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1章
公孫丑問曰, 「夫子當路於齊, 管仲晏子之功, 可復許乎?」 孟子曰, 「子誠齊人也。知管仲晏子而已矣。或問乎曾西曰, 『吾子與子路孰賢?』 曾西蹵然曰, 『吾先子之所畏也。』 曰, 『然則吾子與管仲孰賢?』 曾西艴然不悅曰, 『爾何曾比予於管仲? 管仲得君如彼其專也, 行乎國政如彼其久也, 功烈如彼其卑也。爾何曾比予於是!』」 曰, 「管仲曾西之所不爲也, 而子爲我願之乎?」曰, 「管仲以其君覇, 晏子以其君顯, 管仲晏子猶不足爲與?」 曰, 「以齊王由反手也。」曰, 「若是則弟子之惑滋甚。且以文王之德, 百年而後崩, 猶未洽於天下, 武王周公繼之然後大行。今言王若易然 則文王不足法與?」
曰, 「文王何可當也? 由湯至於武丁, 賢聖之君六七作, 天下歸殷久矣, 久則難變也。武丁朝諸侯, 有天下猶運之掌也, 紂之去武丁未久也。其故家遺俗, 流風善政, 猶有存者, 又有微子微仲王子比干箕子膠鬲, 皆賢人也。 相與輔相之故, 久而後失之也, 尺地莫非其有也, 一民莫非其臣也, 然而文王猶方百里起, 是以難也。齊人有言曰, 『雖有知慧不如乘勢, 雖有鎡基不如待時。』 今時則易然也。夏后殷周之盛, 地未有過千里者也, 而齊有其地矣, 鷄鳴狗吠, 相聞而達乎四境, 而齊有其民矣, 地不改辟矣, 民不改聚矣, 行仁政而王, 莫之能禦也。且王者之不作, 未有疏於此時者也, 民之憔悴於虐政, 未有甚於此時者也, 飢者易爲食, 渴者易爲飮。孔子曰, 『德之流行速於置郵而傳命。』當今之時, 萬乘之國行仁政, 民之悅之猶解倒懸也, 故事半古之人功必倍之, 惟此時爲然。」
공손추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제나라에서 요직을 맡게 되시면 관중과 안자의 공적을 다시 기약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자네는 진실로 제나라 사람이다. 관중과 안자만을 알고 있을 뿐이구나. 어떤 사람이 증서에게 물었다. '우리 선생님과 자로중 누가 더 훌륭합니까?' 증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선조이신 증자께서도 자로를 경외하셨다.' 또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 선생님과 관중의 두분 중 누가 더 훌륭합니까?' 증서가 발끈하여 화를 내고 말했다. “네 어찌 나를 관중에게 비교하는가? 관중은 나라의 전권을 행사할 만큼 왕의 신임을 받았고, 나라의 정사를 행한지가 그렇게 오래 지속되었어도 공적이 저렇게 보잘것 없게 평가되고 있다. 네 어찌 나를 관중에 비교하는가!'"
맹자가 말했다. “관중과는 증서도 비교되기를 원치 않았는데, 너는 내가 관중과 비교되기를 원한다고 여기느냐?”
공손추가 말했다. “관중은 그 인군으로써 패자가 되게 하였고, 안자는 그 인군을 드러나게 했는데도, 관중과 안자가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기십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제나라에서 왕노릇하는 것은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쉽다.”
공손추가 말했다. “그렇다며 제자인 저의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 문왕의 덕으로 말하자면, 문왕이 백년을 사신 후에 돌아가셨으나 오히려 천하를 흡족하게 하지 못했으며, 무왕과 주공이 계승한 연후에야 크게 행해졌습니다. 이제 선생님께서 왕노릇하는 것이 쉽다고 말씀하셨는데 문왕도 본받기에는 부족한 것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나를 어찌 문왕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탕임금으로부터 무정에 이르기까지 훌륭하고 성스런 인군이 예닐곱 분이 일어나 천하가 은나라로 돌아간지 오래되었으나, 오래되면 변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법이다. 무정이 제후들에게 조회받고 천하를 손바닥위에 올려 놓고 운전하는 것같이 하였으나 주(紂)왕은 무정과의 거리가 오래되지 않았다.
옛 가문의 남은 풍속과 이어져온 기풍과 선정(善政)이 아직 남아 있고, 또 미자, 미중, 왕자 비간, 기자, 교격이 다 훌륭한 사람이라 서로 함께 주왕을 보좌했기 때문에 오래 지난 후에 망하였는데, 한 척의 땅도 그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었고, 한 사람의 백성도 그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었으며, 문왕이 오직 사방 백리의 땅으로 일어나셨으니 이로써 어려우셨다.
제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지혜가 있다 해도 세를 타는 것만 같지 못하며, 비록 농기구가 있다 해도 때를 기다림만 같지 못하다.' 고 하였는데 지금 시기에는 쉽다. 하후씨와 은나라 주나라가 번성할 때, 땅이 천리를 넘은 자가 있지 않았으나 제나라가 그 정도의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이어져 서로 듣는 것이 사방 국경에까지 이르렀고, 제나라에 그만한 백성을 두고 있으니, 땅을 더 넓히지 않고 백성을 더 모으지 않더라도 어진 정치를 행하여 왕노릇하면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또 왕이 될만한 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 이 때보다 더 드문 적이 없었으며, 백성이 학정으로 힘들게 사는 것이 이 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으니, 굶주린 자에게 먹이는 것이 쉬웠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는 것이 쉬웠다. 공자께서는 '덕이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 파발로 명을 전하는 것보다 빠르다.' 고 하셨다. 이 시기에 만승의 나라가 어진 정치를 행하면, 백성들이 기뻐하기를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에서 풀린 것 같이 할 것이니, 그러므로 일은 옛 사람의 반만 하고도 공적은 반드시 배가 될 것인데 오직 이 시기만이 그러하다."
[해설]
맹자가 자기네 나라의 역사속 인물만 아는 공손추가 견문이 좁고 고루함을 책망하고 있다.
○公孫丑 孟子弟子齊人也. 當路居要地也. 管仲 齊大夫, 名 夷吾. 相桓公 覇諸侯. 許 猶期也. 孟子未嘗得政, 丑蓋設辭以問也.
○齊人 但知其國 有二子而已. 不復知有聖賢之事.
設辭 : (中) 핑계(를 대다). 구실(을 꾸미다).
○공손추는 맹자 제자이니 제나라 사람이라. 당로(當路)는 중요한 자리에 거함이라. 관중은 제나라 대부이니 이름은 이오라. 환공을 도와 제후의 패권을 잡게 했느니라. 허(許)는 기약하다는 뜻이라. 맹자가 일찍이 정사를 펼치지 못하였기에 공손추가 (대개) 말을 가정해서 (이로써) 물음이라.
○제나라 사람이 다만 그 나라에 두 사람만이 있음을 알 뿐이오, (다시) 성현의 일이 있음은 알지 못함이라.
或問乎曾西曰, 「吾子與子路孰賢?」 曾西蹵然曰, 「吾先子之所畏也。」 曰, 「然則吾子與管仲孰賢?」 曾西艴然不悅曰, 「爾何曾比予於管仲? 管仲得君如彼其專也, 行乎國政如彼其久也, 功烈如彼其卑也。爾何曾比予於是!」
蹵 : 蹴 同字. 차다. 밟다. 좇다. 뒤좇음. 공경하는 모양. 얼굴색이 변하는 모양. 蹵然 : 삼가는 모양 또는 불안한 모양
艴 : 발끈할 불(발)/새벽 배. 발끈하다. 성난얼굴. 색칠하다. 새벽.
어떤 사람이 증서에게 물었다. “우리 선생님과 자로중 누가 더 훌륭합니까? ”
증서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선조이신 증자께서도 자로를 경외하셨다.”
또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 선생님과 관중의 두분 중 누가 더 훌륭합니까?”
증서가 발끈하여 화를 내고 말했다. “네 어찌 나를 관중에게 비교하는가? 관중은 나라의 전권을 행사할 만큼 왕의 신임을 받았고, 나라의 정사를 행한지가 그렇게 오래 지속되었어도 공적이 저렇게 보잘것 없게 평가되고 있다. 네 어찌 나를 관중에 비교하는가!”
○孟子 引曾西與或人問答如此. 曾西 曾子之孫. 蹵 不安貌. 先子 曾子也. 艴 怒色也. 曾之言則也. 烈猶光也. 桓公 獨任管仲四十餘年, 是專且久也, 管仲不知王道而行覇術. 故 言功烈之卑也.
○楊氏曰, 孔子 言子路之才曰, 千乘之國可使治其賦也, 使其見於施爲如是而已. 其於九合諸侯, 一正天下, 固有所不逮也. 然則曾西 推尊子路如此, 而羞比管仲者 何哉? 譬之御者, 子路則範我馳驅而不獲者也. 管仲之功 詭遇而獲禽. 曾西 仲尼之徒也. 故 不道管仲之事.
○맹자가 증서와 혹인이 묻고 답한 말을 인용함이 이와 같음이라. 증서는 증자의 손자라. 축(蹵)은 불안한 모양이라. 선자(先子)는 증자라. 불(艴)은 성내는 빛이라. 증(曾)은 ‘곧 즉’을 말함이라. 열(烈)은 빛남과 같음이라. 환공이 홀로 관중에게 40여년을 맡겼으니 이것이 오로지 함이고 또 오래 함이로대 관중이 왕도를 알지 못하고 패권의 술수를 행함이라. 이에 (맹자가) 공렬이 낮다고 말함이라.
○양씨 가로대 공자가 자로의 재주를 말씀해 가라사대 천승의 나라에 그로 하여금 부(賦=兵士)를 다스리게 할 만하다 하셨으니 그 베풀어 하는 것이 이와 같을 뿐이오. 그 제후를 규(九=糾)합하고 한번 천하를 바로 잡는데는 진실로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 하시니, 그렇다면 증서가 자로를 추존함이 이와 같고, 관중에게 비교함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어째서인고? 말 모는 사람에게 비유컨대 자로는 (곧) (나의) 말 모는 법도에 따름으로써 (짐승을) 잡지 못한 것이고, 관중의 공은 속임수를 써서 짐승을 잡음이라. 증서는 공자의 무리라. 이에 관중의 일을 언급하지 아니함이라.
曰, 「管仲曾西之所不爲也, 而子爲我願之乎?」
맹자가 말했다. “관중과는 증서도 비교되기를 원치 않았는데, 너는 내가 관중과 비교되기를 원한다고 여기느냐?”
○曰 孟子言也. 願 望也.
○왈은 맹자의 말씀이라. 원은 바람이라.
曰, 「管仲以其君覇, 晏子以其君顯, 管仲晏子猶不足爲與?」 曰, 「以齊王由反手也。」
공손추가 말했다. “관중은 그 인군으로써 패자가 되게 하였고, 안자는 그 인군을 드러나게 했는데도, 관중과 안자가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기십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제나라에서 왕노릇하는 것은 손을 뒤집는 것과 같이 쉽다.”
由 : 마치 …와 같다. 마치 …과 같음.
○顯 顯名也. 反手 言易也.
○현(顯)은 이름을 나타냄이라. 반수는 쉬움을 말함이라.
曰, 「若是則弟子之惑滋甚。且以文王之德, 百年而後崩, 猶未洽於天下, 武王周公繼之然後大行。今言王若易然則文王不足法與?」
공손추가 말했다. “그렇다며 제자인 저의 의혹이 더욱 심합니다. 문왕의 덕으로 말하자면, 문왕이 백년을 사신 후에 돌아가셨으나 오히려 천하를 흡족하게 하지 못했으며, 무왕과 주공이 계승한 연후에야 크게 행해졌습니다. 이제 선생님께서 왕노릇하는 것이 쉽다고 말씀하셨는데 문왕도 본받기에는 부족한 것입니까?”
○滋 益也. 文王 九十七而崩, 言百年 擧成數也. 文王 三分天下 才有其二, 武王 克商乃有天下, 周公相成王, 制禮作樂然後, 敎化大行.
○자(滋)는 더함이라. 문왕이 97세에 돌아가시니 백년은 완된 수를 들어 말함이라. 문왕이 천하를 삼분함에 그 둘을 두시고 무왕이 상나라를 이기고는 이에 천하를 두셨으며 주공이 성왕을 도와 예(주례)를 짓고 음악을 지은 후에야 교화가 크게 행해졌음이라.
曰, 「文王何可當也? 由湯至於武丁, 賢聖之君六七作, 天下歸殷久矣, 久則難變也。武丁朝諸侯, 有天下猶運之掌也, 紂之去武丁未久也。其故家遺俗, 流風善政, 猶有存者, 又有微子微仲王子比干箕子膠鬲, 皆賢人也。 相與輔相之故, 久而後失之也, 尺地莫非其有也, 一民莫非其臣也, 然而文王猶方百里起, 是以難也。
맹자가 말했다. “나를 어찌 문왕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탕임금으로부터 무정에 이르기까지 훌륭하고 성스런 인군이 예닐곱 분이 일어나 천하가 은나라로 돌아간지 오래되었으나, 오래되면 변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법이다. 무정이 제후들에게 조회받고 천하를 손바닥위에 올려 놓고 운전하는 것같이 하였으나 주(紂)왕은 무정과의 거리가 오래되지 않았다.
옛 가문의 남은 풍속과 이어져온 기풍과 선정(善政)이 아직 남아 있고, 또 미자, 미중, 왕자 비간, 기자, 교격이 다 훌륭한 사람이라 서로 함께 주왕을 보좌했기 때문에 오래 지난 후에 망하니, 한 자 땅도 그의 소유가 아님이 없었고, 한 사람의 백성도 그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었으며, 문왕이 오직 사방 백리의 땅으로 일어나셨으니 이로써 어려우셨다.
鬲 솥 력/막을 격. 솥, 굽은다리 셋인 솥. 막다. 사이를 막음. 손잡이, 움쿰. 목이 메다.
○當 猶敵也. 商自成湯至于武丁, 中間太甲太戊祖乙盤庚, 皆賢聖之君. 作 起也. 自武丁至紂 凡七世. 故家 舊臣之家也.
○당(當)은 맞서다는 뜻이라. 상나라가 탕임금으로부터 무정에 이르기까지 중간에 태갑(4대), 태무(9대), 조을(13대), 반경(19대)이 모두 현군이고 성군이라. 작은 일어남이라. 무정으로부터 주까지는 무릇 7세라. 고가는 옛 신하의 가문이라.
齊人有言曰, 『雖有知慧不如乘勢, 雖有鎡基不如待時。』 今時則易然也。
제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비록 지혜가 있다 해도 세를 타는 것만 같지 못하며, 비록 농기구가 있다 해도 때를 기다림만 같지 못하다.' 고 하였는데 지금 시기에는 쉽다.
鎡 : 호미 자. 基 : 쟁기. 鎡基 : 농기구.
○鎡基 田器也. 時 謂耕種之時.
○자기는 밭농사짓는 농기구라. 때는 갈고 심는 때를 이름이라.
夏后殷周之盛, 地未有過千里者也, 而齊有其地矣, 鷄鳴狗吠相聞, 而達乎四境, 而齊有其民矣, 地不改辟矣, 民不改聚矣, 行仁政而王, 莫之能禦也。
하후씨와 은나라 주나라가 번성할 때, 땅이 천리를 넘은 자가 있지 않았으나 제나라가 그 정도의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이어져 서로 듣는 것이 사방 국경에까지 이르렀고, 제나라에 그만한 백성을 두고 있으니, 땅을 더 넓히지 않고 백성을 더 모으지 않더라도 어진 정치를 행하여 왕노릇하면 이를 막을 수가 없었다.
○此 言其勢之易也. 三代盛時 王畿不過千里, 今齊已有之, 異於文王之百里, 又雞犬之聲 相聞, 自國都以至于四境, 言居民稠密也.
○이는 그 세(勢)의 쉬움을 말함이라. 삼대(하.은.주)가 번성할 적에 왕이 직접 다스리는 영역이 천리를 넘지 않았거늘 이제 제나라가 이미 그만한 땅을 두고 있으니, 문왕의 백리땅과 다르고, 또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려서 국도로부터 변방에 이르기까지 백성이 많이 살고 있음을 말함이라.
且王者之不作, 未有疏於此時者也, 民之憔悴於虐政, 未有甚於此時者也, 飢者易爲食, 渴者易爲飮。
또 왕이 될만한 자가 나오지 않는 것이 이 때보다 더 드문 적이 없었으며, 백성이 학정으로 힘들게 사는 것이 이 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으니, 굶주린 자에게 먹이는 것이 쉬웠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게 하는 것이 쉬웠다.
[해설]
제대로 왕노릇하는 자가 없어 백성들이 그동안 학정에 시달려 왔기에, 굶주린 백성에게 먹을 것을 주면 얼른 달게 먹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면 바로 달게 마실 정도이다. 이와 같은 때에 仁政을 행하면 그 성과가 금방 드러나니 정치하기가 이만큼 쉬운 때가 없다는 의미이다.
○此 言其時之易也. 自文武至此 七百餘年, 異於商之聖賢繼作, 民苦虐政之甚, 異於紂之猶有善政. 易爲飮食 言飢渴之甚 不待甘美也.
○이는 그 때의 쉬움을 말함이라. 문왕, 무왕으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7백여년이니 상나라에 聖賢이 이어서 나온 것과 다르고 (또한 지금은) 백성의 학정에 시달림이 심함이 紂왕 때와는 다름이라. 易爲飮食(이위음식)은 굶주림과 목마름이 심함에 감미로운 맛까지 기대하지 않음을 말함이라.
孔子曰, 『德之流行速於置郵而傳命。』
공자께서는 '덕이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이 파발로 명을 전하는 것보다 빠르다.' 고 하셨다.
○置 驛也, 郵 馹也, 所以傳命也. 孟子 引孔子之言如此.
○치(置)는 역(驛)이요 우(郵)도 일(馹)이니 써한 바 命을 전달함이라. 맹자가 공자의 말씀을 이와같이 인용함이라. (置 驛 郵 馹 : 모두 역마의 뜻)
馹 : 역말 일. 역말. 역마(驛馬). 역참(驛站)에 둔 말.
當今之時, 萬乘之國行仁政, 民之悅之猶解倒懸也, 故事半古之人功必倍之, 惟此時爲然。」
이 시기에 만승의 나라가 어진 정치를 행하면, 백성들이 기뻐하기를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에서 풀린 것 같이 할 것이니, 그러므로 일은 옛 사람의 반만 하고도 공적은 반드시 배가 될 것인데 오직 이 시기만이 그러하다."
○倒懸 猶困苦也. 所施之事半於古人 而功倍於古人, 由時勢易而德行速也.
○거꾸로 매달리는 형벌은(倒懸)은 곤궁하고 고통스러움(困苦)에 비유함이라. 베푸는 바의 일을 옛 사람의 반만 하고도 공적은 옛 사람보다 배가 됨은 때와 형세가 쉽고 덕행은 빠르게 퍼져나가기 때문이라.
[해설]
이 장은 공손추가 문왕은 성인이라도 몇 대에 걸쳐 주나라를 세웠으나, 관중은 당대에 제환공을 패제후로 만들어준 역사적 사례를 비교하면서 문왕의 공적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하자, 맹자가 답변한 내용이다. 맹자는 각기의 정치적 상황과 배경이 다르며 또한 패도정치와 왕도정치가 근본적으로 다름을 지적하였다. 아울러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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