商君列傳
公叔既死, 公孫鞅聞秦孝公下令國中求賢者, 將修繆公之業, 東複侵地, 廼遂西入秦, 因孝公寵臣景監以求見孝公. 孝公既見衛鞅, 語事良久, 孝公時時睡, 弗聴. 罷而孝公怒景監曰:「子之客妄人耳, 安足用邪!」景監以譲衛鞅. 衛鞅曰:「吾説公以帝道, 其志不開悟矣.」後五日, 複求見鞅. 鞅複見孝公, 益愈, 然而未中旨. 罷而孝公複譲景監, 景監亦譲鞅. 鞅曰:「吾説公以王道而未入也. 請複見鞅.」鞅複見孝公, 孝公善之而未用也. 罷而去. 孝公謂景監曰:「汝客善, 可與語矣.」鞅曰:「吾説公以霸道, 其意欲用之矣. 誠複見我, 我知之矣.」衛鞅複見孝公. 公與語, 不自知躂之前於席也. 語數日不厭. 景監曰:「子何以中吾君? 吾君之驩甚也.」鞅曰:「吾説君以帝王之道比三代, 而君曰:『久遠, 吾不能待. 且賢君者, 各及其身顕名天下, 安能邑邑待數十百年以成帝王乎?』故吾以彊國之術説君, 君大説之耳. 然亦難以比徳於殷周矣.」
孝公既用衛鞅, 鞅欲変法, 恐天下議己. 衛鞅曰:「疑行無名, 疑事無功. 且夫有高人之行者, 固見非於世;有獨知之慮者, 必見敖於民. 愚者闇於成事, 知者見於未萌. 民不可與慮始而可與樂成. 論至徳者不和於俗, 成大功者不謀於衆. 是以聖人苟可以彊國, 不法其故;苟可以利民, 不循其禮.」孝公曰:「善.」甘竜曰:「不然. 聖人不易民而教, 知者不変法而治. 因民而教, 不勞而成功;縁法而治者, 吏習而民安之.」衛鞅曰:「竜之所言, 世俗之言也. 常人安於故俗, 學者溺於所聞. 以此両者居官守法可也, 非所與論於法之外也. 三代不同禮而王, 五伯不同法而霸. 智者作法, 愚者制焉;賢者更禮, 不肖者拘焉.」杜摯曰:「利不百, 不変法;功不十, 不易器. 法古無過, 循禮無邪.」衛鞅曰:「治世不一道, 便國不法古. 故湯武不循古而王, 夏殷不易禮而亡. 反古者不可非, 而循禮者不足多.」孝公曰:「善.」以衛鞅為左庶長, 卒定変法之令.
令民為什伍, 而相牧司連坐. 不告姦者腰斬, 告姦者與斬敵首同賞, 匿姦者與降敵同罰. 民有二男以上不分異者, 倍其賦. 有軍功者, 各以率受上爵;為私鬥者, 各以軽重被刑大小. 僇力本業, 耕織致粟帛多者複其身. 事末利及怠而貧者, 挙以為収孥. 宗室非有軍功論, 不得為屬籍. 明尊卑爵秩等級, 各以差次名田宅, 臣妾衣服以家次. 有功者顕栄, 無功者雖富無所芬華.
令既具, 未布, 恐民之不信,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 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民怪之, 莫敢徙. 複曰「能徙者予五十金」. 有一人徙之, 輒予五十金, 以明不欺. 卒下令.
令行於民期年, 秦民之國都言初令之不便者以千數. 於是太子犯法. 衛鞅曰:「法之不行, 自上犯之.」將法太子. 太子, 君嗣也, 不可施刑, 刑其傅公子虔, 黥其師公孫賈. 明日, 秦人皆趨令. 行之十年, 秦民大説, 道不拾遺, 山無盜賊, 家給人足. 民勇於公戦, 怯於私鬥, 郷邑大治. 秦民初言令不便者有來言令便者, 衛鞅曰「此皆亂化之民也」, 盡遷之於邊城. 其後民莫敢議令.
於是以鞅為大良造. 將兵囲魏安邑, 降之. 居三年, 作為築冀闕宮庭於鹹陽, 秦自雍徙都之. 而令民父子兄弟同室內息者為禁. 而集小(都)郷邑聚為県, 置令、丞, 凡三十一県. 為田開阡陌封疆, 而賦稅平. 平鬥桶権衡丈尺. 行之四年, 公子虔複犯約, 劓之. 居五年, 秦人富彊, 天子致胙於孝公, 諸侯畢賀.
其明年, 斉敗魏兵於馬陵, 虜其太子申, 殺將軍龐涓. 其明年, 衛鞅説孝公曰:「秦之與魏, 譬若人之有腹心疾, 非魏並秦, 秦即並魏. 何者? 魏居領阨之西, 都安邑, 與秦界河而獨擅山東之利. 利則西侵秦, 病則東収地. 今以君之賢聖, 國頼以盛. 而魏往年大破於斉, 諸侯畔之, 可因此時伐魏. 魏不支秦, 必東徙. 東徙, 秦拠河山之固, 東郷以制諸侯, 此帝王之業也.」孝公以為然, 使衛鞅將而伐魏. 魏使公子卬將而撃之. 軍既相距, 衛鞅遺魏將公子卬書曰:「吾始與公子驩, 今倶為両國將, 不忍相攻, 可與公子面相見, 盟, 樂飲而罷兵, 以安秦魏.」魏公子卬以為然. 會盟已, 飲, 而衛鞅伏甲士而襲虜魏公子卬, 因攻其軍, 盡破之以帰秦. 魏恵王兵數破於斉秦, 國內空, 日以削, 恐, 乃使使割河西之地獻於秦以和. 而魏遂去安邑, 徙都大梁. 梁恵王曰:「寡人恨不用公叔座之言也.」衛鞅既破魏還, 秦封之於、商十五邑, 號為商君.
商君相秦十年, 宗室貴戚多怨望者. 趙良見商君. 商君曰:「鞅之得見也, 従孟蘭皐, 今鞅請得交, 可乎?」趙良曰:「僕弗敢願也. 孔丘有言曰:『推賢而戴者進, 聚不肖而王者退.』僕不肖, 故不敢受命. 僕聞之曰:『非其位而居之曰貪位, 非其名而有之曰貪名.』僕聴君之義, 則恐僕貪位貪名也. 故不敢聞命.」商君曰:「子不説吾治秦與?」趙良曰:「反聴之謂聡, 內視之謂明, 自勝之謂彊. 虞舜有言曰:『自卑也尚矣.』君不若道虞舜之道, 無為問僕矣.」商君曰:「始秦戎翟之教, 父子無別, 同室而居. 今我更制其教, 而為其男女之別, 大築冀闕, 営如魯衛矣. 子観我治秦也, 孰與五羖大夫賢?」趙良曰:「千羊之皮, 不如一狐之掖;千人之諾諾, 不如一士之諤諤. 武王諤諤以昌, 殷紂墨墨以亡. 君若不非武王乎, 則僕請終日正言而無誅, 可乎?」商君曰:「語有之矣, 貌言華也, 至言実也, 苦言薬也, 甘言疾也. 夫子果肯終日正言, 鞅之薬也. 鞅將事子, 子又何辭焉!」趙良曰:「夫五羖大夫, 荊之鄙人也. 聞秦繆公之賢而願望見, 行而無資, 自粥於秦客, 被褐食牛. 期年, 繆公知之, 挙之牛口之下, 而加之百姓之上, 秦國莫敢望焉. 相秦六七年, 而東伐鄭, 三置晉國之君, 一救荊國之禍. 発教封內, 而巴人致貢;施徳諸侯, 而八戎來服. 由餘聞之, 款関請見. 五羖大夫之相秦也, 勞不坐乗, 暑不張蓋, 行於國中, 不従車乗, 不操幹戈, 功名蔵於府庫, 徳行施於後世. 五羖大夫死, 秦國男女流涕, 童子不歌謠, 舂者不相杵. 此五羖大夫之徳也. 今君之見秦王也, 因嬖人景監以為主, 非所以為名也. 相秦不以百姓為事, 而大築冀闕, 非所以為功也. 刑黥太子之師傅, 殘傷民以駿刑, 是積怨畜禍也. 教之化民也深於命, 民之效上也捷於令. 今君又左建外易, 非所以為教也. 君又南面而稱寡人, 日縄秦之貴公子. 詩曰:『相鼠有體, 人而無禮, 人而無禮, 何不遄死.』以詩観之, 非所以為壽也. 公子虔杜門不出已八年矣, 君又殺祝懽而黥公孫賈. 詩曰:『得人者興, 失人者崩.』此數事者, 非所以得人也. 君之出也, 後車十數, 従車載甲, 多力而駢脅者為驂乗, 持矛而操闟戟者旁車而趨. 此一物不具, 君固不出. 書曰:『恃徳者昌, 恃力者亡.』君之危若朝露, 尚將欲延年益壽乎? 則何不帰十五都, 潅園於鄙, 勧秦王顕巌穴之士, 養老存孤, 敬父兄, 序有功, 尊有徳, 可以少安. 君尚將貪商於之富, 寵秦國之教, 畜百姓之怨, 秦王一旦捐賓客而不立朝, 秦國之所以収君者, 豈其微哉? 亡可翹足而待.」商君弗従.
後五月而秦孝公卒, 太子立. 公子虔之徒告商君欲反, 発吏捕商君. 商君亡至関下, 欲舎客舎. 客人不知其是商君也, 曰:「商君之法, 舎人無験者坐之.」商君喟然歎曰:「嗟乎, 為法之敝一至此哉!」去之魏. 魏人怨其欺公子卬而破魏師, 弗受. 商君欲之他國. 魏人曰:「商君, 秦之賊. 秦彊而賊入魏, 弗帰, 不可.」遂內秦. 商君既複入秦, 走商邑, 與其徒屬発邑兵北出撃鄭. 秦発兵攻商君, 殺之於鄭黽池. 秦恵王車裂商君以徇, 曰:「莫如商鞅反者!」遂滅商君之家.
太史公曰:商君, 其天資刻薄人也. 跡其欲幹孝公以帝王術, 挾持浮説, 非其質矣. 且所因由嬖臣, 及得用, 刑公子虔, 欺魏將卬, 不師趙良之言, 亦足発明商君之少恩矣. 餘嘗読商君開塞耕戦書, 與其人行事相類. 卒受悪名於秦, 有以也夫!
상군(商君)은 위(衛)의 서얼(庶孼) 공자로 이름은 앙(鞅), 성은 공손(公孫)이었다. 그 조상은 본래 희(姬) 성이었다. 공손앙은 젊어서 형명학(刑名學)을 좋아했고, 위(魏)의 재상인 공숙좌(公叔座)를 모셔 중서자(中庶子)가 되었다. 공숙좌는 그가 유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추천하지 않았다. 공숙자가 병이 나자 위 혜왕(惠王)은 몸소 문병을 가서 “공숙의 병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직은 어찌 되는 것이오?”라고 했다. 공숙이 “이 숙좌의 중서자 공손앙이 나이는 어리지만 특별한 재주가 있으니 왕께서 나라를 그에게 맡겨보시길 바랍니다.”라고 했다. 왕은 말이 없었다. 왕이 가려고 하자 공숙좌는 사람들을 물리고 왕에게 “왕께서 공손앙을 기용하지 않으시려거든 반드시 그를 죽여서 국경을 나가지 못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왕은 허락하고 떠났다.
공숙좌는 공손앙을 불러 사과하며 “오늘 왕이 재상으로 삼을 만한 사람을 묻길래 내가 그대를 말했으나 왕의 표정으로 보아 내 말을 허용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군주가 먼저고 신하가 나중이라 생각하여 왕에게 기용하지 않으려면 그대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왕이 이를 허락했으니 그대는 빨리 떠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붙잡힐 것이다.”라고 했다. 공손앙은 “그 왕이 당신의 말을 듣고 신을 기용할 수 없다고 해놓고 어찌 당신의 말을 듣고 신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라 하고는 끝내 떠나지 않았다.
혜왕은 그곳을 떠난 뒤 좌우에게 “공숙의 병이 깊어 슬프구나! 과인에게 나라를 공손앙에게 맡기라고 하니 어찌 황당무계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공숙좌가 죽고 공손앙은 진(秦)의 효공(孝公)이 나라 안의 유능한 사람을 구한다는 명령을 내려 목공(穆公)의 위업을 이어 동으로 침략당한 땅을 되찾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서쪽 진으로 들어가서 효공이 총애하는 신하 경감(景監)을 통해 효공을 만나고자 했다.
효공은 위앙(衛鞅)을 만나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효공이 수시로 조는 바람에 듣지 않았다. 자리가 끝나자 효공은 화가 나서 경감에게 “당신 손님이 허황된 사람이니 어찌 기용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경감이 위앙을 책망했다.
위앙은 “제가 공께 오제(五帝)의 길을 말씀드렸더니 그 뜻을 깨닫지 못하시더군요. 닷새 뒤 이 앙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위앙이 다시 효공을 만나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으나 뜻과는 맞지 않았다. 자리가 끝나자 효공은 다시 경감을 나무랐고, 경감도 상앙을 나무랐다. 위앙이 “제가 공께 왕도(王道)를 말씀드렸는데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다시 이 앙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위앙이 다시 효공을 만나니 효공은 위앙을 좋게 여기기는 했지만 기용하지는 않았다. 자리가 끝나자 효공은 경감에게 “그대의 손님이 괜찮더군.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만하오.”라고 했다. 위앙이 “제가 공께 패도(覇道)를 말씀드렸더니 채용할 마음이 있으시더군요. 진심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길 청합니다. 제가 이제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위앙이 다시 효공을 만났다. 효공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이 (위앙의) 자리로 다가갔다. 며칠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도 싫증을 내지 않았다. 경감이 “그대가 어떻게 우리 국군의 마음을 움직였소? 우리 국군께서 아주 기뻐하셨소!”라고 했다.
위앙은 “제가 국군께서 제왕의 도를 가지고 삼대와 비교했더니 국군께서 ‘너무 멀어서 내가 기다릴 수가 없소이다. 그리고 현명한 군주라면 그 자신의 당대에 천하에 그 명성을 드러내야지 어찌 느릿느릿 수백 년을 기다려 제왕이 될 수 있겠소이까?’라고 하시더이다. 그래서 제가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국군께 말씀드렸더니 국군께서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역시 은·주와 덕을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효공은 위앙을 기용한 다음 변법(變法)을 시행하려 했으나 천하가 자신에 대해 쑥덕거릴 것이 걱정되었다. 위앙이 이렇게 말했다.
“행동에 의심이 따르면 명성을 이룰 수 없고, 일을 의심하면 공을 세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뛰어난 사람의 행동은 세상의 비난을 만나기 마련이고, 남다른 사람의 생각은 일반 사람의 비방을 만나기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일이 이루어져도 모르고, 지혜로운 자는 싹트기 전에 봅니다. 보통 사람과는 시작부터 함께 생각할 수 없지만 성과를 함께 즐길 수는 있습니다. 지극한 덕을 말하는 사람은 세속과 불화하며, 큰 공을 이루는 사람은 여러 사람과 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인이 진정으로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면 옛날을 본받지 않으며, 진정으로 인민을 이롭게 하려면 낡은 예법을 따르지 않습니다.”
효공은 “좋습니다.”라고 하자 감룡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인은 인민의 습속을 바꾸지 않고 교화하며,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바꾸지 않고 다스립니다. 인민의 습속에 따라 교화하면 힘 들이지 않고 성공하며, (지금 있는) 법에 따라 다스리면 관리는 익숙하고 인민은 편안해합니다.”
위앙이 말했다.
“감룡의 말은 세속에서 하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은 습속에 안주하고 학자는 들은 것에 빠집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은 자리를 차지하고 법을 지키는 일이라면 몰라도 법 밖의 일을 함께 의논할 수는 없습니다. 삼대는 다른 의례를 가지고도 왕이 되었고, 오패는 다른 법을 가지고도 패주가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사람은 법에 통제 당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의례를 바꾸고, 못난 자는 그것에 구속당합니다.”
두지(杜摯)가 말했다.
“이익이 백배가 안 되면 법을 고치지 않고, 공이 열배가 못되면 기물을 바꾸지 않습니다. 옛날을 본받으면 잘못이 없고, 의례를 따르면 사악해지지 않습니다.”
위앙이 말했다.
“세상은 한 길로만 다스리지 않습니다. 나라에 편리하다면 옛날을 본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탕 임금과 무왕은 옛날을 본받지 않고도 왕이 되었고, 하와 은은 의례를 바꾸지 않았지만 망했습니다. 옛 것에 반대하는 사람을 그르다 해서는 안 되며, 의례를 따르려는 사람이 칭찬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효공이 “좋습니다.”라 하고는 위앙을 좌서장(左庶長)으로 삼고 마침내 법을 바꾸는 변법령을 확정했다.
백성들의 집을 십(什)과 오(伍)로 나누어 서로를 감독하고 연좌(連坐)시켰다. 범법자를 알리지 않으면 허리를 자르는 요참(腰斬)에 처했고, 범법자를 알린 사람은 적의 목을 벤 것과 같은 상을 주었으며, 범법자를 감추면 적에 항복한 것과 같은 벌을 주었다. 민가에 성인 남자가 둘 이상인데도 분가하지 않으면 세금을 두 배로 올렸다. 군대에서 공을 세우면 그 정도에 따라 벼슬을 높여 주었다. 사적으로 다툰 자는 각각 경중을 따져 크고 작은 형을 매겼다. 본업에 힘을 다 하게 하여 농사와 베짜기에 수확이 많은 자는 노역을 면제해주었다. 상업에 종사하거나 게을러 빈궁해진 자는 모조리 노비로 떨어뜨렸다. 종실이라도 군공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져 친족 명부에 올리지 못하게 했다. 귀하고 천함, 벼슬과 작위의 등급을 분명히 하여 땅과 집을 차등 있게 등록하게 했고, 노비의 옷도 그 집안의 등급에 따라 달리 입게 했다. 공을 세운 사람은 부와 명예를 누렸고, 공이 없는 자는 아무리 부유해도 명예를 누릴 수 없었다.
법령이 갖추어지고 공표되기에 앞서 인민들이 자신을 믿지 않을까 염려되어 (상앙은) 3장 길이의 나무를 도읍의 시장 남문에 세운 다음 모여든 인민들에게 이것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는 10금을 주겠다고 했다. 인민들은 괴이하게만 여겼지 선뜻 옮기지 못했다. 이에 다시 “옮기는 자에게는 50금을 준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옮기자 바로 50금을 주어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마침내 법령을 하달했다.
법령이 민간에 시행된 지 1년, 진나라 인민으로 도읍에까지 와서 새로운 법령의 불편함을 말하는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이어 태자가 법을 어겼다. 위앙은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어기기 때문이다.”며 태자를 법대로 하려고 했다.
태자는 군주의 후계자로 처벌할 수 없어 태자의 태부 공자 건(虔)을 처벌하고, 그 태사 공손고(公孫賈)에게는 얼굴에 뜸을 뜨는 경형(黥刑)을 가했다. 그 다음날부터 진의 인민들이 모두 법령에 따랐다.
법령이 시행되고 10년째 진의 인민들은 크게 기뻐했다. 길 위의 물건을 줍지 않았고, 산에는 도적이 없어졌고, 집집마다 풍족해졌다. 인민들은 나라의 전쟁에는 용감했지만 사사로운 싸움은 겁을 냈다. 농촌과 도읍이 크게 다스려졌다. 당초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한 진나라 인민들 중 (수도 함양에) 와서는 법령이 편리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자 위앙은 “이 자들은 모두 교화를 어지럽히는 인민들이다.”라며 변방의 성으로 모조리 옮겨버렸다. 그 뒤로 법령에 대해 말하는 인민들은 없었다.
이어 위앙은 대량조(大良造)에 임명되었다. 위앙은 병사를 이끌고 위(魏)의 안읍(安邑)을 포위하여 항복시켰다. 3년 뒤, 함양(咸陽)에 궁궐과 궁정을 지어 진의 도읍을 옹(雍)에서 함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인민들이 부모형제가 한 집에 사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작은 향(鄕)과 읍(邑)을 합쳐 현(縣)으로 삼고 현령(縣令)과 현승(縣丞)을 두었는데, 모두 31현이 되었다. 밭 사이로 난 길과 경계를 없애고 세금을 공평하게 했다. 됫박의 용량, 저울추의 무게, 자의 길이를 통일했다. 이를 시행한 지 4년, 공자 건이 다시 법을 어겨 코를 베었다. 5년 째, 진나라와 인민들이 부강해져 천자는 효공에게 제사 고기를 보내왔고 제후들이 모두 축하했다.
그 이듬해(기원전 341년) 제(齊)가 마릉(馬陵)에서 위(魏)의 군대를 패배시키고는 그 태자 신(申)은 사로잡고 장군 방연(龐涓)은 죽였다. 그 다음해 위앙은 효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진나라에게 위나라는 사람 뱃속의 질병에다 비유할 수 있습니다. 위가 진을 병합하지 않으면 진이 바로 위를 병합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위는 산의 험준함을 끼고 있는 서쪽을 차지하고 안읍을 도읍으로 삼고 있습니다. 진과는 황하를 사이에 두고 효산 동쪽의 이점을 독차지하고 있습니다. 유리하면 서쪽으로 진을 침략하고 불리하면 동쪽의 땅을 거둡니다. 지금 우리 진나라는 군주의 영명함으로 강성해졌습니다. 반면에 위는 지난 해 제에 크게 패하고 제후들이 반발하고 있으니 지금 위를 정벌하면 좋습니다. 위가 진에게 버티지 못하면 동쪽으로 옮겨갈 것이 틀림없습니다. (위가) 동쪽으로 옮겨가면 진은 황하와 효산의 견고함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제후들을 통제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제왕의 대업입니다.”
효공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위앙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위를 치게 했다. 위는 공자 앙(卬)이 군대를 이끌고 진을 맞이했다.
군대가 서로 마주하자 위왕은 위 공자 앙에게 편지를 보내 “저는 당초 공자와 사이가 좋았는데 지금 각각 두 나라의 장수가 되었으니 차마 서로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공자와 얼굴을 마주하여 맹서하고 즐겁게 마신 다음 군대를 철수시켜 진과 위를 편안하게 합시다.”라고 했다.
위 공자 앙도 옳다고 여겼다. 만나서 맹서하고 술을 마시는데 위앙이 숨겨놓은 병사들이 위 공자 앙을 습격하여 포로로 잡았다. 이어 그 군대를 공격하여 모조리 격파하고 진으로 돌아왔다.
위 혜왕은 군대가 잇따라 제와 진에게 패하여 나라 안은 비고 날이 갈수록 약해지자 두려움에 바로 사신을 보내 황하 서쪽 땅을 떼어 진에게 바치며 강화했다. 그리고 위는 마침내 안읍을 떠나 도읍을 대량(大梁)으로 옮겼다.
양(위) 혜왕은 “과인은 공숙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한스럽다.”라고 했다. 위앙이 위를 격파하고 돌아오자 진은 그에게 오(於)와 상(商) 15개 읍을 봉지로 내리고 상군(商君)이라 불렀다.
상군이 진의 상(相)이 된 지 10년, 종실과 귀족들 중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조량(趙良)이 상군을 만났다. 상군이 “이 앙이 그대를 만난 것은 맹난고(孟蘭皐) 때문입니다. 지금 앙이 교제를 청하는데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조량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감히 그렇게 하길 원치 않습니다. 공구(孔丘)의 말씀에 ‘현명한 사람을 추천하면 뜻을 가진 사람들이 나오고, 못난 자들을 모아 놓으면 왕도를 말하는 사람들이 떠난다’고 했습니다. 저는 못난 자라 감히 명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제가 듣기에 ‘그 자리가 아닌데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탐위(貪位)라 하고, 그 명예가 아닌데 그 명예를 가지는 것을 탐명(貪名)이라고 한다’고 합디다. 제가 군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리와 명예를 탐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그래서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상군이 “그대는 내가 진을 다스리는 것이 못 마땅합니까?”라고 했다. 조량이 이렇게 말했다.
“남의 말을 돌이켜 듣는 것을 총(聰)이라 하고, 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명(明)이라 하며, 자신을 이기는 것을 강(强)이라 합니다. 순 임금은 ‘스스로를 낮추면 존중받는다’고 했습니다. 군께서는 순의 도를 따르시면 될 일이지 제게 물을 것 없습니다.”
상앙이 이렇게 말했다.
“처음 진은 융적(戎翟)의 풍습처럼 아비와 아들의 구별도 없이 한 집에서 살았습니다. 지금 내가 그 풍습을 바꾸어 남녀를 구별하게 하고, 노나라와 위나라처럼 궁궐을 크게 지었습니다. 그대가 보기에 내가 진을 다스린 것과 오고대부(五羖大夫)의 현명함 중 어느 쪽이 낫습니까?”
조량이 말했다.
“양가죽 천 장이 여우 겨드랑이 가죽 한 장만 못합니다. 아부하는 천 사람의 말은 한 사람의 바른 말만 못합니다. 무왕은 바른 말로 번창했고, 은주는 말을 못하게 해서 망했습니다. 군께서 무왕이 틀렸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제가 하루 종일 바른 말만 해도 죽임을 당하지 않을 터이니 괜찮겠습니까?”
상군이 말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꾸미는 말은 꽃이고, 지극한 말은 열매이며, 쓴 말은 약이고, 달콤한 말은 병이다.’ 선생께서 과감하게 하루 종일 바른 말만 하시겠다면 그것은 이 앙에게는 약입니다. 앙이 그대를 모시고자 하는데 그대는 어찌 하여 사양하십니까?”
조량이 말했다.
“대개 오고대부는 형(荊)의 비천한 사람이었습니다. 목공(穆公)이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만나길 원해서 가려 했지만 노자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진의 객에게 팔아 거친 옷을 입고 소를 먹였습니다. 1년 뒤 목공이 이를 알고는 그를 소 주둥이로부터 빼내서 백관의 윗자리에 올렸지만 진나라는 감히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진의 상으로 지낸 6,7년 동안 동으로는 정을 정벌했고, 진(晉)나라의 군주를 세 번이나 세웠으며, 형(초)의 재난을 한 번 구했습니다. 나라 안에 가르침을 베푸니 파인(巴人)이 조공을 왔고, 제후에게 덕을 베푸니 팔융(八戎)이 복속했습니다. 유여(由余)가 이를 듣고는 관문을 두드리며 뵙길 청했습니다. 오고대부는 진의 상이 되어 피로해도 수레에 앉지 않았고 더워도 지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나라 안을 다닐 때 수레가 뒤따르지 않게 했고 무기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공명은 창고에 (기록으로) 보관되었고, 덕행은 후대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오고대부가 죽자 진나라 남녀 모두가 눈물을 흘렸고, 동자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으며, 곡식을 빻는 사람들은 절구공이를 두드리며 함성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고대부의 덕입니다.
지금 군께서 진왕을 만나시면서 총애 받는 경감을 앞세웠으니 명예로운 것은 아닙니다. 진의 상으로서 백성을 위해 일하지 않고 궁궐을 크게 지었으니 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태자의 사부에게 경형을 가하고 인민들을 가혹한 형벌로 상하게 했으니 원망과 화가 쌓였습니다. 인민에 대한 교화가 명령보다 심각하고, 인민들이 그것을 본받는 것이 명령보다 빠릅니다. 지금 군은 또 그 하는 일이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니 이는 교화가 아닙니다. 군은 또 남면하여 과인이라 칭하며 날마다 진의 귀공자들을 옭아매고 있습니다.
『시경(詩經)』에 ‘쥐에게도 사지가 멀쩡하게 있는데 사람에게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은데 어째서 일찍 죽지 않는가’라고 했습니다. 『시경』으로 미루어보면 (군의) 일이 오래 갈 수 없습니다. 공자 건(虔)이 문을 닫고 나오지 않은 지 벌써 8년째인데, 군께서는 또 축환(祝歡)을 죽이고 공손고를 경형(黥刑)에 처했습니다. 『시경』에 ‘사람을 얻는 자는 흥하고, 사람을 잃는 자는 무너진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을 얻는 행동이 아닙니다. 군께서 외출할 때면 수레 십여 대와 무장한 병사들을 실은 수레가 따르며, 힘세고 체구가 건장한 자들을 좌우에 태워 호위하게 하고, 긴 창과 짧은 창을 쥔 자들이 수레 옆에서 달립니다.
『서경(書經)』에 ‘덕을 믿는 자는 번창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고 했듯이 군의 위태로움이 아침 이슬 같은데 여전히 수명을 늘리고 장수하길 바라십니까? 그러니 왜 15개 읍을 반납하고 한갓진 곳으로 물러나 전원에 물이나 주며 살지 않으십니까? 또 왜 진왕께 숨어 지내는 선비를 추천하고, 노인과 고아를 봉양하고 보살피며, 부형을 공경하고, 공 있는 사람을 장려하고, 덕 있는 사람을 존중할 것을 권유하여 조금이라도 편해지려 하지 않으십니까?
군께서 앞으로도 여전히 상오 땅의 부유함을 탐하고 진나라의 정권을 오로지 하며 백성들의 원한을 사게 된다면 진왕께서 어느 날 갑자기 불귀의 객이 되어 조정에 서지 못하시게 되었을 때 진나라에서 군을 잡으려는 자들이 얼마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멸망이 발뒤꿈치를 세운 채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군은 듣지 않았다.
그로부터 다섯 달, 진 효공이 죽고 태자가 섰다. 공자 건의 무리가 상군이 반역을 꾀한다고 알리자 관리를 뽑아 상군을 잡게 했다. 상군이 함곡관 아래까지 도망쳐 객사에 묵으려 했다. 객사 주인이 그가 상군일 줄 모르고 “상군의 법에 묵으려는 사람의 신분증이 없으면 함께 처벌받습니다.”라고 했다. 상군이 탄식하며 “어허, 법을 만든 폐단이 여기까지 이르렀구나!”라고 했다. 그곳을 떠나 위로 갔다. 위 사람들은 그가 공자 앙을 속이고 위의 군대를 격파한 일에 원망을 품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군이 다른 나라로 가려 하자 위 사람이 “상군은 진의 죄인이다. 강한 진나라의 죄인이 위에 들어왔으니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며 진으로 들여보냈다.
상군이 다시 진으로 들어와 상읍으로 달아나서는 그 부하들과 읍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정을 공격했다. 진이 군사를 내어 상군을 공격하여 정의 민지(黽池)에서 죽였다. 진 혜왕은 상군을 사지를 찢는 거열(車裂) 형벌을 가하고 조리를 돌리고는 “상앙처럼 반역하지 말라!”라고 했다. 마침내 상군의 집안을 다 없앴다.
<사마천의 논평>
태사공은 이렇게 말한다.
“상군은 타고나길 각박한 사람이었다. 그가 효공에게 행하려 했던 제왕술을 보면 허황된 말에 불과하고 그 본심이 아니었다. 총애를 받는 신하를 넣어 등용되어서는 공자 건에게 형벌을 가하고, 위의 장수 앙을 속이고, 조량의 말을 받들지 않은 것 역시 상군의 각박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내가 일찍이 상군의 「개새(開塞)」, 「경전(耕戰)」 이란 글을 읽었는데 그 사람이 행한 일과 비슷했다. 진나라에서 결국 오명을 얻은 데는 그 만한 까닭이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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