賦得高原草送別
白 居 易
離離原上草, 우거진 언덕 위의 풀은
壹歲壹枯榮。 해마다 성함과 쇠함을 반복하는데
野火燒不盡, 들불도 다 태우지는 못하고
春風吹又生。 봄바람 불면 다시 돋누나
遠芳侵古道, 아득한 향기 옛 길에 일렁이고
晴翠接荒城。 옛 성터엔 푸른빛 감도는데
又送王孫去, 또 그대를 보내니
萋萋滿別情。 석별의 정만 무성하구나.
이 시는 정원(貞元) 3년(787) 혹은 5년, 白居易의 나이 16세 혹은 18세 때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저작시기를 두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舊唐書≫ 〈白居易傳〉에는, 15, 6세에 저작랑(著作郞) 고황(顧況)에게 글을 보여주었다고만 했는데, 당나라 사람 장고(張固)의 ≪幽閑鼓吹(유한고취)≫에 상세한 내용이 보인다.
“백거이(白居易)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처음 장안에 왔을 때 고황(顧況)을 뵙고 자신의 시를 보여주었더니, 고황(顧況)이 백거이(白居易)의 성명을 보고 한참 동안 백거이를 바라보고 나서 말하기를 ‘장안은 물가가 비싸 살기도 아주 쉽지 않을 텐데.[米價方貴 居亦不易]’라고 농담을 하더니(白居易 이름을 희롱한 것이다.), 시권(詩卷) 첫 수의 ‘咸陽原上草(함양원상초) 一歲一枯榮(일세일고영) 野火燒不盡(야화소부진) 春風吹又生(춘풍취우생)’이란 구절을 보고는 바로 감탄하며, ‘이런 언어를 말하니 살기 쉽겠구나.’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칭찬이 퍼져 명성이 크게 떨쳤다.
[白尙書應擧 初至京 以詩謁顧著作況 顧睹其名 熟視白公曰 米價方貴 居亦不易 乃披卷首篇曰 咸陽原上草 一歲一枯榮 野火燒不盡 春風吹又生 卽嗟賞曰 道得个語 居卽易矣 因爲之延譽 聲名大振]”
후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황은 정원 5년에 요주(饒州) 사호참군(司戶參軍)으로 폄직(貶職)되었고 백거이는 이 이전에는 장안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당대(唐代) 기록에 따라 저작시기를 확정하는 데 회의적인 의견이 있다.
한편 백거이가 강남에 있을 때 지었다고 보기도 한다. 백거이는 정원 5년에 아버지를 따라 구주(衢州)에 있었는데, 이때 요주(饒州)로 폄직되어 부임하는 고황(顧況)이 소주(蘇州), 항주(杭州), 목주(睦州)를 거쳐 구주(衢州)를 경유하게 된다. 이 시기에 백거이가 고황을 배알했을 가능성이 높아 고황과 관련된 이야기가 생겼고 저작시기도 이때로 보는 것이다.
굴원(屈原)의 ≪楚辭(초사)≫ 이후 풀은 이별과 관련된 은유로 상징이 되다시피 했다. 소년 백거이는 그 전통을 이어 ‘離離(이리)’, ‘萋萋(처처)’, ‘遠芳(원방)’, ‘晴翠(청취)’ 등 풀에 대한 다채로운 표현을 사용하면서 전통을 이었다. ‘野火燒不盡(야화소부진) 春風吹又生(춘풍취우생)’이란 구절이 유명한데, ‘吹又生(취우생)’은 경구(警句)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