仲尼弟子列傳
子夏
蔔商字子夏. 少孔子四十四歳.
子夏問:「『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為絢兮』, 何謂也?」 子曰:「絵事後素.」 曰:「禮後乎?」 孔子曰:「商始可與言詩已矣.」
子貢問:「師與商孰賢?」子曰:「師也過, 商也不及.」 「然則師愈與?」曰:「過猶不及.」
子謂子夏曰:「汝為君子儒, 無為小人儒.」
孔子既沒, 子夏居西河教授, 為魏文侯師. 其子死, 哭之失明.
복상(卜商)은 자를 자하(子夏)라 했고, 공자보다 44년 아래였다.
자하가 “‘웃을 때 보이는 어여쁜 보조개, 초롱한 눈 곱기도 하여라. 바탕색을 그 위에 보태니 더욱 아름답구나’라고 했는데 무슨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그림을 그린 뒤 바탕색을 더한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자하가 “예가 그 다음이란 말씀입니까?”라고 하자 공자는 “복상이 이제야 나와 『시(詩)』를 말할 수 있겠구나.”라고 했다.
자공이 “사(師, 자장)와 상(商, 복상) 누가 더 뛰어납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자장은 지나치고, 복상은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장이 더 낫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공자는 “지나친 것이나 미치지 못한 것이나 같다.”라고 했다.
공자가 자하에게 “너는 군자유(君子儒)가 되어야지 소인유(小人儒)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공자가 죽자 자하는 서하(西河)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베풀면서 위(魏) 문후(文侯)의 스승이 되었다. 그 아들이 죽자 슬퍼하다가 눈이 멀었다.
子張
顓孫師, 陳人, 字子張. 少孔子四十八歳.
子張問幹祿, 孔子曰:「多聞闕疑, 慎言其餘, 則寡尤;多見闕殆, 慎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他日従在陳蔡閒, 困, 問行. 孔子曰:「言忠信, 行篤敬, 雖蠻貊之國行也;言不忠信, 行不篤敬, 雖州里行乎哉!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 夫然後行.」 子張書諸紳.
子張問:「士何如斯可謂之達矣?」孔子曰:「何哉, 爾所謂達者?」子張対曰:「在國必聞, 在家必聞.」 孔子曰:「是聞也, 非達也. 夫達者, 質直而好義, 察言而観色, 慮以下人, 在國及家必達.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國及家必聞.」
전손사(顓孫師)는 진(陳) 사람이고 자를 자장(子張)이라 했다. 공자보다 48년 아래였다.
자장이 벼슬하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는 “많이 듣고 의심나는 것은 보류해두며, 다 아는 일을 신중히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위험한 일을 보류해두며, 다 아는 일을 신중하게 행동하면 후회가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으면 벼슬이 그 안에 있다.”라고 했다.
어느 날 (자장이) 공자를 따르다가 진(陳)과 채(蔡) 사이에서 곤경에 처하여 행동(처세)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말이 충성스럽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독실하고 공경스럽다면 오랑캐 나라에서도 통하겠지만, 말이 충성스럽지 못하고 믿음도 없으며, 행동 또한 독실하지도 공경스럽지도 못하면 자기 고향인들 통하겠느냐?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늘 그것이 눈앞에 보여야 행할 수 있느니라.”
자장은 허리띠에 써두었다.
자장이 “선비가 어떠해야 통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무엇이냐, 네가 말하는 통달이란 것이?”라고 했다. 자장이 “나라에서는 반드시 그 이름이 들려야 하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그 이름이 들리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그것은 명성이지 통달이 아니다. 무릇 통달이란 바탕이 곧아 의리를 좋아하고, 말을 잘 살피고 표정을 관찰하며, 늘 남보다 낮은 자세로 임하면 나라에서건 집안에서건 통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릇 명성이란 어진 것 같지만 행동은 어긋나는데도 거기에 안주하여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그러면 나라건 집안이건 명성이 나기 마련이다.”
曾參
曾參,南武城人,字子輿。少孔子四十六歲。
孔子以為能通孝道,故授之業。作《孝經》。死於魯。
子羽
澹台滅明, 武城人, 字子羽. 少孔子三十九歳.
狀貌甚悪. 欲事孔子, 孔子以為材薄. 既已受業, 退而修行, 行不由徑, 非公事不見卿大夫.
南遊至江, 従弟子三百人, 設取予去就, 名施乎諸侯. 孔子聞之, 曰:「吾以言取人, 失之宰予;以貌取人, 失之子羽.」
담대멸명(澹臺滅明)은 무성(武城) 사람으로 자를 자우(子羽)라 했다. 공자보다 39년 아래였다.
얼굴이 아주 못 생겼다. 공자를 모시러 오자 공자는 재능이 보잘 것 없을 것으로 여겼다. 수업을 다 마친 뒤 물러나와 행동을 조심했는데, 길도 지름길로 가지 않았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경대부를 만나지 않았다.
남쪽을 떠돌다 장강에 이르렀을 무렵 따르는 제자가 300인이었다. 주고받는 것, 나아가고 물러남이 분명하여 그 명성이 제후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공자가 이를 듣고는 “내가 말로 사람을 평가했다가 재여에게 실수를 범했고, 얼굴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자우에게 실수했다.”라고 했다.
宓不齊
宓不齊字子賤。少孔子三十歲。
孔子謂子賤,「君子哉!魯無君子,斯焉取斯?」
子賤為單父宰,反命於孔子,曰:「此國有賢不齊者五人,教不齊所以治者。」孔子曰:「惜哉不齊所治者小,所治者大則庶幾矣。」
子思
原憲字子思. 子思問恥. 孔子曰:「國有道, 谷. 國無道, 谷, 恥也.」
子思曰:「克伐怨欲不行焉, 可以為仁乎?」孔子曰:「可以為難矣, 仁則吾弗知也.」
孔子卒, 原憲遂亡在草沢中. 子貢相衛, 而結駟連騎, 排藜藿入窮閻, 過謝原憲. 憲摂敝衣冠見子貢. 子貢恥之, 曰:「夫子豈病乎?」原憲曰:「吾聞之, 無財者謂之貧, 學道而不能行者謂之病. 若憲, 貧也, 非病也.」子貢慚, 不懌而去, 終身恥其言之過也.
원헌(原憲)은 자를 자사(子思)라 했다.
자사가 부끄러움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벼슬을 하고 녹봉을 받는다.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고 있는데도 녹봉을 받고 있다면 이것이 부끄러움이다.”라고 했다.
자사가 “이기길 좋아하고, 떠벌리고, 원망하고, 욕심을 내고하는 이런 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어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는 “참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겠다.”라고 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원헌은 초야에 숨었다. 자공이 위(衛)의 재상이 되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풀숲을 헤치고 궁핍한 골목을 찾아 헌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원헌은 해진 의관을 단정히 여미고 자공을 만났다. 자공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대는 어찌 하여 이렇게 궁색하게 사시오?”라고 했다. 헌원이 “내가 듣기에 재산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 하고, 도를 배워 행하지 않는 것을 궁색하다고 했소. 나 헌은 가난하지만 궁색하지는 않소이다.”라고 했다. 자공이 아프고 편치 못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나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했던 잘못을 부끄러워했다.
公冶長
公冶長,齊人,字子長。
孔子曰:「長可妻也,雖在累紲之中,非其罪也。」其子妻之。
子容
南宮括字子容。
問孔子曰:「羿善射,奡盪舟,俱不得其死然;禹稷躬稼而有天下?」孔子弗答。容出,孔子曰:「君子哉若人!上德哉若人!」「國有道,不廢;國無道,免於刑戮。」三復「白珪之玷」,以其兄之子妻之。
남궁괄(南宮括)은 자를 자용(子容)이라 했다.
공자에게 “예(羿)는 활을 잘 쏘았고, 오(奡)는 땅에서 배를 움직일 정도였는데 모두 제명에 죽지 못했고, 우(禹)와 직(稷)은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도 천하를 얻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으나 공자는 답하지 않았다.
자용이 나가자 공자는 “군자로다 저 사람이! 덕을 숭상할 줄 아는 사람이로구나!”라고 했다. 그리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버려지지 않을 사람이고, 사람에 도가 없더라도 죽음을 면할 사람이다.”라고 했다. (남궁괄이) “하얀 옥의 티끌” 부분을 세 번 반복해서 읽자 공자는 자기 형님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公皙哀
公皙哀字季次。
孔子曰:「天下無行,多為家臣,仕於都;唯季次未嘗仕。」
曾蒧
曾蒧字皙.
侍孔子, 孔子曰:「言爾志.」蒧曰:「春服既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帰.」
孔子喟爾歎曰:「吾與蒧也!」
증점(曾蒧)은 자가 석(晳)이다.
공자를 모시고 있는 데 공자가 “네 뜻을 말해 보거라.”라고 하자 증점은 “화창한 봄날에 같은 또래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沂水)에서 몸을 씻고 무우(舞雩)의 대(臺) 위에서 바람을 쐰 다음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내가 점의 뜻과 같다.”라고 했다.
顔無繇
顔無繇字路. 路者, 顔回父, 父子嘗各異時事孔子. 顔回死, 顔路貧, 請孔子車以葬.
孔子曰:「材不材,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以為之槨, 以吾従大夫之後, 不可以徒行.」
안무요(顔無繇)는 자가 노(路)이다. 노는 안회의 아버지로서 아버지와 아들이 각기 시기를 달리하여 공자를 섬겼다.
안회가 죽자 가난했던 안로(顔路)는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 장례를 치르길 청했다.
공자는 “재능이 있든 없든 각자 다 자기 자식들이 아닌가. (내 아들) 공리(孔鯉)가 죽었을 때 관으로 널만 쓰고 겉널은 쓰지 않았다. 내가 수레를 팔아 겉널을 마련해주지 않은 것은 내가 대부가 된 이후로 걸어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商瞿
商瞿,魯人,字子木。少孔子二十九歲。
孔子傳易於瞿,瞿傳楚人馯臂子弘,弘傳江東人矯子庸疵,疵傳燕人周子家豎,豎傳淳于人光子乘羽,羽傳齊人田子莊何,何傳東武人王子中同,同傳菑川人楊何。何元朔中以治易為漢中大夫。
高柴
高柴 字子羔. 少孔子三十歳. 子羔長不盈五尺, 受業孔子, 孔子以為愚.子路使子羔為費郈宰, 孔子曰:「賊夫人之子!」 子路曰:「有民人焉, 有社稷焉, 何必読書然後為學!」孔子曰:「是故悪夫佞者.」
고시(高柴)는 자를 자고(子羔)라 했고, 공자보다 30년 연하였다.
자고는 키가 다섯 자도 안 되었다. 공자에게 수업을 받았는데 공자는 둔하다고 여겼다.
자로가 자고를 비읍(費邑)의 재(宰)로 삼자 공자는 “남의 자식을 그르치는구나!”라고 했다. 자로가 “인민이 있고 사직이 있거늘 꼭 책을 읽어야만 학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공자는 “이래서 말 잘하는 자들이 싫다.”라고 했다.
漆彫開
漆彫開字子開. 孔子使開仕, 対曰:「吾斯之未能信.」孔子説.
칠조개(漆雕開)는 자가 자개(子開)이다.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을 하라고 하자 “저는 그 일에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기뻐했다.
公伯繚
公伯繚字子周.
周愬子路於季孫, 子服景伯以告孔子, 曰:「夫子固有惑志, 繚也, 吾力猶能肆諸市朝.」 孔子曰:「道之將行, 命也;道之將廃, 命也. 公伯繚其如命何!」
공백료(公伯繚)는 자를 자주(子周)라 했다.
자주가 계손(季孫)에게 자로를 헐뜯었다.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이를 공자에게 알리면서 “그 사람(계손)이 이미 의심을 품었습니다. 공백료라면 제 힘으로도 저자거리에다 조리를 돌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도가 실행되려는 것도 천명이고 도가 폐기되려는 것도 천명이다. 공백료 그가 천명을 어찌 하겠느냐?”라고 했다.
司馬耕
司馬耕字子牛.
牛多言而躁. 問仁於孔子, 孔子曰:「仁者其言也訒.」曰:「其言也訒, 斯可謂之仁乎?」子曰:「為之難, 言之得無訒乎!」
問君子, 子曰:「君子不憂不懼.」
曰:「不憂不懼, 斯可謂之君子乎?」子曰:「內省不疚, 夫何憂何懼!」
사마경(司馬耕)은 자가 자우(子牛)이다.
자우는 말이 많고 급했다. 공자에게 인(仁)을 물은 적이 있는데 공자는 “인덕이 있는 사람은 말을 조심스럽게 한다.”라고 했다. “말을 조심스럽게 하면 인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묻자 공자는 “행하기도 어려운데 말할 때 조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군자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군자는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라고 했다. “걱정도 두려움도 없으면 군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라고 다시 묻자 “마음으로 반성하여 잘못이 없으면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겠느냐?”라고 했다.
樊須
樊須字子遅. 少孔子三十六歳. 樊遅請學稼, 孔子曰:「吾不如老農.」請學圃, 曰:「吾不如老圃.」 樊遅出, 孔子曰:「小人哉樊須也! 上好禮, 則民莫敢不敬;上好義, 則民莫敢不服;上好信, 則民莫敢不用情. 夫如是, 則四方之民繈負其子而至矣, 焉用稼!」
樊遅問仁, 子曰:「愛人.」問智, 曰:「知人.」
번수(樊須)는 자를 자지(子遲)라 했고, 공자보다 36년 연하였다.
번지(樊遲)가 농사에 대해 배우길 청하자 공자는 “내가 오래 농사지은 사람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 채소 키우는 것을 배우려고 하자 “내가 오래 채소를 가꾼 사람만 못하느니라.”라고 했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는 “소인이로구나, 번수가! 위에서 예를 좋아하면 공경하지 않을 백성이 없고, 위에서 의리를 좋아하면 복종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위에서 믿음이 있으면 진정으로 대하지 않을 백성이 없다. 이렇게만 하면 사방의 인민들이 그 자식을 들쳐 업고라도 찾아 올 것인데 농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라고 했다.
번지가 인을 묻자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혜에 대해 묻자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有若
有若少孔子四十三歳. 有若曰:「禮之用, 和為貴, 先王之道斯為美. 小大由之, 有所不行;知和而和, 不以禮節之, 亦不可行也.」 「信近於義, 言可複也;恭近於禮, 遠恥辱也;因不失其親, 亦可宗也.」
孔子既沒, 弟子思慕, 有若狀似孔子, 弟子相與共立為師, 師之如夫子時也. 他日, 弟子進問曰:「昔夫子當行, 使弟子持雨具, 已而果雨. 弟子問曰:『夫子何以知之?』夫子曰:『詩不雲乎? 「月離於畢, 俾滂沱矣.」 昨暮月不宿畢乎?』他日, 月宿畢, 竟不雨. 商瞿年長無子, 其母為取室. 孔子使之斉, 瞿母請之. 孔子曰:『無憂, 瞿年四十後當有五丈夫子.』 已而果然. 問夫子何以知此?」有若黙然無以應. 弟子起曰:「有子避之, 此非子之座也!」
유약(有若)은 공자보다 43년 아래였다.
유약은 이런 말을 했다.
“예의 쓰임에서 중요한 것은 조화이다. 선왕의 도에서도 이를 가장 앞세웠다. 다만 크든 작든 무조건 이를 따를 경우 안 통하는 경우도 있다. 조화만 알아 조화만 내세우고 예로 조절하지 않아도 안 통할 수 있다.”
“믿음이 의리에 가까우면 말을 반복할 수 있다. 공경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 할 수 있다. 친해야 할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의지할 수 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로 제자들은 공자가 그리워 공자를 닮은 유약을 함께 스승으로 모시고는 선생님을 섬길 때처럼 섬겼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와서 “옛날 선생님께서 길을 나서시면서 제자에게 우산을 갖추라고 했는데 과연 비가 왔습니다. 제자가 ‘선생님께서는 비가 올 줄 어찌 아셨습니까’라 하자 선생님께서 ‘ 『시』에 달이 필(畢)이란 별과 만나면 큰 비가 온다고 하지 않더냐며 어제 밤 달이 필에 머물러 있지 않았더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날 달이 필에 머물러 있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상구(商瞿)가 나이가 많은데도 자식이 없어서 그 어머니가 첩실을 얻으라고 했습니다. 공자가 상구를 제로 보내려 하자 상구의 어머니가 보내지 말아달라고 청했습니다. 공자께서는 ‘걱정마십시오. 상구가 40이 넘으면 아들 다섯을 두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감히 묻건대 선생님께서는 이를 어떻게 아셨을까요?”라고 물었다. 유약이 말도 없고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때 질문했던 제자가 일어나면서 “당신은 비키시오. 그 자리는 당신 자리가 아니오!”라고 했다.
公西赤
公西赤字子華. 少孔子四十二歳.
子華使於齊, 冉有爲其母請粟. 子曰與之釜. 請益曰與之庾. 冉子與之粟五秉. 孔子曰, 赤之適齊也. 乘肥馬衣輕裘.
吾聞, 君子周急不繼富.
釜 : 六斗四升. 庾 : 一六斗. 秉 : 一六斛
공서적(公西赤)은 자를 자화(子華)라 했고, 공자보다 42년 연하였다.
자화가 제에 사신으로 가자 염유가 자화의 어머니를 위해 양식을 요청했다. 공자가 “1부(釜)만 주어라.”라고 하자 더 줄 것을 요청했다. 공자가 “1유(庾)를 주어라.”라고 했다. 염유가 조 5병(秉)을 주었다. 공자가 “공서적이 제로 갈 때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었다. 내가 듣기에 군자는 급한 사람은 보살피지만 부유한 사람에게는 더 보태주지 않는다.”라 했다.
巫馬施
巫馬施字子旗. 少孔子三十歳.
陳司敗問孔子曰:「魯昭公知禮乎?」孔子曰:「知禮.」退而揖巫馬旗曰:「吾聞君子不黨, 君子亦黨乎? 魯君娶呉女為夫人, 命之為孟子. 孟子姓姫, 諱稱同姓, 故謂之孟子. 魯君而知禮, 孰不知禮!」施以告孔子, 孔子曰:「丘也幸, 苟有過, 人必知之. 臣不可言君親之悪, 為諱者, 禮也.」
무마시(巫馬施)는 자를 자기(子旗)라 했고, 공자보다 30년 연하였다.
진사패(陳司敗)가 공자에게 “노의 소공이 예를 압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예를 알지요.”라고 했다. (진사패가) 물러나와 무마기(巫馬旗)에 절을 하고는 “제가 듣기에 군자는 패거리를 짓지 않는다 하던데 군자도 패거리를 짓습니까? 노의 국군이 오의 여자를 부인으로 취하여 맹자(孟子)라 불렀습니다. 맹자의 성이 희(姬)로 서로 같은 성이었기 때문에 맹자라 부른 것입니다. 노의 국군이 예를 안다면 누군들 예를 모르겠습니까?”라고 했다. 마무시가 이를 공자에게 알리자 공자는 “이 구는 행운이다. 무엇이든 잘못이 있으면 누군가 반드시 알게 해주는구나. 신하에게는 군주의 잘못을 말하지 않고 숨기는 것이 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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