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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歷史와文學/列國志

第十九回. 擒傅瑕厲公復國, 殺子頹惠王反正.

by 柳川 2021. 3. 22.

第十九回. 擒傅瑕厲公復國, 殺子頹惠王反正.

 

 

話說齊桓公歸國,管仲奏曰:「東遷以來,莫强於鄭。鄭滅東虢而都之,前嵩後河,右洛左濟,虎牢之險,聞於天下,故在昔莊公恃之,以伐宋兼許,抗拒王師。今又與楚爲黨。楚,僭國也,地大兵强,呑噬漢陽諸國,與周爲敵。君若欲屛王室而霸諸侯,非攘楚不可;欲攘楚,必先得鄭。」 桓公曰:「吾知鄭爲中國之樞,久欲收之,恨無計耳!」 甯戚進曰:「鄭公子突爲君二載,祭足逐之而立子忽;高渠彌弒忽而立子亹;我先君殺子亹,祭足又立子儀。祭足以臣逐君,子儀以弟篡兄,犯分逆倫,皆當聲討。今子突在櫟,日謀襲鄭,況祭足已死,鄭國無人。主公命一將往櫟,送突入鄭,則突必懷主公之德,北面而朝齊矣。」 桓公然之。遂命賓須無引兵車二百乘,屯於櫟城二十里之外。賓須無預遣人致齊侯之意。鄭厲公突先聞祭足死信,密差心腹到鄭國打聽消息。忽聞齊侯遣兵送已歸國,心中大喜,出城遠接,大排宴會。

 

 

제환공이 귀국하자 관중이 아뢰었다. "낙양으로 동천한 이래 정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습니다. 정나라는 동괵(東虢)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도읍으로 하였는데, 앞에는 숭산(嵩山)이 있고 뒤에는 황하가 있으며 오른 쪽에는 낙수(洛水), 왼쪽에는 제수(濟水)가 있고, 호뢰의 험준함이 있어 천하의 소문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옛날 장공은 그것을 믿고 송나라와 아울러 허(許)나라를 치면서 황제의 군대에 저항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또 초나라와 한편이 되었습니다.

초나라는 왕위를 참칭한 나라로 땅이 넓고 군대는 강하며, 한수(漢水) 북쪽의 나라들을 병탄(兵呑)하고 주(周)왕실을 적대시 하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주왕실을 보호하고 제후들의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신다면 초나라를 치지 않을 수 없으며 초나라를 치려면 반드시 먼저 정나라를 손에 넣어야 할 것입니다."

환공이 말했다. "나도 정나라가 중국의 근본이 되는 것을 알고 오랫동안 거둘 마음이 있었으나 계책이 없는 것이 한이었소,"

영척이 말했다. "정나라의 공자 돌(突)은 2년동안 군주위에 있었는데, 제족이 그를 축출하고 공자 홀(忽)을 옹립하였었으며, 고거미는 홀을 시해하고 공자 미(亹)를 군주로 세웠고, 우리 선군께서 공자 미를 죽이자 제족은 공자 의(儀)를 군주로 세웠습니다. 제족은 신하가 되어 군주를 축출하였고, 공자 의는 동생이 되어 형의 자리를 빼앗아 분수를 어기고 윤리를 거역하였으니 모두 준엄한 질책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공자 돌은 역(櫟)에서 지내면서 매일 정나라를 습격하려고 도모해 왔는데, 하물며 제족이 이미 죽어 정나라에 인재가 없습니다.

주공께서 한 장수에게 명하여 역으로 가서 공자 돌을 정나라에 입국시키도록 하신다면 돌은 반드시 주공의 은덕을 마음에 새길 것이니 북면하여 제나라에 조회할 것입니다."

환공도 그렇게 여기고 빈수무(賓須無)에게 명을 내려 병거 200대를 인솔하여 역성의 20리 밖에 주둔하게 하였다. 빈수무는 미리 사람을 보내 제후의 뜻을 전했다. 정나라 여공(厲公) 돌은 앞서 제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은밀히 심복을 정나라에 보내 소식을 탐지하게 하였었다. 갑자기 제후가 병력을 보내 자신을 귀국시키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매우 기뻐하며 성을 나가 멀리까지 가서 맞아들이고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었다.  

  

 

 

二人敍話間,鄭國差人已轉,回說:「祭仲已死,如今叔詹爲上大夫。」 賓須無曰:「叔詹何人?」 鄭伯突曰:「治國之良,非將才也。」 差人又稟:「鄭城有一奇事:南門之內,有一蛇長八尺,靑頭黃尾;門外又有一蛇,長丈餘,紅頭綠尾;鬥於門闕之中,三日三夜,不分勝負。國人觀者如市,莫敢近之。後十七日,內蛇被外蛇咬死。外蛇竟奔入城,至太廟之中,忽然不見。」 須無欠身賀鄭伯曰:「君位定矣。」 鄭伯突曰:「何以知之?」 須無曰:「鄭國外蛇即君也,長丈餘,君居長也。內蛇子儀也,長八尺,弟也。十七日而內蛇被傷,外蛇入城者,君出亡以甲申之夏,今當辛丑之夏,恰十有七年矣。內蛇傷死,此子儀失位之兆;外蛇入於太廟,君主宗祀之徵也。我主方申大義於天下,將納君於正位,蛇鬥適當其時,殆天意乎!」 鄭伯突曰:「誠如將軍之言,沒世不敢負德!」 賓須無乃與鄭伯定計,夜襲大陵。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도중에 정나라에 탐지하러 갔던 사람이 돌아와 말했다. 

"제족이 이미 죽고 지금 숙첨(叔詹)이 상대부가 되었습니다."

빈수무가 물었다. "숙첨은 어떤 사람입니까?"

정백 돌이 말했다. "나라를 다스리는데에는 좋은 신하이지만 장수의 재목은 아닙니다."

정나라에 갔던 사람이 또 말했다. "정나라 성에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남문 안에 한 마리의 뱀이 있었는데 길이가 팔 척이나 되고 머리는 푸른색이며 꼬리는 노란 색이었습니다. 또 문 밖에도 한 마리의 뱀이 있었는데 길이가 일 장이 넘었고 붉은 머리에 녹색 꼬리였습니다.

그 뱀들이 문 틈에서 주야로 3일간이나 싸웠는데도 승부를 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저자거리처럼 몰려 구경하면서도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17일이 지난 후에 안에 있던 뱀이 밖에 있던 뱀에게 물려 죽었는데 밖에 있던 뱀이 성안으로 들어가 태묘안에 이르러 갑자기 사라져 버렸습니다."

빈수무가 몸을 숙여 정백에게 하례하며 말했다. "군주의 지위가 정해졌습니다."

정백 돌이 물었다. "그것을 어찌 압니까?"

빈수무가 대답했다. "정나라에서의 바깥 뱀은 바로 군주이신데 길이가 일 장이 넘는 것은 군주께서 형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안에 있던 뱀은 바로 공자 의이며, 길이가 8척으로 밖의 뱀보다 짧은 것은 동생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17일이 지나 안에 있던 뱀이 죽고 밖에 있던 뱀이 입성한 것은 군주께서 나라를 잃은 때가 갑신(甲申)년 여름이고 지금은 신축(辛丑)년 여름이라 17년이 지난 것과 흡사합니다. 

안에 있던 뱀이 죽었는데 이것은 공자 의가 군주의 지위를 잃는다는 조짐이며, 밖의 뱀이 태묘안에 들어깠다는 것은 군주께서 조종을 제사지내게 된다는 징조입니다.  우리 주군께서 바야흐로 천하에 대의를 베풀어 군주를 받아들여 정나라 군주의 지위를 바로잡고자 하시는데 뱀들이 때 맞춰 싸웠으니 반드시 하늘의 뜻이리다!."

정백 돌이 말했다. "진실로 장군의 말과 같다면 죽는다 해도 감히 은덕을 잊지 못할 것이오."

이리하여 빈수무는 정백과 더불어 계책을 정하여 밤에 대릉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傅瑕率兵出戰,兩下交鋒,不虞賓須無繞出背後,先打破大陵,揷了齊國旗號,傅瑕知力不敵,只得下車投降。鄭伯突銜傅瑕十七年相拒之恨,咬牙切齒,叱左右:「斬訖報來!」 傅瑕大呼曰:「君不欲入鄭耶?何爲殺我?」 鄭伯突喚轉問之。傅瑕曰:「君若赦臣一命,臣願梟子儀之首。」 鄭伯突曰:「汝有何策,能殺子儀?不過以甘言哄寡人,欲脫身歸鄭耳。」 瑕曰:「當今鄭政皆叔詹所掌,臣與叔詹至厚。君能赦我,我潛入鄭國,與詹謀之,子儀之首,必獻於座下。」 鄭伯突大罵:「老賊奸詐,焉敢誑吾?吾今放汝入城,汝將與叔詹起兵拒我矣。」 賓須無曰:「瑕之妻孥見在大陵,可囚於櫟城爲質。」 傅瑕叩頭求哀:「如臣失信,誅臣妻子。」 且指天日爲誓。鄭伯突乃縱之。傅瑕至鄭,夜見叔詹。詹見瑕,大驚曰:「汝守大陵,何以至此?」 瑕曰:「齊侯欲正鄭位,命大將賓須無統領大軍,送公子突歸國。大陵已失,瑕連夜逃命至此。齊兵旦晚當至,事在危急。子能斬儀之首,開城迎之,富貴可保,亦免生靈塗炭。轉禍爲福,在此一時。不然,悔無及矣!」 詹聞言嘿然,良久曰:「吾向日原主迎立故君之議,爲祭仲所阻。今祭仲物故,是天助故君。違天必有咎,但不知計將安出?」 瑕曰:「可通信櫟城,令速進兵。子出城,僞爲拒敵,子儀必臨城觀戰,吾覷便圖之。子引故君入城,大事定矣。」 叔詹從其謀,密使人致書於突。傅瑕然後參見子儀,訴以齊兵助突,大陵失陷之事。子儀大驚曰:「孤當以重賂求救於楚,待楚兵到日,內外夾攻,齊兵可退。」 叔詹故緩其事。過二日,尙未發使往,諜報:「櫟軍已至城下。」 叔詹曰:「臣當引兵出戰。君同傅瑕登城固守。」 子儀信以爲然。

 

哄 : 떠들썩할 홍. 떠들썩하다여럿이 시끄럽게 내는 소리. 여러 사람이 함께 웃다.

 

 

부하(傅瑕)가 병사들을 이끌고 출전하여 양쪽이 싸우는 동안, 빈수무가 배후를 치리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먼저 대릉이 함락되어 제나라 기가 꽂히자 부하는 힘으로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수레에서 내려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정백 돌은 부하가 17년동안 저항한데 대하여 한을 품고 이를 갈며 좌우에 명했다. "참하고 와서 보고하라!" 

부하가 큰 소리로 외쳤다. "군주께서는 정나라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찌 나를 죽이려고 하십니까?"

정백이 그를 불러들여 무슨 말인지 물었다. 

부하가 대답했다. "주군께서 신을 용서하고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공자 의의 수급을 베어 매달겠습니다." 

정백 돌이 물었다. "네가 무슨 계책으로 공자 의를 죽일 수 있겠는가? 감언 이설로 과인을 속이고 정나라로 도망가려고 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부하가 말했다. "지금 정나라의 정치는 모두 숙첨이 장악하고 있는데 신은 숙첨과 돈독히 지내고 있습니다. 군주께서 저를 용서하신다면 저는 정나라에 잠입하고, 숙첨과 도모하여 공자 의의 수급을 취해 반드시 군주께 바칠 것입니다."

정백 돌이 크게 꾸짖었다. "늙은 도적이 간사하게 어찌 감히 나를 속이려고 하느냐? 내가 지금 너를 방면하여 성에 들어가게 되면 숙첨과 더불어 병사들을 일으켜 나에게 항거할 것이다."

빈수무가 말했다. "부하의 처자가 대릉에 있는데 역성에 인질로 가둬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하가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하였다. "신이 믿음을 저버린다면 신의 처자를 죽이십시오."

그리고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하니 정백 돌은 마침내 그의 말에 따랐다.

부하가 정나라에 도착하자 밤에 숙첨을 찾아가 만났다. 숙첨이 부하를 보자 크게 놀라며 물었다.

"그대는 대릉을 지키고 있는 자인데 어찌 여기에 오게 된 것이오?"

부하가 말했다. "제후(齊侯)는 정나라 군주의 자리를 바로 잡으려고, 빈수무를 대장으로 명하여 대군을 이끌고 와서 공자 돌을 귀국시키려고 하고 있소. 대릉은 이미 그들에게 빼앗겼으며 나는 밤새워 도망쳐 왔소.  제나라 군병이 조만간 도착할 것이라 일이 급합니다. 그대가 공자 의의 수급을 취하여 성을 열고 그들을 맞이할 수 있다면 부귀가 보전될 수 있으며 또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할 수 있습니다.

전화위복은 바로 이 순간에 달려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오."

숙첨은 묵묵히 말을 듣고는 한참 있다가 말했다. "나는 지난 날 원래 옛 군주인 돌을 맞이하여 옹립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제족에 의해서 저지 되었었소. 지금은 제족이 죽고 없으니 이야말로 하늘이 옛 군주를 돕는 것이며, 하늘을 거스르면 반드시 재앙을 받게 될 것이오. 다만 계책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 모르겠소." 

부하가 말했다. "역성과 연락하여 속히 진병토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대가 성을 나가 거짓으로 적을 막는 채 하면 공자 의는 반드시 성에서 관전할 것이니 내가 기회를 봐서 그를 도모할 것입니다. 그대가 옛 군주를 인도하여 성에 들어오면 대사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숙첨이 그 계책에 따라 은밀히 사람을 보내 돌에게 서찰을 전했다.  부하는 그 후 공자 의를 만나 제나라 군대가 돌을 도와 대릉이 함몰된 일을 하소연했다. 

공자 의가 크게 놀라 말했다. "고가 초나라에 뇌물을 후하게 써서 구원병을 청할 것이니 초나라 군사들이 도착하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안팎에서 협공한다면 제나라 군사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숙첨은 의도적으로 그 일을 늦추었다. 이틀이 지나도록 초나라에 사자를 출발시키지도 않았는데 탐지병의 보고가 들어왔다.

"역읍의 군대가 이미 성아래에 도착했습니다."

숙첨이 말했다. "신이 병사들을 이끌고 출전하겠습니다. 주군께서는 부하와 함께 성에 올라 굳게 지키십시오."

공자 의는 믿고 그렇게 하였다.

 

 

  

卻說鄭伯突引兵先到,叔詹略戰數合,賓須無引齊兵大進,叔詹回車便走。傅瑕從城上大叫曰:「鄭師敗矣!」子儀素無膽勇,便欲下城。瑕從後刺之,子儀死於城上。叔詹叫開城門,鄭伯同賓須無一同入城。傅瑕先往淸宮,遇子儀二子,俱殺之。迎突復位。國人素附厲公,歡聲震地。厲公厚賄賓須無,約以冬十月親至齊庭乞盟。須無辭歸。厲公復位數日,人心大定。乃謂傅瑕曰:「汝守大陵,十有七年,力拒寡人,可謂忠於舊君矣。今貪生畏死,復爲寡人而弑舊君,汝心不可測也!寡人當爲子儀報仇!」喝令力士押出,斬於市曹。其妻孥姑赦弗誅。

 

髯翁有詩嘆云:

鄭突奸雄世所無,

借人成事又行誅。

傅瑕不愛須臾活,

贏得忠名萬古呼。

 

 

정백 돌은 병사들을 이끌고 먼저 도착하여 숙첨과 대략 수합을 싸우는 도중에, 빈수무가 제나라 군사를 이끌고 대대적으로 몰려오니 숙첨이 수레를 돌려 도주하였다. 

부하가 성 위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정나라 군사가 패했구나!"

공자 의는 본래 담력도 용기도 없는 자라 바로 성을 내려가려고 하였는데 그 순간 부하가 뒤에서 그를 칼로 찔러 공자 의는 성위에서 죽고 말았다. 숙첨이 큰 소리로 성문을 열게 하여 정백과 빈수무가 함께 성안으로 들어왔다. 

부하가 먼저 청궁(淸宮)으로 가서 공자 의의 두 아들을 모두 죽였다. 백성들은 본래 여공편이라 환성이 크게 진동했다. 여공은 빈수무에게 후하게 사례하고 겨울인 10월에 친히 제나라 조정에 들어가 맹약을 청하기로 약속했다.  빈수무가 작별하고 돌아갔다.

연공이 복귀한지 며칠 지나자 민심이 크게 안정되었다.

이에 부하에게 말했다. "너는 대릉을 지키면서 17년동안이나 과인에게 항거하였으니 옛 군주인 공자 의에게는 충신이라고 할 것이다. 지금 삶을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여 또 과인을 위하여 옛 군주를 죽였으니 네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구나!  과인이 공자 의를 위하여 복수를 해주는 것이 마땅하리라!"

큰 소리로 장사들에게 영을 내려 부하를 끌고나가 저자거리에서 참하게 했다.  그러나 그 처자들은 용서하고 죽이지 않았다.

 

염옹이 시를 지어 탄식했다. 

 

정나라 여공 돌은 세상에 없는 간웅이라,

남의 손을 빌어 대사를 이루고는 그를 죽였구나.

부하가 잠시라도 목숨에 애착을 갖지 않았더라면,

충신이라는 명예를 만고에 드날렸을 것이다.

   

 

 

原繁當先贊立子儀,恐其得罪,稱疾告老。厲公使人責之,乃自縊而死。厲公復治逐君之罪,殺公子閼。强鉏避於叔詹之家,叔詹爲之求生,乃免死,刖其足。公父定叔出奔衛國。後三年,厲公召而復之,曰:「不可使共叔無後也!」 祭足已死勿論。叔詹仍爲正卿,堵叔師叔並爲大夫,鄭人謂之 「三良」。

 

 

원번(原繁)은 전에 공자 의를 추천하며 옹립하였던 까닭에 벌을 받을까 두려워 늙어 병이 있음을 핑계로 은퇴하고자 했다. 여공은 사람을 시켜 원번을 꾸짖었는데 이에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강서는 숙첨의 집으로 도피하여 숨었는데 숙첨이 그의 목숨을 살려 주기를 간청하여 죽음을 면하고 발꿈치를 베는 월형(刖刑)에 처해졌다.

공보정숙은 위나라로 도주하였었는데 3년이 지나서 여공이 불러 복귀시키고 말했다. "공숙의 후사를 없게 하여서는 안된다."   

제족은 이미 죽어 논하지 않았다. 숙첨은 정경이 되었고 도숙(堵叔)과 사숙(師叔) 모두 대부로 삼았는데 정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삼량(三良)이라 불렀다. 

  

 

 

 

再說齊桓公知鄭伯突已復國,衛曹二國,去冬亦曾請盟,欲大合諸侯,刑牲定約。管仲曰:「君新擧霸事,必以簡便爲政。」 桓公曰:「簡便如何?」 管仲曰:「陳、蔡、邾自北杏之後,事齊不貳。曹伯雖未會,已同伐宋之擧。此四國,不必再煩奔走。惟宋衛未嘗與會,且當一見。俟諸國齊心,方擧盟約可也。」 言未畢,忽傳報:「周王再遣單蔑報宋之聘,已至衛國。」 管仲曰:「宋可成矣。衛居道路之中,君當親至衛地爲會,以親諸侯。」 桓公乃約宋、衛、鄭三國,會於鄄地。連單子齊侯,共是五位,不用歃血,揖讓而散。諸侯大悅。齊侯知人心悅從,乃大合宋、魯、陳、衛、鄭、許諸國於幽地,歃血爲盟,始定盟主之號。此周釐王三年之冬也。

 

 

제환공은 정백 돌이 이미 나라를 되찾은 것을 알고, 위, 조나라가 지난 겨울에 맹약을 청했던 바, 대대적으로 제후들을 모아 맹약을 체결하고자 하였다. 

관중이 말했다. "주군께서 새로이 패자가 되는 일을 행하시려면 반드시 일을 간편하게 하셔야 합니다."

환공이 물었다. "간편하게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오?"

관중이 대답했다. "진(陳)、채(蔡)、주(邾)의 세 나라는 북행에서의 맹약이후 제나라를 섬기는 것이 한결같습니다.  또 조백(曹伯)은 그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어도 이미 송나라를 치는 일에 동참하였습니다. 이 네 나라는 다시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송나라와 위나라는 모임에 참여한 적이 없으니 마땅히 한번은 만나셔야 합니다.  모든 나라들이 뜻을 함께 하기를 기다려 그 때 맹약을 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홀연히 보고가 들어왔다. "주 천자께서 다시 선멸(單蔑)을 보내시어 송나라에서 주 왕실에 사신을 보내 예를 표한 일을 알리도록 하셨는데 선멸은 이미 위나라에 도착하였습니다." 

관중이 말했다. "송나라와는 우호관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선멸이 위나라에 도착했다고 하니 우리나라에 오는 도중이라 군주께서는 친히 위나라 땅으로 가시어 그를 맞이하시고, 천자의 사자인 그를 가깝게 대하는 모습을 제후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환공은 송(宋)、위(衛)、정(鄭) 세 나라와 위나라의 견읍(鄄邑)에서 회맹하기로 약속했다. 선멸과 만나자 제후(齊侯)는 모두 다섯 명이 모였지만 삽혈의식도 생략하고 읍(揖)하는 것으로 간단히 마치고 헤어졌다.  참여했던 제후들이 크게 기뻐했다. 

제후는 인심이 기쁘게 따르는 것을 알고, 이에 따라 송(宋)、노(魯)、진(陳)、위(衛)、정(鄭)、허(許)의 나라들과 유(幽)라는 곳에서 크게 회합을 갖고 삽혈의식을 취하며 맹약을 체결하므로써 비로소 맹주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 때는 주 이왕 3년 겨울이었다. 

 

 

  

卻說楚文王熊貲,自得息嬀立爲夫人,寵幸無比。三年之內,生下二子,長曰熊囏,次曰熊惲。息嬀雖在楚宮三載,從不與楚王說話。楚王怪之。一日,問其不言之故。息嬀垂淚不答。楚王固請言之,對曰:「吾一婦人而事二夫,縱不能守節而死,又何面目向人言語乎?」 言訖淚下不止。

 

胡曾先生有詩云:

息亡身入楚王家,

回看春風一面花。

感舊不言常掩淚,

祇應翻恨有容華。

 

囏 : 어려울 간. 어렵다. 괴롭다. 가난하다.       惲 : 중후할 운. 중후하다. 도탑다. 꾀하다. 도모하다. 姓.

 

 

한편 초문왕 웅자는 스스로 식부인 규씨를 부인으로 삼아 비할데 없이 총애하여 3년이 되지 않았는데 두 아들을 두어 형은 웅간(熊囏),동생은 웅운(熊惲)이라 하였다.  그러면서도 식부인 규씨는 초나라 궁에서 3년을 지내면서도 초왕과 더불어 말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괴이히 여기고 어느 날 말을 하지 않는 까닭을 물었다. 식부인 규씨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초왕이 굳이 대답을 청하자 마지못해 대답했다. "저는 한 아녀자로서 두 명의 지아비를 섬겼으며, 수절하지도 죽지도 못했으니 또 무슨 면목으로 남에게 말을 하겠습니까?" 

말을 마치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호증선생이 시를 남겼다.

 

식(息)나라는 망했어도 몸은 초(楚)왕실에 들어갔는데,

돌이켜 보니 봄바람에 피어난 한 떨기 꽃이었다.

지난 일이 한이 되어 말없이 눈물로 지내는데,

한갖 부귀영화를 누린다 해서 한이 풀리겠는가.

 

 

 

楚王曰:「此皆蔡獻舞之故,孤當爲夫人報此仇也,夫人勿憂。」 乃興兵伐蔡,入其郛。蔡侯獻舞肉袒伏罪,盡出其庫藏寶玉以賂楚,楚師方退。適鄭伯突遣使告復國於楚。楚王曰:「突復位二年,乃始告孤,慢孤甚矣。」 復興兵伐鄭。鄭謝罪請成,楚王許之。周釐王四年,鄭伯突畏楚,不敢朝齊。齊桓公使人讓之。鄭伯使上卿叔詹如齊,謂桓公曰:「敝邑困於楚兵,早夜城守,未獲息肩,是以未修歲事。君若能以威加楚,寡君敢不朝夕立於齊庭乎?」 桓公惡其不遜,囚詹於軍府。詹視隙逃回鄭國。自是鄭背齊事楚。不在話下。

 

郛 : 외성 부. 外城. 城郭.  

 

 

초왕이 말했다. "이것은 모두 채나라 헌무가 잘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내가 마땅히 부인을 위해 그 복수를 해줄 것이니 괴로워하지 마시오."

그리하여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를 정벌하여 부(郛)에 들어갔다. 채후 헌무는 웃통을 벗고 엎드려 항복하고 죄를 청하며, 부고에 저장된 보물을 모조리 꺼내어 초나라에 뇌물을 바치자 초군이 물러갔다. 

그때 정백 돌이 초나라에 사자를 보내 자신이 정나라의 군주로 복귀하였음을 알려왔다. 

초왕이 말했다. "돌이 복위한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나에게 알려 오다니,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심하구나."

다시 군대를 일으켜 정나라를 치려고 하였다. 정나라에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화해를 청하자 초나라에서는 허락했다. 

주 이왕 4년, 정백 돌은 초나라를 두려워하여 감히 제나라에 입조하지 못했다.  제환공이 사자를 보내 정백을 꾸짖자 정백은 상경 숙첨을 제나라에 사자로 보내 제환공에게 말했다. 

"저희 나라에서는 초나라 군대의 핍박을 받아 성을 지키느라 숨돌릴 여유가 없어서 입조하지 못했습니다. 군주께서 위력으로 초나라를 칠 수 있다면 저희 주군께서 감히 조석으로 제나라의 조정에 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환공은 그의 불손함을 싫어하여 군부에 가두었으나, 숙첨은 기회를 노려 탈출해 정나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정나라는 제나라를 배신하고 초나라를 섬겼음은 말할 것도 없다.  

 

 

 

  

再說周釐王在位五年崩。子閬立,是爲惠王。惠王之二年,楚文王熊貲淫暴無政,喜於用兵。先年,曾與巴君同伐申國,而驚擾巴師。巴君怒,遂襲那處,克之。守將閻敖游涌水而遁。楚王殺閻敖。閻氏之族怨王。至是,約巴人伐楚,願爲內應。巴兵伐楚,楚王親將迎之,大戰於津。不隄防閻族數百人,假作楚軍,混入陣中,竟來跟尋楚王。楚軍大亂,巴兵乘之,遂大敗楚。楚王面頰中箭而奔。巴君不敢追逐,收兵回國,閻氏之族從之,遂為巴人。楚王回至方城,夜叩城門。鬻拳在門內問曰:「君得勝乎?」 楚王曰:「敗矣!」 鬻拳曰:「自先王以來,楚兵戰無不勝。巴,小國也,王自將而見敗,寧不爲人笑乎? 今黃不朝楚,若伐黃而勝,猶可自解。」 遂閉門不納。楚王憤然謂軍士曰:「此行再不勝,寡人不歸矣!」 乃移兵伐黃。王親鼓,士卒死戰,敗黃師於踖陵。是夜,宿於營中,夢息侯怒氣勃勃而前曰:「孤何罪而見殺? 又占吾疆土,淫吾妻室,吾已請於上帝矣!」 乃以手批楚王之頰。楚王大叫一聲。醒來箭瘡迸裂,血流不止。急傳令回軍,至於湫地,夜半而薨。鬻拳迎喪歸葬。長子熊囏嗣立。鬻拳曰:「吾犯王二次,縱王不加誅,吾敢偷生乎?吾將從王於地下!」 乃謂家人曰:「我死,必葬我於絰皇,使子孫知我守門也。」 遂自剄而死。熊囏憐之,使其子孫,世爲大閽。

 

閬 : 솟을대문 랑.  솟을대문. 문이 높다. 그 모양. 넓고 밝다. 해자(垓子).      踖 : 밟을 적. 밟다. 짓밟다. 

 

 

주 이왕은 재위 5년만에 붕(崩)하고 그 아들 랑(閬)이 즉위하였는데 바로 혜왕(惠王)이다.  혜왕 2년, 초문왕 웅자는 방탕에 빠져 전쟁을 즐겼다.  전 해에 파(巴)나라의 군주와 함께 신(申)나라를 쳤는데 그때 파나라 군사를 어지럽게 한 적이 있었다. 파의 군주가 노하여 초나라 땅 나처(那處)를 급습하여 이겼다.  수비를 하던 장수 염오(閻敖)는 용수(涌水)를 헤엄쳐 도망쳤고 초왕은 그 일로 염오를 죽이자 염씨의 종족은 초왕에게 원한을 품었다.  이에 이르러 파나라 사람과 초나라를 치기로 약속하고 안에서 내응하기를 원했다. 파나라의 군대가 초나라를 치자 초왕이 친히 맞이하여 진(津)에서 크게 싸웠다. 그러나 염씨 종족 수벡명을 막지 못했는데 초나라 병사로 위장하여 진중에 섞여 들어가 진중을 두루 돌아다니며 초왕을 찾았다. 초나라 군영이 크게 어지러워졌는데 파나라 군대가 그 틈을 타서 마침내 초군을 크게 무너뜨렸다.  초왕은 뺨에 화살을 맞고 도주했으나 파나라 군사들은 감히 쫒지 못하고 병사들을 거두어 돌아갔는데 염씨 종족이 그들을 따라가 파나라 사람이 되었다. 

초왕이 도성으로 돌아가 성문을 두드리자 육권이 성문 안에서 물었다. "주군께서 승리하셨습니까?"

초왕이 말했다. "졌소!"

육권이 말했다. "선왕이래 초나라 군대는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습니다. 파는 작은 나라인데 왕께서 스스로 출전하셔서 패배하셨으니 어찌 남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황(黃)나라가 초나라에 입조하지 않고 있는데, 만약 황나라를 쳐서 승리하신다면 스스로 비웃음을 면할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초왕이 분개하며 병사들에게 말했다. "이번에 가서 이기지 못하면 과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리하여 병력을 이동하여 황나라를 쳤다. 왕이 친히 복을 치자 사졸들이 죽기로 싸워 황나라 군대를 적릉(踖陵)에서 쳐부수었다. 

이날 밤 군영 안에서 묵었는데 꿈에 식후(息侯)가 노기충천하여 앞으로 와서 말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죽였느냐? 또 내 강토를 점령하고 내 아내를 더럽혀 내가 이미 상제께 너의 목숨을 청하였다."

그리고는 손으로 초왕의 뺨을 쳤다. 초왕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잠에서 깨었는데 화살 맞은 상처가 모두 터져 피가 멈추지 않았다. 급히 명을 내려 회군하다가 추(湫)라는 곳에 도착하여 한밤중에 죽었다.  육권이 시신을 맞이하여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

큰 아들 웅간(熊囏)이 대를 이었다. 

육권이 말했다. "나는 두번이나 왕을 거역했다. 왕이 죽음을 내리지 않더라도 내가 감히 목숨을 부지하겠는가?  내가 마땅히 지하에서라도 왕을 따르리라!"

그리하여 가족들에게 말했다. "내가 죽으면 반드시 나를 질황(絰皇 : 초문왕의 능침 앞의 뜰)에 묻어, 자손들이 내가 도성의 성문을 지켰던 자였음을 알게 하라."

마침내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웅간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의 자손들로 하여금 대를 이어 도성의 성문을 지키게 하였다.

 

 

 

先儒左氏稱鬻拳爲愛君,史官有詩駁之,曰:

諫主如何敢用兵?

閉門不納亦堪驚。

若將此事稱忠愛,

亂賊紛紛盡借名。

 

 

옛 선비 좌씨(左氏 : 左丘明)는 육권이 군주를 사랑했다고 칭찬하였으나 사관이 시를 지어 그를 반박하였다.

 

어찌 주제넘게 군주에게 용병을 간하였는가?

성문을 닫고 군왕을 들이지 않은 것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만약 이 일을 충성과 사랑이라고 칭찬한다면,

난신적자들이 어지러이 모두 그 이름을 구실삼을 것이다. 

 

 

 

鄭厲公聞楚文王凶信,大喜曰:「吾無憂矣!」 叔詹進曰:「臣聞『依人者危,臣人者辱。』 今立國於齊楚之間,不辱即危,非長計也。先君桓武及莊,三世爲王朝卿士,是以冠冕列國,征服諸侯。今新王嗣統,聞虢晉二國朝王,王爲之饗醴命宥,又賜玉五瑴,馬三匹。君不若朝貢於周,若賴王之寵,以修先世卿士之業,雖有大國,不足畏也。」 厲公曰:「善。」乃遣大夫師叔如周請朝。師叔回報:「周室大亂。」 厲公問:「亂形如何?」 對曰:「昔周莊王嬖妾姚姬,謂之王姚,生子頹,莊王愛之,使大夫蔿國爲之師傅。子頹性好牛,嘗養牛數百,親自餵養,飼以五穀,被以文繡,謂之『文獸』。凡有出入,僕從皆乘牛而行,踐踏無忌。又陰結大夫蔿國、邊伯、子禽、祝跪、詹父,往來甚密。釐王之世,未嘗禁止。

今新王即位,子頹恃在叔行,驕橫益甚。新王惡之,乃裁抑其黨,奪子禽、祝跪、詹父之田。新王又因築苑囿於宮側,蒍國有圃,邊伯有室,皆近王宮,王俱取之,以廣其囿。又膳夫石速進膳不精,王怒,革其祿,石速亦憾王。故五大夫同石速作亂,奉子頹爲君以攻王。賴周公忌父同召伯廖等死力拒敵,眾人不能取勝,乃出奔於蘇。先周武王時,蘇忿生爲王司寇有功,謂之蘇公,授以南陽之田爲采地。忿生死,其子孫爲狄所制,乃叛王而事狄,又不繳還采地於周。桓王八年,乃以蘇子之田,畀我先君莊公,易我近周之田。於是蘇子與周嫌隙益深。衛侯朔惡周之立黔牟,亦有夙怨,蘇子因奉子頹奔衛,同衛侯帥師伐王城。周公忌父戰敗,同召伯廖等奉王出奔於鄢。五大夫等尊子頹爲王,人心不服。君若興兵納王,此萬世之功也。」

 

瑴 : 쌍옥 각(곡). 珏.      蔿 : 애기풀 위. 애기풀. 고을이름. 姓. 떠들다. 변화하다. 잘못되다.  餵 : 먹일 위/주릴 뇌.  廖 : 공허할 료/성 료.

繳 : 주살의 줄 작/감길 교/다툴 규/깃의 심 핵.  [작(격)]주살끈, 生絲. [교] 얽히다. 바치다. 되돌려 주다. 치르다. 행전(行纏)

 

 

정 여공이 초문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내 근심거리가 없어졌구나!"

숙첨이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 '남에게 의지하면 위태로워지며, 남의 신하가 되면 욕을 당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제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욕을 당하지 않으면 위태로우니 장기적인 계책이 아닙니다. 선군이신 환공(桓公)과 무공(武公)과 장공(莊公)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주 왕실의 경사가 되었으며 이로써 당당하게 열국을 대하시며 제후들을 쳐서 복종시키셨습니다. 지금 새로운 왕이 왕통을 이어 괵나라와 진(晉) 두나라에서 입조하였는데 왕은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옥 다섯 쌍과 말 세필씩을 하사하셨다고 합니다. 주군께서는 주 왕실에 입조하여 조공을 바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만약 주군께서 왕의 총애를 받아 선군시대에 누렸던 경사의 일을 맡아 행하신다면 대국의 위협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여공이 말했다. "좋소."

그리하여 대부 사숙(師叔)을 주나라에 보내 조현(朝見)을 청하게 하였다. 

사숙이 돌아와 복명했다. "주왕실에 대란이 일어났습니다."

여공이 물었다. "난이 일어났다니 무슨 말이오?"

사숙이 대답했다. "옛날 주 장왕은 요희(姚姬)라는 첩을 총애하여 왕희(王姚)라고 하였는데 아들 퇴(頹)를 낳았습니다. 장왕이 퇴를 사랑하여 대부 위국(蔿國)을 그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왕자 퇴는 성품이 소를 좋아하여 항상 소 수백 마리를 기르면서 친히 먹이를 주어 오곡을 먹이고, 아름답게 수놓은 비단 옷을 입혀 '문수(文獸)'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출입할 때에는 하인들이 따랐는데 모두 소를 타고 다니면서 함부로 경작지를 밟고 다녔습니다. 또 은밀히 대부 위국, 변백, 자금, 축궤, 첨보등과 결탁하여 매우 긴밀하게 왕래하였습니다. 

이왕의 생존시에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새로운 왕이 즉위하자 왕자 퇴는 숙부의 항렬에 있음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함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왕이 그를 싫어하여 그 무리들을 억제하려고 자금, 축궤, 첨보의 전답을 빼앗았습니다.  또 신왕은 궁옆에 원유를 지으면서 위국의 채마밭, 변백의 집 등, 왕궁에 가까이 있는 것들을 모두 왕이 취득하여 원유를 넓혔습니다.

또 요리사인 석속(石速)이 바친 요리가 정성스럽지 못해 왕이 노하여 그 직책을 거두자 석속도 왕에게 한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섯 명의 대부와 석속이 함께 난을 일으켜 공자 퇴를 받들어 군왕으로 삼으려고 왕을 공격했습니다. 주공 기보와 소백 료등이 죽을 힘을 다해 막은 덕분에 그 사람들은 승리하지 못하자 소(蘇)나라로 도망쳤습니다. 앞서 주 무왕시절에 소분생(蘇忿生)은 왕실의 사구(司寇)의 직을 맡았었는데, 공을 세워 소공이 되어 남양(南陽)의 땅을 봉읍으로 받았습니다. 소분생이 죽자 그 자손들은 적(狄)에게 제압당하여 왕실에 반기를 들고 적을 섬기면서도 주나라에 봉읍을 되돌려주지 않았습니다.  환왕 8년, 소군의 땅을 우리 선군이신 장공에게 주고 주나라 땅에 가까이 있는 우리의 땅과 바꿨습니다. 이리하여 소군은 주왕실과 틈이 더욱 벌어졌습니다.  위후 삭(朔)은 주왕실이 검모(黔牟)를 군주로 세운 것을 미워하여 또한 일찍부터 원한을 품어왔었는데, 소군이 왕자 퇴를 받들어 위나라로 도주한 후 위후와 함께 군대를 통솔하여 왕성을 쳤습니다. 주공 기보가 싸웠으나 패배하여 소백 료등과 함께 왕을 받들어 언(鄢)으로 망명했습니다. 다섯명의 대부들은 왕자 퇴를 왕으로 삼았으나 인심이 복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주군께서 군사를 일으켜 왕을 다시 복귀시키신다면 이 일은 만세의 공이 될 것입니다."           

 

 

 

 

厲公曰:「善。雖然,子頹懦弱,所恃者衛燕之眾耳,五大夫無能爲也。寡人再使人以理諭之,若悔禍反正,免動干戈,豈不美哉?」 一面使人如鄢迎王,暫幸櫟邑。因厲公向居櫟十七年,宮室齊整故也。一面使人致書於王子頹。

書曰:

突聞以臣犯君,謂之不忠;以弟奸兄,謂之不順。不忠不順,天殃及之!王子誤聽奸臣之計,放逐其君,若能悔禍之延,奉迎天子,束身歸罪,不失富貴。不然,退處一隅,比於藩服,猶可謝天下之口。惟王子速圖之!

 

子頹得書,猶豫未決。五大夫曰:「騎虎者勢不能復下。豈有尊居萬乘,而復退居臣位者?此鄭伯欺人之語,不可聽之。」頹遂逐出鄭使。鄭厲公乃朝王於櫟,遂奉王襲入成周,取傳國寶器,復還櫟城。時惠王三年也。

 

 

여공이 말했다. "좋소, 그렇다 해도 왕자 퇴가 나약하여 믿는 것은 위나라와 연나라의 무리들 뿐이며 다섯 명의 대부들도 무능한 자들이오. 과인이 사람을 보내 이치로 그를 설득하게 하여, 반정을 일으킨 죄를 후회한다면 전쟁을 면하게 될 것이니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소?"

그리하여 한편으로 사람을 언(鄢)으로 보내 왕을 맞이하여 잠시 역읍(櫟邑)으로 가서 머물게 하였다. 역읍은 여공이 17년동안 지내던 곳이라 궁실이 모두 잘 정돈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 사람을 왕자 퇴에게 보내 서찰을 전하게 하였다. 

서찰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가 듣건대 신하가 되어 군왕을 범하는 것은 불충이라 하고 동생이 되어 형을 범하는 것은 불순하다고 하였습니다. 불충하고 불순한 자에게는 하늘의 재앙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왕자께서는 간신들의 음모를 잘못 받아들이시고 군왕을 내쫒았습니다. 만약 난을 일으킨 일을 후회하고 천자를 맞이하여 스스로 몸을 묶고 죄를 청한다면 부귀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물러나 깊숙한 곳에서 살면서 번복을 입고 오히려 천하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왕자의 빠른 결단을 바랄 뿐입니다."

 

왕자 퇴가 서찰을 받고 미처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다섯 대부가 말했다. "범의 등에 올라 탄 기세라 내릴 수 없습니다. 어찌 만승 천자의 자리에 계시다가 다시 신하의 자리로 물러나겠습니까?  이것은 정백이 사람을 업신여기는 말이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왕자 퇴는 마침내 정나라의 사자를 쫒아내버렸다.  정여공은 역읍에 있는 왕을 조현하고 마침내 왕을 받들어 주나라 도성을 기습하여 입성한 다음 국보로 전해져 내려온 기물들을 취하여 역성으로 돌아갔다.  때는 혜왕 3년이었다. 

 

 

 

  

是冬,鄭厲公遣人約會西虢公,同起義兵納王。虢公許之。惠王四年之春,鄭虢二君,會兵於弭。夏四月,同伐王城。鄭厲公親率兵攻南門,虢公率兵攻北門。蔿國忙叩宮門,來見子頹。子頹因飼牛未畢,不即相見。蔿國曰:「事急矣!」 乃假傳子頹之命,使邊伯、子禽、祝跪、詹父登陴守禦。周人不順子頹,聞王至,歡聲如雷,爭開城門迎接。蔿國方草國書,謀遣人往衛求救。書未寫就,聞鐘鼓之聲,人報 「舊王已入城坐朝矣!」 蔿國自刎而死。祝跪子禽死於亂軍之中。邊伯詹父被周人綁縛獻功。子頹出奔西門,使石速押文牛爲前隊,牛體肥行遲,悉爲追兵所獲,與邊伯詹父一同斬首。

 

陴 : 성가퀴 비. 성가퀴. 돕다. 보비(補裨)함.

 

 

그해 겨울, 정 여공은 사람을 보내 서괵공(西虢公)에게 함께 의병을 일으켜 왕을 복귀시키자고 제의하였는데 괵공이 승락했다. 

혜왕 4년 봄, 정나라와 괵의 두 군주는 미(弭)에서 병사들을 집결시켰다. 여름 4월이 되자 함께 왕성을 쳤는데 정 여공은 친히 병사들을 거느리고 남문을 쳤고, 괵공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북문을 쳤다. 위국은 당황하여 궁문을 두드려 왕자 퇴를 만나고자 했으나 퇴는 소 먹이는 일이 끝나지 않아 바로 만날 수가 없었다. 

위국은 "일이 급하다." 하고는 왕자 퇴의 이름으로 명을 내려 변백, 자금, 축궤, 첨보들과 성가퀴에 올라 방어했다. 

주나라 사람들은 왕자 퇴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왕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우레같은 환성을 지르며 다투어 성문을 열고 영접했다. 위국은 국서를 작성하여 이나라에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하려고 하였다. 

서찰을 미처 다 쓰지도 못했는데 종소리와 북소리가 들리더니 병사가 와서 보고했다.

"옛 왕이 이미 성에 들어와 조정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위국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축궤와 자금은 난군 속에서 죽고 변백과 첨보는 주나라 사람에 의해 꽁꽁 묶여 바쳐졌다.  왕자 퇴는 서문으로 달려 나가면서, 석속으로 하여금 비단 옷을 입힌 소를 앞세워 전대를 삼았으나 소가 너무 살이 쪄서 몸이 둔해 추격병에 의해 모두 잡혀 변백, 첨보와 한꺼번에 참수형에 처해졌다.      

 

 

 

髯翁有詩嘆子頹之愚云:

挾寵橫行意未休,

私交乘舋起奸謀。

一年南面成何事?

只合關門去飼牛。

 

又一詩說齊桓公旣稱盟主,合倡義納王,不應讓之鄭虢也。詩云:

天子蒙塵九廟羞,

紛紛鄭虢效忠謀。

如何仲父無遺策,

卻讓當時第一籌?

 

舋 : 틈 흔. 틈. 움직이다.

 

 

염옹이 왕자 퇴의 어리석음을 시를 지어 탄식했다.

 

황제의 총애를 믿고 횡행을 그치지 않았고,

사사로이 사귀며 틈을 타 역모를 일으켰도다.

일 년동안 황제가 되어 무슨 일을 하였던가?

단지 관문을 나가 소를 먹였를 뿐이로다. 

 

또 하나의 시를 지어 제환공이 이미 맹주를 칭하였으면 마땅히 의를 내세워 왕을 복귀시켜야 했음에도, 그에 부응하여 행하지 않고 정나라와 괵나라에 양보한 일을 논했다. 

 

천자가 도성을 떠나 몽진한 일은 수치스러운 일인데,

정나라와 괵나라의 군주가 분분히 충성을 다해 꾀를 내었도다.

어찌하여 관중은 계책을 내지 않고,

오히려 당대의 제일 공을 양보하였던가?     

 

 

 

惠王復位,賞鄭虎牢以東之地,及后之鞶鑒。賞西虢公以酒泉之邑,及酒爵數器。二君謝恩而歸。鄭厲公於路得疾,歸國而薨。群臣奉世子捷即位,是爲文公。

  

周惠王五年,陳宣公疑公子禦寇謀叛,殺之。公子完,字敬仲,乃厲公之子,與禦寇相善,懼誅奔齊,齊桓公拜爲工正。一日,桓公就敬仲家飮酒甚樂。天色已晚,索燭盡歡。敬仲辭曰:「臣止卜晝,未卜夜,不敢繼以燭也。」 桓公曰:「敬仲有禮哉!」 贊嘆而去。桓公以敬仲爲賢,使食於田,是爲田氏之祖。是年魯莊公爲圖婚之事,會齊大夫高傒於防地。

卻說魯夫人文姜,自齊襄公變後,日夜哀痛想憶,遂得嗽疾。內侍進莒醫察脈。文姜久曠之後,慾心難制,遂留莒醫飮食,與之私通。後莒醫回國,文姜託言就醫,兩次如莒,館於莒醫之家。莒醫復薦人以自代,文姜老而愈淫,然終以不及襄公爲恨。周惠王四年秋七月,文姜病愈劇,遂薨於魯之別寢。

 

鞶 : 큰띠 반. 큰 띠. 말의 뱃대끈. 작은 주머니.         后之鞶鑒 : 군후가 사용하는 거울이 달린 띠.    (男鞶革 女鞶絲 <禮記>) 

 

 

혜왕이 복위한 후, 정백에게 상으로 호뢰(虎牢)의 동쪽 땅과 군후가 쓰는 거울이 달린 띠를 주었고, 서괵공에게는 주천읍(酒泉邑)과 술잔과 여러 개의 제기를 주었다.  두 군주가 사례하고 돌아갔다. 

정여공은 귀국하는 도중에 병을 얻어 귀국 후 죽었다.  신하들이 세자 첩(捷)을 받들어 즉위하게 하였는데 바로 문공(文公)이다.

 

주혜왕 5년, 진선공(陳宣公)은 공자 어구(禦寇)가 모반한다고 의심하여 죽였다. 공자 완(完)은 자가 경중(敬仲)으로 여공(厲公)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구와 친했으므로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 제나라로 도주했는데 제환공이 그를 공정(工正)으로 삼아 장인(匠人)들과 그들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하루는 환공이 경중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며 매우 즐거워 하였는데, 날이 어두워지자 촛불을 켜고 계속 즐기려고 하였다. 

경중이 사양하며 말했다. "신은 다만 낮에만 주군을 모실 뿐이며 밤에는 모시지 못합니다. 감히 불을 밝혀 계속 모실 수 없습니다."

환공은, "경중은 예의가 있구나!" 라고 찬탄하며 돌아갔다.  환공은 경중을 현인(賢人)으로 여기고 전(田) 땅을 식읍으로 하사했으며 이로써 경중은 전씨(田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 해에 노장공은 혼사를 도모하여 제나라 대부 고혜(高傒)를 방(防) 땅에서 만났다. 

 

한편 노부인 문강(文姜)은 제양공이 변을 당해 죽은 후 밤낮으로 애통해 하며 상념에 빠졌다가 마침내 기침병(咳嗽 : 喘息[천식])에 걸렸다. 내시가 거(莒)나라에서 온 의원을 추천하여 맥을 진찰하게 하였다. 문강은 오랫동안 빈방을 지켜온 후라 정욕을 억제하기 어려워 거나라  의원을 궁에 머무르게 하더니 그와 정을 통하고 말았다. 후에 거나라 의원이 귀국하자 문강은 의원에게 간다는 핑계로 두차례나 거나라에 가서 의원의 집에서 묵었다. 거의원이 다시 사람을 추천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였는데 문강은 늙어가면서 더욱 음욕이 넘쳤으나 끝내 어떤 사람도 양공에 미치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주혜왕 4년 추 7월, 문강의 병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노나라의 별궁에서 죽었다.

 

 

 

 

臨終謂莊公曰:「齊女今長成十八歲矣。汝當速娶,以正六宮之位。萬勿拘終喪之制,使我九泉之下,懸念不了。」 又曰:「齊方圖伯,汝謹事之,勿替世好。」 言訖而逝。莊公喪葬如常禮。遵依遺命,其年便欲議婚。大夫曹劌曰:「大喪在殯,未可驟也。請俟三年喪畢行之。」 莊公曰:「吾母命我矣。乘凶則驟,終喪則遲,酌其中可也。」 遂以期年之後,與高傒申訂前約,請自如齊,行納幣之禮。齊桓公亦以魯喪未終,請緩其期。直至惠王七年,其議始定,以秋爲吉。時莊公在位二十四年,年已三十有七歲矣。意欲取悅齊女,凡事極其奢侈。又念父桓公薨於齊國,今復娶齊女,心終不安,乃重建桓宮,丹其楹,刻其桷,欲以媚亡者之靈。大夫御孫切諫,不聽。是夏,莊公如齊親迎。至秋八月,姜氏至魯,立爲夫人,是爲哀姜。大夫宗婦,行見小君之禮,一概用幣。御孫私嘆曰:「男贄大者玉帛,小者禽鳥,以章物采。女贄不過榛栗棗脩,以告虔也。今男女同贄,是無別也。男女之別,國之大節,而由夫人亂之,其不終乎?」 自姜氏歸魯後,齊魯之好愈固矣。齊桓公復同魯莊公合兵伐徐,伐戎,徐戎俱臣服於齊。鄭文公見齊勢愈大,恐其侵伐,遂遺使請盟。

 

采 : 벼슬, 관직, 일, 長官. 폐백.

 

 

문강은 죽음에 임박하자 장공에게 말했다. "제나라 여인이 이제 장성하여 18살이 되었다. 너는 빨리 그녀를 맞아들여 육궁을 바로 잡아야 한다.  내가 죽더라도 결코 삼년상에 구애받지 말고  내가 구천에서라도 걱정하지 않도록 해라."

또 말했다. "제나라는 지금 패자의 업을 도모하고 있으니 너는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대를 이어 우호관계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말을 마치고는 세상을 떠났다.

장공은 통상의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르고 유언에 따라 그해에 혼사를 치르려고 혼사를 논의하게 했다. 

대부 조귀가 말했다. "모친의 대상 중에 서둘러 행하실 수 없습니다. 3년상을 마치시기를 기다리십시오." 

장공이 말했다. "내 모친이 나에게 명하신 일이오. 상중에 하면 빠르고 상을 마친 후에 하면 늦으니 그 중간이 좋겠소."

그리하여 1주년으로 상을 마친 후, 제나라 대부 고혜와 더불어 새로이 날을 정해 예전의 혼약대로 스스로 제나라로 가서 납폐지례를 행하고 신부를 맞이하기로 하였다.  제환공도 노나라가 상중임을 들어 혼기를 늦추자고 했다. 

주 혜왕 7년이 되자 혼사를 논의한 끝에 비로소 그해 가을이 길하다고 하여 혼사가 정해졌다. 그때는 장공이 재위 24년이며 나이가 이미 37세나 되었다. 제나라 여인을 맞이하는 것을 기뻐하여 모든 일에 그 사치가 극에 달했다. 

또 부친 환공이 제나라에서 죽은 일을 생각하고 지금 또다시 제나라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끝내 불안하여 환궁(桓宮)을 다시 세우면서 기둥을 붉게 칠하고 서까래에 조각으로 장식하여 돌아가신 부친의 영혼을 달랬다.

대부 어손(御孫)이 간곡히 간절하게 불가함을 간했으나 불청하고 그해 여름 제나라에 가서 친영하였다. 가을 8월에 노나라로 돌아와 부인으로 삼으니 바로 애강(哀姜)이다.  대부의 종부(宗婦)들은 그녀에게 가서 소군(小君)에게 조현(朝見)하는 예를 취하고 모두 예물을 바쳤다.

어손이 홀로 탄식했다. "남자의 폐백은 큰 것이 옥과 비단이며 작은 것은 가축이나 날짐승으로, 예물은 관직의 높고 낮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자의 폐백은 개암, 밤, 대추, 말린 고기로 경의를 보이는 것이다. 지금 남녀가 폐백이 같으니 이것은 분별이 없는 것이다. 남녀간에 분별을 두는 것은 나라의 큰 법도인데 부인으로 인하여 어지럽혀졌으니 어찌 종말을 맞지 않겠는가?"

강씨가 노나라에 들어온 때부터 제나라와 노나라의 우호관계는 더욱 확고해졌다. 제환공은 다시 노장공과 연합하여 서(徐)나라와 융(戎)나라을 첬는데 서융 두 나라는 모두 굴복하여 제나라에 신하가 되었다.

정문공은 제나라의 세력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고 제나라가 침입할까 두려워 마침내 사자를 보내 맹약을 청했다.        

 

 

 

不知後事如何,且看下回分解。

 

 

뒷 일이 어찌 될지 모른다면 다음 회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