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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列傳

史記 卷六八. 商君列傳

by 柳川 2019. 6. 2.

                                    商君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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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군()은 위()의 서얼() 공자로 이름은 앙(), 성은 공손()이었다. 그 조상은 본래 희() 성이었다. 공손앙은 젊어서 형명학()을 좋아했고, 위()의 재상인 공숙좌()를 모셔 중서자()가 되었다. 공숙좌는 그가 유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천하지 않았다. 공숙자가 병이 나자 위 혜왕()은 몸소 문병을 가서 “공숙의 병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직은 어찌 되는 것이오?”라고 했다. 공숙이 “이 숙좌의 중서자 공손앙이 나이는 어리지만 특별한 재주가 있으니 왕께서 나라를 그에게 맡겨보시길 바랍니다.”라고 했다. 왕은 말이 없었다. 왕이 가려고 하자 공숙좌는 사람들을 물리고 왕에게 “왕께서 공손앙을 기용하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그를 죽여서 국경을 나가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왕은 허락하고 떠났다.

공숙좌는 공손앙을 불러 사과하며 “오늘 왕이 재상으로 삼을 만한 사람을 묻길래 내가 그대를 말했으나 왕의 표정으로 보아 내 말을 허용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군주가 먼저고 신하가 나중이라 생각하여 왕에게 기용하지 않으려면 그대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왕이 이를 허락했으니 그대는 빨리 떠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붙잡힐 것이다.”라고 했다. 공손앙은 “그 왕이 당신의 말을 듣고 신을 기용할 수 없다고 해놓고 어찌 당신의 말을 듣고 신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혜왕은 그곳을 떠난 뒤 좌우에게 “공숙의 병이 깊어 슬프구나! 과인에게 나라를 공손앙에게 맡기라고 하니 어찌 황당무계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공숙좌가 죽고 공손앙은 진()의 효공()이 나라 안의 유능한 사람을 구한다는 명령을 내려 목공()의 위업을 이어 동으로 침략당한 땅을 되찾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서쪽 진으로 들어가서 효공이 총애하는 신하 경감()을 통해 효공을 만나고자 했다.

효공은 위앙()을 만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효공이 수시로 조는 바람에 듣지 않았다. 자리가 끝나자 효공은 화가 나서 경감에게 “당신 손님이 허황된 사람이니 어찌 기용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경감이 위앙을 책망했다.

위앙은 “제가 공께 오제()의 길을 말씀드렸더니 그 뜻을 깨닫지 못하시더군요. 닷새 뒤 이 앙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위앙이 다시 효공을 만나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뜻과는 맞지 않았다. 자리가 끝나자 효공은 다시 경감을 나무랐고, 경감도 상앙을 나무랐다. 위앙이 “제가 공께 왕도()를 말씀드렸는데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다시 이 앙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위앙이 다시 효공을 만나니 효공은 위앙을 좋게 여기기는 했지만 기용하지는 않았다. 자리가 끝나자 효공은 경감에게 “그대의 손님이 괜찮더군.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만하오.”라고 했다. 위앙이 “제가 공께 패도()를 말씀드렸더니 채용할 마음이 있으시더군요. 진심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길 청합니다. 제가 이제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위앙이 다시 효공을 만났다. 효공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이 (위앙의) 자리로 다가갔다. 며칠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 경감이 “그대가 어떻게 우리 국군의 마음을 움직였소? 우리 국군께서 아주 기뻐하셨소!”라고 했다.

위앙은 “제가 국군께서 제왕의 도를 가지고 삼대와 비교했더니 국군께서 ‘너무 멀어서 내가 기다릴 수가 없소이다. 그리고 현명한 군주라면 그 자신의 당대에 천하에 그 명성을 드러내야지 어찌 느릿느릿 수백 년을 기다려 제왕이 될 수 있겠소이까?’라고 하시더이다. 그래서 제가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국군께 말씀드렸더니 국군께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역시 은·주와 덕을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효공은 위앙을 기용한 다음 변법()을 시행하려 했으나 천하가 자신에 대해 쑥덕거릴 것이 걱정되었다. 위앙이 이렇게 말했다.

“행동에 의심이 따르면 명성을 이룰 수 없고, 일을 의심하면 공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사람의 행동은 세상의 비난을 만나기 마련이고, 남다른 사람의 생각은 일반 사람의 비방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이 이루어져도 모르고, 지혜로운 자는 싹트기 전에 봅니다. 보통 사람과는 시작부터 함께 생각할 수 없지만 성과를 함께 즐길 수는 있습니다. 지극한 덕을 말하는 사람은 세속과 불화하며, 큰 공을 이루는 사람은 여러 사람과 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인이 진정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면 옛날을 본받지 않으며, 진정으로 인민을 이롭게 하려면 낡은 예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효공은 “좋습니다.”라고 하자 감룡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인은 인민의 습속을 바꾸지 않고 교화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바꾸지 않고 다스립니다. 인민의 습속에 따라 교화하면 힘 들이지 않고 성공하며, (지금 있는) 법에 따라 다스리면 관리는 익숙하고 인민은 편안해합니다.”

위앙이 말했다.

“감룡의 말은 세속에서 하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은 습속에 안주하고 학자는 들은 것에 빠집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자리를 차지하고 법을 지키는 일이라면 몰라도 법 밖의 일을 함께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삼대는 다른 의례를 가지고도 왕이 되었고, 오패는 다른 법을 가지고도 패주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사람은 법에 통제 당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의례를 바꾸고, 못난 자는 그것에 구속당합니다.”

두지()가 말했다.

“이익이 백배가 안 되면 법을 고치지 않고, 공이 열배가 못되면 기물을 바꾸지 않습니다. 옛날을 본받으면 잘못이 없고, 의례를 따르면 사악해지지 않습니다.”

위앙이 말했다.

“세상은 한 길로만 다스리지 않습니다. 나라에 편리하다면 옛날을 본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탕 임금과 무왕은 옛날을 본받지 않고도 왕이 되었고, 하와 은은 의례를 바꾸지 않았지만 망했습니다. 옛 것에 반대하는 사람을 그르다 해서는 안 되며, 의례를 따르려는 사람이 칭찬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효공이 “좋습니다.”라 하고는 위앙을 좌서장()으로 삼고 마침내 법을 바꾸는 변법령을 확정했다.

 

백성들의 집을 십()과 오()로 나누어 서로를 감독하고 연좌()시켰다. 범법자를 알리지 않으면 허리를 자르는 요참()에 처했고, 범법자를 알린 사람은 적의 목을 벤 것과 같은 상을 주었으며, 범법자를 감추면 적에 항복한 것과 같은 벌을 주었다. 민가에 성인 남자가 둘 이상인데도 분가하지 않으면 세금을 두 배로 올렸다. 군대에서 공을 세우면 그 정도에 따라 벼슬을 높여 주었다. 사적으로 다툰 자는 각각 경중을 따져 크고 작은 형을 매겼다. 본업에 힘을 다 하게 하여 농사와 베짜기에 수확이 많은 자는 노역을 면제해주었다. 상업에 종사하거나 게을러 빈궁해진 자는 모조리 노비로 떨어뜨렸다. 종실이라도 군공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 친족 명부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귀하고 천함, 벼슬과 작위의 등급을 분명히 하여 땅과 집을 차등 있게 등록하게 했고, 노비의 옷도 그 집안의 등급에 따라 달리 입게 했다. 공을 세운 사람은 부와 명예를 누렸고, 공이 없는 자는 아무리 부유해도 명예를 누릴 수 없었다.

법령이 갖추어지고 공표되기에 앞서 인민들이 자신을 믿지 않을까 염려되어 (상앙은) 3장 길이의 나무를 도읍의 시장 남문에 세운 다음 모여든 인민들에게 이것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10금을 주겠다고 했다. 인민들은 괴이하게만 여겼지 선뜻 옮기지 못했다. 이에 다시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준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옮기자 바로 50금을 주어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마침내 법령을 하달했다.

법령이 민간에 시행된 지 1년, 진나라 인민으로 도읍에까지 와서 새로운 법령의 불편함을 말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이어 태자가 법을 어겼다. 위앙은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어기기 때문이다.”며 태자를 법대로 하려고 했다.

태자는 군주의 후계자로 처벌할 수 없어 태자의 태부 공자 건()을 처벌하고, 그 태사 공손고()에게는 얼굴에 뜸을 뜨는 경형()을 가했다. 그 다음날부터 진의 인민들이 모두 법령에 따랐다.

법령이 시행되고 10년째 진의 인민들은 크게 기뻐했다. 길 위의 물건을 줍지 않았고, 산에는 도적이 없어졌고, 집집마다 풍족해졌다. 인민들은 나라의 전쟁에는 용감했지만 사사로운 싸움은 겁을 냈다. 농촌과 도읍이 크게 다스려졌다. 당초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한 진나라 인민들 중 (수도 함양에) 와서는 법령이 편리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자 위앙은 “이 자들은 모두 교화를 어지럽히는 인민들이다.”라며 변방의 성으로 모조리 옮겨버렸다. 그 뒤로 법령에 대해 말하는 인민들은 없었다.


 

이어 위앙은 대량조()에 임명되었다. 위앙은 병사를 이끌고 위()의 안읍()을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3년 뒤, 함양()에 궁궐과 궁정을 지어 진의 도읍을 옹()에서 함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인민들이 부모형제가 한 집에 사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작은 향()과 읍()을 합쳐 현()으로 삼고 현령()과 현승()을 두었는데, 모두 31현이 되었다. 밭 사이로 난 길과 경계를 없애고 세금을 공평하게 했다. 됫박의 용량, 저울추의 무게, 자의 길이를 통일했다. 이를 시행한 지 4년, 공자 건이 다시 법을 어겨 코를 베었다. 5년 째, 진나라와 인민들이 부강해져 천자는 효공에게 제사 고기를 보내왔고 제후들이 모두 축하했다.


 

그 이듬해(기원전 341년) 제()가 마릉()에서 위()의 군대를 패배시키고는 그 태자 신()은 사로잡고 장군 방연()은 죽였다. 그 다음해 위앙은 효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나라에게 위나라는 사람 뱃속의 질병에다 비유할 수 있습니다. 위가 진을 병합하지 않으면 진이 바로 위를 병합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위는 산의 험준함을 끼고 있는 서쪽을 차지하고 안읍을 도읍으로 삼고 있습니다. 진과는 황하를 사이에 두고 효산 동쪽의 이점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유리하면 서쪽으로 진을 침략하고 불리하면 동쪽의 땅을 거둡니다. 지금 우리 진나라는 군주의 영명함으로 강성해졌습니다. 반면에 위는 지난 해 제에 크게 패하고 제후들이 반발하고 있으니 지금 위를 정벌하면 좋습니다. 위가 진에게 버티지 못하면 동쪽으로 옮겨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위가) 동쪽으로 옮겨가면 진은 황하와 효산의 견고함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제후들을 통제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제왕의 대업입니다.”

효공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위앙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위를 치게 했다. 위는 공자 앙()이 군대를 이끌고 진을 맞이했다.

군대가 서로 마주하자 위왕은 위 공자 앙에게 편지를 보내 “저는 당초 공자와 사이가 좋았는데 지금 각각 두 나라의 장수가 되었으니 차마 서로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공자와 얼굴을 마주하여 맹서하고 즐겁게 마신 다음 군대를 철수시켜 진과 위를 편안하게 합시다.”라고 했다.

위 공자 앙도 옳다고 여겼다. 만나서 맹서하고 술을 마시는데 위앙이 숨겨놓은 병사들이 위 공자 앙을 습격하여 포로로 잡았다. 이어 그 군대를 공격하여 모조리 격파하고 진으로 돌아왔다.

위 혜왕은 군대가 잇따라 제와 진에게 패하여 나라 안은 비고 날이 갈수록 약해지자 두려움에 바로 사신을 보내 황하 서쪽 땅을 떼어 진에게 바치며 강화했다. 그리고 위는 마침내 안읍을 떠나 도읍을 대량()으로 옮겼다.

양(위) 혜왕은 “과인은 공숙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라고 했다. 위앙이 위를 격파하고 돌아오자 진은 그에게 오()와 상() 15개 읍을 봉지로 내리고 상군()이라 불렀다.

상군이 진의 상()이 된 지 10년, 종실과 귀족들 중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조량()이 상군을 만났다. 상군이 “이 앙이 그대를 만난 것은 맹난고() 때문입니다. 지금 앙이 교제를 청하는데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조량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감히 그렇게 하길 원치 않습니다. 공구()의 말씀에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면 뜻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고, 못난 자들을 모아 놓으면 왕도를 말하는 사람들이 떠난다’고 했습니다. 저는 못난 자라 감히 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가 듣기에 ‘그 자리가 아닌데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탐위()라 하고, 그 명예가 아닌데 그 명예를 가지는 것을 탐명()이라고 한다’고 합디다. 제가 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리와 명예를 탐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상군이 “그대는 내가 진을 다스리는 것이 못 마땅합니까?”라고 했다. 조량이 이렇게 말했다.

“남의 말을 돌이켜 듣는 것을 총()이라 하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명()이라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이라 합니다. 순 임금은 ‘스스로를 낮추면 존중받는다’고 했습니다. 군께서는 순의 도를 따르시면 될 일이지 제게 물을 것 없습니다.”

상앙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 진은 융적()의 풍습처럼 아비와 아들의 구별도 없이 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지금 내가 그 풍습을 바꾸어 남녀를 구별하게 하고, 노나라와 위나라처럼 궁궐을 크게 지었습니다. 그대가 보기에 내가 진을 다스린 것과 오고대부()의 현명함 중 어느 쪽이 낫습니까?”

조량이 말했다.

“양가죽 천 장이 여우 겨드랑이 가죽 한 장만 못합니다. 아부하는 천 사람의 말은 한 사람의 바른 말만 못합니다. 무왕은 바른 말로 번창했고, 은주는 말을 못하게 해서 망했습니다. 군께서 무왕이 틀렸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제가 하루 종일 바른 말만 해도 죽임을 당하지 않을 터이니 괜찮겠습니까?”

상군이 말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꾸미는 말은 꽃이고, 지극한 말은 열매이며, 쓴 말은 약이고, 달콤한 말은 병이다.’ 선생께서 과감하게 하루 종일 바른 말만 하시겠다면 그것은 이 앙에게는 약입니다. 앙이 그대를 모시고자 하는데 그대는 어찌 하여 사양하십니까?”

조량이 말했다.

“대개 오고대부는 형()의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목공()이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만나길 원해서 가려 했지만 노자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진의 객에게 팔아 거친 옷을 입고 소를 먹였습니다. 1년 뒤 목공이 이를 알고는 그를 소 주둥이로부터 빼내서 백관의 윗자리에 올렸지만 진나라는 감히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의 상으로 지낸 6,7년 동안 동으로는 정을 정벌했고, 진()나라의 군주를 세 번이나 세웠으며, 형(초)의 재난을 한 번 구했습니다. 나라 안에 가르침을 베푸니 파인()이 조공을 왔고, 제후에게 덕을 베푸니 팔융()이 복속했습니다. 유여()가 이를 듣고는 관문을 두드리며 뵙길 청했습니다. 오고대부는 진의 상이 되어 피로해도 수레에 앉지 않았고 더워도 지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나라 안을 다닐 때 수레가 뒤따르지 않게 했고 무기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공명은 창고에 (기록으로) 보관되었고, 덕행은 후대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오고대부가 죽자 진나라 남녀 모두가 눈물을 흘렸고, 동자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며, 곡식을 빻는 사람들은 절구공이를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고대부의 덕입니다.

지금 군께서 진왕을 만나시면서 총애 받는 경감을 앞세웠으니 명예로운 것은 아닙니다. 진의 상으로서 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고 궁궐을 크게 지었으니 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태자의 사부에게 경형을 가하고 인민들을 가혹한 형벌로 상하게 했으니 원망과 화가 쌓였습니다. 인민에 대한 교화가 명령보다 심각하고, 인민들이 그것을 본받는 것이 명령보다 빠릅니다. 지금 군은 또 그 하는 일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는 교화가 아닙니다. 군은 또 남면하여 과인이라 칭하며 날마다 진의 귀공자들을 옭아매고 있습니다.

『시경()』에 ‘쥐에게도 사지가 멀쩡하게 있는데 사람에게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은데 어째서 일찍 죽지 않는가’라고 했습니다. 『시경』으로 미루어보면 (군의) 일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공자 건()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 지 벌써 8년째인데, 군께서는 또 축환()을 죽이고 공손고를 경형()에 처했습니다. 『시경』에 ‘사람을 얻는 자는 흥하고, 사람을 잃는 자는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을 얻는 행동이 아닙니다. 군께서 외출할 때면 수레 십여 대와 무장한 병사들을 실은 수레가 따르며, 힘세고 체구가 건장한 자들을 좌우에 태워 호위하게 하고, 긴 창과 짧은 창을 쥔 자들이 수레 옆에서 달립니다.

『서경()』에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했듯이 군의 위태로움이 아침 이슬 같은데 여전히 수명을 늘리고 장수하길 바라십니까? 그러니 왜 15개 읍을 반납하고 한갓진 곳으로 물러나 전원에 물이나 주며 살지 않으십니까? 또 왜 진왕께 숨어 지내는 선비를 추천하고, 노인과 고아를 봉양하고 보살피며, 부형을 공경하고, 공 있는 사람을 장려하고, 덕 있는 사람을 존중할 것을 권유하여 조금이라도 편해지려 하지 않으십니까?

군께서 앞으로도 여전히 상오 땅의 부유함을 탐하고 진나라의 정권을 오로지 하며 백성들의 원한을 사게 된다면 진왕께서 어느 날 갑자기 불귀의 객이 되어 조정에 서지 못하시게 되었을 때 진나라에서 군을 잡으려는 자들이 얼마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멸망이 발뒤꿈치를 세운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군은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다섯 달, 진 효공이 죽고 태자가 섰다. 공자 건의 무리가 상군이 반역을 꾀한다고 알리자 관리를 뽑아 상군을 잡게 했다. 상군이 함곡관 아래까지 도망쳐 객사에 묵으려 했다. 객사 주인이 그가 상군일 줄 모르고 “상군의 법에 묵으려는 사람의 신분증이 없으면 함께 처벌받습니다.”라고 했다. 상군이 탄식하며 “어허, 법을 만든 폐단이 여기까지 이르렀구나!”라고 했다. 그곳을 떠나 위로 갔다. 위 사람들은 그가 공자 앙을 속이고 위의 군대를 격파한 일에 원망을 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군이 다른 나라로 가려 하자 위 사람이 “상군은 진의 죄인이다. 강한 진나라의 죄인이 위에 들어왔으니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며 진으로 들여보냈다.

상군이 다시 진으로 들어와 상읍으로 달아나서는 그 부하들과 읍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정을 공격했다. 진이 군사를 내어 상군을 공격하여 정의 민지()에서 죽였다. 진 혜왕은 상군을 사지를 찢는 거열() 형벌을 가하고 조리를 돌리고는 “상앙처럼 반역하지 말라!”라고 했다. 마침내 상군의 집안을 다 없앴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상군은 타고나길 각박한 사람이었다. 그가 효공에게 행하려 했던 제왕술을 보면 허황된 말에 불과하고 그 본심이 아니었다. 총애를 받는 신하를 넣어 등용되어서는 공자 건에게 형벌을 가하고, 위의 장수 앙을 속이고, 조량의 말을 받들지 않은 것 역시 상군의 각박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내가 일찍이 상군의 「개새()」, 「경전()」 이란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이 행한 일과 비슷했다. 진나라에서 결국 오명을 얻은 데는 그 만한 까닭이 있지 않겠는가!”

 

 

변법개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