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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

史記 卷六. 秦始皇本期 Ⅱ

by 柳川 2019. 5. 11.

秦始皇本期 Ⅱ



始皇推終始五德之傳,109) 以爲周得火德, 秦代周德, 從所不勝.110) 方今水德之始,111) 改年始, 朝賀皆自十月朔.112) 衣服旄旌節旗113)皆上黑.114) 數以六爲紀, 符、法冠皆六寸, 而輿六尺, 六尺爲步, 乘六馬.115) 更名河曰德水, 以爲水德之始. 剛毅戾深, 事皆決於法, 刻削毋仁恩和義, 然後合五德之數.116) 於是急法, 久者不赦.

 

 

시황제는 오덕(五德)이 순환 반복하는 순서를 고찰해, 주(周)나라는 화덕(火德)을 얻었는데 진나라가 주나라를 대신했으니, 주나라의 화덕이 이기지 못하는 수덕(水德)을 따라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이제는 수덕의 시작이니 일 년의 시작을 바꾸고 조정의 하례식(賀禮式)도 모두 10월 초하루에 거행했다.

 

 

의복, 깃발, 부절(符節)의 색은 모두 검은 색을 숭상했다. 수는 6을 기초로 했으니, 부절, 법관(法冠)을 모두 여섯 치로 규정하고 가마의 너비도 여섯 자로 정했으며, 여섯 자를 1보(步)라고 하고 수레 한 대를 여섯 마리의 말이 끌게 했다. 황하(黃河)를 덕수(德水)라고 개명해 수덕(水德)의 시작을 나타냈다. 강인하고 엄혹하며, 모든 일을 법에 의해서 결정하고, 각박해 인의, 은덕, 우호 따위가 없어야 오덕(五德)의 명수(命數)에 부합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법령을 엄하게 해 법을 어긴 자는 오랫동안 죄를 용서받지 못했다.

 

 

丞相綰等言:「諸侯初破, 燕、齊、荊地遠, 不爲117)置王, 毋以塡之. 請立諸子, 唯上幸許.」始皇下其議於群臣, 群臣皆以爲便. 廷尉李斯議曰:「周文武所封子弟同姓甚衆, 然後屬疏遠, 相攻擊如仇讎, 諸侯更相誅伐, 周天子弗能禁止. 今海內賴陛下神靈一統, 皆爲郡縣, 諸子功臣以公賦稅重賞賜之, 甚足易制. 天下無異意,118) 則安寧之術也. 置諸侯不便.」始皇曰:「天下共苦戰鬥不休, 以有侯王. 賴宗廟, 天下初定, 又復立國, 是樹兵也, 而求其寧息, 豈不難哉! 廷尉議是.」

 

승상 왕관 등이 말하기를 “제후들을 이제 막 평정했지만, 연(燕), 제(齊), 초(楚) 나라의 땅이 너무 멀어서 왕을 두지 않으면 그들을 제압할 수 없사옵니다. 청하오니 황자들을 왕으로 세울 것을 윤허해주소서.”라 했다. 시황제가 군신들에게 이 의견을 상의하게 내놓자 군신들 모두 그것이 유리하다고 여겼으나, 정위(廷尉) 이사가 다음과 같이 이의를 제기했다.

 

“주(周)의 문왕(文王), 무왕(武王)은 많은 자제들과 일족을 왕으로 봉했지만, 후손들이 점차 소원해지고 멀어져 서로 원수처럼 공격했고, 심지어 제후들끼리 서로 주벌했음에도 주(周)의 천자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천하가 폐하의 신령(神靈)에 의해 통일되어 모두 군현(郡縣)으로 삼았으니, 황자나 공신들에게 국가의 부세로써 후한 상을 내리신다면 그들을 다스리시기에 매우 쉬울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 천하에 다른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천하를 안녕케 하는 책략이오니, 제후를 설치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자 진시황은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멈추지 않아 천하가 모두 고통 받고 있는데 이는 제후 왕이 있기 때문이다. 선조의 신령에 의지해 이제 천하를 평정했는데, 이제 또다시 제후국을 세운다는 것은 다시 전쟁을 조성하는 것이다. 안녕과 평정을 구하는 것이 어찌 어렵지 않겠는가! 정위의 의견이 옳도다.”

 

分天下以爲三十六郡,119) 郡置守、尉、監.120) 更名民曰「黔首」.121) 大酺. 收天下兵,122) 聚之咸陽, 銷以爲鍾鐻,123) 金人十二, 重各千石,124) 置廷宮中. 一法度衡石丈尺. 車同軌. 書同文字. 地東至海曁朝鮮,125) 西至臨洮、羌中,126) 南至北嚮戶,127) 北據河爲塞, 並陰山至遼東.128) 徙天下豪富於咸陽十二萬戶. 諸廟及章臺、上林皆在渭南. 秦每破諸侯, 寫放其宮室, 作之咸陽北阪上,129) 南臨渭, 自雍門130)以東至涇、渭, 殿屋複道周閣相屬.131) 所得諸侯美人鍾鼓, 以充入之.132)

 

천하를 36개 군으로 나누어 군마다 수(守), 위(尉), 감(監)을 두었다. 백성을 일컫는 말을 바꾸어 ‘검수(黔首)’라고 하고, 전국에 큰 연회를 베풀었다. 천하의 병기를 수집해 함양(咸陽)에 모아 놓고, 그것을 녹여서 종거(鍾鐻)와 12개의 동인상(銅人像)을 만들었는데 무게가 각각 1천 석(石)이었다. 모두 궁전 안에 놓아두었다. 법률과 도량형을 통일하고 수레의 궤폭을 통일했으며, 문자의 서체를 통일했다.

 

영토가 동쪽으로는 동해(東海), 조선(朝鮮)에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임조(臨洮), 강중(羌中)에까지 이르며, 남쪽으로는 북향호(北嚮戶)에까지 이르고, 북쪽으로는 황하를 근거지로 해 요새를 쌓아서 음산(陰山)을 끼고 요동(遼東)에까지 이르게 했다. 전국의 부호(富豪) 12만 호를 함양으로 이주하게 했다. 조묘(祖廟), 장대궁(章臺宮), 상림원(上林苑)이 모두 위수(渭水)의 남쪽 언덕에 있었다. 이것들은 진나라가 제후들을 평정할 때마다 그 나라의 궁실을 모방해 함양의 북쪽 산기슭에 지은 것인데, 남쪽으로는 위수가 흐르고 옹문(雍門) 동쪽에서 경수(涇水), 위수(渭水)에까지 이르며, 궁전 사이의 구름다리와 주각(周閣)이 서로 연이어졌고, 제후들에게서 뺏은 미인과 종고(鍾鼓)가 이곳을 메웠다.

 

二十七年, 始皇巡隴西、北地,133) 出雞頭山,134) 過回中.135) 焉作信宮渭南, 已更命信宮爲極廟, 象天極.136) 自極廟道通酈山, 作甘泉前殿. 築甬道,137) 自咸陽屬之. 是歲, 賜爵一級. 治馳道.138)

 

 

27년, 진시황은 농서(隴西), 북지(北地)를 순무하고, 계두산(鷄頭山)을 지나서 회중궁(回中宮)을 경유했다. 위수 남쪽에 신궁(信宮)을 지었다. 얼마 후에 신궁을 극묘(極廟)라고 개명해 북극성을 상징했다. 극묘에서부터 여산(酈山)까지 길을 뚫고, 감천궁(甘泉宮)의 전전(前殿)을 지었으며, 용도(甬道)를 수축해 함양까지 통하게 했다. 이해에 작위를 한 등급씩 하사했다. 치도(馳道)를 수축했다.

 

二十八年, 始皇東行郡縣, 上鄒嶧山.139) 立石, 與魯諸儒生議, 刻石頌秦德, 議封禪望祭山川之事.140) 乃遂上泰山,141) 立石, 封, 祠祀.142) 下, 風雨暴至, 休於樹下, 因封其樹爲五大夫.143) 禪梁父.144) 刻所立石, 其辭曰:145)

 

28년, 진시황이 동쪽으로 군현을 순무하던 중에 추역산(鄒嶧山)에 올라 비석을 세웠다. 노(魯) 땅의 유생들과 상의해 비석에 진(秦)의 공덕을 노래하는 내용을 새겼으며, 봉선(封禪)과 여러 산천에 대한 망제(望祭)의 일을 논의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태산(泰山)에 올라서 비석을 세우고, 토단을 쌓아서 하늘에 제사 지냈다. 제사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던 중,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나무 아래서 잠시 쉬었는데, 이 일로 인해서 그 나무를 오대부(五大夫)로 봉했다. 이어 양보산(梁父山)에서 땅에 제사 지내고, 비석을 세워서 글을 새겼는데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皇帝臨位, 作制明法, 臣下脩飭.146) 二十有六年, 初幷天下, 罔不賓服. 親巡遠方黎民, 登茲泰山, 周覽東極. 從臣思跡,147) 本原事業, 祗誦功德.148) 治道運行, 諸産得宜, 皆有法式. 大義休明, 垂于後世, 順承勿革. 皇帝躬聖, 旣平天下, 不懈於治. 夙興夜寐, 建設長利,149) 專隆敎誨. 訓經宣達, 遠近畢理, 咸承聖志. 貴賤分明, 男女禮順, 愼遵職事. 昭隔內外,150) 靡不淸淨, 施于後嗣. 化及無窮, 遵奉遺詔, 永承重戒.

 

“황제께서 제위에 오르시어 밝은 법도를 창제하시니 신하들은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갔으며, 26년에 처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시니 제후들이 신하로서 조현(朝見)하지 않는 자 없었다. 황제께서 친히 먼 지방의 백성들에게까지 순무해 이 태산에 올라 동쪽 끝을 바라보시니, 따르던 신하들이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고 사업의 근원을 생각하며 황제의 공덕을 찬송했다. 치국(治國)의 도가 행해지자, 모든 일들이 마땅함을 얻고 모든 법식(法式)이 생겨, 대의(大義)가 아름답게 드러나 후세에 널리 전해지며, 영원토록 계승되어 변함이 없으리라.

 

황제께서 친히 정사를 베푸시어 이제 천하를 평정했도다. 천하를 다스림에 게을리 하지 않으시니, 아침 일찍 일어나시고 밤늦게 주무시면서 백성들을 위해 장구(長久)한 이익을 세우시고, 백성들에 대한 가르침과 깨우침에 전념하셨다. 경전(經典)을 두루 가르치시니 원근이 모두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모두 황제의 성스러운 뜻을 받들며, 귀천이 분명하게 나뉘고 남녀가 예의를 따르며, 자신의 직분을 신중하게 준수했다. 안과 바깥이 밝게 구분되고 깨끗하지 않음이 없으니 후세에까지 덕정(德政)이 이어지며 교화의 미침이 무궁하리라. 황제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엄중한 훈계를 영원히 계승할지어다.”

 

於是乃並勃海以東,151) 過黃、腄,152) 窮成山, 登之罘,153) 立石頌秦德焉而去.

 

그리고 발해(勃海)를 끼고 동쪽으로 향해 황현(黃縣), 추현(腄縣)을 지나 성산(成山)에 오르고 지부산(之罘山)에 올라, 비석을 세우고 진(秦)의 공덕을 노래한 후 떠났다.

 

南登琅邪,154) 大樂之, 留三月. 乃徙黔首三萬戶琅邪臺下,155) 復十二歲.156) 作琅邪臺,157) 立石刻, 頌秦德, 明得意. 曰:158)

 

진시황이 남쪽으로 낭야산(琅邪山)에 올라서 매우 기뻐하며 석 달을 머물렀다. 이때 백성 3만 호를 낭야산 아래로 이주시키고 그들에게 12년간의 부세와 요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낭야대(琅邪臺)를 지어 비석을 세우고 비문을 새겨서 진의 공덕을 노래하면서 자기의 의기양양한 심정을 나타내었다.

 

維二十八年, 皇帝作始. 端平法度, 萬物之紀. 以明人事, 合同父子. 聖智仁義, 顯白道理. 東撫東土, 以省卒士.159) 事已大畢, 乃臨于海. 皇帝之功, 勸勞本事. 上農除末, 黔首是富. 普天之下, 摶心揖志.160) 器械一量,161) 同書文字. 日月所照, 舟輿所載. 皆終其命, 莫不得意. 應時動事, 是維皇帝. 匡飭異俗, 陵水經地.162) 憂恤黔首, 朝夕不懈. 除疑定法, 咸知所辟.163) 方伯分職, 諸治經易.164) 擧錯必當, 莫不如畫.165) 皇帝之明, 臨察四方. 尊卑貴賤, 不踰次行.166) 姦邪不容, 皆務貞良. 細大盡力, 莫敢怠荒. 遠邇辟隱,167) 專務肅莊. 端直敦忠, 事業有常. 皇帝之德, 存定四極. 誅亂除害, 興利致福. 節事以時, 諸産繁殖. 黔首安寧, 不用兵革.168) 六親相保, 終無寇賊. 驩欣奉敎, 盡知法式. 六合之內, 皇帝之土. 西涉流沙,169) 南盡北戶. 東有東海, 北過大夏.170) 人跡所至, 無不臣者. 功蓋五帝, 澤及牛馬. 莫不受德, 各安其宇.

 

“28년에 황제께서 처음으로 황제에 즉위하자, 법도를 바로잡아 만물의 준칙으로 삼고 인사(人事)를 밝히시니 부자지간이 화목하고, 성지(聖智)와 인의(仁義)로써 모든 도리를 분명히 드러내셨다. 또한 동쪽 땅을 순무하시고 군사들을 살펴보셨다. 대사(大事)가 다 끝나자 해안지역까지 왕림하셨다.

 

황제의 공적은 근본적인 대사를 부지런히 힘쓰신 것이며, 농업을 숭상하고 상업을 억제해 백성들을 풍요롭게 하니 천하의 백성들이 마음을 하나로 하고 뜻을 모았다. 각종 기물의 도량(度量)을 통일하고 문자의 서체를 통일했다. 무릇 해와 달이 비추는 곳과 배와 수레가 다니는 곳은 어디나 황제의 명이 행해지니 뜻을 얻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사시(四時)의 변화에 따라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은 오직 황제이시니, 다른 풍속을 바로잡고자 산을 넘고 물을 건너셨으며, 백성들을 가엾게 여겨 아침이나 저녁이나 게으름피지 않으시고, 의혹을 제거하고 법령을 제정하니 백성들이 모두 법으로 금한 일을 피할 줄 알게 되었다. 지방장관의 직무가 나뉘어서 모든 정무의 시행이 용이해지고 모든 조치가 타당해 바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황제께서 현명하심으로 사방을 두루 살피시니,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모두 자신의 분수를 지키며, 간교하고 사악함을 용납하지 않고 모두 충정(忠貞)과 선량함을 힘써 구했다. 작은 일이나 큰일을 막론하고 힘을 다해 감히 태만하거나 소홀히 함이 없으며, 멀건 가깝건 혹은 편벽한 곳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오로지 엄숙과 장중함에 힘쓰고, 정직하고 충성되어야만 하는 일이 꾸준히 지속될 수 있었다. 황제의 덕이 사방의 끝까지 안정시켰다. 난리를 일으킨 자들을 토벌해 해악을 제거하고 이로움을 일으켜서 복을 이루셨다.

 

농번기에는 노역(勞役)을 줄여주니 모든 산업이 번성했으며, 백성들이 편안해지니 무기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육친(六親)이 서로 의지하며 보살피니 마침내 도적이 없어졌다. 백성들이 모두 교화를 기쁘게 받들며 법령과 제도를 다 이해했다. 천지사방이 모두 황제의 영토이니, 서쪽으로는 유사(流沙)를 건너고 남쪽으로는 북호(北戶)까지 이르며 동쪽으로는 동해(東海)를 포함하고 북쪽으로는 대하(大夏)를 지나,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는 곳에는 신하라고 칭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황제의 공적은 오제(五帝)보다 뛰어났고, 은택이 소와 말에게까지 미쳤으며, 은덕을 받지 않은 자 없어 각자 평안한 생활을 영위했다.”

 

維秦王兼有天下, 立名爲皇帝, 乃撫東土, 至于琅邪. 列侯171)武城侯王離、列侯通武侯王賁、倫侯172)建成侯趙亥、倫侯昌武侯成、倫侯武信侯馮毋擇、丞相隗林、173) 丞相王綰、卿李斯、卿王戊、五大夫趙嬰、五大夫楊樛174)從, 與175)議於海上.176) 曰:「古之帝者, 地不過千里,177) 諸侯各守其封域, 或朝或否, 相侵暴亂, 殘伐不止, 猶刻金石, 以自爲紀. 古之五帝三王, 知敎不同, 法度不明, 仮威鬼神,178) 以欺遠方, 實不稱名,179) 故不久長. 其身未歿, 諸侯倍叛, 法令不行. 今皇帝幷一海內, 以爲郡縣, 天下和平. 昭明宗廟, 體道行德, 尊號大成. 群臣相與誦皇帝功德, 刻于金石, 以爲表經.」

 

진왕께서 천하를 통일하시어 이름을 세워서 황제라고 칭하고, 동쪽 영토를 순무해 낭야에 이르셨다. 열후(列侯)인 무성후(武城侯) 왕리(王離)와 통무후(通武侯) 왕분(王賁), 윤후(倫侯)인 건성후(建成侯) 조해(趙亥)와 창무후(昌武侯) 성(成), 무신후(武信侯) 풍무택(馮毋擇), 승상인 외림(隗林)과 왕관(王綰), 경(卿)인 이사(李斯)와 왕무(王戊), 오대부(五大夫)인 조영(趙嬰)과 양규(楊樛) 등이 황제를 수행하며 해상에서 황제의 공덕을 함께 의론했다.

 

고대의 제왕들은 영토가 사방 천리에 불과했지만 제후들이 각기 자기의 봉토만을 지키면서 어떤 이는 입조(入朝)하고 어떤 이는 입조하지 않으며, 서로 침략해 폭란을 일삼으며 잔살함이 그치지 않았음에도 금석(金石)에 글을 새겨 스스로를 기념했다.

 

旣已, 齊人徐市等上書, 言海中有三神山, 名曰蓬萊、方丈、瀛洲,180) 僊人居之. 請得齋戒, 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發童男女數千人, 入海求僊人.181)

 

일을 마치자 제나라 사람 서불(徐市) 등이 상서해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 하며 거기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재계하고 나서 동남동녀(童男童女)를 데리고 신선을 찾아 나서게 하소서.”라고 하자, 서불을 보내 수천 명의 동남동녀를 선발해 바다로 들어가서 신선을 찾도록 했다.

 

始皇還, 過彭城,182) 齋戒禱祠, 欲出周鼎泗水. 使千人沒水求之, 弗得. 乃西南渡淮水, 之衡山、183) 南郡.184) 浮江, 至湘山祠.185) 逢大風, 幾不得渡. 上問博士曰:「湘君神?」博士對曰:「聞之, 堯女, 舜之妻, 而葬此.」186)於是始皇大怒, 使刑徒三千人皆伐湘山樹, 赭其山.187) 上自南郡由武關歸.188)

 

진시황이 돌아오면서 팽성(彭城)을 지날 때, 재계하고 사당에서 기도한 후 사수(泗水)에 빠진 주정(周鼎)을 꺼내기 위해서, 천여 명을 보내 물속에 들어가서 정을 찾도록 했으나 얻지 못했다. 그러자 서남쪽으로 회하(淮河)를 건너 형산(衡山), 남군(南郡)으로 갔다가, 장강(長江)의 물줄기를 타고 상산사(湘山祠)에 이르렀으나, 마침 큰 바람을 만나서 하마터면 강을 건너지 못할 뻔했다. 진시황이 박사(博士)들에게 “상군(湘君)은 어떤 신인가?” 하고 묻자, 박사들이 “요(堯)임금의 여식으로서 순(舜)임금의 아내가 되었는데,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고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복역형 죄수 3천 명을 보내 상산(湘山)의 나무를 모두 베게 해 그 산을 붉은 벌거숭이로 만들었다. 시황제가 남군으로부터 무관(武關)을 거쳐 도성으로 돌아왔다.

 

二十九年, 始皇東游. 至陽武博狼沙中,189) 爲盜所驚. 求弗得, 乃令天下大索十日.

 

29년에 시황제가 동쪽으로 행차했다. 시황제가 양무현(陽武縣)의 박랑사(博狼沙)에 이르렀을 때 강도 때문에 몹시 놀랐다. 자객을 잡으려고 했으나 잡지 못하자, 10일간 대규모로 전국을 수색하게 명령했다.

 

 

登之罘, 刻石. 其辭曰:190)

 

지부(之罘)에 올라, 글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維二十九年, 時在中春,191) 陽和方起. 皇帝東游, 巡登之罘, 臨照于海. 從臣嘉觀,192) 原念休烈, 追誦本始. 大聖作治, 建定法度, 顯箸綱紀. 外敎諸侯, 光施文惠, 明以義理. 六國回辟,193) 貪戾無厭,194) 虐殺不已. 皇帝哀衆, 遂發討師, 奮揚武德. 義誅信行, 威燀旁達,195) 莫不賓服. 烹滅彊暴, 振救黔首, 周定四極. 普施明法, 經緯天下, 永爲儀則. 大矣哉! 宇縣之中,196) 承順聖意.197) 群臣誦功, 請刻于石, 表垂于常式.

 

“29년 음력 2월 봄, 바야흐로 봄기운이 일어나는 때에 황제께서 동쪽으로 행차하시어 지부에 올라서 대해(大海)를 바라보셨다. 황제를 따르던 신하들이 경치를 찬양하며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생각하고 창업의 공적을 가송했다. 위대한 성군께서 치도(治道)를 만드시고 법도를 제정하고 기강을 분명히 밝히셨으며, 밖으로는 제후들을 교화하고 널리 예악제도와 은덕을 베푸시어 대의와 도리를 밝히셨다. 육국(六國)의 군주들이 사악하고 탐욕스러워서 만족할 줄 모르니 학살이 멈추지 않았다. 황제께서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토벌해 무덕(武德)을 크게 떨치셨다.

 

정의에 의거해 주살하고 신의에 맞게 행동하시니, 황제의 위엄이 사방 먼 지방에 이르러 빛나고 제후들이 신하로서 조현하지 않는 자 없었다. 강포함을 소멸시키고 백성들을 구제하시어 천하를 두루 안정되게 하셨으며, 분명한 법도를 널리 베푸시어 천하를 다스리시니 영원토록 법칙이 되었다. 위대하도다. 천하의 백성들이 황제의 성스러운 뜻을 이어받아 순종하도다. 군신들이 황제의 공덕을 노래하며 비석에 그 공덕을 새겨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전범(典範)으로 후세에 전해지도록 간청했다.”

 

其東觀曰:維二十九年, 皇帝春游, 覽省遠方. 逮于海隅, 遂登之罘, 昭臨朝陽. 觀望廣麗, 從臣咸念, 原道至明. 聖法初興, 淸理疆內, 外誅暴彊. 武威旁暢, 振動四極, 禽滅六王. 闡幷天下, 甾害絶息, 永偃戎兵. 皇帝明德, 經理宇內, 視聽不怠.198) 作立大義, 昭設備器, 咸有章旗. 職臣遵分, 各知所行, 事無嫌疑. 黔首改化, 遠邇同度, 臨古絶尤. 常職旣定, 後嗣循業, 長承聖治. 群臣嘉德, 祗誦聖烈, 請刻之罘.

 

동관(東觀)에서 또 비문을 새겨서 이렇게 말했다.

 

“29년 봄날에 황제께서 행차하시어 먼 지방에까지 시찰하시며 해변에 이르셨다. 마침내 지부에 올라서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셨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면서 따르던 신하들이 모두 황제의 공적을 생각하며 그 치도(治道)가 지극히 밝았음을 회상했다. 황제께서 성법(聖法)을 처음 시행하시어 안으로는 국내를 깨끗이 정리하시고 밖으로는 강폭한 자들을 주살하셨다. 무위(武威)를 떨치시어 사방을 진동시키고 육국의 군주를 사로잡아 주멸했으며, 천하를 통일해 재해를 멈추게 하고 전쟁을 영원히 중지시키셨다.

 

황제께서 덕을 밝히시어 천하를 다스리고 보고 듣고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시며, 대의(大義)를 세우시고 각종 기물(器物)을 설치하시니 신분의 등급마다 모두 장기(章旗)가 생겼다. 신하들은 자신의 직분을 준수하고 각기 자신이 행해야 할 바를 알아 모든 일에 의혹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이 풍습을 개량하고 가까운 곳이나 먼 지방이나 모두 법도를 같게 하니 노년이 되도록 죄를 짓지 않았다. 일상적인 직무가 이미 확정되니 후손들은 선업을 따라 영원토록 이 성스러운 다스림을 계승토록 할지어다.”

 

군신들이 황제의 덕을 찬양하고 성스러운 업적을 노래하며 지부에 비석을 새기기를 간청했다.

 

旋, 遂之琅邪, 道上黨入.199)

 

얼마 후, 낭야에 갔다가 상당(上黨)을 거쳐서 도성으로 돌아왔다.

 

三十年, 無事.

三十一年200)十二月, 更名臘曰「嘉平」.201) 賜黔首里六石米, 二羊. 始皇爲微行咸陽,202) 與武士四人俱, 夜出逢盜蘭池,203) 見窘, 武士擊殺盜, 關中大索二十日. 米石千六百.

 

30년에는 나라에 별다른 일이 없었다.

 

31년 12월, 납월(臘月)을 가평(嘉平)이라고 개명했다. 각 리(里)마다 백성들에게 쌀 여섯 섬과 양 두 마리씩을 하사했다. 진시황이 함양을 미행(微行)하려고 무사 네 명과 함께 한밤중에 궁궐을 나왔다가, 난지(蘭池)에서 도적을 만나서 위험하게 되었으나 무사들이 도적을 물리쳐 죽였다. 이 일로 인해서 대규모로 관중(關中)을 20여 일간이나 수색했다. 이 해에 쌀값이 올라 쌀 한 섬에 1천 6백 전(錢)이나 했다.

 

 

三十二年, 始皇之碣石, 使燕人盧生求羨門、204) 高誓.205) 刻碣石門.206) 壞城郭, 決通隄防. 其辭曰:207)

 

 

32년, 진시황이 갈석산(碣石山)에 가서 연(燕)나라 사람 노생(盧生)을 시켜서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도록 했다. 갈석산의 산문(山門)에 비문을 새겼다. 성곽을 허물고 제방을 팠다. 그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써넣었다.

 

遂興師旅, 誅戮無道, 爲逆滅息. 武殄暴逆, 文復無罪,208) 庶心咸服. 惠論功勞, 賞及牛馬, 恩肥土域. 皇帝奮威, 德幷諸侯, 初一泰平. 墮壞城郭,209) 決通川防, 夷去險阻. 地勢旣定, 黎庶無繇,210) 天下咸撫. 男樂其疇, 女修其業, 事各有序. 惠被諸産, 久並來田,211) 莫不安所. 群臣誦烈, 請刻此石, 垂著儀矩.

 

 

“황제께서 군대를 일으켜 무도한 자를 주벌하시고 반역을 평정하셨으며, 무력으로 포악하고 반역하는 자들을 멸했다. 법령으로 죄 없는 자들을 보호해주시니, 백성들의 마음이 모두 황제께 복종하게 되었다. 공로를 헤아려서 소나 말에게까지 상을 내리니 황제의 은택이 전국에 베풀어졌다. 황제께서 위엄을 떨치시고 덕으로 제후들을 병합해 처음으로 통일해 천하를 태평하게 하셨다. 성곽을 허물고 하천의 제방을 파서 서로 통하게 해 험난한 지형을 제거하시고, 지세가 이미 평탄해져 백성들의 요역이 없어지니 천하가 다 편안했다. 남자는 밭에서 경작하기를 즐거워했고 여자는 집안일에 힘썼으며 일에는 각기 그 순서가 있었다. 황제의 은혜가 모든 산업에까지 미치고, 오래도록 서로가 협력해 밭을 경작하니 편안한 생활을 누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군신들이 황제의 위대한 업적을 노래하며 이 비석에 새겨서 영원히 전범으로 삼기를 간청했다.”

 

 

因使韓終、侯公、石生求仙人不死之藥. 始皇巡北邊, 從上郡入. 燕人盧生使212)入海還, 以鬼

神事, 因奏錄圖書, 曰「亡秦者胡也」.213) 始皇乃使將軍蒙恬發兵三十萬人北擊胡, 略取河南地.214)

 

 

이에 한종(韓終), 후공(侯公), 석생(石生)을 시켜서 신선들의 장생불사 약을 구하게 했다. 진시황이 북쪽 지방을 순무하면서 상군(上郡)을 지나서 도성으로 돌아왔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파견되어 바다에 들어갔다. 돌아와서는 귀신에 관한 일로 인해 참위(讖緯)의 글월을 상주했다. 거기에는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에 진시황은 장군 몽염(蒙恬)으로 하여금 군사 30만 명을 일으켜 북쪽으로 호인(胡人)을 공격하게 해, 하남지역을 점령했다.

 

三十三年, 發諸嘗逋亡人、贅婿、215) 賈人略取陸梁地,216) 爲桂林、217) 象郡、218) 南海,219) 以適遣戍.220) 西北斥逐匈奴. 自楡中221)並河以東,222) 屬之陰山,223) 以爲三十四縣, 城河上爲塞. 又使蒙恬渡河取高闕、224) (陶)[陽]山、北仮中,225) 築亭障以逐戎人. 徙謫, 實之初縣.226) 禁不得祠. 明星出西方.227) 三十四年, 適治獄吏不直者, 築長城及南越地.228)

 

33년, 병역이나 노역을 피해서 도망간 사람, 집이 가난해 몸을 팔아서 노예가 된 사람, 장사하는 사람 등을 징발해 육량(陸梁) 지역을 공격해 계림(桂林), 상군(象郡), 남해(南海) 등의 군(郡)을 설치하고, 죄를 지어 유배된 사람들을 보내 지키도록 했다. 또한 서북쪽의 흉노를 쫓아버렸다. 유중(楡中)으로부터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음산(陰山)에 이르기까지 44현을 설치했고, 황하 연변에 성곽을 쌓아서 요새로 삼았다. 또 몽염으로 하여금 황하를 건너 고궐(高闕), 양산(陽山), 북가(北假) 일대를 빼앗게 했고, 요새를 쌓아서 융인(戎人)들을 몰아내게 했다. 유배된 사람들을 이주시켜서 새로 설치한 현을 충실하게 했다. 명을 내려서 제사를 금지시켰다. 혜성이 서쪽에 나타났다.

 

34년, 시황제는 부정직한 관리들을 유배시켜서 장성(長城)을 수축하거나 남월(南越) 지역을 지키게 했다.

 

 

흉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연결한 장성. 현재 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축조한 것

 

始皇置酒咸陽宮, 博士七十人前爲壽. 僕射229)周靑臣進頌曰:「他時秦地不過千里, 賴陛下神靈明聖, 平定海內, 放逐蠻夷, 日月所照, 莫不賓服. 以諸侯爲郡縣, 人人自安樂, 無戰爭之患, 傳之萬世. 自上古不及陛下威德.」始皇悅. 博士齊人淳于越進曰:「臣聞殷周之王千餘歲, 封子弟功臣, 自爲枝輔. 今陛下有海內, 而子弟爲匹夫, 卒有田常、六卿之臣, 無輔拂,230) 何以相救哉? 事不師古而能長久者, 非所聞也. 今靑臣又面諛以重陛下之過, 非忠臣.」始皇下其議. 丞相李斯曰:「五帝不相復, 三代不相襲, 各以治, 非其相反, 時變異也. 今陛下創大業, 建萬世之功, 固非愚儒所知. 且越言乃三代之事, 何足法也? 異時諸侯並爭, 厚招游學. 今天下已定, 法令出一, 百姓當家則力農工, 士則學習法令辟禁.231) 今諸生不師今而學古, 以非當世, 惑亂黔首. 丞相臣斯昧死言:古者天下散亂, 莫之能一, 是以諸侯並作, 語皆道古以害今, 飾虛言以亂實, 人善其所私學,232) 以非上之所建立. 今皇帝幷有天下, 別黑白而定一尊. 私學而相與非法敎, 人聞令下, 則各以其學議之, 入則心非, 出則巷議, 夸主以爲名,233) 異取以爲高, 率群下以造謗. 如此弗禁, 則主勢降乎上, 黨與成乎下. 禁之便. 臣請史官非秦記皆燒之. 非博士官所職, 天下敢有藏詩、書、百家語者, 悉詣守、尉雜燒之. 有敢偶語詩書者棄市.234) 以古非今者族. 吏見知不擧者與同罪. 令下三十日不燒, 黥爲城旦.235) 所不去者, 醫藥卜筮種樹之書. 若欲有學法令,236) 以吏爲師.」制曰:「可.」

 

시황제가 함양궁에서 주연을 베풀었다. 박사 70명이 앞에 나와서 축수(祝壽)를 올렸다. 복야(僕射) 주청신(周靑臣)이 나아가 찬양하기를 “이전에 진(秦) 땅은 사방 천리에 불과했으나, 폐하의 신명(神明)과 지덕(智德)에 의지해 천하를 평정하고 만이(蠻夷)를 몰아내니,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라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후국을 군현으로 삼으시니, 사람마다 안락함을 누리고 전쟁의 근심이 사라져, 그 공적을 만세에까지 전하게 되었습니다. 상고(上古) 이래의 군주들도 폐하의 위엄과 덕망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시황제는 기뻐했다. 제(齊)나라 사람인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나아가 말했다.

 

“신이 듣건대 은(殷), 주(周)의 왕조가 천여 년 간 지속되면서 자제(子弟)와 공신들을 봉해 왕실을 보위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소유하셨지만 자제분들께서는 오히려 평민으로 계시는데, 만약 전상(田常)이나 진(晉)의 육경(六卿) 같은 신하들이 갑자기 나타나면 황제를 보필할 자가 없으니 어떻게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인을 본받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일은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주청신이 면전에서 아부하며 폐하의 과실을 가중시키려고 하니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닙니다.” 라고 했다.

 

 

시황제가 대신들에게 이 의견을 논의하게 하자, 승상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오제(五帝)의 다스림이 서로 중복되지 않고,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가 서로 이어받지 않고 각자의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린 것은 서로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변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대업을 창시해 만세의 공덕을 세웠으니, 진실로 어리석은 유생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순우월이 말한 것은 삼대(三代)의 일이니 어찌 본받을 만한 것이겠습니까? 전에는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으므로 높은 관직과 후한 봉록으로 유사(遊士)들을 초치했습니다.

 

이제 천하가 안정되어 법령이 통일되었고, 백성들은 집안에서 농공(農工)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령과 형법을 학습하고 있거늘, 지금 모든 유생들은 지금의 것을 배우지 않고 옛것만을 배워 당세(當世)를 비난하며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승상인 신 이사가 황공하게도 아뢰옵니다. 옛날에는 천하가 혼란스러워서 어느 누구도 천하를 통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후들이 서로 군사를 일으키고, 하는 말마다 모두 옛것을 말해 지금을 비난하고, 허망한 말을 늘어놓아 실질적인 것을 어지럽게 하고, 사람마다 자기가 개인적으로 배운 것을 찬양해 조정에서 건립한 제도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어 흑백을 가리고 모든 것이 지존(至尊, 황제를 가리킴) 한 분에 의해서 결정되도록 하셨거늘, 개인적으로 학습해 함께 조정의 법령과 교화를 비난하고, 법령을 들으면 각자 자기의 학문으로써 그 법령을 의론하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조정을 나와서는 길거리에서 의논하며,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해 명예를 구하고 기발한 주장을 내세워서 자신을 높이려고 하며, 백성들을 거느려 비방하는 말을 조성할 뿐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들을 금지하지 않으신다면 위에서는 황제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붕당(朋黨)이 형성될 것이오니, 그것을 금지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신이 청하옵건대 사관에게 명해 진(秦)의 전적이 아닌 것은 모두 태워버리고, 박사관(博士官)에서 주관하는 서적을 제외하고서 천하에 감히 수장되어 있는 『시(詩)』, 『서(書)』 및 제자백가의 저작들을 지방관에게 보내 모두 태우게 하며, 감히 두 사람 이상이 모여 『시』,『서』를 이야기하는 자는 저잣거리에서 사형시켜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며,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는 모두 멸족시키고, 이 같은 자들을 보고도 검거하지 않는 관리는 같은 죄로 다스리소서. 명령이 내려진 지 30일이 되어도 서적을 태우지 않는 자는 경형(黥刑)을 내리어 성단형(城旦刑)에 처하십시오. 다만 불태워 제거하지 않을 서적은 의약, 점복, 종수(種樹)에 관계된 서적뿐이며,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옵소서.”

 

이에 진시황이 영을 내려서 “그렇게 하라.”라 했다.

 

三十五年, 除道, 道九原237)抵雲陽,238) 塹山堙谷, 直通之. 於是始皇以爲咸陽人多, 先王之宮廷小, 吾聞周文王都豐, 武王都鎬, 豐鎬之閒, 帝王之都也. 乃營作朝宮渭南上林苑中. 先作前殿阿房,239) 東西五百步, 南北五十丈, 上可以坐萬人, 下可以建五丈旗.240) 周馳爲閣道, 自殿下直抵南山. 表南山之顚以爲闕. 爲復道, 自阿房渡渭, 屬之咸陽, 以象天極閣道絶漢抵營室也.241) 阿房宮未成;成, 欲更擇令名名之. 作宮阿房, 故天下謂之阿房宮. 隱宮242)徒刑者七十餘萬人, 乃分作阿房宮, 或作麗山. 發北山石槨, 乃寫蜀、荊地材皆至. 關中計宮三百, 關外四百餘. 於是立石東海上朐界中, 以爲秦東門. 因徙三萬家麗邑,243) 五萬家雲陽, 皆復不事十歲.

 

35년, 도로를 수축해 구원(九原)을 지나 운양(雲陽)까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곧바로 통하게 했다. 이때 진시황은 함양에는 사람이 많지만 선왕의 궁전은 너무 작다고 여겨 이르기를, “짐이 듣건대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풍(豐)에 도읍하고 무왕(武王)은 호(鎬)에 도읍했다고 하니, 풍과 호 두 지역 사이가 제왕의 도읍지이다”라 했다.

 

이에 위수의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궁전을 지었다. 먼저 아방(阿房)에 전전(前殿)을 건축했는데, 동서의 넓이가 5백 보(步)이며 남북의 길이가 50장(丈)으로 위쪽에는 1만 명이 앉을 수 있으며, 아래쪽에는 5장(丈) 높이의 깃발을 꽂을 수 있었다. 사방으로 구름다리를 만들어 궁전 아래부터 남산(南山)에 이르기까지 통하게 했으며, 남산 봉우리에 궐루(闕樓)를 세워서 표지로 삼았다. 또 구름다리를 수축해 아방에서 위수를 건너서 함양에까지 이르게 함으로써, 북극성, 각도성(閣道星)이 은하수를 건너 영실성(營室星)까지 이르는 모양을 상징했다.

 

아방궁이 완성되지 않았으나, 완성된 이후에 좋은 이름으로 명명하려고 했다. 결국 아방에 궁전을 지었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그것을 아방궁이라고 불렀다. 궁형(宮刑), 도형(徒刑)을 받은 70만여 명을 나누어 아방궁을 짓게 하거나 여산(驪山)을 조림(造林)하게 했다. 북산(北山)에서 석재(石材)를 캐내고 촉(蜀), 형(荊) 지역에서 목재를 운반해 모두 이곳에까지 이르게 했다. 관중(關中)에는 궁전 3백 채를 지었으며 함곡관 동쪽에는 4백여 채의 궁전을 지었다. 이에 동해(東海) 연변의 구산(朐山)에 비석을 세우고 진나라 국경의 동문(東門)으로 삼았다. 동시에 3만 가구를 여읍(驪邑)으로 이주시키고 5만 가구를 운양(雲陽)으로 이주시켜서 10년간 부세와 요역을 면제해주었다.

 

盧生說始皇曰:「臣等求芝奇藥仙者常弗遇, 類物有害之者. 方中, 人主時爲微行以辟惡鬼, 惡鬼辟, 眞人至. 人主所居而人臣知之, 則害於神. 眞人者, 入水不濡, 入火不爇,244) 陵雲氣, 與天地久長. 今上治天下, 未能恬倓. 願上所居宮毋令人知, 然后不死之藥殆可得也.」於是始皇曰:「吾慕眞人, 自謂『眞人』, 不稱『朕』.」乃令咸陽之旁二百里內宮觀二百七十復道甬道相連, 帷帳鍾鼓美人充之, 各案署不移徙. 行所幸, 有言其處者, 罪死. 始皇帝幸梁山宮,245) 從山上見丞相車騎衆, 弗善也. 中人或告丞相, 丞相後損車騎. 始皇怒曰:「此中人泄吾語.」案問莫服. 當是時, 詔捕諸時在旁者, 皆殺之. 自是後莫知行之所在. 聽事, 群臣受決事, 悉於咸陽宮.

 

노생(盧生)이 진시황에게 권하기를 “신들이 영지(靈芝), 선약(仙藥), 신선을 찾아다녔으나 매번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는 마치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황제께서 때때로 미행(微行)하시어 악귀를 물리치시고, 악귀가 물리쳐지면 진인(眞人)이 올 것입니다. 황제께서 머무르시는 장소를 신하들이 알게 되면, 신선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받게 될 것입니다. 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운기(雲氣)를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나 아직은 안정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원하옵건대 황제께서 거처하는 궁궐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신다면 아마 불사(不死)의 약을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진시황은 “짐(朕)이 평소 진인을 흠모했으니 이제부터 스스로를 진인이라고 부를 것이며 짐이라고 부르지 않겠노라.” 라고 말했다.

 

이에 명을 내려 함양 부근 2백 리 안의 궁관(宮關) 2백 7곳을 구름다리와 용도(甬道)로 서로 연결시켜, 휘장, 종고(鍾鼓), 미인들로 그곳을 채웠으며, 모두 등기된 부서에 따르게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했다. 황제가 행차해 머무를 경우, 그 거처를 말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했다.

 

진시황이 양산궁(梁山宮)에 행차했는데, 산 위에서 승상의 거마(車馬)가 많은 것을 보고 언짢아했다. 황궁의 어떤 사람이 그 사실을 승상에게 말하니 승상이 그 후 에 거마의 숫자를 줄였다. 그러자 진시황이 노하여, “이는 궁중의 누군가가 내 말을 발설한 것이로다.”라고 말하고 하나씩 심문했으나 죄를 인정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그 당시 곁에 있던 자들을 모두 잡아 죽이도록 명령하니, 이후로는 황제가 행차한 곳을 아는 자가 없었다. 황제가 정사를 처리하고 군신들이 결정된 정책을 접수하는 것이 다 함양에서 이루어졌다.

 

 

侯生246)盧生相與謀曰:「始皇爲人, 天性剛戾自用, 起諸侯, 幷天下, 意得欲從, 以爲自古莫及己. 專任獄吏, 獄吏得親幸. 博士雖七十人, 特備員弗用. 丞相諸大臣皆受成事, 倚辨於上. 上樂以刑殺爲威,247) 天下畏罪持祿, 莫敢盡忠. 上不聞過而日驕, 下懾伏謾欺以取容. 秦法, 不得兼方248)不驗, 輒死. 然候星氣者至三百人, 皆良士, 畏忌諱諛, 不敢端言其過. 天下之事無小大皆決於上, 上至以衡石量書,249) 日夜有呈, 不中呈250)不得休息. 貪於權勢至如此, 未可爲求仙藥.」於是乃亡去. 始皇聞亡, 乃大怒曰:「吾前收天下書不中用者盡去之. 悉召文學方術士甚衆, 欲以興太平, 方士欲練以求奇藥.251) 今聞韓衆252)去不報, 徐市等費以巨萬計, 終不得藥, 徒姦利相告日聞.253) 盧生等吾尊賜之甚厚, 今乃誹謗我, 以重吾不德也. 諸生在咸陽者, 吾使人廉問, 或爲訞言以亂黔首.」於是使御史悉案問諸生, 諸生傳相告引, 乃自除犯禁者四百六十餘人, 皆阬之咸陽, 使天下知之, 以懲後. 益發謫徙邊.254) 始皇長子扶蘇諫曰:「天下初定, 遠方黔首未集, 諸生皆誦法孔子, 今上皆重法繩之, 臣恐天下不安. 唯上察之.」始皇怒, 使扶蘇北監蒙恬於上郡.255)

 

후생(侯生)은 노생과 함께 모의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시황의 사람됨은 천성이 고집 세고 사나워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며, 제후 출신으로서 천하를 통일해 마음먹은 대로 일을 행하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자기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여기고 있소. 그리고 전문적으로 옥리를 임용했으니 옥리는 모두 황제의 친애와 총애를 받고 있거늘, 박사는 비록 70명이지만 숫자만을 충족시켰을 뿐 중용하지는 않았으며, 승상과 대신들은 모두 이미 결정된 일들을 명령받으니 황제에 의해서 모든 일이 처리되고 있소. 황제는 형벌과 살육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를 좋아하니 천하가 죄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봉록만을 유지하려고 할 뿐이며 감히 충성을 다하려 하지는 않소. 황제는 자신의 허물을 듣지 않고 날마다 교만해지며, 아랫사람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해 속이고 기만하며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있소. 진의 법률에는 두 가지 이상의 방술(方術)을 겸할 수 없게 했으며, 만약 그 방술에 영험이 없으면 즉시 사형에 처하게 되어 있소.

 

성상(星象)과 운기(雲氣)를 관측하는 자가 3백 명에 이르고 모두 뛰어난 선비들이지만 두려워하고 기피해 감히 황제의 허물을 직언하지 못하고 있으며, 천하의 일이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황제에 의해서 결정되니 황제가 읽어야 할 문서의 중량을 저울질해야할 지경이며 밤낮으로 정량이 있어서 그 정량에 이르지 못하면 휴식을 할 수가 없소.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니 그를 위해서 선약을 구해주어서는 안 될 것이오.”

 

그리고는 바로 도망쳐버렸다. 진시황은 후생과 노생이 도망쳤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에 천하의 쓸모없는 책들을 거두어 모두 불태우게 하고, 문학에 종사하는 선비들과 방술사(方術士)들을 모두 불러 모아 태평성세를 일으키고자 하고 방사들로 하여금 각지를 찾아다니며 선약을 구하게 했거늘, 지금 들으니 한중(韓衆, 韓終을 가리킴)이 한번 가더니 소식이 없다 하고, 서불(徐市) 등은 막대한 금액을 낭비하고서도 결국 선약을 구하지 못한 채 불법으로 이익을 챙기며 서로 고발하고 있다는 소식만을 매일 듣고 있다. 내가 노생 등을 존중해 그들에게 많은 것을 하사했으나 이제는 나를 비방하면서 나의 부덕(不德)을 가중시키고 있도다. 내가 사람을 시켜서 함양에 있는 이런 자들을 조사해보니 어떤 자는 요망한 말로써 백성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이에 어사(御史)를 시켜서 이런 자들을 조사하자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니, 진시황이 친히 법령으로 금지한 것을 범한 자 4백 60명을 사형죄로 판결해 모두 함양에 생매장하고 천하에 그것을 알려서 후세 사람들을 경계시켰다. 또한 유배된 자를 더 징발해 변경을 지키게 했다. 진시황의 장자(長子) 부소(扶蘇)가 간언해 말하기를

 

“이제 막 천하가 평정되었으나 먼 지방의 백성들은 귀속되지 않았으며 유생들은 모두 『시』, 『서』를 암송하며 공자를 본받고 있는데, 지금 황제께서 법을 엄하게 해 그들을 얽어매시니, 소자는 천하가 불안해질까 두렵습니다. 황제께서는 이런 사실을 살펴주소서.”

 

라고 하자, 진시황은 노하여 부소를 북쪽으로 상군(上郡)에 파견해 몽염을 감독하게 했다.

 

三十六年, 熒惑守心. 有墜星下東郡, 至地爲石,256) 黔首或刻其石曰「始皇帝死而地分」. 始皇聞之, 遣御史逐問, 莫服, 盡取石旁居人誅之, 因燔銷其石. 始皇不樂, 使博士爲仙眞人詩, 及行所游天下, 傳令257)樂人歌弦之. 秋, 使者從關東夜過華陰平舒道,258) 有人持璧遮使者曰:「爲吾遺滈池君.」259) 因言曰:「今年祖龍死.」260) 使者問其故, 因忽不見, 置其璧去. 使者奉璧具以聞. 始皇黙然良久, 曰:「山鬼固不過知一歲事也.」退言曰:「祖龍者, 人之先也.」使御府視璧, 乃二十八年行渡江所沈璧也. 於是始皇卜之, 卦得游徙吉. 遷北河楡中三萬家.261) 拜爵一級.

 

36년, 형혹(熒惑)이 심성(心星)의 세 별을 침범했다. 운성(隕星)이 동군(東郡)에 떨어졌는데 땅에 닿자 돌이 되었다. 백성들 중에 누군가 그 돌에 “진시황이 죽어 땅이 나뉜다.”라고 새겼다. 진시황이 그 사실을 듣고 어사를 파견해 하나씩 심문했으나 실토하는 자가 없자, 그 돌 가까이 거주하던 사람들을 모두 잡아 죽이고 그 돌을 불태워 없애버렸다. 진시황이 기분이 언짢아서 박사를 시켜 “선진인시(仙眞人詩)”를 짓게 하고, 천하를 순무해 가는 곳마다 전령(傳令), 악사들로 하여금 그것을 연주하고 노래하게 했다.

 

가을에 사자가 관동(關東)으로부터 밤중에 화음(華陰), 평서(平舒) 길을 지나는데 어떤 사람이 벽옥(璧玉)을 쥐고 사자를 막으며 말하기를 “나를 대신해 호지군(滈池君)에게 갖다 주게.”라고 했다. 이어 “금년에 조룡(祖龍)이 죽을 걸세.”라고 말했다. 사자가 그 까닭을 묻자, 그 벽옥을 놓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사자가 벽옥을 받들고 진시황에게 그 일을 상세히 보고하자, 진시황은 오랫동안 묵묵히 있다가 “산귀(山鬼)는 불과 1년간의 일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고, 또 퇴조(退朝)하며 말하기를 “조룡이라는 것은 사람의 조상일 뿐이다.”라 했다. 한편 어부(御府)로 하여금 벽옥을 조사하게 하니 그것은 바로 28년에 순무하면서 장강을 건너다가 빠뜨린 그 벽옥이었다. 이에 진시황이 그것을 점복(占卜)하게 하니 이동하는 것이 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북하(北河), 유중(楡中)에 3만 가구를 이주시키고 매 가구마다 작위 한 등급을 하사했다.

 

 

三十七年十月癸丑, 始皇出游. 左丞相斯從, 右丞相去疾守. 少子胡亥愛慕請從, 上許之. 十一月, 行至雲夢, 望祀虞舜於九疑山.262) 浮江下, 觀籍柯, 渡海渚.263) 過丹陽,264) 至錢唐.265) 臨浙江,266) 水波惡, 乃西百二十里從狹中渡.267) 上會稽, 祭大禹,268) 望于南海, 而立石刻269)頌秦德. 其文曰:270)

 

37년 10월 계축일(癸丑日), 시황제가 행차를 나서니 좌승상 이사가 수행하고 우승상 풍거질(馮去疾)이 도성을 지켰다. 막내아들 호해(胡亥)가 부러워하며 함께 따르기를 간청하니 황제가 허락했다. 11월에 운몽(雲夢)에 이르러 구의산(九疑山)에서 우(虞), 순(舜)을 제사 지낸 후, 장강의 물줄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며 적가(籍柯)를 바라보며 해저(海渚)를 건너서 단양(丹陽)을 지나 전당(錢唐)에 이르렀다. 절강(浙江)에 이르니 물결이 거세져 서쪽으로 1백 20리를 가서 강폭이 좁은 곳에서 건넜다. 회계산(會稽山)에 올라서 대우(大禹)에게 제사 지내고 남해(南海)를 바라보며 그곳에 비석을 세워서 진나라의 공덕을 노래했다. 그 비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皇帝休烈, 平一宇內, 德惠脩長.271) 三十有七年, 親巡天下, 周覽遠方. 遂登會稽, 宣省習俗, 黔首齋莊. 群臣誦功, 本原事跡, 追首高明.272) 秦聖臨國, 始定刑名, 顯陳舊章.273) 初平法式, 審別職任, 以立恆常. 六王專倍, 貪戾傲猛, 率衆自彊.274) 暴虐恣行,275) 負力而驕, 數動甲兵.276) 陰通閒使,277) 以事合從,278) 行爲辟方.279) 內飾詐謀,280) 外來侵邊, 遂起禍殃. 義威誅之, 殄熄281)暴悖,282) 亂賊滅亡. 聖德廣密, 六合之中, 被澤無疆. 皇帝幷宇, 兼聽萬事, 遠近畢淸. 運理群物, 考驗事實, 各載其名. 貴賤並通, 善否陳前, 靡有隱情. 飾省宣義,283) 有子而嫁,284) 倍死不貞. 防隔內外, 禁止淫泆, 男女絜誠. 夫爲寄豭,285) 殺之無罪, 男秉義程. 妻爲逃嫁,286) 子不得母,287) 咸化廉淸. 大治濯俗, 天下承風, 蒙被休經. 皆遵度軌, 和安敦勉, 莫不順令.288) 黔首脩絜, 人樂同則,289) 嘉保太平. 後敬奉法, 常治無極, 輿舟不傾. 從臣誦烈,290) 請刻此石, 光垂休銘.

 

“황제의 공덕이 훌륭해 천하를 통일하시니 그 은덕과 혜택이 장구했다. 37년에 친히 천하를 순무하시며 두루 먼 지방까지 유람하시고, 회계산에 올라 풍속과 습관을 두루 살피시니 백성들이 공경하며 흠모했다. 군신들이 황제의 공덕을 노래하고 황제의 사적을 생각하며 황제의 고명(高明)하심을 회상했다. 진(秦) 왕조의 성왕(聖王)이 즉위해 처음으로 형벌의 명칭을 제정하시고 옛날의 전장제도를 명백히 밝히셨으며, 처음으로 법식(法式)을 공평하게 하고 맡은 바 직책을 신중하게 구분함으로써 영원불변한 기강을 확립하셨다.

 

 

육국의 왕들이 전횡(專橫)하고,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오만하고 사나워져서 무리를 거느려 강력함을 과시하며, 포악하고 방자하며, 무력을 믿고 교만해 수차 군사를 일으켰다. 몰래 첩자를 통해 합종(合縱)을 도모하고 그릇된 행위를 일삼았으며, 안으로는 그들의 사악한 모의를 감추고 밖으로는 변경을 침략해 마침내 큰 재앙을 일으켰다. 정의에 입각해 위세를 떨치며 그들을 주살해 흉포와 반역을 소멸시키니 난리를 일으킨 도적들이 모두 멸망했도다.

 

황제의 성스러운 덕이 깊고 넓어 천하 사람들이 은택을 끝없이 입었으며,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고 만사를 다스리시니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모두 태평스럽게 되었다. 만물을 관리하고 사실을 증험해 각기 그 이름을 기록했으며,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의견을 표시하게 해, 선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을 앞에서 진술하게 하니, 숨길 일이 없게 되었다. 허물을 숨기고 도의(道義)가 뒤섞여 자식이 있으면서도 재가하는 것은 죽은 지아비를 배신하는 부정(不貞)한 짓이니, 내외(內外)를 나누어 구별하고 음탕함을 금지시키자 남녀가 순결하고 진실해졌다.

 

지어미가 있으면서도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는 남자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게 하니 남자는 마땅히 지켜야 할 규정을 준수했으며, 지아비를 버리고 달아나 재가한 여자는 자식들이 그녀를 어미로 인정하지 않게 하니, 모두 교화되어 정숙해졌다. 위대한 정치가 베풀어지니 풍속이 변화하고, 천하가 교화를 받아들이어 훌륭한 정치의 혜택을 입었으며, 모든 백성들이 규칙을 지키고 평화롭게 서로 권면하며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백성들이 선량하고 순결해 사람마다 즐거이 법령을 따르며 태평스러운 생활을 잘 영위했다. 후대 사람들이 법령을 경건하게 이어받아 변함없는 선정(善政)이 끝이 없으니, 수레와 배가 기울어지는 일이 없었다. 이에 수행 신하들이 황제의 공덕을 노래하며 이 비석에 새기어, 이 훌륭한 비문이 영원히 전해지기를 간청했다.”

 

還過吳, 從江乘渡.291) 並海上, 北至琅邪. 方士徐市等入海求神藥, 數歲不得, 費多, 恐譴, 乃詐曰:「蓬萊藥可得, 然常爲大鮫魚所苦,292) 故不得至, 願請善射與俱, 見則以連弩射之.」始皇夢與海神戰, 如人狀. 問占夢, 博士曰:「水神不可見, 以大魚蛟龍爲候. 今上禱祠備謹, 而有此惡神, 當除去, 而善神可致.」乃令入海者齎捕巨魚具, 而自以連弩候大魚出射之. 自琅邪北至榮成山,293) 弗見. 至之罘, 見巨魚, 射殺一魚. 遂並海西.

 

 

진시황이 돌아올 때 오현(吳縣)을 지나서 강승(江乘)에서 강을 건넜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가 낭야에 이르렀다. 방사(方士) 서불 등이 바다로 들어가 선약을 구했으나 몇 년 동안 얻지 못하고 비용만 많이 허비했다. 그는 문책 받을 것이 두려워 거짓으로 말하기를, “봉래의 선약은 구할 수는 있으나 항상 커다란 상어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까닭에 그곳에 도달할 수 없으니, 원하옵건대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청해 함께 보내주시면 상어를 보는 즉시 연노(連弩)로써 그것을 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진시황이 꿈에 해신(海神)과 싸웠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점몽가(占夢家)에게 물어보니 박사가 말하기를 “수신(水神)은 원래 볼 수 없는 것이지만, 대어(大魚)나 교룡(蛟龍)으로 징후를 삼습니다. 지금 황제께서 완전히 갖추어 정중하게 제사를 지냈지만, 이러한 악신(惡神)이 나타났으므로, 이 악신을 마땅히 제거해야 선신(善神)이 임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바다에 들어가는 자에게는 대어를 잡는 공구를 휴대하게 하고, 친히 연노를 가지고 대어를 기다렸다가 쏘게 했다. 낭야에서 북쪽으로 영성산(榮成山)에 이르렀지만 대어는 보이지 않았다. 지부에 이르러 커다란 물고기가 나타나자 화살을 쏘아 한 마리를 죽였다. 마침내 바다를 따라 서쪽으로 갔다.

 

至平原津而病.294) 始皇惡言死, 群臣莫敢言死事. 上病益甚, 乃爲璽書賜公子扶蘇曰:「與喪會咸陽而葬.」書已封, 在中車府令趙高295)行符璽事所, 未授使者. 七月丙寅, 始皇崩於沙丘平臺.296) 丞相斯爲上崩在外,297) 恐諸公子及天下有變, 乃袐之, 不發喪. 棺載轀凉車中,298) 故幸宦者參乘, 所至上食. 百官奏事如故, 宦者輒從轀凉車中可其奏事. 獨子胡亥、趙高及所幸宦者五六人知上死. 趙高故嘗敎胡亥書及獄律令法事, 胡亥私幸之. 高乃與公子胡亥、丞相斯陰謀破去始皇所封書299)賜公子扶蘇者, 而更詐爲丞相斯受始皇遺詔沙丘, 立子胡亥爲太子. 更爲書賜公子扶蘇、蒙恬, 數以罪,300) (其)賜死. 語具在李斯傳中. 行, 遂從井陘301)抵九原.302) 會暑, 上轀車臭, 乃詔從官令車載一石鮑魚,303) 以亂其臭.

 

진시황이 평원진(平原津)에 이르러서 병이 생겼다. 진시황은 죽는다는 말을 싫어했기 때문에 군신들도 감히 죽는 일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황제는 병이 날로 심해지자 공자(公子) 부소에게 보내는 새서(璽書)를 써서 말하기를, “돌아와서 상사(喪事)에 참여하고, 함양에 안장하라”라고 한 뒤 봉인해 성지(聖旨)를 집행하는 중거부령(中車府令) 조고(趙高)의 관부(官府)에 놓아둔 채, 사자에게 주지는 않았다.

 

 

7월 병인일(丙寅日), 진시황이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서거했다. 승상 이사는 황제가 외지에서 서거했기 때문에 모든 공자와 천하에 변란이 발생할까 두려워서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발상(發喪)하지 않았다.

 

 

진시황의 관을 온량거(轀涼車)에 싣고 예전에 총애 받던 환관으로 하여금 함께 타게 해, 이르는 곳마다 황제에게 음식을 올렸으며, 신하들이 예전과 다름없이 국사(國事)를 상주하면 환관이 수레 안에서 상주된 일을 허가했다. 오직 호해와 조고 및 총애 받던 환관 오륙 명 정도만 황제가 죽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호해는 예전에 조고가 자신에게 서법 및 옥률(獄律)과 법령을 가르친 적이 있어서 그를 개인적으로 총애했다. 이에 조고는 공자 호해, 승상 이사 등과 은밀히 모의해 진시황이 공자 부소에게 보내는 새서를 뜯어서 승상 이사가 사구(沙丘)에서 진시황의 유조(遺詔)를 받은 것처럼 거짓으로 꾸며서 호해를 태자로 삼았다.

 

 

또 공자 부소와 몽염에게 보내는 새서를 만들어 그들의 죄목을 열거하며 그들에게 죽을 것을 명했다. 이러한 일은 모두 「이사열전(李斯列傳)」에 기재되어 있다. 일행은 계속 가서 마침내 정경(井陘)으로부터 구원(久原)에 도착했다. 때마침 여름철이어서 황제의 온량거에서 시신이 썩는 악취가 나자, 수행관원에게 소금에 절여서 말린 고기 1석(石)을 수레에 싣게 해 시신의 악취와 어물의 냄새를 구분하지 못하게 했다.



각주

109 集解鄭玄曰:「音亭傳.」索隱音張戀反. 傳, 次也. 謂五行之德始終相次也. 漢書郊祀志曰:「齊人鄒子之徒論著終始五德之運, 始皇采用.」

110 正義勝, 申證反. 秦以周爲火德. 能滅火者水也, 故稱從其所不勝於秦.

111 索隱封禪書曰秦文公獲黑龍, 以爲水瑞, 秦始皇帝因自謂爲水德也.

112 正義周以建子之月爲正, 秦以建亥之月爲正, 故其年始用十月而朝賀.

113 正義旌音精. 旄音毛. 旗音其. 周禮云:「析羽爲旌, 熊虎爲旗.」旌節者, 編毛爲之, 以象竹節, 漢書云「蘇武執節在匈奴牧羊, 節毛盡落」是也. 韋昭云:「節者, 山國用人節, 澤國用龍節, 皆以金爲之. 道路以旌節, 門關用符節, 都鄙用管節, 皆用竹爲之.」

114 正義以水德屬北方, 故上黑.

115 集解張晏曰:「水, 北方, 黑, 終數六, 故以六寸爲符, 六尺爲步.」瓚曰:「水數六, 故以六爲名.」譙周曰:「步以人足爲數, 非獨秦制然.」索隱管子司馬法皆云六尺爲步. 譙周以爲步以人足, 非獨秦制. 又按:禮記王制曰「古者八尺爲步」, 今以周尺六尺四寸爲步, 步之尺數亦不同.

116 索隱水主陰, 陰刑殺, 故急法刻削, 以合五德之數.

117 正義于僞反.

118 正義易音以職反.

119 集解三十六郡者, 三川、河東、南陽、南郡、九江、鄣郡、會稽、潁川、碭郡、泗水、薛郡、東郡、琅邪、齊郡、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代郡、鉅鹿、邯鄲、上黨、太原、雲中、九原、鴈門、上郡、隴西、北地、漢中、巴郡、蜀郡、黔中、長沙凡三十五, 與內史爲三十六郡. 正義風俗通云:「周制天子方千里, 分爲百縣, 縣有四郡, 故左傳云上大夫受縣, 下大夫受郡. 秦始皇初置三十六郡以監縣也.」

120 集解漢書百官表曰:「秦郡守掌治其郡;有丞、尉, 掌佐守典武職甲卒;監御史掌監郡.」

121 集解應劭曰:「黔亦黎, 黑也.」

122 集解應劭曰:「古者以銅爲兵.」

123 集解徐廣曰:「音巨.」

124 索隱按:二十六年, 有長人見于臨洮, 故銷兵器, 鑄而象之. 謝承後漢書「銅人, 翁仲, 翁仲其名也」. 三輔舊事「銅人十二, 各重三十四萬斤. 漢代在長樂宮門前」. 董卓壞其十爲錢, 餘二猶在. 石季龍徙之鄴, 苻堅又徙長安而銷之也. 正義漢書五行志云:「二十六年, 有大人長五丈, 足履六尺, 皆夷狄服, 凡十二人, 見于臨洮, 故銷兵器, 鑄而象之.」謝承後漢書云:「銅人, 翁仲其名也.」三輔舊事云:「聚天下兵器, 鑄銅人十二, 各重二十四萬斤. 漢世在長樂宮門.」魏志董卓傳云:「椎破銅人十及鍾鐻, 以鑄小錢.」關中記云:「董卓壞銅人, 餘二枚, 徙淸門裏. 魏明帝欲將詣洛, 載到霸城, 重不可致. 後石季龍徙之鄴, 苻堅又徙入長安而銷之.」英雄記云:「昔大人見臨洮而銅人鑄, 至董卓而銅人毁也.」

125 正義曁, 其記反. 朝音潮. 鮮音仙. 海謂渤海南至揚、蘇、台等州之東海也. 曁, 及也. 東北朝鮮國. 括地志云:「高驪治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卽古朝鮮也.」

126 正義洮, 吐高反. 括地志云:「臨洮郡卽今洮州, 亦古西羌之地, 在京西千五百五十一里羌中. 從臨洮西南芳州扶松府以西, 並古諸羌地也.」

127 集解吳都賦曰:「開北戶以向日.」劉逵曰:「日南之北戶, 猶日北之南戶也.」

128 集解地理志西河有陰山縣. 正義塞, 先代反. 並, 白浪反. 謂靈、夏、勝等州之北黃河. 陰山在朔州北塞外. 從河傍陰山, 東至遼東, 築長城爲北界.

129 集解徐廣曰:「在長安西北, 漢武時別名渭城.」正義今咸陽縣北阪上.

130 集解徐廣曰:「在高陵縣.」正義今岐州雍縣東.

131 正義複音福. 屬, 之欲反. 廟記云:「北至九嵕、甘泉, 南至長楊、五柞, 東至河, 西至汧渭之交, 東西八百里, 離宮別館相望屬也. 木衣綈繡, 土被朱紫, 宮人不徙. 窮年忘歸, 猶不能遍也.」

132 正義三輔舊事云:「始皇表河以爲秦東門, 表汧以爲秦西門, 表中外殿觀百四十五, 後宮列女萬餘人, 氣上衝于天.」

133 正義隴西, 今隴右;北地, 今寧州也.

134 正義括地志云:「雞頭山在成州上祿縣東北二十里, 在京西南九百六十里. 酈元云蓋大隴山異名也. 後漢書隗囂傳云『王莽塞雞頭』, 卽此也.」按:原州平高縣西百里亦有笄頭山, 在京西北八百里, 黃帝雞山之所.

135 集解應劭曰:「回中在安定高平.」孟康曰:「回中在北地.」正義括地志云:「回中宮在岐州雍縣西四十里.」言始皇欲西巡隴西之北, 從咸陽向西北出寧州, 西南行至成州, 出雞頭山, 東還, 過岐州回中宮.

136 索隱爲宮廟象天極, 故曰極廟. 天官書曰「中宮曰天極」是也.

137 集解應劭曰:「築垣牆如街巷.」正義築音竹. 甬音勇. 應劭云:「謂於馳道外築牆, 天子於中行, 外人不見.」

138 集解應劭曰:「馳道, 天子道也, 道若今之中道然.」漢書賈山傳曰:「秦爲馳道於天下, 東窮燕齊, 南極吳楚, 江湖之上, 濱海之觀畢至. 道廣五十步, 三丈而樹, 厚築其外, 隱以金椎, 樹以靑松.」

139 集解韋昭曰:「鄒, 魯縣, 山在其北.」正義上, 時掌反. 鄒, 側留反. 嶧音亦. 國系云:「邾嶧山亦名鄒山, 在兗州鄒縣南三十二里. 魯穆公改『邾』作『鄒』, 其山遂從『邑』變. 山北去黃河三百餘里.」

140 正義晉太康地記云:「爲壇於太山以祭天, 示增高也. 爲墠於梁父以祭地, 示增廣也. 祭尙玄酒而俎魚. 墠皆廣長十二丈. 壇高三尺, 階三等, 而樹石太山之上, 高三丈一尺, 廣三尺, 秦之刻石云.」

141 正義泰山一曰岱宗, 東嶽也, 在兗州博城縣西北三十里. 山海經云:「泰山, 其上多玉, 其下多石.」郭璞云:「從泰山下至山頭, 百四十八里三百步.」道書福地記云:「泰山高四千九百丈二尺, 周迴二千里. 多芝草玉石, 長津甘泉, 仙人室. 又有地獄六, 曰鬼神之府, 從西上, 下有洞天, 周迴三千里, 鬼神考謫之府.」

142 集解服虔曰:「增天之高, 歸功於天.」張晏曰:「天高不可及, 於泰山上立封禪而祭之, 冀近神靈也.」瓚曰:「積土爲封. 謂負土於泰山上, 爲壇而祭之.」

143 正義封, 一作「復」, 音福.

144 集解服虔曰:「禪, 闡廣土地也.」瓚曰:「古者聖王封泰山, 禪亭亭或梁父, 皆泰山下小山. 除地爲墠, 祭於梁父. 後改『墠』曰『禪』.」正義父音甫. 在兗州泗水縣北八十里.

145 索隱其詞每三句爲韻, 凡十二韻. 下之罘、碣石、會稽三銘皆然.

146 正義飭音敕.

147 正義從, 財用反.

148 正義祗音脂.

149 正義長, 直良反.

150 集解徐廣曰:「隔, 一作『融』.」

151 正義並, 白浪反. 勃作「渤」, 蒲忽反.

152 集解地理志東萊有黃縣、腄縣. 正義腄, 逐瑞反. 字或作「陲」. 括地志云:「黃縣故城在萊州黃縣東南二十五里, 古萊子國也. 牟平縣城在黃縣南百三十里. 十三州志云牟平縣古腄縣也.」

153 集解地理志之罘山在腄縣. 正義罘音浮. 括地志云:「在萊州文登縣東北百八十里. 成山在文登縣西北百九十里.」窮猶登極也. 封禪書云:「八神, 五曰陽主;祠之罘;七曰日主, 祠成山, 成山斗入海.」又云:「之罘山在海中. 文登縣, 古腄縣也.」

154 集解今兗州東沂州、密州, 卽古琅邪也.

155 集解地理志越王句踐嘗治琅邪縣, 起臺館. 索隱山海經琅邪臺在渤海閒. 蓋海畔有山, 形如臺, 在琅邪, 故曰琅邪臺. 正義括地志云:「密州諸城縣東南百七十里有琅邪臺, 越王句踐觀臺也. 臺西北十里有琅邪故城. 吳越春秋云:『越王句踐二十五年, 徙都琅邪, 立觀臺以望東海, 遂號令秦、晉、齊、楚, 以尊輔周室, 歃血盟.』卽句踐起臺處.」括地志云:「琅邪山在密州諸城縣東南百四十里. 始皇立層臺於山上, 謂之琅邪臺, 孤立衆山之上. 秦王樂之, 留三月, 立石山上, 頌秦德也.」

156 正義復音福. 復三萬戶徙臺下者.

157 正義今琅邪臺.

158 索隱二句爲韻.

159 正義省, 山井反. 卒, 子忽反.

160 索隱摶, 古「專」字. 左傳云:「如琴瑟之摶壹.」揖音集.

161 正義內成曰器, 甲冑兜鍪之屬. 外成曰械, 戈矛弓戟之屬. 壹量者, 同度量也.

162 正義陵作「凌」, 猶歷也. 經, 界也.

163 正義音避.

164 正義易音以豉反. 言方伯分職治, 所理常在平易.

165 正義畫音戶卦反. 謂政理齊整, 分明若畫, 無邪惡.

166 正義音胡郎反.

167 正義辟, 匹亦反.

168 正義協韻音棘.

169 正義解見夏紀.

170 索隱協韻音戶. 下「無不臣者」音渚. 「澤及牛馬」音姥. 正義杜預云:「大夏, 太原晉陽縣.」按:在今幷州, 「遷實沈於大夏, 主參」, 卽此也.

171 集解張晏曰:「列侯者, 見序列.」

172 索隱爵卑於列侯, 無封邑者. 倫, 類也, 亦列侯之類.

173 索隱隗姓, 林名. 有本作「狀」者, 非. 顔之推云:「隋開皇初, 京師穿地得鑄秤權, 有銘, 云始皇時量器, 丞相隗狀、王綰二人列名, 其作『狀』貌之字, 時令校寫, 親所按驗.」王劭亦云然. 斯遠古之證也. 正義隗音五罪反.

174 正義音居虯反.

175 正義上才用反. 下音預. 言王離以下十人從始皇, 咸與始皇議功德於海上, 立石於琅邪臺下, 十人名字並刻頌.

176 正義此頌前後序兩句爲韻, 此三句爲韻.

177 正義過音戈. 千里謂王畿.

178 正義言五帝、三王仮借鬼神之威, 以欺服遠方之民, 若萇弘之比也.

179 正義稱, 尺證反.

180 正義漢書郊祀志云:「此三神山者, 其傳在渤海中, 去人不遠, 蓋曾有至者, 諸仙人及不死之藥皆在焉. 其物禽獸盡白, 而黃金白銀爲宮闕. 未至, 望之如雲;及至, 三神山乃居水下;臨之, 患且至, 風輒引船而去, 終莫能至云. 世主莫不甘心焉.」

181 正義括地志云:「亶洲在東海中, 秦始皇使徐福將童男女入海求仙人, 止在此州, 共數萬家. 至今洲上人有至會稽市易者. 吳人外國圖云亶洲去琅邪萬里.」

182 正義彭城, 徐州所理縣也. 州東外城, 古之彭國也. 搜神記云陸終弟三子曰籛鏗, 封於彭, 爲商伯. 外傳云殷末, 滅彭祖氏.

183 正義括地志云:「衡山, 一名岣嶁山, 在衡州湘潭縣西四十一里.」岣音苟. 嶁音樓.

184 正義今荊州也. 言欲向衡山, 卽西北過南郡, 入武關至咸陽.

185 正義括地志云:「黃陵廟在岳州湘陰縣北五十七里, 舜二妃之神. 二妃冢在湘陰北一百六十里靑草山上. 盛弘之荊州記云靑草湖南有靑草山, 湖因山名焉. 列女傳云舜陟方, 死於蒼梧. 二妃死於江湘之閒, 因葬焉.」按:湘山者, 乃靑草山. 山近湘水, 廟在山南, 故言湘山祠.

186 索隱列女傳亦以湘君爲堯女. 按:楚詞九歌有湘君、湘夫人. 夫人是堯女, 則湘君當是舜. 今此文以湘君爲堯女, 是總而言之.

187 正義赭音者.

188 集解應劭曰:「武關, 秦南關, 通南陽.」文穎曰:「武關在析西百七十里弘農界.」正義括地志云:「故武關在商州商洛縣東九十里, 春秋時少習也. 杜預云少習. 商縣武關也.」

189 集解地理志河南陽武縣有博狼沙. 正義狼音浪.

190 索隱三句爲韻, 凡十二韻.

191 正義中音仲. 古者帝王巡狩, 常以中月.

192 正義從, 才用反. 觀音琯.

193 正義必亦反.

194 正義於廉反.

195 集解徐廣曰:「燀, 充善反.」

196 集解宇, 宇宙. 縣, 赤縣.

197 索隱協韻音憶.

198 索隱怠, 協旗、疑韻, 音銅綦反. 故國語范蠡曰「得時不怠, 時不再來」, 亦以怠與(臺)[來]爲韻.

199 索隱道猶從也.

200 集解徐廣曰:「使黔首自實田也.」

201 集解太原眞人茅盈內紀曰:「始皇三十一年九月庚子, 盈曾祖父濛, 乃於華山之中, 乘雲駕龍, 白日升天. 先是其邑謠歌曰『神仙得者茅初成, 駕龍上升入泰淸, 時下玄洲戱赤城, 繼世而往在我盈, 帝若學之臘嘉平』. 始皇聞謠歌而問其故, 父老具對此仙人之謠歌, 勸帝求長生之術. 於是始皇欣然, 乃有尋仙之志, 因改臘曰『嘉平』.」索隱廣雅曰:「夏曰『淸祀』, 殷曰『嘉平』, 周曰『大蜡』, 亦曰『臘』, 秦更曰『嘉平』.」蓋應歌謠之詞而改從殷號也. 道書茅濛字初成, 今此云「茅濛初成」者爲神仙之道, 其意失也. 蓋由裴氏所引不明, 或後人增益「濛」字, 遂令七言之詞有衍爾.

202 集解張晏曰:「若微賤之所爲, 故曰微行也.」

203 集解地理志渭城縣有蘭池宮. 正義括地志云:「蘭池陂卽古之蘭池, 在咸陽縣界. 秦記云『始皇都長安, 引渭水爲池, 築爲蓬、瀛, 刻石爲鯨, 長二百丈』. 逢盜之處也.」

204 集解韋昭曰:「古仙人.」

205 正義亦古仙人.

206 集解徐廣曰:「一作『盟』.」

207 正義此一頌三句爲韻.

208 集解徐廣曰:「復, 一作『優』.」正義復音福. 言秦以武力能殄息暴逆, 以文訓道令無罪失, 故復除之.

209 正義墮音許規反. 壞音怪. 墮, 毁也. 壞, 坼也. 言始皇毁坼關東諸侯舊城郭也. 夫自頹曰壞, 音戶怪反.

210 正義音遙.

211 集解徐廣曰:「久, 一作『分』.」

212 正義音所吏反.

213 集解鄭玄曰:「胡, 胡亥, 秦二世名也. 秦見圖書, 不知此爲人名, 反備北胡.」

214 正義今靈、夏、勝等州, 秦略取之.

215 集解瓚曰:「贅, 謂居窮有子, 使就其婦家爲贅婿.」

216 索隱謂南方之人, 其性陸梁, 故曰陸梁. 正義嶺南人多處山陸, 其性强梁, 故曰陸梁.

217 集解韋昭曰:「今鬱林是也.」

218 集解韋昭曰:「今日南.」

219 正義卽廣州南海縣.

220 集解徐廣曰:「五十萬人守五嶺.」正義適音直革反. 戍, 守也. 廣州記云:「五嶺者, 大庾、始安、臨賀、揭楊、桂陽.」輿地志云:「一曰臺嶺, 亦名塞上, 今名大庾;二曰騎田;三曰都龐;四曰萌諸;五曰越嶺.」

221 集解徐廣曰:「在金城.」

222 集解服虔曰:「並音傍. 傍, 依也.」

223 集解徐廣曰:「在五原北.」正義屬, 之欲反. 按:五原, 今勝州也.

224 正義高闕, 山名, 在五原北. 兩山相對若闕, 甚高, 故言高闕.

225 集解晉灼曰:「王莽傳云『五原北仮, 膏壤殖谷』. 北仮, 地名也.」索隱高闕, 山名;北仮, 地名. 近五原. 正義酈元注水經云:「黃河逕河目縣故城西, 縣在北仮中.」北仮, 地名也. 按:河目縣屬勝州, 今名河北. 漢書地理志云屬五原郡.

226 索隱徙有罪而謫之, 以實初縣, 卽上「自楡中屬陰山, 以爲三十四縣」是也. 故漢七科謫亦因於秦.

227 集解徐廣曰:「皇甫謐云彗星見.」

228 正義謂戍五嶺, 是南方越地.

229 集解漢書百官表曰:「僕射, 秦官. 古者重武, 官有主射以督課之.」應劭曰:「僕, 主也.」正義射音夜.

230 正義蒲筆反.

231 正義令, 力性反. 辟音避.

232 集解徐廣曰:「私, 一作『知』.」

233 正義夸, 口瓜反.

234 集解應劭曰:「禁民聚語, 畏其謗己.」正義偶, 對也.

235 集解如淳曰:「律說『論決爲髡鉗, 輸邊築長城, 晝日伺寇虜, 夜暮築長城』. 城旦, 四歲刑.」

236 集解徐廣曰:「一無『法令』二字.」

237 集解地理志五原郡有九原縣.

238 集解徐廣曰:「表云道九原, 通甘泉.」

239 正義房, 白郎反. 括地志云:「秦阿房宮亦曰阿城, 在雍州長安縣西北一十四里.」按:宮在上林苑中, 雍州郭城西南面, 卽阿房宮城東面也. 顔師古云「阿, 近也. 以其去咸陽近, 且號阿房」.

240 索隱此以其形名宮也, 言其宮四阿旁廣也, 故云下可建五丈之旗也. 阿房, 後爲宮名. 正義三輔舊事云:「阿房宮東西三里, 南北五百步, 庭中可受萬人. 又鑄銅人十二於宮前. 阿房宮以慈石爲門, 阿房宮之北闕門也.」

241 索隱謂爲複道, 渡渭屬咸陽, 象天文閣道絶漢抵營室也. 常考天官書曰「天極紫宮後十七星絶漢抵營室, 曰閣道」.

242 正義餘刑見於市朝. 宮刑, 一百日隱於蔭室養之乃可, 故曰隱宮, 下蠶室是.

243 正義麗音離.

244 正義而說反.

245 集解徐廣曰:「在好畤.」正義括地志云:「俗名望宮山, 在雍州好畤縣西十二里, 北去梁山九里. 秦始皇(起)[紀]『從山上見丞相車騎衆, 弗善』, 卽此山也.」

246 集解說苑曰:「韓客侯生也.」

247 正義樂, 五孝反.

248 集解徐廣曰:「一云『幷力』.」正義言秦施法不得兼方者, 令民之有方伎不得兼兩齊, 試不驗, 輒賜死. 言法酷.

249 集解石百二十斤. 正義衡, 秤衡也. 言表牋奏請, 秤取一石, 日夜有程期, 不滿不休息.

250 正義中, 竹仲反.

251 集解徐廣曰:「一云『欲以練求』.」

252 正義音終.

253 集解徐廣曰:「一作『閒』.」

254 集解徐廣曰:「表云徙於北河、楡中, 耐徙三處. 拜爵一級.」

255 正義括地志云:「上郡故城在綏州上縣東南五十里, 秦之上郡城也.」

256 集解徐廣曰:「表云石晝隕.」

257 正義傳, 逐戀反. 令, 力呈反.

258 正義括地志云:「平舒故城在華州華陰縣西北六里. 水經注云『渭水又東經平舒北, 城枕渭濱, 半破淪水, 南面通衢. 昔秦之將亡也, 江神送璧於華陰平舒道, 卽其處也』.」

259 集解服虔曰:「水神也.」張晏曰:「武王居鎬, 鎬池君則武王也. 武王伐商, 故神云始皇荒淫若紂矣, 今亦可伐也.」孟康曰:「長安西南有滈池.」索隱按:服虔云水神, 是也. 江神以璧遺滈池之神, 告始皇之將終也. 且秦水德王, 故其君將亡, 水神先自相告也. 正義遺, 庾季反. 滈, 湖老反. 括地志云:「滈水源出雍州長安縣西北滈池. 酈元注水經云『滈水承滈池, 北流入渭』. 今按:滈池水流入來通渠, 蓋酈元誤矣.」張晏云:「武王居滈, 滈池君則武王也. 伐商, 故神云始皇荒淫若紂矣, 今武王可伐矣.」

260 集解蘇林曰:「祖, 始也. 龍, 人君象. 謂始皇也.」服虔曰:「龍, 人之先象也, 言王亦人之先也.」應劭曰:「祖, 人之先. 龍, 君之象.」

261 正義謂北河勝州也. 楡中卽今勝州楡林縣也. 言徙三萬家以應卜卦游徙吉也.

262 正義括地志云:「九疑山在永州唐興縣東南一百里. 皇覽冢墓記云舜冢在零陵郡營浦縣九疑山.」言始皇至雲夢, 望祭虞舜於九疑山也.

263 正義括地志云:「舒州同安縣東.」按:舒州在江中, 疑「海」字誤, 卽此州也.

264 正義括地志云:「丹陽郡故在潤州江寧縣東南五里, 秦兼幷天下, 以爲鄣郡也.」

265 正義錢唐, 今杭州縣.

266 集解晉灼曰:「其流東至會稽山陰而西折, 故稱浙. 音折.」

267 集解徐廣曰:「蓋在餘杭也. 顧夷曰『餘杭者, 秦始皇至會稽經此, 立爲縣』.」

268 正義上音上掌反. 越州會稽山上有夏禹穴及廟.

269 索隱望于南海而刻石. 三句爲韻, 凡二十四韻.

270 正義此二頌三句爲韻. 其碑見在會稽山上. 其文及書皆李斯, 其字四寸, 畫如小指, 圓鐫. 今文字整頓, 是小篆字.

271 索隱脩亦長也, 重文耳. 王劭按張徽所錄會稽南山秦始皇碑文, 「脩」作「攸」.

272 索隱今檢會稽刻石文「首」字作「道」, 雅符人情也.

273 正義作「彰」, 音章. 碑文作「畫璋」也.

274 正義碑文作「率衆邦强」.

275 正義寒彭反.

276 正義數音朔.

277 正義閒, 紀莧反, 又如字. 使, 所吏反.

278 正義合音閤. 從, 子容反.

279 正義行, 下孟反. 辟, 匹亦反.

280 索隱刻石文作「謀詐」.

281 集解徐廣曰:「音息.」

282 正義殄, 田典反. 暴, 白報反. 悖音背.

283 集解徐廣曰:「省, 一作『非』.」正義飾音式. 省, 山景反. 飾謂文飾也. 省, 過也.

284 正義謂夫死有子, 棄之而嫁.

285 索隱豭, 牡豬也. 言夫淫他室, 若寄豭之豬也. 豭音加.

286 正義謂棄夫而逃嫁於人.

287 正義言妻棄夫逃嫁, 子乃失母.

288 正義力呈反.

289 正義樂音岳.

290 正義從音才用反. 烈, 美也. 所隨巡從諸臣, 咸誦美, 請刻此石.

291 集解地理志丹陽有江乘縣. 索隱地埋志丹陽有江乘縣. 正義乘音時升反. 江乘故縣在潤州句容縣北六十里, 本秦舊縣也. 渡謂濟渡也.

292 正義鮫音交. 苦音苦故反.

293 正義卽成山也, 在萊州.

294 集解徐廣曰:「渡河而西.」正義今德州平原縣南六十里有張公故城, 城東有水津焉, 後名張公渡, 恐此平原郡古津也. 漢書公孫弘平津侯, 亦近此. 蓋平津卽此津, 始皇渡此津而疾.

295 集解伏儼曰:「主乘輿路車.」

296 集解徐廣曰:「年五十. 沙丘去長安二千餘里. 趙有沙丘宮, 在鉅鹿, 武靈王之死處.」正義括地志云:「沙丘臺在邢州平鄕縣東北二十里. 又云平鄕縣東北四十里.」按:始皇崩在沙丘之宮, 平臺之中. 邢州去京一千六百五十里.

297 正義爲, 于僞反.

298 正義棺音館. 又古患反.

299 正義去, 丘呂反.

300 正義數音色具反.

301 集解徐廣曰:「在常山.」

302 正義抵, 丁禮反. 抵, 至也. 從沙丘至勝州三千里.

303 正義鮑, 白卯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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