破閑集
李仁老(1152-1220)가 1220年(高宗 7)에 시창작과 감상에 얽힌 詩話 및 民間의 閑談과 歷史에 대한 생각들을 기록한 詩話集으로 1冊 43張의 木版本이다.
이인로는 高麗中期의 文臣 · 學者로 初名이 得玉, 字는 眉叟, 號는 雙明齋이며 海左七賢 중의 한 사람이다. ≪破閑集≫은 아들인 李世黃이 1260年(元宗 元年)에 初刊하였고 1493年(成宗 24)에는 ≪補閑集≫과 합책하여 ≪二閑集≫으로 간행된 바 있다.
本書는 1659年(孝宗 9)에 간행한 重刊本이다. 권말에는 李世黃이 쓴 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上中下 3권으로 분권되어 있다. 上卷에 23則, 中卷에 22則, 下卷에 30則, 총 75則의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수록내용으로는 詩作에 얽힌 일화, 詩評, 詩作品, 詩論의 개진 등 詩話 관련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新羅의 舊俗, 西京과 開京의 風物, 人物逸話도 일부 있다. 詩話로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시인들을 망라하였다. 詩評은 신라부터 당시까지의 시인의 작품과 시풍을 품평하고, 이들을 중국의 杜甫, 韓愈, 蘇軾 등과 비교하여 작시의 규범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여러 시인들의 작품과 함께 자신의 작품에 대한 소개를 할 때에 작가의 생애와 작시의 배경 등을 기술하여 작품론, 작가론의 성격도 겸하고 있다. 또한 시문은 빈부귀천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며, 작가의 생애와 시풍은 친연성이 있고, 語義와 意妙가 구비되고 文質이 조화되어야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고 하는 등 자신의 시론을 개진하기도 하였다. 이 외에 역대 왕조의 역사, 풍습 등을 기술하여 그의 다양한 관심을 폭을 느끼도록 한다. 우리나라 시화집의 효시가 된 책으로 崔滋의 ≪補閑集≫, 李齊賢의 ≪櫟翁稗說≫, 徐居正의 ≪東人詩話≫ 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인로의 생애와 시론, 당대까지의 시화 뿐만 아니라 시화집의 성격과 체재 연구에도 필수적인 자료이다. (김남기)
李仁老(1152·1220)의 詩話漫錄集. 詩創作 및 鑑賞에 얽힌 逸話와 市井의 閑話, 歷史에 대한 斷想 등을 기록한 雜文集으로 朝鮮時代에 같은 類의 著書가 성행하게 된 효시가 되었다. 저자의 생존시에 편집한 것이나, 간행되지 못하다가 그의 아들 世黃이
1260년(高麗 元宗 元)에 按廉使 大原王公의 후원으로 初刊되었음을 世黃이 쓴 <世黃謹誌>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初刊本은 전해지지 않으며, 1493년(成宗 24) 李克墩이 경상감사로 있을 때 ≪補閑集≫과 合冊, <二閑集>이라 하여 발간했다 하나 역시 전해지지 않는다. 奎章閣本은 1659년(孝宗 10)에 刻本된 것이다. 李仁老의 字는 眉叟, 號는 雙明齋, 본관은 仁州. 名門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고아가 되자 친척인 僧 寥一의 양육을 받았다. 절에서 글을 배우던 중 1170년(高麗 毅宗 24) 鄭仲夫의 亂이 일어나 文臣들이 모두 숙청되는 위기에 처하자,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 이후 5년만에 還俗, 1180년(高麗 明宗 10) 과거에 급제,桂가 記를 거쳐 翰林에 보직되자, 여러 가지 詞疏陽管 모두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禮部員外郞·秘書監右諫議大夫 등을 역임했으나, 성절이 편협하고 남에게 미움을 받아 크게 쓰이지 못하고 69세로卒했다. 李仁老가 宗이 되어 林椿·吳世才 등을 비롯한 當代의 文士 7인이 술과 詩로 세월을 보내며武臣에게 좌우되는 世態를 이겨내려는 모임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국 西晋의 竹林七賢에 비겨<海左七賢>이라 불리워졌다. 그 중 특히 李湛之, 林椿 등과 친했다. 그의 저서로는 世黃의 글에 의하면 그가 평생에 지은 詩·賦를 모은 ≪銀臺集≫ 20권, 後集 4권, 耆老會 중에서의 雜著를 엮어서 洪思胤이 펴낸 ≪雙明齋集≫ 3권이 있다 하나 전하지 않으며, ≪東文選≫에 일부분인 율문 84수, 산문 15편이 실려 전할 뿐이다. ≪破閑集≫은 한가함을 깨뜨린다는 의미에서 온갖 소재에 대한 隨想을 엮은 오늘날의 隨筆과 같은 것이다. 그 내용은 주로 文談, 新羅의 舊俗, 西京·開京의 당시 풍물, 詩作에 얽힌 逸話·詩評, 자신의 詩作에 대한 題詠 등으로 되어 있다. 分卷한 기준은 뚜렷하지 않으며, 分章한 수효에 따르면 상권에는 약 22話, 중권에는 23話, 하권에는 31話가 수록되어 있다.
이 ≪破閑集≫에 수록된 雜文들이 당시에 대한 資料를 보충해 줄 기록을 제공해 준다는 점에서 史料的 가치 역시 의미 있는 것이지만, 그 가치는 무엇보다도 수록 내용의 절반을 넘는 詩話에 있다 하겠다. 詩話란 오늘날의 文學評論과 같은 것으로, 중국에서는 이보다 백년 쯤 앞선 宋 歐陽修의 ≪六一詩話≫이후로 성행되어 高麗 高宗 이후 文人간에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전에도 몇 字로 詩에 대해서 評한 기록이 있기는 하나 文學의 本質에 대해 논하고, 문학의 性命의 위대함을 논한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그는 詩評을 함에 있어서도 신라 때부터 그 당시까지의 수많은 詩人의 작품과 詩風을 評論하고, 이들을 中國 詩人들과 비교하여 當代의 문단의 한 基準을 세우는 바 되었다. 또한 자신의 詩作에 대한 소개도 있어 作家論의 자료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후 이러한 양식의 문학이 성행하여 麗朝에 이미 崔滋의 ≪補閑集≫, 李齊賢의 ≪櫟翁稗說≫, 李奎報의 ≪白雲小說≫이 뛰어났고, 朝鮮시대에는 徐巨正의 ≪東人詩話≫를 비롯하여 수십 종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詩話들은 오늘날 漢文學에 대한 귀중한 批評書일 뿐 아니라, 수십 韻에 이르거나 量이 너무 방대해 文集에 수록되지 못한 작품, 혹은 문집이 없는 文人의 작품을 몇 句 소개하여 주고 있어 古典文學의 자료를 보충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李仁老는 文으로는 韓愈의 古文을 따르고 詩는 宋詩 중에서도 특히 蘇東坡를 숭상했다고 自述한 바 있는데, 그의 文學評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宋代의 詩風을 숭상했기 때문에 險僻한 故事의 인용을 빈번히 했고, 자신의 獨創性을 古人의 모범에 묶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李奎報와 비교되는 詩作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詩評 혹은 詩人評에 있어서도 중국의 문인을 지나치게 模範的 基準으로 내세워 무리한 比較를 행한 例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러한 미비한 점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詩話漫談類의 문학양식이 아직 굳어 지지 않은 시기의 著述이기 때문에 取捨한 素材의 영역과 記述方式이 자유스럽고 文體 또한 流麗하여, 이후 이를 추종한 同類의 어떤 저서에 실린 評보다도 신선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古典文學史를 硏究하는데 있어서는 우선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저서이다.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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