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1章
子曰,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 樂云樂云, 鐘鼓云乎哉!」
공자가 말씀하셨다.
“예(禮)다, 예다 하지만, 옥과 비단갈은 예물을 말한 것이겠는가. 음악이다, 음악이다 하지만, 종소리과 북소리를 말한 것이겠는가.”
[해설]
사람들이 예를 따지는데 호칭이나 폐백을 갖고 말하는 것인가? 또한 음악을 따지는데 도대체가 쇠북을 치고 장구를 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실제로 예악을 행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敬而將之以玉帛 則爲禮, 和而發之以鍾鼓 則爲樂, 遺其本而專事其末 則豈禮樂之謂哉.
○程子曰, 禮只是一箇序, 樂之是一箇和, 只此兩字含蓄多少義理, 天下無一物無禮樂, 且如置此兩椅 一不正, 便是無序, 無序 便乖, 乖便不和, 又如盜賊至爲不道, 然 亦有禮樂, 蓋必有總屬, 必相聽順 乃能爲盜, 不然則叛亂無統 不能一日相聚而爲盜也. 禮樂 無處無之, 學者要須識得.
○공경하고 옥백으로써 가지고 가면 곧 예가 되고 화하여 종고로써 소리를 나게 하면 음악이 되나 그 근본을 버리고 오로지 그 끝을 일삼으면 어찌 예악이라 이르리오.
○정자 가라사대 예라는 것은 다만 이 한낱 질서요 악이라는 것은 이 한낱 조화이니, 다만 이 두 가지에 많고 적은 의리를 함축하면 천하가 한 물건도 예악이 없음이 없고, 또한 만약 이 두 가지 의자에 두어서 하나라도 바르지 못하면 문득 이 질서가 없으니, 질서가 없으면 문득 괴이해지고 괴이해지면 문득 화하지 못하니라. 또한 만약 도적이 지극히 도가 없으나 그러나 또한 예악이 있으니 대개 반드시 우두머리에 속해 있어서 반드시 서로 순히 들어야 이에 능히 도적질 할 수 있으니 그렇지 않으면 반란하고 계통이 없어서 능히 하루라도 서로 모여서 도적질을 하지 못하니라. 예악은 곳도 없고 갈 데도 없으니 배우는 자가 모름지기 알아서 얻어짐을 기다려야 하느니라.
[해설]
嘗試論之,世俗之所謂至知者,有不為大盜積者乎? 所謂至聖者,有不為大盜守者乎?何以知其然邪?昔者龍逢斬,比干剖,萇弘胣,子胥靡,故四子之賢而身不免乎戮。故盜跖之徒問於跖曰:「盜亦有道乎?」跖曰:「何適而無有道邪?夫妄意室中之藏,聖也;入先,勇也;出後,義也;知可否,知也;分均,仁也。五者不備而能成大盜者,天下未之有也。」由是觀之,善人不得聖人之道不立,跖不得聖人之道不行;天下之善人少而不善人多,則聖人之利天下也少而害天下也多。
故曰:「脣竭則齒寒,魯酒薄而邯鄲圍。」聖人生而大盜起。掊擊聖人,縱舍盜賊,而天下始治矣。夫川竭而谷虛,丘夷而淵實。聖人已死,則大盜不起,天下平而無故矣。<莊子 外篇 胠篋>
胣 : 창자 가를 치(이),
시험삼아 말해본다. 세속에서 말하는 지극히 지혜로운 자는 도둑을 위해서 재물을 쌓아놓은 자가 아닌가? 이른바 지극히 성스러운 자는 큰 도둑을 위하여 물건을 지켜주는 자가 아닌가? 어째서 그런 줄을 아는가? 옛날 관용봉(關龍逢)은 〈걸왕(桀王)에게 간하다가〉참살을 당했고 비간은 가슴이 갈라졌으며 장홍(周 靈王때의 賢臣으로 참소를 당하여 죽었음)은 내장이 끊겨 죽었으며 오자서는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다. 그러므로 네 사람은 어진데도 죽음을 면치 못했다.
그러므로 도척의 무리가 도척에게 물었다. "도둑질하는데도 도가 있습니까?"
도척은, "어디를 간들 도가 없겠는가? 무릇 방안에 감추어둔 것을 헤아리는 것을 성(聖)이고, 먼저 들어가는 것은 용(勇)이며, 맨 나중에 나오는 것을 의(義)이고, 가부를 아는 것은 지(知)이며, 고르게 나누는 것은 인(仁)이다. 다섯 가지를 갖추지 않고 큰 도둑이 된 자는 천하에 없다."라 대답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착한 사람이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면 세상에 바로 설수 없으며 도척같은 도둑도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면 행할 수 없는 것이다. 천하에 착한 사람은 적고 착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서, 성인이 천하에 이롭게 하는 일은 적고 해롭게 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며, 노나라의 술 맛이 박하여 (조나라의 수도) 한단이 포위당했다."했다. 성인이 나타나자 큰 도둑이 생겨났다. 성인을 배격하고 도적들을 내버려 두어야 비로소 천하가 다스려진다. 무릇 냇물이 마르면 골짜기가 비고 언덕이 무너지면 연못이 메워진다. 성인이 이미 죽어 큰 도둑이 일어나지 않으니 천하가 태평해지고 사고도 없을 것이다.
☞ 魯酒薄而邯鄲圍
이에 대한 이야기는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당나라 육덕명(陸德明)의 석명(釋名)에, 다른 하나는 회남자(淮南子) 무칭훈편(繆稱訓篇) 허신주(許愼注)에서 볼 수 있다.
楚宣王朝諸侯. 魯恭公後至而酒薄. 宣王怒欲辱之, 恭公不受命. 乃曰我周公之胤, 長於諸侯, 行天子禮樂, 勳在周室, 我送酒已失禮, 方責其薄 無乃太甚, 遂不辭而還. 宣王怒 乃發兵與齊攻魯, 梁惠王常欲擊趙, 而畏楚救, 楚以魯爲事, 故梁得圍邯鄲. 言事相由也.
許愼注淮南云 楚會諸侯 魯趙俱獻酒於楚王 魯酒薄而趙酒厚 楚之主酒吏求酒於趙 趙不與 吏怒 乃以趙厚酒易魯薄酒 奏之 楚王以趙酒薄 故圍邯鄲也.
第12章
子曰, 「色厲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窬之盜也與。」
공자가 말씀하셨다.
“얼굴빛은 위엄이 있으면서 마음이 부드러운 것은 소인에게 비유하면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적과 같을 것이다.”
窬 : 협문 유. 협문, 작은 문. 넘다. 속이 비다. 공허. 뚫다. 뒷간.
○厲 威嚴也, 荏 柔弱也. 小人 細民也. 穿 穿壁, 窬 踰墻, 言其無實盜名而常畏人知也.
○려는 위엄이고, 임은 유약함이라. 소인은 미세한 백성이라. 천은 벽을 뚫음이고, 유는 담을 넘음이니 그 실제 도적의 이름은 없지만 늘 사람 두려워할 줄을 아는 것이라.
[해설]
‘임(荏)’ 자에 대해 유약(柔弱)이라고 글자풀이를 하였는데 요사스럽고 교활하다는 뜻이 있다. 글자 모양이 ‘초(艹)’ 자 아래 ‘임(任)’ 자를 붙인 것이다. 초(草)는 유약하다는 뜻이고, 임은 공임(孔任)의 뜻이다. 이는 말과 얼굴빛을 좋게 하며 아첨하고 아양을 떠니 한갓 유(柔)한 일이다. 《주역》에서 음유(陰柔)를 소인으로 설정하였다. 대체로 소인이면서 강단(剛斷)이 없는 자는 매사를 남에게 구하고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 제아무리 사나운 고집으로 스스로 도취해 자랑하더라도 끝내는 굽히고 능글맞게 된다. 이런 속마음을 품으면서 겉으로는 엄격하고 정중하여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모습을 보이니, 어찌 좀도둑이 아니겠는가. 무덤가에 남은 음식을 구걸할 때 그 얼마나 유약한 마음이며, 집에 들어와서 처첩(妻妾)에게 교만을 떨 때 그 얼마나 얼굴에 위엄이 있었는가. 참으로 좀도둑일 뿐이다.
“항상 남이 알까 두렵다.〔常畏人知〕”라는 네 글자는 소인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讀書箚義>
第13章
子曰, 「鄕原德之賊也。」
공자가 말하였다.
“마을에서 성실한 척 하는 향원은 덕을 해치는 자이다.”
○鄕者 鄙俗之意. 原 與愿同, 荀子原慤註 讀作愿 是也. 鄕原 鄕人之愿者也. 蓋其同流合汙 以媚於世. 故 在鄕人之中 獨以愿稱. 夫子以其似德非德而反亂乎德故, 以爲德之賊而深惡之. 詳見孟子末篇.
○향이라는 것은 비속한 뜻이라. 원은 ‘정성스러울 원’과 같으니 순자가 원각의 주에 읽는 것을 愿을 지음이 이것이라. 향원은 시골 사람의 성실한 자이니 대개 그 같이 흐르며 더러운 데에 합하여 써 세상에 아첨함이라. 그러므로 시골 사람 가운데에 홀로 써 愿이라 일컫느니라. 부자가 그 덕에 가까우면서도 덕이 아닌 것으로써(사이비한 자) 오히려 덕을 어지럽게 하는 까닭으로 덕의 해가 되기 때문에 깊이 미워하시니라. 『맹자』 말편에 자세하게 나타나니라.
[해설]
향(鄕)은 향(嚮)하다는 뜻이니, 매사에 오로지 남을 추종하여 제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 남을 따르는 것이 위주가 되어 스스로 지킬 수 없다면 매우 심하게 비속한 것이다. 비속한 사람들 모두 ‘원(愿)’이라고 칭한다면 사이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고장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고 만족하여 이를 덕(德)이라고 자처하니, 어찌 ‘덕을 해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온통 악행만을 일삼는 자는 제 잘못을 후회하고 고칠 수 있지만, 향원이 덕에 들어갈 리는 만무하다. <讀書箚義>
☞ 孟子
孔子曰, 『過我門而不入我室, 我不憾焉者, 其惟鄕原乎! 鄕原德之賊也。』」 曰, 「何如斯可謂之鄕原矣?」 曰, 「『何以是嘐嘐也, 言不顧行, 行不顧言, 則曰, '古之人, 古之人!'』, 『行何爲踽踽涼涼! 生斯世也, 爲斯世也 善斯可矣。』 閹然媚於世也者, 是鄕原也。」 萬章曰, 「一鄕皆稱原人焉, 無所往而不爲原人, 孔子以爲德之賊 何哉?」 曰, 「非之無擧也, 刺之無刺也, 同乎流俗, 合乎汙世, 居之似忠信, 行之似廉潔, 衆皆悅之, 自以爲是而不可與入堯舜之道。故曰德之賊也。」 孔子曰, 『惡似而非者, 惡莠恐其亂苗也, 惡佞恐其亂義也, 惡利口恐其亂信也, 惡鄭聲 恐其亂樂也, 惡紫恐其亂朱也, 惡鄕原恐其亂德也。』
<孟子 盡心 下 第37章>
第14章
子曰, 「道聽而塗說, 德之棄也。」
공자가 말씀하셨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해버리면 덕(德)을 버리는 것이다.”
○雖聞善言不爲己有, 是 自棄其德也.
○王氏曰, 君子多識前言往行, 以畜其德, 道聽塗說則棄之矣.
○비록 선한 말을 듣고도 자기 소유로 삼지 않는다면 이것은 스스로 그 덕을 버림이라.
○왕씨 가로대 군자가 앞서간 (성인의) 말과 가신 행동을 많이 알아서 그 덕을 쌓으니(多識前言往行, 以畜其德. 『주역』山天大畜괘 대상전에 나오는 구절) 길에서 듣고 길에서 말하면 그것을 버림이라.
[해설]
길을 ‘도(道)’라고 하고, 길을 다니는 것을 ‘도(塗)’라고 한다. 하지만 이 구절은 굳이 길 위에서 듣고 길을 가면서 말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음에 되새기지 않고 대충 건성으로 경솔하다는 뜻이다. ‘도(塗)’ 자는 더욱 경솔하고 천박해서 말 한마디를 듣자마자 의미를 이해하지 않고 의리를 따지지 않은 채 경솔히 아는 체하고 만족하여 스스로 기뻐한다는 뜻이다.
말이 귓구멍으로 들어오자마자 몸속으로 들여보내지 못하고 곧장 입으로 술술 내뱉어 버린다. 비록 마주 앉아 말을 듣더라도 마치 길가에서 듣는 경우와 같고, 마주 앉아 말하더라도 마치 길을 가면서 말하는 경우와 같다. 언제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가 덕을 행하는 데 유익하게 한 적이 있겠는가.
날마다 스승과 친구의 말을 듣고 날마다 도의(道義)에 대해 말하더라도 예전 그대로 어리석은 선비이니, 어찌 덕을 버리는 일이 아니겠는가. 버린다는 말은 통절히 미워하고 가엾게 여기는 표현이다. 속언에 “바람결에 듣자마자 달려가서 말한다.”라는 것과 같으니, 덕에 무익할 뿐만 아니라 기상(氣象)이 해괴하고 좋지 않다. <讀書箚義>
第15章
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患得之, 旣得之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공자가 말씀하셨다.
“비열한 사람과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부귀를 얻지 못했을 때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얻고나서는 잃을까봐 걱정하니, 진실로 잃을까봐 걱정한다면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鄙夫 庸惡陋劣之稱.
○비부는 용렬하고 악하고 누추하고 용렬함을 일컬음이라.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患失之,
부귀를 얻지 못했을 때는 얻으려고 근심하고, 얻고나서는 잃을까봐 걱정하니,
○何氏曰, 患得之 謂患不能得之.
○하씨 가로대 얻는 것을 근심함은 능히 얻지 못할까를 근심함이라.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진실로 잃을까봐 걱정한다면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小則吮癰舐痔, 大則弑父與君, 皆生於患失而已.
○胡氏曰 許昌靳裁之有言曰, 士之品大槪有三, 志於道德者 功名不足以累其心, 志於功名者 富貴不足以累其心, 志於富貴而已者 則亦無所不至矣 志於富貴 卽孔子所謂鄙夫也.
○작게는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고(추잡스러운 짓을 하고), 크게는 아비와 다못 인군을 죽이니(천인공노할 짓을 하니) 다 잃을까를 근심하는 데에서 나오니라.
○호씨 가로대 허창근이 재단한 것에 말함이 있으니 가로대 선비의 품질이 대개는 세 가지가 있으니, 도덕에 뜻을 둔 자는 공명이 족히 써 그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공명에 뜻을 둔 자는 부귀가 족히 써 그 마음을 더럽히지 아니하니, 부귀에만 뜻을 둔 자는 또한 이르지 않는 바가 없으니 곧 공자가 이른바 비부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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