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二四回。 盟召陵禮款楚大夫、 會葵邱義戴周天子。
話說屈完再至齊軍,請面見齊侯言事。管仲曰:「楚使復來,請盟必矣。君其禮之。」 屈完見齊桓公再拜。桓公答禮,問其來意。屈完曰:「寡君以不貢之故,致干君討,寡君已知罪矣。君若肯退師一舍,寡君敢不惟命是聽!」 桓公曰:「大夫能輔爾君以修舊職,俾寡人有辭於天子,又何求焉?」 屈完稱謝而去。歸報楚王,言:「齊侯已許臣退師矣,臣亦許以入貢,君不可失信也。」 少頃,諜報:「八路軍馬,拔寨俱起。」 成王再使探實,回言:「退三十里,在召陵駐紮。」 楚王曰:「齊師之退,必畏我也。」 欲悔入貢之事。子文曰:「彼八國之君,尚不失信於匹夫,君可使匹夫食言於國君乎?」 楚王嘿然。乃命屈完賷金帛八車,再往召陵犒八路之師,復備菁茅一車,在齊軍前呈樣過了,然後具表,如周進貢。
舍 : 옛날, 행군할 때 30리를 이르던 말. 賷 : 齎와 同字.
굴완이 제나라 군영에 다시 가서, 제환공에게 알현을 청하여 초왕의 말을 전하고자 했다.
관중이 말했다.
"초나라에서 사자가 다시 온 것은 반드시 화해를 청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예로 대하십시오."
굴완이 환공을 보고 재배하자 환공도 답례하고 나서 그가 온 뜻을 물었다.
굴완이 대답했다.
"저희 군주께서 조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주께서 토벌에 이르게 되셨으나, 저희 군주께서는 이미 그 죄를 알고 계십니다. 군주께서 병사들을 일사(一舍) 즉, 삼십 리를 물리신다면 저희 군주께서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환공이 말했다.
"대부가 능히 그대의 군주를 보좌하여 옛 직분을 수행하게 하므로써 과인이 천자께 보고할 수 있다면 또 무엇을 구하겠소?"
굴완이 칭사하고 돌아가 초왕에게 보고했다.
"제환공은 이미 신에게 부대를 물리겠다고 하였으며, 신 또한 주왕실에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주군께서는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잠시 후 첩보가 전해져 왔다. "팔로 군마가 영채를 뽑고 모두 기병했습니다."
성왕이 다시 사자를 보내 허실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돌아와 보고했다. "삼십 리를 물러나 소릉(召陵)에서 진을 쳤습니다."
초왕이 말했다. "제나라 군대가 물러간 것은 반드시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왕실에 공물을 바치기로 한 것을 후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자문이 말했다.
"저 8나라의 군주들이 대부에게도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는데, 주군께서는 대부가 타국의 군주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되어도 좋다는 것입니까?"
초왕은 말이 없었다. 마침내 굴완에게 명을 내려 금과 비단 10수레를 싣고 재차 소릉으로 가서 8로의 군대를 호궤하게 하고, 다시 청모(靑茅) 한 수레를 준비하여 제나라 군문 앞을 주왕실에 바칠 모습으로 통과한 후 표를 갖추어 주나라에 공물로 진상하게 하였다.
卻說許穆公喪至本國,世子業嗣位,主喪,是爲僖公。感桓公之德,遣大夫百佗,率師會於召陵。桓公聞屈完再到,吩咐諸侯:「將各國車徒,分爲七隊,分列七方。齊國之兵,屯於南方,以當楚衝。俟齊軍中鼓起,七路一齊鳴鼓,器械盔甲,務要十分整齊,以强中國之威勢。」 屈完旣入,見齊侯陳上犒軍之物。桓公命分派八軍。其菁茅驗過,仍令屈完收管,自行進貢。桓公曰:「大夫亦曾觀我中國之兵乎?」 屈完曰:「完僻居南服,未及睹中國之盛,願借一觀。」 桓公與屈完同登戎輅,望見各國之兵,各占一方,聯絡數十里不絶。齊軍中一聲鼓起,七路鼓聲相應,正如雷霆震擊,駭地驚天。桓公喜形於色,謂屈完曰:「寡人有此兵眾,以戰,何患不勝?以攻,何患不克?」 屈完對曰:「君所以主盟中夏者,爲天子宣布德意,撫恤黎元也。君若以德綏諸侯,誰敢不服?若恃眾逞力,楚國雖褊小,有方城爲城,漢水爲池,池深城峻,雖有百萬之眾,正未知所用耳!」 桓公面有慚色,謂屈完曰:「大夫誠楚之良也!寡人願與汝國修先君之好如何?」 屈完對曰:「君惠徼福於敝邑之社稷,辱收寡君於同盟,寡君其敢自外?請與君定盟可乎?」 桓公曰:「可。」 是晚留屈完宿於營中,設宴款待。
한편 허나라 목공의 운구가 본국에 도착하자 세자 업(業)이 대를 이어 군주의 위에 오르고 장례를 주도하였는데 바로 이 사람이 희공(僖公)이다. 희공은 환공의 후덕함에 감복하여 대부 백타(百佗)를 파견하여 군대를 인솔하고 소릉에서 회맹하게 했다.
환공은 굴완이 재차 왔다는 것을 알고 제후들에게 분부했다.
"각국의 군대를 7대(隊)로 나누고 7방면에 나누어 진을 치십시오. 제나라의 군대는 남쪽에 주둔하여 초나라를 막겠습니다. 제나라의 군중에서 북소리가 일기를 기다려 7로군이 일제히 북울 울리며 병기들과 무장을 완전히 갖추어 중국의 위세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시오."
굴완이 제나라의 진중에 들어가 제환공을 알현하고 군사들을 호궤할 물품을 진상했다. 환공은 명을 내려 8국의 군대에 나눠 보내주도록 하였다. 초나라의 청모(靑茅)가 통과한다고 하자 환공은 굴완이 맡아서 주나라에 공물을 바치게 했다.
환공이 물었다. "대부도 우리 중국의 군대를 본적이 있소?"
굴완이 대답했다. "저는 남쪽 변방의 외진 곳에 살아서 아직 중국 군대의 성대한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 기회에 한번 보겠습니다."
환공은 굴완과 더불어 제후가 타는 융로(戎輅)에 함께 올라 각국의 군대를 바라보니 각 한 방면씩을 차지하였는데 수십리에 연결되어 끊임이 없었다. 제나라 군중에서 북소리가 한 번 울리자 칠로군 군중에서 북을 쳐 서로 상응하는데 바로 우레가 진동하여 하늘과 땅이 놀라는 것 같았다.
환공의 기쁜 모습으로 굴완에게 말했다.
"과인에게는 이같은 병력이 있는데 싸운다면 어찌 이기지 못하리라 걱정하겠소? 공격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하리라 근심하겠소?"
굴완이 대답했다.
"군주께서는 중원의 여러 나라들을 이끌고 회맹을 주도하고 계시기 때문에 천자를 위하여 널리 덕을 베풀고 백성들을 어루만져 구휼하여야 합니다. 군주께서 제후들에게 덕으로써 편안하게 하신다면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많은 병력과 강한 힘에 기대신다면 초나라가 비록 좁고 작은 나라지만 방성을 성으로 삼고 한수를 해자로 삼아 못을 깊이 파고 성벽을 높인다면 백만대군이 몰려온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환공이 만면에 부끄러운 기색을 띄며 말했다. "대부는 참으로 초나라의 현명한 신하로다. 과인은 그대의 나라와 더불어 선군(先君)시절과 같이 맹약을 체결하고자 하는데 어떻소?"
굴완이 대답했다. "군주의 은혜는 저희나라 사직에 복이 되며, 군주께서 번거롭게 저희 군주와의 동맹을 받아들이시는데 저희 군주께서 감히 그밖의 다른 것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군주께서는 저희 군주와 맹약을 체결하시겠습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할 수 있소."
이날 늦게까지 굴완을 군영에 머무르게 하고 묶게 하였으며 주연을 베풀어 극진히 대접했다.
次日,立壇於召陵,桓公執牛耳爲主盟,管仲爲司盟。屈完稱楚君之命,同立載書:「自今以後,世通盟好。」 桓公先歃,七國與屈完以次受歃。禮畢,屈完再拜致謝。管仲私與屈完言,請放聃伯還鄭。屈完亦代蔡侯謝罪。兩下各許諾。管仲下令班師。途中鮑叔牙問於管仲曰:「楚之罪,僭號爲大。吾子以包茅爲辭,吾所未解。」 管仲對曰:「楚僭號已三世矣,我是以擯之,同於蠻夷。倘責其革號,楚肯俛首而聽我乎?若其不聽,勢必交兵,兵端一開,彼此報復,其禍非數年不解,南北從此騷然矣。吾以包茅爲辭,使彼易於共命。苟有服罪之名,亦足以誇耀諸侯,還報天子,不愈於兵連禍結,無已時乎?」 鮑叔牙嗟嘆不已。
다음 날 소릉에 단을 쌓고 환공이 소의 귀를 잡아 맹주가 되고 관중이 맹약을 주관했다. 굴완은 초나라 군주의 명을 따른다 하고 함께 서약문을 작성했다.
"지금이후 대대로 맹약을 따르노라."
환공이 먼저 삽혈하고 7국 제후들과 굴완이 순서대로 삽혈의식을 행했다.
예식을 마치자 굴완이 환공에게 재배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관중이 은밀히 굴완에게 담백(聃伯)을 정나라로 돌려보내줄 것을 청했다. 굴완이 또한 채후(蔡侯)를 대신하여 사죄했다. 양쪽이 모두 허락했다. 관중은 영을 내려 부대가 귀국했다.
도중에 포숙아가 관중에게 물었다. "초나라의 죄는 왕을 참칭한 것이 크네. 자네가 포모를 바치는 것으로 용서를 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네."
관중이 대답했다. "초나라에서 왕호를 참칭한 것은 이미 3대 이전의 일이네. 우리는 그 일로 초나라를 배척하여 초나라는 만이(蠻夷)와 같은 취급을 받아 왔네. 초나라에서 참칭한 것을 책망한다면 초나라에서 머리를 숙이고 우리 말을 듣겠는가? 그들이 우리 말을 듣지 않으면 형세가 반드시 충돌하게 되고 한번 전쟁이 일어나면 피차가 보복할 터이라 그 재앙은 수년이 지나지 않으면 풀리지 않을 것이며 남북이 이로부터 소란스러워질 것이네. 나는 포모를 바치는 것으로 사과를 받아들여 초나라에서 입장을 바꿔 왕명을 함께 받들게 한 것이네. 구차하기는 하지만 죄를 스스로 인정한 것을 제후들에게 보여주었고 천자에게 돌아가 보고할 수 있는 것을 명분으로 삼는 것으로 족하며, 더우기 군사들에게 전쟁을 벌이는 재앙에 연결시키지 않았으니 끝내야 할 때가 아닌가?"
胡曾先生有詩曰:
楚王南海目無周,
仲父當年善運籌。
不用寸兵成款約,
千秋伯業誦齊侯。
又髯翁有詩譏桓仲苟且結局,無害於楚,所以齊兵退後,楚兵犯侵中原如故,桓仲不能再興伐楚之師矣。詩云。
南望躊躇數十年,
遠交近合各紛然。
大聲罪狀謀方壯,
直革淫名局始全。
昭廟孤魂終負痛,
江黃義舉但貽愆。
不知一歃成何事,
依舊中原戰血鮮!
☞ 昭廟
소목제도(昭穆制度)는 중국 상고시대부터 유래한 것인데, 주나라의 주공(周公)이 禮와 樂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周禮』에 의하면 제1세의 시조를 중앙에 모시고, 이를 중심으로 동쪽의 소묘(昭廟)에는 아버지 항렬인 2세・4세・6세의 신주를 배치하며, 서쪽의 목묘(穆廟)에는 아들 항렬인 3세・5세・7세의 신주를 모신다. 그리고 天子의 경우에는 소묘에 2세・4세・6세를, 목묘에 3세・5세・7세를 각각 봉안하여 삼소삼목(三昭三穆)의 칠묘(七廟)를 세운다. 제후는 소묘에 2세와 4세, 목묘에 3세와 5세를 봉안하여 이소이목(二昭二穆)의 오묘(五廟)를 세우며, 大夫는 일소일목(一昭一穆)의 삼묘(三廟)를 세우도록 규정하였다. <中庸 第19章 解說>
※ 昭廟는 누구를 칭하는지 불분명한데, 어색하기는 하지만 문맥상, 허목공의 세자 업(業)이 대를 이어 희공(僖公)이 된 것등을 감안할 때 허목공(許穆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해석한다.
호증선생이 시를 남겼다.
초왕이 남해에서 주나라를 안중에 두지 않아,
중부(管仲)가 그때 계책을 잘 세웠도다.
병사 한 명 쓰지 않고 맹약을 체결하여,
천추에 제환공이 패업을 이룬 일을 읊게 하였도다.
또 염옹이 시를 지어 제환공과 관중이 구차하게 일을 끝낸 것을 꾸짖었는데, 초나라에 전혀 해를 끼치지 않고 제나라 군대가 물러섰기 때문에 예전과 다름없이 초나라 군대가 중원에 쳐들어가려는 뜻을 품게 되었으며, 제환공과 관중이 다시는 초나라를 치기 위해 중원의 군대를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남방의 초나라를 엿보며 머뭇거리기를 수십년,
원교근공(遠交近攻)으로 각 나라의 형세가 어지러웠도다.
큰 소리로 죄상을 밝혀 초나라를 치려는 기세가 씩씩했고,
초나라를 바로잡는다는 큰 명분이 처음에는 온전했었다.
허목공(許穆公 = 昭廟)의 외로운 영혼이 괴로움으로 생을 마쳤고,
강(江)나라, 황(黃)나라의 의거조차 허물이 되었도다.
한번의 삽혈로 무슨 일을 이루겠는가,
여전히 중원은 싸움으로 피가 선명하구나 !
陳大夫轅濤塗聞班師之令,與鄭大夫申侯商議曰:「師若取道於陳鄭,糧食衣屨,所費不貲,國必甚病。不若東循海道而歸,使徐莒承供給之勞,吾二國可以少安。」 申侯曰:「善,子試言之。」 濤塗言於桓公曰:「君北伐戎,南伐楚,若以諸侯之眾,觀兵於東夷,東方諸侯,畏君之威,敢不奉朝請乎?」桓公曰:「大夫之言是也。」少頃,申侯請見,桓公召入。申侯進曰:「臣聞『師不踰時』,懼勞民也。今自春徂夏,霜露風雨,師力疲疾。若取道於陳鄭,糧食衣屨,取之猶外府也。若出於東方,倘東夷梗路,恐不堪戰,將若之何?濤塗自恤其國,非善計也。君其察之!」 桓公曰:「微大夫之言,幾誤吾事!」 乃命執濤塗於軍,使鄭伯以虎牢之地,賞申侯之功。因使申侯大其城邑,爲南北藩蔽。鄭伯雖然從命,自此心中有不樂之意。陳侯遣使納賂,再三請罪,桓公乃赦濤塗。諸侯各歸本國。桓公以管仲功高,乃奪大夫伯氏之駢邑三百戶,以益其封焉。
梗 : 대개 경. 대개, 대강. 가시나무. 느릅나무, 도라지. 굳세다. 강함. 곧다. 정직함. 막다. 재앙을 미리 방지함. 막히다. 통하지 아니함. 人形.
진(陳)나라 대부 원도도(轅濤塗)는 반사한다는 명을 듣고 정(鄭)나라 대부 신후(申侯)와 상의하며 말했다.
"반사하는 군데가 진나라와 정나라로 통하는 길을 취한다면 식량과 의복, 신발등 써야할 물자가 적지않아 두 나라는 반드시 심한 곤경을 겪게 될 것입니다. 동쪽 해도를 따라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니, 서(徐)나라와 거(莒)나라가 물자를 공급하도록 한다면 우리 두 나라는 약간이나마 편안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후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대가 말해보십시오."
원도도가 제환공에게 가서 말했다.
"군주께서 북으로는 융(戎)을 치시고 남으로는 초(楚)를 치셨습니다. 중원 제후들의 군대를 동이(東夷)와 동쪽 지방의 제후들에게 보여 주신다면군주의 위세를 두려워 하여 감히 주나라 조정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대부의 말이 옳도다."
잠시후 신후(申侯)가 알현을 청하여 환공이 불러 들이니 신후가 진언했다.
"신이 듣건데 '군사의 일은 때를 놓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백성을 수고롭게 할까 두려워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봄부터 여름으로 가면서 이슬과 비바람에 병력이 피로에 지쳤습니다. 진(陳)나라와 정(鄭)나라로 길을 나아간다면 식량과 의복, 신발의 물자를 외부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 동방으로 나아가 동이(東夷)가 길을 막는다면 싸움을 감당치 못할 까 두려운데 장차 어찌하시겠습니까? 원도도는 자신의 나라를 도우려는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군주께서는 그점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환공이 말했다. "하찮은 대부의 말을 들었다가 일을 망칠뻔 했구나!"
그리고 바로 명을 내려 원도도를 군영에 억류하고 정백(鄭伯 : 文公 輒)으로 하여금 호뢰곡의 땅을 신후의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주도록 했다. 그리고 신후로 하여금 그곳에 성읍을 크게 쌓도록 하여 남북으로 통하는 요로를 막게 하였다.
정백은 그렇게 명을 따랐지만 이로부터 심중에 불쾌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진후(陳侯)가 사자를 보내 뇌물을 바치고 재삼 용서를 빌자 환공은 마침내 원도도를 용서했다.
환공은 관중의 공이 높다 여기고 대부 백씨의 병읍(騈邑) 300호를 빼앗아 그에게 봉읍을 더해 주었다.
楚王見諸侯兵退,不欲貢茅。屈完曰:「不可以失信於齊!且楚惟絶周,故使齊得私之以爲重。若假此以自通於周,則我與齊共之矣。」 楚王曰:「奈二王何:」 屈完曰:「不序爵,但稱遠臣某可也。」 楚王從之。即使屈完爲使,賷菁茅十車,加以金帛,貢獻天子。周惠王大喜曰:「楚不共職久矣。今效順如此,殆先王之靈乎?」 乃告於文武之廟,因以胙賜楚。謂屈完曰:「鎭爾南方,毋侵中國!」 屈完再拜稽首而退。屈完方去後,齊桓公遣隰朋隨至,以服楚告。惠王待隰朋有加禮。隰朋因請見世子,惠王便有不樂之色。乃使次子帶與世子鄭,一同出見。隰朋微窺惠王神色,似有倉皇無主之意。隰朋自周歸,謂桓公曰:「周將亂矣!」 桓公曰:「何故?」 隰朋曰:「周王長子名鄭,先皇后姜氏所生,已正位東宮矣。姜后薨,次妃陳嬀有寵,立爲繼后,有子名帶。帶善於趨奉,周王愛之,呼爲太叔。遂欲廢世子而立帶。臣觀其神色倉皇,必然此事在心故也。恐《小弁》之事,復見於今日!君爲盟主,不可不圖。」 桓公乃召管仲謀之。管仲對曰:「臣有一計,可以定周。」 桓公曰:「仲父計將安出?」 管仲對曰:「世子危疑,其黨孤也。君今具表周王,言:『諸侯願見世子,請世子出會諸侯。』 世子一出,君臣之分已定,王雖欲廢立,亦難行矣。」 桓公曰:「善。」 乃傳檄諸侯,以明年夏月會於首止。再遣隰朋如周,言:「諸侯願見世子,以申尊王之情。」 周惠王本不欲子鄭出會,因齊勢强大,且名正言順,難以辭之,只得許諾。隰朋歸報。
共職 : 共(= 貢), 職(= 貢物). 공물을 바치다. 趨奉 : 비위를 맞추다. 엽합하다. 시중들다.
小弁(소반) : 詩經 小雅/小旻之什/小弁.
이 시의 지은이에 대해서 魯詩에서는 尹吉甫의 전처의 아들인 伯奇가 지었다고 한다. 윤길보의 후처가伯邦을 낳더니 伯奇를 참소하여 쫓아내자, 伯奇가 황야를 헤매면서 지었다고 한다.
一說에는 유왕(幽王)이 신(申)나라에 장가들어 태자 의구(宜臼)를 낳은 후, 포사(褒姒)를 얻어 미혹되어 아들 백복을 낳았다. 그후 유왕은 포사의 참소를 믿어 신후를 폐출하고 의구를 폐태자하였는데 의구가 이 시를 지어서 스스로 원망했다고 한다.
초왕은 제후들의 병력이 물러가는 것을 보고 청모를 바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굴완이 아뢰었다.
"제나라에 믿음을 저버려서는 안됩니다. 또 초나라만 주왕실과 단절한다면 제나라로 하여금 주왕실로부터 더욱 편애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 기회를 빌어 주나라와 스스로 통하게 된다면 우리나라와 제나라는 같은 입장이 될 것입니다."
초왕이 물었다. "왕이 둘인데 어찌 해야 하는가?"
굴완이 대답했다. "작위를 사용하지 마시고 다만 먼 곳에 있는 신하라고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초왕이 그 의견에 따랐다. 즉시 굴완을 사자로 삼고 청모 10수레에 금과 비단을 더하여 천자에게 공물로 바쳤다.
주혜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초나라에서 공물을 바치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는데, 이렇게 도리를 따르니 아마도 선왕(先王)의 영험 때문인가?"
그리하여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사당에 고하고 초나라에 제육(祭肉)을 하사했다.
그리고 굴완에게 말했다. "너희는 남방을 지키며 중원을 넘보지 말라!"
굴완은 머리를 조아리며 재배하고 물러났다. 굴완이 떠난 직후 제환공이 보낸 사자 습붕(隰朋)이 이르러 초나라를 복종시킨 일을 고했다.
혜왕은 습붕을 격을 높여 후대하였는데 습붕이 세자를 알현하겠다고 청하자 혜왕은 바로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둘째 아들 대(帶)로 하여금 세자 정(鄭)과 함께 나타나 알현하게 하였다. 습붕이 은밀히 혜왕의 표정을 보자 혜왕이 당황하여 어쩔줄 모르는 것 같았다.
습붕이 주나라에서 귀국하여 환공에게 말했다. "주나라는 장차 어지러워질 것 같습니다."
환공이 물었다. "무슨 까닭이오?"
습붕이 대답했다. "주 혜왕의 장자는 이름이 정(鄭)인데 선황후인 강씨 소생으로 이미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강씨가 죽자 다음 왕비인 진규(陳嬀)가 왕의 총애를 받아 왕비가 되었는데 아들을 낳자 이름을 대(帶)라 하였습니다. 대는 비위를 잘 맞추니 주왕이 그를 사랑하여 태숙(太叔)이라 불렀습니다. 마침내 세자를 폐하고 대를 세자로 세우려 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세자를 알현하고자 했을 때 주왕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반드시 그 일이 심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소반(小弁)의 일이 다시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주군께서는 맹주이시니 계책을 마련하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환공이 관중을 불러 물으니 관중이 대답했다. "신에게 하나의 계책이 있어 주나라 왕실을 안정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환공이 물었다. "중부의 계책은 무엇입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세자가 위태로우면 그를 따르는 무리도 멀어집니다. 주군께서는 주왕에게 표를 닦아 올리십시오. '제후들이 세자를 알현하고자 하니 세자가 제후들의 회합에 출석하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자가 일단 출석하게 되면 이미 군신의 구분이 정해지는 것이라 왕이 폐립하고자 하여도 실행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환공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리하여 제후들에게 격문이 전해졌는데 다음 해 여름에 수지(首止)에서 회동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다시 습붕을 주왕에게 보내 말하게 하였다. "제후들이 세자를 알현하여 왕실을 받드는 마음을 펴고자 합니다."
주혜왕은 본래 세자 정을 제후들의 회합에 출석시키기 싫었지만 제나라의 세력이 강하고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못하고 승락할 수 밖에 없었다. 습붕은 귀국하여 환공에게 복명했다.
至次年春,桓公遣陳敬仲先至首止,築宮以待世子駕臨。夏五月,齊、宋、魯、陳、衛、鄭、許、曹八國諸侯,並集首止。世子鄭亦至,停駕於行宮。桓公率諸侯起居,子鄭再三謙讓,欲以賓主之禮相見。桓公曰:「小白等忝在藩室,見世子如見王也,敢不稽首!」 子鄭謝曰:「諸君且休矣。」 是夜,子鄭使人邀桓公至於行宮,訴以太叔帶謀欲奪位之事。桓公曰:「小白當與諸臣立盟,共戴世子,世子勿憂也!」 子鄭感謝不已,遂留於行宮。諸侯亦不敢歸國,各就館舍,輪番進獻酒食,及犒勞輿從之屬。子鄭恐久勞諸國,便欲辭歸京師。桓公曰:「所以願與世子留連者,欲使天王知吾等愛戴世子,不忍相舍之意,所以杜其邪謀也。方今夏月大暑,稍俟秋涼,當送駕還朝耳。」遂預擇盟期,用秋八月之吉。
다음 해 봄이 되자 환공은 진경중(陳敬仲)을 먼저 수지에 보내 궁을 신축하여 세자의 어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게 했다. 5월이 되자 제(齊), 송(宋), 노(魯), 진(陳), 위(衛), 정(鄭), 허(許), 조(曹)등 8개국의 제후들이 수지에 모두 모였다. 세자 정도 도착하여 행궁에 어가를 멈췄다. 환공이 제후들을 인솔하고 일어나니 세자 정이 재삼 겸양하고 손님과 주인의 예로 만나고자 했다.
환공이 말했다. "소백등은 황공하옵게도 왕실을 지키는 번국의 제후들로, 세자 전하를 알현하는 것을 황제를 알현하는 것과 같이 여기는데 감히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자가 사례하며 말했다. "제군들은 예를 거두시오."
이날 밤, 세자는 사람을 시켜 환공을 행궁으로 불러 만나 태숙 대가 세자의 지위를 찬탈하려고 모의하고 있는 일로 하소연했다.
환공이 말했다. "소백은 신하들과 맹약을 체결하고 함께 세자를 추대하기로 하였으니 세자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세자가 감사의 말을 그치지 않으며 행궁에서 유숙했다.
제후들도 감히 귀국하지 못하고 각각 관사로 돌아가 돌아가며 세자에게 술과 음식을 바치고 마부들과 종자들을 호궤하며 위로했다.
세자는 각국의 제후와 군사들이 오랫동안 수고하는 것을 염려하여 바로 작별하고 경사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환공이 말했다. "세자 전하와 더불어 이곳에 계속 머물고자 하는 까닭은 천자께서 제후들이 세자 전하를 좋아하여 황제로 추대하려는 것을 아시고 세자 전하를 차마 버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이며, 사악한 음모를 막으려는 까닭입니다. 지금은 한여름이라 매우 더운 때이니 잠시 가을의 서늘한 날씨를 기다렸다가 어가를 조정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미리 제후들과 맹약을 체결할 날을 택하여 정했는데 8월이 길하다고 하였다.
卻說周惠王見世子鄭久不還轅,知是齊侯推戴,心中不悅。更兼惠后與叔帶朝夕在傍,將言語浸潤惠王。太宰周公孔來見,謂之曰:「齊侯名雖伐楚,其實不能有加於楚。今楚人貢獻效順,大非昔比,未見楚之不如齊也。齊又率諸侯擁留世子,不知何意,將置朕於何地!朕欲煩太宰通一密信於鄭伯,使鄭伯棄齊從楚,因爲孤致意楚君,努力事周,無負朕意!」宰孔奏曰:「楚之效順,亦齊力也。王奈何棄久暱之伯舅,而就乍附之蠻夷乎?」 惠王曰:「鄭伯不離,諸侯不散,能保齊之無異謀乎?朕志決矣,太宰無辭。」 宰孔不敢復言。惠王乃爲璽書一通,封函甚固,密授宰孔。宰孔不知書中何語,只得使人星夜達於鄭伯。鄭文公啟函讀之,言:「子鄭違背父命,植黨樹私,不堪爲嗣。朕意在次子帶也。叔父若能舍齊從楚,共輔少子,朕願委國以聽!」 鄭伯喜曰:「吾先公武莊,世爲王卿士,領袖諸侯,不意中絶,夷於小國。厲公又有納王之勞,未蒙召用。今王命獨臨於我,政將及焉,諸大夫可以賀我矣。」 大夫孔叔諫曰:「齊以我故,勤兵於楚。今乃反齊事楚,是悖德也。況翼戴世子,天下大義,君不可以獨異。」 鄭伯曰:「從霸何如從王?且王意不在世子,孤何愛焉!」 孔叔曰:「周之主祀,惟嫡與長。幽王之愛伯服,桓王之愛子克,莊王之愛子頹,皆君所知也。人心不附,身死無成。君不惟大義是從,而乃蹈五大夫之覆轍乎?後必悔之!」 大夫申侯曰:「天子所命,誰敢違之?若從齊盟,是棄王命也。我去,諸侯必疑,疑則必散,盟未必成。且世子有外黨,太叔亦有內黨,二子成敗,事未可知。不如且歸,以觀其變。」 鄭文公乃從申侯之言,托言國中有事,不辭而行。
暱 : 친할 닐. 친하다. 친한 사람. 친족. 나. 자기자신.
厲公의 納王之勞, 五大夫之覆轍 : 열국지 제19회 참조.
한편 주혜왕은 세자 정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제후(齊侯)가 세자로 추대한 것을 알고 마음이 불편했다. 또 혜후(惠后)와 태숙 대가 조석으로 곁에서 세자를 참소하며 혜왕을 졸라댔다.
태재 주공 재공(周公 宰孔)이 와서 알현하자 그에게 말했다.
"제후(齊侯)가 명분을 초나라를 친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초나라를 친 것이 아니었소. 이제 초나라에서 공물을 바치며 받드는 모습을 보이니 지난 날 파당을 지었던 것과는 크게 다르며 초나라가 제나라만 같지 못한 것을 보지 못했소. 제환공은 또 제후들을 거느리고 세자를 옹위하며 수지에서 머무르게 하고 있으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고 장차 짐이 어느 곳에 발붙이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겠소! 짐은 번거롭지만 태제를 통해 한 통의 서찰을 은밀히 정백(鄭伯)에게 보내 정백으로 하여금 제나라를 버리고 초나라를 좇도록 하여 나를 위해 초나라 군주에게 내 뜻을 전하여 주를 섬기도록 노력하고 짐의 뜻을 저버리지 말게 하기 위한 것이오."
재공이 아뢰었다. "초나라가 주나라를 받들게 된 것은 제나라의 힘입니다. 왕께서는 어찌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 온 백구(伯舅)를 버리시고 갑자기 따르는 만이(蠻夷)를 취하려 하십니까?"
혜왕이 대답했다. "세자 정과 백구(제환공)가 떨어져 있지 않고 제후들이 해산하지 않고 있는데 제환공에게 다른 뜻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소? 짐의 뜻은 결정되었으니 태재는 말할 것 없소."
재공은 감히 또다시 말할 수 없었다. 혜왕은 옥새를 찍은 서신 1통을 작성하여 견고하게 봉한 다음 제공에게 은밀히 건네 주었다. 재공은 서찰에 무슨 말이 써 있는지도 모르고 다만 사람을 시켜 밤새워 달려가 정백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정문공(鄭文公 : 鄭伯)이 서찰을 뜯어 읽어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세자는 아비의 명을 거스르고 사사로이 도당을 만들고 있으니 후사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짐의 뜻은 둘째인 대(帶)에게 있습니다. 숙부가 제나라를 버리고 초나라를 좇아 함께 어린 아들을 보좌한다면 짐은 국정을 숙부에게 맡길 것이오!"
정백이 기뻐하며 말했다.
"우리 선공이신 무공(武公), 장공(莊公)께서는 대를 이어 왕의 경사(卿士)가 되어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셨는데 뜻밖에 도중에 대가 끊겨 작은 나라로 몰락했다. 여공(厲公)께서는 또 왕을 복위시킨 공로가 있는데도 부름을 받아 기용되는 은택을 받지 못했다. 이제 왕명이 나에게만 내려져 정권이 장차 나에게 올 것이니 대부들은 나에게 경하해야 할 것이다."
대부 공숙(孔叔)이 간했다.
"제나라는 우리나라때문에 병력을 동원하여 초나라에 대적하였습니다. 이제 제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를 섬기는 것은 덕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하물며 세자를 도와 추대하는 일이 천하의 대의인데 주군께서 홀로 다른 길을 가셔서는 안됩니다."
정백이 말했다.
"패자를 좇는 일이 어찌 왕을 좇는 것만 같겠는가? 또 왕의 뜻이 세자에게 있지 않은데 내가 어찌 제나라를 따르겠소?"
공숙이 말했다.
"주왕실의 사직을 잇는 일은 오로지 적장자여야 합니다. 유왕(幽王)이 백복(伯服)을 사랑하고, 환왕(桓王)이 공자 극(克)을 사랑하고, 장왕(莊王)이 공자 퇴(頹)를 사랑한 일로 나라가 어지러워졌던 일은 모두 주군께서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인심이 따르지 않으면 몸이 죽어도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주군께서는 오직 대의를 따라야 할 뿐인데 오대부의 전철을 밟으려고 하시니 후에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대부 신후가 말했다.
"천자의 명인데 누가 감히 거스르겠습니까? 만약 제나라가 주도하는 맹약을 따른다면 이는 왕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떠난다면 제후들은 반드시 의혹에 빠질 것이고 의혹에 빠지게 되면 반드시 흩어질 것이니 맹약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세자에게는 외부에 지지하는 세력이 있지만 태숙도 내부에 지지하는 세력이 있어 두 왕자의 성패(成敗)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잠시 돌아가 사태의 변화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문공은 신후의 의견을 좇아 나라에 변고가 생겼다고 핑계대고 작별인사도 없이 떠났다.
齊桓公聞鄭伯逃去,大怒,便欲奉世子以討鄭。管仲進曰:「鄭與周接壤,此必周有人誘之。一人去留,不足以阻大計。且盟期已及,俟成盟而後圖之。」 桓公曰:「善。」 於是即首止舊壇,歃血爲盟。齊、宋、魯、陳、衛、許、曹,共是七國諸侯。世子鄭臨之,不與歃,示諸侯不敢與世子敵也。盟詞曰:「凡我同盟,共翼王儲,匡靖王室。有背盟者,神明殛之!」事畢,世子鄭降階揖謝曰:「諸君以先王之靈,不忘周室,暱就寡人,自文武以下,咸嘉賴之!況寡人其敢忘諸君之賜?」諸侯皆降拜稽首。次日,世子鄭欲歸,各國各具車徒護送。齊桓公同衛侯親自送出衛境,世子鄭垂淚而別。
史官有詩讚云:
君王溺愛冢嗣危,
鄭伯甘將大義違。
首止一盟儲位定,
綱常賴此免凌夷。
鄭文公聞諸侯會盟,且將討鄭,遂不敢從楚。
제환공은 정백이 도망쳐 떠났다는 소식에 크게 노하여 세자를 받들고 정나라를 치고자 했다.
그러자 관중이 진언했다. "정나라와 주왕실은 국토가 붙어있어 이 일은 반드시 주나라 사람이 유혹한 것입니다. 한 사람이 떠나고 머무르는 일이 대계를 막을 수 없습니다. 또 맹약을 체결하는 날이 이미 다가왔으니 맹약을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그 후에 처리하십시오."
환공이 말했다. "좋습니다."
이리하여 수지의 단으로 나아가 삽혈하며 맹약을 체결했다. 제, 송, 노, 진, 위, 허, 조나라등 모두 7개국 제후들이 함께 했다. 세자가 참여했으나 함께 삽혈의식은 행하지 않은 것은 제후들이 감히 세자와 함께 대등하게 할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맹약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의 동맹은 함께 태자를 도와 왕실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맹약을 저버리는 자는 천지신명이 죽음을 내리게 될 것이다!"
의식을 마치자 세자가 층계를 내려와 사례했다.
"선왕들의 영험으로 제후 여러분이 주왕실을 잊지 않고 과인을 돕고 있습니다. 문무왕이래 모두 제후들의 은덕을 입어 왔습니다. 하물며 과인이 감히 제후 여러분들의 은덕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제후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려 절했다. 다음날 세자가 돌아가고자 하여 각국에서 각 수레를 준비해 세자를 호송했다.
제환공은 위후(衛侯)와 함께 친히 위나라 경계 밖까지 호송했으며 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작별했다.
사관이 시를 지어 칭찬했다.
군왕이 미색에 빠져 세자가 위태로웠는데,
정백은 감언이설에 빠져 대의를 거슬렀도다.
수지의 맹약으로 세자의 위치가 정해졌으니,
이 덕택에 강상이 무너지는 것은 면했도다.
정문공은 제후들이 회맹이 이루어졌으며 또 장차 정나라를 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감히 초나라를 좇지 못했다.
卻說楚成王聞鄭不與首止之盟,喜曰:「吾得鄭矣!」 遂遣使通於申侯,欲與鄭修好。原來申侯先曾仕楚,有口才,貪而善媚,楚文王甚寵信之。及文王臨終之時,恐後人不能容他,贈以白璧,使投奔他國避禍。申侯奔鄭,事厲公於櫟,厲公復寵信如在楚時。及厲公復國,遂爲大夫。楚臣俱與申侯有舊,所以今日打通這個關節,要申侯從中慫恿,背齊事楚。申侯密言於鄭伯,言:「非楚不能敵齊,況王命乎?不然,齊楚二國,皆將仇鄭,鄭不支矣。」 鄭文公惑其言,乃陰遣申侯輸款於楚。
周惠王二十六年,齊桓公率同盟諸侯伐鄭,圍新密。時申侯尙在楚,言於楚成王曰:「鄭所以願歸宇下者,正謂惟楚足以抗齊也。王不救鄭,臣無辭以復命矣。」 楚王謀於群臣。令尹子文進曰:「召陵之役,許穆公卒於軍中,齊所憐也。許事齊最勤,王若加兵於許,諸侯必救,則鄭圍自解矣。」 楚王從之,乃親將伐許,亦圍許城。諸侯聞許被圍,果去鄭而救許,楚師遂退。申侯歸鄭,自以爲有全鄭之功,揚揚得意,滿望加封。鄭伯以虎牢之役,謂申侯已過分,不加爵賞。申侯口中不免有怨望之言。明年春,齊桓公復率師伐鄭。陳大夫轅濤塗,自伐楚歸時,與申侯有隙,乃爲書致孔叔曰:申侯前以國媚齊,獨擅虎牢之賞。今又以國媚楚,使子之君,負德背義,自召干戈,禍及民社。必殺申侯,齊兵可不戰而罷。
孔叔以書呈於鄭文公。鄭伯爲前日不聽孔叔之言,逃歸不盟,以致齊兵兩次至鄭,心懷愧悔,亦歸咎於申侯。乃召申侯責之曰:「汝言惟楚能抗齊。今齊兵屢至,楚救安在?」 申侯方欲措辯,鄭伯喝敎武士推出斬之。函其首,使孔叔獻於齊軍曰:「寡君昔者誤聽申侯之言,不終君好。今謹行誅,使下臣請罪於幕下,惟君侯赦宥之!」 齊侯素知孔叔之賢,乃許鄭平。遂會諸侯於寧母。鄭文公終以王命爲疑,不敢公然赴會,使其世子華代行,至寧母聽命。
한편 초나라 성왕은 정나라가 수지의 맹약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정나라를 얻었도다!"
마침내 신후에게 은밀히 사자를 보내 정나라와 수교를 맺고자 했다.
원래 신후는 앞서 초나라에서 벼슬을 한 적이 있었는데 말재간이 좋고 탐욕스럽고 아첨을 잘하여 초문왕(楚文王)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받았었다. 문왕의 임종이 다가왔을 때 후인(後人)들이 그를 용납할 수 없을까 두려워 백벽(白璧)을 주고 다른 나라로 도망가서 화를 피하게 했다. 신후는 정나라로 도망가 역(櫟)땅에서 여공을 섬겼는데 여공은 또 신후를 초문왕처럼 총애하고 신임했다.
여공이 정나라의 군주로 복귀하게 되자 신후는 대부가 되었다. 초나라의 신하들은 모두 신후와 옛날의 교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개별적으로 연락을 취하여 중간에서 제나라를 배신하고 초나라를 섬기도록 종용하였다.
신후가 은밀히 정백에게 말했다. "초나라가 아니면 제나라를 대적할 수 있는 나라가 없는데 하물며 왕명이 아닙니까? 왕명을 받들지 않으면 제나라와 초나라의 두 나라가 모두 정나라를 적으로 돌릴 것인데 그러면 정나라는 지탱할 수 없게 됩니다."
정문공은 그 말에 혹하여 은밀히 신후를 초나라에 보내 초나라와 화친을 맺었다.
주혜왕 26년, 제환공은 동맹을 맺은 제후들을 인솔하고 정나라를 정벌하러 가서 신밀성(新密城)을 포위했다.
당시 신후는 아직 초나라에 있었는데 초성왕에게 말했다. "정나라가 초나라의 산하로 들어오려고 한 까닭은 바로 초나라만이 제나라에 항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왕께서 정나라를 구원하지 않으신다면 신은 귀국하여 복명할 말이 없게 됩니다."
초왕은 군신들과 상의했다.
영윤 자문(子文)이 진언했다. "소릉의 회합에서 허목공(許穆公)이 군중에서 사망했을 때 제환공은 가엽게 여겼습니다. 허나라에서 제나라를 정성을 다해 섬기고 있는데 왕께서 허나라를 친다면 제후들은 반드시 구원할 것이니 정나라의 포위는 저절로 풀리게 될 것입니다."
초왕이 그 말을 좇아 친히 허나라를 치러 가서 허나라 도읍성을 포위했다. 제후들이 허나라 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과연 정나라를 떠나 허나라로 구원하러 갔고 초나라 군대는 철수했다.
신후가 정나라로 돌아가자 스스로 정나라를 온전하게 한 공이 있다고 여기고 득의양양하여 교만하게 봉작을 늘려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정백은 호뢰의 일로 신후는 이미 과분한 봉작을 받았다고 여겨 봉작을 더해주지 않았다. 신후는 입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다음해 봄, 제환공은 다시 제후들을 거느리고 정나라를 쳤다. 진(陳)나라 대부 원도도는 초나라를 치러 갔다가 귀국한 이후 신후에게 원한이 있었는데 마침내 서찰을 작성하여 공숙에게 보냈다.
'신후는 전에 나라를 바쳐 제나라에 아첨하여 마음대로 호뢰의 땅을 상으로 받았습니다. 이제 또 나라를 바쳐 초나라에 아부하여 그대의 군주로 하여금 덕을 등지고 의를 배신하게 하여 스스로 전쟁을 초래하였으며 그 재앙이 백성과 사직에 미치고 있습니다. 반드시 신후를 죽여야 제나라 군대가 싸우지 않고 물러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숙은 그 서찰을 정문공에게 바쳤다. 정백은 지난 날 공숙의 말을 듣지 않고 몰래 귀국하여 맹약을 체결하지 않으므로써 제나라 연합군이 두차례에 걸쳐 정나라에 이르게 한 일로 마음속에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 신후에게 잘못을 돌렸다.
그리하여 신후를 꾸짖어 말했다.
"너는 오직 초나라만이 제나라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제나라 군대가 거듭 밀려왔는데 초나라 구원군은 어디에 있는가?"
신후가 막 변명하려고 하는데 정백은 무사들을 꾸짖어 신후를 끌고 나가 참하게 했다.
그 수급을 함에 담아 공숙으로 하여금 제나라 군중에 바치고 사죄하게 했다.
"저희 군주께서 지난 날 신후의 말을 잘못 받아들여 군주와의 맹약을 체결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를 참하여 저를 보내 막하에 죄를 청하오며 오직 군주만이 잘못을 용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제환공은 본래 공숙의 현명함을 알고 있던 터라 바로 정나라와의 화평을 허락했다. 마침내 영모(寧母)에서 제후들과 회맹했는데 정문공은 끝내 왕명을 받은일로 의심받을까 생각하여 감히 공개적으로 회맹에 참석하지 못하고 세자 화(華)를 대신 참석하게 하여 영모에서 명을 받들게 하였다.
子華與弟子臧,皆嫡夫人所出。夫人初有寵,故立華爲世子。後復立兩夫人,皆有子。嫡夫人寵漸衰,未幾病死。又有南燕姞氏之女,爲媵於鄭宮,向未進御。一夕,夢一偉丈夫,手持蘭草謂女曰:「余爲伯鯈,乃爾祖也。今以國香贈爾爲子,以昌爾國。」 遂以蘭授之。及覺,滿室皆香,且言其夢。同伴嘲之曰:「當生貴子。」 是日,鄭文公入宮,見此女而悅之。左右皆相顧而笑。文公問其故,乃以夢對。文公曰:「此佳兆也,寡人爲汝成之。」 遂命採蘭蕊佩之,曰:「以此爲符。」 夜召幸之,有娠,生子名之曰蘭。此女亦漸有寵,謂之燕姞。世子華見其父多寵,恐他日有廢立之事。乃私謀之於叔詹。叔詹曰:「得失有命,子亦行孝而已。」 又謀之於孔叔,孔叔亦勸之以盡孝。子華不悅而去。子臧性好奇詭,聚鷸羽以爲冠,師叔曰:「此非禮之服,願公子勿服。」 子臧惡其直言,訴於其兄。故子華與叔詹、孔叔、師叔三大夫,心中俱有芥蒂。
鯈 : 피라미 조. 蕊 : 蕋, 蘂. 꽃술 예. 꽃술. 꽃. 열매. 더부룩하다. 꽃이 더부룩하게 피어 있는 모양.
鷸 : 도요새 휼. 도요새. 새매. 물총새. 물새의 한 가지. 蒂 : 꼭지 체. 꼭지. 꽃받침. 성의 하나. 芥蒂 : 불만. 응어리. 맺힌 마음.
정나라 세자 화와 동생 공자 장(臧)은 모두 적실 부인의 소생이다. 부인이 처음에는 문공의 총애를 받았으므로 화를 세자로 세울 수 있었다. 후에 다시 두 사람의 부인을 얻었는데 모두 아들을 낳았다. 적실인 부인은 점차 총애를 잃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또 남연(南燕)의 길(姞)씨에게 딸이 있었는데 정나라 궁에 잉첩(媵妾)으로 보내졌으나 길씨녀는 아직 문공을 모시지 못했었다.
어느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한 장대한 장부(丈夫)가 나타나 손에 난초를 가지고 있다가 그녀에게 주며 말했다.
"나는 백조(伯鯈)로 바로 네 조상이다. 이것은 향기가 매우 진한 것으로 너에게 주니 아들로 삼거라. 내가 네 나라를 번창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난초를 그녀에게 주었다. 잠에서 깨니 난초향이 방안에 가득하여 함께 자던 궁녀에게 꿈이야기를 했다.
함께 자던 궁녀가 조롱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귀한 아들을 낳겠구나."
그날 정문공이 궁에 들어와 그녀를 보고 기뻐하였다. 좌우에서 모두 서로 쳐다보며 웃었다. 문공이 그 까닭을 묻자 바로 꿈이야기를 했다.
문공이 말했다. "이것은 좋은 징조이다. 과인이 너에게 그 일을 이루게 해 주리라."
명을 내려 난초꽃을 꺾어오게 하여 허리에 채워주며 말했다. "이것을 부적으로 삼으리라."
그날 밤 그녀를 불러 동침했는데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게 되자 이름을 란(蘭)이라고 지었다. 그녀는 점차 총애를 받게 되었고 연길(燕姞)이라고 불리었다.
세자 화는 부친이 그녀를 매우 총애하는 것을 보고 훗날 자신을 폐위하는 일이 있을까 두려워 하였다. 그리하여 은밀히 숙첨과 상의했다.
숙첨이 말했다. "세자의 지위의 득실(得失)은 천명에 달려있는 것이니 세자께서는 효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또 공숙과도 상의하였으나 공숙 역시 효성을 다하라고 권할 뿐이었다. 세자는 불쾌한 마음으로 물러났다.
공자 장은 성품이 기이하고 이상한 것을 좋아하여 물총새 깃을 모아 관을 만들어 쓰고 다녔는데 사숙(師叔)이 말했다.
"이것은 예가 아닌 것을 쓰고 다니시는 것이니 공자께서는 쓰지 마십시오."
공자 장은 그가 직언하는 것을 싫어하여 그 형인 세자에게 하소연했다. 이에 세자는 숙첨, 공숙, 사숙등 세 사람의 대부를 마음속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至是,鄭伯使子華代行赴會,子華慮齊侯見怪,不願往。叔詹促之使速行。子華心中益恨,思爲自全之術。旣見齊桓公,請屛去左右,然後言曰:「鄭國之政,皆聽於洩氏、孔氏、子人氏三族。逃盟之役,三族者實主之。若以君侯之靈,除此三臣,我願以鄭附齊,比於附庸。」 桓公曰:「諾。」 遂以子華之謀,告於管仲。管仲連聲曰:「不可,不可!諸侯所以服齊者,禮與信也。子奸父命,不可謂禮。以好來而謀亂其國,不可謂信。且臣聞此三族,皆賢大夫,鄭人稱爲『三良』。所貴盟主,順人心也。違人自逞,災禍必及。以臣觀之,子華且將不免,君其勿許。」 桓公乃謂子華曰:「世子所言,誠國家大事。俟子之君至,當與計之。」 子華面皮發赤,汗流浹背,遂辭歸鄭。管仲惡子華之奸,故洩其語於鄭人。先有人報知鄭伯。比及子華復命,詭言:「齊侯深怪君不親行,不肯許成,不如從楚。」 鄭伯大喝曰:「逆子幾賣吾國,尙敢謬說耶?」 叱左右將子華囚禁於幽室之中。子華穴牆謀遁,鄭伯殺之,果如管仲所料。公子臧奔宋,鄭伯使人追殺之於途中。鄭伯感齊不聽子華之德,再遣孔叔如齊致謝,並乞受盟。
胡曾先生詠史詩曰:
鄭用三良似屋楹,
一朝楹撤屋難撐。
子華奸命思專國,
身死徒留不孝名。
此周惠王二十二年事也。
浹 : 두루미칠 협. 두루 미치다. 물이 넘치는 모양. 사무치다. 통함. 젖다. 적시다. 돌다. 일주함.
撐 : 撑. 버틸 탱(청). 버티다. 버팀대, 배를 젓다. 배부르다. 가득참.
이때에 정백은 세자 화로 하여금 회맹에 대신 참석하게 하였는데 세자 화는 제환공이 괴이하게 생각할까봐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숙첨이 세자에게 빨리 가도록 독촉하자 세자 화의 마음 속에 더욱 한이 깊어져 스스로 온전한 계책을 생각해냈다.
제환공을 만나자 좌우를 물리쳐 줄 것을 청하여 모두 물러간 후에 말했다.
"정나라의 정치는 모두 설씨(洩氏), 공씨(孔氏), 자인씨(子人氏)의 세 집안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전에 회맹을 피해 떠난 일도 실상은 세 집안에서 주장하여 행해진 것입니다. 군후의 도움으로 이 세 집안을 제거해 주신다면 저는 정나라가 제나라와 가까이 지내며 부용국이 될 것입니다."
제환공이 말했다. "그렇게 하겠노라."
이에 정세자의 계책을 관중에게 알렸다.
그러자 관중은 연달아 소리쳤다. "불가합니다. 불가합니다. 제후들이 제나라에 복종하고 있는 까닭은 예(禮)와 신의(信義) 때문입니다. 자식이 되어 부친을 거스르는 것은 예라고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일을 하려고 와서 그 나라를 어지럽히려고 하는 것은 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신이 듣건대 이 세 집안은 모두 현명한 대부이며 정나라 사람들이 삼량(三良)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맹주를 귀하게 받드는 것은 인심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심을 거스르고 스스로 강해지려고 한다면 반드시 재앙을 맞게 됩니다. 신이 그를 보건대 세자 화는 자신의 약속도 지키지 않을 것이니 주군께서는 허락하지 마십시오."
환공이 세자 화를 보고 말했다. "세자가 말한 것은 진실로 국가의 대사이다. 세자가 군주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마땅하다."
세자의 얼굴이 붉어지며 땀이 흘러 등에 흥건해졌다. 그리하여 작별하고 정나라로 돌아갔다.
관중은 세자 화의 간교한 것을 싫어하였으므로 사자 화가 한 말을 정나라 사람들에게 누설하였다. 세자보다 먼저 정나라 사람이 정백에게 보고해 알렸다.
세자 화가 돌아가 복명할 때가 되자 거짓으로 꾸며 말했다. "제환공은 주군께서 직접 가시지 않은 것을 괴이히 여기고 화친을 거절하였습니다. 초나라를 따르는 것만 못합니다."
정백이 큰 소리로 꾸짖으며 말했다. "아비를 거스른 자식이 몇 번이나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아직도 감히 거짓말을 하느냐?"
좌우를 꾸짖어 세자 화를 밀실 안에 가두게 했다. 세자가 벽에 구멍을 뚫고 도망치려고 하자 정백이 잡아 죽였는데 과연 관중이 헤아린 것과 같았다. 공자 장은 송나라로 도망치려고 하였으나 정백이 사람을 시켜 뒤쫒아가 도중에 잡아 죽였다.
정백은 제환공이 세자 화의 말을 듣지 않은 덕에 감격하여 재차 공숙을 제나라에 보내 사례하고 맹약을 요청하여 체결했다.
호증선생이 역사적인 사실을 시로 읊었다.
정나라에서는 삼량(三良)을 집의 기둥처럼 기용하였는데,
하루아침에 기둥을 철거하면 집은 지탱하지 못하는 법.
세자 화가 명을 어기고 나라를 마음대로 하려다가,
몸은 죽고 불효자라는 이름만 남겼도다.
이것은 주혜왕 22년에 일어난 일이다.
是冬,周惠王疾篤。王世子鄭恐惠后有變,先遣下士王子虎告難於齊。未幾,惠王崩。子鄭與周公孔召伯廖商議,且不發喪,星夜遣人密報於王子虎。王子虎言於齊侯,乃大合諸侯於洮。鄭文公亦親來受盟。同歃者,齊、宋、魯、衛、陳、鄭、曹、許,共八國諸侯,各各修表,遣其大夫如周。那幾位大夫:齊大夫隰朋,宋大夫華秀老,魯大夫公孫敖,衛大夫寧速,陳大夫轅選,鄭大夫子人師,曹大夫公子戊,許大夫百佗。八國大夫連轂而至,羽儀甚盛,假以問安爲名,集於王城之外。王子虎先驅報信,王世子鄭使召伯廖問勞,然後發喪。諸大夫固請謁見新王,周召二公奉子鄭主喪,諸大夫假便宜,稱君命以弔。遂公請王世子嗣位,百官朝賀,是爲襄王。惠后與叔帶暗暗叫苦,不敢復萌異志矣。襄王乃以明年改元,傳諭各國。
廖 : 공허할 료. 공허하다. 洮 : 씻을 도/호수이름 요. 씻다. 강이름. 땅이름. 호수이름.
下士 : 주나라 왕실의 봉록과 작위의 서열 중 마지막 등급, 卿, 大夫, 上士, 中士, 下士의 5등급으로 되어있다. <孟子 萬章<下> 第2章>
叫苦 : 괴로워서 울부짖음. 고통을 호소하다. 비명을 지르다. 죽는 소리를 하다.
이해 겨울 주혜왕이 병이 들어 위독했다. 왕세자 정(鄭)은 혜후(惠后)가 변고를 일으킬까 두려워 먼저 하사(下士)인 황자 호(虎)를 제나라에 파견하여 어려움을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혜왕이 붕(崩)했다. 세자는 주공 공(孔)과 소백 료(廖)와 상의하여 잠시 발상을 하지 않고 사람을 공자 호에게 밤새워 달려가도록 하여 은밀하게 혜왕의 죽음을 알렸다. 왕자 호가 제환공에게 알리자 도(洮)에서 제후들이 크게 회합을 가졌다. 정문공도 친히 회맹에 참석했다. 함께 삽혈한 제후는 제(齊), 송(宋), 노(魯), 위(衛), 진(陳), 정(鄭), 조(曹), 허(許)나라 제후였다.
8개국 제후가 각각 표를 닦아 그 나라 대부들을 주나라에 파견했다. 그 대부들은 제나라 대부 습붕(隰朋), 송나라 대부 화수로(華秀老), 노나라 대부 공손오(公孫敖), 위나라 대부 영속(寧速), 진나라 대부 원선(轅選), 정나라 대부 자인사(子人師), 조나라 대부 공자 무(戊), 허나라 대부 백타(百佗)였다.
8개국 대부들의 수레가 연이어 도착하자 수레에 장식한 새 깃털이 매우 성대하였는데 혜왕을 문안드린다는 명분으로 핑계로 왕성 밖에 집결했다. 왕자 호가 먼저 달려와 소식을 전하자 세자는 소백 료를 사자로 보내 각 나라의 제후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그 후에 발상했다.
대부들이 굳이 새로운 왕을 알현하기를 청하여 주공 공과 소백 료의 두 사람이 세자를 받들어 상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대부들은 혜왕을 알현하러 온 김에 각각 군주로부터 혜왕을 조문하라는 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마침내 왕세자가 왕위를 이어받아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요구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즉위하였는데 바로 양왕(襄王)이다.
혜후와 태숙 대는 암암리에 비명을 질렀으나 감히 따른 뜻을 나타내지 못했다. 양왕은 다음 해에 개원하고 각국에 그 사실을 알렸다.
襄王元年,春祭畢。命宰周公孔賜胙於齊,以彰翼戴之功。齊桓公先期聞信,復大合諸侯於葵邱。時齊桓公在路上,偶與管仲論及周事。管仲曰:「周室嫡庶不分,幾至禍亂。今君儲位尙虛,亦宜早建,以杜後患。」 桓公曰:「寡人六子,皆庶出也,以長則無虧,以賢則昭。長衛姬事寡人最久,寡人已許之立無虧矣。易牙豎貂二人,亦屢屢言之。寡人愛昭之賢,意尙未決。今決之於仲父。」 管仲知易牙豎貂二人奸佞,且素得寵於長衛姬,恐無虧異日為君,內外合黨,必亂國政。公子昭,鄭姬所出,鄭方受盟,假此又可結好。乃對曰:「欲嗣伯業,非賢不可。君旣知昭之賢,立之可也。」 桓公曰:「恐無虧挾長來爭,奈何!」 管仲曰:「周王之位,待君而定。今番會盟,君試擇諸侯中之最賢者,以昭托之,又何患焉?」 桓公點首。比至葵邱,諸侯畢集,宰周公孔亦到,各就館舍。時宋桓公御說薨,世子茲父,讓國於公子目夷,目夷不受,茲父即位,是爲襄公。襄公遵盟主之命,雖在新喪,不敢不至,乃墨衰赴會。管仲謂桓公曰:「宋子有讓國之美,可謂賢矣!且墨衰赴會,其事齊甚恭。儲貳之事,可以托之。」 桓公從其言,即命管仲私詣宋襄公館舍,致齊侯之意。襄公親自來見齊侯。齊侯握其手,諄諄以公子昭囑之:「異日仗君主持,使主社稷。」 襄公愧謝不敢當,然心感齊侯相托之意,已心許之矣。
墨衰 : 상례(喪禮)에서, 베 직령(直領)에 묵립(墨笠)과 묵대(墨帶)를 갖추어 입는 옷.
儲貳 : 다음 제위(帝位)를 이을 황태자나 다음 왕위를 이을 왕세자를 이르던 말.
양왕 원년 봄제사를 마쳤다. 양왕은 태재 주공 공에게 명을 내려 제나라에 제사고기를 하사하여 왕위에 추대한 공로를 표창했다.
제환공은 먼저 그 소식을 듣고 날을 정해 다시 규구(葵邱)에서 제후들과 크게 회합을 가졌다. 그때 제환공은 규구로 가는 중이었는데 노상에서 관중과의 의론이 주왕실의 일에 미치게 되었다.
관중이 말했다. "주왕실은 적자와 서자가 구분되지 않아 몇차례 환란이 일어났습니다. 지금 주군께서는 세자의 자리를 아직도 비워두시고 계신데 속히 세자를 세워 후환을 막아야 합니다."
환공이 말했다. "과인에게는 여섯명의 아들이 있는데 모두 서출입니다. 나이로 보면 무휴(無虧)이고 현명하기로 보면 소(昭)가 제일 낫습니다. 큰 위희(長衛姬)가 가장 오랫동안 과인을 섬겨 과인은 이미 무휴를 세자로 세우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했습니다. 역아(易牙)와 수초(豎貂) 두 사람도 누누히 무휴를 말했습니다. 과인은 소의 현명함을 사랑하는데 아직 뜻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중부가 결정해 주시오."
관중은 역아와 수초 두사람이 간사하고 아첨을 잘 하며, 또 평소 큰 위희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어 훗날 무휴가 군주가 되면 안팎으로 무리를 이루어 반드시 국정이 어지러워질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자 소(昭)는 정희(鄭姬) 소생으로 정나라는 이제 맹약을 받아들였으니 공자 소가 세자가 되면 이를 계기로 또 화친조약도 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관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패업을 이어가게 하시려면 현명한 자가 아니면 불가합니다. 주군께서 공자 소가 현명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니 그를 세자로 세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환공이 물었다. "무휴가 나이를 믿고 다툴까 걱정인데 어찌합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주나라 왕위도 주군을 기다려 정해졌습니다. 이번 회맹에서 주군께서는 제후들 중에서 가장 현명한 자를 택하여 그에게 공자 소를 부탁하신다면 또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환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규구에 도착하자 제후들이 모두 모였고 태재 주공 공도 도착하여 각 관사로 들어갔다.
그때 송환공(宋桓公) 어설(御說)이 죽고 세자 자부(子父)가 공자 목이(目耳)에게 나라를 양보하였으나 목이가 받지 않아 자부가 즉위하였으니 바로 양공(襄公)이다. 양공은 맹주의 명에 따라 상주의 몸이지만 참석하지 않을 수 없어 상복을 입고 회맹에 참석했다.
관중이 환공에게 말했다.
"송나라 제후에게 나라를 양보하는 미덕이 있으니 어질다고 할만 합니다. 또 상복을 입고 회맹에 참석했으니 그가 제나라를 섬기는 모습이 참으로 공손합니다. 세자의 일은 그에게 부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환공이 그 말에 따라 바로 관중에게 명을 내려 은밀히 송양공의 관사에 가서 제환공의 뜻을 전했다. 양공은 친히 와서 제환공을 알현했다. 제환공은 그의 손을 잡고 간곡하게 공자 소의 일을 그에게 부탁했다.
"훗날 군주께서 공자 소를 보살펴 주시어 그가 제나라 사직의 주인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양공은 부끄럽기도 하여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제환공의 부탁하는 마음에 감겯하여 이미 그 일을 허락했다.
至會日,衣冠濟濟,環珮鏘鏘。諸侯先讓天使升壇,然後以次而升。壇上設有天王虛位,諸侯北面拜稽,如朝覲之儀,然後各就位次。宰周公孔捧胙東向而立,傳新王之命曰:「天子有事於文武,使孔賜位舅胙。」 齊侯將下階拜受。宰孔止之曰:「天子有後命:以伯舅耋老,加勞,賜一級,無下拜。」 桓公欲從之,管仲從旁進曰:「君雖謙,臣不可以不敬。」 桓公乃對曰:「天威不違顔咫尺,小白敢貪王命,而廢臣職乎?」 疾趨下階,再拜稽首,然後登堂受胙。諸侯皆服齊之有禮。桓公因諸侯未散,復申盟好,頌周《五禁》曰:「毋壅泉,毋遏糴,毋易樹子,毋以妾爲妻,毋以婦人與國事。」 誓曰:「凡我同盟,言歸於好。」 但以載書,加於牲上,使人宣讀,不復殺牲歃血,諸侯無不信服。
髯翁有詩云:
紛紛疑叛說春秋,
攘楚尊周握勝籌。
不是桓公功業盛,
誰能不歃信諸侯?
회맹하는 날이 되자 의관을 단정히 갖추니 허리에 두른 패옥소리가 쟁쟁했다. 제후들은 천자의 사자가 먼저 단에 오르도록 양보하고 그 다음에 올랐다. 단상에는 천자의 자리를 빈채로 설치하고 제후들은 북면하여 머리를 조아려 절했는데 마치 조정에서 황제를 알현하는 것 같이 하였으며 그 후 각 순서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
태재 주공 공이 제육(祭肉)을 받들고 동쪽을 향하여 서서 새로운 황제의 명을 전했다.
"천자는 문왕과 무왕에게 제사를 지내고 주공 공으로 하여금 백구(伯舅)에게 제사고기를 하사하게 하노라."
제환공이 계단을 내려가 절하고 받으려고 하자 태재 공이 그를 저지하고 말했다.
"천자의 후명(後命)이 있었습니다. 백구(伯舅 : 齊桓公)께서는 연로하시기 때문에 힘들 것을 염려하시고 한 등급을 높여 당에서 내려와 절하지 마시라 하셨습니다."
환공이 그 말에 다르려고 하자 관중이 옆에서 따르며 진언했다.
"천자께서 겸양하시더라도 신하된 입장에서 공경을 보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자 환공이 대답했다.
"천자의 위엄이 얼굴에서 지척지간도 못되는데 소백이 감히 황명을 탓하며 신하의 직분을 저버리겠습니까?"
그리고 계단을 달려 내려가 두번 절하며 머리를 조아리고는 그 후에야 당에 올라가 제육(祭肉)을 받았다. 제후들은 모두 제환공이 예의가 있는 것을 보고 감복했다.
환공은 제후들이 미처 해산하지 않고 있자 다시 맹약을 밝히고 주나라를 기리며 다섯가지의 금기사항을 정했다.
우물을 메우지 말라!
쌀을 사들이지 말라!
세자를 바꾸지 말라!
첩을 부인으로 삼지 말라!
부인이 국사에 참여하게 하지 말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서약했다. "우리가 함께 맹약을 체결하였으니 우호를 따릅시다."
문서에 기재하여 희생(犧牲) 위에 올려 놓은 후 사람을 시켜 읽게 했다. 다시 희생을 죽여 삽혈의식은 행하지 않았으나 제후들이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염옹이 시를 지었다.
춘추시대가 의혹과 반란의 시대라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초(楚)를 물리쳐 주황실을 받드는 승책(勝策)을 가지고 있었도다.
제환공의 공업이 강성하지 않았다면,
누가 삽혈하지 않고도 제후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었을까?
盟事已畢,桓公忽謂宰孔曰:「寡人聞三代有封禪之事,其典何如?可得聞乎?」 宰孔曰:「古者封泰山,禪梁父。封泰山者,築土爲壇,金泥玉簡以祭天,報天之功。天處高,故崇其土以象高也。禪梁父者,掃地而祭,以象地之卑。以蒲爲車,葅稭爲藉,祭而掩之,所以報地。三代受命而興,獲祐於天地,故隆此美報也。」 桓公曰:「夏都於安邑,商都於毫,周都於豐鎬。泰山梁父,去都城甚遠,猶且封之禪之。今二山在寡人之封內,寡人欲徼寵天王,擧此曠典,諸君以爲何如?」 宰孔視桓公足高氣揚,似有矜高之色,乃應曰:「君以爲可,誰敢曰不可!」 桓公曰:「俟明日更與諸君議之。」 諸侯皆散。
封禪 :
봉(封)은 하늘 제사로 태산에서 지내는 제(祭)이다. 봉은 산에 흙을 쌓아 단을 세우고 금니(金泥)와 옥간(玉簡)을 차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하늘의 공(功)에 감사하는 의식이다. 선(禪)은 땅 제사로 태산 줄기 중에서 제일 작은 양보산(梁父山)에 제 지내는 것을 말한다. 선은 땅바닥을 쓸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부들이란 풀로 수레를 만들고, 띠풀과 볏짚으로 자리를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 그걸 땅에 묻는다. 땅에 감사하고 보답하는 의식이다. <다음백과>
봉선의식의 내용은 은밀하게 관리되어 세상사람들은 기록할 수 없었다고 史記(卷28)에 기록되어 있다. [封藏皆袐之, 世不得而記也.]
金泥 : 옛날에 회화나 글씨 특히 사경에 주로 사용되던 재료이다. 그림이나 글씨는 흰 종이에 검은 먹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인데 귀중한 것, 혹은 특별한 멋을 나타낼 때 금니를 사용했다.
☞ 金泥玉簡
다음백과에서는 金泥를 따로 玉簡과 같이 취급했고 부연된 설명이 없다. 金泥를 따로 찾아보니 금가루로 쓴 글씨를 의미한 뜻이 있었다. 죽간(竹簡) 형태의 玉簡에 금가루를 개어 글씨를 쓴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보고 그렇게 해석한다.
葅稭 : 볏짚. 葅 : 菹. 김치 자/늪 자. 김치. 젓갈, 육장. 절이다. 마른 풀. 늪. 稭 : 짚고갱이 개(갈), 짚고갱이(짚에서 이삭이 달린 줄기)
徼 : 구할 요(교). 구하다. 훔치다. 빼앗음. 순찰하다. 순라꾼. 변방의 경계. 막다. 차단함. 샛길, 교외의 길. 미묘, 심원한 경지.
회맹의 일을 마치고나서 제환공이 갑자기 태재 공(孔)에게 물었다.
"과인이 듣기로 하은주(夏殷周) 3대에 걸쳐 봉선의식을 치뤘다는데 그 절차가 어떻습니까?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태재가 대답했다.
"옛날 봉(封)이라 하는 것은 태산에서 행해진 것이고 선(禪)은 양보산(梁父山)에서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태산에서 봉을 행한 것은 흙을 쌓아 단(壇)을 만들고 옥간(玉簡)에 금으로 글씨를 써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하늘의 은덕에 보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은 높은 곳에 있으므로 흙을 높이 쌓아 높은 것을 상징했습니다. 양보산에서 선을 행한 것은 땅을 청소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땅이 낮은 곳에 있는 것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부들로 수레를 만들고 볏짚으로 방석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는 그것들을 모두 땅에 묻어 땅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삼대가 천명을 받고 일어나 천지신명의 도움을 얻어 융성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아름다운 보은의식이 오래 행해진 것입니다."
환공이 말했다. "하나라가 안읍(安邑)을 도읍으로 하고, 상나라가 박(亳)을 도읍으로 했으며 주나라는 풍호(豊鎬)를 도읍으로 하였습니다. 태산과 양보산은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오히려 봉선의식을 행했습니다. 지금 두 산은 모두 과인의 봉지(封地) 안에 있으니 과인이 천자에게 청하여 이 의식을 행하고 싶은데 제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태재가 환공을 바라보니 의기양양하고 자랑스러운 기색이 역력하여 어짤 수 없이 대답했다.
"군주께서는 가능할 것입니다. 누가 감히 불가하다고 하겠습니까!"
환공이 말했다.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제후들과 논의합시다."
마침내 제후들이 모두 해산했다.
宰孔私詣管仲曰:「夫封禪之事,非諸侯所宜言也。仲父不能發一言諫止乎?」 管仲曰:「吾君好勝,可以隱奪,難以正格也。夷吾今且言之矣。」 乃夜造桓公之前,問曰:「君欲封禪,信乎?」 桓公曰:「何爲不信?」 管仲曰:「古者封禪,自無懷氏至於周成王,可考者七十二家,皆以受命,然後得封。」 桓公艴然曰:「寡人南伐楚,至於召陵;北伐山戎,刜令支,斬孤竹;西涉流沙,至於太行;諸侯莫余違也。寡人兵車之會三,衣裳之會六,九合諸侯,一匡天下,雖三代受命,何以過於此?封泰山,禪梁父,以示子孫,不亦可乎?」 管仲曰:「古之受命者,先有禎祥示徵,然後備物而封,其典甚隆備也。鄗上之嘉黍,北里之嘉禾,所以爲盛。江淮之間,一茅三脊,謂之『靈茅』,王者受命則生焉,所以二藉。東海致比目之魚,西海致比翼之鳥,祥瑞之物,有不召而致者,十有五焉。以書史冊,爲子孫榮。今鳳凰麒麟不來,而鴟鴞數至;嘉禾不生,而蓬蒿繁植;如此而欲行封禪,恐列國有識者必歸笑於君矣!」 桓公嘿然。明日,遂不言封禪之事。
艴 : 발끈할 불. 발끈하다. 성난 얼굴. 색칠하다. 새벽. 刜 : 칠 불. 치다. 공격함. 가르다. 쪼갬. 끊다. 단절함.
兵車之會 : 전쟁할 때에 쓰는 수레를 거느리고 무력으로 제후를 회합시키는 일. 또는 그런 회합. 衣裳之會 : 평화로운 회합(會合).
禎 : 상서 정. 상서. 복. 바르다. 곧음. 선하다. 좋음. 鄗 : 땅이름 호/산이름 교. 땅이름. 춘추시대 제나라의 땅. 鎬京. 산이름.
嘉黍(禾) : 한 줄기에 여러개의 이삭이 달린 기장(벼).
比目魚 : 눈이 나란히 붙어있는 물고기로 부부간의 사랑을 비유하는 전설상의 물고기. 넙치를 말하기도 하나 이와는 다른 개념이다.
比翼鳥 : 암수가 날개와 눈이 각각 하나씩만 있어서 암수가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날 수 있다는 전설상의 새.
태재 공은 은밀히 관중에게 가서 말했다.
"무릇 봉선의 일은 제후들이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중부께서는 능히 한마디 하시어 중지하도록 간할 수 없었습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우리 군주께서는 호승심이 강하시어 은밀히 간해야 중단시킬 수 있으며 정식으로 그만두게 하려면 어렵습니다. 제가 오늘밤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침내 밤이 되자 관중은 환공에게 가서 물었다. "주군께서 봉선의식을 행하시려는 것이 진정이십니까?"
환공이 물었다. "어찌 불신하십니까?"
관중이 대답헸다. "옛날 봉선의식은 무회씨(無懷氏)로부터 주성왕(周成王)에 이르기까지 상고할 수 있는 자가 72명인데 모두 천명을 받은 이후 봉선의식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환공이 발끈해서 물었다.
"과인은 남으로는 초를 정벌하여 소릉에 이르렀고, 북으로는 융(戎)을 정벌하고 영지를 쳤으며 고죽국의 군주를 참하였고, 서쪽으로는 유사(流沙)를 건너 태항(太行)에 이르렀는데 제후들이 나를 거스르지 못했습니다. 과인은 무력을 통한 회합을 세 번, 평화로운 회합을 여섯 번, 도합 아홉차례에 걸쳐 제후들과 회합을 가져 천하를 바로잡았는데, 3대가 천명을 받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히겠습니까? 태산에서 봉의식을 행하고 양보산에서 선의식을 행하여 자손들에게 보여준다면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옛날 천명을 받은 자는 먼저 상서로운 징후를 보여주었고 그 후에 제물을 갖추어 봉선의식을 행하였는데 그 의식을 매우 성대하게 준비했었습니다. 호상(鄗上)에서는 한줄기에 여러 이삭이 달린 기장이 나타났고, 북리(北里)에서는 한 줄기에 여러 이삭이 달린 벼가 나타나 나라가 번성하였습니다. 강수(江水)와 회수(淮水)의 사이에서는 하나의 띠(茅)에 등줄기가 셋인 것이 나타나 영모(靈茅)라 불리웠는데 왕이 천명을 받아야 나타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해에서는 비목어가 나타났고 서해에서는 비익조가 나타났는데 모두 상서로운 것들로 부르지도 않았는데도 나타난 것이 15번이나 되었습니다. 모두 사서에 기록되어 자손들에게 영예가 되었습니다. 지금 기린과 봉황이 나타나지도 않고 올빼미만 여러차례 나타났으며, 한 줄기에 여러 이삭이 달린 벼가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잡초만 번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데도 봉선의식을 행하려고 하신다면 열국의 식자(識者)들은 반드시 주군께 비웃음을 보내게 될 것이라 두렵습니다!"
환공은 말이 없었다. 다음날 환공은 봉선의식에 관한 일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桓公旣歸,自謂功高無比,益治宮室,務爲壯麗。凡乘輿服御之制,比於王者,國人頗議其僭。管仲乃於府中築臺三層,號爲「三歸之臺」。言民人歸,諸侯歸,四夷歸也。又樹塞門,以蔽內外。設反坫,以待列國之使臣。鮑叔牙疑其事,問曰:「君奢亦奢,君僭亦僭,毋乃不可乎?」 管仲曰:「夫人主不惜勤勞,以成功業,亦圖一日之快意爲樂耳。若以禮繩之,彼將苦而生怠。吾之所以爲此,亦聊爲吾君分謗也。」 鮑叔口雖唯唯,心中不以爲然。
塞門 : 논어 八佾 第22章에 塞門과 反坫에 대한 설명이 있다. 屛謂之樹塞, 猶蔽也. 設屛於門, 以蔽內外也.
反坫 : 在兩楹之間, 獻酬飮畢則反爵於其上, 此皆諸侯之禮, 而管仲僭之, 不知禮.
제환공은 귀국하자 스스로 자신의 공이 비할데가 없을만큼 크다고 여기고 궁실을 더욱 확장하여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그리고 모든 수레와 마부의 복식도 왕과 같게 하여 나라 사람들이 그가 참람하다고 의론이 분분했다. 관중마저도 부중에 3층으로 누대를 쌓고 이름을 '삼귀대(三歸臺)'라고 하였다. 즉, 백성들이 따르고 제후들이 따르고, 사이(四夷)가 따른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 색문을 세워 안과 밖을 가리고 반점을 설치하여 열국의 사신들을 접대하였다.
포숙아가 그 일에 의문을 품고 관중에게 물었다.
"주군이 사치하니 자네도 사치하고, 주군이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한다해서 자네도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하는데, 하지말도록 간하지도 않고 자네도 그래서는 안되는 것 아닌가?"
관중이 대답했다. "주군이 힘을 아끼지 않고 노력하여 공업을 이루셨는데 하루라도 기쁜 마음으로 즐기도록 해드렸을 뿐이네. 만약 예로써 제약을 가한다면 힘들어 하시고 태만해지실 것이네. 또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애오라지 우리 주군에 대한 비방을 나누어 받으려는 것일 뿐이네."
포숙아는 입으로는 수긍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話分兩頭。卻說周太宰孔自葵邱辭歸,於中途遇見晉獻公亦來赴會。宰孔曰:「會已撤矣。」 獻公頓足恨曰:「敝邑遼遠,不及觀衣裳之盛,何無緣也?」 宰孔曰:「君不必恨。今者齊侯自恃功高,有驕人之意。夫月滿則虧,水滿則溢,齊之虧且溢,可立而待,不會亦何傷乎?」 獻公乃回轅西向。於路得疾,回至晉國而薨,晉乃大亂。
한편 주나라 태재 공(孔)이 규구에서 제후들과 작별하고 돌아가는 도중에 우연히 당진(唐晉)의 헌공(獻公)을 만났는데 헌공도 제후들의 회맹에 참가하려고 가던 중이었다.
태재 공이 말했다. "회맹은 이미 끝났습니다."
헌공이 발을 구르며 한탄했다. "우리 나라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평화로운 성대한 모임을 참관하지 못했는데 어찌 이렇게 인연이 없는가?"
태재가 말했다. "군주께서는 한탄할 것 없습니다. 지금 제환공은 스스로 공이 높다고 믿고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무릇 달이 차면 기울고 물이 가득 차면 넘치는 법, 제나라는 이지러지고 넘치게 될 것이니 귀국하시어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것인데 회맹에 참석하지 못하셨다 해서 어찌 상심 하십니까?"
헌공은 바로 수레를 돌려 서쪽으로 향했다. 도중에 병이 들어 당진에 도착하자 죽었는데 이로써 당진은 크게 어지러워졌다.
欲知晉亂始末,且看下回分解。
당진이 어지러워진 상황의 시작과 끝을 알려면 다음 회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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