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昌宮詞
元稹
連昌宮中滿宮竹、 연창궁에 가득한 대나무,
歲久無人森似束。 오랜 세월 돌보는 이 없더니 숲이 묶인 다발 같네.
又有牆頭千葉桃、 또 담장 가에 벽도나무,
風動落花紅蔌蔌。 쏴- 하고 바람불자 붉은 꽃잎 날리는구나.
宮邊老人爲余泣、 궁 옆 노인 울며 내게 말했네.
少年選進因曾入。 어렸을 때 뽑혀 궁안에 들어갔었습니다.
上皇正在望仙樓、 상황(玄宗)이 바로 망선루에 계셨는데
太眞同憑欄干立。 태진이 함께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습니다.
千葉桃 : 벽도(碧桃)。복숭아의 일종. 희고 아름다운 겹꽃이 피며 멸매는 작아 먹지 못하고 관상용으로 키움. 전설에 선경에 있다함.
蔌 : 푸성귀 속. 푸성귀. 흰 띠. 바람이 세게 부는 소리. 사물의 모양. 蔌蔌 : 바람이 세게 부는 소리.
太眞 : 당 현종은 황후 무혜비(武惠妃)가 죽자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환관 고력사의 안내로 양옥환을 여산 온천궁에서 만났으나
자신의 18번째 아들 수왕(壽王)의 비였다. 고력사의 기지로 옥환을 여도사의 신분으로 위장시켜 황궁 안에 있던 태진궁(太眞宮)
이라는 도가의 사당에서 제사를 받들도록 한 후, 현종은 그녀에게 태진(太眞)이라는 법호를 내리고 밤마다 시중을 들게 했다.
그후 입궁하여 귀비가 되었고 현종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樓上樓前盡珠翠、 누대의 위와 앞에는 모두 옥과 비취로 꾸미니,
炫轉熒煌照天地。 그 현란함이 번쩍여 천지를 비추었습니다.
歸來如夢復如癡、 돌아오니 꿈인 듯 또 바보가 된 듯 하였으나,
何暇備言宮裡事。 어느 겨를에 궁안의 일을 모두 말하겠습니까?
初過寒食一百五、 처음에 105일이 지나 한식날이 되자,
店舍無煙宮樹綠。 가게와 집들이 연기를 내지 않아 궁안 나무들이 푸르렀습니다.
夜半月高絃索鳴、 깊은 밤 달이 높이 떠 있는데 거문고 소리 들려오니,
賀老琵琶定場屋。 악공 하회지(賀懷之)가 비파를 들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賀老 : 악공인 하회지(賀懷知)로 唐나라 때 비파를 잘 타기로 유명하였다.
場屋 : 본래 광장가운데 막으로 둘러친 과거시험장을 뜻하였으나, 광대나 악공들의 놀이 무대도 이와 비슷하므로 장옥이라 칭한 것.
力士傳呼覓念奴、 고력사가 소리쳐 염노를 찾았는데
念奴潛伴諸郞宿。 염노는 몰래 악공 집에서 함께 있었습니다.
須臾覓得又連催、 잠깐만에 찾아내고는 연이어 재촉해,
特勅街中許然燭。 특별히 칙령을 내려 거리에 등불 밝히기도 허락했습니다.
春嬌滿眼睡紅綃、 춘정어린 교태 눈에 가득히 붉은 비단이불 속에서 자다가
掠削雲鬟旋粧束。 구름같은 머리 다듬고 재빠르게 단장하고 띠를 매었습니다.
飛上九天歌一聲、 나는 듯 궁궐에 올라 노래 한 곡 부르니.
二十五郞吹管逐。 이십오랑이 피리를 불며 장단을 맞추었습니다.
念奴 : 당나라 현종 때의 유명한 명창. 천보(天寶) 연간(742—756)가무를 잘하던 유명한 기생이라 함.
鬟 : 쪽진 머리 환. 쪽찐 머리. 계집종. 산 모양 또는 산 빛깔. 九天 : 궁궐. 逐 : 篴(= 피리 적)
二十五郞 : 스물다섯번째 랑(郞)이라는 뜻으로 빈왕(邠王) 이승녕(李承寧)을 가리킨다. 현종(玄宗)의 아우인데 피리의 명수였다.
逡巡大徧涼州徹、 어느덧 대편 양주곡이 끝나니,
色色龜茲轟錄續。 여러 구자곡(龜茲曲)이 연이어 울렸습니다.
李謨擪笛傍宮牆、 이모(李謨)가 궁의 담장 옆에서 피리소리를 듣고,
偷得新翻數般曲。 몰래 새로운 곡 여러 편을 손가락으로 눌러 베꼈습니다.
平明大駕發行宮、 날이 밝자 어가가 행궁으로 출발하였고,
萬人鼓舞途路中。 모든 사람들이 길에서 북치며 춤을 추었습니다.
百官隊仗避岐薛、 백관과 호위대, 의장행렬은 기왕(岐王), 설왕(薛王)을 피했고,
楊氏諸姨車鬪風。 양씨 언니들은 바람을 거슬러 나아갔습니다.
逡巡大徧涼州徹 : 대편(大徧)은 大遍이라고도 하며 양주(梁州)는 당나라 교방(敎坊)의 곡명(曲名)으로 본래 서량(西凉)의 곡명인데
대편(大徧)과 소편(小徧)으로 나뉘었다.
김륭(金隆)의 《勿巖集(물암집)》 4권에 “逡巡은 잠시라는 뜻이니, 어느덧 이미 양주곡을 두루 연주했다는 것이다. 철(徹)은
파한다(끝낸다)는 뜻이다.” 하였다.
涼州曲 : 악부 근대 곡사(樂府近代曲辭)의 이름이며 당나라 때 주로 기생들이 부르던 풍류 곡조이고 왕한(王翰)의 涼州詞가 있다.
色色 : 여러가지, 갖가지,
龜茲 : 옛날의 악곡명, 본래 구자국(龜玆國)의 악곡. 구자국은 한대(漢代)에 서역에 있던 여러 나라 중의 하나이다. <隋書 樂志 下>
☞李謨 ~ 般曲。
명황(明皇 : 현종)이 상원(上元)날 밤에 몰래 등불 아래에서 놀았는데, 홀연히 누대 위에서 피리 부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전날 저녁에 새로 지은 곡조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크게 놀라 은밀히 피리부는 자를 잡아다가 힐문하니, 말하기를 “어젯밤에 몰래 천진교 위에서 달을 구경하다가 궁중에서 연주하는 곡조를 듣고는 마침내 다리 기둥에다 손톱으로 악보를 그려 기억하였다.” 하였다. 그의 성명을 물으니 이모(李謨)라 하였다. 명황은 기이하게 여겨 물건을 하사해 주고 가게 하였다.
擪 : 누를 엽. 누르다. 손가락으로 누름.
百官隊仗避岐薛 : 岐薛은 唐 玄宗의 아우인 岐王 李範과 薛王 李業. 金隆의《勿巖集》4권에 “隊仗은 호위병과 의장행렬이다.” 하였다.
明年十月東都破、 다음해 10월 동도(東都 : 洛陽)가 무너지고,
御路猶存祿山過。 황제가 다니던 길 안록산이 지나갔습니다.
驅令供頓不敢藏、 백성을 다그쳐 곡식을 요구해도 감히 감추지 못하고,
萬姓無聲淚潛墮。 뭇 백성이 소리없이 남몰래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兩京定後六七年、 낙양과 장안이 평정된 후 6,7 년만에
却尋家舍行宮前。 행궁 앞 집을 찾아 았습니다.
莊園燒盡有枯井、 장원은 모두 불타고 마른 우물만 남았어도,
行宮門闥樹宛然。 행궁 문 안의 나무들은 여전했습니다.
爾後相傳六皇帝、 그 이후 여섯 황제가 바뀌어 전해지는 동안,
不到離宮門久閉。 이궁(離宮)에는 오지 않아 궁문이 오랫동안 닫혀 있었지요.
往來年少說長安、 소년들 오가며 장안 일을 이야기 하는데,
玄武樓成花萼廢。 현무루가 세워지고 화악루를 폐하였다고 했습니다.
去年敕使因斫竹、 지난 해에 칙사가 대나무를 베러 왔었는데,
偶值門開暫相逐。 우연히 만나 문을 열자 잠시 따라 들어갔습니다.
荊榛櫛比塞池塘、 싸리나무, 개암나무 우거져 연못 통로를 메웠고,
狐兎驕癡緣樹木。 여우와 토끼들이 나무 사이를 마음대로 미친 듯 뛰어다녔습니다.
舞榭欹傾基尙在、 춤추던 정자는 무너졌어도 그 터는 아직 남아 있고,
文窗窈窕紗猶綠。 꽃무늬 창은 아름답고 깁은 아직도 푸르렀습니다.
萼 : 꽃받침 악. 榭 : 정자 사. 정자, 사당. 곳집. 악기(樂器)를 넣어 두는 창고. 도장(道場). 무술을 익히는 곳.
欹 : 감탄하는 소리 의/기울 기. 아! 어조사. 의지하다. 기대다.묶다. 길다. 보태다.
塵埋粉壁舊花鈿、 단장한 벽과 꽃비녀는 먼지에 묻혀 있었고,
烏啄風箏碎如玉。 까마귀가 풍경을 쪼아 옥처럼 부서졌습니다.
上皇偏愛臨砌花、 상황(玄宗)은 섬돌 가 꽃을 유달리 사랑하셨는데,
依然御榻臨階斜。 여전히 어탑(御榻)을 지키며 계단에 비켜 있었습니다.
蛇出燕巢盤鬪栱、 뱀이 제비 둥지에서 나와 두공에 또아리를 틀고,
菌生香案正當衙。 버섯이 향안에서 생겨 황제의 거처를 마주보며 자라고 있었습니다.
寢殿相連端正樓、 침전은 단정루에 연해 있었는데,
太眞梳洗樓上頭。 태진이 그 위에서 머리빗고 씻던 누각이었습니다.
晨光未出簾影黑、 새벽 빛 나지 않아 주렴 그림자가 어두웠는데,
至今反掛珊瑚鉤。 이제까지 산호 갈고리가 거꾸로 걸려 있었네요.
指向傍人因慟哭、 옆 사람에게 그 것을 가리키며 통곡하였었는데,
却出宮門淚相續。 궁문을 나와서도 눈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自從此後還閉門、 이후부터 다시 문이 닫혔고,
夜夜狐狸上門屋。 밤마다 여우와 삵괭이가 문과 지붕위에 올라가 놀았습니다.
風箏 : 풍경(風磬). 砌 : 섬돌 체. (벽돌이나 돌을) 쌓다. 섬돌. 계단. 依然 :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栱 : 두공 공. 두공(抖栱). 목조 건물의 기둥머리를 장식하기 위하여 짜 올린 구조. 말뚝. 香案 : 향로를 올려 놓는 탁자.
我聞此語心骨悲、 내가 그 말을 듣고 슬픔이 뼛속까지 사무쳤는데,
太平誰致亂者誰。 태평세월은 누가 이루었으며 난세는 누가 일으켰는가?
翁言野父何分別、 노인이 말하기를 시골 노인이 어찌 분별이 있을까만
耳聞眼見爲君說。 들은대로 본대로 그대에게 말하리다.
姚崇宋璟作相公、 요숭과 송경이 재상이 되었을 때,
勸諫上皇言語切。 상황에게 권하고 간하였는데 그 말이 간절하였습니다.
燮理陰陽禾黍豐、 음양의 이치를 조화롭게 다스려 곡식이 풍년들었고,
調和中外無兵戎。 나라 내정과 외정을 조화롭게 다스려 전쟁이 없었습니다.
姚崇 · 宋璟 : 요숭은 당 고종때 출사하여 측천무후가 그의 일처리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발탁하였고 중종 때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현종때 다시 발탁되어 병부상서 동평장사가 되었고 다시 양국공에 봉해졌다. 그후 현종에게 10개의 건의를 올려 국정을 개혁하였으며 송경(宋璟)과 함께 「개원의 치」라 불리는 태평성세를 열어간 공로자로 평가받았다.
長官淸平太守好、 장관들 청렴하고 공평하였고 태수들도 훌륭하였는데,
揀選皆言由相公。 그들을 가려 뽑은 것이 모두 재상들로 인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開元之末姚宋死、 개원 말기에 재상 요숭과 송경이 죽자,
朝廷漸漸由妃子。 조정 일은 점점 양귀비에게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祿山宮裏養作兒、 안록산은 궁안에 들어가 양귀비의 양자가 되었고,
虢國門前鬧如市。 괵나라 문앞은 저자거리처럼 소란했습니다.
弄權宰相不記名、 권력을 농단한 재상은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依稀憶得楊與李。 희미한 기억으로는 양씨와 이씨였습니다.
祿山宮裏養作兒 :
天寶 10년(751)에 안록산(安祿山)을 불러 궁중에 들어오게 하였는데 양귀비가 궁녀들로 하여금 그를 채색 가마에 태우게 하였다. 임금이 후궁들이 떠들고 웃는 이유를 묻자, 좌우의 사람들은 양귀비가 아이를 씻겨 주어서라고 대답하니, 임금은 기뻐하여 양귀비에게 洗兒錢(아이를 씻기는 돈)을 하사하였다.
虢國 : 양귀비의 언니가 괵국부인(虢國夫人)에 봉해지니, 형세와 기염이 찌를 듯하여 사람들이 모두 아부해서 그 문이 시장과 같았다.
楊與李 : 양귀비의 6촌 오빠인 楊國忠과 이임보(李林甫).
양국충은 양귀비가 현종의 총애를 받게 되자 감찰어사·시어사 등의 관직을 얻었으며, 국충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이와 더불어 15개의 직책을 겸해 그 권세가 나라 안팎을 뒤흔들었다. 2차례 군대를 일으켜 남조를 쳤으나, 20만의 군사만 잃었다. 후에 이임보가 죽자 우상이 되어 국정을 농단하다가 안록산의 난으로 촉땅으로 가다가 군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임보는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모두 위임하자 19년간이나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국정을 농단하였으며, 절도사를 문관에서 무관으로 모두 교체하여 안사의 난(안록산과 사사명의 난)의 원인이 되게 하였다. <다음백과>
廟謨顚倒四海搖、 조정의 계책이 뒤집혀 사해가 요동치고,
五十年來作瘡痏。 50년래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今皇神聖丞相明、 지금의 황제는 신성하시고 승상은 현명하여,
詔書纔下吳蜀平。 조서를 내리자 얼마 후 오촉지방이 평정되었습니다.
官軍又取淮西賊、 관군이 또 회수 서쪽의 적당을 사로잡으니,
此賊亦除天下寧。 이 역적도 제거되자 천하가 평안해졌습니다.
年年耕種宮前道、 해마다 연창궁 앞 길에 씨뿌려 농사지었으나,
今年不遣子孫耕。 올해에는 자손을 보내 농사를 짓지 않았습니다.
老翁此意深望幸、 이 늙은이의 뜻은 천자께서 이 궁에 납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努力廟謀休用兵。 조정에서는 힘써 계책을 세워 병란이 없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古文眞寶 前集 第12卷 曲類>
痏 : 멍 유/앓을 욱. 멍, 흉터, 호한. 떨다. [욱] 앓다. 시달리다.
今皇 : 현종 후 다섯번째 왕인 헌종(憲宗)을 말함. 玄宗 - 肅宗 - 代宗 - 德宗 - 順宗 - 憲宗
吳蜀 : 吳는 江南東道節度使 이기(李錡), 蜀은 劍南西川節度使 유벽(劉闢). 이들은 모두 반란을 일으켰다.
淮西賊 : 淮西節度使 오원제(吳元濟). 당(唐) 나라 헌종(憲宗) 때의 문신. 채주 자사(蔡州刺史)로 있으면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절도사 이소(李愬)에게 사로잡혀 장안(長安)에서 참수됨
[해설]
연창궁(連昌宮)은 당(唐)나라 황제의 행궁(行宮) 중의 하나로 고종(高宗) 현경(顯慶) 3년(658)에 지어졌는데,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의양현(宜陽縣) 서쪽 19리 지점에 있었다. 원화(元和) 13년(818) 원진이 통주사마(通州司馬)였을 때 이 유명한 장편 서사시(敍事詩)를 지었는데, 연창궁의 흥망성쇠를 통하여 안사(安史:安祿山과 史思明)의 난을 전후로 한 당(唐)나라 정치의 어지러운 상황을 표현했다.
崔演( ?-? )의《艮齋集》1권〈連昌宮〉에서는 안록산의 난이 빚어지게 된 시대적인 상황을 서술한 다음 “아 처음은 있으나 잘 끝마침이 드무니 임금의 마음이 현명한가의 여부에 달려있네.[嗟有初而鮮終 在一心之聖狂]”라 하고 “돌아보건대 시군과 세주는 어찌하여 이것을 거울삼아 징계하지 않는가.[顧時君與世主 盍監此而懲創]”라고 경계하였다.
[이 시의 번역과 注는 동양고전종합DB의 번역및 注를 많이 참고, 인용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