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三回. 宋公伐齊納子昭, 楚人伏兵劫盟主.
話說高虎乘雍巫統兵出城,遂伏壯士於城樓,使人請豎刁議事。豎刁不疑,昻然而來。高虎置酒樓中相待,三杯之後,高虎開言:「今宋公糾合諸侯,起大兵送太子到此,何以禦之?」 豎刁曰:「已有易牙統兵出郊迎敵矣。」 虎曰:「眾寡不敵,奈何?老夫欲借重吾子,以救齊難。」 豎刁曰:「刁何能爲?如老大夫有差遣,惟命是聽!」 虎曰:「欲借子之頭,以謝罪於宋耳!」 刁愕然遽起。虎顧左右喝曰:「還不下手!」 壁間壯士突出,執豎刁斬之。虎遂大開城門,使人傳呼曰:「世子已至城外,願往迎者隨我!」 國人素惡雍巫豎刁之爲人,因此不附無虧,見高虎出迎世子,無不攘臂樂從,隨行者何止千人。國懿仲入朝,直叩宮門,求見無虧,奏言:「人心思戴世子,相率奉迎,老臣不能阻當,主公宜速爲避難之計。」 無虧問:「雍巫豎刁安在?」 懿仲曰:「雍巫勝敗未知。豎刁已爲國人所殺矣。」 無虧大怒曰:「國人殺豎刁,汝安得不知?」 顧左右欲執懿仲,懿仲奔出朝門。無虧帶領內侍數十人,乘一小車,憤然仗劍出宮,下令欲發丁壯授甲,親往禦敵。內侍輩東喚西呼,國中無一人肯應,反叫出許多冤家出來。
正是:
恩德終須報,
冤仇撒不開。
從前作過事,
沒興一齊來。
撒 : 뿌릴 살. 뿌리다. 흩뜨리다. 흩어져 떨어지다. 놓다. 놓아주다. 펼치다.
한편 고호는 옹무가 군대를 통솔하고 성을 나간 틈을 타서, 성루에 장사들을 매복시켜놓고 사람을 시켜 수조에게 논의할 일이 있다고 만나기를 청했다. 수조는 아무 의심도 없이 당당하게 왔다.
고호는 망루 안에 술상을 마련하였다가 대접하였는데 세 잔을 권한 후 입을 열었다.
"지금 송공이 제후들을 규합하여 대군을 일으켜 태자를 이곳에 보냈는데 어떻게 막을 것인가?"
수조가 대답했다.
"이미 역아가 군사를 통솔하고 나가서 교외에서 적을 맞이했습니다."
고호가 말했다.
"중과부적인데 어찌 하겠는가? 노부가 그대에게서 중요한 것 하나를 빌려 제나라를 위난에서 구하고자 하네."
수조가 말했다.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노대부께서 사람을 보내신다면 명을 받들겠습니다."
고호가 말했다.
"그대의 머리를 빌려 송나라 군영에 바쳐 사죄하고자 할 뿐이네."
수조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고호가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어찌 손을 쓰지 않는가!"
벽 사이에 숨어있던 장사들이 갑자기 뛰쳐나와 수조를 잡아 참했다.
고호가 마침내 성문을 활짝 열고 사람을 시켜 큰 소리로 알리게 했다.
"세자께서 이미 성밖에 와 계신다. 세자를 맞이하러 가기를 원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
국인(國人)들이 평소 옹무와 수조의 사람됨을 싫어하였고 또 이들은 무휴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고호가 세자를 맞이하러 나가는 것을 보고 팔을 걷어부치고 즐겁게 따르지 않는 자가 없다보니 따르는 자들이 어찌 천명에 그치겠는가!
국의종이 입조한 후 곧바로 궁문을 두드려 무휴에게 알현을 청하고 말했다.
"인심이 세자를 추대하려고 모두 잇따라 세자를 맞이하러 가고 있는데 노신이 막을 수 없습니다. 주공께서는 빨리 위난을 피할 계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무휴가 물었다.
"옹무와 수조는 어디에 있습니까?"
국의종이 대답했다.
"옹무의 승패는 알 수 없고 수조는 이미 국인들에 의하여 살해되었습니다."
무휴가 크게 노하여 말했다.
"국인들이 수조를 죽였다면 네가 어찌 모를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좌우를 돌아보며 국의종을 잡게 하려고 하는데 국의종이 조문으로 급히 도망쳐 나갔다. 무휴는 내시 수십 명을 대동하고 작은 수레에 올라 분연히 검을 들고 궁을 나가면서 영을 내려 장정들을 불러 모아 무기를 지급하게 하고 친히 가서 적을 막겠다고 하였다.
내시들이 이리저리 다니며 장정들을 불렀으나 궁안에 한 사람도 호응하는 자가 없었고 오히려 원한을 가진 가문에서 많은 사람들만 불러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바로 다음과 같았다.
은덕을 베풀고 나면 반드시 보답을 받고,
원한을 사면 보복을 면치 못한다.
지난 날 잘못을 저질렀다면,
재앙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這些冤家,無非是高氏、國氏、管氏、鮑氏、寧氏、陳氏、晏氏、東郭氏、南郭氏、北郭氏、公孫氏、閭邱氏眾官員子姓。當初只爲不附無虧,被雍巫豎刁殺害的,其家屬人人含怨,個個銜冤,今日聞宋君送太子入國,雍巫統兵拒戰,論起私心,巴不得雍巫兵敗。又怕宋國兵到,別有一番殺戮之慘,大家懷著鬼胎。及聞高老相國殺了豎刁,往迎太子,無不喜歡,都道:「今日天眼方開!」 齊帶器械防身,到東門打探太子來信,恰好撞見無虧乘車而至,仇人相見,分外眼睜,一人爲首,眾人相助,各各挺著器械,將無虧圍住。內侍喝道:「主公在此,諸人不得無禮!」 眾人道:「那裏是我主公!」 便將內侍亂砍,無虧抵擋不住,急忙下車逃走,亦被眾人所殺。東門鼎沸,卻得國懿仲來撫慰一番,眾人方纔分散。懿仲將無虧屍首抬至別館殯殮,一面差人飛報高虎。
巴不得 : 갈망하다. 간절히 원하다. (실현 가능한 사실). 恨不得 : ~ 할 수 없어 한이다. (실현불가능한 사실)
鬼胎 : 마음속의 공포나 두려움. 나쁜 마음. 음모(陰謀). 鼎沸: 솥 안의 탕(湯)이 끓는 것처럼 요란(擾亂)하고 혼잡(混雜)함을 이르는 말.
이들 원한을 가진 가문은 바로 고씨(高氏)、국씨(國氏)、관씨(管氏)、포씨(鮑氏)、영씨(寧氏)、진씨(陳氏)、안씨(晏氏)、동곽씨(東郭氏)、남곽씨(南郭氏)、복곽씨(北郭氏)、공손씨(公孫氏)、여구씨(閭邱氏)등 많은 관원의 가문이었다.
당초에 무휴와 친하지 않았고 옹무와 수조에게 살해당한 자들이 많아 그 집안 사람들이 모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금일 송나라 군주가 태자를 호송하여 입국하였으며 옹무가 병력을 통솔하여 대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내심 옹무의 군대가 패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또 송나라 군대가 도착하여 특히 한 바탕 살육하는 참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고 대가에서는 두려움마저 품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노재상인 고호가 수조를 죽이고 태자를 맞이하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말했다.
"오늘에야 하늘이 눈을 떴구나!"
다같이 갑옷차림으로 병장기를 들고 동문으로 가서 태자가 온 소식을 들으려고 하는데 때마침 무휴가 수레를 타고 오다가 딱 마주쳤다. 원수와 마주치자 유달리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는 중에 한 사람이 앞으로 나서니 모두 힘을 합쳐 각각 병장기를 들고 무휴를 에워싸버렸다.
내시가 외쳤다.
"주군이 여기 계시니 무례를 범하지 마시오."
그러자 사람들이 말했다.
"우리 주공이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그리고 곧 바로 내시들을 어지러이 베어 넘기니 무휴가 막지 못하고 급히 수레에서 내려 도망치다가 사람들에게 피살되었다. 동문이 소란스러워지자 국의중이 달려와 한 번 어루만지고 나서여 겨우 사람들이 흩어졌다. 국의중은 무휴의 시수(屍首)를 별관으로 옮겨 빈소를 차리게 하고 한편으로 고호에게 사람을 보내 급히 상황을 알렸다.
再說雍巫正屯兵東關,與宋相持,忽然軍中夜亂,傳說:「無虧豎刁俱死,高虎相國率領國人,迎接太子昭爲君,吾等不可助逆。」 雍巫知軍心已變,心如芒刺,急引心腹數人,連夜逃奔魯國去訖。天明,高虎已到,安撫雍巫所領之眾。直至郊外,迎接世子昭,與宋、衛、曹、邾四國請和。四國退兵。高虎奉世子昭行至臨淄城外,暫停公館,使人報國懿仲整備法駕,同百官出迎。卻說公子元公子潘聞知其事,約會公子商人,一同出郭奉迎新君。公子商人咈然曰:「我等在國奔喪,昭不與哭泣之位,今乃借宋兵威,以少凌長,强奪齊國,於理不順。聞諸侯之兵已退,我等不如各率家甲,聲言爲無虧報仇,逐殺子昭。吾等三人中,憑大臣公議一人爲君,也免得受宋國箝制,滅了先公盟主的志氣。」 公子元曰:「若然,當奉宮中之令而行,庶爲有名。」 乃入宮稟知長衛姬。
咈 : 어길 불. 어기다. 거스르다. 아니다. 기뻐하지 않다.
箝 : 재갈먹일 겸. 재갈을 먹이다. 입을 다물다. (사이에)끼우다. 구하다. 항쇄(項鎖: 쇄사슬로 목을 맴)
箝制 : 말에게 재갈을 채워 부린다는 뜻으로, 남을 눌러 억제하거나 자유를 구속하여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을 말함. 겸제(鉗制).
한편 옹무는 바로 동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송나라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영 안이 밤에 소란스러운데 전하는 말이,
"무휴와 수조가 모두 죽고 상국 고호가 국인들을 거느리고 태자소를 맞아 군주로 세웠으니 우리들도 역적을 도울 수 없다."고 하였다.
옹무는 군심이 이미 변한 것을 알고 마음이 가시에 찔린 듯 쓰리고 아파 급히 심복 몇 사람을 데리고 밤새도록 노(魯)나라로 도망쳤다.
날이 밝자 고호가 도착하여 옹무가 거느리던 군사들을 위무하였다. 그리고 바로 교외로 나가 세자 소를 영접하고 송(宋), 위(衛), 조(曹)、주(邾)나라의 네 나라와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네 나라의 군대가 물러가자 고호는 세자 소를 받들어 임치(臨淄) 성밖에 도착하여 잠시 공관에 머무르게 하고는 사람을 국의중에게 보내 법가(法駕)를 정비하고 백관들과 함께 마중을 나오게 했다.
한편 공자 원(元)과 공자 반(潘)은 그 사실을 알고 공자 상인(商人)과 만나 함께 성을 나가 새로운 군주를 맞이하려고 하였다.
공자 상인은 거절하며 말했다.
"우리들은 나라 안에서 선공의 상을 치렀는데 세자 소는 함께 빈소에서 곡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송나라 군대의 위세를 빌어 나이가 적으면서도 나이 많은 공자들을 능멸하며 제나라를 강탈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듣건대 제후들의 군대가 이미 물러갔으니 우리들이 각각 가병들을 무장시킨 후 인솔하여 무휴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며 세자 소를 죽입시다. 그런 후에 우리 세 사람 중 대신들의 공의에 따라 한 사람이 군주가 된다면 송나라로부터 받을 속박도 면하게 될 것이며 사라졌던 선공의 맹주의 기백도 유지될 것입니다."
공자 원이 말했다.
"그렇다면 마땅히 중궁의 영을 받들어 행하여야 명분이 서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궁으로 들어가 큰 위희(長衛姬)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長衛姬泣曰:「汝能爲無虧報仇,我死無恨矣!」 即命糾集無虧舊日一班左右人眾,合著三位公子之黨,同拒世子。豎刁手下亦有心腹,欲爲其主報仇,也來相助,分頭據住臨淄城各門。國懿仲畏四家人眾,將府門緊閉,不敢出頭了。高虎謂世子昭曰:「無虧豎刁雖死,餘黨尙存,況有三公子爲主,閉門不納。若欲求入,必須交戰,儻戰而不勝,前功盡棄。不如仍走宋國求救爲上。」 世子昭曰:「但憑國老主張。」 高虎乃奉世子昭復奔宋國。宋襄公纔班師及境,見世子昭來到,大驚,問其來意。高虎一一告訴明白。襄公曰:「此寡人班師太早之故也。世子放心,有寡人在,何愁不入臨淄哉?」 即時命大將公孫固增添車馬。(先前有衛、曹、邾三國同事,止用二百乘,今日獨自出車,加至四百乘。)公子蕩爲先鋒,華御事爲合後,親將中軍,護送世子,重離宋境,再入齊郊。時有高虎前驅,把關將吏,望見是高相國,即時開門延入,直逼臨淄下寨。宋襄公見國門緊閉,吩咐三軍准備攻城器具。城內公子商人謂公子元公子潘曰:「宋若攻城,必然驚動百姓。我等率四家之眾,乘其安息未定,合力攻之。幸而勝固善,不幸而敗,權且各圖避難,再作區處。强如死守於此,萬一諸侯之師畢集,如之奈何?」 元潘以爲然。
큰 위희(長衛姬)가 울면서 말했다.
"그대들이 무휴의 원수를 갚아준다면 나는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즉시 명을 내려 지난 날 무휴의 주변에 있던 무리들을 규합하고 세 공자의 무리와 합쳐 함께 세자에 항거하게 하였다. 수조의 수하에도 심복이 있어 그 주인의 복수를 위해 와서 도왔는데 임치성의 각 문에 나누어 웅거하였다. 국의중은 네 가문의 무리를 두려워하여 부중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감히 나가지 못했다.
고호가 세자에게 말했다.
"무휴와 수조가 죽었다 해도 그 잔당이 아직 남아 있는데 하물며 세 공자마저 군주가 되려고 문을 닫아 걸고 세자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만약 도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반드시 교전하게 될 것이고 만약 싸우다가 지기라도 한다면 지난 공도 모두 없어질 것입니다. 차라리 송나라로 달려가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세자 소가 말했다.
"저는 노대신(老大臣)이 하시는대로 따를 뿐입니다."
마침내 고호는 세자 소를 받들어 다시 송나라로 달려갔다. 송양공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 막 국경에 도달하던 참인데 세자 소가 나타난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달려 온 뜻을 물었다. 고호가 일일이 고하며 솔직하게 하소연했다.
양공이 말했다.
"이 사태는 과인의 반사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네. 세자는 마음을 놓으라. 과인이 있는데 어찌 임치성에 들어가지 못할까 근심하는가?"
즉시 대장 공손고(公孫固)에게 명을 내려 병거(兵車)를 늘리게 하였다. - 앞서 위(衛)、조(曹)、주(邾) 세 나라와 함께 일을 도모할 때에는 송나라에서 200승만을 출동시켰기 때문에 이제 독자적으로 병거를 출동시키게 되자 400승으로 늘리려고 한 것이다. - 그리하여 공자 탕(蕩)을 선봉으로 삼고, 화어사(華御事)를 후군으로 삼아, 송양공은 친히 중군을 거느리고 세자를 호송하며 다시 송나라 국경을 떠나 제나라 도읍성 임치의 교외로 들어갔다.
그때 고호가 앞장서서 달려갔었는데 관문을 지키던 장수와 관리들이 고상국임을 알아보고 바로 관문을 열고 맞아들였고, 송양공의 군대는 바로 임치성을 압박하며 영채를 세웠다. 송양공은 도성 성문이 견고하게 닫혀있는 것을 보고 삼군에 분부하여 성을 공격할 장비를 준비하도록 했다.
성안에서는 공자 상인이 공자 원과 공자 반에게 말했다.
"송나라 군대가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백성들이 놀라 동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네 집안의 가병을 거느리고 송군이 안정을 찾기 전에 힘을 합해 공격해야 합니다. 다행히 승리가 굳어지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패한다면 잠시 피했다가 형편에 따라 다시 일어나면 될 것입니다.
이곳을 사수하다가 만일 제후들의 군대가 다시 모두 모인다면 어찌 하겠습니까?"
공자 원과 공자 반도 그렇다고 여겼다.
乃於是日,夜開城門,各引軍出來劫宋寨,不知虛實,單劫了先鋒公子蕩的前營。蕩措手不及,棄寨而奔。中軍大將公孫固,聞前寨有失,急引大軍來救。後軍華御事,同齊國老大夫高虎,亦各率部下接應。兩下混戰,直至天明。四家黨羽雖眾,各爲其主,人心不齊,怎當得宋國大兵。當下混戰了一夜,四家人眾,被宋兵殺得七零八落。公子元恐世子昭入國,不免於禍,乘亂引心腹數人,逃奔衛國避難去訖。公子潘公子商人收拾敗兵入城。宋兵緊隨其後,不能閉門,崔夭爲世子昭御車,長驅直入。上卿國懿仲聞四家兵散,世子已進城,乃聚集百官,同高虎擁立世子昭即位。即以本年爲元年,是爲孝公。孝公嗣位,論功行賞,進崔夭爲大夫。大出金帛,厚犒宋軍。襄公留齊境五日,方纔回宋。時魯僖公起大兵來救無虧,聞孝公已立,中道而返,自此魯齊有隙。不在話下。
黨羽 : 패거리. 도당.
마침내 이날 밤 성문을 열고 각각 군사를 이끌고 나가 송나라 군영을 쳤으나 그 허실(虛實)을 알지 못해 선봉인 공자 탕의 앞 영채를 쳤을 뿐이었다. 공자 탕은 미처 대응치 못하고 영채를 버리고 도주했으나 중군대장 공손고가 선봉군의 영채를 잃었다는 소식에 급히 대군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후군 장수 화어사도 제나라 노대부 고호와 함께 각 부하 병력을 이끌고 접응하여 양군이 혼전을 벌였는데 곧 날이 밝았다.
네 집안의 가병들은 비록 그 수는 많았지만 각 주인을 위해 싸우다보니 마음이 하나가 되지 못했는데 어찌 송나라 대군을 당해낼 수 있었겠는가! 하룻 밤 혼전으로 네 집안의 가병들은 송나라 병사들에 의하여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되어버렸다.
공자 원은 세자 소가 도성에 들어오면 화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 어지러움을 틈타 심복 몇 사람을 이끌고 위(衛)나라로 난을 피해 망명했다. 공자 반과 공자 상인은 패잔병을 이끌고 성으로 들어갔는데 송나라 병사들의 추격이 너무 급하다 보니 성문을 닫을 수가 없었다.
최요(崔夭)가 태자 소가 탄 병거를 몰아 깊숙히 곧 바로 들어갔다. 상경 국의중은 네 집안의 가병들이 모두 패하여 흩어졌고 세자가 이미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백관을 소집하여 고호와 함께 세자 소를 옹립하여 제나라의 군주로 즉위하게 하였다.
그 해를 원년으로 삼으니 바로 효공(孝公)이다. 효공이 즉위하자 논공행상을 실시하여 최요를 승진시켜 대부로 삼았다. 금과 비단을 크게 풀어 송나라 병사들을 후하게 호궤하였으며, 송양공은 제나라의 국경에서 5일간 머물다가 마침내 송나라로 돌아갔다.
당시 노(魯)나라 희공(僖公)은 대병을 일으켜 무휴를 구원하려고 했으나 효공이 이미 옹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도중에 돌아갔는데 이때부터 노나라와 제나라 사이에 균열이 생겼음은 말할 것도 없다.
再說公子潘與公子商人計議,將出兵拒敵之事,都推在公子元身上。國高二國老,明知四家同謀,欲孝公釋怨修好,單治首亂雍巫、豎刁二人之罪,盡誅其黨,餘人俱赦不問。是秋八月,葬桓公於牛首堈之上,連起三大墳。以晏蛾兒附葬於旁,另起一小墳。又爲無虧公子元之故,將長衛姬少衛姬兩宮內侍宮人,悉令從葬,死者數百人。後至晉永嘉末年,天下大亂,有村人發桓公塚,塚前有水銀池,寒氣觸鼻,人不敢入,經數日,其氣漸消。乃牽猛犬入塚中,得金蠶數十斛,珠襦玉匣,繒綵軍器,不可勝數,塚中骸骨狼藉,皆殉葬之人也。足知孝公當日葬父之厚矣。
亦何益哉!髯仙有詩云:
疑塚三堆峻似山,
金蠶玉匣出人間。
從來厚蓄多遭發,
薄葬須知不是慳。
堈 : 언덕 강. 언덕. 항아리. 襦 : 저고리 유. 저고리. 속옷. 턱받이. 慳 : 아낄 간. 아끼다. 인색하다. 망설이다. 감추다.
永嘉 : 위진남북조시대 서진의 회제가 사용한 연호(307〜313년).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서진(西晉)의 제3대 황제인 회제(懷帝) 사마치
(司馬熾, 재위 307〜311) 때의 연호이다. 307년 음력 1월부터 313년 음력 4월까지 7년 동안 사용되었다.
회제는 307년 1월에 형인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이 죽자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는 307년 음력 1월에 연호를 ‘광희
(光熙)’에서 ‘영가(永嘉)’로 바꾸고, 그 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영가 연간인 311년(영가 5)에 서진은 수도인 낙양이 전조(前趙)의 유요(劉曜)에게 함락되고, 회제도 전조의 수도인 평양(平陽)
으로 붙잡혀가면서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이를 ‘영가의 난[永嘉之亂]’이라고 부른다.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金蠶 : 누에의 유충을 본뜬 청동도금의 소품(小品).
실물 크기인 것, 약간 유형화된 것 등이 있다. 《삼보고사(三補故事)》에 보면 진시황릉에 ‘금잠 30 채반’을 넣었다고 기록하고 있
고, 山西省 陽高의 경영묘(耿嬰墓)에는 칠관(漆棺) 안에 탄화(炭化)된 누에가 많이 들어 있었다.누에의 모습이 변하는 데에서 부활
의례(儀禮)에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秦 ·漢나라의 무덤에서 주로 발견되며, 최근에 당나라 때의 분묘에서 나온 일도 있다.
<네이버지식백과/두산백과>
한편 공자 반은 공자 상인과 계책을 논의하고 가병을 출동시켜 세자 소를 대적한 일은 모두 공자 원의 소행이라고 미뤄버렸다. 국의중과 고호 두 원로는 네 집안이 함께 공모한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나 효공이 형제간에 모든 원한을 풀고 사이좋게 지내고자 하여, 난을 일으킨 수괴인 옹무와 수조 두 사람의 죄를 다스려 그 무리를 모두 처형하였을 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죄를 사면하고 불문에 부쳤다.
그해 가을 8월에 우수(牛首) 언덕 위에 환공을 장사지내니 연이어 세 개의 큰 분묘가 생겨났다. 안아아도 그 곁에 장사지내 따로 작은 묘 하나가 생겼다. 또 무휴와 공자 원 때문에 변고가 일어났으므로 큰 위희와 작은 위희의 두 궁의 내시와 궁인들을 모두 순장시키게 하니 죽은 자가 수백명에 달했다.
후에 서진(西晉) 영가 말년, 천하 대란이 일어났을 때 한 시골사람이 환공의 묘지를 발견하였는데 무덤 앞에 수은으로 된 연못이 있어 찬 기운이 코를 자극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감히 들어갈 수 없었으나 며칠이 지나자 그 기운이 점차 소멸되었다. 그리하여 사나운 개를 이끌고 무덤 안으로 들어가 얻은 것이 금잠(金蠶) 수십 말(斛), 구슬장식의 저고리가 담긴 옥갑(玉匣), 채색 비단과 군기(軍器)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무덤 안에 해골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는데 모두 순장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로써 효공이 당시 부친인 환공을 후하게 장사지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후히 장사지냈다 해도 또 무슨 이로움이 있었으리오!
염선이 시를 지었다.
아마도 세 무덤은 산처럼 높았으나,
그 안의 금잠과 옥갑등 보물은 사람이 반출하였도다.
옛부터 후하게 장사를 지냈어도 발굴당한 일이 많았으니,
간소한 장례라 해서 모름지기 인색한 것이 아니로다.
話分兩頭。卻說宋襄公自敗了齊兵,納世子昭爲君,自以爲不世奇功,便想號召諸侯,代齊桓公爲盟主。又恐大國難致,先約滕、曹、邾、鄫小國,爲盟於曹國之南。曹邾二君到後,滕子嬰齊方至。宋襄不許嬰齊與盟,拘之一室。鄫君懼宋之威,亦來赴會,已踰期二日矣。宋襄公問於群臣曰:「寡人甫倡盟好,鄫小國,輒敢怠慢,後期二日,不重懲之,何以立威!」 大夫公子蕩進曰:「向者齊桓公南征北討,獨未服東夷之眾。君欲威中國,必先服東夷。欲服東夷,必用鄫子。」 襄公曰:「用之何如?」 公子蕩曰:「睢水之次,有神能致風雨。東夷皆立社祠之,四時不缺。君誠用鄫子爲犧牲,以祭睢神,不惟神將降福,使東夷聞之,皆謂君能生殺諸侯,誰不聳懼來服?然後藉東夷之力,以征諸侯,伯業成矣。」 上卿公子目夷諫曰:「不可,不可!古者小事不用大牲,重物命也,況於人乎?夫祭祀,以爲人祈福也。殺人以祈人福,神必不饗。且國有常祀,宗伯所掌。睢水河神,不過妖鬼耳!夷俗所祀,君亦祀之,未見君之勝於夷也。而誰肯服之?齊桓公主盟四十年,存亡繼絶歲, 有德施於天下。今君纔一擧盟會,而遂戮諸侯以媚妖神,臣見諸侯之懼而叛我,未見其服也。」 公子蕩曰:「子魚之言謬矣!君之圖伯與齊異。齊桓公制國二十餘年,然後主盟,君能待乎?夫緩則用德,急則用威,遲速之序,不可不察也。不同夷,夷將疑我;不懼諸侯,諸侯將玩我。內玩而外疑,何以成伯?昔武王斬紂頭,懸之太白旗,以得天下。此諸侯之行於天子者也,而何有於小國之君?君必用之。」
睢 : 물이름 수/부릅떠 볼 휴. 강이름. 부릅떠 보다. 성을 내어 사나운 눈으로 봄. 놀라 휘둥그런 눈으로 봄. 우러러보다. 헐뜯다. 비방함.
한편 송양공은 스스로 제나라 군을 물리치고 세자 소를 제나라 군주로 세웠는데, 스스로 그 일을 불세출의 큰 공으로 여겨 곧 제후들을 소집하고 제환공에 이어 맹주가 되려고 생각했다. 또 큰 나라는 참석하기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먼저 등(滕)、조(曹)、주(邾)、증(鄫)나라등 작은 나라와 약속하고 조나라의 남쪽에서 회맹하기로 하였다. 조나라와 주나라의 군주가 도착한 후에 등나라 군주(子爵이라 藤子라 함) 영제(嬰齊)가 도착했다. 송양공은 영제가 회맹에 참여하는 것을 불허하고 방에 가두었다. 증(鄫)나라 군주는 송양공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회맹에 왔으나 약속일이 이미 2일이 지났었다.
송양공이 신하들에게 물었다.
"과인이 지금 화친(和親)을 도모하고 있는데 증나라 같은 작은 나라에서 감히 태만히 여겨 이틀이나 늦게 참석한단 말인가? 엄중하게 처벌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권위를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대부인 공자 탕이 진언했다.
"지난 날 제환공이 남으로 초나라를 치고 북의 산융을 정벌할 때 오직 동이(東夷)의 무리만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주군께서 중국에 위엄을 떨치시려면 반드시 먼저 동이를 굴복시켜야 하고 동이를 굴복시키시려면 반드시 증나라 군주를 이용하셔야 합니다."
양공이 물었다.
"그를 어떻게 이용한단 말인가?"
공자 탕이 말했다.
"수수(睢水) 속에는 바람과 비를 부를 수 있는 신이 있습니다. 동이족은 모두 사당을 세워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사계절을 거르지 않습니다. 주군께서 증나라 군주를 희생물로 삼아 수신(睢神)에게 제사를 지내신다면 수신이 복을 내릴 뿐만 아니라 동이족에게 알려준다면 모두 주군께서 제후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니 누가 두려워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후에 동이족의 힘을 빌려 제후들을 친다면 주군께서는 패업을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상경인 공자 목이가 간했다.
"불가합니다. 불가합니다. 옛날에는 작은 일에 큰 희생을 쓰지 않았던 것은 생명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인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는 어떻겠습니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사람을 위하여 복을 내리기를 비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여 사람의 복을 빌게 되면 신은 반드시 흠향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나라에서 항상 제사를 받드는 일은 종손이 관장하고 있습니다. 수수(睢水)의 하신(河神)은 요괴에 불과할 뿐입니다. 수수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오랑캐의 풍속인데도 주군께서 제사를 지내신다면 주군께서 오랑캐보다 낫다고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누가 복종하려고 하겠습니까? 제환공이 제후들의 회맹을 40여년 동안 주도한 것은, 망한 나라를 존속시키게 하고 끊어진 제사는 대를 잇도록 하여 천하에 덕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군께서는 겨우 한 차례 회맹을 주도하였을 뿐인데 제후를 죽여 요사한 신에게 아첨하려고 하시니, 신이 보건대 제후들은 그 일을 두려워하여 우리를 배반하고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공자 탕이 말했다.
"자어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주군께서 패업을 도모하는 것은 제환공과는 다릅니다. 제환공은 나라를 다스린지 20여 년이 지난 후에야 회맹을 주도하였는데 주군께서는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여유가 있다면 덕을 베풀면 되지만 급하다면 위엄을 보여야 합니다. 여유있게 할 것인가 급히 해야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은 상황을 살펴 행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동이가 하는대로 하지 않으면 동이는 우리를 의심하게 될 것이며,
제후들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희롱하려고 할 것입니다. 안에서는 희롱당하고 밖에서는 의심을 받는데 어찌 패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옛날 주무왕이 은나라 주왕(紂王)의 목을 참하여 태백기에 걸고나서 천하를 얻었습니다. 이 일은 제후의 신분으로 천자에게 행한 일인데, 작은 나라의 군주를 어찌 살려두어야 하겠습니까? 주군께서는 꼭 증나라 군주를 제물로 쓰셔야 합니다."
襄公本心急於欲得諸侯,遂不聽目夷之言,使邾文公執鄫子殺而烹之,以祭睢水之神。遣人召東夷君長,俱來睢水會祀。東夷素不習宋公之政,莫有至者。滕子嬰齊大驚,使人以重賂求釋,乃解嬰齊之囚。曹大夫僖負羈謂曹共公襄曰:「宋躁而虐,事必無成,不如歸也。」 共公辭歸,遂不具地主之禮。襄公怒,使人責之曰:「古者國君相見,有脯資餼牢,以修賓主之好。寡君逗留於君之境上,非一日矣。三軍之眾,尙未知主人之所屬。願君圖之!」 僖負羈對曰:「夫授館致餼,朝聘之常禮也。今君以公事涉於南鄙,寡人亟於奔命,未及他圖。今君責以主人之禮,寡君愧甚,惟君恕之!」 曹共公遂歸。襄公大怒,傳令移兵伐曹。公子目夷又諫曰:「昔齊桓公會盟之跡,遍於列國,厚往薄來,不責其施,不誅其不及,所以寬人之力,而恤人之情也。曹之缺禮,於君無損,何必用兵?」 襄公不聽,使公子蕩將兵車三百乘,伐曹圍其城。僖負羈隨方設備,與公子蕩相持三月,蕩不能取勝。是時,鄭文公首先朝楚,約魯、齊、陳、蔡四國之君,與楚成王爲盟於齊境。宋襄公聞之大驚。一來恐齊魯兩國之中,或有倡伯者,宋不能與爭,二來又恐公子蕩攻曹失利,挫了銳氣,貽笑於諸侯,乃召蕩歸。曹共公亦恐宋師再至,遣人至宋謝罪。自此宋曹相睦如初。
逗 : 머무를 두/피해 돌아갈 기. 머무르다. 묵음. 던지다. 헛간. 문짝이 없는 광. 무덤. 흉노(匈奴)의 말.
餼牢 : 음식물을 보낼 때 익힌 것은 옹(饔), 날 것은 희(餼)라 하였다. 희에는 소, 양, 돼지, 기장(黍, 梁, 稷), 벼(禾)등을 썼다.
양공의 본심은 제후들의 마음을 얻는 것이 급했기 때문에 목이의 말을 듣지 않고 주(邾)나라 문공(文公)으로 하여금 증(鄫)나라 군주를 잡아 죽이게 하고 삶아서 수수(睢水)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사람을 보내 동이족의 군장들에게 모두 와서 수수의 제사에 참석하라고 했으나, 동이족은 평소 송공의 정사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석한 자가 없었다. 등나라의 군주 영제는 크게 놀라 사람을 시켜 후하게 뇌물을 바치고 석방을 요구하여 풀려나게 되었다.
조(曹)나라 대부 희부기(僖負羈)가 조나라 공공(共公) 양(襄)에게 말했다.
"송양공은 성급하고 잔인하여 반드시 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돌아가는 것이 낫겠습니다."
공공이 송양공에게 주인으로서의 예물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송양공이 노하여 사람을 보내 꾸짖으며 말했다.
"옛날 군주들이 서로 만날 때에는 포와 희뢰(餼牢)를 바쳐 주인과 손님이 우의를 다졌습니다. 저희 군주께서 귀국의 국경부근에서 머무신지가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삼군의 병사들이 주인이 누군지 아직도 모르고 있습니다. 군주께서는 잘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희부기가 대답했다.
"관사를 제공하고 희뢰를 보내는 것은 조정에서 초대했을 때 행하는 예입니다. 지금 군주께서는 공무로 저희 나라 남쪽 변방에 오셨기 때문에 저희 군주께서는 명을 받들어 급히 오느라 미처 다른 일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군주께서 저희 군주가 주인의 예를 다하지 못했다고 책하시니 저희 군주께서는 매우 부끄럽게 여기십니다. 군주의 용서를 바랄 뿐입니다."
그리고는 조나라 공공은 돌아가버렸다. 양공은 크게 노하여 영을 전해 군사를 보내 조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자 공자 목이가 또 간했다.
"옛날 제환공이 회맹을 주도한 행적을 보면 열국에 두루 돌아다니며 후한 예물을 가지고 갔는데도 예물을 적게 가져 왔다고 책하지 않았으며 기일에 맞게 오지 않았어도 벌하지 않은 것은 남에게 관대하게 베푸는 힘이 있었으며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나라 군주가 결례를 범했다 해도 주군께 손해를 끼치지 않았는데 어찌 꼭 군대를 동원해야 합니까?"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고 공자 탕으로 하여금 병거 300승을 이끌고 조나라 도읍을 포위하여 치게 하였다. 그러나 희부기가 곧바로 방어진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공자 탕과 3개월동안 대치했어도 공자 탕이 승리할 수 없었다.
그때 정(鄭)나라 문공(文公)은 맨 먼저 초(楚)나라에 조회(배알)하고 노(魯), 제(齊), 진(陳), 채(蔡) 네 나라의 군주와 약속하여 초나라 성왕(成王)과 더불어 제나라 국경에서 회맹하기로 하였다. 송양공은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하나는 제(齊)나라와 노(魯)나라 두 나라중 한 나라가 혹 패자로 추대된다면 송나라로서는 더불어 다툴 수 없었고, 둘째는 공자 탕이 조나라를 치고 있는데 손해를 보고 예기가 꺾이기라도 한다면 제후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 두려워 공자 탕을 불러들였다.
조나라 공공도 송나라 군대가 다시 올까 두려워 송나라에 사람을 보내 사죄했다. 이로부터 송나라와 조나라는 처음과 같이 화목하게 지냈다.
再說宋襄公一心求伯,見小國諸侯,紛紛不服,大國反遠與楚盟,心中憤急,與公子蕩商議。公子蕩進曰:「當今大國,無過齊楚。齊雖伯主之後,然紛爭方定,國勢未張。楚僭王號,乍通中國,諸侯所畏。君誠不惜卑詞厚幣,以求諸侯於楚,楚必許之。借楚力以聚諸侯,復借諸侯以壓楚,此一時權宜之計也。」 公子目夷又諫曰:「楚有諸侯,安肯與我?我求諸侯於楚,楚安肯下我?恐爭端從此開矣!」 襄公不以爲然。即命公子蕩以厚賂如楚,求見楚成王。成王問其來意,許以明年之春,相會於鹿上之地。公子蕩歸報襄公,襄公曰:「鹿上齊地,不可不聞之齊侯。」 復遣公子蕩如齊修聘,述楚王期會之事。齊孝公亦許之。時宋襄公之十一年,乃周襄王之十二年也。
송양공은 오로지 패자가 되려는 마음 뿐인데 작은 나라의 제후들을 보면 분분히 복종하지 않고 큰 나라는 초나라와의 회맹으로 오히려 더 멀어지게 되자 마음이 분하기도 하고 급하기도 해서 공자 탕과 상의했다.
공자 탕이 말했다.
"지금 큰 나라로서는 제(齊)나라와 초(楚)나라보다 나은 나라는 없습니다. 제나라는 패자인 환공이 죽고 분쟁이 평정되었다지만 국세가 회복되지 못했으며 초나라는 왕호를 참칭한 일이 순식간에 중국에 알려져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공손한 말로 후한 뇌물을 써서 초나라에 제후들을 소집하기를 부탁한다면 초나라에서는 반드시 허락할 것입니다. 초나라의 힘을 빌려 제후들을 모으고 또 제후들의 힘을 빌려 초나라를 압박한다면 이는 일시적으로 쓸 수 있는 임기응변의 계책이 될 것입니다."
공자 목이가 또 간했다.
"초나라에서 제후들을 소집해 모이게 한다고 해도 어찌 우리를 돕겠습니까? 우리가 초나라에 제후들을 소집해 달라고 부탁한다고 해도 초나라에서 어찌 우리나라의 부탁을 들어주겠습니까? 이로 인해서 초나라와 분쟁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양공은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즉시 공자 탕에게 명을 내려 후하게 뇌물을 준비해서 초성왕(楚成王)을 찾아보게 하였다.
초성왕이 찾아온 뜻을 묻자 다음해 봄에 녹상(鹿上)이라는 곳에서 제후들의 회맹을 개최하기로 약속했다.
공자 탕이 귀국해서 복명하자 양공이 말했다.
"녹상은 제나라의 땅이니 제나라 제후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다."
다시 공자 탕을 제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초왕과 회맹하는 일을 알렸다. 제나라 효공도 허락했다.
그때가 송양공 11년이며 주양왕(周襄王) 12년이었다.
次年春正月,宋襄公先至鹿上,築盟壇以待齊楚之君。二月初旬,齊孝公始至。襄公自負有納孝公之功,相見之間,頗有德色。孝公感宋之德,亦頗盡地主之禮。又二十餘日,楚成王方到。宋齊二君接見之間,以爵爲序。楚雖僭王號,實是子爵。宋公爲首,齊侯次之,楚子又次之。這是宋襄公定的位次。至期,共登鹿上之壇,襄公毅然以主盟自居,先執牛耳,並不謙讓。楚成王心中不悅,勉强受歃。襄公拱手言曰:「茲父忝先代之後,作賓王家,不自揣德薄力微,竊欲修擧盟會之政。恐人心不肅,欲借重二君之餘威,以合諸侯於敝邑之盂地,以秋八月爲期。若君不棄,倡率諸侯,徼惠於盟,寡人願世敦兄弟之好。自殷先王以下,咸拜君之賜,豈獨寡人乎?」 齊孝公拱手以讓楚成王,成王亦拱手以讓孝公,二君互相推讓,良久不決。襄公曰:「二君若不棄寡人,請同署之。」 乃出徵會之牘,不送齊侯,卻先送楚成王求署。孝公心中亦懷怏怏。楚成王擧目觀覽,牘中敘合諸侯修會盟之意,效齊桓公衣裳之會,不以兵車。牘尾宋公先已署名。楚成王暗暗含笑,謂襄公曰:「諸侯君自能致,何必寡人?」 襄公曰:「鄭許久在君之宇下,而陳蔡近者復受盟於齊,非乞君之靈,懼有異同。寡人是以借重於上國。」 楚成王曰:「然則齊君當署,次及寡人可也。」 孝公曰:「寡人於宋,猶宇下也,所難致者,上國之威令耳。」 楚王笑而署名,以筆授孝公。孝公曰:「有楚不必有齊。寡人流離萬死之餘,幸社稷不隕,得從末歃爲榮,何足重輕,而褻此簡牘爲耶?」 堅不肯署。論齊孝公心事,卻是怪宋襄公先送楚王求署,識透他重楚輕齊,所以不署。宋襄公自負有恩於齊,卻認孝公是衷腸之語,遂收牘而藏之。三君於鹿上又敘數日,丁寧而別。
髯仙有詩嘆曰:
諸侯原自屬中華,
何用紛紛乞楚家?
錯認同根成一樹,
誰知各自有丫叉?
德色 : 남에게 은혜를 베푼 것을 자랑하는 말이나 태도.
爵位 : 공작(公爵), 후작(侯爵), 백작(伯爵), 자작(子爵), 남작(男爵)의 순으로 서열이 정해져 있었는데 이에 따라 군주의 명칭도 작위에
따라 달랐다. 송나라는 공작국이므로 송공(宋公), 제나라 효공은 후작국이므로 제후(齊侯), 초나라는 자작국이므로 초자(楚子)
가 된다.
自居 : 자처하다. 스스로 …라고 생각하다. 행세하다.
作賓王家 : 周武王이 은나라를 멸하고 그 유민들을 송 땅으로 옮긴 다음에 紂王의 서형인 微子 開를 송나라 군주로 봉할 때 그 작위를
제후들의 맨 위인 공(公)에 봉한 것.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武王崩, 成王少, 周公旦代行政當國. 管、蔡疑之, 乃與武庚作亂, 欲襲成王、周公. 周公既承成王命誅武庚, 殺管叔, 放蔡叔,
乃命微子開代殷後, 奉其先祀, 作微子之命以申之, 國于宋. 微子故能仁賢, 乃代武庚, 故殷之余民甚戴愛之.
餘威 : 이전의 위세로 말미암아 은연 중에 드러나는 위엄.
揣 : 잴 췌(취)/둥글게 할 단. 재다. 높이를 측량함. 생각하다. 헤아림. 불리다. 단련함. 시험해 보다. [단] 둥글게 하다.
徼 : 구할 요(교). 구하다. 훔치다. 빼앗음. 순찰하다. 순라꾼. 막다. 차단함. 샛길. 교외의 길. 미묘. 심원한 경지. 변방의 경계.
牘 : 편지 독. 편지. 죽간. 책. 서적. 공문서. 악기 이름. 대나무로 만들어 그 끝에 두 구멍을 내고, 땅을 두드려 소리를 냄.
衣裳之會 : 나라사이의 평화로운 회합을 말하며, 병거(兵車)를 동원한 전쟁을 위한 회맹과 대비되는 뜻으로 쓴다.
승거(乘車)를 타고 참석하는 회맹, 즉 승거지회(乘車之會)라고도 한다. <史記 卷32. 齊太公世家>
衷腸 : 속마음. 진심. 의중. 丫 : 가닥 아. 가닥. 가장귀(나뭇가지의 갈라진 부분). 총각. 포크.
다음해 봄 정월이 되자 송양공은 먼저 녹상으로 가서 제후들과 회맹할 제단을 쌓고 제나라와 초나라 군주를 기다렸다. 2월 초순이 되자 제나라 효공이 비로소 도착하였는데 양공은 효공을 군주로 세운 공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만나는 동안 매우 자랑스러운 기색이었다. 효공도 과거 송양공이 베푼 은덕에 감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시 땅 주인으로서의 예를 매우 극진히 베풀었다.
또 10여일이 지나자 초성왕이 도착했다. 송나라와 제나라의 군주가 만나는 동안에는 벼슬의 서열에 따랐었다. 초성왕이 왕을 참칭했다 해도 벼슬은 자작이라 송나라 군주가 수위가 되고 그 다음이 제나라 군주, 초성왕이 그 다음이었다. 이것은 송양공이 미리 정해놓은 작위에 따른 서열이었다.
약속한 날이 되자 함께 녹상의 제단에 올랐는데 송양공은 의연하게 스스로 회맹을 주도하여 먼저 희생으로 바쳐진 소의 귀를 잡아 전혀 겸양의 뜻을 보이지 않았다. 초성왕은 내심 불쾌하여 억지로 삽혈의식을 치렀다.
양공이 공수하며 말했다.
"황공하옵게도 주 왕실의 빈객이 되어 벼슬을 받은 선대의 후예로 스스로 덕이 박하고 힘이 약한 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심 회맹을 맺어 천하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심이 따르지 않을까 두려워 막중한 두 나라의 위세를 빌려 저희 나라 우(盂)라는 곳에서 가을 8월에 제후들과 회맹을 갖고자 합니다. 군주들께서 제 뜻을 버리지 않고 앞장서서 제후들을 통솔해 주신다면 회맹의 혜택으로 과인은 대를 이어 돈독한 형제의 우의를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은왕조로부터 선왕이후 모두 군왕의 은혜를 입은 것이 어찌 과인 뿐이겠습니까?"
제나라 효공이 공수하며 초성왕에게 양보하니 성왕도 역시 공수하며 제효공에게 양보하여 두 군주가 서로 미루며 양보하다보니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그러자 양공이 말했다.
"두 분 군주께서 과인의 뜻을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함께 서명해 주십시오."
그리고 회의록을 내밀었는데 제후(齊侯)에게 주지 않고 초성왕에게 먼저 주어 서명을 요구했다. 효공도 마음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초성왕이 바라보니 회의록 안에는 제후들과 회맹하는 것을 합의한다는 뜻이 기록되어 있고 제환공의 의상지회(衣裳之會)를 본받아 병거를 거느리지 않고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회의록 말미에 송공이 먼저 서명했다.
초성왕은 암암리에 미소를 머금고 양공에게 말했다.
"제후들은 군주께서 스스로 참석하게 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과인에게 하라고 하십니까?"
양공이 대답했다.
"정(鄭)나라와 허(許)나라는 오랫동안 군주의 휘하에 있었으며 진(陳)나라와 채(蔡)나라는 근래에 제나라와 다시 동맹을 맺었으니 군주들께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면 회맹에 함께 하지 못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과인은 이때문에 상국의 위세를 좀 빌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초성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제나라 군주께서 서명하시는 것이 당연하며 그 다음에 과인이 서명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효공이 말했다.
"과인은 송나라 휘하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회맹에 참석을 기대하기 어려운 나라는 상국에서 위력으로 영을 내리면 그 뿐일 것입니다."
초성왕이 웃으면서 서명하고 붓을 효공에게 주니 효공이 말했다.
"초나라에서 서명하셨으니 제나라도 반드시 서명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인은 떠돌아 다니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다행하게도 사직이 끊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석에서 삽혈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영광인데 어찌 경중을 따져 이 목간(회의록)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굳이 서명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제효공의 심사를 논하자면 송양공이 먼저 초왕에게 서명을 요구한 것이 정상적이지 않았고, 송양공이 초나라를 중히 여기고 제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있음을 간파하였기 때문에 서명하지 않았다.
송양공은 제나라에 은혜를 베풀었다는 자부심이 있어 효공의 말을 진심에서 나운 것으로 알고 마침내 회의록을 거두어 보관했다.
세 나라 군주는 녹상에서 또 며칠을 더 보내고 헤어졌다.
염선이 시를 지어 탄식했다.
제후는 원래 스스로 중국에 속해 있는데,
어찌 분분히 초나라에 구걸하는가?
한 뿌리에서 자란 나무로 착각하고,
누가 알았으랴? 각자가 스스로 갈라져 싸울 것을!
楚成王旣歸,述其事於令尹子文。子文曰:「宋君狂甚!吾王何以徵會許之?」 楚王笑曰:「寡人欲主中華之政久矣,恨不得其便耳。今宋公倡衣裳之會,寡人因之以合諸侯,不亦可乎?」 大夫成得臣進曰:「宋公爲人好名而無實,輕信而寡謀,若伏甲以劫之,其人可虜也。」 楚王曰:「寡人意正如此。」 子文曰:「許人以會而復劫之,人謂楚無信矣,何以服諸侯?」得臣曰:「宋喜於主盟,必有傲諸侯之心。諸侯未習宋政,莫之與也。劫之以示威,劫而釋之,又可以示德。諸侯恥宋之無能,不歸楚,將誰歸乎?夫拘小信而喪大功,非策也。」 子文奏曰:「子玉之計,非臣所及。」 楚王乃使成得臣鬥勃二人爲將,各選勇士五百人,操演聽令,預定劫盟之計。不必詳說,下文便見。
초성왕이 귀국하자 영윤인 자문(子文)에게 세 나라 군주가 회맹한 경위를 전부 소상히 설명했다.
자문이 물었다.
"송군의 광기가 심하군요! 왕께서는 어찌 회의록에 서명하셨습니까?"
초성왕이 웃으며 말했다.
"과인이 중국 정치를 주도하고자 뜻을 세운지 오래 되었으나 그 기회를 잡을 수 없는 것이 한이었소. 지금 송공이 의상지회를 외치고 있는데 과인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제후들을 규합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소?"
대부 성득신(成得臣)이 진언했다.
"송공의 사람됨이 명예를 좋아하지만 실속이 없으며 사람을 가볍게 믿고 지략이 적습니다. 갑사들을 잠복시켰다가 겁채한다면 그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초왕이 말했다.
"과인의 뜻이 바로 그와 같소."
자문이 말했다.
"회맹하기로 약속해놓고 겁채한다면 사람들이 초나라 사람은 신의가 없다고 여길 것인데 무엇으로 제후들을 복종시키겠습니까?"
성득신이 말했다.
"송공은 회맹을 주도하게 된 것을 기뻐할 것이니 반드시 제후들에게 오만한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제후들은 송공의 정치가 낯설어 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를 사로잡아 위력을 보이고 나서 그를 풀어준다면 천하에 덕을 베푸는 모습을 보일 수가 있습니다. 제후들은 회맹을 주도한 송공의 무능함을 치욕으로 여길 것인데 초나라를 따르지 않는다면 장차 누구를 따르겠습니까? 작은 신의에 구애된다면 큰 공을 잃을 것이니 좋은 계책은 아니라고 봅니다."
자문이 아뢰었다.
"자옥(성득신의 자)의 계책은 신이 미칠 바가 아닙니다."
초성왕은 마침내 성득신과 투발(鬥勃) 두 사람을 장수로 삼아 각각 용사 500명씩을 선발하고 훈련을 시키며 명을 기다리게 하고 미리 회맹장소를 겁채할 계획을 확정했다. 자세한 말을 필요치 않으니 아래 글에서 바로 보게 될 것이다.
且說宋襄公歸自鹿上,欣然有喜色,謂公子目夷曰:「楚已許我諸侯矣。」 目夷諫曰:「楚,蠻夷也,其心不測。君得其口,未得其心。臣恐君之見欺也。」 襄公曰:「子魚太多心了。寡人以忠信待人,人其忍欺寡人哉?」 遂不聽目夷之言,傳檄征會。先遣人於盂地築起壇場,增修公館,務極華麗。倉場中儲積芻糧,以待各國軍馬食費。凡獻享犒勞之儀,一一從厚,無不預備。至秋七月,宋襄公命乘車赴會。目夷又諫曰:「楚强而無義,請以兵車往。」 襄公曰:「寡人與諸侯約爲『衣裳之會』 若用兵車,自我約之,自我墮之,異日無以示信於諸侯矣。」 目夷曰:「君以乘車全信,臣請伏兵車百乘於三里之外,以備緩急何如?」 襄公曰:「子用兵車,與寡人用之何異?必不可!」 臨行之際,襄公又恐目夷在國起兵接應,失了他信義,遂要目夷同往。目夷曰:「臣亦放心不下,也要同去。」 於是君臣同至會所。楚、陳、蔡、許、曹、鄭六國之君,如期而至。惟齊孝公心懷怏怏,魯僖公未與楚通,二君不到。襄公使候人迎接六國諸侯,分館安歇,回報:「都用乘車。楚王侍從雖眾,亦是乘車。」襄公曰:「吾知楚不欺吾也!」
多心 :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지나치게 걱정이 많음. 마음이 안 놓이어 여러 가지로 생각하거나 너무 걱정을 함.
放心不下 : 마음이 놓이지 않다. 不下 : ~ 할 수 없다. 하지 않다.
한편 송양공은 녹상에서 귀국하자 기쁜 기색으로 공자 목이에게 말했다.
"초성왕이 이미 나에게 제후들을 소집해 주기로 약속했소."
그러자 목이가 간했다.
"초나라는 야만족이라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주군께서 그의 입은 얻으셨다 해도 그 마음은 얻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신은 주군께서 기만당하셨을까 두렵습니다."
양공이 말했다.
"자어는 너무 소심합니다. 과인은 남을 충심으로 믿고 대하는데 그 사람이 과인을 차마 기만하겠습니까?"
마침내 목이의 말을 불청하고 회맹을 개최한다고 격문을 작성하여 제후들에게 전달했다. 먼저 사람을 우지(盂地)에 보내 제단을 쌓고 공관을 증축하였는데 그 화려함이 극에 달했다. 창고에 말먹이와 식량을 저장하여 각국 군마의 식비로 사용하도록 준비시켰다. 모두 참가자들을 접대하고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기 위한 것들로 일일이 점검하여 후하게 미리 준비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가을 7월이 되자 송양공은 명을 내려 회맹장소로 타고 갈 수레를 병거가 아닌 일반 수레로 준비시켰다.
목이가 또 간했다.
"초나라는 강하지만 의리가 없는 나라이니 병거로 가시기 바랍니다."
양공이 말했다.
"과인이 제후들에게 의상지회로 회맹한다고 약속했는데 만약 병거를 타고 간다면 내가 스스로 약속해놓고 나 스스로 어기게 될 것이니 훗날 제후들에게 과인이 신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목이가 말했다.
"주군께서 승거를 타고 가시어 신의를 지키신다면 신이 병거 100승을 회맹장소의 3리 밖에 잠복시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양공이 말했다.
"그대가 병거를 쓴다면 과인이 쓰는 것과 어찌 다르겠소? 절대 안됩니다."
출발할 때가 되자 양공은 또 목이가 도성에서 접응할 군사를 일으킨다면 신의를 잃게 될 것이라고 염려하여 마침내 목이에게 회맹장소로 함께 가자고 했는데 목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함께 가려고 청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군신이 회맹장소로 함께 갔다. 초(楚)、진(陳)、채(蔡)、허(許)、조(曹)、정(鄭) 의 여섯 나라 군주가 기일에 맞추어 도착했다. 오직 제나라 효공만이 마음이 불편하여, 노(魯)나라 희공은 아직 초나라와 국교가 없어 두 나라의 군주가 도착하지 않았다.
양공은 접객을 임무로 하는 후인(候人)들로 하여금 6국 제후들을 영접하고 공관을 분배하여 편히 쉬게 하였는데 보고가 들어왔다.
"모두 승거를 타고 왔는데 초왕은 시종이 많은데도 역시 승거로 왔습니다."
그러자 양공이 말했다.
"나는 초왕이 나를 기만하지 않을 줄 알았노라!"
太史卜盟日之吉,襄公命傳知各國。先數日,預派定壇上執事人等。是早五鼓,壇之上下,皆設庭燎,照耀如同白日。壇之旁,另有憩息之所,襄公先往以待。陳穆公穀,蔡莊公甲午,鄭文公捷,許僖公業,曹共公襄五位諸侯,陸續而至。伺侯良久,天色將明,楚成王熊惲方到。襄公且循地主之禮,揖讓了一番,分左右兩階登壇。右階賓登,眾諸侯不敢僭楚成王,讓之居首。成得臣鬥勃二將相隨,眾諸侯亦各有從行之臣。不必細說。
송양공은 태사에게 점을 치게 하여 회맹할 날을 길일로 잡아 각 나라 군주에게 전하여 알리게 하였다. 며칠 전에 미리 제단 위에서 일을 집행할 인원등을 정하여 파견했다. 그날 일찍 북이 다섯 번 울리자 제단의 위 아래에 모두 화톳불을 설치했는데 대낮처럼 밝았다. 제단 옆에는 따로 쉬는 장소를 마련했는데 양공이 먼저 가서 대기했다. 진(陳)나라 목공(穆公) 곡(穀), 채(蔡)나라 장공(莊公) 갑오(甲午), 정(鄭)나라 문공(文公) 첩(捷), 허(許)나라 희공(僖公) 업(業), 조(曹)나라 공공(共公) 양(襄)의 다섯 제후들이 속속 도착했다. 한동안 기다리는데 날이 밝아오자 초나라 성왕 웅운(熊惲)이 막 도착했다. 송양공이 주인의 예에 따라 읍하며 한 번 양보하자 좌우로 나뉘어 양쪽 계단으로 제단에 올랐다. 오른 쪽 계단은 손님들이 올라가는데 제후들이 감히 초성왕 앞에 오르지 못하고 성왕이 앞장서도록 양보했다. 성득신과 투발의 두 장수가 따랐으며 제후들 역시 따라 오르는 신하가 있었다. 상세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左階主登,單只宋襄公及公子目夷君臣二人。方纔升階之時,論個賓主,旣登盟壇之上,陳牲歃血,要天矢日,列名載書,便要推盟主爲尊了。宋襄公指望楚王開口,以目視之。楚王低頭不語。陳蔡諸國,面面相覷,莫敢先發。襄公忍不往了,乃昻然而出曰:「今日之擧,寡人欲修先伯主齊桓公故業,尊王安民,息兵罷戰,與天下同享太平之福,諸君以爲何如?」 諸侯尙未答應,楚王挺身而前曰:「君言甚善!但不知主盟今屬何人?」 襄公曰:「有功論功,無功論爵,更有何言!」 楚王曰:「寡人冒爵爲王久矣。宋雖上公,難列王前,寡人告罪占先了。」 便立在第一個位次。目夷扯襄公之袖,欲其權且忍耐,再作區處。襄公把個盟主捏在掌中,臨時變卦,如何不惱。包著一肚子氣,不免疾言遽色,謂楚王曰:「寡人徼福先代,忝爲上公,天子亦待以賓客之禮。君言冒爵,乃僭號也。奈何以假王而壓眞公乎?」
變卦 : 기정사실이 돌연 변경되다. 마음을 바꾸다. 표변하다. 사정이 변하다 . 一肚子氣 : 잔뜩 화가 나다. 慪氣, 鬧脾氣, 發脾氣.
疾言遽色 : 「빠른 말소리와 급(急)히 서두르는 얼굴빛」이라는 뜻으로, 당황(唐慌)하는 말투나 태도(態度)를 이르는 말.
좌측 계단은 주인이 올라가는데 단지 송양공과 목이 두 사람 뿐이었다. 계단에 다 오르자 손님과 주인을 가려 맹단(盟壇)위에 올라 제단 위에 놓인 희생물의 피를 마시고 하늘에 맹세한 후 서약서에 이름을 올렸는데 바로 이어 맹주를 뽑는 차례가 되었다.
송양공은 초성왕이 입을 열기를 기대하며 바라보았으나 초성왕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진나라와 채나라등 다른 군주들은 서로 쳐다만 볼 뿐 감히 먼저 말을 하지 못했다.
송양공이 참지 못하고 앙연히 앞으로 나가 말했다.
"오늘의 일은 과인이 지난 날의 패자인 제환공(齊桓公)의 옛 업적을 이어받아 주왕실을 받들고 백성을 편안케 하며 군사들을 쉬게하여 전쟁을 없애므로써 천하와 더불어 태평성대의 복을 누리고자 하는데 군주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후들이 미처 응답할 겨를도 없이 초성왕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군주의 말이 매우 좋습니다. 다만 지금 맹을 주도하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
양공이 말했다.
"공이 있다면 공을 따지고 공이 없으면 작위를 따지면 되는데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초왕이 말했다.
"과인의 작위는 왕위에 나아간지 오래 되었습니다. 송나라 군주의 작위가 제일 위인 공(公)이라 하지만 서열이 왕의 앞 대열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제일 앞에 서겠습니다."
그리고 제일 앞자리에 나가 섰다. 목이가 송상공의 소매를 잡아 당기며 잠시 참고 다시 상황을 보며 대처하자고 했다. 송양공은 맹주의 자리를 손안에 움켜쥐었다가 잠깐 사이에 상황이 급변하니 어찌 괴롭자 않겠는가!
분노가 폭발하여 당황함을 금치 못하고 초성왕에게 말했다.
"과인은 선대의 복으로 황공하옵게도 작위중의 맨 윗자리인 공(公)이 되었으며 천자께서 빈객의 예로 대하고 있습니다. 군주는 벼슬이 높다고 하지만 왕호를 참칭한 것이 아닙니까? 어찌 참칭한 왕의 지위로써 진정한 공(公)을 압박하십니까?"
楚王曰:「寡人旣是假王,誰敎你請寡人來此?」 襄公曰:「君之至此,亦是鹿上先有成議,非寡人之謾約也。」 成得臣在旁大喝曰:「今日之事,只問眾諸侯,爲楚來乎?爲宋來乎?」 陳蔡各國,平素畏服於楚,齊聲曰:「吾等實奉楚命,不敢不至。」 楚王呵呵大笑曰:「宋君更有何說?」 襄公見不是頭,欲待與他講理,他又不管理之長短,欲作脫身之計,又無片甲相護,正在躊躇。只見成得臣鬥勃卸去禮服,內穿重鎧,腰各揷小紅旗一面,將旗向壇下一招,那跟隨楚王人眾,何止千人,一個個俱脫衣露甲,手執暗器,如蜂攢蟻聚,飛奔上壇。各國諸侯,俱嚇得魂不附體。成得臣先把宋襄公兩袖緊緊捻定,同鬥勃指揮眾甲士,擄掠壇上所陳設玉帛器皿之類。一班執事,亂竄奔逃。宋襄公見公子目夷緊隨在旁,低聲謂曰:「悔不聽子言,以至如此,速歸守國,勿以寡人爲念!」 目夷料想跟隨無益,乃乘亂逃回。
卸 : 풀 사. 풀다. 수레를 멈추고 말을 풀다. 안장을 풀다. 옷 따위를 벗다. 이무를 그만두다. 떨어지다.
捻 : 비틀 념/누를 녑. 비틀다. 집다. 붙잡다.
초성왕이 말헸다.
"과인은 이미 왕이 되었었는데 누가 너에게 과인을 이 자리에 오게 하라고 시켰는가?"
송양공이 대답했다.
"군주께서 이곳에 오시게 된 것은 녹상에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지 과인이 속인 것이 아닙니다."
성득신이 옆에 있다가 큰 소리로 물었다.
"오늘의 일을 제후들께 묻습니다. 초나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송나라 때문에 오셨습니까?"
진나라와 채나라등 각 나라 군주들은 평소 초나라를 두려워하여 복종해왔기 때문에 일제히 소리쳐 대답했다.
"우리는 실제로 초나라의 명을 받았으며 감히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초성왕이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송군은 또 할 말이 있는가?"
송양공은 머리를 들지 못했다. 그와 더불어 시비를 가리고자 했으나 그는 또 잘잘못을 가리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또 위기를 벗어날 계책을 생각해 봤으나 몸을 보호해 줄 갑사가 한 명도 없어 주저하고 있을 뿐이었다.
바로 그때 성득신과 투발이 예복을 벗어 던졌는데 안에는 두터운 갑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각각 작은 붉은 기를 꽂았었다. 그 기를 뽑아 단 아래를 향해 한번 흔들자 초성왕을 따라왔던 천 명이 남는 무리가 모두 옷을 벗고 갑옷을 드러내며 손에는 숨겨두었던 무기를 들고 벌떼처럼 제단위로 뛰어 올라갔다. 각국의 제후들은 모두 두려움에 혼비백산했다. 성득신은 먼저 송양공의 양소매를 단단히 잡아 꼼짝 못하게 하였고 투발은 갑사들을 지휘하여 단상에 진열된 옥과 비단, 제기류를 노획하게 하였다. 일을 집행하던 무리들이 어지러이 도망쳤다. 송양공은 곁에서 수행하던 공자 목이를 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그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속히 귀국하여 나라를 지키고 과인을 염려하지 마십시오."목이도 가까이 수행해 봐야 이로울 것이 없다고 보고 혼란을 틈타 도망쳐 도성으로 돌아갔다.
不知宋襄公如何脫身,且看下回分解。
송양공이 어떻게 위기를 벗어날지 모른다면, 다음 회를 보면 분명히 알게 되리라!
'中國歷史와文學 > 列國志' 카테고리의 다른 글
第三五回. 晉重耳周遊列國, 秦懷嬴重婚公子. (0) | 2021.03.22 |
---|---|
第三四回. 宋襄公假仁失眾, 齊姜氏乘醉遣夫. (0) | 2021.03.22 |
第三二回. 晏蛾兒踰牆殉節, 群公子大鬧朝堂. (0) | 2021.03.22 |
第三一回. 晉惠公怒殺慶鄭, 介子推割股啖君. (0) | 2021.03.22 |
第三十回. 秦晉大戰龍門山, 穆姬登臺要大赦. (0) | 2021.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