓋가 있었다. 견훤은 서남해를 지키는 부대장으로 나아갔다가 진성왕 6년(892)에 지방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지방을 공략하여 휘하에 장악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고 900년에 전주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부흥을 표방하고 나왔다. 910년 궁예 휘하의 왕건이 나주지역을 점령하자 步騎 3천을 거느리고 이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920년 견훤은 步騎 1만 명으로 대야성을 쳐 함락하고 청도에까지 진입하자, 경명왕은 김률을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다. 924년 견훤은 그의 아들 수미강을 보내어 조물성(현재의 경북 안동)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다음 해 고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러나 인질로 보낸 견훤의 생질 眞虎가 병사함을 계기로 고려와의 화친이 깨졌다. 927년 近品城(경북 문경시 산양면)을 공격하고, 高鬱府(경북 영천)를 습격하고 이어서 11월에는 경주를 습격하여 경애왕을 포석정에서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웠으며 대구 公山 전투에서 고려 태조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929년 안동전투에서 고려 태조의 군대에게 패배하여 세력이 약화되었다. 아들 10여명을 두었는데 말년에 넷째아들 금강에게 傳位하려 하다가 935년 3월에 장자 신검에 의하여 금산사에 유폐되자 사위 박영규와 함께 나주로 도망쳐 고려 태조에 투항하였다. 고려 태조는 나이가 10살이 더 많다고 하여 尙父(상보)라 칭하고 楊州를 식읍으로 주었다. 자청하여 신검을 치는 천안 전투에 참가하여 아들에게 복수하였으나 번민으로 連山의 佛寺에서 죽었다.
견훤은 거란과 후당,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실정에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못하여 결국 후백제는 고려에 멸망되었다.
[역주:50권40] 가은현(加恩縣)
현재의 경북 문경군 가은읍이다. 본서 권34잡지 지리1의 古寧郡條에 그 領縣으로 ‘加善縣’이 있고 그 본래 이름은 ‘加害縣’이었다가 경덕왕 때에 ‘嘉善縣’으로 고쳤으며, 고려조에 ‘加恩縣’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고려 공양왕 2년에 聞慶으로 이속되었다. 본서 권34 주석 175참조.
[역주:50권41]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사람이다
견훤의 출신지에 대하여 경북 상주설을 비판하고 《三國遺事》에 인용된 古記의 기록에 의하여 光州 부근일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金庠基, 〈甄萱의 家鄕에 대하여〉, 《가람李秉岐博士頌壽紀念論文集》, 1966: 《東邦史論叢》, 1974 재수록 참조).
[역주:50권42] 견(甄)으로 씨(氏)를 삼았다
본성은 이씨인데 견씨로 改姓하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견훤 자체가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이를 성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그의 아들이 이를 계속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성으로 본 것은 김부식의 해석일 것으로 생각한다.
[역주:50권43] 아자개(阿慈介)
견훤의 아버지. 본서 권12 신라본기 景明王 2년(918)조에 나오는 尙州의 賊首로서 고려 태조에게 귀부하였다는 阿慈蓋와는 음이 같으나 다른 사람으로 판단된다. 그러므로 본서와 《三國遺事》에서는 이를 기록하지 않았다. 만약 견훤의 아버지였다면 고려측에서 이를 단순히 賊首로만 기록하였을 리가 없고, 이 때는 견훤이 칭왕한 지 26년이나 되는 시기였으므로 상주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安鼎福의 《東史綱目》에서와 金庠基는 이를 동명이인일 것으로 보았으나 申虎澈은 동일 인물로 파악하였다(〈後百濟 甄萱政權 硏究〉, 1988, 서강대학박사학위논문, 19∼22쪽).
[역주:50권44]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 기이하게 여겼다
본서 열전 기록과는 달리 《三國遺事》에는 견훤에 대하여 국초에 편찬된 것으로 생각되는 《三國史》 본전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三國史 本傳云 甄萱尙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个 以農自活 光啓中據沙弗城(今尙州) 自稱將軍 有四子 皆知名於世 萱號傑出 多智略』
그리고《三國遺事》에는〈李碑家記〉를 인용하여 아자개는 진흥대왕의 혈손이라는 설을 적고 있으며, 〈古記〉를 인용하여 그의 출생설화로서 광주북촌의 딸과 지렁이가 견훤을 났다는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이는 그의 어머니가 광주 출신일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역주:50권45] 비장(裨將)
이병도는 보좌관으로 보았고, 신호철은 副大將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에는 副將이라는 뜻과 一方專任之將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는 바 여기서는 후자의 개념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역주:50권46] 정권
본서 원문에는 ‘政柄’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에는 ‘國柄’으로 표기되어 있다. ‘政柄’의 직역은 인사권이라 할 수 있으나 ‘國柄’을 참고하여 ‘정권’으로 번역하였다.
[역주:50권47] 왕의 총애를 … 해이해졌고
본서 권11 신라본기 진성왕 2년조에 각간 위홍이 죽은 후 소년 미장부 2∼3인을 궁궐에 몰래 끌어들여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기니 아첨꾼이 득세하고 뇌물이 횡행하고, 상벌이 불공정하여 기강이 해이해지고 무너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역주:50권48]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본 열전에서는 892년을 후백제 원년으로 보았으나 《三國遺事》에는 원년을 88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본 열전에 나라가 42년간 지속되었다는 기록을 庚寅(930)이라는 기록으로부터 역산하여도 원년은 889년이 합당하다(신호철, 앞의 논문, 43∼46쪽). 또한 남원 實相寺의 〈片雲浮屠碑片〉에 『政開十年 庚午』(910)의 기록이 있으니 이는 견훤이 나라를 전주로 옮긴 후에 연호를 칭하였다고 생각한다(같은 논문, 56∼7쪽).
[역주:50권49] 도독전·무·공등주군사(都督全武公等州軍事)
전주, 무주, 공주는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백제의 옛 땅을 셋으로 나누어 설치한 州로서 견훤이 신라의 관직을 自署할 때부터 백제의 계승을 표방하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박한설, 〈후삼국의 성립〉,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7, 619∼620쪽).
[역주:50권50] 양길(良吉)
본서 권50 열전 궁예전과 신라본기에서는 梁吉로 기록되어 있다. 그에 관한 행적은 본권 주석 16 참조.
[역주:50권51] 총장(總章) 연간
총장은 당 고종의 연호. 668∼9년 2년간 사용되었다. 이는 잘 못 말해진 것이고 백제가 멸해진 660년은 顯慶中(顯慶5년)이라 표현되었어야 올바른 것이다.
[역주:50권52] 후백제왕
이는 백제왕이어야 한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에는 百濟로 기록되어 있다. ‘後’자는 《三國史記》 撰者가 써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역주:50권53] 오월(吳越)
오대 십국 중의 한 나라로 현재 양자강 남쪽에 절강지방에 있었던 나라. 연호는 독자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오월국은 錢鏐가 다스리고 있었다. 後梁 태조로부터 오월국왕에 봉하여졌다. 5왕 72년 만인 978년에 宋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 《新五代史》 권67 吳越世家 참조. 《舊五代史》에는 권133 세습열전에 오월국 관련 기사가 실려 있다.
[역주:50권54] 나머지 관직은 전과 같았다
이는 관직명이 앞에 기록되었을 경우 바뀌거나 새로 더하여진 관직명만을 쓰고 이하의 관직은 전과 같다고 쓸 때의 표현방식인데 오월에서 책봉된 기록이 앞에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두찬이다.
[역주:50권55] 천복(天復)
당 나라 昭宗의 연호. 901∼903년 4년간 사용되었다.
[역주:50권56]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 기사는 본서 권12 신라본기 효공왕 5년조에 나오고 다음과 같은 기록이 첨부되어 있다. 『移軍錦城之南 奪掠沿邊部落而歸』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의 신빙성은 지리적 상황으로 보아 의심스럽다.
[역주:50권57] 개평(開平)
後梁 태조의 연호. 908∼911년 4년간 사용되었다.
[역주:50권58] 건화(乾化)
後梁 태조의 연호. 911∼914년 4년간 사용되었다. 태조는 2년 3월에 시해되었으나 말제가 즉위한 후에도 2년간 더 사용되었다.
[역주:50권59] 덕진포(德津浦)
영암의 일출산의 서쪽 포구. 이병도는 현재 충남 대덕군 회덕으로 보았다.
[역주:50권60] 정명(貞明)
後梁 末帝의 연호. 915∼920년 6년간 사용되었다.
[역주:50권61] 공작선(孔雀扇) … 바쳤다
공작의 깃으로 만든 부채. 이 기사는 《高麗史》 권1 世家 태조 3년 9월조에 견훤이 阿餐 功達을 보내어 고려 태조에게 바친 것인데 본 열전에서는 태조 원년조에 함께 기록하였다.
[역주:50권62] 진례성(進禮城)
경남 金海郡 進禮面 新安里·松亭里에 걸쳐 있는 토성, 즉 進禮山城을 가리킨다(金侖禹, 〈新羅末의 仇史城과 進禮城考〉, 《史學志》 22, 155∼160쪽). 본서 권36 주석 132 참조.
今西龍, 이병도, 신호철은 경남 청도로, 이재호는 전북 무주에 비정하였다. 본서 권36 지리지 전주조에는 무주의 경덕왕대 군현 이름으로 進禮郡이 보이고 있으나 본서 권12 신라본기 경명왕 4년조에 대야성을 공격하고 진례성으로 진군하였다고 한 점으로 보아 무주설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역주:50권63] 동광(同光)
後唐 시조 莊宗의 연호. 924∼926년 3년간 사용되었다.
[역주:50권64] 수미강(須彌强)
견훤의 아들이다. 《高麗史》와 《高麗史節要》 태조 7년조에는 ‘强’을 ‘康’으로 표기하였고, 良劍이 추가되어 기록되어 있다. 박한설과 신호철은 수미강을 견훤의 장자 神劍으로 파악하였다(신호철, 〈후백제 금강에 대하여〉, 《대구사학》 18, 1973, 및 신호철, 앞의 논문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88쪽).
[역주:50권65] 조물성(曹物城)
《高麗史》 세가 및 《高麗史節要》의 태조 7년조 그리고 《高麗史》 권92 朴守卿傳에는 曹物郡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북 선산의 금오산성, 금릉군 조마면, 의성등으로 비정되고 있으나 확실한 현재의 위치는 알수 없다.
[역주:50권66] 총마(驄馬)
《高麗史》 世家와 《高麗史節要》 太祖 9년조에는 절영도의 驄馬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50권67] 승패를 겨루었다[與之确]
《漢書》권54 李廣傳에 『數與虜确』으로 나오고 이에 대한 安師古의 註에 ‘确’을 ‘승패를 겨룬다’로 설명하였다.
[역주:50권68] 왕신(王信)
고려 태조의 사촌동생. 품계는 元尹으로 후백제와 고려의 친선이 맺어지자 고려측의 인질로 후백제에 보내졌다. 그러나 후백제의 진호가 고려에 인질로 온 다음해 병사하자 고려에서 죽였다고 하여 후백제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시신은 태조 10년에 돌아왔다(《高麗史》 권1 世家 및 《高麗史節要》 권1 태조 9년·10년조 참조).
[역주:50권69] 사촌동생 왕신(王信)을 … 진호(眞虎)를 인질로 교환하였다
《고려사절요》와 《고려사》 세가에는 庾黔弼의 군대가 가세하여 고려의 군세가 강해지자 견훤이 두려워하여 먼저 인질을 보내어 화친을 청한 것으로 되어 있고 또한 견훤의 나이가 10세 위이므로 尙父라고 칭하였다고 추가되어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본 기록이 옳다고 생각된다.
[역주:50권70]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이 사건은 《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에 의하면 926년 4월이었다.
[역주:50권71] 옥중에 가두고
《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 太祖 9년조에는 왕신을 살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보복으로 고려에서 웅진을 공격하였다는 기사가 덧붙여 있다.
[역주:50권72] 근품성(近品城)
《高麗史》 世家와 《高麗史節要》 태조 10년조에도 근품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서 권12 신라본기 경애왕 4년(927) 3월조에서는 近巖城이라고도 하였으며, 권37 잡지 지리4에는 近嵒城으로 나온다. 현재의 경북 문경군 산양면 일대로 추정된다. 본서 권37 주석 313 참조.
[역주:50권73] 김응렴(金應廉)
신라말의 재상.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청한 것은 경명왕 4년(920) 10월에 있었던 일로 전해의 국상은 시중 彦邕으로 나오므로 應廉이 그의 다른 표기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 분명하지 않다.
[역주:50권74] 작은 자라가 … 모이는 것 같고[黿鳴鼈應]
《埤雅廣要》의 [黿大鼈也 鼈以爲雄故 黿鳴而鼈應]이라는 고사에서 나온 말(《淵鑑類函》 권12 7641쪽 참조). 黿은 고려를 지칭하고 鼈은 신라에 비유한 것이다.
[역주:50권75] 종달새[鷃]
일반 字典에는 메추리로 나오나, 《淵鑑類函》이나 《太平御覽》을 보면 봄의 철새로 날이 더워지면 하늘로 올라간다고하였으므로 종달새라고 풀이하여야 할 것이다. 이가원 편, 《漢文辭典》 에 종달새로 되어 있다.
[역주:50권76] 종달새가 날개를 헤친 것을 보고 새매의 날개로 착각한 것이니[鷃披隼翼]
매의 날개 속에 종달새가 헤치고 들어감은 여우가 호랑이의 위엄을 빌리는 것 같아서 우선은 보호를 받는 것 같지만 마침내는 피해를 본다는 뜻. 庾信의 〈哀江南賦〉에 『或以隼翼鴳披 虎威狐假 漸漬鋒鏑 脂膏原野』에서 따온 문구이다(王雲五 主編, 《庾子山文集》, 국학기본총서 415).
여기서 종달새는 신라를 상징하고 매는 고려를 뜻한다.. 이병도본, 이재호본, 신호열본, 김종권본에서는 종달새가 매를 해친다, 매의 날개를 찢으려 한다고 번역하여 종달새를 고려와 신라로 보고 견훤을 매로 파악하였으나 북한본에서는 보호를 받는다고 보았는 바 문의로 보아 후자의 해석이 원의에 가깝다.
[역주:50권77] 조적(祖逖)의 … 채찍을 잡고[祖鞭]
先鞭을 잡는다는 고사. 《晉書》 권62 劉琨傳 『琨少負志氣 有縱橫之才 善交勝己 而頗浮誇 與范陽 祖逖爲友 聞逖被用 與親故書曰 吾枕戈待旦 志梟逆虜 常恐祖生先吾著鞭』에서 나온 말이다.
[역주:50권78] 한월(韓鉞)
鉞은 장수가 사용하는 무기인 도끼이고 ‘韓’은 한금호를 지칭한다. 한금호는 陳나라 임금을 포로로 잡아 강남을 평정함에 대공을 세운 수나라 초기 장군이다.
‘韓’을 신호열본에서는 韓信으로, 이병도, 이재호, 김종권본 및 《東史綱目》 번역본에서는 韓擒虎로 해석하였으나 전고를 찾을 수 없다. 그러나 《隋書》 권52 韓擒虎傳에 수문제가 陳나라를 평정한 공로를 치하하는 글에서 祖逖과 짝할 만하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한금호일 가능성이 높다."
[역주:50권79] 미리사(美理寺)
여기에만 나오는 절 이름. 대구의 공산 아래에 있었던 절(《新增東國與地勝覽》 권26 대구 古跡條). 《세종실록》 권150 세종실록지리지 대구군의 속현인 解顔縣조에 一云 美里라고 기록하고 있고 이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解顔縣에 있었음을 기술하고 혹은 解顔을 美理라고도 한다고 적고 있다. 《高麗史》 세가 및 《高麗史節要》 태조 10년조에는 美利寺로 기록하고 있다.
[역주:50권80] 오월국(吳越國)
당나라 말 오대 때에 항주지방에서 錢鏐(전류)가 세운 나라. 회수 남쪽을 병합하여 당나라 소종으로부터 902년에 越王에 봉해졌으며, 904년에는 吳王에 봉하여졌고, 양태조가 즉위하자 오월왕에 봉하여졌다. 성을 元씨로 개칭하였다. 921년 오월왕으로 자칭하였다. 《新五代史》 권67 吳越世家 참조.
[역주:50권81] 반(班) 상서
오월국의 재상.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
[역주:50권82] 그만두려 해도 그렇지 못하고[欲罷不能]
《論語》 子罕篇(제9)에 나오는 말이다. 안연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공자의 도는 다함이 없어서 우러러보면 더욱 높고 뚫으려 하면 더욱 견고하며 쳐다보면 앞에 있는 듯하나 홀연히 뒤에 있다.” 부자께서 차근차근 잘 사람을 이끌어 주어 나에게 글을 넓게 가르쳐 주고 예로서 나를 단속하여 주니 학문을 그만두고자 하나 그만둘 수 없어 내 재주를 다 해보니 우뚝 서는 바가 있는 것 같으나 쫓고자 하니 길이 없다고 한 말에서 인용되었다. 『安淵喟然歎曰 仰之彌高 鑽之彌堅 瞻之在前 忽焉在後 夫子循循然 善誘人 博我以文 約我以禮 欲罷不能 旣竭吾才 有所立卓爾 雖欲從之 末由也已』
[역주:50권83] 교활한 토끼[㕙]
《戰國策》에 나오는 말로 천하의 교활한 토기를 지칭한다.
[역주:50권84] 날랜 사냥개[獹]
전국시대 韓나라의 날랜 사냥개를 지칭한다.
[역주:50권85]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버티고 있는 것[蚌鷸相持]
《戰國策》 燕策에서 나온 ‘蚌鷸相爭(방휼상쟁)’이란 말에서 나옴. 서로 다투다가 양자가 손해를 보고 제 3자에게 이익을 준다는 말. 큰 조개가 해변에 노출되자 도요새가 부리로 물으니 조개가 부리를 물어 서로 다투는 중에 어부의 몫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연유한다. ‘鷸蚌相持’, ‘鷸蚌相爭’이라고도 함.
[역주:50권86] 돌이킬 수 없다[迷復]
《春秋左氏傳》 襄公 28년조에 나오는 『欲復其願 而棄其本 復歸無所 是謂迷復』이란 말에서 나온 말로 그 주에 『도를 잃음이 너무 깊어지면 돌아갈 길이 없다.』고 풀이하였다.
[역주:50권87] 중국 사신[華軺膚使]
華는 곱다는 뜻이고 軺(초)는 말 한 필이 끄는 작은 수레이다. 膚使의 ‘膚’는 아름답게 한다는 뜻으로 君命을 실추시키지 않는 사신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중국 사신으로 번역하였다.
[역주:50권88] 흰 비단에 쓴 좋은 편지[尺素好音]
‘尺’은 편지이고 ‘素’는 흰 비단을 말한다.
[역주:50권89] 조서[芝檢]
‘芝’는 상서로운 풀이고 ‘檢’은 봉한 편지를 말하는 것으로 황제의 詔書를 의미한다.
[역주:50권90] 천명[天假]
하늘이 나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 대행자에게 손을 빌려준다는 뜻. 《書經》 伊訓에 『皇天降災 假手于我有命』이라는 전고에서 나왔다.
[역주:50권91] 전국[九土]
九州라는 말로 전국이라는 뜻이다. 요순 이래 주나라까지 전국을 9州로 나누었다.
[역주:50권92] 버마재비가 수레를 막는 것[螳蜋拒轍]
《莊子》의 人間世에 나오는 『螳蜋怒 臂當車轍』이란 곳에 나오는 전고로 힘에 당치 않은데 덤비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역주:50권93] 모기가 산을 등진 것[蚊負]
《莊子》의 應帝王篇에 나오는 『其於治天下也 猷涉海鑿河 而似蚊負山也』에서 나온 전고로 힘이 약할 때에 일함을 신중히 함을 뜻한다.
[역주:50권94] 어가[黃屋]
《史記》 권6 秦始皇本紀에 나오는 말로 임금이 타는 수레를 말한다.
[역주:50권95] 성 언저리[城邊]
《高麗史》 世家와 《高麗史節要》에는 邊城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는 합천지역으로 추정된다. 다음 주 참조.
[역주:50권96] 추조(鄒造)
경북 합천 지역의 호족. 《三國史節要》에는 ‘趨祖’로 기록되어 있고 《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 태조 10년(927) 秋七月條에는 『遣元甫在忠金樂等 擊大良城 擄將軍鄒許祖等三十餘人 破其城而還』이라 하여 ‘鄒許祖’로 기술하고 있다. 이 전투는 합천의 大良城 전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역주:50권97] 연산군에서 … 길환(吉奐)을 목베었고
길환은 후백제의 장군으로 태조 8년(乙酉 925)에 征西大將軍 庾黔弼에 의하여 연산에서 살륙되었다.(《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 참조)
[역주:50권98] 임존성을 … 버려졌고
임존성이 고려 태조 8년(925) 10월에 庾黔弼에 의하여 함락되었고, 3천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 참조)
[역주:50권99] 청주를 격파할 때에는 … 머리를 바쳤으며
태조 원년 10월에 청주의 파진찬 陳宣과 그 동생 室長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된 사건을 말하는 듯하다.
[역주:50권100] 구슬을 물고[銜璧]
《春秋左氏傳》 僖公 6년조의 『許男面縛銜璧』에서 나온 전고로 포로는 손을 뒤로 묵고 구슬을 입에 물린다는 고사이다.
[역주:50권101] 강주(康州)의 경우 남쪽에서 귀부하였고
《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 태조 3년 정월에 강주장군 尹雄의 귀부사실과 태조 10년 8월에 高思葛伊城 성주 興達이 아들을 보내 귀부한 사실을 말한다.
[역주:50권102] 나부(羅府)의 경우 서쪽에서 복속해 왔습니다
이 사실은 태조가 즉위하기 이전에 궁예의 장수로서 나주를 공략한 사실을 말하는 듯하다.
[역주:50권103] 지수(沚水)
중국 河北省 元氏縣 서쪽을 흐르는 沚河.
[역주:50권104] 장이(張耳)의 천 갈래 원한
張耳와 陳餘는 魏나라의 현인. 두 사람은 刎頸之交를 맺었으나 항우에게서 장이가 趙國王에 봉해지고 진여는 작은 고을의 후로 봉해지자 틈이 벌어져 장이는 漢의 劉邦에게 속했다. 유방이 조나라의 진여의 협력을 구하자 장이를 목베는 조건으로 수락하였다가 그가 죽지 않은 것을 알고 항우에게 투항하여 沚水 전투에서 장이는 한신과 함께 진여의 군대를 격파하고 그의 목을 베었다. 《史記》 권89 張耳陳餘列傳 참조.
[역주:50권105] 오강(烏江)
중국 안휘성 화현 동북쪽을 흐르는 강. 項羽가 垓下 전투에서 참패한 후 자결한 곳이다.
[역주:50권106] 길이[永]
중종임신간본에서는 ‘求’자로 되어 있고 조병순 고려본에서는 ‘永’자인지 ‘求’자인지 정확히 판독할 수 없어 감교본 초판본에서는 ‘求’자로 두었으나 《高麗史》 세가 및 《高麗史節要》에는 ‘永’으로 되어 있고 문의로 보아도 ‘永’자가 맞을 듯하여 이렇게 수정하였다.
[역주:50권107] 단금(丹禁)
붉게 칠한 왕의 궁성.
[역주:50권108] 엎드려 오월국 통화사(通和使) … 늦을 것입니다
고려 태조의 이 편지를 《東史綱目》에서는 최치원이 썼다고 하였다.
[역주:50권109] 부곡성(缶谷城)
《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 태조 11년 11월조에는 ‘烏於谷城’으로 기록하였다.
[역주:50권110] 장군 양지(楊志)와 명식(明式) 등
《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에는 양지와 명식 등 6명이 항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주:50권111] 하지현(下枝縣)
현재의 경북 안동시 풍산읍. 《三國遺事》 권2 紀異篇 후백제 견훤조에는 豊山縣으로 주를 달아 놓았다. 본서 권 34 주석 86-88 참조.
[역주:50권112] 장흥(長興)
後唐 명종의 연호. 930∼933년 년간 4년간 사용되었다.
[역주:50권113] 청태(淸泰)
후당 폐제의 연호. 934∼935년 2년간 사용되었다.
[역주:50권114] 금강(金剛)
?∼935. 후백제 견훤의 넷째 아들. 체구가 크고 지략이 많아 견훤이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넘기려 하였다. 이에 그의 형들인 神劍, 良劍, 龍劍 등이 시기하였고, 마침내 伊湌 能煥이 康州(현재의 경남 진주)의 도독 양검과 무주(광주광역시)의 도독 용검을 사주하고 그들은 다시 장형인 신검을 부추켜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그는 살해되었다.
[역주:50권115] 신검(神劒)
후백제 견훤의 맏아들. 935년 왕위를 동생인 금강에게 물려주려 하자 능환과 두 동생의 권유를 받아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금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금산사에서 탈출한 고려에 투항한 후 고려 태조와의 一利川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 왕위의 찬탈이 능환이 한 것이라고 하여 처형되고 신검은 용서되어 그에게는 작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도 살해되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역주:50권116] 양검(良劒)
?∼936. 견훤의 둘째 아들. 康州(현재의 경남 진주)도독으로 있었다. 왕위가 동생인 금강에게 전하려 하자 능환의 사주에 의하여 형 신검을 움직여 아버지를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금강을 사해하고 장형인 신검을 왕위에 앉혔다. 936년 고려와의 선산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眞州로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역주:50권117] 용검(龍劒)
?∼936. 견훤의 셋째아들. 武州(현재의 광주광역시)도독으로 있었다. 금강의 왕위계승에 반기를 들었고 고려와의 一利川 전투에서 패배하여 항복하여 眞州에 유배되었다가 살해되었다.
[역주:50권118] 여의(如意)
한 고조의 넷째 아들. 戚夫人의 所生. 한고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惠帝에 의하여 물러났다.
[역주:50권119] 건성(建成)
당 고조의 큰 아들. 당 태종의 형. 주색과 사냥을 좋아하여 동생 李世民을 제거하려 음모하다가 오히려 그에 의하여 제거되었다.
[역주:50권120] 헌공(獻公)의 의혹
晉나라 獻公의 이름은 詭諸. 재위기간은 서기전 676~650. 즉위하여 여융을 쳐서 呂姬를 얻고 총애하여 그 말에 미혹되어 태자를 죽이고 여희의 아들을 태자로 세웠다. 따라서 공자 耳吾와 重耳는 난을 피해서 여러 나라에 유랑하였다. 《國語》와 《사기》에 자세하다(《國語》 晉語, 《史記》 권39).
[역주:50권121] 특별한 은혜[不次之恩]
이 번역문의 原義는 정상적인 서차를 뛰어넘는 보답을 하여야 할 큰 은혜라는 뜻이다.
[역주:50권122] 새로운 정치[維新之政]
《詩經》 大雅編에 『周雖舊邦 其命維新』이란 말에서 나온 전고로 周나라 文王의 개혁정치를 두고 지칭한다.
[역주:50권123] 큰 죄[大辟]
옛 다섯 가지 형벌 중의 하나. 머리를 베는 斬首刑을 말한다.
[역주:50권124] 만세(萬歲)
고려 초의 인물. 성은 王. 太祖의 從弟. 본 열전에서는 그의 직함이 장군직으로 쓰여 있으나 《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 태조 18년 6월조에 그의 관등은 大匡으로 기록되어 있다. 《高麗史》 권101 王珪傳 참조.
[역주:50권125] 영규(英規)
후백제의 장군. 견훤의 사위. 견훤을 좇아 후백제의 건국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고려 태조 18년(935) 3월 견훤의 아들 신검 등이 반역하여 그 아우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자 6월에 견훤이 금산사를 탈출하여 고려 태조에 귀부함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9월 태조가 신검을 칠 때에 내응하여 후삼국통일에 기여하였다. 태조는 박영규의 공을 높이 치하하고 그를 左丞에 임용하고 밭 1천 頃을 내려주었다. 이어서 역마 35필을 내어 그 부인을 맞이하게 하고 두 아들에게도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의 두 딸은 태조의 東山院夫人과 정종의 비인 文恭王后이다.
[역주:50권126] 삼한(三韓)
이는 원래의 삼한인 마한, 진한, 변한을 지칭하였으나 여기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의 용어로 사용되었고, 삼국의 전국토를 의미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역주:50권127] 천복(天福)
後晉 고조의 연호. 936∼943년 8년간 사용되었다.
[역주:50권128] 일선(一善)
현재의 경북 구미시 선산읍. 본서 권34 주석 122 참조.
[역주:50권129] 갑오일
음력 11월 9일이다.
[역주:50권130] 일리천(一利川)
현재 구미시 선산읍의 낙동으로 흘러 들어가는 내. 一利郡이 경덕왕 16년 군현개칭 이전의 선산군의 고호이었다는 점과 벽진면 성주읍 선남면 사이를 흘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이천(伊川)이 아닐까 한다. 《慶北마을誌》(경북향토사연구회편, 1992) 중 성주군의 연혁조와 동군의 船南面 龍新里조에서는 왜관으로부터 성주를 지나가는 지금의 낙동강의 별칭이라고 쓰고 있으나 확증할 수는 없다.
[역주:50권131] 왕순(王順)
여기에만 보이는 인물로 《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에는 ‘三順’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50권132] 철리(鐵利)
여진의 종족명으로 《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에는 ‘鐵勒’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50권133] 여러 도(道)
《高麗史》 세가와 《高麗史節要》에는 여러 번(蕃)으로 기록되어 있고 흑수와 철륵 사이에 달고(達姑)의 부족명이 추가되어 있다.
[역주:50권134] 공훤(公萱)
여기에만 보이는 인물로 그의 관등은 大相이었다. 《高麗史》 世家 및 《高麗史節要》에는 대장군이라는 직책이 추가 기록되어 있다.
[역주:50권135] 백제 장군 효봉(孝奉), 덕술(德述), 명길(明吉) 등
《高麗史》 世家와 《高麗史節要》에는 백제 左將軍 孝奉, 德述, 哀述, 明吉 等四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50권136] 반역의 마음을 품어[包藏禍心]
흉계를 품고 감춘 者라는 뜻으로 《春秋左氏傳》 昭公 원년조에 나오는 전고이다.
[역주:50권137] 원악대대(元惡大憝)
《書經》 康誥篇에 나오는 전고로서 『元惡大憝 矧惟不孝不友』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는 악인 중 우두머리를 뜻한다. 《荀子》 王制篇에서는 元惡大憝는 왕명을 기다리지 않고 죽여도 된다고 쓰고 있다.
[역주:50권138] 이밀(李密)
582∼618. 수나라 말기의 뛰어난 책략가. 자는 玄邃, 또는 法主. 先代는 遼東 襄平人. 수나라 때에 장안으로 가서 살았다. 글을 잘하고 뜻이 雄遠하였고 책략이 많았다. 아버지의 재산을 써서 才士를 모았다. 수 문제가 만나보고 공부를 하라고 하자 소를 타고 다니면서 《漢書》를 읽었다. 수나라 楊玄感의 謀士가 되어 刎頸의 관계를 맺었다. 양현감이 패망하자 도망쳐 산동 서부의 東郡의 盜賊 翟讓의 모사로 활동하여 수나라 토벌군을 격파하여 하남 북부의 세를 장악하였다. 수양제의 죽인 宇文化及의 군대와 싸워 크게 패하였다. 적양을 죽이고 당 고조에 귀화하여 형국공에 봉하여졌으나 신변의 불안을 느끼고 난을 꾀하다가 37세 때에 陸渾縣에서 복병에 의하여 살해되었으나 李勣의 권유에 의하여 용서되어 禮葬되었다. 《隋書》 권70, 《新唐書》 권84, 《後唐書》 권53에 열전이 실려 있다.
[역주:50권139] 백성을 몰아다주는 일을 한 사람들[歐民者]
이 말은 《孟子》 권9의 離婁章 上에 나오는 『爲湯武敺民者 桀與紂也』라는 전고에서 나온 말이다. ‘敺’와 ‘歐’자는 상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