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昭君
漢家秦地月、 한나라 진땅의 달은
流影送明妃。 명비를 보내며 그림자를 딸려보내네.
一上玉關道、 옥문관을 나서면
天涯去不歸。 아득히 먼 곳으로 떠나 돌아오지 못하네.
漢月還從東海出、 한나라의 달은 또 다시 동해에서 뜨건만
明妃西嫁無來日。 명비는 서쪽 땅으로 시집가 돌아오지 못하네.
燕支長寒雪作花、 연지산은 항상 춥고 눈이 내려 눈꽃을 이루는데
峨眉憔悴沒胡沙。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땅 모래에 잠겼네.
生乏黃金枉圖畵、 살아서는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망치게 하더니
死留靑塚使人嗟。 죽어서는 청총이 있어 사람들의 탄식을 자아내게 하는구나.
[해설]
漢나라 황제(元帝)는 후궁을 모집하기 위해 전국에 방을 붙였다. 하여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수천 명의 처녀들이 입궁했는데 그 중 18세의 꽃다운 王昭君이라는 처녀가 끼어 있었다.
이리하여 황제는 수천 명의 궁녀들을 일일이 볼 수 없어서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시켜 개인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러자 부귀한 집안의 궁녀나 장안에 살고 있던 궁녀들은 저마다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고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오직 왕소군은 집안이 가난하여 돈도 없을 뿐더러 황제에게 자신의 용모를 사실대로 보여주려고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그러자 궁중화가 모연수는 왕소군을 괘씸하게 여겨 그녀의 용모를 못 생긴 것처럼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 하나를 찍어 놓았다. 그 후 황제는 왕소군의 초상을 보긴 보았으나 적당히 그려진 그녀의 모습에 눈길도 두지 않았다. 바야흐로 왕소군은 입궁한지도 벌써 5년이 흘렀건만 황제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채로 허송세월만 보냈던 것이다.
당시 중국은 국력이 약하여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던 시절이었다. 그때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 58∼ BC 31)라는 자가 화친을 빙자하여 황제를 알현하고자 長安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호한야는 황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린 후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바쳤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대접하자, 호한야는 황제를 장인으로 모시겠다고 청하였다. 즉 사위로 삼아달라고 한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황제는 기꺼이 청을 받아들였으나 오랑캐인 그에게 공주를 시집보낸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황실의 위엄을 보이고자 자기의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들여 술을 권하게 했던 것이다. 불려온 후궁들은 절호의 찬스를 맞아 황제의 환심을 사기위해 저마다 예쁘게 단장하였다.
이윽고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각기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 중에서 절색의 미인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마음이 바뀐 그는 즉시 황제에게 또 다른 청을 올렸다.
즉 “황제폐하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면 족합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황제는 그렇지 않아도 종실의 공주를 그에게 시집보내려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던 차 생각이 바뀐 호한야의 제의를 반기고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이리하여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재주와 미모를 겸비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점찍었던 것이다.
그러자 황제가 호한야가 가리킨 쪽을 바라보니 천하절색의 궁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하며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황제도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하여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 없게 된 황제는 땅을 치며 후회했던 것이다.
이윽고 연회가 끝난 후 황제는 급히 대전으로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하나하나 다시 대조해 보았다. 아차, 이게 웬일인가.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다른데다 얼굴에 점까지 그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 순간 황제는 분노가 치밀어 궁중화가 모연수에 대한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자 진상이 밝혀지고 모연수는 황제를 기만한 죄로 斬首되고 말았다.
그 후 황제는 왕소군을 놓치기 싫어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호한야에게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며 3일만 기다려달라고 핑계를 대고는 그 3일 동안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들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내며 못 이룬 정을 나누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복장으로 단장하고 미앙궁에서 황제에게 작별을 고하게 되었는데, 황제는 매우 섭섭하여 흉노족에 시집가서도 한나라를 빛내는 여인이 되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昭君(중국의 공인된 미인칭호)"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그리하여 왕소군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장안을 한 번 바라본 다음, 서운한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오른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나온 사람들로 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이렇게 왕소군은 번화한 장안을 떠나 중 늙은이 흉노 선우 호한야를 따라 황량한 흉노 땅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런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 곡을 연주하자, 그때 남쪽으로 날아가던 한 무리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에 반해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왕소군을 일러 "落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왕소군이 떠날 때 중원은 따뜻한 봄이었지만 북쪽 변방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 닥치고 있었다.
흉노 땅을 밟은 왕소군은 마음이 착하여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漢나라와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힘써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나라와의 전쟁은 없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선우 호한야가 죽자 왕소군은 그의 아들에게 재가하여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 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는데 그 묘지는 지금도 내몽고 후허호트시(呼和浩特市) 남쪽 9km 지점에 있다고 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어 그 무덤을 "청총(靑冢)"이라 불렀다고 한다.
왕소군의 이 역사적인 드라마틱한 슬픈 이야기는 흉노에게 억지로 시집을 가야하고 중국이 오랑캐들을 달래기 위한 화친정책 때문에 생긴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왕소군을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다고 한다.
중국의 미인을 수식하는 말로 沈魚落雁, 閉月羞花가 있다.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沈魚)는 西施의 미모,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落雁)는 왕소군, 달도 부끄러워서 구름 사이로 숨어 버렸다(閉月)는 貂嬋,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羞花)는 楊貴妃, 즉 중국 대표적인 미녀의 미모를 함축하여 표현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