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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列國志

第二三回 衛懿公好鶴亡國, 齊桓公興兵伐楚。

by 柳川 2021. 3. 22.

話說衛惠公之子懿公,自周惠王九年嗣立,在位九年。般樂怠傲,不恤國政,最好的是羽族中一物,其名曰鶴。按浮邱伯《相鶴經》云:

    

鶴,陽鳥也,而遊於陰。因金氣,乘火精以自養。金數九,火數七,故鶴七年一小變,十六年一大變,百六十年變止,千六百年形定。體尚潔,故其色白。聲聞天,故其頭赤。食於水,故其喙長。棲於陸,故其足高。翔於雲,故毛豐而肉疏。大喉以吐,脩頸以納新,故壽不可量。行必依洲渚,止不集林木。蓋羽族之宗長,仙家之騏驥也。鶴之上相:隆鼻短口則少眠,高腳疏節則多力,露眼赤睛則視遠,鳳翼雀毛則喜飛,龜背鱉腹則能產,輕前重後則善舞,洪髀纖趾則能行。

 

那鶴色潔形淸,能鳴善舞,所以懿公好之。俗諺云:「上人不好,下人不要。」 因懿公偏好那鶴,凡獻鶴者皆有重賞。弋人百方羅致,都來進獻。自苑囿宮廷,處處養鶴,何止數百? 有齊高帝詠鶴詩爲證:

    

八風舞遙翮,

九野弄淸音;

一摧雲間志,

爲君苑中禽。

 

懿公所畜之鶴,皆有品位俸祿:上者食大夫俸,次者食士俸。懿公若出遊,其鶴亦分班從幸,命以大軒,載於車前,號曰「鶴將軍」。養鶴之人,亦有常俸。厚歛於民,以充鶴糧。民有飢凍,全不撫恤。

 

浮邱佰 

전한 초기 제(齊) 사람. 성은 부구(浮丘)고, 이름은 백(伯)이며, 포구자(包丘子)라고도 한다. 산동(山東) 치박(緇博) 사람이다. 진(秦)나라 말기의 유생(儒生)으로, 형 순황(荀况)에게 배워 『시경』과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밝았다. 진나라 때 『시경』과 『춘추곡량전』을 가르쳤고, 전한 초기 여후(呂后) 집권 시기에 장안(長安)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이름난 제자로 노목생(魯穆生)과, 백생(白生), 신배공(申培公), 초원왕(楚元王) 유교(劉交) 등이 있다. 신배공은 한문제(漢文帝) 때 박사가 되어 금문경학인 『노시(魯詩)』를 개창했다. 초원왕이 아들 유영(劉郢)을 보내 배우게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相鶴經 : 옛날 신선 부구공(浮丘公)이 왕자 진(王子晉)과 학을 타고 놀면서 그에게 가르쳤다는 책. <唐書 藝文志>

羅致 : 모으다. 물색하다. 

高帝 : 중국 남북조 시대 남제(南齊)의 초대 황제 소도성(蕭道成 427 ~ 482).

유송(劉宋)의 창건자 유유(劉裕)의 부하가 되어 세운 군공으로 세력을 키웠다. 난릉(蘭陵) 출신의 하급병사 신분으로 서서히 출세하여 유송의 왕족 유휴범(劉休範)의 반란을 진압하여 권력을 장악한 후 479년 순제(順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나라를 건국했다. 즉위한지 3년 만에 죽었다.

九野 : 고대 중국에서, 하늘을 아홉 방위로 나누어 이르던 말. 온 천하. 

 

 

 

 

위(衛)나라 혜공(惠公)의 아들 의공(懿公)은 주혜왕(周惠王) 9년에 대를 이어 즉위한 이후 재위기간이 9년이었다.  놀기를 좋아하고 게으르고 거만하였으며 국정을 돌보지 않으면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날개달린 종족중의 하나였으니 그것은 이름하여 학(鶴)이었다. 

부구백(浮邱佰)은 상학경(相鶴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鶴)은 양조(陽鳥)이지만 음지(陰地)에서 논다.  쇠(金)의 기운으로 불의 정기(精氣)를 타고 스스로 양생한다. 금(金)의 수(數)는 아홉이고 화(火)의 수는 일곱이니, 그러므로 학은 7년에 한 번 조금 변화하며 16년에 한 번 크게 변화하고, 160년이 되면 변화를 멈추고, 1600년이 되어야 모습이 정해진다. 몸은 항상 정결하게 유지하여 그 색이 희고 소리는 하늘에 닿아 머리는 붉은 색이다. 물을 마시므로 그 부리는 길고 육지에서 살기 때문에 다리가 길며, 구름 속을 날기 때문에 털이 많지만 살이 적다. 목구멍이 커서 뱉어낼 수 있으며 목이 길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수명은 헤아리기 힘들다.  날아갈 때에는 반드시 물가를 따라가며 멈출 때에는 숲이나 나무에 모이지 않는다. 날개달린 종족의 우두머리라 선가(仙家)의 천리마와 같다. 학의 좋은 상(相)은 코가 높고 부리가 짧아야 잠을 적게 자고, 다리가 높고 마디가 길어야 힘이 좋으며, 눈이 튀어나오고 눈동자가 붉어아 멀리 보고, 봉의 날개와 참새의 털 같아야 날기를 좋아하며, 거북의 등같고 자라의 배처럼 생겨야 새끼를 낳을 수 있고, 앞이 가볍고 뒤가 무거워야 춤을 잘 추며, 넓은 넙적다리와 가는 발가락이라야 걸어다닐 수 있다. 

 

그 학의 색깔이 정결하고 모습이 깨끗하며, 울기도 잘 하고 춤을 잘 추니 그 때문에 의공이 학을 좋아했다. 

속담에, "윗 사람이 좋아하지 않으면 아랫 사람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다. 의공이 학을 지나치게 좋아하니 모두 학을 갖다 바쳤고 후한 상을 받았다.  새사냥꾼들이 백방으로 학을 물색하여 학을 잡아다 바쳤다. 원유(苑囿)에서 궁의 뜰에 이르기까지 곳곳마다 학을 기르니 어찌 수백 마리에 그치겠는가?

남제(南齊) 고제(高帝) 소도성(蕭道成)이 학을 읊은 시가 이를 입증한다. 

 

팔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훨훨 춤을 추니

구천(九天)에서 맑은 소리를 연주한다. 

한번 구름사이를 넘나들던 뜻이 꺾이더니,

군주의 동산에서 사는 날짐승이 되었네.

 

의공은 기르는 학에 모두 품계를 두고 봉록을 지급하였다.  가장 촣은 등급에는 대부의 봉록의 먹이를 주고, 그 다음은 사(士)의 봉록에 해당하는 먹이를 주었다. 의공이 놀러 나가면 학들도 무리를 나누어 따르게 했는데 명을 내려 큰 수레의 앞에 태우고 '학장군(鶴將軍)이라 불렀다.학을 기르는 사람에게도 봉록을 내렸다. 백성들에게는  무겁게 세금을 걷어들여 학의 먹이에 충당했다. 

백성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었어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大夫石祁子,乃石碏之後,石駘仲之子,爲人忠直有名,與寧莊子名速,同秉國政,皆賢臣也。二人進諫屢次,俱不聽。公子燬乃惠公庶兄,公子碩烝於宣姜而生者,即文公也。燬知衛必亡,託故如齊。齊桓公妻以宗女,竟留齊國。衛人向來心憐故太子急子之冤,自惠公復位之後,百姓日夜咒詛:「若天道有知,必不終於祿位也!」 因急子與壽,俱未有子,公子碩早死,黔牟已絶,惟燬有賢德,人心陰歸附之。及懿公失政,公子燬出奔,衛人無不含怨。

 

祁 : 성할 기. 성하다. 큼. 많다. 조용히, 천천히. 오가는 모양. 이. 땅이름.         碏 : 삼갈 작/훼방할 석. 

駘 : 둔마 태. 둔마(鈍馬). 둔하다. 어리석음. 벗다. 말이 재갈을 벗음. 밟다. 넓다. 들피지다. 여위고 지침. 한가로운 모양. 땅이름.

向來 :  본래부터, 종래, 여태까지, 줄곧.      詛 : 저주할 저. 저주하다. 맹세하다. 욕하다. 원망함. 

 

 

 

대부 석기자(石祁子)는 바로 석작(石碏)의 후손인데 석태중(石駘仲)의 아들로 사람됨이 충직하여 이름이 알려졌는데 영장(寧莊)의 아들인 영속(寧速)과 함께 국정을 맡았는데 모두 어진 신하였다.  두 사람이 나아가 여러차례 간하였으나 의공은 모두 듣지 않았다.

공자 훼(燬)는 혜공(惠公)의 서형(庶兄)인데, 공자 석(碩)이 선강(宣姜)을 증(烝)하여 태어난 자로 바로 문공이다.  훼는 위나라가 반드시 망하리라는 것을 알고 일부러 제나라에 가서 몸을 의탁했다. 제환공은 종실(子糾)의 딸을 시집보내 마침내 제나라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위나라 사람들은 본래 태자 급자(急子)가 혜공(惠公 : 朔)에게 살해당한 일을 동정하여 원통하게 여겼기 때문에 혜공이 복위한 이후 백성들이 밤낮으로 저주하였다. 

"천도가 있다면 반드시 복록과 지위가 후손에게 미치지 못하리라!"

급자와 공자 수(壽 : 朔의 兄)가 모두 자식이 없고 공자 석이 일찍 죽었으며, 검모도 이미 세상을 떠나 오직 훼(燬)만 남았는데 어질고 덕이 있어 인심이 소리없이 그에게 돌아갔다.  의공이 실정을 하고 공자 훼가 국외로 망명하자 위나라 사람으로 원한을 품지 않은 자가 없었다.   

 

 

  

卻說北狄自周太王之時,獯鬻已强盛,逼太王遷都於岐。及武王一統,周公南懲荊舒,北膺戎狄,中國久安。迨平王東遷之後,南蠻北狄,交肆其橫。

單說北狄主名曰瞍瞞,控弦數萬,常有迭蕩中原之意。及聞齊伐山戎,瞍瞞怒曰:「齊兵遠伐,必有輕我之心,當先發制之。」 乃驅胡騎二萬伐邢,殘破其國。聞齊謀救邢,遂移兵向衛。時衛懿公正欲載鶴出遊,諜報:「狄人入寇。」 懿公大驚,即時歛兵授甲,爲戰守計。百姓皆逃避村野,不肯即戎。懿公使司徒拘執之。須臾,擒百餘人來,問其逃避之故。眾人曰:「君用一物,足以禦狄,安用我等?」 懿公問:「何物?」 眾人曰:「鶴。」 懿公曰:「鶴何能禦狄耶?」 眾人曰:「鶴旣不能戰,是無用之物,君敝有用以養無用,百姓所以不服也!」 懿公曰:「寡人知罪矣!願散鶴以從民可乎?」 石祁子曰:「君亟行之,猶恐其晚也。」 懿公果使人縱鶴,鶴素受豢養,盤旋故處,終不肯去。石寧二大夫,親往街市,述衛侯悔過之意,百姓始稍稍復集。狄兵已殺至滎澤,頃刻三報。石祁子奏曰:「狄兵驍勇,不可輕敵,臣請求救於齊。」 懿公曰:「齊昔日奉命來伐,雖然退兵,我國並未修聘謝,安肯相救?不如一戰,以決存亡!」 寧速曰:「臣請率師禦狄,君居守。」 懿公曰:「孤不親行,恐人不用心。」 乃與石祁子玉玦,使代理國政,曰:「卿決斷如此玦矣!」 與寧速矢,使專力守禦。又曰:「國中之事,全委二卿。寡人不勝狄,不能歸也!」 石寧二大夫皆垂淚。懿公吩咐已畢,乃大集車徒。使大夫渠孔爲將,于伯副之,黃夷爲先鋒,孔嬰齊爲後隊。一路軍人口出怨言,懿公夜往察之。

軍中歌曰:

鶴食祿,民力耕;

鶴乘軒,民操兵。

狄鋒厲兮, 不可攖,

欲戰兮, 九死而一生!

鶴今何在兮?

而我瞿瞿爲此行!

 

獯鬻 : 훈육. 夏代 북방의 종족 이름, 北狄. 秦漢시대의 匈奴.       瞍 : 소경 수. 소경. 여위다. 총명하다. 늙은이.

控弦 : 궁수. 활을 쏘는 병사.    迭 : 갈마들 질. 갈마들다. 범하다. 침범함. 지나치다. 도를 넘음. 달아나다.    豢 ; 기를 환. 기르다. 가축.

滎 : 실개천 형, 실개천. 못 이름. 물결이 일다.    玉玦 : 허리에 차는 . 고리 모양에 한쪽이 트였으므로 決斷, 絶緣등의 뜻이 있음.

玦 : 패옥 결. 패옥(佩玉). 허리에 차는 고리 모양에 한쪽이 트였으므로 결단(決斷), 절연(絶緣등의 뜻이 있음.  활깍지. 활을   

     오른손 엄지에 끼는 .     

攖 : 다가설 영.  다가서다. 접근함. 잇다. 묶다. 어긋나다. 어지럽히다. 

 

 

 

한편 북적(北狄)은 주나라 태왕(太王 : 周文王의 조부 高公亶父) 때부터 훈육(獯鬻)이 이미 강성하여 핍박을 받던 태왕이 도읍을 기(岐)로 옮겼었다.  무왕이 천하를 일통하자 주공이 남으로 형(荊 : 楚)과 서(舒)나라를 치고, 북으로 융(戎), 적(狄)나라를 정벌하여 중국이 오랫동안 평안했었다.  평왕(平王)이 낙양으로 동천(東遷)한 후 남만(南蠻)과 북적(北狄)이 함부로 날뛰기에 이르렀다.

북적의 우두머리는 이름을 수만(瞍瞞)이라 하는데 궁수(弓手) 수만 명을 양성하여 중원을 휩쓸 뜻을 품었다. 

제나라가 산융을 쳤다는 소식을 듣고 수만이 노하여 말했다.

"제나라 군대가 먼 길을 가서 치는 것은 반드시 우리를 가볍게 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군사를 내어 그들을 제압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리하여 기병 2만을 몰아 형(邢)나라를 쳐서 쑥대밭을 만들어버렸다.  제나라에서 형나라를 구원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위(衛)나라로 향해 이동했다.

그때 위나라 의공은 수레에 학을 싣고 놀러 나가려고 했었는데 첩보가 날아들었다. "적인(狄人)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의공이 크게 놀라 즉시 병사들을 소집하고 무장시켜 싸워 나라를 지킬 계책을 마련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모두 시골로 도피하고 전장에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의공이 사도를 시켜 잡아 가두게 하였더니 순식간에 100여명을 사로잡아와 그들에게 도망친 까닭을 물었다.

백성들이 대답했다. "주군께서는 한가지 것을 쓰시면 족히 적인들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데 어찌 우리들을 쓰려고 하십니까?"

의공이 물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백성들이 대답했다. "학입니다."

의공이 물었다. "학이 어떻게 적인들을 막는단 말인가?"

백성들이 대답했다. "학이 싸울 수 없다면 그것은 쓸데멊는 것인데 군주께서는 쓸 수 있는 것을 버리고 쓸모 없는 것을 기르셨기 때문에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의공이 말했다. "과인의 잘못임을 알겠노라. 학을 해산하고 백성들의 뜻을 따르면 되겠는가?"

석기자가 말했다. "주군께서는 빨리 실행하십시오. 늦을까 염려됩니다."

의종이 마침내 사람들을 시켜 학을 날려보내게 하였으나 학들이 본래 먹이로 길러진 까닭에 살던 곳을 맴돌뿐 끝내 날아가지 않았다. 

석기자와 영속 두 대부는 직접 거리로 나가  의공이 잘못을 뉘우친 뜻을 말하니 백성들이 비로소 점차 모이기 시작했다. 

적나라 군대가 이미 형택(滎澤)에 몰려왔다는 급보가 순식간에 세 차례나 있었다. 

석기자가 아뢰었다. "적의 군대가 용맹스러워 경솔히 대적할 수 없으니 신이 제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겠습니다."

의공이 말했다. "제나라에서는 지난 날 왕실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다가 부군(父君 : 惠公 朔)의 상중(喪中)임을 알고 물러갔는데도 우리나라는 사신을 보내 수교도 하지 않고 사례도 하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구원을 청하겠습니까?  한번 싸워 존폐를 결정짓느니만 못합니다."

영속이 말했다. "신이 군사들을 이끌고 적인들을 막아보겠습니다. 주군께서는 성을 지키십시오."

의공이 말했다. "과인이 친히 출전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이오." 

마침내 석기자에게 옥결(玉玦)을 풀어주며 국정을 대리하게 하며 말했다. 

"경은 이 옥결로 정사를 처리하시오."

그리고 영속에게 화살을 주며 전력을 다해 적인들을 막아주도록 했다. 

또 말했다. "나라 안의 일은 두 분 경에게 모두 맡깁니다. 과인은 적인들을 막지 못하면 돌아올 수 없을 것이오."

석기자와 영속 두 대부는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명을 받았다.

의공은 분부하기를 마치자 병거(兵車)와 병사들을 모두 모은 후 대부 거공(渠孔)을 장수로 삼고 우백(于伯)을 부장, 황이(黃夷)를 선봉, 공영제(孔嬰齊)에게 후대를 맡게 했다. 

행군중 병사들의 입에서 원망의 말이 쏟아져 나왔는데, 의공이 밤에 순찰을 돌았다. 

 

군중에서 노래소리가 들렸다.

학은 녹을 받아먹는데 백성들은 힘들게 농사를 짓는다,

학은 수레를 타는데 백성들은 무기를 든다.

적인들이 날카롭고 사나워 다가갈 수 없네.

싸우고자 하면 거의 죽는다네.

학은 지금 어디 있는가?

우리만 두려움에 떨며 이렇게 출전하는구나.

 

 

 

 

懿公聞歌,悶悶不已。大夫渠孔用法太嚴,人心益離。行近滎澤,見敵軍千餘,左右分馳,全無行次。渠孔曰:「人言狄勇,虛名耳!」 即命鼓行而進。狄人詐敗,引入伏中,一時呼哨而起,如天崩地塌,將衛兵截做三處,你我不能相顧。衛兵原無心交戰,見敵勢兇猛,盡棄車仗而逃。懿公被狄兵圍之數重。渠孔曰:「事急矣!請偃大旆,君微服下車,尙可脫也。」 懿公嘆曰:「二三子苟能相救,以旆為識。不然,去旆無益也。孤寧一死,以謝百姓耳!」 須臾,衛兵前後隊俱敗,黃夷戰死,孔嬰齊自刎而亡。狄軍圍益厚。于伯中箭墜車,懿公與渠孔先後被害,被狄人砍為肉泥,全軍俱沒。

 

髯翁有詩云:

曾聞古訓戒禽荒,

一鶴誰知便喪邦。

滎澤當時遍燐火,

可能騎鶴返仙鄕?

 

塌 : 떨어질 탑. 떨어지다. 떨어뜨림. 땅이 낮다. 애벌갈이.           大旆旗 : 대장기. 군주나 제후가 쓰는 기. 

 

 

 

의공이 그 노래소리를 듣고 불편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대부 거공이 군법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여 인심이 갈수록 이반되었다. 행군이 형택 가까이에 이르자 적군 천여 명이 나타났다가 좌우로 나누어 달려 도망하는데 전혀 질서가 없었다.    

거공이 말했다. "적인들이 용맹하다고들 하던데 허명뿐이로다."

즉시 명을내려 북을 치며 나아가게 했다.  적인들이 거짓으로 패퇴하여 병사들이 잠복한 곳까지 유인하자 동시에 함성을 지르며 일어서는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아 위나라 병사들이 삼등분 되어 서로 돌아볼 수도 없었다.  위나라 병사들은 원래 싸울 뜻이 없었는데 적군의 기세가 흉맹한 것을 보자 모두 병거와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의공은 적의 병사들에 의하여 겹겹으로 포위되었다.  

거공이 말했다. "사태가 급합니다. 대패기를 접고 주군께서는 미복으로 갈아입고 수레를 버리시고 속히 탈출하셔야 합니다."

의공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대들이 나를 구할 수 있다 해도 대패기로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대패기를 버린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내가 차라리 한 번 죽어 백성들에게 사죄하는 것 뿐이다."

잠깐사이에 위나라 병사들은 앞 뒤 대오가 모두 쓰러졌고 황이는 싸우다 죽었으며 공영제는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적군(狄軍)의 포위망은 더욱 두터워졌다.  우백은 화살을 맞아 병거에서 떨어졌고 의공과 거공은 앞뒤로 공격을 받아 적인들의 칼에 난자당했으며 전군이 모두 몰살당했다.

 

염옹이 시를 지었다. 

옛 교훈에 금수(禽獸)때문에 나라기 망한다고 경계했었는데,

한낱 학때문에 나라가 망할줄 누가 알았으랴.

당시 형택에 위나라 군사들의 인화(燐火 : 鬼火)가 널렸을텐데,

모두 학에 올라 선경(仙境)에 들었는가?

 

 

 

 

狄人囚衛太史華龍滑禮孔,欲殺之。華禮二人知胡俗信鬼,給之曰:「我太史也,實掌國之祭祀,我先往爲汝白神。不然,鬼神不汝佑,國不可得也。」 瞍瞞信其言,遂縱之登車。寧速方戎服巡城,望見單車馳到,認是二太史,大驚,問:「主公何在?」 曰:「已全軍覆沒矣!狄師強盛,不可坐待滅亡,宜且避其鋒。」 寧速欲開門納之,禮孔曰:「與君俱出,不與君俱入,人臣之義謂何?吾將事吾君於地下!」 遂拔劍自刎。華龍滑曰:「不可失史氏之籍。」 乃入城。寧速與石祁子商議,引著衛侯宮眷及公子申,乘夜乘小車出城東走。華龍滑抱典籍從之。國人聞二大夫已行,各各攜男抱女,隨後逃命,哭聲震天。狄兵乘勝長驅,直入衛城。百姓奔走落後者,盡被殺戮。又分兵追逐。石祁子保宮眷先行,寧速斷後,且戰且走。從行之民,半罹狄刃。將及黃河,喜得宋桓公遣兵來迎,備下船隻,星夜渡河。狄兵方纔退去,將衛國府庫,及民間存留金粟之類,劫掠一空,墮其城郭,滿載而歸。不在話下。

 

 

 

 

적인들이 위나라 태사(太史) 화룡활(華龍滑)과 예공(禮孔)을 사로잡아 가두었다가 죽이려고 하였다. 화룡활과 예공 두 사람은 호(胡)의 풍속에 귀신을 믿는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태사이며 실제로 나라의 제사를 관장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먼저 위나라에 돌아가 그대들의 승전을 신에게 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들이 그대들을 돕지 않아 위나라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수만이 그들의 말을 믿고 마침네 그들을 풀어주고 수레에 오르게 하였다. 영속이 갑옷을 입고 성을 순시하다가 수레 한 대가 달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들은 두 사람의 태사라 깜짝 놀라 물었다.

"주공은 어디 계십니까?"

"이미 전군이 무너졌습니다. 적(狄)의 군세가 강성하니 앉아서 멸망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되고 잠시 그 예봉을 피해야 합니다."

영속이 문을 열어 그들을 맞아 들이려고 하는데 예공이 말했다.

"주군과 함께 출전하였다가 주공과 함께 돌아와 입성하지 못한다면 신하의 도리가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지하에서 주군을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 

화룡활이 말했다. "태사의 직분을 버릴 수 없도다!" 마침내 입성하였다. 영속과 석기자 두 사람은 상의 끝에 위후(衛侯) 의공의 가족들과 공자 신(申)을 인솔하고 어둠을 틈타 작은 수레에 태우고 성문을 열고 동쪽으로 도주했다.  화룡활은 전적(典籍)을 안고 그들을 따라갔다.

국인들은 두 사람의 대부가 이미 망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각각 사내아이는 손잡고, 계집아이는 부등켜 안고 그들의 뒤를 좇아 목숨을 구하고자 도망쳤는데 백성들의 곡성이 하늘에 진동했다. 

적인들은 승세를 타고 멀리까지 뒤쫒아 바로 위나라 도성으로 들어갔다.  백성들 중 뒤처진 자들은 모두 살육당했다. 

또 군사를 나누어 도망친 자들을 뒤쫒게 하였다. 석기자는 위후의 권속들을 보호하며 앞서가고 영속이 뒤를 끊으며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도주했다. 그들을 따라가던 백성들은 절반이 적인의 칼에 화를 입었다. 

황하에 이르자 다행스럽게도 송나라 환공(桓公)이 맞아오도록 보낸 군사들을 만나 준비된 배를 타고 밤새도록 황하를 건넜다.  

적의 군사들은 물러나자마자 위나라 부고와 민간의 저택에 남겨진 금붙이와 양식등속을 약탈하여 텅텅비게 만들고 성곽을 허물어버린 후에 수레에 가득 싣고 돌아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卻說衛大夫弘演,先奉使聘陳,比及反役,衛已破滅。聞衛侯死於滎澤,往覓其屍。一路看見骸骨暴露,血肉狼藉,不勝傷感。行至一處,見大旆倒於荒澤之旁,弘演曰:「旆在此,屍當不遠矣。」 未數步,聞呻吟之聲,前往察之,見一小內侍折臂而臥。弘演問曰:「汝認得主公死處否?」 內侍指一堆血肉曰:「此即主公之屍也。吾親見主公被殺。爲臂傷疼痛,不能行走,故臥守於此,欲俟國人來而示之。」 弘演視其屍體,俱已零落不全,惟一肝完好。弘演對之再拜,大哭,乃復命於肝前,如生時之禮。事畢,弘演曰:「主公無人收葬,吾將以身為棺耳!」 囑從人曰:「我死後,埋我於林下。俟有新君,方可告之。」 遂拔佩刀自剖其腹,手取懿公之肝,納於腹中,須臾而絕。從者如言埋掩,因以車載小內侍渡河,察聽新君消息。

 

 

 

 

한편 위나라 대부 홍연(弘演)은 진(陳)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위나라가 이미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듣기로 위후(衛侯)가 죽었다고 하여 가서 시신을 찾고자 했다. 가다 보니 해골이 널려있고 혈육이 낭자하여 마음이 아픔을 금할 수 없었다. 한 곳에 이르니 대패기(大旆旗)가 황폐한 못 옆에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홍연이 중얼거렸다.

"대패기가 여기 있으니 주군의 시신도 멀지 않은 곳에 있으리라."

몇 걸음 가지도 않았는데 신음소리가 들려와 앞으로 나아가면서 살피니 어린 내시 한명이 팔이 부러진채 누워있다. 

홍연이 물었다. "너는 주공이 돌아가신 곳을 아느냐?"

내시가 손가락으로 피와 살점이 뭉쳐있는 덩어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주공의 시신입니다. 제가 직접 주공이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팔에 부상을 당한 고통으로 도망치지 못하고 이곳에 누워 주공의 시신을 지키고 있으면서 우리 나라 사람이 와서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홍연이 시체를 보니 모두 짓이겨져 온전한데가 없고 오로지 간(肝) 하나가 온전했다. 홍연이 시신과 간에 재배하고는 큰 소리로 울고는 생전의 예로 간 앞에서 복명했다. 

예를 마치자 홍연이 말했다. "주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는 자가 없으니 내 몸으로 주공의 관을 삼으리라."

그리고는 종자들에게 부탁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신을 숲속에 묻었다가 새로운 군주가 등극하면 바로 고하도록 해라."

마침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신의 배를 갈라 손으로 의공의 간을 뱃속에 넣고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종자들이 그가 말한대로 그의 시신을 묻어 감추고 수레에 어린 내시를 태우고 황하를 건너 새로운 군주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卻說石祁子先扶公子申登舟。寧速收拾遺民,隨後趕上。至於漕邑,點查男女,纔存得七百有二十人。狄人殺戮之多,豈不悲哉!二大夫相議:「國不可一日無君,其奈遺民太少!」 乃於共滕二邑,十抽其三,共得四千有餘人,連遺民湊成五千之數,即於漕邑創立廬舍,扶立公子申爲君,是爲戴公。宋桓公御說許桓公新臣,各遣人致唁。戴公先已有疾,立數日遂薨。寧速如齊,迎公子燬嗣位。齊桓公曰:「公子歸自敝邑,將守宗廟,若器用不具,皆寡人之過也。」 乃遺以良馬一乘,祭服五稱,牛、羊、豕、雞、狗各三百隻。又以魚軒贈其夫人,兼美錦三十端。命公子無虧帥車三百乘送之。並致門材,使立門戶。公子燬至漕邑,弘演之從人,同折臂小內侍俱到,備述納肝之事。公子燬先遣使具棺,往滎澤收殮。一面爲懿公戴公發喪。追封弘演,錄用其子,以旌其忠。諸侯重齊桓公之義,多有弔賻。時周惠王十八年冬十二月也。

 

唁 ; 위문할 언.             魚軒 : 산돼지와 비슷한 짐승인 어(魚)의 가죽으로 꾸민 수레나 가마. 왕후나 제후의 부인이 탔다. 

 

 

 

한편 석기자는 앞서 공자 신을 부축하여 배에 오르게 하였고 영속은 유민을 수습하여 뒤쫒아 왔다.  조읍(漕邑)에 이르러 백성들을 점검해보니 겨우 720명이 남아 있었다.  적인에게 살륙당한 자가 그토록 많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두 사람의 대부가 상의했다. "나라에 하루라도 군왕이 없어서는 안되는데 유민의 수가 너무 적으니 어찌할 것인가!"

그리하여 공(共), 등(騰)의 두 읍(邑)에서 열에 셋을 차출하니 모두 4천 여명을 얻을 수 있었는데, 유민을 합치자 오천의 숫자가 되었다. 조읍(漕邑)으로 가서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공자 신을 부축하여 군주로 세우니 이 사람이 바로 대공(戴公)이다. 

송(宋)나라 환공(桓公) 어설(御說)과  허(許)나라 환공(桓公) 신신(新臣)이 각각 사람을 파견하여 조문했다. 

대공은 앞서 이미 병이 있어 즉위한지 며칠만에 죽었다. 영속은 제나라로 가서 공자 훼(燬)를 맞아들여 후사를 잇게 했다. 

제환공이 말했다. "공자가 우리 나라에서 돌아가 종묘를 지키는데 쓸 기물이 갖추어지지 못하다면 모두 과인의 잘못이다."

그리하여 좋은 말 4필, 제복(祭服) 5벌, 소, 양, 돼지, 닭, 개를 각 300마리씩을 보냈다.  또 훼의 부인에게 타고 갈 수레인 어헌(魚軒)을 보내고 아울러 아름다운 비단 30단을 주었다.  그리고 공자 무휴(無虧)에게 명하여 수레 300승을 인솔하여 그들을 위나라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아울러 성문을 만들 재목도 가져가 성문을 세워주게 하였다. 공자 훼가 조읍에 도착하자 홍연(弘演)의 종자들이 팔이 잘려나간 어린 내시를 태우고 도착하여 홍연이 의공의 간을 자신의 뱃속에 넣고 죽은 일을 모두 고했다.  공자 훼는 우선 사람들에게 관을 준비하여 형택에 가서 시신을 수습하게 하였다.  한편으로는 의공과 대공의 상을 알렸다.  그리고 홍연에게 봉작을 추증하고 그 아들이 봉록받게 하고 정문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렸다.제후들은 제환공의 의로운 행동을 소중히 여기고 많은 제후들이 조문하고 부의를 표했다.  

이때가 주나라 혜왕 18년 12월이었다.

 

 

 

  

其明年,春正月,衛侯燬改元,是爲文公。纔有車三十乘,寄居民間,甚是荒涼。文公布衣帛冠,蔬食菜羹,早起夜息,撫安百姓,人稱其賢。公子無虧辭歸齊國,留甲士三千人,協戍漕邑,以防狄患。無虧回見桓公,言衛燬草創之狀,並述弘演納肝之事。桓公嘆曰:「無道之君,亦有忠臣如此者乎?其國正未艾也。」 管仲進曰:「今留戍勞民,不如擇地築城,一勞永逸。」 桓公以爲然,正欲糾合諸侯同役。忽邢國遣人告急,言:「狄兵又到本國,勢不能支,伏望救援!」 恆公問管仲曰:「邢可救乎?」管仲對曰:「諸侯所以事齊,謂齊能拯其災患也。不能救衛,又不救邢,霸業隕矣!」桓公曰:「然則邢衛之急孰先?」管仲對曰:「俟邢患旣平,因而城衛,此百世之功也。」 桓公曰:「善。」 即傳檄宋、魯、曹、邾各國,合兵救邢,俱於聶北取齊。宋曹二國兵先到。管仲又曰:「狄寇方張,邢力未竭,敵方張之寇,其勞倍,助未竭之力,其功少,不如待之。邢不支狄,必潰,狄勝邢,必疲。驅疲狄而援潰邢,所謂力省而功多者也。」 桓公用其謀,託言待魯邾兵到,乃屯兵於聶北,遣諜打探邢狄攻守消息。

 

史臣有詩譏管仲不早救邢衛,乃霸者養亂爲功之謀也。詩云:

救患如同解倒懸,

提兵那可復遷延?

從來霸事遜正事,

功利偏居道義先。

 

 

 

다움해 정월, 위후(衛侯)가 개원을 하니 바로 문공(文公)이다.  병거(兵車)가 겨우 30승밖에 되지 않았으며 민가에서 기거하니 생활이  매우 황량했다.  문공은 포의(布衣)를 입고 백관(帛冠)을 썼으며 나물반찬에 나물국을 마시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이 늦어서야 쉬면서 백성을 어루만지니 사람들이 그의 어짐을 칭송했다. 

공자 무휴가 문공과 작별하고 제나라로 돌아가면서 갑사 3천명을 머무르게 하고,  위나라 사람들과 협력하여 조읍을 지키며 적인(狄人)의 환란을 방비하게 하였다.

공자 무휴가 돌아가 환공을 알현하고 위나라 군주 훼의 초창기 모습과 아울러 홍연이 의공의 간을 자신의 뱃속에 넣고 죽은 일등을 모두 고했다. 

제환공이 탄식했다. "무도한 군주에게도 그런 자와 같은 충신이 있었단 말인가?  위나라는 진정코 아직 망할 때가 아니로다."

관중이 진언했다.

"지금 우리가 병사를 주둔시켜 어려운 백성들을 지켜주고 있으나, 좋은 곳을 택해 도성을 쌓아준다면, 한번의 수고로 위나라가 영원히 평안할 것입니다."

환공이 옳다고 여기고 바로 제후들을 규합하여 함께 일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때 홀연히 형(邢)나라에서 사람을 보내 급변을 알렸다. "적(狄)의 군대가 다시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그 기세를 지탱할 수 없습니다. 구원해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환공이 관중에게 물었다. "형나라를 구원해주는 것이 좋겠습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제후들이 제나라를 섬기는 까닭은 제나라가 능히 재앙과 환란에서 자신을 건져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나라를 구해줄 수 없었는데 또 형나라를 구원해 주지 않는다면 패업은 끝나는 것입니다."

환공이 물었다. "그렇다면 형나라와 위나라 중 어느 쪽이 급합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형나라의 환란을 평정하고 나서 위나라의 도성을 쌓아준다면 백세의 공이 될 것입니다." 

환공이 말했다. "좋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송(宋), 노(魯), 조(曹), 주(邾)나라등 각 나라에 군대를 연합하여 형나라를 구원하자는 격문을 띄웠다.  송나라, 조나라의 두나라 군대가 먼저 도착했다. 

관중이 말했다.

"적(狄)나라 군사의 기세가 바야흐로 왕성한데다, 형나라의 힘이 아직 고갈되지 않았습니다. 적이 바야흐로 기세등등하게 쳐들어 왔기 때문에 그들을 대적하는 것은 힘이 더 들고, 힘이 고갈되지도 않은 형나라를 돕는 것은 그 공도 적을 것이니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형나라는 적인의 기세를 지탱하지 못하고 반드시 궤멸될 것이고 적인이 형나라에 승리하고 나면 반드시 피로해질 것입니다. 지친 적인을 몰아쳐 궤멸된 형나라를 구원한다면 이른바 힘은 아끼고 공이 많게 될 것입니다."

환공이 그 계책을 받아들여 노나라와 주나라의 군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섭(聶)의 북쪽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첩자들을 보내 적인과 형나라의 전쟁상황을 탐지하게 하였다. 

 

사관이 시를 지어 관중이 위나라와 형나라를 재빨리 구원하지 않고 패자가 되어 환란을 키워 공을 도모했다고 꾸짖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환난에서 구하는 것은 촌각을 다투는 일인데,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어찌 또 시간만 끄는가?

예로부터 패자는 겸손했고 일처리가 공정했는데,

공리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의로움만 앞세웠구나.

 

 

 

 

話說三國駐兵聶北,約及兩月。狄兵攻邢,晝夜不息。邢人力竭,潰圍而出。諜報方到,邢國男女,塡湧而來,俱投奔齊營求救。內一人哭倒在地,乃邢侯叔顔也。桓公扶起,慰之曰:「寡人相援不早,以致如此,罪在寡人。當請宋公曹伯共議,驅逐狄人。」 即日拔寨都起。狄主瞍瞞擄掠滿欲,無心戀戰,聞三國大兵將至,放起一把火,望北飛馳而去。比及各國兵到,只見一派火光,狄人已遁。桓公傳令將火撲滅,問叔顔:「故城尙可居否?」 叔顔曰:「百姓逃難者,大半在夷儀地方,願遷夷儀,以從民欲。」 桓公乃命三國各具版築,築夷儀城,使叔顔居之。更爲建立朝廟,添設廬舍,牛馬粟帛之類,皆從齊國運至,充牣其中。邢國君臣,如歸故國,懽祝之聲徹耳。事畢,宋曹欲辭齊歸國。桓公曰:「衛國未定,城邢而不城衛,衛其謂我何?」 諸侯曰:「惟霸君命。」 桓公傳令,移兵向衛,凡畚鍤之屬,盡攜帶隨身。衛文公燬遠遠相接。桓公見其大布爲衣,大帛爲冠,不改喪服,惻然久之。乃曰:「寡人藉諸君之力,欲爲君定都,未審何地爲吉?」 文公燬曰:「孤已卜得吉地,在於楚邱,但版築之費,非亡國所能辦耳!」 桓公曰:「此事寡人力任之。」 即日傳令三國之兵,俱往楚邱興工。復運門材,重立朝廟,謂之 「封衛」。

 

衛文公感齊再造之恩,爲《木瓜》之詩以詠之。詩云:

投我以木瓜兮,報之以瓊琚。

投我以木桃兮,報之以瓊瑤。

投我以木李兮,報之以瓊玖。

 

牣 : 찰 인. 차다. 충만하다. 살찌다. 더하다. 막다. 막힘. 질기다.  또는, 부드럽다.

版築 : 토벽이나 흙 단의 축조 법에서 판으로 틀을 만들고, 흙을 그 안에 쌓아 1층씩 절굿공이로 빻아서 굳힌 것.

畚 : 삼태기 분.     鍤 : 가래 삽. 가래. 흙을 파헤치거나 떠서 던지는 농기구. 바늘. 

 

☞ 木瓜 : 이 시는 詩經 國風/衛風/木瓜라는 시이다. 참고로 전편을 인용하여 소개한다. 

投我以木瓜,報之以瓊琚。            나에게 모과를 보내주시니 옥으로 보답하나이다. 

匪報也,永以為好也。                   보답이 아니라 길이 사이좋게 지내려 하는 것입니다.

 

投我以木桃,報之以瓊瑤。            나에게 복숭아를 보내주시니 옥으로 보답하나이다. 

匪報也,永以為好也。                   보답이 아니라 길이 사이좋게 지내려 하는 것입니다. 

 

投我以木李,報之以瓊玖。            나에게 오얏을 보내주시니 옥으로 보답하나이다.

匪報也,永以為好也。                   보답이 아니라 길이 사이좋게 지내고자 함입니다.

 

 

 

한편 세 나라의 군대가 섭의 북쪽에서 주둔한지 두 달이 지났다.  적의 군대가 형나라를 공격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형나라 사람들이 힘이 고갈되어 궤멸되자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다. 첩보가 도착했는데 형나라 백성들은 강을 메우듯 건너 모두 제나라의 군영으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했다. 그 안에서 한 사람이 나와 통곡하며 땅에 엎드렸는데 바로 형(邢)나라 제후인 숙안(叔顔)이었다. 

환공이 부축해 일으키며 위로했다.

"과인이 일찍 돕지 못해 이와같은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과인의 죄이니 마땅히 송공(宋公)과 조백(曹伯)을 청해 함께 상의하여 적인을 쫒아버립시다."

그날로 영채를 뽑고 모두 기병했다. 적(狄)의 군주 수만은 노략질하려는 생각뿐이라 싸울 뜻이 없어 세 나라의 대군이 이를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일제히 불을 지르고 북쪽을 향해 나는듯이 달려갔다.

각국의 군대가 도착하자 오직 보이는 것은 한 줄기 화광뿐이고 적인들은 이미 도망친 후였다.

환공은 명을 내려 불을 끄게 하고 형후(邢侯) 숙안에게 물었다.

"예전의 도성에서 아직도 지낼 수 있겠습니까?"

숙안이 대답했다.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태반이 이의(夷儀)지방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의로 도읍을 옮겨 백성을 따르고자 합니다."

환공이 마침내 명을 내려 세 나라 병사들이 각 판축을 준비하여 이의성을 쌓고 형후 숙안이 지내게 하였다. 다시 종묘를 짓고 여막을 지어 소와 말, 양식과 비단등속을 제나라에서 가져다가 그 안을 채우니 형나라 군신들이 고국에 돌아간 것처럼 기뻐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일을 마치자 송나라와 조나라 제후는 제환공에게 작별하고 돌아가려고 하니 환공이 말했다. 

"위나라가 아직 안정되지 못했고 형나라에는 성을 쌓아주었으나 위나라에는 성을 쌓아주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철군한다면 위나라는 우리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제후들이 대답했다. "오직 군명에 따르겠습니다."

환공이 명을 내려 위나라로 이동하는 병사들에게 삼태기와 삽등속을 모두 몸에 지니고 가게 하였다. 

위나라 문공 훼가 멀리까지 영접을 나갔다. 

환공이 문공을 보니 큰 베로 옷을 만들어 입고, 큰 명주로 관을 만들어 쓰고 있는데 아직 상복을 갈아입지 않아 측은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문공에게 물었다.

"과인이 제후들의 힘을 빌어 군주를 위해 도읍을 정해주려고 하는데 어느 곳이 좋은 곳인지 검토한 바가 있습니까?"

문공 훼가 대답했다. "제가 이미 점을 쳐 좋은 곳을 얻었습니다. 초구(楚邱)에 있는데 단지 판축의 비용만큼은 패망한 나라라 어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환공이 말했다. "그일은 과인의 힘으로 하겠습니다."

그날로 세 나라의 병사들에게 명을 내려 모두 초구에 가서 공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다시 문을 만들 재목을 운반하여 종묘에 세우고 '봉위(封衛 : 위나라에 봉한다."라 현판을 써 달았다.     

 

위 문공은 제환공이 도성과 종묘를 전건해준데 감격하여 모과(木瓜)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나에게 모과를 보내주시니 옥으로 보답하나이다. 

나에게 복숭아를 보내주시니 옥으로 보답하나이다. 

나에게 오얏을 보내주시니 옥으로 보답하나이다.

 

 

 

 

當時稱桓公存三亡國:謂立僖公以存魯,城夷儀以存邢,城楚邱以存衛,有此三大功勞,此所以爲五霸之首也。潛淵先生讀史詩云:

    

周室東遷綱紀摧,

桓公糾合振傾頹。

興滅繼絶存三國,

大義堂堂五霸魁。

 

 

 

당시 환공이 패망한 세 나라를 존립시켜준 것을 칭송하였다.  노나라 희공(僖公)을 세워 노나라를 존립시켰고, 이의(夷儀)에 성을 쌓아 형나라를 존속시켰으며, 초구(楚邱)에 성을 쌓아 위나라를 존속시켰으니 이 세 큰 공적은 제환공을 오패(五覇)의 우두머리로 삼은 까닭이 되었다. 

잠연선생(潛淵先生)이 역사를 읽고 시를 남겼다.

 

주나라가 낙양으로 동천한 후 기강이 쇠퇴했는데,

환공이 제후들을 규합해 무너지는 것을 진정시켰도다.

패망한 나라를 일으켜 세 나라를 존속시켰으니,

대의를 떨쳐 당당하게 오패의 우두머리가 되었도다.

 

 

 

 

時楚成王熊惲,任用令尹子文圖治,修明國政,有志爭霸。聞齊侯救邢存衛,頌聲傳至荊襄,楚成王心甚不樂,謂子文曰:「齊侯布德沽名,人心歸向。寡人伏處漢東,德不足以懷人,威不足以懾眾,當今之時,有齊無楚,寡人恥之!」 子文對曰:「齊侯經營伯業,於今幾三十年矣。彼以尊王爲名,諸侯樂附,未可敵也。鄭居南北之間,爲中原屛蔽,王若欲圖中原,非得鄭不可。」 成王曰:「誰能爲寡人任伐鄭之事者?」 大夫鬥章願往,成王與車二百乘,長驅至鄭。

 

 

 

그때 초(楚)나라 성왕(成旺) 웅운(熊惲)은 영윤(令尹)으로 자문(子文)을 기용하고 치세를 도모하여 국정이 발전되자 패자가 되는데 뜻을 두게 되었다. 제환공이 형나라를 구원하고 위나라를 존속시켰다고 칭송하는 소리가 형양에까지 전해져 오자 초 성왕의 마음이 매우 불쾌하여 영윤인 자문에게 말했다. 

"제후(齊侯)가 덕을 펼쳐 명성을 얻고 인심이 그에게 돌아가고 있소. 과인이 한수의 동쪽에 엎드려 있으면서 덕이 부족하니 사람들을 끌어 안지도 못하고, 위엄도 부족하여 대중을 두려워하다 보니  지금에 이르러 제나라는 있고 초나라는 없소, 과인은 그것이 부끄럽소!"

자문이 대답했다.

"제환공이 패업(伯業)을 경영한지 지금 거의 30년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실을 높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으니 제후들이 즐겨 가까이하고 있어  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정(鄭)나라는 남북의 사이에 있어 중원을 가로막고 있으니 왕께서 중원을 도모하고자 하신다면 정나라를 얻지 않고는 불가합니다."

그러자 성왕이 물었다.

"누가 과인을 위하여 정나라 치는 일을 맡아주겠는가?"

대부 투장(鬥章)이 나서자 성왕은 병거(兵車)200승을 주어 멀리 정나라로 떠나게 했다. 

 

 

  

  

卻說鄭自純門受師以後,日夜隄防楚兵。探知楚國興師,鄭伯大懼,即遣大夫聃伯,率師把守純門,使人星夜告急於齊。齊侯傳檄,大合諸侯於檉,將謀救鄭。鬥章知鄭有準備,又聞齊救將至,恐其失利,至界而返。楚成王大怒,解佩劍賜鬥廉,使即軍中斬鬥章之首。鬥廉乃鬥章之兄也。旣至軍中,且隱下楚王之命,密與鬥章商議:「欲免國法,必須立功,方可自贖。」鬥章跪而請教。鬥廉曰:「鄭知退兵,謂汝必不驟來,若疾走襲之,可得志也。」 鬥章分軍爲二隊,自率前隊先行,鬥廉率後隊接應。

卻說鬥章銜枚臥鼓,悄地侵入鄭界,恰遇聃伯在界上點閱車馬。聃伯聞有寇兵,正不知何國,慌忙點兵,在界上迎住廝殺。不期鬥廉後隊已到,反抄出鄭師之後,腹背夾攻。聃伯力不能支,被鬥章只一鐵簡打倒,雙手拿來。鬥廉乘勝掩殺,鄭兵折其大半。鬥章將聃伯上了囚車,便欲長驅入鄭。鬥廉曰:「此番掩襲成功,且圖免死,敢僥幸從事耶?」 乃即日班師。鬥章歸見楚成王,叩首請罪,奏曰:「臣回軍是誘敵之計,非怯戰也。」 成王曰:「旣有擒將之功,權許準罪。但鄭國未服,如何撤兵?」 鬥廉曰:「恐兵少不能成功,懼褻國威。」 成王怒曰:「汝以兵少爲辭,明是怯敵。今添兵車二百乘,汝可再往,若不得鄭成,休見寡人之面!」 鬥廉奏曰:「臣願兄弟同往。若鄭不投降,當縛鄭伯以獻。」 成王壯其言,許之。乃拜鬥廉爲大將,鬥章副之,共率車四百乘,重望鄭國殺來。

 

史臣有詩云:

荊襄自帝勢炎炎,

蠶食多邦志未厭。

溱洧何辜三受伐?

解懸只把霸君瞻。

 

檉 : 위성류 정. 渭城柳, 위성류과의 낙엽 활엽 교목. 능수버들. 

 

 

 

한편 정나라는 성의 남쪽에 있는 순문(純門)으로 부대가 들어온 후 밤낮으로 초나라 군대의 침략에 대비했다. 초나라에서 군대를 일으켰다는 것을 탐지하고 정백은 크게 두려워 하여 즉시 대부 담백(聃伯)을 파견하여 군사들을 인솔하여 순문을 지키게 하고 사람을 제나라에 보내 급변을 고하게 했다. 제환공은 격문을 돌려 정(檉)에서 제후들과 크게 회합하고 정나라를 구원할 계책을 상의했다.

투장은 정나라에서 준비가 되어있고 제나라의 구원군이 도착하리라는 것을 알고 예기(銳氣)를 잃을까 두려워 하여 정나라와의 경계로 돌아갔다. 초성왕은 크게 노하여 차고 있던 검을 풀어 투렴(鬥廉)에게 하사하고 군중에 가는 즉시 투장을 참하라고 명을 내렸다. 

투렴은 바로 투장의 형이라 군중에 도착하자 일단 깊숙한 곳에서 투장에게 초왕의 명을 전하고 은밀히 투장과 상의했다.

"국법을 면하려면 반드시 공을 세워 스스로 죄를 면제받아야 한다."

투장은 무릎을 꿇고 가르침을 청하니 투렴이 말했다.

"정나라에서는 네가 퇴각한 것을 알고 반드시 네가 갑자기 공격해 오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니, 만약 질풍처럼 달려가 습격한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투장은 부대를 2대로 나누어 스스로 전대(前隊)를 이끌고 앞서 가고 투렴은 후대를 이끌고 접응하기로 하였다.

투장은 병사들에게 막대를 물리고 북을 눕히게 하여 조용히 정나라의 국경을 침입해 들어갔는데 때마침 담백이 국경옆에서 거마를 점고하고 있었다. 담백은 적병이 쳐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어느 나라에서 쳐들어왔는지 몰라 황망히 점고를 마치고 국경부근에서 맞이하여 싸웠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투렴이 이끄는 후대가 이미 도착하여 정나라 군대의 뒤에서 튀어나와 앞뒤에서 협공하였다. 

담백이 지탱하지 못하고 투장이 철간을 한 번 내리치자 두 손을 사로잡혔다. 투렴이 승세를 타고 급히 달려드니 정나라 군사들의 태반이 꺾였다. 투장이 담백을 함거에 싣고 정나라로 곧장 짓쳐들어가려고 하였다. 

투렴이 말했다. "이번은 기습으로 성공한 것이다. 일단 죽음을 면하려고 한 것인데 감히 요행으로 싸우려고 하느냐?"

그리하여 당일로 군사를 회군하였다.

투장은 돌아가 성왕을 알현하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아뢰었다.

"신이 회군한 것은 적을 유인하기 위한 계책이었으며 싸우기를 겁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왕이 말했다. "이미 적장을 사로잡아 공을 세웠으니 잠시 죄 묻는 것을 미루겠소. 그런데 정나라가 항복하지 않았는데 어찌 군대를 물린 것이오?"

투렴이 대답했다. "병력이 적어 성공하지 못할까 두려웠고 국위를 손상시킬까봐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성왕이 노하여 말했다. "너는 병력이 적다고 핑계대지만 분명히 적을 겁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병거 200승을 더해 줄터이니 너는 다시 출정해라. 만약 정나라에 승리하지 못한다면 과인의 얼굴을 보려고 하지 말라."

투렴이 아뢰었다. "신은 형제가 함께 가기를 원합니다. 만약 정나라에서 항복을 하지 않는다면 정백을 묶어 바치겠습니다."

성왕이 그 말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그리하여 투렴을 대장으로 삼고 투장을 부장으로 삼아 함께 병거 400승을 인솔하여 정나라를 향해 짓쳐갔다. 

 

사관이 시를 지어 평했다.

형양(초나라)은 주(周) 황실의 세가 왕성했을 때부터 

주변의 많은 나라들을 잠식했는데도 뜻이 차지 않았구나.

정나라가 무슨 죄가 있어 세번이나 공격을 받는가?

어려움을 풀어달라고 패자인 제환공만 쳐다보네.

 

 

 

 

且說鄭伯聞聃伯被囚,復遣人如齊請救。管仲進曰:「君數年以來,救燕存魯,城邢封衛,恩德加於百姓,大義布於諸侯,若欲用諸侯之兵,此其時矣。君若救鄭,不如伐楚,伐楚必須大合諸侯。」 桓公曰:「大合諸侯,楚必爲備,可必勝乎?」管仲曰:「蔡人得罪於君,君欲討之久矣。楚蔡接壤,誠以討蔡爲名,因而及楚,《兵法》所謂『出其不意』者也。」(先時,蔡穆公以其妹嫁桓公爲第三夫人,一日,桓公與蔡姬共登小舟,遊於池上,採蓮爲樂。蔡姬戲以水灑公,公止之。姬知公畏水,故蕩其舟,水濺公衣。公大怒曰:「婢子不能事君!」 乃遣豎貂送蔡姬歸國。蔡穆公亦怒曰:「已嫁而歸,是絶之也。」 竟將其妹更嫁於楚國,爲楚成王夫人。桓公深恨蔡侯,故管仲言及之。) 桓公曰:「江黃二國,不堪楚暴,遣使納款,寡人欲與會盟,伐楚之日,約爲內應,何如?」 管仲曰:「江黃遠齊而近楚,一向服楚,所以僅存。今背而從齊,楚人必怒,怒必加討。當此時,我欲救,則阻道路之遙;不救,則乖同盟之義。況中國諸侯,五合六聚,儘可成功,何必借助蕞爾?不如以好言辭之。」 桓公曰:「遠國慕義而來,辭之將失人心。」 管仲曰:「君但識吾言於壁,異日勿忘江黃之急也。」 桓公遂與江黃二君盟會,密訂伐楚之約,以明年春正月爲期。二君言:「舒人助楚爲虐,天下稱爲『荊舒』,不可不討。」 桓公曰:「寡人當先取舒國,以剪楚翼。」 乃密寫一書,付於徐子。徐與舒近,徐嬴嫁爲齊桓公第二夫人,有婚姻之好,一向歸附於齊,故桓公以舒事囑之。徐果引兵襲取舒國。桓公即命徐子屯兵舒城,以備緩急。江黃二君,各守本界,以候調遣。魯僖公遣季友至齊謝罪,稱:「有邾莒之隙,不得共邢衛之役。今聞會盟江黃,特來申好,嗣有征伐,願執鞭前驅。」 桓公大喜,亦以伐楚之事,密與訂約。

 

濺 : 흩뿌릴 천. 물을 흩뿌리다. 물이 빠르게 흐르는 모양.        納款 : 귀순하다. 내통하다.       一向 : 언제나 한결같이.

儘 : 다할 진. 다하다. 어떻든. 그것은 그렇다 . 조금.      蕞 : 작을 최. 작다. 작은 모양. 모이다. 모이는 모양. 땅 이름.

調遣 : 지시. 배정. 

 

 

 

한편 정백(鄭伯)은 담백이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제나라에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관중이 진언했다.

"주군께서 수년동안 연나라를 구하고 노나라를 존속시키셨으며, 형나라의 성을 쌓아 주고 위나라에 새로운 도읍을 봉하시어 백성들에게 은덕을 베푸시고 제후들에게는 대의를 널리 펼치셨는데 제후들의 군대를 쓰시려 한다면 바로 이때입니다. 주군께서 정나라를 구원하시려고 하신다면 초나라를 치는 것만 같지 못하니 초나라를 치려면 반드시 제후들과 크게 연합하셔야 합니다."

환공이 듣고 물었다.

"제후들을 크게 규합한다면 초나라에서는 반드시 대비할 것인데 이길 수 있겠습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채(蔡)나라 사람이 주군께 죄를 지어 주군께서 채나라를 치려고 하신지 오래 되었습니다. 초나라와 채나라는 영토가 붙어있어 채나라를 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초나라를 친다면 병법에 이른바 '불의에 친다'는 것입니다."

 

앞서 채나라 목공(穆公)은 그 누이를 환공에게 출가시켜 제 3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하루는 환공과 채희(蔡姬)가 함께 작은 배에 올라 연꽃을 꺾으며 놀았다. 채희가 장난으로 환공에게 물을 뿌렸는데 환공이 말렸다. 채희는 환공이 물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일부러 배를 흔들어 환공의 옷에 물이 튀게 하였다. 

그러자 환공이 크게 노했다. "천한 것이 군주를 잘 모시지 못한단 말이냐!"

그리하여 수초를 시켜 채희를 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채 목공도 노하여 말했다. "이미 출가한 사람을 돌려보내니  이것은 인연을 끊는 것이로다."

마침내 그 누이를 다시 초나라에 재가시켜 초성왕의 부인이 되게 하였다. 환공은 이 일로 인하여 채후에게 깊은 한을 품었는데 관중이 그 일을 언급한 것이다. 

 

환공이 물었다.

"강(江), 황(黃) 두 나라가 초나라의 횡포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내통해 왔는데 과인은 그들과 회맹하고 초나라를 치는 날 내응하게 하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강나라, 황나라는 제나라와는 멀리 떨어져 있고 초나라와는 가까이에 있어 오로지 초나라에 복종하였기 때문에 겨우 존립해왔습니다. 이제 초나라를 등지고 제나라를 따른다면 초나라 사람은 반드시 노할 것이고 노한다면 반드시 쳐들어 갈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가 구원하려고 해도 길이 멀어 구원하기가 힘들며, 구원하지 않는다면 동맹을 맺은 의리를 거스르는 것이 됩니다.  

하물며 중국의 제후들이 연합하면 초나라에 승리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작은 나라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까? 좋은 말로 사양하는 것이 좋습니다."

환공이 말했다. "먼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의로움을 우러러 보고 왔는데 거절하면 인심을 잃게 될 것입니다."

관중이 말했다. "주군께서는 제 말이 뜻에 맞지 않다고 여기시는데, 훗날 강나라와 황나라가 위급할 때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환공은 마침내 강나라, 황나라의 두 군주와 만나 맹약을 체결하였는데, 은밀히 초나라를 치기로 하고 다음해 정월로 시기를 정했다. 

두 군주가 말했다.

"서(舒)나라 사람이 초나라를 도와 포학한 짓을 자행하여 천하에서는 형서(荊舒)라 칭하는데 서나라를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환공이 말했다.

"과인이 마땅히 먼저 서나라를 취하여 초나라의 날개를 꺾으리다."

그리하여 은밀히 서신을 작성하여 서(徐)나라 제후에게 보냈다.  서(徐)나라와 서(舒)나라는 가까이에 있지만 서영(徐嬴)이 제환공에게 출가하여 제2부인이 되므로써 혼맥으로 우호관계가 이루어졌었다. 서(徐)나라는 한결간이 제나라에 밀착해왔기 때문에 환공이 서(舒)나라를 치도록 부탁한 것이다. 서(徐)나라에서 과연 군대를 이끌고 가서 서(舒)나라를 취했다.  환공이 즉각 서(徐)나라 군주에게 명하여 서(舒)의 성에서 병사들을 주둔시켜 만일의 사태에 대비토록 하였다. 

그리고 강황(江黃) 두 나라의 군주는 각 본국의 경계를 지키며 지시를 기다리게 하였다.

노희공(魯僖公)은 제나라에 계우(季友)를 보내 사죄했다.

"주(邾)나라와 거(莒)나라 사이에 틈이 있어, 형위(邢衛) 두 나라의 일에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강황(江黃) 두 나라와 회맹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와서 우호관계에 입각하여 초나라를 치는 일을 따르고 합니다.  말채찍을 잡고 앞장서기를 원합니다."

환공이 크게 기뻐하며 초나라 치는 일을 은밀히 약속했다. 

 

 

 

 

  

時楚兵再至鄭國,鄭文公請成,以紓民禍。大夫孔叔曰:「不可,齊方有事於楚,以我故也。人有德於我,棄之不祥,宜堅壁以待之。」 於是再遣使如齊告急。桓公授之以計,使揚言齊救即至,以緩楚。至期,或君或臣,率一軍出虎牢,於上蔡取齊,等候協力攻楚。於是遍約宋、魯、陳、衛、曹、許之君,俱要如期起兵,名爲討蔡,實爲伐楚。

 

紓 : 느슨할 서. 느슨하다. 헐거워짐. 풀다. 화해함.

虎牢(關) : 무뢰관(武牢關)이라고도 한다. 관성(關城)은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다. 사방에 천 길 절벽이 솟아 있다. 남쪽으로는 숭악(嵩嶽),

         북쪽으로는 황하에 접해 있으며, 서남쪽으로만 낙양 서쪽으로 통하는 깊은 계곡이 있다.

         중원(中原)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첫째 관문.  당대(唐代) 이후 사수관(汜水)으로 이름을 고쳤다. 

 

 

 

 

그때 초나라 군대가 다시 정나라를 쳐들어놨는데 정나라 문공(文公)은 초나라와 화해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다. 

그러자 대부 공숙(孔叔)이 말했다.

"안됩니다. 제나라에서는 바야흐로 초나라를 치려고 하고 있는데 바로 우리나라 때문입니다.  남들이 우리에게 덕을 베풀고 있는데 그것을 저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합니다. 마땅히 성을 견고하게 지키며 그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사자를 제나라에 다시 보내 급한 사정을 알렸다. 환공이 계책을 내어 제나라의 구원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고 말을 퍼뜨려 초나라의 공격을 늦추고자 했다.  약속한 날이 되면 군주이건 신하이건 간에 모두 일군을 인솔하고 호뢰관을 나가 채(蔡)나라의 국경에서 집합했다가  제후들의 협력을 기다려 초나라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송(宋), 진(陳), 위(衛), 조(曹), 허(許)나라의 군주들과 두루 약속하고 약속한 날에 모두 기병하기로 하였는데 명분은 채나라를 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초나라를 치는 것이었다.

 

 

 

 

  

明年,爲周惠王之十三年,春正月元旦,齊桓公朝賀已畢,便議討蔡一事。命管仲爲大將,率領隰朋、賓須無、鮑叔牙、公子開方、豎貂等,出車三百乘,甲士萬人,分隊進發。太史奏:「七日出軍上吉。」 豎貂請先率一軍,潛行掠蔡,就會集各國車馬。桓公許之。蔡人恃楚,全不設備直待齊兵到時,方纔歛兵設守。豎貂在城下耀武揚威,喝令攻城,至夜方退。蔡穆公認得是豎貂,先年在齊宮曾伏侍蔡姬,受其恩惠,蔡姬退回,又是他送去的,曉得是宵小之輩。乃於夜深,使人密送金帛一車,求其緩兵。豎貂受了,遂私將齊侯糾合七路諸侯,先侵蔡,後伐楚,一段軍機,備細洩漏於蔡:「不日各國軍到,將蔡城蹂爲平地,不如及早逃遁爲上。」 使者回報,蔡侯大驚。當夜率領宮眷,開門出奔楚國。百姓無主,即時潰散,豎貂自以爲功,飛報齊侯去訖。

 

朝賀 : 예전에, 동지, 정초, 즉위, 탄일 따위의 경축일에 신하가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는 일이나 또는 그런 의식을 이르던 말.

 

 

 

다음해는 주나라 혜왕 13년이었는데, 정월 초 하룻날 제환공은 신년하례를 마치자 곧 채나라를 치는 일을 논의했다. 

관중을 대장으로 삼아 습붕(隰朋), 빈수무(賓須無), 포숙아(鮑叔牙), 송자 개방(開方), 수초(豎貂)등을 통솔하게 하고 병거 300승, 갑사 만명을 내주고 대를 나누어 진발하게 하였다. 

태사가 아뢰었다. "7일이 출군하기에 가장 좋은 날입니다."

수초가 선봉을 자청하여 일군을 거느리고 잠행하여 채나라를 친 후 나아가 각군의 거마화 합세하겠다고 하니 환공이 허락했다.

채나라에서는 초나라를 믿고 제나라 군대가 쳐들어 갈 때를 대비한 준비가 전혀 없었다.  가까스로 병사들을 모아 수비하도록 배치했다. 

수초는 성밑에서 무위를 뽐내며 성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리고는 밤이 되자 물러났다. 

채목공(蔡穆公)은 제나라의 장수가 바로 수초인 것을 알자, 지난 날 제나라 궁궐에서 채희를 섬기며 은혜를 입었고 채희가 돌아갈 때 또 바로 그가 호송해 갔기 때문에 그가 소인배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밤이 깊어지자 사람을 시켜 은밀히 금과 비단 한 수레를 보내고 병사들의 공격을 늦춰줄 것을 요청했다.  수초는 뇌물을 받고 은밀히 제환공이 7로의 제후를 규합하여 먼저 채나라를 치고 후에 초나라를 칠것이라고 일단의 군사 기밀을 모두 세세히 채나라에 누설했다. 

"조만간 각국의 군대가 도착하면 채나라 도성을 유린하여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니 빨리 도망치는 것이 상책입니다."라고 사자가 돌아가 보고하니 채후는 크게 놀랐다. 

그날 밤 채후는 궁안의 식솔들을 데리고 성문을 열고 초나라로 도망쳤다. 백성들은 주인이 없어 바로 달아나 흩어지니 자신의 공으로 삼아 나는듯이 사자를 보내 제환공에게 보고했다.

 

 

 

  

卻說蔡侯至楚,見了成王,備述豎貂之語。成王方省齊謀,傳令簡閱兵車,准備戰守,一面撤回鬥章伐鄭之兵。數日後,齊侯兵至上蔡。豎貂謁見已畢。七路諸侯陸續俱到,一個個躬率車徒,前來助戰,軍威甚壯。那七路:宋桓公御說,魯僖公申,陳宣公杵臼,衛文公燬,鄭文公捷,曹昭公班,許穆公新臣。連主伯齊桓公小白,共是八位。內許穆公抱病,力疾率師先到蔡地。桓公嘉其勞,使序於曹伯之上。是夜,許穆公薨。齊侯留蔡三日,爲之發喪。命許國以侯禮葬之。七國之師,望南而進,直達楚界。只見界上,早有一人衣冠整肅,停車道左,磬折而言曰:「來者可是齊侯?可傳言楚國使臣奉候久矣。」 那人姓屈名完,乃楚之公族,官拜大夫。今奉楚王之命爲行人,使於齊師。桓公曰:「楚人何以預知吾軍之至也?」 管仲曰:「此必有人漏洩消息。旣彼遣使,必有所陳。臣當以大義責之,使彼自愧屈,可不戰而降矣。」 管仲亦乘車而出,與屈完車上拱手。屈完開言曰:「寡君聞上國車徒,辱於敝邑,使下臣完致命。寡君命使臣辭曰:『齊楚各君其國。齊居於北海,楚近於南海,雖風馬牛不相及也。不知君何以涉於吾地?』 敢請其故?」 管仲對曰:「昔周成王封吾先君太公於齊,使召康公賜之命,辭曰:『五侯九伯,汝世掌征伐,以夾輔周室。其地東至海,西至河,南至穆陵,北至無棣,凡有不共王職,汝勿赦宥。』 自周室東遷,諸侯放恣,寡君奉命主盟,修復先業。爾楚國於南荊,當歲貢包茅,以助王祭。自爾缺貢,無以縮酒,寡君是徵。且昭王南征而不返,亦爾故也。爾其何辭?」 屈完對曰:「周失其綱,朝貢廢缺,天下皆然,豈惟南荊?雖然,包茅不入,寡君知罪矣。敢不共給,以承君命!若夫昭王不返,惟膠舟之故,君其問諸水濱,寡君不敢任咎。完將復於寡君。」 言畢,麾車而退。

 

磬折 : 공손한 태도로 경쇠 모양으로 허리를 굽혀 절함.    磬 : 경쇠경. 비다. 다함. 말을 달리다. 허리굽혀 절하다. 목매어 죽다.

只見 : 다만 …만을 보다. 문득 보다. 얼핏 보다.           可是 : 그러나, 그런데, …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 지요? ~ 맞지요?

行人 : 옛날 조근(朝覲) · 빙문(聘問)의 일을 맡은 관직. 사자(使者)를 통틀어 일컫는 말.

 

五侯九伯 ~ : 史記 卷32. 齊太公世家에 그 文句가 나온다.  

及周成王少時, 管蔡作亂, 淮夷畔周, 乃使召康公命太公曰:「東至海, 西至河, 南至穆陵, 北至無棣, 五侯九伯, 実得征之.」 齊由此得征伐, 爲大国. 都営丘.

 

包茅 : 고대에 초(楚)나라 지역에서 바치던 공물(貢物)로, 제사에 술을 거를 때 사용하는 띠풀의 일종인 청모(菁茅)를 궤짝에 넣은 것인데,

        《서경(書經)》 〈하서(夏書) 우공(禹貢)〉에 “싸서 궤에 넣는 것은 청모이다.[包匭菁茅]”라고 하였다. 

        史記 卷32. 齊太公世家에는 「楚貢包茅不入, 王祭不具, 是以來責.」라고 했다. 

 

 

 

 

채후는 초나라에 도착하여 초왕을 만나자 수초의 말을 모두 전했다. 성왕은 그제야 제나라의 계책을 깨닫고 명을 내려 병거를 점검하고 전쟁에 대비토록하며 한편으로는 정나라를 치러 갔던 투장의 병력을 철수시켰다. 

며칠 후 제후의 군대가 채나라 국경에 도착하자 수초가 환공을 알현하고 이미 임무를 마쳤음을 보고했다.  7로 제후가 모두 이어서 도착하였는데 제후들이 몸소 부대를 인솔하고 전쟁을 돕기위해 미리 도착하여 군대의 위세가 대단했다. 

그 7로군은 송나라 환공 어설, 노나라 희공 신, 진(陳)나라 선공 저구, 위나라 문공 훼, 정나라 문공 첩, 조나라 소공 반, 허나라 목공 신신이었다. 연이어 일을 주도한 패자 제환공 소백까지 모두 8명의 군주가 함께한 것이다. 

그 중 허나라 목공은 병중임에도 병을 무릅쓰고 힘들게 부대를 인솔하여 맨 먼저 체나라에 도착했다. 제 환공이 허목공의 노고에 감동하여 서열을 조나라 소공보다 앞에 두었다.  그날 밤 허목공이 죽었다.  제환공은 채나라에서 3일동안 머무르며 허목공을 위해 발상했다. 

그리고 허나라에 명을 내려 허목공을 후작(侯爵)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7국의 군대가 남쪽을 향하여 나아가 바로 초나라의 국경에 도달했다.  국경을 얼핏 바라보니 한 사람이 의관을 단정하게 하고 길가에 수레를 멈추고 있다가 깍듯이 절을하고 말했다.

"오시는 분은 제나라 군주이시지요?  초나라 사신이 기다린지 오래라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성은 굴(屈)이며, 이름은 완(完)이라 하였으며 초나라 공족출신의 대부였는데, 지금은 초나라 왕의 명을 받아 빈객을 접대하는 행인(行人)의 직을 맡아 제나라 군대에 사신으로 왔다. 

환공이 물었다.

"초나라 사람이 어떻게 미리 우리 부대가 도착할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이것은 반드시 우리나라의 작전 기밀을 누설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이 사자를 보낸 것을 보면 반드시 방비가 있을 것입니다. 신이 마땅히 대의로써 그들을 꾸짖어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굴복하여 싸우지 않고 항복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관중도 수레를 타고 나가 굴완에게 수레 위에서 두 손을 맞잡고 인사했다. 

굴완이 말했다.

"저희 군주께서는 귀국의 군대가 저희 나라를 욕보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저에게 명을 전하도록 하명하셨습니다. 저희 군주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제나라와 초나라는 각 나라에 군주가 있어 제나라는 북해에 있고 초나라는 남해 가까이에 있으므로 바람과 소나 말이라 할지라도 서로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군주께서는 어찌 우리나라 땅으로 넘어오셨는지 모르겠다.' 감히 묻건대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관중이 대답했다.

"옛날 주성왕(周成王)께서 우리나라 선군(先君)이신 태공(太公)을 제나라에 봉하실 때,  소강공(召康公)을 보내시어 명을 내리셨습니다. 

'다섯 등급의 제후와 9주의 백(伯)이 잘못이 있으면 그대가 정벌하는 일을 관장하고 주나라 왕실을 도우라. 그 땅은 동으로는 바다까지, 서로는 황하까지, 남으로는 목릉(穆陵)까지, 북으로는 무체(無棣)까지 왕실의 직무를 함께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대는 용서하지 말지어다.'  주왕실이 낙양으로 동천한 이래 제후들이 방자해지자 우리 주군께서는 왕명을 받들어 제후들의 회맹을 주도하고 선대의 왕업을 다시 일으키고자 하십니다.  남쪽 형땅에 있는 그대의 초나라는 해마다 포모(包茅)를 왕실에 바쳐 왕실의 제사를 도와야 함에도 그대들이 바치지 않아 술울 거르지 못하고 있어 우리 군주께서 그것을 징치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또 소왕께서 남정을 나갔다가 귀환하지 못하셨으니 이 또한 그대들의 잘못인 것입니다. 그대들은 무어라 변명하시겠습니까?"

굴완이 대답했다. 

"주나라의 기강이 실추되어 조공이 끊어진 것은 천하가 모두 그러한 것인데 어찌 남쪽의 초나라뿐이겠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포모를 바치지 않은 것은 저희 군주께서도 죄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황제의 명을 받들면서 감히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소왕께서 귀환하지 못하신 것은 오로지 배가 좌초되었기 때문이라 그대는 강가에 가서 물어야 할 것입니다. 저희 군주께 감히 잘못을 책임지게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저희 군주께 가서 복명하겠습니다."

말을 마치고는 수레를 불러 타고 돌아가버렸다. 

 

 

 

 

 

管仲告桓公曰:「楚人倔强,未可以口舌屈也,宜進逼之。」 乃傳令八軍同發,直至陘山。離漢水不遠,管仲下令:「就此屯札,不可前行!」 諸侯皆曰:「兵已深入,何不濟漢,決一死戰,而逗留於此?」 管仲曰:「楚旣遣使,必然有備,兵鋒一交,不可復解。今吾頓兵此地,遙張其勢,楚懼吾之眾,將復遣使,吾因取成焉。以討楚出,以服楚歸,不亦可乎?」 諸侯猶未深信,議論紛紛不一。

卻說楚成王已拜鬥子文爲大將,蒐甲厲兵,屯於漢南,只等諸侯濟漢,便來邀擊。諜報:「八國之兵,屯駐陘地。」 子文進曰:「管仲知兵,不萬全不發。今以八國之眾,逗留不進,是必有謀。當遣使再往,探其強弱,察其意向,或戰或和,決計未晚。」 成王曰:「此番何人可使?」 子文曰:「屈完旣與夷吾識面,宜再遣之。」 屈完奏曰:「缺貢包茅,臣前承其咎矣。君若請盟,臣當勉行,以解兩國之紛。若欲請戰,別遣能者。」 成王曰:「戰盟任卿自裁,寡人不汝制也。」 屈完乃再至齊軍。

 

倔 : 고집셀 굴. 고집세다. 몸을 일으키다. 입신함. 굽(히)다.     

陘 : 지레목 형. 지레목. 산줄기가 끊어진 . 비탈. 부뚜막의 (). 물건을 얹는  . 땅이름. 산이름. 하남성 신정현(新鄭縣) 경계.

逗 : 머무를 두/피해 돌아갈 기. 머무르다. 묵음. 던지다. 헛간문짝이 없는 . 무덤흉노(匈奴) .

鬥子文 : 투누오토(鬥穀於菟) 第20回 후반 참조.

 

 

 

관중이 환공에게 고했다.

"초나라 사람이 고집이 세니 말로 굴복시킬 수는 없습니다. 진격하여 압박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8군에 영을 내려 동시에 진발하여 바로 형산(陘山)에 도착했다.  

한수(漢水)와 멀지 않은 곳에 이르자 관중이 영을 내렸다. "이곳에서 주둔하고 앞으로 나아가서는 안된다."

제후들이 모두 말했다.

"군사들이 이미 깊숙히 들어왔는데 어찌 한수를 건너 한번 죽기로 싸워보지도 않고 이곳에서 머무는 것입니까?"

관중이 말했다.

"초나라에서 이미 사자를 보낸 것은 반드시 방비가 있기 때문인 것인데 일단 군사들의 기세가 충돌한다면 다시 화해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곳에서 병사들을 주둔시키고 기세를 떨친다면 초군 진영에서는 우리의 병력이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다시 사자를 보낼 것이니 우리는 그로 인해 이루려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나라를 치기 위해서 출병하였으니 초나라를 굴복시키고 돌아간다면 그 또한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후들은 여전히 믿지 못하고 의론이 분분하여 하나가 되지 못했다. 

초나라에서는 성왕이 이미 투자문(鬥子文)을 대장으로 삼아 사나운 병사들을 선발하여 한수의 남쪽에 주둔시켜 제후들이 한수를 건너오기를 기다려 바로 맞이해 치도록 했었다. 

그러는 중에 첩보가 들어왔다. "8국의 군대가 형산(陘山)에서 주둔하고 있습니다."

자문이 진언했다.

"관중이 병법에 관한 지식이 있어 만전을 기하지 않고는 출병하지 않습니다. 지금 8국의 군대가 머무르며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반드시 도모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사자를 다시 보내 그 허실을 탐지하고 그들의 의향을 살핀 후에 싸우던 화해를 하던 계책을 정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성왕이 물었다. "이번에는 누구를 사자로 보내는 것이 좋겠소?"

자문이 대답했다. "굴완이 이미 이오와 면식이 있으니 마땅히 다시 보내야 합니다."

그러자 굴완이 이뢰었다. "주 왕실에 포모를 바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제가 전에 저희 잘못이라고 인정했습니다. 주군께서 화해하시려고 하신다면 제가 노력하겠지만 싸우고자 하신다면 유능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성왕이 말했다. "싸우든 화해를 하든 경의 재량에 맡길 것이고, 과인은 그대에게 제약을 가하지 않겠소."

마침내 굴완이 다시 제나라의 군영으로 출발했다.

 

 

 

 

畢竟齊楚如何,且看下回分解。

 

제나라와 초나라는 결국 어찌될 것인가? 다음회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