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中國歷史와文學/史記

史記 卷六. 秦始皇本期 Ⅲ

by 柳川 2019. 5. 11.

秦始皇本期 Ⅲ



行從直道至咸陽, 發喪. 太子胡亥襲位, 爲二世皇帝. 九月, 葬始皇酈山. 始皇初卽位, 穿治酈山, 及幷天下, 天下徒送詣七十餘萬人, 穿三泉, 下銅304)而致槨, 宮觀百官奇器珍怪徙臧滿之.305) 令匠作機弩矢, 有所穿近者輒射之. 以水銀爲百川江河大海, 機相灌輸,306) 上具天文, 下具地理. 以人魚膏爲燭,307) 度不滅者久之.308) 二世曰:「先帝後宮非有子者, 出焉不宜.」皆令從死, 死者甚衆. 葬旣已下, 或言工匠爲機, 臧皆知之, 臧重卽泄. 大事畢, 已臧, 閉中羨,309) 下外羨門, 盡閉工匠臧者, 無復出者. 樹草木以象山.310)

 

 

결국 직도(直道)를 따라서 함양에 도착한 후에야 발상했다. 태자 호해가 제위를 계승해 2세 황제(二世皇帝)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여산(酈山)에 진시황을 안장했다.

 

옛날 진시황이 처음 즉위해 여산에 치산(治山) 공사를 벌였는데,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전국에서 이송되어온 죄인 70만여 명을 시켜서 깊이 파게하고 구리물을 부어 틈새를 메워 외관을 설치했다. 모형으로 만든 궁관(宮觀), 백관(百官), 기기(奇器), 진괴(珍怪)들을 운반해 그 안에 가득 보관했다. 장인(匠人)에게 명령해 자동으로 발사되는 궁전(弓箭)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파내어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쏘게 했으며, 수은(水銀)으로 백천(百川), 강하(江河), 대해(大海)를 만들고, 기계로 수은을 주입해 흘러가도록 했다. 위에는 천문(天文)의 도형을 장식하고 아래에는 지리(地理)의 모형을 설치했으며, 도롱뇽의 기름으로 양초를 만들어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 했다.

 

2세 황제가 말하기를 “선제의 후궁(後宮)들 가운데 자식이 없는 자를 궁궐 밖으로 내쫓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며 명령을 내려서 모두 순장시켜버리니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매장이 끝나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장인(匠人)이 기계를 만들었고, 그 일에 참여한 노예들도 모두 그것을 알고 있는데 그들의 숫자가 많아서 누설될 것이라 했다. 장중한 상례가 끝나고 보물들도 이미 다 매장되자 묘도(墓道)의 가운데 문을 폐쇄하고, 또 묘도의 바깥문을 내려서 장인과 노예들이 모두 나오지 못하게 폐쇄하니 다시는 빠져나오는 자가 없었다. 묘지 바깥에 풀과 나무를 심어서 묘지가 마치 산과 같았다.

 

二世皇帝元年, 年二十一.311) 趙高爲郎中令,312) 任用事. 二世下詔, 增始皇寢廟犠牲及山川百祀之禮. 令群臣議尊始皇廟. 群臣皆頓首言曰:「古者天子七廟, 諸侯五, 大夫三, 雖萬世世不軼毁.313) 今始皇爲極廟, 四海之內皆獻貢職, 增犠牲, 禮咸備, 毋以加. 先王廟或在西雍,314) 或在咸陽. 天子儀當獨奉酌祠始皇廟. 自襄公已下軼毁. 所置凡七廟. 群臣以禮進祠, 以尊始皇廟爲帝者祖廟. 皇帝復自稱『朕』.」

 

2세 황제(二世皇帝) 원년, 황제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조고(趙高)를 낭중령(郞中令)으로 삼아 국사를 돌보게 했다. 2세 황제는 조령(詔令)을 내려서 시황의 침묘(寢廟)에 바치는 희생(犧牲)과 산천에 드리는 제사 및 여러 제사에 쓰이는 일체의 예물을 늘리게 명했다. 대신들에게 시황제의 묘를 존숭하는 문제를 상의하게 명령하니, 대신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 천자는 7묘(七廟),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를 두었으므로, 천년만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시황의 묘는 가장 높이 받드는 조묘(祖廟)로 전국 각지에서 모두 공물(貢物)을 헌상해, 희생을 늘리고 예를 두루 갖추어 다른 어떤 것도 이보다 더할 것이 없습니다. 선왕의 사묘(祠廟)는 서옹(西雍)에 있는 것도 있고, 함양(咸陽)에 있는 것도 있습니다만, 천자께서는 예법에 따라서 시황의 사묘에 친히 잔을 올리고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양공(襄公) 이하의 사묘는 모두 태묘(太廟)로 옮겨서 봉안하십시오. 지금 설치되어 있는 조묘는 모두 일곱으로 대신들이 모두 예에 따라서 제를 드리고 있으며, 시황의 묘를 황제의 시조묘(始祖廟)로서 높이고 있습니다. 황제는 예전처럼 ‘짐(朕)’이라고 자칭하십시오.”

 

二世與趙高謀曰:「朕年少, 初卽位, 黔首未集附. 先帝巡行郡縣, 以示彊, 威服海內. 今晏然不巡行, 卽見弱, 毋以臣畜天下.」春, 二世東行郡縣, 李斯從. 到碣石, 並海, 南至會稽, 而盡刻始皇所立刻石, 石旁著315)大臣從者名, 以章先帝成功盛德焉:

 

2세 황제는 조고와 의논해 이렇게 말했다.

 

“짐이 나이가 어리고 이제 막 즉위한 터이라 백성들이 미처 따르지를 아니하는구려. 선제(先帝)께서는 군현(郡縣)을 순무함으로써 국력의 강대함을 과시해 위엄으로 온 천하 사람들을 복종시켰는데, 이제 짐이 한가롭게 지내면서 순무하지 않는다면 약하게 보여서 천하를 통치할 도리가 없을 것이오.”

 

봄철에 2세 황제는 동쪽 지방의 군현을 순무하니, 이사(李斯)가 수행했다. 갈석산(碣石山)에 이른 다음,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행차해 회계산(會稽山)에 도착해, 시황제가 건립한 비석에 모두 글자를 새기고, 비석의 옆면에는 수행한 신하들의 이름을 새겨 넣어 선제의 업적과 성덕(盛德)을 밝혀놓았다.

 

皇帝曰:「金石刻盡始皇帝所爲也. 今襲號而金石刻辭不稱316)始皇帝, 其於久遠也317)如後嗣爲之者, 不稱成功盛德.」丞相臣斯、臣去疾、318) 御史大夫臣德昧死言:「臣請具刻詔書刻石, 因明白矣. 臣昧死請.」制曰:「可.」 遂至遼東而還.

 

2세 황제가 말하기를

 

“금석에 새겨진 것은 모두 시황께서 남기신 업적이오. 이제 ‘황제’라는 칭호를 그대로 이어받아 사용하면서 금석에 새긴 글귀에 ‘시황제’라고 칭하지 않는다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황위(皇位)를 계승한 후대의 황제가 한 일처럼 보여서 시황제의 업적과 성덕을 밝힐 수가 없을 것이오.”

 

라고 하니, 승상(丞相) 이사, 풍거질(馮去疾), 어사대부(御史大夫) 덕(德)이 황공한 마음으로 아뢰기를, “신 등이 황제의 조서를 자세히 이 비석에 새겨서 그 연유를 명백히 밝히게 해주십시오. 신 등은 황공한 마음으로 주청하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2세 황제는 “그렇게 하시오.”라고 재가했다.

 

그리고는 요동(遼東)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於是二世乃遵用趙高, 申法令. 乃陰與趙高謀曰:「大臣不服, 官吏尙彊, 及諸公子必與我爭, 爲之柰何?」高曰:「臣固願言而未敢也. 先帝之大臣, 皆天下累世名貴人也, 積功勞世以相傳久矣. 今高素小賤, 陛下幸稱擧, 令在上位, 管中事. 大臣鞅鞅, 特以貌從臣, 其心實不服. 今上出, 不因此時案郡縣守尉有罪者誅之, 上以振威天下, 下以除去上生平所不可者. 今時不師文而決於武力, 願陛下遂從時毋疑, 卽群臣不及謀. 明主收擧餘民, 賤者貴之, 貧者富之, 遠者近之, 則上下集而國安矣.」二世曰:「善.」乃行誅大臣及諸公子, 以罪過連逮少近官三郎,319) 無得立者, 而六公子戮死於杜. 公子將閭昆弟三人囚於內宮, 議其罪獨後. 二世使使令將閭曰:「公子不臣, 罪當死, 吏致法焉.」將閭曰:「闕廷之禮, 吾未嘗敢不從賓贊也;廊廟之位, 吾未嘗敢失節也;受命應對, 吾未嘗敢失辭也. 何謂不臣? 願聞罪而死.」使者曰:「臣不得與謀, 奉書從事.」將閭乃仰天大呼天者三, 曰:「天乎! 吾無罪!」昆弟三人皆流涕拔劍自殺. 宗室振恐. 群臣諫者以爲誹謗, 大吏持祿取容, 黔首振恐.

 

이때 2세 황제는 조고의 의견에 따라서 법령을 공표했다. 그리고는 은밀히 조고와 상의하기를 “대신들은 복종하지 않고, 관리들은 아직도 세력이 강력하며 게다가 여러 공자(公子)들은 기필코 나와 권력을 다투려고 하니 어찌해야 좋겠소?”라고 말했다. 조고는

 

“신은 본래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으나 지금껏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 선제께서 거느렸던 대신들은 모두가 여러 대에 걸쳐서 천하에 명망을 떨친 귀인(貴人)들로서 세상에 쌓은 공이 오래도록 전해옵니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비천한 신을 칭찬하고 높은 지위에 등용하시어 궁중의 일을 맡기시니, 대신들은 불만에 싸여 겉으로만 따르는 체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불복합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순무하시면서 어찌 이때를 이용해서 군현의 수위(守尉) 가운데 죄 있는 자들을 색출해 처형함으로써 크게는 천하에 위엄을 떨치고 작게는 황제께서 평소에 못마땅하게 여기던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으십니까? 지금은 문치(文治)를 숭상하지 아니하고 무력에서 결판이 날 것이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의심하지 않고 즉각 시세(時勢)에 따르시면, 대신들조차도 논의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현명한 임금은 버려진 인재들을 끌어 모아 비천한 사람도 귀하게 만들고, 빈곤한 사람도 부유하게 만들며, 멀어진 사람도 가까이 오게 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윗자리와 아랫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합하게 되어 온 나라가 편안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2세 황제는 “좋다.”라고 대답하고, 대신과 여러 공자들을 처형하니 여러 가지 죄명이 근시(近侍)의 작은 관직인 삼랑(三郎)에까지 미치어 능히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여섯 명의 공자는 두현(杜縣)에서 살육당했고, 공자 장려(將閭)의 형제 세 사람은 내궁(內宮)에 감금되었는데, 가장 나중에 논죄되었다. 2세 황제는 사자를 보내어 장려에게 말하기를 “공자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으므로 그 죄는 사형에 해당되기에, 형리(刑吏)가 형을 집행하노라.”라 했다. 그러자 장려가

 

“궁중의 의식(儀式)에서 나는 이제까지 감히 빈찬(賓贊)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조정의 자리에서는 이제껏 감히 예를 어긴 적이 없었으며,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응대(應對)할 때에는 이제껏 감히 실언한 적이 없었는데 어찌해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입니까? 죄명이라도 알고 나서 죽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하자, 사자는 “나는 죄명을 논의하는 데 참여할 수가 없으니, 다만 조서(詔書)를 받들어 삼가 일을 처리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장려는 하늘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세 번이나 “하늘이시여! 나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절규했다. 형제 세 사람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칼을 꺼내어 자결하니, 황족(皇族)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대신들의 간언(諫言)은 비방이라고 여겨졌으며, 고관들은 녹위(祿位)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사리고, 백성들은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四月, 二世還至咸陽, 曰:「先帝爲咸陽朝廷小, 故營阿房宮爲室堂. 未就, 會上崩, 罷其作者, 復土320)酈山. 酈山事大畢, 今釋阿房宮弗就, 則是章先帝擧事過也.」復作阿房宮. 外撫四夷, 如始皇計. 盡徵其材士321)五萬人爲屯衛咸陽, 令敎射狗馬禽獸. 當食者多,322) 度不足, 下調323)郡縣轉輸菽粟芻藁, 皆令自齎糧食, 咸陽三百里內不得食其谷. 用法益刻深.

 

4월에 2세 황제는 함양(咸陽)으로 돌아와서

 

“선제께서는 함양의 조정이 좁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아방궁을 수축하셨소. 그런데 실당(室堂)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선제의 붕어(崩御)를 만나 공사를 중단하고 그 인부들을 여산(酈山)에 보내어 복토(復土)하게 했소. 여산의 역사(役事)가 모두 끝난 지금, 아방궁의 건축을 내버려둔 채 손대지 않는다면, 이는 선제께서 벌이신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오.”

 

라고 말하더니, 아방궁을 다시 건축했다. 대외적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들을 위무(慰撫)하니 시황의 정책과 변함이 없었다. 건장한 병졸 5만 명을 징발해 함양에 주둔시키고 활쏘기와 군견(軍犬), 군마(軍馬), 금수(禽獸)의 조련을 익히게 했다. 그러나 먹어야 할 입은 많은데 따져보니 식량이 부족한지라, 각 군현에 양곡과 사료를 징발해 운반하고 보급하게 명을 내리고, 여기에 동원되는 인부들은 모두 각자 자기 양식을 휴대하게 해, 함양을 중심으로 3백 리 이내의 지역에서는 이 곡식을 먹을 수 없도록 했다. 법의 집행이 더욱 가혹해졌다.

 

七月, 戍卒陳勝324)等反故荊地, 爲「張楚」.325) 勝自立爲楚王, 居陳, 遣諸將徇地. 山東郡縣少年苦秦吏, 皆殺其守尉令丞反, 以應陳涉, 相立爲侯王, 合從西鄕, 名爲伐秦, 不可勝數也. 謁者326)使東方來, 以反者聞二世. 二世怒, 下吏. 後使者至, 上問, 對曰:「群盜, 郡守尉方逐捕, 今盡得, 不足憂.」上悅. 武臣自立爲趙王, 魏咎爲魏王, 田儋327)爲齊王. 沛公起沛. 項梁擧兵會稽郡.

 

7월에 수졸(戍卒) 진승(陳勝) 등이 옛 형(荊) 땅에서 반란을 일으켜서 ‘장초(張楚)’라고 이름했다. 진승은 스스로 초왕(楚王)이 되어 진현(陳縣)에 주둔하면서 여러 장수들을 파견해 땅을 점령하게 했다. 진(秦)의 관리들에게 고초를 당하던 산동(山東) 각지의 젊은이들은 모두 그 지방의 군수(郡守), 군위(郡尉), 현령(縣令), 현승(縣丞)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켜서 진승에게 동조했다. 그들은 서로 후(侯), 왕(王)이 되어 연합하고 서쪽으로 진격하며 진나라를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니,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동쪽으로 사신 갔던 알자(謁者)가 돌아와서 반란이 일어난 일을 2세 황제에게 보고하니 2세는 노하여 사자를 하옥시키도록 했다. 그 후 다른 사자가 또 도착하자, 2세가 물으니 사자는 “그들은 도적떼들이온대 각 군의 수위(守尉)들이 추격, 체포해 지금은 모두 잡아들였으니 그다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황제는 기뻐했다.

 

무신(武臣)은 스스로 조왕(趙王)이 되었고, 위구(魏咎)는 위왕(魏王)이 되었으며, 전담(田儋)은 제왕(齊王)이 되었다. 패공(沛公)은 패현(沛縣)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항량(項梁)은 회계군(會稽郡)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二年冬, 陳涉所遣周章等將西至戱,328) 兵數十萬. 二世大驚, 與群臣謀曰:「柰何?」少府章邯曰:329)「盜已至, 衆彊, 今發近縣不及矣. 酈山徒多, 請赦之, 授兵以擊之.」二世乃大赦天下, 使章邯將, 擊破周章軍而走, 遂殺章曹陽.330) 二世益遣長史司馬欣、董翳佐章邯擊盜, 殺陳勝城父,331) 破項梁定陶,332) 滅魏咎臨濟.333) 楚地盜名將已死, 章邯乃北渡河, 擊趙王歇等於鉅鹿.334)

 

2년 겨울에 진승이 파견한 주장(周章) 등은 서쪽으로 진격해 희수(戲水)에 이르니 병력이 10만이었다. 2세는 크게 놀라서 여러 신하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의논했다. 소부(少府) 장한(章邯)이 이렇게 말했다.

 

“도적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며 그 수가 많고 기세가 강대하니, 지금 가까운 고을에서 군사를 징발하기엔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여산에 죄수들이 많이 있사오니, 청컨대 그들에게 사면을 내리고 무기를 지급해 도적을 격퇴하게 하십시오.”

 

2세는 이에 천하에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리고 장한으로 하여금 그들을 거느리고 주장의 군사를 격파하게 하니, 마침내 장한은 조양(曹陽)에서 주장을 죽였다. 2세는 또 장사(長史) 사마흔(司馬欣)과 동예(董翳)를 파견해 장한을 도와 도적을 격퇴하게 했다. 진승을 성보(城父)에서 죽이고, 항량을 정도(定陶)에서 무찔렀으며, 위구를 임제(臨濟)에서 죽였다. 초(楚) 땅의 도적의 명장들이 죽고 나자, 장한은 북으로 황하(黃河)를 건너 거록(巨鹿)에서 조왕(趙王) 헐(歇) 등을 공략했다.

 

趙高說二世曰:「先帝臨制天下久, 故群臣不敢爲非, 進邪說. 今陛下富於春秋, 初卽位, 柰何與公卿廷決事? 事卽有誤, 示群臣短也. 天子稱朕, 固不聞聲.」335) 於是二世常居禁中,336) 與高決諸事. 其後公卿希得朝見, 盜賊益多, 而關中卒發東擊盜者毋已. 右丞相去疾、左丞相斯、將軍馮劫進諫曰:「關東群盜並起, 秦發兵誅擊, 所殺亡甚衆, 然猶不止. 盜多, 皆以戌漕轉作事苦, 賦稅大也. 請且止阿房宮作者, 減省337)四邊戍轉.」二世曰:「吾聞之韓子曰:『堯舜采椽不刮,338) 茅茨不翦, 飯土,339) 啜土形,340) 雖監門之養,341) 不觳於此.342) 禹鑿龍門, 通大夏,343) 決河亭水,344) 放之海, 身自持築臿,345) 脛毋毛, 臣虜之勞不烈於此矣.』346) 凡所爲貴有天下者, 得肆意極欲, 主重347)明法, 下不敢爲非, 以制御海內矣. 夫虞、夏之主, 貴爲天子, 親處窮苦之實, 以徇百姓, 尙何於法? 朕尊萬乘, 毋其實, 吾欲造千乘之駕, 萬乘之屬, 充吾號名. 且先帝起諸侯, 兼天下, 天下已定, 外攘四夷以安邊竟,348) 作宮室以章得意, 而君觀先帝功業有緖. 今朕卽位二年之閒, 群盜並起, 君不能禁, 又欲罷先帝之所爲, 是上毋以報先帝, 次不爲朕盡忠力,349) 何以在位?」下去疾、斯、劫吏, 案責他罪. 去疾、劫曰:「將相不辱.」自殺. 斯卒囚,350) 就五刑.

 

조고가 2세에게 권하기를

 

“선제께서는 등극해 천하를 다스린 것이 오래되었기 때문에, 군신들이 감히 그릇된 짓을 하거나 사악한 말을 진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폐하는 젊으신 데다 이제 막 즉위하셨거늘, 어찌하여 조정에서 공경(公卿)들과 더불어 국사(國事)를 결정하려고 하십니까? 일에 잘못이 있으면 군신들에게 폐하의 단점을 보이게 됩니다. 천자가 짐이라고 자칭하는 것은 본래 천자의 소리를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2세는 늘 금중(禁中)에 거처하면서 조고와 함께 모든 국사를 결정했다. 그 후 로 공경들이 천자를 조현(朝見)할 수 있는 기회가 아주 드물어졌다. 도적(반란군)이 갈수록 많아지자, 관중(關中)의 병졸들을 징발해 동쪽으로 도적을 토벌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우승상(右丞相) 풍거질, 좌승상(左丞相) 이사, 장군 풍겁(馮劫)이 간언하기를,

 

“관동지방에서 도적의 무리가 동시에 봉기하자 우리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토벌해, 매우 많은 자들을 죽였습니다만 아직 평정하지 못했습니다. 도적이 많아지는 것은 모두 병역과 각종 요역의 일이 고달프고, 부세(賦稅)가 과중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아방궁의 건축을 일시 중단하고 전국의 군역(軍役)과 운송의 요역을 경감해주십시오.”라 했다.

 

그러자 2세는 이렇게 말했다.

 

“내 들으니 한비(韓非)가 말하기를 ‘요순은 나무를 베어다가 깎지도 않은 채로 서까래를 만들었고, 짚으로 지붕을 이으면서 처마 끝도 잘라내지 않았으며, 질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질그릇에 물을 담아 마셨으니, 설사 문지기의 봉양이라고 해도 이보다 궁핍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禹)는 용문(龍門)을 뚫어 대하(大夏)를 소통시키고, 황하의 막힌 물길을 터서 바다로 흐르게 했는데, 몸소 공이와 가래를 들어 정강이의 털조차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으니, 노예의 수고로움도 이보다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소.

 

대개 천하를 소유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 내키는 대로 다할 수 있고, 군주가 엄중히 법률제도를 밝혀두면 아랫사람들이 감히 그릇된 짓을 하지 못하니 이로써 천하를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오.

 

우(虞), 하(夏)의 임금은 천자의 귀한 몸이었음에도 직접 궁핍하고 고단한 실정을 체험하며 백성들을 위해 희생했으니 본받을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소? 짐은 존귀하기가 만승(萬乘)의 천자이지만 걸맞는 실상이 없으니, 천승(千乘)의 친위대와 만승의 군대를 조직해 나의 칭호에 걸맞게 하려고 하오. 그리고 선제께서는 제후의 신분에서 일어나 천하를 겸병하시고, 천하가 평정된 다음에는 대외적으로 사방 오랑캐를 물리쳐서 변방을 안정시키고, 대내적으로는 궁실을 지어서 뜻을 성취했음을 나타내 보이셨으니, 그대들도 선제께서 남기신 업적들을 보았을 것이오.

 

이제 짐이 즉위한 후 이년 동안 도적떼가 여기저기서 일어나는데도 그대들은 막지 못하고, 또 선제의 업적마저 버리려고 하니, 이는 위로는 선제에게 보답하지 못하고 다음으로는 짐에게 충성을 다하지 않는 것이니, 이러고서도 어떻게 관직을 차지하고 있소?”

 

이에 풍거질, 이사, 풍겁을 옥리(獄吏)에게 회부해 그들의 죄를 심문하게 했다. 풍거질과 풍겁은 “장상(將相)은 모욕을 당하지 않는다.”라며 자살했고, 이사는 결국 옥에 갇혀서 오형(五刑)을 받았다.

 

 

三年, 章邯等將其卒圍鉅鹿, 楚上將軍項羽將楚卒往救鉅鹿. 冬, 趙高爲丞相, 竟案李斯殺之. 夏, 章邯等戰數卻, 二世使人讓邯, 邯恐, 使長史欣請事. 趙高弗見, 又弗信. 欣恐, 亡去, 高使人捕追不及. 欣見邯曰:「趙高用事於中, 將軍有功亦誅, 無功亦誅.」項羽急擊秦軍, 虜王離, 邯等遂以兵降諸侯. 八月己亥,351) 趙高欲爲亂, 恐群臣不聽, 乃先設驗, 持鹿獻於二世, 曰:「馬也.」二世笑曰:「丞相誤邪? 謂鹿爲馬.」問左右, 左右或黙, 或言馬以阿順趙高. 或言鹿(者), 高因陰中諸言鹿者以法. 後群臣皆畏高.

 

3년에 장한(章邯) 등이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거록(巨鹿)을 포위하자, 초(楚)의 상장군(上將軍) 항우(項羽)가 초의 병졸을 거느리고 거록으로 달려가서 구원했다. 겨울에 조고(趙高)는 승상이 되어 마침내 이사를 판결해 살해했다. 여름에 장한 등이 싸움에서 여러 차례 패퇴하자, 2세는 사신을 보내어 장한을 질책했다. 장한은 두려움에 장사(長史) 사마흔을 보내어 하명을 청했으나 조고는 만나주지도 않고 또 믿어주지도 않으므로, 사마흔이 두려워 달아나버렸다. 조고는 사람을 시켜서 체포하게 했으나 추격이 미치지 못했다. 사마흔은 장한을 만나 “조고가 조정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장군께서 세운 공이 있어도 죽임을 당할 것이며, 공이 없어도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항우가 진(秦)의 군사를 기습해 왕리(王離)를 사로잡으니, 장한 등은 마침내 병졸을 이끌고 제후에게 투항했다.

 

8월 기해일에 조고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군신들이 듣지 않을까 염려되자, 먼저 시험해보기 위해서 2세에게 사슴을 바치며 말하기를 “말(馬)입니다.”라 했다. 2세는 빙그레 웃으며 “승상이 틀렸을 것이오. 사슴을 말이라고 하는구려.”라고 말하고는 주변의 군신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은 묵묵히 있으면서 대꾸를 하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말이라고 대답해 조고에게 아부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사슴이라고 말했다. 조고는 은밀하게 사슴이라고 말한 사람을 법을 빙자해 모함했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다음, 군신들은 모두 조고를 두려워했다.

 

高前數言「關東盜毋能爲也」, 及項羽虜秦將王離等鉅鹿下而前, 章邯等軍數卻, 上書請益助, 燕、趙、齊、楚、韓、魏皆立爲王, 自關以東, 大氐352)盡畔秦吏應諸侯, 諸侯咸率其衆西鄕. 沛公將數萬人已屠武關, 使人私於高, 高恐二世怒, 誅及其身, 乃謝病不朝見. 二世夢白虎齧其左驂馬, 殺之, 心不樂, 怪問占夢. 卜曰:「涇水爲祟.」353)二世乃齋於望夷宮,354) 欲祠涇, 沈四白馬. 使使責讓高以盜賊事. 高懼, 乃陰與其婿咸陽令閻樂、其弟趙成謀曰:「上不聽諫, 今事急, 欲歸禍於吾宗. 吾欲易置上, 更立公子嬰. 子嬰仁儉, 百姓皆載其言.」使郎中令爲內應,355) 詐爲有大賊, 令樂召吏發卒, 追劫樂母置高舍. 遣樂將吏卒千餘人至望夷宮殿門, 縛衛令僕射, 曰:「賊入此, 何不止?」衛令曰:「周廬設卒甚謹,356) 安得賊敢入宮?」樂遂斬衛令, 直將吏入' 行射, 郎宦者大驚, 或走或格, 格者輒死, 死者數十人. 郎中令與樂俱入, 射上幄坐幃. 二世怒, 召左右, 左右皆惶擾不鬥. 旁有宦者一人, 侍不敢去. 二世入內, 謂曰:「公何不蚤告我? 乃至於此!」宦者曰:「臣不敢言, 故得全. 使臣蚤言, 皆已誅, 安得至今?」閻樂前卽二世數曰:「足下驕恣,357) 誅殺無道, 天下共畔足下, 足下其自爲計.」二世曰:「丞相可得見否?」樂曰:「不可.」二世曰:「吾願得一郡爲王.」弗許. 又曰:「願爲萬戶侯.」弗許. 曰:「願與妻子爲黔首, 比諸公子.」閻樂曰:「臣受命於丞相, 爲天下誅足下, 足下雖多言, 臣不敢報.」麾其兵進. 二世自殺.

 

조고는 과거 여러 차례에 걸쳐서 “관동(關東)의 도적들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항우가 진의 장수 왕리 등을 거록에서 사로잡고 계속 진격하자, 장한 등은 여러 차례 패퇴를 거듭해 상소해 원조를 요청했다. 연(燕), 조(趙), 제(齊), 초(楚), 한(韓), 위(魏)는 모두 자립(自立)해 왕이 되었다. 함곡관(函谷關) 동쪽은 모두 진나라 관리를 배반하고 제후들에게 호응했으며, 제후들은 모두 자신들의 군사를 이끌고 서쪽을 향해서 진격했다. 패공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무관(武關)을 함락시킨 후, 사람을 보내어 조고와 은밀히 접촉했다.

 

이에 조고는 2세가 노했으니 주벌(誅罰)이 자신에게 미칠까 두려워해 병을 핑계 삼아 조회에 나가지 않았다. 2세는 자신의 좌참마(左驂馬)를 물어뜯는 백호(白虎)를 죽이는 꿈을 꾸고 나서, 마음이 언짢고 괴이하게 여겨져서 점쟁이에게 해몽하게 했더니, “경수(涇水)의 수신(水神)이 재앙을 일으킨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에 2세는 망이궁(望夷宮)에서 재계하고, 경수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자 백마 네 필을 경수에 빠뜨렸다. 사신을 보내 조고에게 도적의 일에 대해 문책하자 조고는 두려워서 몰래 사위 함양령(咸陽令) 염락(閻樂), 아우 조성(趙成)과 의논했다.

 

“황제가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더니만 이제 사태가 급박해지자 책임을 우리 가문으로 돌리려고 한다. 나는 천자를 폐위시키고 공자(公子) 영(嬰)을 다시 세우려고 한다. 공자 영은 인자하고 겸손해 백성들이 모두 그의 말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는 낭중령(郎中令)으로 하여금 궁내에서 호응하게 하고, 거짓으로 큰 도적이 있다고 해 염락에게 관리들을 불러 모으고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는 한편, 곧바로 염락의 모친을 위협해 조고의 부중(府中)에 연금시켰다. 조고는 또한 염락에게 군사 천여 명을 주어 망이궁의 전문(殿門)으로 보내 위령(衛令)과 복야(僕射)를 포박하고는 “도적이 여기까지 들어왔거늘 어찌해 막지 않았는가?”라고 하니, 위령은 “궁전을 빙 둘러 병졸들을 배치해 대단히 삼엄한데 어떻게 도적이 감히 궁내에 침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염락은 결국 위령을 베어 죽이고는 곧장 장수들을 거느리고 궁내로 들어가 돌아다니면서 활을 쏘아대니, 낭관(郎官)과 환관들은 크게 놀라서 어떤 자는 도망치고, 어떤 자는 맞서 싸웠다. 대항하는 자들은 속속 죽임을 당하니, 죽은 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 낭중령과 염락은 함께 안으로 들어가서 악좌(幄座)의 휘장에 활을 쏘았다. 2세는 노하여 좌우의 시신(侍臣)을 불렀으나 측근들은 모두들 두려워서 나서서 대항하는 자가 없었다.

 

곁에는 환관 한 사람이 2세를 시종하며 감히 달아나지 못했다. 2세는 안으로 들어가서 그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어찌해 진작 나에게 고하지 않았는가? 결국 이런 지경에 이르다니.”라고 하자, 환관은 “신이 감히 아뢰지 못했기에 목숨을 보전한 것입니다. 만약 신이 일찍이 아뢰었더라면 벌써 주살당했을 터이니,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염락은 2세의 앞으로 나아가서 그의 죄상을 따지며 말하기를 “족하(足下)는 교만하고 방자하며, 사람을 살육함이 잔악무도해 천하의 백성들이 함께 족하를 배반했으니, 족하 스스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시오.”라 했다.

 

그러자 2세는 “승상을 만나볼 수 있겠소?”라고 물으니, 염락은 “안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2세는 “나는 일개 군(郡)을 얻어 그곳의 왕이 되길 바라오.”라고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또 “만호후(萬戶侯)가 되길 바라오.”라고 했으나 그것 역시 허락되지 않으니, 2세는 “처자를 거느리고 백성이 되어 여러 공자들같이 되고 싶소.”라 했다. 염락은 말하기를 “신은 승상에게서 명을 받아, 천하를 위해 그대를 주벌(誅罰)하는 것이오. 그대가 비록 이런저런 말을 하더라도 나는 보고를 올릴 수가 없소.”라고 하고는 그의 병졸들을 나가도록 지시하자, 2세는 자살했다.

 

閻樂歸報趙高, 趙高乃悉召諸大臣公子, 告以誅二世之狀. 曰:「秦故王國, 始皇君天下, 故稱帝. 今六國復自立, 秦地益小, 乃以空名爲帝, 不可. 宜爲王如故, 便.」立二世之兄子公子嬰爲秦王. 以黔首葬二世杜南宜春苑中. 令子嬰齋, 當廟見, 受王璽. 齋五日, 子嬰與其子二人謀曰:「丞相高殺二世望夷宮, 恐群臣誅之, 乃詳以義立我.358) 我聞趙高乃與楚約, 滅秦宗室而王關中. 今使我齋見廟, 此欲因廟中殺我. 我稱病不行, 丞相必自來, 來則殺之.」高使人請子嬰數輩, 子嬰不行, 高果自往, 曰:「宗廟重事, 王柰何不行?」子嬰遂刺殺高於齋宮, 三族高家以徇咸陽. 子嬰爲秦王四十六日, 楚將沛公破秦軍入武關, 遂至霸上,359) 使人約降子嬰. 子嬰卽係頸以組, 白馬素車,360) 奉天子璽符, 降軹道旁.361) 沛公遂入咸陽, 封宮室府庫, 還軍霸上. 居月餘, 諸侯兵至, 項籍爲從長,362) 殺子嬰及秦諸公子宗族. 遂屠咸陽, 燒其宮室, 虜其子女, 收其珍寶貨財, 諸侯共分之. 滅秦之後, 各分其地爲三, 名曰雍王、塞王、翟王, 號曰三秦. 項羽爲西楚霸王, 主命分天下王諸侯, 秦竟滅矣. 後五年, 天下定於漢.

 

염락이 돌아가서 조고에게 보고하니, 조고는 여러 대신과 공자들을 모두 불러 2세를 주벌한 상황을 알리고는

 

 

“진나라는 본시 일개 왕국이었으나, 시황께서 천하를 통치했기 때문에 ‘제(帝)’라고 칭했소. 이제 육국(六國)이 다시 각자 독립해 진의 국토가 갈수록 좁아지니, 이에 허명으로 ‘제(帝)’라고 칭해서는 안 될 것이오. 그러니 예전처럼 ‘왕(王)’이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오.”

 

 

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2세의 형의 아들인 자영(子嬰)을 진왕(秦王)으로 삼았으며, 평민의 예로써 2세를 두현(杜縣) 남쪽의 의춘원(宜春苑)에 장사 지냈다. 자영으로 하여금 재계하고, 묘현(廟見)의 예를 행하면서 옥새(玉璽)를 인수하게 했다. 재계한 지 닷새째 되던 날, 자영은 그의 아들 두 사람과 의논하기를

 

“승상 조고가 2세를 망이궁에서 시해하고는 군신들이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해 거짓으로 의(義)를 빙자하고 나를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 내가 들으니 조고는 초 나라와 약조해 진나라의 종실(宗室)을 멸망시키고 관중(關中)의 왕이 되려 한다는구나. 이제 나로 하여금 재계해 종묘에 제배(祭拜)하게 하니, 이는 묘당(廟堂) 안에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병을 핑계 삼아 가지 않으면 승상 자신이 반드시 오리니, 오거든 그를 없애버려라.”

 

라 했다. 조고는 사람을 시켜서 몇 차례 자영을 불렀으나 자영이 가지 않으니 과연 조고는 자신이 직접 와서는 “종묘의 일은 중대한 일이거늘, 임금께서는 어찌해 행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했다. 자영은 마침내 조고를 재궁(齋宮)에서 척살(剌殺)하고, 조고의 삼족(三族)을 함양에서 처형해 백성들에게 본보기로 보였다.

 

자영이 진왕이 된 지 46일이 되던 날, 초의 장수 패공(沛公)이 진군(秦軍)을 격파하고 무관으로 진입한 다음, 이윽고 패상(覇上)에 당도해서는 사람을 보내 자영에게 투항을 약속받았다.

자영은 즉시 수대(綬帶)를 목에 감고, 백마가 끄는 흰 수레를 타고, 천자의 옥새와 부절(符節)을 받들고 지도(軹道) 부근에서 항복했다. 패공은 마침내 함양에 입성해 궁실의 부고(府庫)를 봉(封)하고, 패상으로 돌아와서 주둔했다.

 

달포가 지난 다음 제후들의 병력이 당도했는데, 항우는 종장(從長)이 되어 자영과 진나라의 여러 공자를 비롯한 왕족들을 살해하더니, 끝내는 함양의 백성들을 살육하고, 궁실을 불태우고, 자녀(子女)들을 사로잡고, 진귀한 보화와 재물을 몰수해 제후들과 함께 나누어가졌다. 진나라를 정벌한 다음, 그 국토를 삼분해 옹왕(雍王), 새왕(塞王), 적왕(翟王)이라고 이름하고 이를 ‘삼진(三秦)’이라고 불렀다. 항우가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정령(政令)을 주관하고 천하를 나누어 제후 왕을 봉하니, 진나라는 드디어 멸망했다. 그 후 5년이 지나서 천하는 한(漢)나라에 의해서 통일되었다.

 

太史公曰:秦之先伯翳, 嘗有勳於唐虞之際, 受土賜姓. 及殷夏之閒微散. 至周之衰, 秦興, 邑于西垂. 自繆公以來, 稍蠶食諸侯, 竟成始皇. 始皇自以爲功過五帝, 地廣三王, 而羞與之侔. 善哉乎賈生推言之也! 曰:秦幷兼諸侯山東三十餘郡, 繕津關, 據險塞, 修甲兵而守之. 然陳涉以戍卒散亂之衆數百, 奮臂大呼, 不用弓戟之兵, 鉏櫌白梃,363) 望屋而食,364) 橫行天下.365) 秦人阻險不守, 關梁不闔, 長戟不刺, 彊弩不射. 楚師深入, 戰於鴻門, 曾無藩籬之艱. 於是山東大擾, 諸侯並起, 豪俊相立.366) 秦使章邯將而東征, 章邯因以三軍之衆要市於外,367) 以謀其上. 群臣之不信, 可見於此矣. 子嬰立, 遂不寤. 藉使子嬰有庸主之材, 僅得中佐, 山東雖亂, 秦之地可全而有, 宗廟之祀未當絶也.

 

태사공(太史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秦)의 선조 백예(伯翳)는 일찍이 당우(唐虞)의 시대에 공훈을 세워서 토지와 성(姓)을 하사받았다. 그 뒤 하대(夏代), 은대(殷代)에 이르러서는 쇠퇴해 이리저리 흩어졌다가, 주(周)가 쇠퇴할 무렵, 드디어 진(秦)이 흥기해 서쪽 변경지역에 도읍을 정했다. 그 후 목공(繆公) 이래 차츰 제후들을 병탄해, 마침내 시황(始皇)이 되었다. 시황은 스스로 자신의 공적이 오제(五帝)를 뛰어넘고, 국토는 삼왕(三王)의 시대보다 넓다고 여겨, 그들과 동등하게 비교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가생(賈生)의 논평은 참으로 훌륭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나라는 산동 제후들의 30여 군(郡)을 겸병해, 포구와 관문을 수리하고, 험난한 요새지에 근거해 갑옷과 병기를 정비해 이를 굳게 지켰다. 그러나 진승(陳勝)이 이리저리 흩어졌던 수졸(戍卒) 수백 명을 규합해 팔을 걷어붙이고 목청을 돋우어, 호미와 서까래, 몽둥이 따위로 활과 창 등의 무기를 대신하고, 가는 곳마다에서 백성들의 도움으로 배를 채우며, 종횡으로 천하를 교란했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들은 험난한 요새에 주둔하면서도 방비조차 하지 않아서, 관문(關門)을 닫지도 않고 성 밖의 다리를 걷어 올리지도 않았으며, 긴 창을 사용해 적을 찌르지도 않고, 강한 활을 사용해 적을 향해서 쏘지도 않았다.

 

초 나라의 군사가 깊숙이 쳐들어가서 홍문(鴻門)에서 전투했지만 울타리 같은 장애물조차 없었다. 이러한 때에 산동지방이 크게 시끄러워져 제후들이 여기저기에서 봉기하고, 호걸과 준재들이 연이어 왕으로 자립했다. 이에 진나라는 장한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동으로 정벌하게 하니, 장한은 이를 이용해 삼군(三軍)의 많은 병력으로써 바깥에서 제후들과 교역을 벌이고 거꾸로 자신의 임금을 처단하고자 했다. 여러 대신들의 믿을 수 없음을 여기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영이 즉위했으나 그도 끝내 깨닫지 못했다. 만약 자영이 평범한 군주의 재능을 지니고서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장상(將相)의 보좌만이라도 얻었다면, 비록 산동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진나라의 국토는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을 것이며, 종묘제사 또한 결코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秦地被山帶河以爲固, 四塞之國也. 自繆公以來, 至於秦王, 二十餘君, 常爲諸侯雄. 豈世世賢哉? 其勢居然也. 且天下嘗同心幷力而攻秦矣. 當此之世, 賢智並列, 良將行其師, 賢相通其謀, 然困於阻險而不能進, 秦乃延入戰而爲之開關, 百萬之徒逃北而遂壞. 豈勇力智慧不足哉? 形不利, 勢不便也. 秦小邑幷大城,368) 守險塞而軍, 高壘毋戰, 閉關據阨, 荷戟而守之. 諸侯起於匹夫, 以利合, 非有素王之行也. 其交未親, 其下未附, 名爲亡秦, 其實利之也. 彼見秦阻之難犯也, 必退師. 安土息民,369) 以待其敝, 收弱扶罷, 以令大國之君, 不患不得意於海內. 貴爲天子, 富有天下, 而身爲禽者, 其救敗非也.

 

진나라의 국토는 산을 등지고 있으며 하천이 휘감아 사방으로 막힌 견고한 나라였다. 목공(繆公) 이래로 진시황에 이르기까지 20여 명의 임금은 늘 제후의 패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어찌 역대 군주가 모두 현능했기 때문이겠는가? 다만 그 지리적 형세가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천하는 일찍이 마음과 힘을 모아서 진나라를 공격했으니, 당시 현인(賢人)과 지사(智士)들이 한데 모여들어, 뛰어난 장수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현능한 재상은 각자의 지혜와 계책을 나누었지만, 진나라의 험고한 지세에 막혀서 진격할 수 없었다.

 

 

진나라는 이에 그들을 맞아들여 싸우기 위해 관문을 활짝 열었으니, 1백 만의 병졸들은 패주하고 결국은 궤멸당하고 말았다. 이것이 어찌 용력(勇力)과 지혜가 모자랐기 때문이겠는가? 지형이 불리하고 지세가 유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다음 진나라는 작은 고을을 큰 성에 합병하고, 험고한 요새를 지키며 주둔해 보루를 높이 쌓고 싸우지 않으면서 관문을 닫아걸고 요새를 점거해, 무기를 걸머진 채 이를 수비했다. 제후들은 필부(匹夫) 출신으로 서로 실리를 좇아 연합했으니, 이것은 소왕(素王)의 덕행을 찾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들은 서로간의 교분이 친밀하지도 못했고 그들의 부하들도 추종하지 않았으며, 진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다. 따라서 그들은 진나라가 험난한 요새지로 둘러싸여 침범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면 반드시 군사를 퇴각시켰을 것이다. 그런 후에 자신의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쉬게 하며, 다른 여러 나라들이 쇠퇴하기를 기다려 약소한 나라를 거둬 취하고, 피폐한 나라들을 도움으로써 대국의 제후를 호령할 수 있음을 알았다면, 천하를 얻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근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자의 귀한 신분에 온 천하를 소유했으면서도 사로잡히는 몸이 된 것은 패망의 상황을 만회하려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秦王足己不問, 遂過而不變. 二世受之, 因而不改, 暴虐以重禍. 子嬰孤立無親, 危弱無輔. 三主惑而終身不悟, 亡, 不亦宜乎? 當此時也, 世非無深慮知化之士也, 然所以不敢盡忠拂過者, 秦俗多忌諱之禁, 忠言未卒於口而身爲戮沒矣. 故使天下之士, 傾耳而聽, 重足而立, 拑口而不言. 是以三主失道, 忠臣不敢諫, 智士不敢謀, 天下已亂, 姦不上聞, 豈不哀哉! 先王知雍蔽之傷國也, 故置公卿大夫士, 以飾法設刑, 而天下治. 其彊也, 禁暴誅亂而天下服. 其弱也, 五伯征而諸侯從. 其削也, 內守外附而社稷存. 故秦之盛也, 繁法嚴刑而天下振;及其衰也, 百姓怨望而海內畔矣. 故周五序370)得其道, 而千餘歲不絶. 秦本末並失, 故不長久. 由此觀之, 安危之統相去遠矣. 野諺曰「前事之不忘, 後事之師也」. 是以君子爲國, 觀之上古, 驗之當世, 參以人事, 察盛衰之理, 審權勢之宜, 去就有序, 變化有時, 故曠日長久而社稷安矣.

 

진시황은 자만해 남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고, 끝내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칠 줄을 몰랐다. 2세는 부친의 과오를 그대로 이어받아서 고치지 않았고, 포학무도해 화를 가중시켰다. 자영은 외톨이로서 가까운 피붙이가 없었으며, 유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보필하는 이가 없었다. 이 세 사람의 임금은 미혹되었으면서도 죽는 날까지 잘못을 깨닫지 못했으니 파멸에 이른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 당시 세상에 생각이 깊고 시세변화를 아는 인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건만, 과감하게 충성된 마음을 다해 황제의 잘못을 막지 못했던 이유는 진나라의 습속에 꺼리고 피해야 할 금기가 많아 충성스러운 간언을 하는 사람은 말도 끝나기 전에 목숨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하의 선비들로 하여금 귀를 기울여 듣게만 하고, 두 다리를 한데 모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 때문에 세 임금이 정도(正道)를 잃어도 충신은 감히 간언하지 못했고, 지사(智士)는 감히 모책을 내지 못했으며, 천하가 어지러워진 다음에도 이 간악한 일이 임금에게 알려지지 못했으니, 이 어찌 애처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선왕은 상하의 언로(言路)가 막히는 것이 나라를 망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공경사대부(公卿士大夫)를 두어서 법령을 정비하고 형벌을 두어서 천하를 다스렸다. 그리하여 나라가 강하면 포악한 행동을 금하고 난을 주벌했기 때문에 천하 사람들이 복종했고, 나라가 약할 때는 오패(五覇)가 토벌해주므로 제후들이 순종했으며, 영토가 줄어들 때에는 안으로는 수비를 갖추고 밖으로는 남에게 의지해 사직을 보존했다. 그러므로 진나라가 강성할 때에는 법이 번잡하고 형벌이 엄격해 천하가 두려워했으나 일단 쇠약해지자 백성들이 원망하며 온 천하가 배반했던 것이다.

 

주(周)나라의 오서(五序)는 정도(正道)를 얻었기 때문에 천여 년 동안 국가의 명맥이 끊이지 않았으나, 진나라는 본말(本末)을 모두 상실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했다. 이런 점으로 본다면 안정과 위망(危亡)의 근본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속담에 “지난 일을 잊지 않는 것은 후일의 귀감이 될 수 있다.”라 했다. 이 때문에 군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전대의 일을 자세히 살펴서 당대에 증험해보고, 인사(人事)를 참작해 성쇠의 이치를 이해하고, 모략과 형세의 적합함을 세심히 살피어 취사(取捨)에 순서가 있었으며, 변화에 그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오래도록 계승되고 나라가 태평한 것이었다.

 

秦孝公據殽函之固, 擁雍州之地, 君臣固守而窺周室, 有席卷天下,371) 包擧宇內, 囊括四海之意,372) 幷呑八荒之心. 當是時, 商君佐之,373) 內立法度, 務耕織, 修守戰之備, 外連衡而鬥諸侯,374) 於是秦人拱手而取西河之外.

 

진 효공(秦孝公)은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의 험준한 요새지에 웅거해 옹주(雍州) 땅을 옹유하고, 군주와 신하가 굳게 지키며 주(周)나라 왕실을 엿보았다. 천하를 석권해 보자기로 싸듯 온 세상을 몽땅 차지하고, 사해(四海)를 몽땅 제 것으로 해 넓은 팔방(八方)을 집어삼킬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공손앙(公孫鞅)이 효공을 보좌해 안으로는 법령과 제도를 정비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일과 ‘베 짜기’에 힘쓰게 하며 수비전투의 군비를 갖추고, 밖으로는 연횡책(連橫策)을 써서 제후국들을 서로 다투게 했다. 그리하여 진나라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아무 수고도 기울이지 않고 서하(西河)의 밖을 차지하게 되었다.

 

孝公旣沒, 惠王、武王蒙故業, 因遺冊, 南兼漢中, 西擧巴、蜀, 東割膏腴之地, 收要害之郡. 諸侯恐懼, 會盟而謀弱秦, 不愛珍器重寶肥美之地, 以致天下之士, 合從締交,375) 相與爲一. 當是時, 齊有孟嘗, 趙有平原, 楚有春申, 魏有信陵. 此四君者, 皆明知而忠信, 寬厚而愛人, 尊賢重士, 約從離衡,376) 幷韓、魏、燕、楚、齊、趙、宋、衛、中山之衆. 於是六國之士377)有寧越、徐尙、蘇秦、杜赫之屬爲之謀,378) 齊明、周最、陳軫、昭滑、樓緩、翟景、蘇厲、樂毅之徒通其意,379) 吳起、孫臏、帶佗、兒良、王廖、田忌、廉頗、趙奢之朋制其兵.380) 常以十倍之地, 百萬之衆, 叩關而攻秦. 秦人開關延敵, 九國之師逡巡遁逃而不敢進. 秦無亡矢遺鏃之費, 而天下諸侯已困矣. 於是從散約解, 爭割地而奉秦. 秦有餘力而制其敝, 追亡逐北, 伏尸百萬, 流血漂鹵.381) 因利乘便, 宰割天下, 分裂河山, 彊國請服, 弱國入朝. 延及孝文王、莊襄王, 享國日淺, 國家無事.

 

효공이 죽은 뒤에는 혜왕(惠王), 무왕(武王) 등이 유업(遺業)을 계승해 효공이 남긴 정책에 따라 남쪽으로는 한중(漢中)을 차지하고, 서쪽으로는 파(巴), 촉(蜀)을 빼앗았으며, 동쪽으로는 기름진 땅을 베어 가지고, 요해처(要害處)가 되는 여러 군(郡)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여러 제후들은 크게 두려워해 동맹을 맺고, 진나라의 세력을 약화시킬 방법을 논의했다. 그리하여 갖가지 진기한 기물(器物)과 중요한 보물, 산물이 많은 기름진 땅까지 아끼지 않으면서 천하의 훌륭한 재사(才士)들을 초치했으며, 합종책(合縱策)을 맺어 서로 하나로 뭉쳤다.

 

그때 제(齊)나라에는 맹상군(孟嘗君)이, 조(趙)나라에는 평원군(平原君)이, 초(楚)나라에는 춘신군(春申君)이, 위(魏)나라에는 신릉군(信陵君)이 있었다. 이 네 사람은 모두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사람들로서, 마음이 너그럽고 온후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현인을 존경하며 선비를 중히 여겼다. 그들은 합종책을 약조해 연횡책을 철회하고, 한(韓), 위(魏), 연(燕), 초(楚), 제(齊), 조(趙), 송(宋), 위(衛), 중산(中山)의 병사를 연합했다.

 

당시 육국의 인재로는 영월, 서상(徐尙), 소진(蘇秦), 두혁(杜赫) 등이 있어 계략을 세웠고, 제명(齊明), 주최(周最), 진진(陳軫), 소활(召滑), 누완(樓緩), 책경(翟景), 소려(蘇?), 악의(樂毅) 등이 각국의 의견을 소통시켰으며, 오기(吳起), 손빈(孫?), 대타(帶?), 아량(兒良), 왕료(王廖), 전기(田忌), 염파(廉頗), 조사(趙奢) 등이 군사를 통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나라의 열 배가 되는 땅과 1백 만이나 되는 대군을 가지고, 함곡관으로 진격해 진나라를 공략했다. 그런데 진나라 병사들이 관문을 활짝 열고 적군을 끌어들이니, 한, 위, 연, 초, 제, 조, 송, 위, 중산의 아홉 나라 병사들은 우물쭈물 대다가 도망치며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마침내 진나라는 화살 한대, 화살촉 하나 허비하지 않고서도 천하의 제후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이에 합종(合縱)의 언약은 깨어지고, 앞을 다투어 땅을 베어 진나라에 바쳤다. 진나라는 그 여세를 몰아서 쇠약해진 아홉 나라를 제압하고 패잔병을 추격해 죽이니, 나뒹구는 시체가 1백 만이 넘었고 흐르는 피에 큰 방패가 떠다닐 정도였다. 진나라는 그들의 이익에 따라 편리한 대로 천하를 마음대로 요리해 제후국의 산하를 갈가리 찢어놓으니, 강한 제후국은 항복을 청하고, 약한 제후국은 신하의 예를 갖춰 입조(入朝)했다. 뒤이은 효문왕(孝文王)과 장양왕(莊襄王) 때에는 재위기간이 짧았으며,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及至秦王, 續六世之餘烈,382) 振長策而御宇內, 呑二周而亡諸侯, 履至尊而制六合, 執棰拊383)以鞭笞天下, 威振四海. 南取百越之地,384) 以爲桂林、象郡, 百越之君俛首係頸, 委命下吏. 乃使蒙恬北築長城而守藩籬, 卻匈奴七百餘里, 胡人不敢南下而牧馬, 士不敢彎弓而報怨. 於是廢先王之道, 焚百家之言, 以愚黔首. 墮名城,385) 殺豪俊, 收天下之兵聚之咸陽, 銷鋒鑄鐻, 以爲金人十二, 以弱黔首之民. 然後斬華爲城,386) 因河爲津, 據億丈之城, 臨不測之谿以爲固. 良將勁弩守要害之處, 信臣精卒陳利兵而誰何,387) 天下以定. 秦王之心, 自以爲關中之固, 金城千里,388) 子孫帝王萬世之業也.

 

그 뒤 시황제(始皇帝) 때에 이르자 시황제는 효공(孝公), 혜문왕(惠文王), 무왕(武王), 소양왕(昭襄王), 효문왕(孝文王), 장양왕(莊襄王) 등 여섯 선왕의 유업을 계승해, 긴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몰듯이 천하를 제어했다.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를 집어삼키고 제후들을 멸망시키어, 스스로 천자의 자리에 올라서 천하를 다스렸다. 짧은 회초리, 긴 매 등 여러 형구(刑具)를 고루 갖추어 온 세상 사람들에게 태장(笞杖)질을 하니, 진나라의 위세는 천하에 떨쳐지게 되었다. 남으로 백월(百越)의 땅을 취해 계림군(桂林郡)과 상군(象郡)의 두 군(郡)으로 만드니, 백월의 임금은 머리를 떨구고 목에 줄을 걸고 와서 목숨을 진나라의 옥리(獄吏)에게 맡기게 되었다.

 

이에 장수 몽염(蒙恬)을 시켜서 북쪽에 만리장성을 쌓아 변방을 지키게 하고, 흉노(匈奴)를 7백여 리 밖으로 몰아내니 오랑캐들은 감히 남쪽으로 내려와서 말을 방목하지 못했으며, 흉노의 병사들은 감히 활을 당겨 진나라에 원한을 갚으려고 하지 못했다. 이에 진시황은 선왕(先王)의 도를 폐기하고 백가(百家)의 학자들이 남긴 책들을 불살라서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었다. 또 이름 있는 성들을 헐어버리고 호걸과 준재들을 죽였으며, 모든 병기를 함양(咸陽)으로 거두어들이고, 그 무기들을 녹여서 종을 주조하고 동상 12개를 만들어서 천하의 백성들을 약화시켰다.

 

그런 다음, 화산(華山)을 깎아 성곽을 만들었으며, 황하의 물줄기를 끌어들여 해자(垓字)를 파고, 억 장(丈) 길이나 되는 높은 성에 웅거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골짜기를 굽어보며 방비를 굳게 했다. 또 우수한 장수와 강한 쇠뇌가 요해처(要害處)를 지키고, 믿을 만한 신하와 정예 병사들이 날카로운 창칼을 들고 행인들을 엄중하게 검문하니, 천하는 이미 평정되었다. 진시황은 마음속으로 관중의 견고함은 천리 길이의 철벽 성곽 같으니, 자손들이 만대 후까지 제왕이 되게 할 위업이라고 여겼다.

 

秦王旣沒, 餘威振於殊俗. 陳涉, 罋牖繩樞之子,389) 甿隷之人,390) 而遷徙之徒, 才能不及中人, 非有仲尼、墨翟之賢, 陶朱、猗頓之富, 躡足行伍之閒, 而倔起什伯之中,391) 率罷散之卒, 將數百之衆, 而轉攻秦. 斬木爲兵, 揭竿爲旗, 天下雲集響應, 贏糧而景從, 山東豪俊遂並起而亡秦族矣.

 

시황제가 죽은 다음에도, 진나라의 위세는 풍속을 달리하는 먼 곳까지 진동하게 했다. 진승(陳勝)은 깨진 항아리 주둥이로 창을 삼고 새끼를 늘어뜨려 문을 대신할 만큼 빈한한 집안의 자식이었으며, 미천한 백성으로서 수(戍)자리에 징발된 역도(役徒)였다. 재능은 보통 사람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공자(孔子)나 묵적(墨翟)처럼 어진 덕을 지니지도 못했고, 도주(陶朱)나 의돈(?頓)과 같은 부를 지닌 것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사졸들의 행렬에 끼어서 행군 중에 반란을 일으켰으니, 그는 지칠 대로 지쳐서 흩어졌던 병사들을 거느리고 수백 명의 사람들을 통솔해 가던 길을 바꾸어서 진나라를 공격했던 것이다. 나무를 베어서 무기로 삼고, 장대를 높이 세워서 깃발로 삼으니, 천하의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호응하고 양식을 짊어진 채로 그림자처럼 따랐다. 마침내 산동(山東)의 호걸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서 진나라의 왕족을 멸망시켰다.

 

且夫天下非小弱也, 雍州之地, 殽函之固自若也.392) 陳涉之位, 非尊於齊、楚、燕、趙、韓、魏、宋、衛、中山之君;鉏櫌棘矜,393) 非錟於句戟長鎩也;394)適戍之衆, 非抗於九國之師;深謀遠慮, 行軍用兵之道, 非及鄕時之士也. 然而成敗異變, 功業相反也. 試使山東之國與陳涉度長絜大,395) 比權量力, 則不可同年而語矣. 然秦以區區之地, 千乘之權, 招八州而朝同列, 百有餘年矣. 然后以六合爲家, 殽函爲宮, 一夫作難而七廟墮, 身死人手, 爲天下笑者, 何也? 仁義不施而攻守之勢異也.

 

진나라의 천하는 작지도 약하지도 않았고, 옹주의 땅도 효산과 함곡관의 견고함도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반면 진승의 지위는 제, 초, 연, 조, 한, 위, 송, 위, 중산의 군주들보다 존귀하지 않았으며, 그가 거사에 썼던 호미와 고무래, 창과 창자루는 굽은 창과 긴 창보다 날카롭지 않았다. 또 변방 수비로 유배된 무리들은 아홉 나라의 병사들보다 강하지 못했으며, 계책과 사려, 행군과 용병의 계략에서도 예전의 모사(謀士)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는 크게 달랐으며, 이룩한 공업(功業)은 완전히 상반되었다.

 

만약 산동의 나라들과 진승의 영토의 크기를 비교해보고 여섯 나라와 진승의 권세와 병력을 비교해본다면 동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진나라는 작은 국토와 천승(千乘) 제후의 권력을 가지고서, 팔주(八州)를 불러들여서 동급인 여섯 제후국으로부터 조회(朝會)를 받은 것이 백여 년이 되었다. 그런 후에 온 천하를 한 집으로 삼고 효산과 함곡관을 궁전으로 삼았던 것인데, 일개 필부가 난을 일으키자 칠묘(七廟)가 무너지고 천자가 남의 손에 죽임을 당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인의를 베풀지 않았고, 천하를 탈취할 때와 천하를 지킬 때의 정세가 달랐기 때문이다.

 

秦幷海內, 兼諸侯, 南面稱帝,396) 以養四海, 天下之士斐然鄕風, 若是者何也? 曰:近古之無王者久矣. 周室卑微, 五霸旣歿, 令不行於天下, 是以諸侯力政, 彊侵弱, 衆暴寡, 兵革不休, 士民罷敝. 今秦南面而王天下, 是上有天子也. 旣元元之民冀得安其性命, 莫不虛心而仰上, 當此之時, 守威定功, 安危之本在於此矣.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해 제후들을 겸병하고 남면(南面)해 ‘제(帝)’라고 칭하며 온 천하를 다스리자 천하의 사인(士人)들이 순순히 귀의했으니, 이와 같은 것은 어째서인가? 대답은 이러하다. 근고(近古) 이래로 왕자(王者)가 오랫동안 없었으니 주 왕실은 국력이 쇠약해졌고, 오패(五覇)는 이미 죽은 터이라, 천자의 명령이 천하에 행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제후들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정벌해 강국은 약국을 침탈하고 대국은 소국을 괴롭히니, 전쟁이 끊이지 않아서 군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지쳐버렸다. 그런데 지금 진나라가 남면해 천하를 다스리니, 이는 윗자리에 천자가 존재하게 된 것이었다. 모든 백성들은 자신의 목숨을 편안히 보전할 수 있기를 바라니 그 누구도 진심으로 황상(皇上)을 우러러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때 위엄을 지니고서 공업(功業)을 굳건히 하니, 안정과 위망(危亡)의 관건은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秦王懷貪鄙之心, 行自奮之智, 不信功臣, 不親士民, 廢王道, 立私權, 禁文書而酷刑法, 先詐力而後仁義, 以暴虐爲天下始. 夫幷兼者高詐力, 安定者貴順權, 此言取與守不同術也. 秦離戰國而王天下, 其道不易, 其政不改, 是其所以取之守之者[無]異也. 孤獨而有之, 故其亡可立而待. 借使秦王計上世之事, 並殷周之跡, 以制御其政, 後雖有淫驕之主而未有傾危之患也. 故三王之建天下, 名號顯美, 功業長久.

 

진시황은 탐욕스럽고 비루한 마음을 품고 독단적인 지모(智謀)를 행해, 공신들을 신뢰하지 않고 선비들과 백성들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왕도(王道)를 버리고 개인의 권위를 내세워서 문서(文書)를 금하고 형법을 가혹하게 했으며, 사술(詐術)과 무력을 앞세우고 인의를 뒷전으로 여기며, 포학함을 천하 통치의 시작으로 삼았다. 대체로 천하를 합병할 때는 계략과 무력을 중하게 여기며 안정되었을 때는 권력에 순종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이는 천하를 얻는 것과 지키는 것의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가 전국시대를 지내고 천하를 통일했음에도 그 방법을 바꾸지 않고 정치를 개혁하지 않았으니, 이는 천하를 얻고 지키는 방법에 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홀로 고립되어 천하를 소유했기에 그의 멸망은 서서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빨리 도래했던 것이다. 만약 진시황이 전대의 일들을 고려하고 은나라와 주나라의 경험을 본보기로 삼아 자신의 정책을 결정하고 시행했다면 후에 설사 방자하고 교만한 임금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기울고 위태해지는 환난은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삼왕(三王)은 천하를 세워서 그 명성이 아름답게 드러나고 공적과 위업이 길이 전해지는 것이다.

 

今秦二世立, 天下莫不引領而觀其政. 夫寒者利裋褐397)而飢者甘糟糠, 天下之嗷嗷, 新主之資也. 此言勞民之易爲仁也. 鄕使二世有庸主之行, 而任忠賢, 臣主一心而憂海內之患, 縞素而正先帝之過, 裂地分民以封功臣之後, 建國立君以禮天下, 虛囹圉而免刑戮, 除去收帑汙穢之罪, 使各反其鄕里, 發倉廩, 散財幣, 以振孤獨窮困之士, 輕賦少事, 以佐百姓之急, 約法省刑以持其後, 使天下之人皆得自新, 更節修行, 各愼其身, 塞萬民之望, 而以威德與天下, 天下集矣. 卽四海之內, 皆讙然各自安樂其處, 唯恐有變, 雖有狡猾之民, 無離上之心, 則不軌之臣無以飾其智, 而暴亂之姦止矣. 二世不行此術, 而重之以無道, 壞宗廟與民,398) 更始作阿房宮, 繁刑嚴誅, 吏治刻深, 賞罰不當, 賦斂無度, 天下多事, 吏弗能紀, 百姓困窮而主弗收恤. 然後姦僞並起, 而上下相遁, 蒙罪者衆, 刑戮相望於道, 而天下苦之. 自君卿以下至于衆庶, 人懷自危之心, 親處窮苦之實, 咸不安其位, 故易動也. 是以陳涉不用湯武之賢, 不藉公侯之尊, 奮臂於大澤而天下響應者, 其民危也. 故先王見始終之變, 知存亡之機, 是以牧民之道, 務在安之而已. 天下雖有逆行之臣, 必無響應之助矣. 故曰「安民可與行義, 而危民易與爲非」, 此之謂也. 貴爲天子, 富有天下, 身不免於戮殺者, 正傾非也. 是二世之過也.

 

진 2세(秦 二世)가 즉위하자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목을 길게 내밀고서 그 정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는 누더기 옷도 도움이 되고 굶주린 사람에게는 술지게미도 달게 여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천하백성들의 애달픈 하소연은 새로이 즉위하는 임금에게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니, 이 말은 고달픈 백성들에게는 인정(仁政)을 베풀기가 쉽다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만약 2세가 평범한 임금의 덕행을 지니고서 충신과 현인을 임용해 신하와 임금이 한마음으로 세상의 걱정거리를 염려하고, 상복을 입은 채로 선제의 잘못을 바로잡으며, 토지를 나누어 백성들에게 주고, 공신들의 후예들에게 식읍을 봉하며, 제후국을 세워서 군주를 옹립하고, 천하의 인재들을 예로써 대우하고, 사면령을 내려서 감옥을 비우며 형벌을 면제해주고, 죄인의 처와 딸을 노비로 삼는 난잡한 죄명을 폐지해 각기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고, 창고와 곳간을 열어서 재물과 돈을 나누어주어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사람과 곤궁한 사람들을 구휼하며, 세금을 가볍게 하고 노역을 줄여서 백성들의 긴급한 사정을 도와주고, 법령을 간략히 하고 형벌을 가볍게 해 죄인이 자신의 후손을 보존하게 하며, 천하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스스로 일신(一新)하게 해 자신의 몸가짐을 고치고 품행을 수양하며, 각자 몸을 근신하게 해 만민의 바람을 만족시키고, 위신(威信)과 인덕(仁德)으로 천하의 백성들을 대했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만약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각자 자기가 처해 있는 위치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고 오직 변란이 발생할까만을 염려하며, 설사 교활한 백성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군주를 배반할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정도(正道)를 벗어난 신하도 자기의 간교를 꾸밀 방법이 없을 것이며 폭란의 간악한 일들도 그칠 것이다. 2세는 이러한 방법을 행하지 않고 거꾸로 포악무도한 짓을 되풀이해 종묘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면서, 다시 아방궁을 새로 짓기 시작했다. 또 형벌을 번잡하게 해 주벌을 엄혹하게 했으며, 관리의 통치가 가혹하고 상벌이 형평을 잃었으며, 세금의 징수에 한도가 없고 천하에 역사(役事)가 많아서 관리들이 감당조차 할 수 없을 지경이었으며, 백성들은 곤궁한데도 임금은 백성들을 구휼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역모(逆謀)와 사술(詐術)이 한꺼번에 발생하고 위아래 사람이 서로 책임을 미루며, 죄지은 자가 많아져서 형벌을 받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서로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천하의 백성들은 고통을 당했다. 그리하여 군후(君侯)와 공경(公卿)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스스로 위태하게 여기는 마음을 품었으며, 몸은 궁핍하고 고단한 실정에 처해 모두들 자신들의 지위를 불안해했기 때문에 쉽게 동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진승이 탕왕(湯王), 무왕(武王)의 현능함을 지니지 못했으면서도, 또 공후(公侯)의 존귀한 신분이 아니었으면서도 대택(大澤)에서 팔을 휘둘러서 봉기하자 천하의 백성들이 이에 동조했던 것은 백성들이 위난(危難)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선왕은 일의 처음과 끝의 변화를 보고서 존망의 기미를 알았으므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도리는 다만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에 있음을 알고 그것에 힘썼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면 설사 천하에 역행하는 신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필시 그들을 돕는 동조자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안정되어 있는 백성들은 함께 더불어 의를 행할 만하고, 위난에 처한 백성들은 함께 어울려서 그릇된 짓을 하기 쉽다.’라고 했으니, 바로 이러한 것을 이르는 것이다. 천자의 귀한 몸으로 온 천하를 소유하고서 그 자신은 죽음을 면하지 못한 것은 바로 기울어가는 것을 바로잡으려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2세의 과오인 것이다.”

 

襄公立, 享國十二年. 初爲西畤. 葬西垂.399) 生文公.

 

양공(襄公)이 즉위했다. 그는 12년간 재위했으며 최초로 서치(西畤)를 만들었다. 서거하자 서수(西垂)에 묻혔다. 양공은 문공(文公)을 낳았다.

 

文公立, 居西垂宮. 五十年死, 葬西垂.400) 生靜公.

 

문공이 즉위해 서수궁(西垂宮)에 거했다. 재위 50년 만에 서거해 서수에 묻혔다. 문공은 정공(靜公)을 낳았다.

 

靜公不享國而死. 生憲公.

憲公享國十二年, 居西新邑. 死, 葬衙.401) 生武公、德公、出子.

 

정공은 즉위하지 못한 채 서거했는데, 그는 헌공(獻公)을 낳았다.

 

헌공은 22년간 재위했으며 서신읍(西新邑)에 거했다. 서거해 아(衙)에 묻혔다. 무공(武公), 덕공(德公), 출자(出子)를 낳았다.

 

出子享國六年, 居西陵.402) 庶長弗忌、威累、參父三人, 率賊賊出子鄙衍, 葬衙. 武公立.

 

출자는 6년간 재위했으며 서릉(西陵)에 거했다. 서장(庶長) 불기(弗忌), 위루(威累), 삼보(參父) 세 사람이 역적을 이끌고 비연(鄙衍)에서 출자를 시해했다. 이에 출자를 아(衙)에 장사 지내고, 무공(武公)이 즉위했다.

 

武公享國二十年. 居平陽封宮.403) 葬宣陽聚東南.404) 三庶長伏其罪. 德公立.

 

무공은 12년간 재위했으며 평양(平陽)의 봉궁(封宮)에 거했다. 그는 선양취(宣陽聚)의 동남쪽에 묻혔다. 세 명의 서장이 징벌을 받았다. 덕공(德公)이 즉위했다.

 

德公享國二年. 居雍大鄭宮. 生宣公、成公、繆公. 葬陽. 初伏, 以御蠱.405)

 

덕공은 2년간 재위했으며 옹읍(雍邑)의 대정궁(大鄭宮)에 거했다. 선공(宣公), 성공(成公), 목공(繆公)을 낳았다. 양(陽)에 장사지냈다. 처음으로 복일(伏日)을 정해 독기(毒氣)를 다스렸다.

 

宣公享國十二年. 居陽宮. 葬陽.406) 初志閏月.

 

선공은 12년간 재위했으며 양궁(陽宮)에 거했다. 양(陽)에 안장되었다. 처음으로 윤월(閏月)을 기록했다.

 

成公享國四年, 居雍之407)宮. 葬陽. 齊伐山戎、孤竹.

 

성공은 4년간 재위했으며 옹읍의 궁전에 거했다. 양(陽)에 묻혔다. 제(齊)나라가 산융(山戎)과 고죽(孤竹)을 정벌했다.

 

繆公享國三十九年. 天子致霸. 葬雍. 繆公學著人.408) 生康公.

 

목공은 39년간 재위했으며 주(周)의 천자가 그를 패주(覇主)로 승인했다. 옹(雍)에 묻혔다. 목공은 저인(著人)에게도 배웠다. 강공(康公)을 낳았다.

 

康公享國十二年. 居雍高寢. 葬竘社. 生共公.

共公享國五年, 居雍高寢. 葬康公南. 生桓公.

桓公享國二十七年. 居雍太寢. 葬義里丘北. 生景公.409)

 

강공은 12년간 재위했으며 옹읍의 고침(高寢)에 거했다. 구사(竘社)에 묻혔다. 공공(共公)을 낳았다.

 

 

공공은 5년간 재위했으며 옹읍의 고침에 거했다. 강공이 묻힌 곳의 남쪽에 묻혔다. 환공(桓公)을 낳았다.

 

 

환공은 27년간 재위했으며 옹읍의 태침(太寢)에 거했다. 의리(義里)의 언덕 북쪽에 묻혔다. 경공(景公)을 낳았다.

 

 

景公享國四十年. 居雍高寢, 葬丘里南.410) 生畢公.411)

 

 

경공은 40년간 재위했으며 옹읍의 고침에 거했다. 구리(丘里)의 남쪽에 묻혔다. 필공(畢公)을 낳았다.

 

 

畢公享國三十六年.412) 葬車里北. 生夷公.

 

 

필공은 36년간 재위했으며 거리(車里)의 북쪽에 묻혔다. 이공(夷公)을 낳았다.

 

 

夷公不享國. 死, 葬左宮. 生惠公.413)

 

 

이공은 즉위하지 못한 채 좌궁(左宮)에 묻혔다. 그는 혜공(惠公)을 낳았다.

 

 

惠公享國十年. 葬車里(康景). 生悼公.

悼公享國十五年.414) 葬僖公西. 城雍. 生剌415)龔公.416)

 

 

혜공은 10년간 재위했으며 거리(車里)에 묻혔다. 도공(悼公)을 낳았다.

 

 

도공은 재위 15년으로 희공(僖公)이 묻힌 곳의 서쪽, 성옹(成雍)에 안장되었다. 옹읍에 성을 축조했다. 자공공(刺龔公)을 낳았다.

 

 

剌龔公享國三十四年. 葬入里.417) 生躁公、418) 懷公.419) 其十年, 彗星見.

 

 

자공공은 34년간 재위했으며 입리(入里)에 묻혔다. 조공(躁公), 회공(懷公)을 낳았다. 즉위한 지 10년째 되던 해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躁公享國十四年. 居受寢. 葬悼公南. 其元年, 彗星見.420)

 

 

조공(躁公)은 14년간 재위했으며 수침(受寢)에 거했다. 도공이 묻힌 곳의 남쪽에 묻혔다. 즉위하던 해에 혜성이 나타났다.

 

 

懷公從晉來. 享國四年. 葬櫟圉氏. 生靈公. 諸臣圍懷公, 懷公自殺.

肅靈公, 昭子子也.421) 居涇陽. 享國十年. 葬悼公西. 生簡公.

 

 

회공은 진(晉)나라에서 돌아와 즉위했다. 4년간 재위했으며 역(櫟) 땅의 어씨(圉氏)에 묻혔다. 영공(靈公)을 낳았다. 여러 신하들이 회공을 포위하니 회공은 자살했다.

 

 

숙령공(肅靈公)은 소자(昭子)의 아들이다. 경양(涇陽)에 거처했다. 10년간 재위했으며 도공이 묻힌 곳의 서쪽에 묻혔다. 간공(簡公)을 낳았다.

 

 

簡公從晉來. 享國十五年. 葬僖公西.422) 生惠公. 其七年. 百姓初帶劍.

 

 

간공은 진(晉)나라에서 돌아와 즉위했다. 15년간 재위했으며 희공이 묻힌 곳의 서쪽에 묻혔다. 혜공(惠公)을 낳았다. 즉위한 지 7년째 되던 해 백관들이 처음으로 검(劍)을 차게 되었다.

 

 

惠公享國十三年. 葬陵圉.423) 生出公.

 

 

혜공은 13년간 재위했으며 능어(陵圉)에 묻혔다. 출공(出公)을 낳았다.

 

 

出公享國二年.424) 出公自殺, 葬雍.

 

 

출공은 재위 2년 만에 자살했으며 옹읍에 묻혔다.

 

 

獻公享國二十三年.425) 葬囂圉. 生孝公.

 

 

헌공(獻公)은 23년간 재위했으며 효어(囂圉)에 묻혔다. 효공(孝公)을 낳았다.

 

 

孝公享國二十四年.426) 葬弟圉. 生惠文王. 其十三年, 始都咸陽.427)

 

 

효공은 24년간 재위했으며 제어(弟圉)에 묻혔다. 혜문왕(惠文王)을 낳았다. 즉위한 지 13년째 되던 해 처음으로 함양(咸陽)에 도읍했다.

 

 

惠文王享國二十七年.428) 葬公陵.429) 生悼武王.

 

 

혜문왕은 27년간 재위했으며 공릉(公陵)에 묻혔다. 도무왕(悼武王)을 낳았다.

 

 

悼武王享國四年, 葬永陵.430)

 

 

도무왕은 4년간 재위했으며 영릉(永陵)에 묻혔다.

 

 

昭襄王享國五十六年. 葬茝陽.431) 生孝文王.

 

 

소양왕(昭襄王)은 56년간 재위했으며 채양(茝陽)에 묻혔다. 효문왕(孝文王)을 낳았다.

 

 

孝文王享國一年. 葬壽陵. 生莊襄王.

莊襄王享國三年. 葬茝陽. 生始皇帝. 呂不韋相.

獻公立七年, 初行爲市. 十年, 爲戶籍相伍.

孝公立十六年. 時桃李冬華.

惠文王生十九年而立. 立二年, 初行錢. 有新生嬰兒曰「秦且王」.

悼武王生十九年而立. 立三年, 渭水赤三日.

昭襄王生十九年而立. 立四年, 初爲田開阡陌.

孝文王生五十三年而立.

莊襄王生三十二年而立. 立二年, 取太原地. 莊襄王元年, 大赦, 脩先王功臣, 施德厚骨肉, 布惠於民. 東周與諸侯謀秦, 秦使相國不韋誅之, 盡入其國. 秦不絶其祀, 以陽人地賜周君, 奉其祭祀.

始皇享國三十七年. 葬酈邑.432) 生二世皇帝. 始皇生十三年而立.

 

 

효문왕은 1년간 재위했으며 수릉(壽陵)에 묻혔다. 장양왕(莊襄王)을 낳았다.

 

 

장양왕은 3년간 재위했으며 채양에 묻혔다. 시황제를 낳았다. 여불위(呂不韋)를 상국(相國)으로 삼았다.

 

 

헌공 7년에 처음으로 집시(集市)가 개설되었다. 10년에는 호구(戶口)를 등록하고, 다섯 호를 1오(伍)로 편성했다.

 

 

효공 16년에 도리(桃李)가 겨울에 꽃을 피웠다.

 

 

혜문왕은 19세에 즉위했다. 즉위한 이듬해에 처음으로 전폐(錢幣)를 발행했다. 새로 태어난 갓난아기가 “진나라는 장차 왕(王)을 칭하리라.”라고 말했다.

 

 

도무왕은 19세에 즉위했다. 즉위 3년에 위수(渭水)의 물빛이 사흘 동안 붉게 변했다.

 

 

소양왕은 19세에 즉위했다. 즉위 4년에 처음으로 논밭간의 경계를 텄다.

 

 

효문왕은 53세에 즉위했다.

 

장양왕은 32세에 즉위했다. 즉위한 이듬해에 태원(太原) 지역을 탈취했다. 장양왕 원년에 대사면을 내리고 선왕의 공신을 표창해 덕을 베풀고, 가까운 친족을 후대하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동주(東周)가 제후들과 연합해 진나라를 치려고 하니 진나라는 상국 여불위를 보내 동주의 천자를 살해하고 동주의 모든 것을 몰수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동주의 제사를 단절시키지는 않고, 양인(陽人)의 땅을 주군(周君)에게 주어 그들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시황제는 37년간 재위했으며 여읍(酈邑)에 묻혔다. 2세 황제를 낳았다. 시황제는 13세에 즉위했다.

 

二世皇帝享國三年. 葬宜春.433) 趙高爲丞相安武侯. 二世生十二年而立.434)

 

2세 황제는 3년간 재위했으며 의춘(宜春)에 묻혔다. 조고는 승상이 되었고 안무후(安武侯)에 봉해졌다. 이세는 12세에 즉위했다.

 

右秦襄公至二世, 六百一十歲.435)

 

위의 일들은 진 양공(秦襄公)에서 이세에 이르기까지 610년간의 일들이었다.

 

孝明皇帝十七年436)十月十五日乙丑, 曰:437)

 

효명황제(孝明皇帝) 17년 10월 15일 을축일(乙丑日)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周曆已移,438) 仁不代母. 秦直其位,439) 呂政殘虐. 然以諸侯十三,440) 幷兼天下, 極情縱欲, 養育宗親. 三十七年, 兵無所不加, 制作政令, 施於後王.441) 蓋得聖人之威, 河神授圖,442) 據狼、狐, 蹈參、伐, 佐政驅除,443) 距之444)稱始皇.

 

“주나라의 역수(曆數)는 이미 지나갔고, 한(漢)나라의 인덕(仁德)은 아직 주나라를 대신하기에 부족하므로 진나라가 제위(帝位)를 차지하게 되었다. 진시황 여정(呂政)은 잔혹하고 포학했지만, 열세 살 된 제후의 몸으로 천하를 겸병해 방종되게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며 종친(宗親)들을 양육했다. 재위 37년 동안 무력을 행사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정령(政令)을 만들어 후대의 제왕에게 남겨주었다. 이는 아마도 여정이 성인의 위령(威靈)을 얻고, 하신(河神)으로부터 도문(圖文)을 받아 낭성(狼星)과 호성(狐星)에 의지하고 삼성(參星)과 벌성(伐星)을 본받았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것들이 여정으로 하여금 적대세력을 몰아내고 스스로 시황제라고 칭할 수 있도록 도왔던 것이다.

 

始皇旣歿, 胡亥極愚, 酈山未畢, 復作阿房, 以遂前策. 云「凡所爲貴有天下者, 肆意極欲, 大臣至欲罷先君所爲」. 誅斯、去疾, 任用趙高. 痛哉言乎! 人頭畜鳴.445) 不威不伐惡,446) 不篤不虛亡,447) 距之不得留, 殘虐以促期, 雖居形便之國, 猶不得存.

 

진시황이 죽고 난 다음, 호해(胡亥)는 너무나도 우둔해 여산의 축묘(築墓)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시 아방궁을 건축해 시황제의 계획을 완수했다. 그리고는 ‘천하를 소유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데에 있는 것이거늘, 대신들이 선왕이 하고자 했던 일을 폐하려 하는 도다.’라고 말하고는 이사와 풍거질을 죽이고 조고를 임용했으니, 실로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마치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서 짐승 같은 소리를 질러대는 꼴이다. 만약 그가 흉악한 횡포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자신의 죄악을 토벌당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가 저지른 죄악이 깊고 중하지 않았다면 허망하게 파멸에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황제의 자리에 등극해 오래 머무르지도 못한 채 잔학한 짓을 일삼아 파멸을 재촉했으니, 비록 지형이 유리한 나라를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보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子嬰度次得嗣, 冠玉冠,448) 佩華紱,449) 車黃屋,450) 從451)百司, 謁七廟. 小人乘非位, 莫不怳忽失守, 偸安日日, 獨能長念卻慮, 父子作權, 近取於戶牖之閒, 竟誅猾臣, 爲452)君討賊. 高死之後, 賓婚未得盡相勞, 餐未及下咽, 酒未及濡脣, 楚兵已屠關中, 眞人翔霸上, 素車嬰組, 奉其符璽, 以歸帝者. 鄭伯茅旌鸞刀, 嚴王退舍.453) 河決不可復壅, 魚爛不可復全.454) 賈誼、司馬遷曰:「向使嬰有庸主之才, 僅得中佐, 山東雖亂, 秦之地可全而有, 宗廟之祀未當絶也.」秦之積衰, 天下土崩瓦解,455) 雖有周旦之材, 無所復陳其巧, 而以責一日之孤,456) 誤哉! 俗傳秦始皇起罪惡, 胡亥極, 得其理矣. 復責小子,457) 云秦地可全, 所謂不通時變者也. 紀季以酅, 春秋不名.458) 吾讀秦紀, 至於子嬰車裂趙高, 未嘗不健其決, 憐其志. 嬰死生之義備矣.459)

 

자영은 순서를 뛰어넘어 황위를 계승해, 옥관(玉冠)을 쓰고 화불(華紱)을 차고, 황옥(黃屋)의 수레를 타고, 백관들을 수행하게 해 칠묘(七廟)를 배알했다. 그러나 소인배들이 의외의 높은 자리에 발탁되어, 직무는 어리둥절해 감당하지 못한 채 날마다 편안함만을 추구했다. 이에 자영은 홀로 깊이 생각하고 과감히 결정해, 부자(父子)가 함께 사태를 저울질하고는, 마침내 가깝게 자신의 집안에서 교활한 간신 조고를 주살함으로써 선군을 위해 역적을 토벌했다.

 

조고가 죽은 다음, 빈객과 친지들이 미처 서로의 노고를 채 위로하지도 못하고, 잔칫상의 음식이 미처 목구멍을 내려가지도 못하고, 술이 미처 입술을 적시기도 전에, 초 나라 병사들이 이미 관중(關中)을 도륙해 진인(眞人)이 패상(覇上)에 날아드니, 자영은 흰 수레에 수대(綬帶)를 목에 감고서 황제의 부절과 옥새를 받들어 새로운 천자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마치 정백(鄭伯)이 두 손에 모정(茅旌)과 난도(鸞刀)를 받들고 투항하자 초 장왕(楚莊王)이 병졸을 90 리 뒤로 물리게 한 것과 같다. 강물은 일단 터져버리면 다시 막을 수 없고, 물고기는 한번 썩어버리면 다시 돌이킬 방법이 없다.

 

가의(賈誼)와 사마천(司馬遷)은 ‘만약 자영이 평범한 군주의 재능을 지니고서 중간 정도의 재능을 지닌 장상(將相)의 보좌만이라도 얻었다면, 비록 산동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진나라의 국토는 온전히 보전될 수 있었을 것이며, 종묘제사 또한 결코 끊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나라는 쇠퇴한 지 오래되어 천하가 흙더미 무너지듯, 기왓장 부서지듯 했으니, 설사 주단(周旦)의 재주가 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그의 교묘한 지혜를 펼칠 도리가 없었다. 그렇거늘, (가의와 사마천이) 자영(子嬰)을 책망한 것은 잘못된 일이다.

 

세간에 전하기로는 진시황은 죄악을 일으켰고 호해는 죄악이 극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 말은 매우 타당하다. 그런데도 오히려 자영을 책망하며 진나라의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고 운운하니, 이는 이른바 시세의 변화를 통찰하지 못한 것이다. 기국(紀國)의 기계(紀季)가 휴읍(酅邑)을 제(齊)나라에 바친 것에 대해 『춘추(春秋)』에서는 그의 이름이 지적되지 않았다. 나는 「진시황본기」를 읽다가 자영이 조고를 거열형(車裂刑)에 처하는 단락에 이르면 그의 결단을 칭송하고 그의 의지를 가상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자영은 생사의 대의(大義)를 완벽히 갖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304 集解徐廣曰:「一作『錮』. 錮, 鑄塞.」正義顔師古云:「三重之泉, 言至水也.」

305 正義言冢內作宮觀及百官位次, 奇器珍怪徙滿冢中. 臧, 才浪反.

306 正義灌音館. 輸音戍.

307 集解徐廣曰:「人魚似■, 四脚.」正義廣志云:「■魚聲如小兒啼, 有四足, 形如鱧, 可以治牛, 出伊水.」異物志云:「人魚似人形, 長尺餘. 不堪食. 皮利於鮫魚, 鋸材木入. 項上有小穿, 氣從中出. 秦始皇冢中以人魚膏爲燭, 卽此魚也. 出東海中, 今台州有之.」按:今帝王用漆燈冢中, 則火不滅.

308 正義度音田洛反.

309 正義音延, 下同. 謂冢中神道.

310 集解皇覽曰:「墳高五十餘丈, 周迴五里餘.」正義關中記云:「始皇陵在驪山. 泉本北流, 障使東西流. 有土無石, 取大石於渭(山)[南]諸山.」括地志云:「秦始皇陵在雍州新豐縣西南十里.」

311 集解徐廣曰:「表云十月戊寅, 大赦罪人.」

312 集解漢書百官表曰:「秦官, 掌宮殿門戶.」

313 正義軼, 徒結反.

314 正義於用反. 西雍在咸陽西, 今岐州雍縣故城是也. 又一云西雍, 雍西縣也.

315 正義丁略反.

316 正義尺證反.

317 正義二世言始滅六國, 威振古今, 自五帝三王未及, 旣已襲位, 而見金石盡刻其頌, 不稱始皇成功盛德甚遠矣.

318 集解徐廣曰:「姓馮.」正義去, 丘呂反.

319 索隱逮訓及也. 謂連及俱被捕, 故云連逮. 少, 小也. 近, 近侍之臣. 三郎謂中郎、外郎、散郎. 正義漢書百官表云有議郎、中郎、散郎, 又有左右三將, 謂郎中、車郎、戶郎.

320 正義謂出土爲陵, 旣成, 還復其土, 故言復土.

321 正義謂材官蹶張之士.

322 正義謂材士及狗馬.

323 正義度, 田洛反. 下, 行嫁反. 調, 田弔反. 謂下令調斂也.

324 正義音升.

325 集解李奇曰:「張大楚國也.」

326 集解漢書百官表曰:「謁者, 秦官, 掌賓贊受事.」

327 集解服虔曰:「音負擔.」

328 集解應劭曰:「戱, 弘農湖西界也.」孟康曰:「水名, 今戱亭是也.」蘇林曰:「邑名, 在新豐東南三十里.」正義戱音許宜反. 括地志云:「戱水源出雍州新豐縣西南驪山. 水經注云戱水出驪山馮公谷, 東北流. 今新豐縣東北十一里戱水當官道, 卽其處.」

329 集解漢書百官表曰:「少府, 秦官.」應劭曰:「掌山澤陂池之稅, 名曰禁錢, 以給私養, 自別爲藏. 少者小也, 故稱少府.」正義邯, 胡甘反.

330 集解晉灼曰;「亭名, 在弘農東十三里. 魏武帝改曰好陽.」正義括地志云:「曹陽故亭一名好陽亭, 在陝州桃林縣東南十四里, 卽章邯殺周文處.」

331 正義父音甫. 括地志云:「城父, 亳州所理縣.」

332 正義今曹州定陶縣.

333 正義今齊州縣.

334 正義括地志云:「邢州平鄕縣城, 本鉅鹿, [王]離圍趙王歇卽此城.」

335 索隱一作「固聞聲」. 言天子常處禁中, 臣下屬望, 纔有兆朕, 聞其聲耳, 不見其形也.

336 集解蔡邕曰:「禁中者, 門戶有禁, 非侍御者不得入, 故曰禁中.」

337 正義上色反.

338 索隱采, 木名. 刮音括.

339 集解徐廣曰:「呂靜云飯器謂之簋.」索隱如字, 一音鏤. 一作「簋」.

340 集解如淳曰:「土形, 飯器之屬, 瓦器也.」索隱飯器, 以瓦爲之.

341 正義以讓反.

342 索隱謂監門之卒. 養卽卒也, 有冢養卒. 觳音學, 謂盡也. 又占學反. 正義又苦角反. 爾雅云:「觳, 盡也.」言堯舜采椽不刮, 茅茨不翦, 飯土, 啜土形, 雖監守門之人, 供養亦不盡此之疏陋也.

343 正義括地志云:「大夏, 今幷州晉陽及汾、絳等州是. 昔高辛氏子實沈居之, 西近河.」言禹鑿龍門, 河水道, 得大通, 幷州之地不壅溢也.

344 正義亭, 平也. 又云「決亭壅之水.」

345 正義臿音初洽反, 築牆杵也. 臿, 鍬也. 爾雅云:「鍬謂之臿.」

346 正義烈, 美也. 言臣虜之勞, 猶不美於此矣. 又烈, 酷也. 禹鑿龍門, 通大夏, 道決黃河洪水放之海, 身持鍬杵, 使膝脛無毛, 賤臣奴虜之勤勞, 不酷烈於此辛苦矣.

347 正義直拱反.

348 正義音境.

349 正義爲, 于僞反.

350 正義卒, 子律反. 囚, 在由反. 謂禁錮也.

351 集解徐廣曰:「一作『卯』.」

352 正義丁禮反. 氐猶略.

353 正義雖遂反.

354 集解張晏曰:「望夷宮在長陵西北長平觀道東故亭處是也. 臨涇水作之, 以望北夷.」正義括地志云:「秦望夷宮在雍州咸陽縣東南八里. 張晏云臨涇水作之, 望北夷.」

355 集解徐廣曰:「一云郎中令趙成.」

356 集解西京賦曰:「徼道外周, 千廬內傅.」薛綜曰:「士傅宮外, 內爲廬舍, 晝則巡行非常, 夜則警備不虞.」

357 集解蔡邕曰:「群臣士庶相與言, 曰殿下、閣下、足下、侍者、執事, 皆謙類.」

358 集解詳音羊.

359 集解應劭曰:「霸水上地名, 在長安東三十里. 古名滋水, 秦穆公更名霸水.」

360 集解應劭曰:「組者, 天子黻也. 係頸者, 言欲自殺. 素車白馬, 喪人之服也.」

361 集解徐廣曰:「在霸陵.」駰案:蘇林曰「亭名, 在長安東十三里」.

362 索隱謂合關東爲從長也.

363 集解徐廣曰:「櫌, 田器, 音憂.」索隱徐以櫌爲田器, 非也. 孟康以櫌爲鉏柄, 蓋得其近也.

364 索隱言其兵蠶食天下, 不裹糧而行.

365 索隱謂輕前敵, 不部伍旅進也. 舞陽侯曰「橫行匈奴中」是也.

366 集解駰案:鶡冠子曰「德萬人者謂之俊, 德千人者謂之豪, 德百人者謂之英」. 索隱謂武臣、田儋、魏豹之屬.

367 索隱此評失也. 章邯之降, 由趙高用事, 不信任軍將, 一則恐誅, 二則楚兵旣盛, 王離見虜, 遂以兵降耳. 非三軍要市於外以求封明矣. 要, 平聲.

368 集解徐廣曰:「大, 一作『小』.」

369 索隱賈誼書「安」作「案」.

370 索隱賈誼書「五」作「王」.

371 索隱按:春秋緯曰諸侯冰散席卷也.

372 集解張晏曰:「括, 結囊也. 言其能包含天下.」索隱注同.

373 索隱商君, 衛公孫鞅, 仕秦爲左庶長, 遂爲秦制法, 孝公致霸, 封之於商, 號商君.

374 索隱戰國策曰:「蘇秦亦爲秦連衡.」高誘曰:「合關東從通之秦, 故曰連衡也.」

375 集解漢書音義曰:「締, 結也.」

376 索隱言孟嘗等四君皆爲其國共相約結爲從, 以離散秦之橫.

377 索隱六國者, 韓、魏、趙、燕、齊、楚是也. 與秦爲七國, 亦謂之七雄. 又六國與宋、衛、中山爲九國. 其三國蓋微, 又前亡.

378 集解徐廣曰:「越, 一作『經』. 或自別有此人, 不必甯越也.」索隱寧越, 趙人, 賈誼作「甯越」. 徐尙, 未詳. 蘇秦, 東周洛陽人. 呂氏春秋「杜赫以安天下說周昭文君」, 高誘曰「杜赫, 周人也」.

379 索隱戰國策齊明, 東周臣, 後仕秦、楚及韓. 周最, 周之公子, 亦仕秦. 陳軫, 夏人, 亦仕秦. 昭滑, 楚人. 樓緩, 魏文侯弟, 所謂樓子也. 蘇厲, 秦之弟, 仕齊. 樂毅本齊臣, 入燕, 燕昭王以客禮待之, 以爲亞卿. 翟景, 未詳也.

380 索隱吳起, 衛人, 事魏文侯爲將. 孫臏, 孫武之後也. 呂氏春秋曰「王廖貴先, 兒良貴後」, 二人皆天下之豪士. 田忌, 齊將也. 廉頗, 趙將也. 趙奢亦趙之將.

381 集解徐廣曰:「鹵, 楯也.」

382 集解張晏曰:「孝公、惠文王、武王、昭王、孝文王、莊襄王.」

383 集解徐廣曰:「拊, 拍也, 音府. 一作『槁朴』.」索隱賈本論作「槁朴」.

384 集解韋昭曰:「越有百邑.」

385 集解應劭曰:「壞堅城, 恐人復阻以害己也.」

386 集解徐廣曰:「斬, 一作『踐』.」駰案:服虔曰「斷華山爲城」. 索隱斬, 亦作「踐」, 亦出賈本論. 又崔浩云:「踐, 登也.」

387 集解如淳曰:「何猶問也.」索隱崔浩云:「何或爲『呵』.」漢舊儀:「宿衛郎官分五夜誰呵, 呵夜行者誰也.」何呵字同.

388 索隱金城, 言其實且堅也. 韓子曰「雖有金城湯池」, 漢書張良亦曰「關中所謂金城千里, 天府之國.」

389 集解服虔曰:「以繩係戶樞也.」孟康曰:「瓦罋爲■也.」

390 集解如淳曰:「甿, 古『氓』字. 氓, 民也.」

391 集解漢書音義曰:「首出十長百長之中.」如淳曰:「時皆辟屈在十百之中.」

392 集解韋昭曰:「殽謂二殽. 函, 函谷關也.」

393 集解服虔曰:「以鉏柄及棘作矛槿也.」如淳曰:「櫌椎, 塊椎也.」

394 集解徐廣曰:「錟, 一作『銛』.」駰案:如淳曰「長刃矛也」. 又曰「鉤戟似矛, 刃下有鐵, 橫方上鉤曲也」. 鎩音所拜反.

395 集解漢書音義曰:「『絜東』之『絜』.」

396 集解徐廣曰:「一本有此篇, 無前者『秦孝公』已下, 而又以『秦幷兼諸侯山東三十餘郡』繼此末也.」索隱按:賈誼過秦論以「孝公」已下爲上篇, 「秦兼幷諸侯山東三十餘郡」爲下篇. 鄒誕生云「太史公刪賈誼過秦篇著此論, 富其義而省其辭. 褚先生增續旣已混殽, 而世俗小智不唯刪省之旨, 合寫本論於此, 故不同也. 今頗亦不可分別」.

397 集解徐廣曰:「一作『短』, 小襦也, 音豎.」索隱趙岐曰:「褐以毛毳織之, 若馬衣. 或以褐編衣也.」裋, 一音豎. 謂褐布豎裁, 爲勞役之衣, 短而且狹, 故謂之短褐, 亦曰豎褐.

398 集解徐廣曰:「一無此上五字.」

399 索隱此已下重序列秦之先君立年及葬處, 皆當據秦紀爲說, 與正史小有不同, 今取異說重列於後. 襄公, 秦仲孫, 莊公子, 救周, 周始命爲諸侯. 初爲西畤, 祠白帝. 立十三年, 葬西土.

400 索隱作鄜畤, 又作陳寶祠.

401 集解地理志云馮翊有衙縣. 索隱憲公滅蕩社, 居新邑, 葬衙. 本紀憲公徙居平陽, 葬西山.

402 索隱一云居西陂, 葬衙. 本紀不云.

403 集解徐廣曰:「一云居平封宮.」

404 索隱紀云葬平陽, 初以人從死.

405 索隱二年初伏. 本紀此已下居葬絶不言也.

406 索隱四年, 作密畤.

407 集解徐廣曰:「之, 一作『走』.」

408 索隱著音宁, 又音貯, 著卽宁也. 門屛之閒曰宁, 謂學於宁門之人. 故詩云「俟我於著乎而」是也.

409 索隱一作「僖公」. 系本云名后伯車.

410 正義丘, 一作「二」也.

411 集解徐廣曰:「春秋作『哀公』.」

412 正義一作「三十七年」.

413 正義十年, 葬車里. 元年, 孔子行魯相事.

414 正義(雍)本紀作「十四年」.

415 正義一作「利」.

416 索隱一作「厲共公」.

417 集解徐廣曰:「一作『人』.」

418 索隱又作「趮公」. 正義十四年, 居受寢, 葬悼公南也.

419 正義四年, 葬櫟圉氏.

420 集解徐廣曰:「年表云『星晝見』.」

421 集解徐廣曰:「懷公生昭子, 昭子生靈公.」索隱紀年及系本無「肅」字. 立十年, 表同, 紀十二年.

422 索隱按:本紀簡公名悼子, 卽剌龔公之子, 懷公弟也. 且紀及系本皆以爲然, 今此文云「靈公」, 謬也. 立十六年, 葬僖公西.

423 索隱王劭按紀年云「簡公後次敬公, 敬公立十三年, 乃至惠公」, 辭卽難憑, 時參異說.

424 索隱系本謂「少主」.

425 集解徐廣曰:「靈公子.」索隱系本稱「元獻公」. 立二十二年, 表同, 紀二十四年.

426 索隱本紀十二年.

427 正義本紀云「十二年作咸陽, 築冀闕」, 是十三年始都之.

428 索隱十九而立.

429 正義括地志云:「秦惠文王陵在雍州咸陽縣西北一十四里.」

430 集解徐廣曰:「皇甫謐曰葬畢, 今按陵西畢陌.」索隱系本作「武烈王」. 十九而立, 立三年. 本紀四年. 正義括地志云:「秦悼武王陵在雍州咸陽縣西十里, 俗名周武王陵, 非也.」

431 索隱十九年而立, 葬芷陵也. 正義括地志云:「秦莊襄王陵在雍州新豐縣西南三十五里, 俗亦謂爲子楚. 始皇陵在北, 故亦謂爲見子陵.」

432 正義酈, 力知反.

433 正義括地志云:「秦故胡亥陵在雍州萬年縣南三十四里.」上文「葬以黔首」也.

434 集解徐廣曰:「本紀云二十一.」

435 正義秦本紀自襄公至二世, 五百七十六年矣. 年表自襄公至二世, 五百六十一年. 三說並不同, 未知孰是.

436 正義班固典引云後漢明帝永平十七年, 詔問班固:「太史遷贊語中寧有非邪?」班固上表陳秦過失及賈誼言答之.

437 索隱此已下是漢孝明帝訪班固評賈馬贊中論秦二世亡天下之得失, 後人因取其說附之此末.

438 正義周初卜世三十, 卜年七百, 以五序得其道, 故王至三十七, 歲至八百六十七. 曆數旣過, 秦幷天下, 是周曆已移也.

439 索隱周曆已移, 周亡也. 仁不代母, 謂周得木德, 木生火, 周爲漢母也. 言曆運之道, 仁恩之情, 子不代母而王, 謂火不代木, 言漢不合卽代周也. 秦値其閏位, 得在木火之閒也. 此論者之辭也. 正義始皇以爲周火德, 秦代周從所不勝, 爲水德之始也. 按:周木德也, 秦水德也. 五行之運,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 金生水. 所生者爲母, 出者爲子. 帝王之次, 子代母. 秦稱水是母代子, 故言若有德之君相代, 不母承其子. 直音値. 言秦幷天下稱帝, 是秦德値帝王之位.

440 集解始皇初爲秦王, 年十三也. 索隱呂政者, 始皇名政, 是呂不韋幸姬有娠, 獻莊襄王而生始皇, 故云呂政.

441 正義謂置郡縣, 壞井田, 開阡陌, 不立侯王, 始爲伏臘;又置丞相、太尉、御史大夫、奉常、郎中令、僕射、廷尉、典客、宗正、少府、中尉、將作、詹事、水衡都尉、監、守、縣令、丞等, 皆施於後王, 至于隋、唐矣.

442 正義蓋者, 疑辭也. 言始皇之威, 能呑幷天下稱帝, 疑得聖人之威靈, 河神之圖錄.

443 正義狼音郎. 狼, 狐, 主弓矢星. 天官書云參伐主斬艾事. 言秦據蹈狼、狐、參、伐之氣, 驅滅天下.

444 正義上音巨. 之, 至也.

445 正義畜, 許又反. 言胡亥人身有頭面, 口能言語, 不辨好惡, 若六畜之鳴.

446 正義此五字爲一句也.

447 正義言胡亥藉帝王之威器, 殘酷暴虐滋己惡, 惡旣深篤, 以至滅亡, 豈其虛哉.

448 正義上「冠」音綰.

449 正義音拂.

450 集解蔡邕曰:「黃屋者, 蓋以黃爲裏.」

451 正義才用反.

452 正義于僞反.

453 集解公羊傳曰:「楚莊王伐鄭, 鄭伯肉袒, 左執茅旌, 右執鸞刀, 以逆莊王, 莊王退舍七里.」何休曰:「茅旌, 鸞刀, 祭祀宗廟所用也. 執宗廟器者, 示以宗廟血食自歸.」正義旌音精. 嚴音莊.

454 索隱宋均曰:「言如魚之爛, 從內而出.」

455 正義言秦國敗壞, 若屋宇崩穨, 衆瓦解散也.

456 正義日音馹. 一日之孤謂子嬰.

457 正義亦謂子嬰.

458 集解春秋曰:「紀季以酅入于齊.」公羊傳曰:「何以不名? 賢之也. 謂設五廟以存姑姊妹也.」正義酅音戶圭反. 括地志云:「安平城在靑州臨淄縣東十九里, 古紀之酅邑. 帝王紀云周之紀國, 姜姓也. 紀侯譖齊哀公於周懿王, 王烹之. 外傳曰紀侯入爲周士. 竹書云齊襄公滅紀、郱、鄑、郚.」又括地志云:「郱城在靑州臨朐縣東三十里. 鄑城在北海縣東北七十里. 郚城在密州安丘縣界.」郱音騈. 鄑音訾. 按:秦始皇起罪惡, 胡亥極, 得其理. 國旣崩絶, 箕子、比干尙不能存殷, 庸主子嬰焉能救秦之敗? 以賈誼、史遷不通時變, 不如紀季之深識也. 季, 紀侯少弟, 不書名, 故曰紀季.

459 集解徐廣曰:「班固典引曰『永平十七年, 詔問臣固, 太史遷贊語中寧有非邪? 臣對, 賈誼言子嬰得中佐, 秦未絶也. 此言非是, 臣素知之耳』.」

 

'中國歷史와文學 > 史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史記 卷七. 項羽本紀 Ⅱ  (0) 2019.05.11
史記 卷七. 項羽本紀 Ⅰ  (0) 2019.05.11
史記 卷六. 秦始皇本期 Ⅱ  (0) 2019.05.11
史記 卷六. 秦始皇本記 Ⅰ  (0) 2019.05.11
史記 卷五. 秦本記 Ⅱ  (0) 2019.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