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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二. 鄭世家[靈公 · 襄公]

by 柳川 2019. 6. 23.

                                 卷四二. 鄭世家[靈公 · 襄公]

 

 

霊公元年春, 楚献黿於霊公. 子家、子公将朝霊公,1) 子公之食指動,2) 謂子家曰:「佗日指動, 必食異物.」及入, 見霊公進黿羹, 子公笑曰:「果然!」霊公問其笑故, 具告霊公. 霊公召之, 独弗予羹. 子公怒, 染其指,3) 嘗之而出. 公怒, 欲殺子公. 子公與子家謀先. 夏, 弑霊公. 鄭人欲立霊公弟去疾, 去疾譲曰:「必以賢, 則去疾不肖;必以順, 則公子堅長.」堅者, 霊公庶弟,4) 去疾之兄也. 於是乃立子堅, 是為襄公.

 

 

영공 원년 봄, 초 나라 왕이 영공에게 자라[黿]를 보내왔다. 자가(子家), 자공(子公)이 영공을 조회하려 할 때 자공의 집게손가락이 움직이자, 자가에게 “이전에 집게손가락이 떨리면 반드시 진기한 음식을 먹게 되더라.”라고 말했다. 조정에 들어가니, 영공이 마침 자라탕을 먹고 있었다. 자공이 웃으면서 “과연 그렇구나!”라고 말했다. 영공이 자공에게 웃는 연유를 묻자, 자공이 영공에게 그 이유를 상세히 아뢰었다. 영공이 그를 올라오게는 해놓고 그에게 자라탕을 먹게 하지는 않았다.

 

 

자공이 매우 화가 나서 손가락에 자라탕을 묻혀 맛보고는 곧 나가버렸다. 영공이 매우 화가 나서 자공을 살해하려고 했다. 자공은 자가와 밀약해서 미리 일을 꾸며, 여름에 영공을 살해했다. 정나라 사람들이 영공의 동생 희거질(姬去疾)을 옹립하려고 하자, 거질이 사양하면서 “반드시 현명한 사람이 등용되어야 하는데 나는 불초하며, 반드시 나이의 순서에 따라야 하는데 그렇다면 왕자 견(堅)이 나보다 연장자입니다.”라고 말했다. 왕자 견은 영공의 서제(庶弟)이고, 거질의 형이었다. 이리하여 왕자 견을 옹립하니, 그가 곧 양공(襄公)이다.

 

 

각주

1 集解賈逵曰:「二子鄭卿也.」

2 集解服虔曰:「第二指.」

3 集解左傳曰:「染指於鼎.」

4 集解徐広曰:「年表云霊公庶兄.」

 

 

 

 

襄公立, 将尽去繆氏. 繆氏者, 殺霊公、子公之族家也. 去疾曰:「必去繆氏, 我将去之.」乃止. 皆以為大夫.

 

 

양공이 왕위에 오르자, 목씨(繆氏)를 모두 제거하려 했다. 목씨는 곧 영공을 죽인 자공의 가족이다. 거질이 “꼭 목씨를 제거해야 한다면, 내가 정나라를 떠나겠다.”라고 말하자, 양공은 죽이지 않고 그들을 모두 대부(大夫)로 임명했다.

 

 

襄公元年, 楚怒鄭受宋賂縦華元, 伐鄭. 鄭背楚, 與晉親. 五年, 楚复伐鄭, 晉來救之. 六年, 子家卒, 国人复逐其族, 以其弑霊公也.

 

 

양공 원년, 초 나라는 정나라가 송나라의 뇌물을 받고 화원을 석방한 것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하고, 정나라를 공격했다. 정나라는 초 나라와의 조약을 파기하고 진(晉)나라와 친선을 맺었다.

 

 

5년, 초 나라가 또 정나라를 공격하자, 진(晉)나라 군대가 와서 정나라를 도왔다.

 

 

6년, 자가(子家)가 세상을 떠나자, 정나라 사람들은 예전 그가 영공을 살해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을 추방했다.

 

 

七年, 鄭與晉盟鄢陵. 八年, 楚荘王以鄭與晉盟, 來伐, 囲鄭三月, 鄭以城降楚. 楚王入自皇門, 鄭襄公肉袒掔羊以迎, 曰:「孤不能事邊邑, 使君王懐怒以及獘邑, 孤之罪也. 敢不惟命是聴. 君王遷之江南, 及以賜諸侯, 亦惟命是聴. 若君王不忘厲、宣王, 桓、武公, 哀不忍絶其社稷, 錫不毛之地,1) 使复得改事君王, 孤之願也, 然非所敢望也. 敢布腹心, 惟命是聴.」荘王為卻三十里而後舎. 楚群臣曰:「自郢至此, 士大夫亦久勞矣. 今得国舎之, 何如?」荘王曰:「所為伐, 伐不服也. 今已服, 尚何求乎?」卒去. 晉聞楚之伐鄭, 発兵救鄭. 其來持両端, 故遅, 比至河, 楚兵已去. 晉将率或欲渡, 或欲還, 卒渡河. 荘王聞, 還撃晉. 鄭反助楚, 大破晉軍於河上. 十年, 晉來伐鄭, 以其反晉而親楚也.

 

 

7년, 정나라는 진(晉)나라와 언릉(鄢陵)에서 회맹했다.

 

 

8년, 초 장왕(楚莊王)은 정나라가 진(晉)나라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정나라를 침공했다. 정나라의 수도를 3개월간 포위해 공격하자, 정나라는 도성(都城)을 내어주고 초 나라에 투항했다. 초 장왕이 황문(皇門)에서 정나라 수도로 들어가자, 정 양공은 사죄의 뜻으로 윗도리를 벗고 양(羊)을 끌고서 초 나라 왕을 영접하면서 “저는 대왕의 변읍(邊邑)을 잘 다스릴 수 없으며, 대왕께 불쾌한 마음으로 저의 읍에 오시게 했는데 이것은 다 저의 죄과이니, 대왕께서 어떤 명령을 내린다 하더라도 어찌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 저를 강남(江南)으로 귀양 보내고, 정나라를 다른 제후들에게 준다 하더라도 제가 어찌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만약 대왕께서 주나라의 여왕(厲王), 선왕(宣王)과 정나라의 환공(桓公), 무공(武公)을 잊지 않으셨다면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발 저의 국가를 멸망시키지 마시고 저에게 불모의 땅이라도 조금 주시어 저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대왕을 섬길 기회를 주십시오. 이것은 저의 소원입니다만 감히 그렇게 되리라고 바라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제가 대왕께 진심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다만 대왕의 명령을 따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초 장왕은 초 나라 군대를 30리 밖으로 후퇴해 주둔하게 했다. 이에 초 나라 대신들이 “영도(郢都)에서 여기까지 오느라고 사대부들도 피곤에 지친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정나라를 탈취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방치하려고 하시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라고 말하자, 장공은 “토벌하러 온 이유는 정나라가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격한 것이오. 지금 정나라는 이미 복종했는데, 또 무엇을 요구하자는 것이오?”라고 말하고, 끝내 군대를 철수했다.

 

 

진(晉)나라는 초 나라가 정나라를 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병해 정나라를 도우려고 했다. 그런데 진나라가 출병하려고 할 때, 반대하는 무리가 있었기 때문에 늦게 도착했다. 황하에 도착했을 때, 초 나라 군대는 이미 철수하고 없었다. 진(晉)나라 장수 중에 어떤 사람은 강을 건너 추격하려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돌아가려고 했다. 끝내 진(晉)나라는 황하를 건너 추격했다. 초 장왕이 이 소식을 듣고서 되돌아와서 진(晉)나라 군대를 습격했다. 그런데 정나라는 오히려 초 나라를 도왔기 때문에, 황하에서 진(晉)나라 군대는 대패했다.

 

 

10년, 진(晉)나라는 또 정나라를 공격했는데, 그것은 정나라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초 나라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十一年, 楚荘王伐宋, 宋告急于晉. 晉景公欲発兵救宋, 伯宗諫晉君曰:「天方開楚, 未可伐也.」乃求壮士得霍人解揚, 字子虎, 誆楚, 令宋毋降. 過鄭, 鄭與楚親, 乃執解揚而献楚. 楚王厚賜與約, 使反其言, 令宋趣降, 三要乃許. 於是楚登解揚樓車,2) 令呼宋. 遂負楚約而致其晉君命曰:「晉方悉国兵以救宋, 宋雖急, 慎毋降楚, 晉兵今至矣!」楚荘王大怒, 将殺之. 解揚曰:「君能制命為義, 臣能承命為信. 受吾君命以出, 有死無隕.」3)荘王曰:「若之許我, 已而背之, 其信安在?」解揚曰:「所以許王, 欲以成吾君命也.」将死, 顧謂楚軍曰:「為人臣無忘尽忠得死者!」楚王諸弟皆諫王赦之, 於是赦解揚使帰. 晉爵之為上卿.

 

 

11년, 초 장왕이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는 진(晉)나라에 급히 구원을 요청했다. 진 경공(晉景公)이 출병해 송나라를 구하려고 하자, 백종(伯宗)이 경공에게 권고하기를 “하늘이 바야흐로 초 나라를 흥성하게 하려는데,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장사(壯士)를 보내어 초 나라를 속여 송나라로 하여금 항복하지 않게 할 생각이었다. 그 장사는 곽인(霍人) 해양(解揚)으로 자(字)가 자호(子虎)였다. 해양이 정나라를 지나자, 정나라는 초 나라와 친선관계이므로 곧 해양을 체포해 초 나라로 압송했다. 초 나라 왕은 해양에게 수많은 재물을 상으로 주어 그와 약속하기를 그가 생각을 바꾸어서 송나라로 하여금 빨리 투항하게끔 말하게 했다. 여러 번 강요가 거듭되매 해양은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래서 초 나라 군에서는 해양을 망루에 오르게 해 그가 송나라에 큰 소리로 말하게 했다. 이때 해양은 결국 초 나라 왕과 한 약속을 어기고 진(晉)나라 왕의 명령을 전달해 “진(晉)나라는 지금 전군을 동원해 송나라를 구원하러 오고 있으니, 송나라는 비록 위급하더라도 제발 초 나라에 투항하지 말라. 진나라의 군대는 오늘 곧 도착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초 장왕이 격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해양이 “국왕이 명령을 할 때에는 의(義)로써 해야 하고, 신하는 명령을 받아 관철시키기를 믿음으로써 해야 합니다. 제가 국왕의 명령을 받았으니, 죽는다 하더라도 국왕의 명령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장왕이 “네가 나의 요구에 응답했다가 배반했는데, 너의 믿음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니, 해양이 “제가 당신의 요구에 응답한 것은,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 국왕의 명령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장왕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그는 초 나라 군인들에게 “신하된 자는 충성을 다하고서도 결국 얻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초 나라 왕의 동생들이 모두 초 나라 왕에게 그를 사면하게 권하므로, 결국 초 나라 왕은 해양을 사면해 돌아가게 했다. 진(晉)나라에서는 그를 상경(上卿)에 임명했다.

 

 

十八年, 襄公卒, 子悼公沸4)立.

 

 

18년, 정 양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 도공(悼公) 희비가 왕위를 이었다.

 

 

각주

1 集解何休曰:「墝埆不生五穀曰不毛. 謙不敢求肥饒.」

2 集解服虔曰:「樓車所以窺望敵軍, 兵法所謂『雲梯』也.」杜預曰:「樓車, 車上望櫓也.」

3 集解服虔曰:「隕, 墜也.」

4 索隠劉音袐. 鄒本一作「沸」, 一作「弗」. 左傳作「費」, 音扶味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