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四九. 外戚世家[陳呂后] 陳皇后母大長公主, 景帝姊也, 數譲武帝姊平陽公主曰:「帝非我不得立, 已而棄捐吾女, 壱何不自喜而倍本乎!」平陽公主曰:「用無子故廃耳.」陳皇后求子, 與医銭凡九千萬, 然竟無子.
진황후의 모친 대장공주는 경제의 누이였는데, 무제의 누이인 평양공주를 여러 차례 책망하기를 ‘황제는 내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 설 수가 없었는데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 딸을 버렸으니 자애(自愛)를 알지 못하고 본분을 망각하는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대해서 평양공주는 ‘자식이 없는 이유 때문에 폐출된 것입니다!’라 했다. 진황후는 아들을 낳으려고 모두 9천 만이나 되는 의약비를 썼지만 끝내 자식을 낳지 못했다.
衛子夫已立為皇后, 先是衛長君死, 乃以衛青為将軍, 撃胡有功, 封為長平侯.1) 青三子在襁褓中, 皆封為列侯. 及衛皇后所謂姊衛少児, 少児生子霍去病, 以軍功封冠軍侯,2) 号驃騎将軍. 青号大将軍. 立衛皇后子拠為太子. 衛氏枝属以軍功起家, 五人為侯.
위자부는 이미 황후가 되었다. 이 이전에 위장군(衛長君)이 죽었으므로 위청이 장군(將軍)이 되었다. 그는 호족(胡族)을 물리친 공적이 있어 장평후(長平侯)에 봉해졌다. 위청의 아들 중 세 명은 아직 강보(襁褓)에 있었는데 모두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이른바 위황후의 언니는 위소아(衛少兒)를 말한다. 소아(少兒)는 아들 곽거병(霍去病)을 낳았다. 그는 군공(軍功)이 있음으로 관군후(冠軍侯)에 봉해져 표기장군(驃騎將軍)이라고 불렸으며, 위청은 대장군(大將軍)으로 불렸다. 위황후의 아들 거(據)는 태자로 세워졌다. 위씨(衛氏) 종족은 군공으로 집안이 일어나 다섯 사람이 후에 봉해졌다.
及衛后色衰, 趙之王夫人3)幸, 有子, 為斉王.
위 황후의 얼굴이 노쇠해지자 조(趙)나라 왕부인(王夫人)이 총애를 받았다. 왕부인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王夫人蚤卒. 而中山李夫人4)有寵, 有男一人, 為昌邑王.5)
왕부인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국(中山國) 이부인(李夫人)이 총애를 받았다. 그녀에게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창읍왕(昌邑王)에 봉해졌다.
李夫人蚤卒,6) 其兄李延年以音幸, 号協律. 協律者, 故倡也. 兄弟皆坐姦, 族. 是時其長兄広利為弐師将軍, 伐大宛, 不及誅, 還, 而上既夷李氏, 後憐其家, 乃封為海西侯.7)
이부인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오빠 이연년(李延年)은 음률에 정통함으로 총애를 받았으며 협률(協律)이 되었다. 협률이라는 관직은 과거에는 예인(藝人)이었다. 그들 형제는 모두 음란함을 범한 후 궁죄(宮罪)로 다스려져 멸족을 당했다. 이때에 마침 그의 맏형 이광리(李廣利)는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대완(大宛)을 토벌하러 갔으므로 죽음을 면했다. 그가 돌아왔으나 무제는 이미 이씨를 멸족시켰으며, 후에 그의 일가를 가련히 여겨 그를 해서후(海西侯)에 봉했다.
他姫子二人為燕王、広陵王.8) 其母無寵, 以憂死.
다른 희비(姬妃)가 낳은 두 명의 아들은 연왕(燕王), 광릉왕(廣陵王)에 봉해졌다. 그들의 모친은 총애를 받지 못했기에 이 때문에 우울해 하다가 죽었다.
及李夫人卒, 則有尹婕妤之属, 更有寵. 然皆以倡見, 非王侯有土之士女, 不可以配人主也. 褚先生曰:9)臣為郎時, 問習漢家故事者鍾離生. 曰:王太后在民閒時所生(子)[一]女者,10) 父為金王孫. 王孫已死, 景帝崩後, 武帝已立, 王太后独在. 而韓王孫名嫣素得幸武帝, 承閒白言太后有女在長陵也. 武帝曰:「何不蚤言!」乃使使往先視之, 在其家. 武帝乃自往迎取之. 蹕道, 先駆旄騎出横城門,11) 乗輿馳至長陵. 當小市西入里, 里門閉, 暴開門, 乗輿直入此里, 通至金氏門外止, 使武騎囲其宅, 為其亡走, 身自往取不得也. 即使左右群臣入呼求之. 家人驚恐, 女亡匿内中床下. 扶持出門, 令拝謁. 武帝下車泣曰:「嚄!12) 大姊, 何蔵之深也!」詔副車載之, 迴車馳還, 而直入長樂宮. 行詔門著引籍,13) 通到謁太后. 太后曰:「帝倦矣, 何従來?」帝曰:「今者至長陵得臣姊, 與倶來.」顧曰:「謁太后!」太后曰:「女某邪?」曰:「是也.」太后為下泣, 女亦伏地泣. 武帝奉酒前為寿, 奉銭千萬, 奴婢三百人, 公田百頃, 甲第, 以賜姊. 太后謝曰:「為帝費焉.」於是召平陽主、南宮主、林慮主三人倶來謁見姊, 因号曰脩成君. 有子男一人, 女一人. 男号為脩成子仲,14) 女為諸侯王王后.15) 此二子非劉氏, 以故太后憐之. 脩成子仲驕恣, 陵折吏民, 皆患苦之.
이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윤첩여(尹婕妤)의 무리가 계속해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모두 노래하는 예인으로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 나타나는 사람들로서, 왕후가 봉지를 소유한 집안의 규수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서 황상지존(皇上至尊)의 배필이 될 자격이 없었다.
저선생(褚先生)은 말했다.
“내가 낭(郎)이었을 때 일찍이 한가(漢家)의 고사(故事)를 모두 알고 있는 종리생(鍾離生)에게 물은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왕 태후(王太后)는 입궁하기 전 민간에서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 아이의 아버지는 김왕손(金王孫)이었다. 김왕손은 이미 죽었고, 경제(景帝)가 서거한 후 무제(武帝)가 황위를 계승했으며, 왕태후는 아직 살아 있었다. 한왕손(韓王孫)이 이름은 언(嫣)으로 평소에 무제의 신임을 받았는데, 그는 기회를 타서 태후에게 장릉(長陵)에 딸이 하나 있다고 알려주었다.
무제는 ‘어째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라 했다. 곧 사람을 보내 먼저 살펴보니 과연 그 집에 살고 있었다. 무제는 친히 그녀를 맞이하러 갔다. 거리의 통행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으며, 앞에는 기병이 기치를 앞세우고 횡성문(橫城門)을 나갔고 무제의 어거(御車)가 뒤이어서 장릉으로 달려갔다. 골목길에서 마을로 들어섰는데 마을의 문이 닫혀 있었으므로 세차게 문을 열었다. 황제의 어거가 곧장 마을로 들어섰으며 김씨의 집, 문 밖에서 멈춰섰다.
무제는 기병들에게 김씨의 집 주위를 포위하게 했는데, 이는 그녀가 도망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으며, 친히 갔는데도 만날 수 없을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좌우의 신하들에게 집으로 들어가 그녀를 찾으라 했다. 집안의 사람들은 두려워했으며, 여인은 도망쳐 내실의 침대 아래에 숨었다. 신하들이 그녀를 부축해 문을 나왔으며 황상(皇上)을 배알하게 했다. 무제는 수레에서 내려 흐느끼며 ‘아이구야! 큰누님. 어찌해 이같이 깊은 곳에 숨어 있었소이까?’라 했다. 부거(副車)에 그녀를 태우고서 수레 머리를 돌려 궁성으로 돌아가되 곧장 장락궁(長樂宮)으로 들어가라 했다.
궁문 간수에게 궁문 통행 증서를 다 써놓으라고 명령했기에 곧장 궁궐에 이르러 태후를 배알할 수 있었다. 태후가 ‘황제의 누를 끼치는 것이 되었구려.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무제가 ‘지금 장릉에 가서 누이를 만났으며 함께 돌아오는 것입니다’라 했다. 무제가 고개를 돌려 그의 누이에게 ‘태후를 알현하십시오!’ 라 했다. 태후가 ‘정말 나의 그 딸이더냐?’라고 묻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태후는 흑흑 흐느껴 울었으며, 딸 또한 땅바닥에 엎드려 흑흑 흐느꼈다.
무제는 술을 받들고 앞으로 나와서 태후를 위해 축수(祝壽)를 했으며, 돈 1천 만, 노비 3백여 명, 논밭 1백경(頃)을 내놓았으며, 또 상등(上等)의 저택을 누이에게 하사했다. 태후는 감사해 이르기를 ‘황제에게 돈을 너무 많이 쓰게 하는구려.’라 했다. 이리하여 평양공주(平陽公主), 남궁공주(南宮公主), 임려공주(林慮公主) 세 사람을 모두 불러 언니를 배알하게 했으며, 그녀를 수성군(修成君)에 봉했다. 수성군에게는 아들 하나와 딸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수성자중(修成子仲)으로 불렸고, 딸은 제후왕(諸侯王)의 왕후(王侯)가 되었다. 이 두 사람은 유씨(劉氏) 성이 아니므로 태후는 그들을 불쌍히 여겼다. 수성자중은 교활하고 방자해 관리와 백성을 괴롭혔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싫어하고 두려워했다.
衛子夫立為皇后, 后弟衛青字仲卿, 以大将軍封為長平侯. 四子, 長子伉為侯世子, 侯世子常侍中, 貴幸. 其三弟皆封為侯, 各千三百戸, 一曰陰安侯,16) 二曰発干侯,17) 三曰宜春侯,18) 貴震天下. 天下歌之曰:「生男無喜, 生女無怒, 独不見衛子夫霸天下!」
위자부(衛子夫)가 황후가 될 때 그녀의 동생 위청(衛靑)은 자가 중경(仲卿)인데 대장군의 신분으로서 장평후에 봉해졌다. 그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항(伉)은 후세자(侯世子)가 되었다. 후세자는 시중(侍中)에 임명되었으므로 존귀와 총애를 받았다. 그의 세 동생들은 모두 후(侯)에 봉해졌는데, 각각에게는 식읍(食邑) 1천3백호(戶)가 주어졌다. 한 사람은 음안후(陰安侯)로, 한 사람은 발간후(發干侯)로, 한 사람은 의춘후(宜春侯)로 불렸는데, 그 존영(尊榮)함은 천하를 진동했다. 세상에는 ‘아들을 낳았다고 기뻐하지 말고, 딸을 낳았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다만 위자부(衛子夫)가 천하를 제패함을 보지 못했더냐.’라고 하는 가요 한 수(首)가 유행되었다.
是時平陽主寡居, 當用列侯尚主. 主與左右議長安中列侯可為夫者, 皆言大将軍可. 主笑曰:「此出吾家, 常使令騎従我出入耳, 柰何用為夫乎?」左右侍御者曰:「今大将軍姊為皇后, 三子為侯, 富貴振動天下, 主何以易之乎?」於是主乃許之. 言之皇后, 令白之武帝, 乃詔衛将軍尚平陽公主焉.
이때 평양공주는 남편이 병으로 인해 경성을 떠나 봉국(封國)으로 갔기 때문에 홀로 지내고 있었으므로 마땅히 열후(列侯)를 한 명 택해 그녀에게 짝을 지어주어야만 했다. 공주는 좌우의 사람과 장안성에서 어떤 열후가 남편이 될 수 있는가를 상의했는데, 모두 대장군이 좋다고 말했다. 공주는 웃으면서 ‘이 사람은 우리 집에서 나왔으며 그에게 기병이 되어 나를 호위하고 따라다니게끔 했는데, 어떻게 그를 남편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라 했다. 좌우의 시어(侍御)가 ‘현재 대장군의 누이는 황후이고 세 아들은 모두 후(侯)로서 부귀함이 천하를 진동시킵니다. 그런데 공주께서는 어찌해 사람을 멸시하십니까?’라 했다. 이리하여 공주는 비로소 이 혼사를 허락했다. 이 일은 황후에게 알려졌고 무제에게 보고되었으며, 위장군(衛將軍)은 평양공주를 맞이하라는 조서가 내려졌다.”
褚先生曰:丈夫竜変. 傳曰:「蛇化為竜, 不変其文;家化為国, 不変其姓.」丈夫當時富貴, 百悪滅除, 光耀栄華, 貧賎之時何足累之哉!
저선생은 말했다.
“남편은 용과 같이 변화하는구나. 『좌전(左傳)』에 이르기를 ‘뱀이 변하여 용이 되는데, 그것의 무늬는 변하지 않는다. 가주(家主)에서 국주(國主)가 되었지만 그 성씨(姓氏)는 변하지 않는다.’라 했다. 남편이 부귀할 때에는 온갖 결함이 모두 가려져 영화(榮華)만이 빛나지만, 빈천할 때에는 조그만 어려운 일이라도 어떻게 그때의 권력과 지위에 연루시킬 수 있겠는가!”
각주 1 索隠地理志県名, 属汝南. 2 索隠子夫姊少児之子去病封也. 地理志冠軍属河陽. 3 索隠生斉王閎. 4 索隠生昌邑哀王髆. 5 正義名賀. 6 索隠李延年之女弟. 漢書云「帝悼之, 李少翁致其形, 帝為作賦」. 此史記以為王夫人最寵, 武帝悼惜. 新論亦同史記為王夫人. 7 正義漢武帝令李広利征大宛, 国近西海, 故号海西侯也. 8 索隠漢書云李姫生広陵王胥、燕王旦也. 9 正義疑此元成之閒褚少孫続之也. 10 集解徐広曰:「名俗.」 正義按:後封修成君者. 11 集解如淳曰:「横音光. 三輔黄図云北面西頭門.」 正義括地志云:「渭橋本名横橋, 架渭水上, 在雍州咸陽県東南二十二里.」按:此橋対門也. 12 索隠烏百反. 蓋驚怪之辞耳. 正義嚄, 嘖, 失声驚愕貌也. 13 正義武帝道上詔令通名状於門使, 引入至太后所. 14 索隠金氏甥, 修成君之子也. 而名仲者, 又與大外祖王氏同字, 恐非也. 15 集解徐広曰:「嫁為淮南王安太子妃也.」 16 索隠名不疑. 地理志県名, 属魏郡. 正義括地志云:「陰安故城魏州頓丘県北六十里也.」 17 索隠名登. 地理志県名, 属東郡. 正義括地志云:「発干故城在博州堂邑県西南二十三里.」 18 索隠名伉. 地理志宜春, 県名, 属汝南. 正義括地志云:「宜春故城在予州汝陽県西六十七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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