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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史記世家

史記 卷四四. 魏世家[景湣王 · 王仮]

by 柳川 2019. 6. 23.

                                   卷四四. 魏世家[景湣王 · 王仮]




景湣王元年, 秦抜我二十城, 以為秦東郡. 二年, 秦抜我朝歌. 衛徙野王.1) 三年, 秦抜我汲. 五年, 秦抜我垣、蒲陽、衍.2) 十五年, 景湣王卒, 子王仮立.

 

 

위 경민왕 원년에는 진나라 군이 위나라의 20여 성을 함락시키고, 진나라의 동군(東郡)으로 삼았다. 2년에는 진나라 군이 위나라의 조가(朝歌)를 함락시켰다. 위(衛)나라는 야왕(野王)으로 수도를 옮겼다. 3년에는 진나라 군이 위(魏)나라의 급읍(汲邑)을 함락시켰다. 5년에는 진나라 군이 위나라의 원읍(垣邑), 포양(蒲陽), 연읍(衍邑)을 함락시켰다. 15년에는 위 경민왕이 죽고, 아들 위 왕가(魏王假)가 즉위했다.

 

 

각주

1 集解徐広曰:「衛従濮陽徙野王.」

2 集解徐広曰:「十二年献城秦.」 正義括地志云:「故垣地本魏王垣也, 在絳州垣県西北二十里. 蒲邑故城在隰州隰川県南四十五里.」在蒲水之北, 故曰蒲陽. 衍, 地名, 在鄭州.



王仮元年, 燕太子丹使荊軻刺秦王, 秦王覚之.1)

 

위 왕가 원년에는 연나라의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를 보내어 진나라 왕을 자해(刺害)하려다가 진나라 왕에게 발각되었다.

 

三年, 秦潅大梁, 虜王仮,2) 遂滅魏以為郡県.

 

3년에는 진나라 군이 물을 끌어서 대량을 수몰시키고, 위 왕가를 포로로 삼았다. 이리하여 위나라는 멸망당했고 그 땅은 진나라의 군현(郡縣)이 되었다.

 

太史公曰:吾適故大梁之墟, 墟中人曰:「秦之破梁, 引河溝而潅大梁, 三月城壊, 王請降, 遂滅魏.」説者皆曰魏以不用信陵君故, 国削弱至於亡, 余以為不然. 天方令秦平海内, 其業未成, 魏雖得阿衡之佐, 曷益乎?3)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일찍이 옛날의 대량성(大梁城)을 찾았는데, 그곳 사람이 말하기를 ‘진(秦)나라 군이 대량을 공격할 때, 강물을 끌어들여서 대량성을 수몰시킴에, 3개월이 지나자 성이 물에 잠겼고, 위나라 왕이 투항함으로써 위나라가 멸망했다’라고 했는데, 평론가들이 말하기를 ‘위나라가 신릉군(信陵君)을 등용하지 않은 까닭에 나라가 쇠약해졌고, 멸망에 이르렀다’라고 했다. 허나, 내 생각은 그러하지 않다.

 

당시에 하늘의 뜻이 진나라 하여금 천하를 평정하게 한 것으로, 아직 그 과업이 완수되지 못했기 때문에 위나라가 비록 아형(阿衡)류의 현신(賢臣)의 보좌를 받았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으리요?”

 

각주

1 集解徐広曰:「二年, 新鄭反.」

2 集解列女傳曰:「秦殺仮.」

3 索隠按:譙周曰「以予所聞, 所謂天之亡者, 有賢而不用也, 如用之, 何有亡哉? 使紂用三仁, 周不能王, 況秦虎狼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