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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六七. 仲尼弟子列傳 Ⅱ

by 柳川 2019. 6. 2.

                                                 仲尼弟子列傳 

 

 


 

商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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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 .

 

복상()은 자를 자하()라 했고, 공자보다 44년 아래였다.

자하가 “‘웃을 때 보이는 어여쁜 보조개, 초롱한 눈 곱기도 하여라. 바탕색을 그 위에 보태니 더욱 아름답구나’라고 했는데 무슨 말입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그림을 그린 뒤 바탕색을 더한다는 뜻이다.”라고 했다. 자하가 “예가 그 다음이란 말씀입니까?”라고 하자 공자는 “복상이 이제야 나와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라고 했다.

자공이 “사(, 자장)와 상(, 복상) 누가 더 뛰어납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자장은 지나치고, 복상은 미치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장이 더 낫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공자는 “지나친 것이나 미치지 못한 것이나 같다.”라고 했다.

공자가 자하에게 “너는 군자유()가 되어야지 소인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공자가 죽자 자하는 서하(西)에 머무르며 가르침을 베풀면서 위() 문후()의 스승이 되었다. 그 아들이 죽자 슬퍼하다가 눈이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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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손사()는 진() 사람이고 자를 자장()이라 했다. 공자보다 48년 아래였다.

자장이 벼슬하는 것에 대해 묻자 공자는 “많이 듣고 의심나는 것은 보류해두며, 다 아는 일을 신중히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많이 보고 위험한 일을 보류해두며, 다 아는 일을 신중하게 행동하면 후회가 적을 것이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후회가 적으면 벼슬이 그 안에 있다.”라고 했다.

어느 날 (자장이) 공자를 따르다가 진()과 채() 사이에서 곤경에 처하여 행동(처세)에 대해 물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말이 충성스럽고 믿음이 있으며, 행동이 독실하고 공경스럽다면 오랑캐 나라에서도 통하겠지만, 말이 충성스럽지 못하고 믿음도 없으며, 행동 또한 독실하지도 공경스럽지도 못하면 자기 고향인들 통하겠느냐? 서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늘 그것이 눈앞에 보여야 행할 수 있느니라.”

자장은 허리띠에 써두었다.

자장이 “선비가 어떠해야 통달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무엇이냐, 네가 말하는 통달이란 것이?”라고 했다. 자장이 “나라에서는 반드시 그 이름이 들려야 하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그 이름이 들리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공자는 “그것은 명성이지 통달이 아니다. 무릇 통달이란 바탕이 곧아 의리를 좋아하고, 말을 잘 살피고 표정을 관찰하며, 늘 남보다 낮은 자세로 임하면 나라에서건 집안에서건 통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릇 명성이란 어진 것 같지만 행동은 어긋나는데도 거기에 안주하여 의심하지 않는 것으로, 그러면 나라건 집안이건 명성이 나기 마련이다.”

 

 

 

曾參

 

曾參南武城人字子輿少孔子四十六歲

孔子以為能通孝道故授之業孝經》。死於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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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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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멸명()은 무성() 사람으로 자를 자우()라 했다. 공자보다 39년 아래였다.

얼굴이 아주 못 생겼다. 공자를 모시러 오자 공자는 재능이 보잘 것 없을 것으로 여겼다. 수업을 다 마친 뒤 물러나와 행동을 조심했는데, 길도 지름길로 가지 않았으며 공적인 일이 아니면 경대부를 만나지 않았다.

남쪽을 떠돌다 장강에 이르렀을 무렵 따르는 제자가 300인이었다. 주고받는 것, 나아가고 물러남이 분명하여 그 명성이 제후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공자가 이를 듣고는 “내가 말로 사람을 평가했다가 재여에게 실수를 범했고, 얼굴로 사람을 판단했다가 자우에게 실수했다.”라고 했다.

 

 

 

宓不齊

 

宓不齊字子賤少孔子三十歲

孔子謂子賤,「君子哉魯無君子斯焉取斯?」

子賤為單父宰反命於孔子:「此國有賢不齊者五人教不齊所以治者。」孔子曰:「惜哉不齊所治者小所治者大則庶幾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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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헌()은 자를 자사()라 했다.

자사가 부끄러움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나라가 잘 다스려지면 벼슬을 하고 녹봉을 받는다.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고 있는데도 녹봉을 받고 있다면 이것이 부끄러움이다.”라고 했다.

자사가 “이기길 좋아하고, 떠벌리고, 원망하고, 욕심을 내고하는 이런 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어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는 “참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도 모르겠다.”라고 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나자 원헌은 초야에 숨었다. 자공이 위()의 재상이 되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풀숲을 헤치고 궁핍한 골목을 찾아 헌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원헌은 해진 의관을 단정히 여미고 자공을 만났다. 자공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그대는 어찌 하여 이렇게 궁색하게 사시오?”라고 했다. 헌원이 “내가 듣기에 재산이 없는 것을 가난하다 하고, 도를 배워 행하지 않는 것을 궁색하다고 했소. 나 헌은 가난하지만 궁색하지는 않소이다.”라고 했다. 자공이 아프고 편치 못한 마음으로 그 자리를 떠나서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했던 잘못을 부끄러워했다.

 

 

 

公冶長

 

公冶長齊人字子長

孔子曰:「長可妻也雖在累紲之中非其罪也。」其子妻之

 

 


 

南宮括字子容

問孔子曰:「羿善射奡盪舟俱不得其死然禹稷躬稼而有天下?」孔子弗答容出孔子曰:「君子哉若人上德哉若人!」「國有道不廢國無道免於刑戮。」三復白珪之玷」,以其兄之子妻之

 

 

남궁괄()은 자를 자용()이라 했다.

공자에게 “예(羿)는 활을 잘 쏘았고, 오()는 땅에서 배를 움직일 정도였는데 모두 제명에 죽지 못했고, 우()와 직()은 몸소 농사를 지었는데도 천하를 얻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으나 공자는 답하지 않았다.

자용이 나가자 공자는 “군자로다 저 사람이! 덕을 숭상할 줄 아는 사람이로구나!”라고 했다. 그리고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버려지지 않을 사람이고, 사람에 도가 없더라도 죽음을 면할 사람이다.”라고 했다. (남궁괄이) “하얀 옥의 티끌” 부분을 세 번 반복해서 읽자 공자는 자기 형님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公皙哀

 

公皙哀字季次

孔子曰:「天下無行多為家臣仕於都唯季次未嘗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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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점()은 자가 석()이다.

공자를 모시고 있는 데 공자가 “네 뜻을 말해 보거라.”라고 하자 증점은 “화창한 봄날에 같은 또래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을 데리고 기수()에서 몸을 씻고 무우()의 대() 위에서 바람을 쐰 다음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공자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내가 점의 뜻과 같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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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요()는 자가 노()이다. 노는 안회의 아버지로서 아버지와 아들이 각기 시기를 달리하여 공자를 섬겼다.

안회가 죽자 가난했던 안로()는 공자에게 수레를 팔아 장례를 치르길 청했다. 

공자는 “재능이 있든 없든 각자 다 자기 자식들이 아닌가. (내 아들) 공리()가 죽었을 때 관으로 널만 쓰고 겉널은 쓰지 않았다. 내가 수레를 팔아 겉널을 마련해주지 않은 것은 내가 대부가 된 이후로 걸어 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商瞿

商瞿魯人字子木少孔子二十九歲

孔子傳易於瞿瞿傳楚人馯臂子弘弘傳江東人矯子庸疵疵傳燕人周子家豎豎傳淳于人光子乘羽羽傳齊人田子莊何何傳東武人王子中同同傳菑川人楊何何元朔中以治易為漢中大夫

 

 

高柴 . . .使, :「!」  :「!」:「.」

 

고시()는 자를 자고()라 했고, 공자보다 30년 연하였다.

자고는 키가 다섯 자도 안 되었다. 공자에게 수업을 받았는데 공자는 둔하다고 여겼다.

자로가 자고를 비읍()의 재()로 삼자 공자는 “남의 자식을 그르치는구나!”라고 했다. 자로가 “인민이 있고 사직이 있거늘 꼭 책을 읽어야만 학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공자는 “이래서 말 잘하는 자들이 싫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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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조개()는 자가 자개()이다.

 

공자가 칠조개에게 벼슬을 하라고 하자 “저는 그 일에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공자가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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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료()는 자를 자주()라 했다.

자주가 계손()에게 자로를 헐뜯었다. 자복경백()이 이를 공자에게 알리면서 “그 사람(계손)이 이미 의심을 품었습니다. 공백료라면 제 힘으로도 저자거리에다 조리를 돌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공자는 “도가 실행되려는 것도 천명이고 도가 폐기되려는 것도 천명이다. 공백료 그가 천명을 어찌 하겠느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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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경()은 자가 자우()이다.

자우는 말이 많고 급했다. 공자에게 인()을 물은 적이 있는데 공자는 “인덕이 있는 사람은 말을 조심스럽게 한다.”라고 했다. “말을 조심스럽게 하면 인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다시 묻자 공자는 “행하기도 어려운데 말할 때 조심스럽지 않을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군자에 대해서 묻자 공자는 “군자는 걱정도 두려움도 없다.”라고 했다. “걱정도 두려움도 없으면 군자라고 할 수 있겠네요?”라고 다시 묻자 “마음으로 반성하여 잘못이 없으면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하겠느냐?”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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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수()는 자를 자지()라 했고, 공자보다 36년 연하였다.

번지()가 농사에 대해 배우길 청하자 공자는 “내가 오래 농사지은 사람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 채소 키우는 것을 배우려고 하자 “내가 오래 채소를 가꾼 사람만 못하느니라.”라고 했다. 번지가 나가자 공자는 “소인이로구나, 번수가! 위에서 예를 좋아하면 공경하지 않을 백성이 없고, 위에서 의리를 좋아하면 복종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위에서 믿음이 있으면 진정으로 대하지 않을 백성이 없다. 이렇게만 하면 사방의 인민들이 그 자식을 들쳐 업고라도 찾아 올 것인데 농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라고 했다.

번지가 인을 묻자 공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혜에 대해 묻자 “사람을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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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은 공자보다 43년 아래였다.

유약은 이런 말을 했다.

“예의 쓰임에서 중요한 것은 조화이다. 선왕의 도에서도 이를 가장 앞세웠다. 다만 크든 작든 무조건 이를 따를 경우 안 통하는 경우도 있다. 조화만 알아 조화만 내세우고 예로 조절하지 않아도 안 통할 수 있다.”

“믿음이 의리에 가까우면 말을 반복할 수 있다. 공경이 예에 가까우면 치욕을 멀리 할 수 있다. 친해야 할 사람을 잃지 않으면 또한 의지할 수 있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로 제자들은 공자가 그리워 공자를 닮은 유약을 함께 스승으로 모시고는 선생님을 섬길 때처럼 섬겼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와서 “옛날 선생님께서 길을 나서시면서 제자에게 우산을 갖추라고 했는데 과연 비가 왔습니다. 제자가 ‘선생님께서는 비가 올 줄 어찌 아셨습니까’라 하자 선생님께서 ‘ 『시』에 달이 필()이란 별과 만나면 큰 비가 온다고 하지 않더냐며 어제 밤 달이 필에 머물러 있지 않았더냐’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날 달이 필에 머물러 있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 상구()가 나이가 많은데도 자식이 없어서 그 어머니가 첩실을 얻으라고 했습니다. 공자가 상구를 제로 보내려 하자 상구의 어머니가 보내지 말아달라고 청했습니다. 공자께서는 ‘걱정마십시오. 상구가 40이 넘으면 아들 다섯을 두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감히 묻건대 선생님께서는 이를 어떻게 아셨을까요?”라고 물었다. 유약이 말도 없고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때 질문했던 제자가 일어나면서 “당신은 비키시오. 그 자리는 당신 자리가 아니오!”라고 했다.

 

 

西

西赤字華. 十二歳.

華使於齊, 冉有爲其母請粟. 子曰與之釜. 請益曰與之庾. 冉子與之粟五秉. 孔子曰, 赤之適齊也. 乘肥馬衣輕裘. 

吾聞, 君子周急不繼富.

 

釜 : 六斗四升.  庾 : 一六斗.  秉 : 一六斛

 

공서적(西)은 자를 자화()라 했고, 공자보다 42년 연하였다.

자화가 제에 사신으로 가자 염유가 자화의 어머니를 위해 양식을 요청했다. 공자가 “1부()만 주어라.”라고 하자 더 줄 것을 요청했다. 공자가 “1유()를 주어라.”라고 했다. 염유가 조 5병()을 주었다. 공자가 “공서적이 제로 갈 때 살찐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었다. 내가 듣기에 군자는 급한 사람은 보살피지만 부유한 사람에게는 더 보태주지 않는다.”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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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마시()는 자를 자기()라 했고, 공자보다 30년 연하였다.

진사패()가 공자에게 “노의 소공이 예를 압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예를 알지요.”라고 했다. (진사패가) 물러나와 무마기()에 절을 하고는 “제가 듣기에 군자는 패거리를 짓지 않는다 하던데 군자도 패거리를 짓습니까? 노의 국군이 오의 여자를 부인으로 취하여 맹자()라 불렀습니다. 맹자의 성이 희()로 서로 같은 성이었기 때문에 맹자라 부른 것입니다. 노의 국군이 예를 안다면 누군들 예를 모르겠습니까?”라고 했다. 마무시가 이를 공자에게 알리자 공자는 “이 구는 행운이다. 무엇이든 잘못이 있으면 누군가 반드시 알게 해주는구나. 신하에게는 군주의 잘못을 말하지 않고 숨기는 것이 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