蜀道難
噫吁戱 아 !
危乎高哉! 아슬아슬하게 높구나!
蜀道之難難于上靑天! 촉도의 험난함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어렵구나
蠶叢及魚鳧 잠총과 어부같은 촉나라 왕들이
開國何茫然! 나라를 연 것이 얼마나 아득한가
爾來四萬八千歲 개국이래 사만팔천 년
始與秦塞通人煙 진나라에 이르러 변방과 인가가 통하였다네
西當太白有鳥道 서쪽으로 태백산과 통하여 험하고 좁은 조도가 있어
可以橫絶峨眉巓 아미산 꼭대기를 가로 지른다.
地崩山摧壯士死 땅이 무너지고 산이 꺾이고 장사들이 죽어서야
然后天梯石棧方鉤連 구름다리와 돌길이 연이어 놓였다네
上有六龍回日之高標 산위에는 육룡이 해를 감싸는 모양의 꼭대기 표시가 있고
下有沖波逆折之回川 아래에는 물결이 굽이치며 거슬러 꺾어져 돌아가는 하천이 있다.
黃鶴之飛尙不得 황학이 날아도 이르지 못하고
猿猱欲度愁攀援 원숭이가 건너려 해도 근심스러워 나무가지를 휘어잡는다
靑泥何盤盤 청니령고개는 어찌 그리 돌아가나
百步九折縈岩巒 백걸음에 아홉번을 꺾어 바위봉우리를 돌았네.
捫參歷井仰脅息 참을 만지고 정을 지나 우러러 숨죽여
以手撫膺坐長嘆 손으로 가슴 쓸으며 앉아 탄식하나니
問君西游何時還 그대여 서쪽으로 떠나면 언제 돌아오나
畏途巉岩不可攀 두려운 길이로다. 깎아지른듯 험한 바위라 잡지도 못하겠구나
但見悲鳥號古木 새는 고목위에서 슬피울고 있는 모습을 볼 뿐
雄飛雌從繞林間 수컷 날면 암컷 따라 숲속을 헤맨다
又聞子規啼 또 자규새 울고
夜月愁空山 달은 산위에 수심에 어렸구나
蜀道之難難于上靑天 촉도의 험난함은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어렵구나
使人聽此凋朱顔 사람이 이를 들으면 얼굴색이 변하고
連峰去天不盈尺 연이은 봉우리들 하늘과의 거리가 한자도 못되고
枯松倒挂倚絶壁 마른 소나무 넘어져 절벽에 기대어 있네
飛湍瀑流爭喧豗 나는듯한 여울 사납게 흐르는 물결소리 세차고
冰崖轉石萬壑雷 얼음봉우리에서 돌 구르는 소리 우뢰같다
其險也如此! 그 험함이 이와 같도다
嗟爾遠道之人 아 ! 먼길 떠나는 이여
胡爲乎來哉? 어떻게 오시려오
劍閣崢嶸而崔嵬 검각산은 가파르고 높아서
一夫當關 한 남자가 관을 지키면
萬夫莫開 만명의 장정도 열지 못하리
所守或匪親 지키는 곳이 익숙치 못하면
化爲狼與豺 이리나 승냥이가 되리라
朝避猛虎 아침에 맹호를 피하면
夕避長蛇 저녁에는 큰 뱀을 피해야 하나니
磨牙吮血 이를 갈고 피를 빨아
殺人如麻 죽은 사람이 삼대같이 많다네
錦城雖雲樂 금성이 비록 즐거우나
不如早還家 일찍 집에 돌아감만 못하다네
蜀道之難難于上靑天 촉도의 험함은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험하다네
側身西望常咨嗟 몸돌려 서쪽하늘 바라보며 늘 탄식하였네.
噫 : 痛傷聲 느낄 희, 슬플 희, 恨聲, 嘆聲, 嘆息 한숨쉴 희, 飽食息배불러 씩은거릴 애, 噫氣트림할 애, 應答聲응답하는 소리 애.
沖 : 흔들릴 충, 화할 충, 깊을 충, 날아오를 충, 어릴 충, 沖沖垂飾貌드리운 모양 충, 沖沖聲也鑿氷聲어름끄는 소리 충, 물 솟을 [동]
猱 : 원숭이 노, 攀 : 이끌 반, 당길 반, 휘어잡을 반, 끌어잡을 반. 縈 : 가죽조각으로 찢어진 곳을 기울 영, 둘릴 영, 얽을 영, 굽을 영.
巒 : 산작고 뾰쪽할 만, 둥근 봉우리 만, 山紆回綿連돌아연한산 만. 捫 : 어루만질문, 더듬을 문.
巉 : 높을 참, 산깎아지른듯한 참. 豗 : 돼지흙뒤질 회, 맞부딛칠 회, 칠 회, 떠들썩할 회, 시끄러울 회,
崢 : 산높고험할 쟁. 嶸 : 산높을 횡,산높고가파른모양 횡. 崔 : 산우뚝한모양 최, 높고큰모양 최,
이백 <촉도난(蜀道難)>의 표현과 해석
서 성 *
1. 머리글
이백의 명편 <촉도난>(蜀道難)은 천고의 절창으로 역대로 널리 음송되었다. 동시에 그 내재된 우의(寓意)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았다.1) 자유롭고 분방한 상상에 전설과 속담 등을 결합하여 촉 지방으로 가는 길의 험난함을 표현한 <촉도난>은 대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놀랍고 기이하며 위대하고 웅장한 장관을 그려낸 점이 두드러진다. 봉우리와 계곡이 공간의 깊이를 드러내고 숲과 절벽이 까마득히 벌어지는 등, 기상이 드넓고 경계가 활달하여 어느 시인도 써내지 못한 시를 써냈다. 끊임없는 경탄과 강렬한 호환(呼喚)은 시의 기조를 이루며 사람을 놀라게 하고 격발시킨다. 이처럼 강렬하고 숭고하며 아름답고 기이한 시가 정작 그 제작의 본뜻이 무엇이냐는 점에 대해서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설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실 이 시는 명편답게 당대에 이미 전설적인 일화를 가지고 있다. 만당 때 맹계(孟棨)가 지은 ≪본사시≫(本事詩)에 따르면, 이백이 처음 장안에 들어갔을 때 하지장(賀知章)이 이 시를 보고 놀라며 이백을 ‘하늘에서 인간세계로 귀양 온 신선’이란 뜻에서 ‘적선’(謫仙)이라 불렀다고 한다.2)
그야말로 천재(天才)만이 쓸 수 있는 시라는 뜻일 것이다. 유사한 기록은 오대 시기에 왕정보(王定保)가 편찬한 ≪당척언≫(唐摭言)에도 나온다.3) 이러한 명편은 그 높은 이름만큼 시의 우의에 대해 당대부터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특히 1980년대에는 새로운 해석이 쏟아져 나왔으며, 지금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본고는 <촉도난>에 대한 해석을 이백이 지향한 표현주의적인 특징에 있다고 보고 접근하고자 한다. 표현주의적인 특징은 ‘표현성을 강하게 추구한다’는 뜻으로, 정감을 강하게 분출하는 성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고자 한다. 이백은 역대의 어느 작가보다 표현주의적 요소가 강하였으며, 설정된 주제를 깊이 있게 천착한 시인이다. 이러한 성향은 특히 악부제에서 두드러졌고, <촉도난>에서도 충분히 반영되었다.
본고는 먼저 <촉도난>의 구성을 살펴보고 역대의 논의를 검토한 후, <촉도난>의 창작 전통, 이백이 운용한 비흥(比興)의 방식, 이백의 표현주의적인 특징 등 세 가지 방면에서 논의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이백의 대표작인 <촉도난>에 대한 이해는 물론 이백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데 일정한 의의가 있다고 본다.
* 열린사이버大 中國비즈니스學科
1) 郁賢皓는 <八世記以來李白研究的十大熱點>(≪文史知識≫, 중화서국, 2001-10)이란 글에서 <촉도난>의 우의와 제작 연대를 이백 연구에 있어 가장 논란이 되는 10대 문제 가운데 하나로 지목하였다.
2) 孟棨, ≪本事詩≫<高逸>, ≪歷代詩話續編≫(中華書局, 1983): “李太白初自蜀至京師, 舍於逆旅. 賀監知章聞其名, 首訪之. 既奇其姿, 復請所爲文. 出‘蜀道難’以示之. 讀未竟, 稱歎者數四, 號爲‘謫仙’, 解金龜换酒, 與傾盡醉. 期不間日, 由是稱譽光赫.” 맹계는 875년에 진
사에 급제하였다.
3) 王定保, ≪唐摭言≫(上海古籍出版社, 1978), 권7.
2. <촉도난>의 구성
작품은 모든 논의의 출발이 되므로 정치적 우의나 작가의 의도 등을 배제하고<촉도난>을 구성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촉도난>은 압운과 평측이 자유로운 잡언체의 가행체 고시이다. 당대의 가행체 고시는 시적 규제가 가장 적다는 의미에서 현대적 개념의 자유시라 할 수 있다. 고시는 자유로운 발상과 기세가 가장 잘 담기는 형식으로, 이백의 재능이 가장 잘 발휘된 형식이다.
길이가 중편이어서 일정한 서사적 내용도 포함시킬 수 있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시를 보자.
01 噫吁歔! 아아! 어허!
02 危乎高哉! 아슬하여라! 높기도 높아라!
03 蜀道之難難於上靑天. 촉도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려워
04 蠶叢及魚鳧, 잠총과 어부 두 왕이
05 開國何茫然! 나라를 연 지 얼마나 오래되었던가!
06 爾來四萬八千歲, 그로부터 사만 팔천 년
07 不與秦塞通人煙. 진 지방으로 오고 간 사람이 없었더라
08 西當太白有鳥道, 장안 서쪽 태백산에 있는 조도(鳥道)가
09 可以橫絶峨眉巓. 길게 아미산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어라
10 地崩山摧壯士死, 땅이 무너지고 산이 부서지며 다섯 장사가 죽고
11 然後天梯石棧相鉤連. 그런 다음에 사다리와 잔도로 연결되었어라
12 上有六龍回日之高標, 위로는 태양을 실은 육룡이 넘지 못하는 봉우리가 있고
13 下有衝波逆折之回川. 아래로는 파도에 부딪치며 역류하는 강이 있어
14 黃鶴之飛尙不得過, 황곡이 날아가려 해도 넘지 못하고
15 猿猱欲度愁攀緣. 원숭이가 건너려 해도 두려워 팔을 뻗지 못해라
16 靑泥何盤盤, 청니령은 얼마나 구불구불한가
17 百步九折縈巖巒. 백 걸음에 아홉 번은 꺾어지며 봉우리를 휘감고
18 捫參歷井仰脇息, 손 뻗으면 삼성과 정성이 잡힐 듯해 우러러 숨을 멈추니
19 以手撫膺坐長歎.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저앉아 길게 탄식하여라
20 問君西遊何時還? 그대에게 묻노니, 서쪽으로 놀러가 언제 돌아오려는가?
21 畏途巉巖不可攀. 무서워라, 가파르고 험한 길 오르기 어려워라
22 但見悲鳥號古木, 다만 보이는 건 고목에서 호곡하는 새들뿐
23 雄飛雌從繞林間. 암컷이 날고 수컷이 따르며 숲 사이를 휘돌고
24 又聞子規啼, 게다가 두견새가 돌아가자고 울어
25 夜月愁空山. 달밤에 빈산 가득 슬픈 소리 메아리치는구나
26 蜀道之難難於上靑天, 촉도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려워
27 使人聽此凋朱顔. 이를 들은 사람은 붉은 얼굴이 시름에 바로 늙어버리네
28 連峰去天不盈尺, 늘어선 봉우리는 하늘까지 겨우 한 척 거리
29 枯松倒挂倚絶壁. 마른 소나무는 절벽에 거꾸로 매달려 있고
30 飛湍瀑流爭喧豗, 나르는 여울과 폭포가 다투어 굉음을 내고
31 砯崖轉石萬壑雷. 물이 절벽을 치고 돌을 굴려 온 계곡이 우레소리라
32 其險也如此, 그 험난함이 이와 같은데
33 嗟爾遠道之人胡爲乎來哉! 아아! 멀리 간 그대 왜 그곳에 갔는가!
34 劍閣崢嶸而崔嵬: 더구나 검각은 삐쭉빼쭉 드높고 험해
35 一夫當關, 한 사람이 관문을 막고 있으면
36 萬夫莫開. 만 명의 병사도 열지 못하니
37 所守或非親, 지키는 자가 측근이 아니라면
38 化爲狼與豺. 이리나 승냥이로 변한다네
39 朝避猛虎, 아침에는 맹호를 피하고
40 夕避長蛇, 저녁에는 뱀을 피해야 한다네
41 磨牙吮血, 이빨을 갈고 피를 마시며
42 殺人如麻; 사람을 삼마 베듯 한다네
43 錦城雖云樂, 금관성이 비록 즐거운 곳이라 해도
44 不如早還家. 일찍 돌아옴만 못하여라
45 蜀道之難難於上靑天, 촉도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려워
46 側身西望長咨嗟! 몸 돌려 서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노라!
총 46구로 된 이 시를 읽었을 때 남는 가장 강력한 인상은 ‘촉도는 험난하다’ 는 제목 <촉도난> 자체의 의미이다. 시에서 “촉도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려워”(蜀道之難難於上靑天)가 3번 출현하여 자연스럽게 3장으로 분할되며, 동일한 영탄이 반복되면서 전체적으로 강한 통일성을 갖는다.
나련첨(羅聯添) 선생의 분단을 참고하여 전체 구성을 보이면 아래와 같다.4)
제1장 : 제01구∼제25구
제1절 : 제01구∼제11구
제2절 : 제12구∼제15구
제3절 : 제16구∼제19구
제4절 : 제20구∼제25구
제2장 : 제26구∼제44구
제5절 : 제26구∼제33구
제6절 : 제34구∼제42구
제7절 : 제43구∼제44구
제3장 : 제45구∼제46구
제8절 : 제45구∼제46구
이 시는 중편의 길이에 변화가 많으면서도 통일성을 갖춰 구성이 상당히 탁월하다.
각 장은 촉도의 험난함을 탄식하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동시에 각장의 말미에서 호소로 단락을 짓고 있어 세 장이 각각 강한 응집성을 갖는다.
예컨대 제1장에서는 “그대에게 묻노니, 서쪽으로 놀러가 언제 돌아오려는가?”(問君西遊何時還?)라 마무리하였고, 제2장에서는
“금관성이 비록 즐거운 곳이라 해도, 일찍 돌아옴만 못하다네”(錦城雖云樂, 不如早還家.)라 매듭지었고, 제3장에서는 “몸 돌려 서쪽을
바라보며 길게 탄식하노라!”(側身西望長咨嗟!)고 마감하였다.
그 어투도 제1장에서는 의문사로 강렬한 염려를 나타내었고, 제2장에서는 청유형으로 은근한 설득의 말투를 사용하였고, 제3장에서는 감탄문으로 안타까움을 나타내었다.
특히 전편은 촉도의 ‘험난함’(難)이 무엇인지 구체적이고 형상적으로 묘사한 것이 주조를 이룬다. 더구나 그 험난함은 갈수록 점층적으로 더해지도록 구성하여, 독자가 읽을수록 저도 모르게 높고 험악한 산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게 만들었다.
제1절은 신화와 전설을 동원하여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내는 어려움과 잔도를 엮는 일을 기술하였다.
제2절은 비록 길이 났어도 지세의 험준함을 황학과 원숭이로 과장하였다.
제3절은 행인이 지나가기 어려움을 청니령을 통해 제시하였다.
제4절은 호곡하는 새와 두견새의 울음으로 두려움을 일으켰다.
제5절은 풍광의 험준함과 폭포의 굉음으로 공포를 일으켰다.
제6절은 검각의 위험을 그렸다.
제7절과 제8절은 청유와 탄식으로 험난함을 연상시키며,촉으로 가는 행인이 조속히 돌아올 것을 권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을 보면 제6절까지 자연에서 시작하여 인사에 이르기까지 갈수록 가파라지는 촉도를 보이며 고조를 이루다가 말미의 2절에서 빠르게 매듭을 지어 그 충격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4) 羅聯添, <蜀道難寓意探討>, ≪唐代文學硏究≫(廣西師範大學出版社, 1994), 제5집.
3. 역대의 논의에 대한 검토
<촉도난>의 우의와 주제에 대해서는 역대로 많은 의견이 나왔으며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여기서는 당대 이래 오늘날까지 그 주요한 것을 든다.
첫 번째 의견은 만당 때 나온 것으로, 촉 지방에 간 방관(房琯)과 두보(杜甫)를 걱정하여 그들이 검남절도사 엄무(嚴武)의 공격을 받지 않고 일찍 돌아오기를 바랐다는 의견이다.
이 설은 만당 이작(李綽)의 ≪상서고실≫(尙書故實)에 처음 보인다.
“육창(陸暢)은 일찍이 위고(韋皐)를 위해 <촉도이>(蜀道易)를 지었는데 그 첫머리는 ‘촉으로 가는 길은 쉬워, 평지를 걷는 것보다 쉽다’라 했다.위고가 크게 기뻐하여 비단 팔백 필을 주었다.
…이백의 <촉도난>은 엄무를 탓한 것인데, 육창은 위고가 자신을 알아주었기 때문에 그 가사를 반대로 만들었다.”5)
5) 李綽, ≪尙書故實≫ : “陸暢字達夫, 常爲韋南康作蜀道易, 首句曰:”蜀道易, 易於履平地.“ 南康大喜, 贈羅八百疋.
… 蜀道難, 李白罪嚴武也. 暢感韋之遇, 遂反其詞焉.”
위고는 785년부터 검남절도사를 지내며 약 20년 동안 촉 지방을 안정시킨 인물로 905년에 죽으므로, 이 시기에 육창이 위고의 인정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육창은 곧 이백의 시를 반대로 패러디하여 위고의 치적으로 촉도가 태평하다는 뜻으로 나타내었다.
만당 시기에 활동안 범터(范攄) 역시 ≪운계우의≫(雲溪友議)에서 같은 의견을 내놓았으며,6) 북송 송기(宋祁)는 이 의견을 채용하여 ≪신당서≫의 <엄무전>과 <위고전>에 기록하였다.
북송 전역(錢易)의 ≪남부신서≫(南部新書)와 남송 섭몽득(葉夢得)의 ≪운어양추≫(韻語陽秋)에서도 같은 의견을 밝힌 것을 보면 그 영향력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설은 송대 심괄(沈括)이 처음 반론을 제기했다.7) 사실 엄무가 검남절도사로 임명된 것은 761년이며 현지에 도착한 것은 762년으로, 이백은 이해 11월에 당도(當涂)에서 죽었다. 더구나 결정적으로 <촉도난>이 실려 있는 ≪하악영령집≫(河嶽英靈集)은 은번(殷璠)이 753년에 편찬하였으므로 작품은 그 이전에 지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8) 또 육창의 <촉도이>는 ≪상서고실≫에만 인용되어 있을 뿐, 시의 전편이 없어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설령 이 시가 위고를 칭송했다고 하더라도, 그 때문에 <촉도난>이 반대로 엄무를 비판했다고 볼 수 없다.
두 번째 의견은 북송 시기에 나온 것으로, 천보 연간에 검남절도사로 있던 장구겸경(章仇兼瓊)에게 험난한 지형을 근거지로 하여 할거하지 말기를 풍자했다는 설이다. 이는 1068년 송민구(宋敏求)가 편집한 북송본 ≪이태백문집≫(李太白文集)에서 <촉도난>의 제목에 달린 주(注)에 “장구겸경을 풍자하다”(諷章仇兼瓊也)에서 처음 나왔다.9) 이 설은 심괄의 ≪몽계필담>과 홍매(洪邁)의 ≪용재속필≫(容齋續筆)에서 동의하고 있는 등 송대에 특히 유행하였다.10) 청대 증국번(曾國藩)은 ≪십팔가시초≫(十八家詩鈔)에서 제주(題注)의 여섯 글자는 이백이 단 것이라 주장하였다.11) 현대에서는 섭석초(聶石樵)는 이백이 장구겸경을 염려하여 지은 것으로 보았다.12)
이 설은 원대 소사빈(蕭士贇)이 처음 반론을 제기하였다.13) 천보 초기에는 천하가 안정되어 있고 장안의 사방 교외가 경계가 없을 정도로 태평했는데 무엇을 하려고 검각을 엄하게 지키겠느냐는 것이다.
현대의 첨영(詹鍈)은 ≪구당서≫<토번전>과 ≪신당서≫<양국충전>의 관련 대목에서 비록 장구겸경이 개원 말기 검남절도사로 촉에 진주했으나 발호의 흔적이 없다고 이 의견에 동조하였다.14) 더불어 북송본 이외에는 제주가 없으므로 이를 이백이 달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6) 范攄, ≪雲溪友議≫(古典文學出版社, 1957), 권上.
7) 沈括, ≪夢溪筆談≫(中華書局, 2009), 권4.
8) 殷璠, ≪河嶽英靈集≫(≪唐人選唐詩新編≫, 陝西人民敎育出版社, 1996), 권上.
9) 宋敏求⋅曾鞏 等編, ≪李太白文集≫(巴蜀書社, 1985), 권3.
10) 沈括, 앞의 책; 洪邁, ≪容齋隨筆≫(北京燕山出版社, 2008), 권6.
11) 曾國藩, ≪十八家詩鈔≫(河北人民出版社, 1996), 권10.
12) 聶石樵, <蜀道難本事新考>, ≪古代詩文論集≫(北京師範大學出版社, 1993)
13) 蕭士贇, ≪分類補注李太白詩≫(北京圖書館出版社, 2003), 권3.
세 번째는 원대에 나온 의견으로, 안사의 난 때 촉 지방으로 달아난 현종이 현지 군벌의 통제를 받지 않도록 일찍 귀경하기를 바랐다는 해석이다. 이는 원대 소사빈이 ≪분류보주이태백시≫(分類補注李太白詩)에서 처음 제기한 것으로, 이백이 안록산의 반란에 현종이 촉으로 몽진을 떠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지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청대 심덕잠(沈德潛)의 ≪당시별재집≫(唐詩別裁集)15)과 건륭제 칙찬 ≪당송시순≫(唐宋詩醇)에도 반영되었다.16) 특히 ≪당송시순≫은 제20행 ‘문군서유하시환’(問君西遊何時還)의 ‘군’(君)은 군주인 현종을 말하며, 제33행의 ‘원도지인’(遠道之人)은 현종의 수행원으로 보고, 시구를 일일이 지적하면서 현종의 일정과 대응시켰다.
청대 진항(陳沆)의 ≪시비흥전≫(詩比興箋)17)은 물론, 현대에 들어서도 서가서(徐嘉瑞), 고보영(高步瀛), 왕요(王瑤), 유평백(兪平伯) 등이 소사빈의 의견을 따르고 있어 이 설이 상당히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이 설에 대한 반론은 명대 호진형(胡震亨)이 ≪이시통≫(李詩通)에서 밝혔다.18) 현종이 촉으로 몽진을 떠난 때는 천보 말기(766년)인데, 하지장이 이 시를 칭송한 것은 천보 초기이기 때문에 연대가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본사시≫의 내용을 사실로 친다면 그 연대는 731년 전후가 되거나 하지장이 744년 귀향했으므로 그 이전으로 보아야 하겠지만, 이를 야사로 친다고 하더라도 이 시가 실린 ≪하악영령집≫이 753년에 편찬되었으므로 그 이전에 쓰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때문에 현종의 촉 지방 피난을 염려했다는 설은 성립되지 않는다.
14) 詹鍈, ≪李白詩文繫年≫(人民文學出版社, 1984), 권3.
15) 沈德潛, ≪唐詩別裁集≫(上海古籍出版社, 1979) 권6: “諸解紛紛, 蕭士贇謂祿山亂華, 天子幸蜀而作, 爲得其解. 臣子忠愛之辭, 不比
尋常穿鑿.”
16) 乾隆, ≪唐宋詩醇≫(春風文藝出版社, 1995), 권2.
17) 陳沆, ≪詩比興箋≫(上海古籍出版社, 1981), 권3.
18) 胡震亨, ≪李詩通≫(淸順治七年刊本), 권16.
네 번째 의견은 험난한 지형에 의지하여 할거하는 세력을 경계한 것으로 보았으며, 구체적인 때와 인물을 지적하지 않는 일반적인 상황을 비유한 것으로 보았다. 이 의견은 명대 호진형(胡震亨)이 ≪이시통≫과 ≪당음계첨≫(唐音癸簽)에서 제기하였다. 호진형은 이백의 시가 장재(張載)의 <검각명>(劍閣銘)의 뜻을 사용한 것에 주의하여 할거 세력이나 반역 세력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왕운희(王運熙)와 나련첨(羅聯添) 선생이 이 설을 채용하고 있다.19)
다섯 번째는 별다른 우의(寓意)가 없이 산수 풍광을 노래했다고 보는 의견이다. 청대 고염무(顧炎武)는 ≪일지록≫(日知錄)에서 당시 사람들이 성도의 즐거움을 말하지만 가는 길의 험난함은 모르기에 썼으며 별다른 우의는 없다고 하였다.20) 조익(趙翼) 역시 ≪구북시화≫(甌北詩話)에서 제목에 따라 쓰거나 경치를 보고 음영한 것이라고 보았으며,21) 장서언(張緖言) 역시 ≪임천수필≫(林泉隨筆)에서 악부시의 시제를 보고 썼다고 판단하였다.22) 현대의 번흥(樊興)도 중국 산천의 기험과 장려함을 노래했다고 보았다.23)
여섯 번째는 장안에서 촉 지방으로 가는 친구를 보내며 쓴 시라는 설이다. 이 설은 1955년 범녕(范寧)이 최초로 제기하였다.24) 그는 이백의 작품 <촉으로 가는 친구를 보내며>(送友人入蜀)와 <검각부>(劍閣賦)를 함께 고찰하면서 상호 유사성을 발견하고는 송별의 뜻으로 썼다고 하였다. 1957년 첨영(詹鍈)은 이 설을 계승하여 친구의 이름을 <검각부>의 주석에 나오는 왕염(王炎)이라고 보았으며, 세 작품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쓰였다고 하였다.25) 이 설이 나오자 양초연(梁超然), 구태원(瞿蛻園) 등 현대 학자 상당수가 채용하였다.26)
19) 王運熙, <讀李白的蜀道難>, ≪李白硏究≫(湖北敎育出版社, 2003); 羅聯添, <蜀道難寓意探討>, ≪唐代文學硏究≫(廣西師範大學
出版社, 1994), 제5집.
20) 顧炎武, ≪日知錄集釋≫(上海古籍出版社, 2006), 권26.
21) 趙翼, ≪甌北詩話≫(人民文學出版社, 1998), 권1.
22) 張緖言, ≪林泉隨筆≫, 瞿蛻園⋅朱金城, ≪李白集校注≫(上海古籍出版社, 1980) 권3에서 재인용.
23) 樊興, <蜀道難的寓意及寫作年代辨>, ≪李白硏究論文集≫(中華書局, 1964).
24) 范寧, <李白詩歌的現實性及其創作特徵>(≪文學遺産≫, 제72기, 1955).
25) 詹鍈, <李白蜀道難本事說>, ≪李白詩論叢≫(作家出版社, 1957).
26) 梁超然, <綜論李白蜀道難的作意問題>, ≪唐代文學論叢≫(陝西人民出版社, 1982), 제2기; 瞿蛻園⋅朱金城 앞의 책.
일곱 번째는 공업을 이루고 벼슬을 하는 것의 어려움을 비유하였다는 설이다.
이는 1982년 욱현호(郁賢皓)가 제기하였고 일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27) 주요한 근거는 중당의 요합(姚合)이 쓴 <급제하여 촉으로 돌아가는 이여를 보내며>(送李餘及第歸蜀)에서 찾았다. 여기에는 “이백이 촉 지방으로 가는 길이 어렵다고 한 것은, 이룬 바 없이 돌아감을 부끄러워 여긴 거라지. 그대는 지금 마음 홀가분히 가게 되었으니, 지나가는 곳에 어찌 위태로움 느끼리오!”(李白蜀道難, 羞爲無成歸. 子今稱意行, 所歷安覺危!)라는 구가 있는데, 중당시기에 이미<촉도난>에 대해 이루기 어려운 공업에 대한 비유로 읽었다는 것이다.
안기(安旗) 역시 이 시를 회재불우의 비애로 해석하면서 남조의 음갱(陰鏗)이 지은 <촉도난>에 “촉으로 가는 길이 이처럼 어려운데, 공명을 어찌 바라리오”(蜀道難如此, 功名詎可要.)라는 구를 들어, 원래 이 시가 공명을 이루기 어려움을 비유한 것이라고 보충하였다.28)
역대의 논의를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를 둘러싸고 전개하고 있다.
(가) 촉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 제3구, 제26구, 제45구와 함께 전편의 주조를 이룬다.
(나) 빨리 돌아오라 : 제20구, 제33수, 제44구로 반복적이고 강하게 호소한다.
(다) 험난한 지세를 이용하여 할거할 수 있다 : 제35구에서 제38구까지로 말미에서 강조하였다.
(라) 촉 지방은 즐거운 곳이다 : 제43구로 말미에서 삽입하였다.
역대로 <촉도난>에 대한 해석은 다양했으며 그 우의에 대해 시종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친구나 현종에 대한 염려에서 자신의 벼슬에 대한 걱정까지, 할거에 대한 경계부터 단순한 풍광의 묘사까지 그 해석의 편폭도 상당히 넓고 다양한 편이다. 이중 세 번째 설까지는 반론이 명확하고 합리적이어서 그 설이 성립되기 어렵다. 네 번째부터 일곱 번째까지는 청대 이후에 나온 것으로 현대학자들도 일부 채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27) 郁賢皓, <李白兩入長安及有關交遊考辨>, ≪李白叢考≫(陝西人民出版社, 1982).
28) 安旗, <蜀道難求是>, ≪唐代文學論叢≫(陝西人民出版社, 1982), 제2기.
4. <촉도난>의 창작 배경과 <촉국현>
<촉도난>은 전설, 역사, 지세, 동식물, 인문 등이 어우러져 한편의 부(賦)처럼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일정한 문학적 전통이 있다.
역대의 학자들이 제시한 바와 같이 구체적인 시구와 관련된 전고는 아래와 같다.
제04-07구 蠶叢及魚鳧, 開國何茫然! 爾來四萬八千歲, 不與秦塞通人煙. :
촉왕의 선조 이름은 잠총(蠶叢), 백관(柏灌), 어부(魚鳧), 포택(蒲澤), 개명(開明)이다. …개명에서 거슬러 올라 잠총까지 삼만 사천 년에 달한다. (揚雄, ≪蜀王本紀≫)29)
29) 揚雄, ≪蜀王本紀≫(≪壁經堂叢書≫): “蜀王之先名蠶叢、柏灌、魚鳧、蒲澤、開明. 是時人萌椎髻左衽, 不曉文字, 未有禮樂. 從開明已上至蠶叢, 積三萬四千歲.”
제10-11구 地崩山摧壯士死, 然後天梯石棧相鉤連. :
진 혜왕(秦惠王)이 촉왕이 색을 좋아하는 줄 알고서는 다섯 딸을 촉 왕에게 시집보내기로 허락하였다. 촉 왕은 다섯 역사를 보내 산을 깎고 길을 내어 맞이하였다. 돌아오는중 재동(梓潼)에서 큰 뱀이 동굴로 파고들어가고 있어 한 사람이 뱀 꼬리를 잡아당겼다. 힘이 딸리자 다섯 역사가 뱀 꼬리를 잡고 큰 구령을 부르짖으며 잡아당겼다. 이때 산이 무너지면서 다섯 역사와 다섯 여인이 모두 깔려 죽고말았으며, 이들이 변하여 다섯 봉우리가 되었다. (常璩, ≪華陽國志≫)30)
30) 常璩, ≪華陽國志≫(四川大學出版社, 2007) 권2: “秦惠王知蜀王好色, 許嫁五女於蜀, 蜀遣五丁迎之. 還到梓潼, 見一大蛇入穴中. 一人攬其尾, 掣之不禁, 至五人相助, 大呼拽蛇, 山崩時壓殺五人及秦五女并將從, 而山分爲五嶺.”
제12-13구 上有六龍回日之高標, 下有衝波逆折之回川. :
희화가 높은 산길에서 길을 빌려 지나가고, 까마귀가 산 위에서 깃을 돌려 돌아간다. (左思,<蜀都賦>)31)
31) 左思, <蜀都賦>, ≪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中華書局, 1958), 권74: “羲和假道於峻岐, 陽烏回翼乎高標.”
제35-36구 一夫當關, 萬夫莫開. :
한 사람이 창을 들고 있으면, 만 명의 적군이 머뭇거린다. 형세가 험난한 곳은 측근이 아니면 맡기지 못한다. (張載,<劍閣銘>)32)
32) 張載, <劍閣銘>, ≪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 권85: “一夫荷戟, 萬夫趑趄. 形勝之地,非親勿居.”
위에서 든 양웅의 <촉도부>, 상거의 ≪화양국지≫, 좌사의 <촉도부>, 장재의 <검각명> 이외에도 당대 이전의 작품에 관련된 어휘와 표현이 많다. 뿐만 아니라 성당까지 많은 문인들이 촉도에 대해서 묘사하였다. 이러한 촉도 문화가 이백의 <촉도난>을 창작하는데
배경이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곽무천(郭茂倩)이 편찬한 ≪악부시집≫에는 ‘상화가사’의 ‘슬조곡’에 이백의 작품 이외에도 모두 6수의 <촉도난>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33) 양 간문제(簡文帝) 2수, 양 유효위(劉孝威) 2수, 진 응갱(陰鏗) 1수, 당 장문종(張文琮) 1수 등이다. ≪악부시집≫에는 제목 아래 간단한 해제가 붙어있다.
먼저 ≪고금악록≫(古今樂錄)을 인용하여 “왕승건의 ≪기록≫에 <촉도난행>이 있는데 지금 노래가 전하지 않는다.”34)고 하였고, 이어서 ≪악부해제≫(樂府解題)를 인용하여 “<촉도난>은 동량산과 옥루산의 험난함을 두루 서술한것으로 <촉국현>(蜀國絃)과 무척 비슷하다.”35)고 하였다. 결국 이백의 <촉도난>은 악부제의 전통 속에서 탄생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유효위의 <촉도난> 제1수를 보자.
玉壘高無極, 옥루산은 끝없이 높고
銅梁不可攀. 동량산은 오를 수 없어라
雙流逆巇道, 두 강줄기가 험난한 길을 거쳐 가고
九折澀陽關. 구절판이 양관보다 더 거칠어라
鄧侯束馬去, 등애(鄧艾)는 말을 매어두고 음평의 길을 가고
王生斂轡還. 왕양(王陽)은 고삐를 잡아당겨 돌아갔다네
懼身充叱馭, 왕존(王尊)은 몸이 떨려 마부에게 물어보며 지나갔으나
奉玉若猶慳. 왕양은 자사 직위를 받았어도 벌벌 떨었다네
동량산은 합천(合川)에 있고 옥루산은 성도(成都) 교외에 소재하며, 제3구의 두 강줄기는 도강언(都江堰)에서 나뉘는 이수(離水)와 퇴수(堆水)를 가리킨다. 구절판은 공래산에 있으며, 등애와 관련된 지역은 험악한 음평(陰平)의 좁은 길을 거쳐 마천령을 넘어 촉을 공격한 길을 가리킨다. 서한의 왕양과 왕존이 관련된 장소 역시 공래산이다. 이처럼 이 시에서 말하는 촉도는 어느 한 곳을 가리키지 않는다.
33) 郭茂倩, ≪樂府詩集≫(中華書局, 1979), 권40.
34) 郭茂倩, 앞의 책, 권40: “王僧虔技錄有蜀道難行, 今不歌.”
35) 郭茂倩, 앞의 책, 권40: “蜀道難備言銅梁玉壘之阻, 與蜀國絃頗同.”
또 간문제(簡文帝)의 <촉도난> 제2수는 무협의 험난함을 묘사한것인데, 역시 진령과 검각 사이의 촉도와는 멀리 떨어져있다. 이렇게 보면 촉도는 촉 지방의 험난한 길을 두루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작품을 보면 악부제 <촉도난>는 촉도의 험난함 자체를 제재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악부해제≫에서 말한 <촉국현>은 어떤 작품인가? <촉국현>은 ≪악부시집≫의 ‘상화가사’에 속하며, 간문제, 노사도(盧思道), 이하(李賀)의 작품을 각각 1수씩 도합 3수를 싣고 있다.
간문제 소강(蕭綱)의 작품을 보자.
銅梁指斜谷, 동량산은 포야곡(褒斜谷)을 가리키고
劍道望中區. 검각산은 중원 지역을 바라본다
通星上分野, 이어진 별들은 위에서 분야(分野)를 나타내며
作固下爲都. 지어진 견고한 성은 아래에 성읍을 이루었다
雅歌因良守, 전아한 노래는 뛰어난 관리의 행정 때문이요
妙舞自巴渝. 절묘한 춤은 파유 지방에서 나왔어라
陽城嬉樂盛, 양성(陽城)은 놀이와 음악이 번성한데
劍騎鬱相趨. 파촉에는 기병이 많아 다투어 따르는구나
五婦行難至, 진나라에서 보낸 다섯 여인이 오기 어렵다 해도
百兩好遊娛. 수레 백 량으로 즐거이 노닐었어라
牲祈望帝祀, 고기를 차려 망제(望帝)에게 제사 지내고
酒酹蜀侯誅. 술을 부어 억울하게 죽은 촉후(蜀侯)를 위로하네
江妃納重聘, 강비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빙례에 응하고
卓女愛將雛. 탁문군이 기러기를 들고 혼례에 나서네
停弦時繫爪, 현을 멈추어 때로 깎지를 조정하고
息吹治脣朱. 불기를 멈추고 입술을 붉게 칠하네
脫衫湔錦浪, 저고리를 벗어 금강의 물결에 씻기도 하고
回扇避陽烏. 부채를 머리 위에 돌려 태양을 가리는구나
聞君握節返, 듣자하니 그대가 부절을 들고 돌아온다 하니
賤妾下城隅. 천첩은 성벽 아래로 내려가 기다리고 있을 테예요
이 시는 머리 부분에서 촉 지방의 지세를 쓰고, 나머지는 촉 지방의 명물과 풍속과 유락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묘사했다. 다만 말미 2구에서 여인이 남편의 귀향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구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소강의 <촉국현>은 6수의 <촉도난>보다 이백의 <촉도난>에 더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세 가지를 꼽을수 있다.
첫째, 6수의 <촉도난>이 (가) ‘촉도의 험난함’만 묘사한 데 비해 <촉국현>은 (가) ‘촉도의 험난함’은 물론 (나) 빨리 돌아오라는 당부와 (라) 촉 지방의 즐거움을 함께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구성상에 있어서 이백의<촉도난>에 있는 네 가지 주요한 요소 가운데 (다) 할거에 대한 경계를 제외하고 모두 갖추고 있는 셈이다.
둘째, <촉국현>은 구성에 있어서도 이백의 <촉도난>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촉국현>의 말미에 나오는 빨리 돌아오라는 당부는 구성상의 필요로 중간 부분에 길게 등장하는 촉 지방의 즐거움을 효과적으로 마감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구성은 부(賦)에서 백 개를 권하다가 말미에서 하나를 경계하는 ‘권백풍일’(勸百諷一)의 구조 속에 흔히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백의 <촉도난>에 등장하는 돌아오라는 호환은 이러한 구성상의 필요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셋째, 악부제 작품은 시인이 시의 내용 속으로 감정이입이 되는 특징이 있다.
예컨대 간문제는 <촉국현> 말미에서 천첩(賤妾)으로 등장한다. 악부제 자체가 공시적⋅통시적으로 다른 시인들과 시제와 내용을 공유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예는 아주 흔하다. 이백의 <촉도난>도 악부제이므로 시적 공간에서 인물들은 일반화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백의 <촉도난>이 세 번에 걸쳐 촉도가 험난하다고 말하며 세 번 돌아오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초혼>(招魂)에서 “혼이여 돌아오라!”라고 시작하여 각지의 험악한 광경을 묘사하는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다만 <촉국현>에서는 첫머리에 촉 지방의 험난한 광경을 제시하였을 뿐이다. 달리 말하면 이백은 <촉도난>으로 6수의 <촉도난>의 전통을 심화하고 구성상에서 <촉국현>을 이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제시한 역대의 의견들 가운데 상당수는 돌아오라는 호환을 중시하여 그 대상을 밝히려 했으나, 문학 전통의 영향 관계에 두고 보았을 때 돌아오라는 반복적 호환도 시적 장치로 읽을 수 있음을 알게 된다.
5. 이백의 악부제와 비흥의 방식
이백의 악부제에서 자주 발견되는 점은 고사(古辭) 또는 이전의 작품들과 이백이 운용한 시사(時事) 사이의 거리이다. 악부제의 운용은 중국고전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의 제재가 오랜 기간 동안 계속 통용되기 때문에 조대를 걸쳐 서로 다른 시인들이 동일한 제목으로 시를 쓸 수 있었다. 시인들의 책상에는 언제나 꺼내 쓸 수 있는 제재가 한쪽에 쌓여 있는 셈이다.
악부제는 일반적으로 한대의 음악에 기원을 두고 위진 시대의 시인들이 가사를 지으면서 시작되었다. 예컨대, <단가행>은 한대 음악이지만, 위진 시기에 조조, 조비,조예, 부현, 육기 등이 지었고, 북조에서는 서겸, 수대에는 신덕원, 당대에 들어서는 섭이중, 이백, 고황, 백거이, 왕건, 장적 등이 지었다. 새로운 노래나 음악이 발생하는 일은 위진 이후에도 계속 되었고, 이로부터 새로운 악부제가 만들어졌으며, 음악이 소실되었어도 때로 제목을 달리하면서 시편을 만들어 나갔다.
이는 마치 화가들이 고대의 화가가 그린 그림을 임모하는 것과 비슷하다. 후대의 화가는 임모하는 과정에서 화가마다 조금씩 다른 필치를 쓰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작품의 일부를 가감하여 구성을 바꾸거나 새로운 해석을 하기도 한다. 그 결과 원본이 없어진 경우도 임모본으로 재임모할 수 있게 된다. 악부제도마찬가지이다.
시인들은 최초의 고사(古辭)가 남아 있지 않아도 후대의 시인들이 쓴 작품으로 그 제재와 중심 내용과 정취를 알 수 있으며, 이로부터 자신도 같은 제목으로 작품을 쓸 수가 있게 된다.
악부시는 도전적인 시인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해석을 기다리는 공간이며, 계속되는 혁신의 공간이다. 그리고 시인들이 남긴 시들은 동일한 시제로 귀속되어 다음 시인을 기다린다.
이백은 고사(古辭)나 전대 악부제 작품을 재해석하는데 뛰어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백이 비흥(比興)에 능한 점은 역대로 정평이 나있다. 이백의 친구이자 그의 임종을 지켜본 이양빙(李陽氷)은 ≪초당집서≫에서 “모든 저술에는 풍자와 비흥이 많다”(凡所著述, 言多諷興.)고 하였다.36)
명대 호진형(胡震亨)도 “이백은 악부에 가장 깊었다. 악부고제는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시는 그 본뜻을 쓰기도 하고, 어떤 시는 번안하여 새로운 뜻을 내기도 하였다. 통합되어 있는 듯하면서 떨어져 있고, 떨어져 있는 듯하면서 사실은 통합되어 있어, 악부고제의 의미를 절묘하게 다 드러내었다.”37)고 갈파하였다.
이백은 악부고제를 재창작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a) 편폭의 확대, (b) 이야기 구조의 삽입, (c) 의미의 심화 등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의미의 심화는 (c-1) 전통 주제의 심화와 (c-2) 현재 시사의 비흥으로 나뉜다.
예컨대, 같은 이별의 제재이지만 <구별리>(久別離)는 전통 제제의 심화이지만<원별리>(遠別離)는 현재 시사의 비흥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c)의 특징은 제재와 일정한 관련성을 보인다.
예컨대 전통 주제의 심화는 <북풍행>(北風行), <첩박명>(妾薄命), <장간행>(長干行), <양반아>(楊叛兒) 등처럼 그 내용이 남녀의 애정이나 이별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물론 이외에도 청년의 기개, 한창 때 즐기기(及時行樂), 음악의 향유 등의 제재도 있다. 이에 반해 현재 시사의 비흥은 <전성남>(戰城南), <상류전>(上留田), <독록편>(獨漉篇) 등과 같이 인간과 사회에 관련된 제재에 집중된 양상을 보인다.
제재의 측면에서 볼 때 <촉도난>은 위에서 논의한 (c)의 두 가지 갈래에서 비켜있다. 이는 남녀의 애정이나 이별에 관한 것도 아니며, 인간과 사회에 관한 것도 아니다.
<촉도난>의 시적 전통은 오히려 산수시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악부제의 내용별 분류 안에서도 갈래를 잡기 어려운 제재이다.
악부제가 인간과 사회 문제에 집중하며 “슬프거나 즐거운 감정에서 감흥을 일으켜 구체적인 일을 통하여 표현한다”(感於哀樂, 緣事而發.)38)는 전통 속에서 출발했기에 산수를 제재로 한 것은 드문 것이다.
게다가 비흥과 우의란 특히 정치적인 사건에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이백의 시에서 정치적인 우의는 현종과 궁중에 대한 풍자이거나 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이 많다.<고풍> 59수 등에서도 종종 은미한 언어와 음험한 이미지로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은 당연히 완적(阮籍) 이래 계승된 전통이지만, 시대가 달라진 당 제국에서 이백이 어느 정도 선까지 궁중과 현실을 비판했느냐 하는 점은 항상 문제가 된다.
전통시기에 군주를 비판한다는 것은 멸족지화를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은미할 수밖에 없으며 그 우의와 비흥도 난해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시의 해석에 있어서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종종 논란을 일으킨다.
그렇게 본다면 정치적 이외의 것은 지나치게 은미할 필요가 없다. 때문에 위에서 검토한 역대의 논의에서 (6) 친구 보내기와 (7) 벼슬길의 어려움은 우의를 사용할 필요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36) 李陽氷, <草堂集序>, ≪李太白文集≫(巴蜀書社, 1985), 권1: “凡所著述, 言多諷興.”
37) 胡震亨, ≪唐音癸簽≫(中華書局, 1959): “太白於樂府最深. 古題無一古弗擬. 或用其本意, 或翻案別出新意, 合而若離, 離而實合, 曲盡擬古之妙.”
38) 班固, ≪漢書≫<藝文志>(中華書局, 1987): “感於哀樂, 緣事而發.”
이백의 비흥을 살펴보는데 있어 두보와의 비교가 어느 정도 유용하리라고 본다.
두보는 같은 제재로 <검각>을 썼다.
惟天有設險, 하늘이 세상에 험준한 곳을 만들었으니
劍門天下壯. 검문의 험난함은 천하의 장관이라
連山抱西南, 이어진 산들은 서남쪽을 감싸고
石角皆北向. 바위의 모서리는 모두 북쪽을 향해 있네
兩崖崇墉倚, 양쪽 벼랑은 높은 벽이 서로 기댄 듯하고
刻畵城郭狀. 모양과 형세는 성곽의 모습과 비슷해라
一夫怒臨關, 한 사람이 용맹을 떨치며 관문을 지키면
百萬未可傍. 백만의 군사라 할지라도 가까이 갈 수 없어라
珠玉走中原, 촉 지방의 보물과 재물이 중원으로 흘러가니
岷峨氣凄愴. 민산과 아미산마저 기색이 창백해지네
三皇五帝前, 생각해 보면 삼황과 오제의 시대에는
鷄犬各相放. 닭과 개를 놓아 기르면서도 싸움이 없었지
後王尙柔遠, 후세의 왕들이 국경을 넓히면서
職貢道已喪. 본래 있던 직공(職貢)의 도리가 벌써 없어졌어라
至今英雄人, 지금까지 촉 지방의 영웅들
高視見霸王. 오만하게 패자(霸者)나 왕자(王者)를 자칭했었지
井呑與割據, 왕자는 병탄하고 패자는 할거하며
極力不相讓. 힘을 다하여 중원과 항쟁하였네
吾將罪眞宰, 내 장차 조물주에게 죄를 물어
意欲鏟疊嶂. 첩첩의 산들을 깎아 평평히 하고 싶어라
恐此復偶然, 할거하는 사람이 우연히 다시 있을까 두려워
臨風黙惆悵.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슬퍼하노라
이 시는 두보가 759년 12월 동곡에서 성도로 가는 도중에 검문을 지나며 쓴 시이다. 먼저 검문의 험난함을 묘사하고, 여기에서 시상을 더 전개하여 이를 방패로 영웅이 할거할 것을 염려하였다. 구성에 있어 변화가 많지만 드러내고자하는 주제는 뚜렷이 나타났다. 물론 이때는 안사의 난으로 현종이 몽진을 떠났다가 다시 환궁한 뒤여서 이러한 주제를 드러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두보의 시와 비교한다면 이백의 비흥은 너무 은미하여 때로 무엇을 비판하는지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이 구체적인 인물과 관련된 음험한 정치에 대한 불만이나 높은 권좌에 앉은 사람을 비평한 것이 아니라면 왜 그렇게 은미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점이 눈에 뜨인다.
그러므로 <촉도난>이 굳이 긴 편폭을 할애하여 비판을 하거나 경계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6. 표현과 해석
시인은 비흥을 사용하여 표현의 공간을 넓히고 독자는 자신의 이해와 감성에 따라 해석하고 감수한다. 앞에서 검토한 여러 설은 이러한 결과이다. 고대에는 (1) 두보와 방관에 대한 걱정, (2) 장구겸경 풍자, (3) 현종에 대한 염려, (4)할거에 대한 경계 등의 의견을 내놓았고, 현대에는 (5) 산수 묘사, (6) 친구 보내기, (7) 벼슬길의 어려움 등의 의견을 내놓았다. 역대의 여러 논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크고 구체적인 사건에서 작은 사건으로 옮겨갔다. 고대의 평자들은 구체적인 인물과 관련시켰고 그것도 중요한 인물들을 떠올려 작품의 무게에 상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비교적 평범하고 일반적인 우의로 해석하였다. 큰 사건은 연대가 맞지 않아 성립되지 않았고, 작고 평범한 사건은 우의를 붙일 필요가 없다.
둘째는 작품의 우의와 풍격 사이의 불일치이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험난함과 공포에 비해 작품은 전혀 음침하거나 무겁지 않고 그 반대로 웅혼하고 낙관적이다. 시인은 가지마라고 반복하여 말하며 험난한 풍광을 제시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오히려 그 다음을 기대하고 보고 싶게 한다. 시는 공포가 아니라 의욕을 준다.
이러한 험난한 길을 계속 가도록 만든다. 염려하고 비판한다면 신랄하고 침중할 것이나 그 반대로 작품의 풍격은 호매하고 분방하다. 음조도 세차고 드높다. 만약에 우의가 있다면 웅건하고 활달한 작품에 부합한 우의가 있어야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염려와 비판과 걱정이라는 우의에 비해 작품은 드높고 장대한 자연이 전개되어 사람을 분발시킨다.
셋째는 해석의 근거가 지엽적이다. 각각의 해석은 다면체와 같은 작품의 어느 한 면을 잡고 말하고 있으며, 제시하는 근거도 부분적이어서 확증하기 어렵다. 확증이 없는 상태에서 이들 해석은 이차적인 해석일 뿐이다. 이차적인 해석으로 친다면 <행로난>과 연관시켜 인생의 험난함을 비유한다는 설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시인의 표현의 문제가 있고, 다음으로 독자의 해석의 문제가 있는데, 작품 속에서 해석에 대한 충분하고 통일적인 이유가 없으면 그 해석은 독자에게 맡겨진다. 이백 자신이 의도를 주었다고 해도 그 의도가 모호함 속에 우의를 찾을 수 없을 정도가 된다면 이는 우의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시인의 표현과 독자의 해석은 일정한 관련을 갖는다. 다시 말해 독자의 해석은 시인의 전반적인 표현 성향을 통해 인식하는 것이 훨씬 유용하다. 앞에서 논의한 점들과 연관시켜 이백의 창작 성향을 살펴봄으로써 <촉도난> 해석의 실마리를 찾아보고자 한다.
첫째, 이백은 다양한 제재를 깊이 있게 천착하며 정감의 철저한 추구를 지향하였다.
이는 이백이 지은 <강상음>(江上吟)에서 “흥이 거나해지면 붓을 들어 오악을 흔들고, 시가 완성되면 웃으며 창해를 넘나드네”(興酣落筆搖五嶽, 詩成笑傲凌滄洲.)라는 말에서 잘 나타나있다.
뿐만 아니라 두보가 지은 <이백에게 부침 이십 운>(寄李十二白二十韻)에서 “붓이 떨어지면 비바람이 치고, 시가 완성되면 귀신이 흐느낀다”(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라며 이백의 문학적 감응력을 높이 칭송하였다.
표현주의적인 특성을 ‘표현성을 강하게 추구한다’는 뜻으로,정감을 강하게 분출하는 성향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한다면, 이백은 역대의 어느 작가보다 표현주의적인 요소가 강하였으며, 설정된 주제를 깊이 있게 천착한 시인이다.
둘째, 이백은 누구보다도 다양한 제재를 섭렵하였다. 예컨대, 이백의 작품을 통독할 때 발견되는 것으로 <촉도난>과 대비되는 작품으로 <장진주>가 있다. <촉도난>이 공포와 두려움을 남김없이 표현한 것이라면, 이에 대비하여<장진주>는 극단적인 낙천주의를 표현하였다. 얼핏 보아 두 작품은 상반되어, 현실 속의 실제하는 한 사람의 정감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문학 작품으로 본다면 같은 악부제에 길이도 비슷한 중편의 시로 대상을 철저히 읊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표현주의적인 특징으로 묶을 수 있다. 선택하는 제재에 대해
철저하게 탐색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정감의 폭을 극단적으로 심화했다는 점에서 이백의 표현주의적
인 특징이 자리한다.
셋째, 이백은 누구보다도 악부제를 최대한 활용하였다. 예컨대, <전성남>(戰城南)에서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양반아>(楊叛兒)에서 연정에 대한 철저한 정감을, <상류전>(上留田)에서 형제의 다툼에 대한 철저한 인식을, <이칙격으로 백구 불무사를 올림>(夷則格上白鳩拂舞辭)에서 관리의 탐욕을 남김없이 드러내었다. 이들은 이전의 악부제로부터 제재를 취하여 나름대로 새롭게 시화하면서 주제를 심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194수 가운데 어떤 악부제는 스스로 창안한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촉도난>이야말로 이백의 ‘표현주의적인 특징’의 입장에서 읽어야 된다고 본다. ‘촉도의 험난함’에 대해 쌓여진 문학적 전통을 제재로 하여,<촉국현>의 구성을 활용하여, 험난함의 극단을 각화하는 것이 이 작품의 최종적인 목표로 보인다. 모든 시적 초점은 험난하다는 점으로 통합되며, 검각도 험난함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반복되는 돌아오라는 호환조차 험난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간에 끼어드는 이러한 호환이야말로 층층이 깊어지는 구성에서 더없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7. 마무리글
이백의 <촉도난>은 천고의 명편으로 역대로 음송되었지만, 그 우의(寓意)에 대해 역대로 다양한 논의가 있어왔다. 본고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먼저 시의 구성을 살피고 역대의 논의를 검토하였다. 그런 연후에 시인의 표현과 독자의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접근하였다.
시인 이백이 <촉도난>을 쓰기 이전의 문학적 전통에서 그 구성의 근원을 파악했으며, 이백이 악부제를 창작하는 방식에서 ‘표현주의적인 특징’이 있음을 찾아내었다. 이백은 악부제의 제재를 어느 시인보다도 가장 다양하게 사용하였고, 주제도 가장 깊이 천착했다는 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촉도난>에서도 충분히 반영되었다.
하나의 대상을 철저하게 그려내는 표현주의적인 특징은 이백의 다른 시에서도 보이지만 악부시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여기에는 ‘촉도난’에서 연상되는 가장 격렬한 세계를 써내려는 문학 심리가 놓여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이백에게 있어 전인이 남겨놓은 악부제는 가장 좋은 창작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이백은 악부시를 즐겨 지었고, 다수의 악부시들은 그의 손에서 완정하고 충분하게 각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촉도난> 역시 그중 하나이다. 그 철저함으로 인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지는 전형성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 인생의 모질고 험난한 비유로까지 읽을 수 있다.
역대로 많은 평론가들이 우의에 주목했지만 더욱 많은 평론가들은 풍격에 주목하였다. 이 시를 최초로 수록한 ≪하악영령집≫에서 은번(殷璠)이 주목한 것은 “기이하고 또 기이하다”(奇之又奇)는 풍격이었다.39)
≪본사시≫에서도 하지장이나 이를 기록한 맹계나 일차적으로 시가 주는 풍격의 웅혼함과 경계의 활달함에 깊이 감염되었지 그 우의에 대해서 논하지 않았다. 독자들은 시의 드높은 기상과 풍광에 주목하고 그 정감의 세계를 좋아했던 것이다. 이백이 추구한 것도 시각, 청각, 촉각, 심리묘사 등을 동원하여 감각을 일깨워주고 시문을 통해 귀신이 울고 산하가 흔들리기 추구했던 것이다. <촉도난>에서 볼 수 있는 이백의 표현주의적인 특징은 이백과 이백의 시를 읽는데도 상당히 유용하리라 본다.
39) 殷璠, ≪河嶽英靈集≫, 권上. : “其爲文章, 率皆縱逸, 至如蜀道難等篇, 可謂奇之又奇. 然自騷人以還, 鮮有此體調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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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文提要>
李白的<蜀道難>是千古傳誦的絶唱,對其寓意或李白的表現意圖,千百年來衆說 紛紜,難成定論。本文通過作品的結構、七種寓意的考
辯,從中莫衷一是的結論中進 一步探討了該詩的主題思想。首先設定了以詩人的表現和讀者的解釋的關係爲中心展 開了討論。李白積極吸
收了‘蜀道文化’,參考了樂府詩‘前<蜀道難>’和<蜀國絃>的結 構,在改造樂府題詩歌的過程當中,完成了自己的‘表現主義’傾向的情感
世界。在中國 詩歌史上,運用樂府題最多、意境最深的詩人,沒有人比不上李白的。這些李白的創 作特點反映在<蜀道難>的創作。
本文還探討了李白運用樂府詩比興的方式,在描寫景物題材詩歌裏幾乎沒有使用政 治意義的比興手法。李白的“表現主義”是遇到某個對像
或主題時,徹底挖掘思想內容的 創作的個人傾向。最好表現在樂府題詩歌。追求最激烈、最奔放的情感世界,乃是李 白寫作<蜀道難>的
文學心理。這種要完成一個情感世界的徹底追求,産生了一篇篇 珠玉般的樂府題,獲得了典型。最終具有多種解讀的可能性。
關鍵詞: 李白、蜀道難、蜀國絃、表現主義、樂府題、比興
투 고 일: 2013. 01. 29
심 사 일: 2013. 02. 10-02. 25
게재확정일: 2013. 03.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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