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거이의 생애
백거이(白居易)의 자는 낙천(樂天), 만년에는 호를 취음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그의
이름 "거이(居易)"는 ≪중용(中庸)≫의 "군자는 편안한 위치에 서서 천명을 기다린다(君子居易以俟命)"는 말에서
취했고, 그의 자 "낙천(樂天)"은 ≪역(易)·계사(繫辭)≫의 "천명을 즐기고 알기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다(樂天知命
故不憂)"는 말에서 취했다. 천명에 순응하고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행하는(順天與素位而行) 유가의 처세사상
이 그의 이름과 자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백거이는 당(唐) 대종(代宗) 대력(大曆) 7년(722) 정월 20일에 정주(鄭州) 신정현(新鄭縣)에서 계당(季唐)의 차
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구당서(舊唐書)≫ 권166 「백거이전(白居易傳)」, ≪신당서(新唐
書)≫ 권119 「백거이전」,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 서술된 내용과 송대(宋代) 진진손(陳振孫)의 ≪백공문연보(白公文年譜)≫를 통하여 그 대략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백거이의 본관은 원래 태원(太原)이었는데, 그의 6대 조부 건(建)이 태원에서 한성(韓城)으로 이주하였으며, 증
조부 온(溫)이 한성에서 하규(下邽: 지금의 섬서 陝西 위남 渭南)로 이주하였다. 그의 조부 굉(鍠)은 만년에 하남
(河南) 공현(鞏縣)의 현령으로 퇴직한 후에 형양(滎陽)의 경치를 좋아하여 정주 신정현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백거이가 출생한 곳은 신정현 동곽리(東郭里)인데, 신정은 바로 형양군에 속하며 옛날 정(鄭)나라 땅이었다.
백거이의 집안은 비록 명문귀족은 아니었지만 대대로 학문을 하며 관리를 지내온 학자집안이었다. 그의 조부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와 산조(酸棗), 공현(鞏縣)의 현령을 역임했으며, 그의 부친은 소산현위(蕭山縣尉), 송주
사호참군(宋州司戶參軍), 팽성(彭城) 현령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의 자술에서, "가련하였다. 소년시절에 가세가 빈천하였으니!(≪白氏文集≫ 권2 <悲哉行>: 可憐哉, 少
年時家境適在貧賤中!)"라고 탄식한 것을 보면, 그가 출생할 당시에 집안 상황은 상당히 곤궁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출생한지 6~7개월만에 비록 말은 못하였지만 "무(無)"자와 "지(之)"자를 구별할
수 있었으며, 5~6세 때에 시 짓는 법을 배우고, 9세에 성운을 알았으며, 15~16세에 진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독
서에 열중하였다. 정원(貞元) 3년(16세)에 그는 장안(長安)에 가서 대시인 고황(顧況)의 현실주의 시를 좋아하여
그의 지도를 받고, <부득고원초송별(賦得古原草送別)>이라는 시로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정원 10년(23세)에 그의 부친이 양주(襄州)에서 세상을 떠난 후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정원 16년(29세)
에 비로소 고영(高郢)이 주관한 진사 시험에 합격하여 관리로 진출하였다.
그후 그는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 32세)을 거쳐, 원화(元和) 원년(35세)에 원진(元稹)과 함께 제책(制策)
시험에 응시, 4등으로 합격하여(원진은 3등) 주질현위(盩厔縣尉)에 임명되었다.(원진은 좌습유 左拾遺) 이해 겨
울 12월에 유명한 <장한가(長恨歌)>를 지었다.
원화 2년(36세, 807)에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집현교리(集賢校理),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4월에는 황제를 가까이 모시면서 백관을 탄핵하고 황제에게 간언을 올리는 좌습유(左拾遺)에 임명되어 신하된
임무를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때부터 강주(江州)로 좌천되기 전까지 그는 어려운 백성들의 편에 서서 곤궁에 처해있던 당시의 사회상을 비
판하고 조정의 부패를 폭로하는 풍유시(諷諭詩)를 많이 썼다.
전술한 바와 같이 문인으로서 그는 단번에 고위관직에 올라 영화로운 지위에 이를 수 있었는데, 이러한 그의 경
력은 문인의 생애 중에서 상당히 보기드문 경우에 속하는 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그가 소년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바탕으로 좌절하지 않고 각고의 인내로써 노력한 결과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
후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새로운 인사제도로 그처럼 빈천한 신분 출신의 인사들도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
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새로운 인사제도는 구관료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되어 신구 관료 간에 빈번한 대립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백거이는 풍유시로 인한 구관료들의 반발을 견디지 못하고 무원형(武元衡) 사건으로 간관
(諫官) 보다 먼저 상소했다는 것 등을 이유로 강주사마(江州司馬)로 좌천되었다. 유명한 <비파행(琵琶行)>은 바
로 이때 지은 것이다.
그후 충주자사(忠州刺史, 원화 13년, 47세), 상서사문원외랑(尙書司門員外郞, 원화 15년 49세), 조산대부(朝散
大夫, 장경 원년, 50세), 항주자사(杭州刺史, 장경 2년, 51세), 소주자사(蘇州刺史, 장경 5년, 54세), 비서감(秘
書監, 대화 원년, 57세), 형부시랑(刑部侍郞, 대화 2년, 57세), 태자소부(太子少傅, 대화 9년, 64세) 등을 역임하
다가, 회창(會昌) 2년 71세 때 병으로 태자소부를 사임하고 그의 생애 최고 벼슬인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오른
후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후 그는 나이의 노쇠와 정치적 실망, 불교의 영향 등으로 은둔생활을 하다가 개성(開城) 4년(68세) 겨울에 중
풍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면서 향산사(香山寺)의 승려인 여만대사(如滿大師)와 향화사(香火寺)를 짓고 스스로
호를 향산거사(香山居士)라 하였다. 이듬해 목종(穆宗) 회창 6년(844) 8월에 중풍이 재발하여 낙양(洛陽) 이도
리(履道里)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내다가 시주(詩酒)와 탄금(彈琴), 참선으로 조생히 일생을 마치니 그의 나이 향
년 75세였다.
2. 백거이의 문학관
이백(李白: 701~762)이 죽은지 10년, 원결(元結)이 죽은 바로 그해에 태어난 백거이는 어릴 때부터 문학혁신의
기풍과 곤궁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후 그는 관계에 진출하여 정치의 문란과 관리들의 부패, 과중한
세금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고통 등 불평스러운 사회현상을 목도하고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구세제민(救世濟
民)의 뜻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관직이 그다지 높지도 않고 실권도 없었기에 시가(詩歌)로써 민생의
고통을 대변하고 정치의 부당함을 풍자하여 탐관오리를 공격하는 도구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시가란 단지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오락물이 아니라 시정에 도움이 되고 사람의 마음과 세상의 이치에
보탬이 되는 내용을 가져야 비로소 그 존재의 의의와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그의 문학사상은
<여원구서(與元九書)>, <신악부서(新樂府序)>, <책림(策林)> 등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특히 좌천시기(원화
10년 12월)에 쓴 <여원구서>에서 그는 시에 대한 종래의 자기 견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글은 귀한 것이다. 삼재(三才)에는 각기 글이 있다. 하늘의 글은 삼광(三光: 해, 달, 별)이 으뜸이고, 땅의
글은 오재(五材: 금, 목, 수, 화, 토)가 으뜸이며, 사람의 글은 육경(六經: 시, 서, 예, 악, 역, 춘추)이 으뜸이다.
육경을 말한다면 시가 으뜸이다. 왜인가? 성인은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켜 천하를 화평케 한다.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는 데에는 정(情)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말보다 처음인 것이 없으며, 소리보다 절실한 것이 없고, 뜻보
다 깊이 것이 없다. 시는 정을 뿌리로 삼고, 말을 싹으로 하고, 소리를 꽃으로 하며, 뜻을 열매로 삼는다. 위로는
성현에서 아래로는 우민(愚民)에 이르기까지, 보잘 것 없는 돼지나 물고기에서 신묘한 귀신에 이르기까지, 여럿
이 나뉘어도 기(氣)는 같고, 형체가 달라도 정은 하나니, 소리를 듣고서 응하지 아니하고, 정을 나눔에 느끼지 않
는 것이 없다. 성인은 그러함을 알아서 그 말에 따라 육의(六義: 風, 雅, 頌, 賦, 比, 興)로 날줄을 삼고, 그 소리에
따라 오음(五音: 宮, 商, 角, 徵, 羽)으로 씨줄을 삼았다."
夫文尙矣, 三才各有文, 天之文, 三光首之, 地之文, 五材首之, 人之文, 六經首之. 就六經言, 詩又首之. 何者? 聖人
感人心而天下和平. 感人心者, 莫先乎精, 莫始乎言, 莫切乎聲, 莫深乎義. 詩者, 根情, 苗言, 華聲, 實義. 上自賢聖,
下至愚騃, 微及豚魚, 幽及鬼神, 群分而氣同, 形異而情一, 未有聲入而不應, 情交而不感者, 聖人知其然, 因其言,
經之以六義, 緣其聲, 緯之以五音.
그는 시가 정(情), 말, 소리, 뜻의 결합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데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시
가에 민생의 고통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시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사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문장은 시대에 부
합되게 지어야 하고, 시가는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 <여원구서>: 文章合爲時而著, 歌詩合爲事而作.)"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는 반드시 육의에 부합하여야 사회적 사명을 달성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시경(詩經)≫의 현실주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계속하여 그는 시경의 정신이 당대에 들어서서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였음을 인식하고 당대 이전의 작자들에게
시가의 사회적 효용이 없음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당대 시인들에 대해서도 시경의 정신이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비평하였다.
"당이 흥한 2백년 이래 그 사이 시인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내세울 만한 작품으로는 진자앙(陳子昻)의
<감우시(感遇詩)> 20수, 포방(鮑魴)의 <감흥시(感興詩)> 15수 등이 있다. ……
이백(李白)의 작품은 특출하여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없지만 풍(風), 아(雅), 비(比), 흥(興)의 작품을 찾아보면
열에 하나도 없다.
두보(杜甫)의 시는 …… <신안리(新安吏)>, <석호리(石壕吏), <동관리(潼關吏)>, <한로자(寒蘆子)>, <유화문
(留花門)> 등의 작품과 "부귀한 집 대문에는 술과 고기 냄새 진동하는데, 길가에는 얼어 죽은 시체가 나뒹군다."
와 같은 싯구가 들어있는 작품은 30~40수에 불과하다. 두보조차 이러하거늘 하물며 두보 보다 못한 사람들에
있어서랴!"
唐興二百年, 其間詩人, 不可勝數, 所可擧者, 陳子昻有感遇詩二十首, 鮑魴有感興詩十五篇. …… 李之作, 挨奇矣,
人不逮矣, 索其風雅比興, 十無一焉. 杜詩 ……然其新安吏·石壕吏·潼關吏·寒蘆子·留花門之章, '朱門酒肉臭, 路
有凍死骨'之句, 亦不過三四十首. 杜尙如此, 況不逮杜者乎!
그는 시가의 이러한 사회적 효용을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써 채시관(採詩官) 제도의 시행을 황제에게 건
의하여 시와 정치의 밀접한 관계를 역설하였다.
"신이 듣걷대 성왕은 다른 사람의 말을 참작하여 자신의 허물을 보완하여 이로써 다스림의 근본을 세우고 교화
의 근원을 이끈다고 합니다. 장차 풍속을 살피는 관리를 뽑고 채시관을 설립하여 노래부르는 소리와 풍자하는
시를 매일 아래에서 채집하고 해마다 위에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을 일러 말하는 자는 죄가 없고 그것을
듣는 자는 스스로 경계하기에 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策林> 第69 '採詩': 臣聞, 聖王酌人之言, 補己之過, 所以立理本, 導化源也. 將在乎選觀風之使, 建採詩之官, 俾
乎歌詠之聲, 諷刺之興, 日採於下, 歲獻於上者也. 所謂言之者無罪, 聞之者是以自誡.
결론적으로 그는 "임금, 신하, 백성, 사물을 위하여 시를 지은 것이지 문체를 위하여 지은 것이 아니며(<新樂府
序>: 爲君, 爲臣, 爲民, 爲物, 爲事而昨, 不爲文而作.)", "윗사람은 풍(風)으로써 아랫사람을 교화하고, 아랫사람
은 풍으로써 윗사람을 풍자해야 한다.(<毛詩大序>: 上以風化下, 下以風刺上.)"는 정신에 입각하여 시의 사회적
효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실천하기 위하여 정치와 사회를 비판한 <풍유시> 172수를 짓고
그것에 최고의 평가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그가 40세 전후에 황제의 신변에서 좌습유가 되었을 때 가장 강렬하였으며, 이로 인하
여 강주(江州)로 좌천된 후에는 인생관과 함께 시풍의 변화를 겪는다. 이에 "문장으로 명성을 얻고 마침내 문장
으로 죄를 받게 된(<여원구서>: 始得名於文章, 終得罪於文章.)" 백거이는 뒷일들을 떨쳐 버리고, "한가지 일도
이루지 못한채 강주로 좌천의 길을 떠나는구나!(<題四皓廟>: 不成一事貶江州.)", "새장 속에 갇힌 몸 언제나 풀
려날까?(<紅鸚鵡>: 籠檻何年出得身.)", "내 스스로 자문하건대, 어찌 자연으로 돌아옴이 늦었던가?(<仙娥峯下
作>: 感彼私自問, 歸山何不早.)"라고 하며 초기의 시상과는 판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거이의 이러한 변
화는 두 가지 측면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문학의 자연적인 변동에 기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집정자
의 지지를 받지 못한 까닭이다.(陳寶條 <白居易在文學史上的獨特地位>)
3. 백거이 시의 분류
백거이는 <여원구서(與元九書)>에서 자신의 시를 아래와 같이 풍유시(諷諭詩), 한적시(閒適詩), 감상시(感傷詩),
잡률시(雜律詩)의 4종류로 분류하였다.
"좌습유가 된 이래로 사물을 접하면서 느낀 모든 찬미, 풍자, 흥(興), 비(比)에 관한 것과 무덕(武德)에서 원화(元
和)까지 시사를 제재로 삼고 '신악부'라 제목을 붙힌 것을 합한 150여수를 풍유시라 하였다. 또 공직에 물러나
홀로 지내거나 병을 핑계로 물러나서 한가하게 거처하면서 분수를 알고 몸을 잘 보전하며 마음이 끌리는 대로
읊은 것 100수를 한적시라 하였다. 또 사물이 밖에서 끌어당기고 정감이 안에서 움직여 느낌이 닿는대로 찬탄
하여 읊조린 것 100수를 감상시라 하였으며, 5언, 7언, 장구(長句), 절구의 100운에서 2운에 이르는 것 400여
수를 잡률시라 하였다."
自拾遺來, 凡所遇所感, 關於美刺興比者, 又自武德訖元和, 因事立題, 題爲新樂府者, 一百五十首, 謂之諷諭詩, 又
或退公獨處, 或移病閒居, 知足保和,吟翫性情者, 一百首, 謂之閒適詩, 又有事物牽於外, 情理動於內, 隨感遇而形
於歎詠者, 一百首, 謂之感傷詩, 又有五言七言長句絶句, 自一百韻至兩韻者, 四百餘首, 謂之雜律詩.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풍유시는 바로 풍자시로 그 내용은 정치의 좋고 나쁨과 민생의 고락 등을 노래한 것이며,
그 범위는 권력을 잡고 있는 권신과 재야의 은사를 불문하고 논하여 시대의 부족함과 시정의 득실을 도우고 살
핀 것이다.
이것은 국풍(國風)에서 그 방법을 취한 것으로 <시서(詩序)>에서 말하는 "문장을 가지고 넌지시 간하니 말하는
자는 죄가 없고, 그것을 듣는 자는 족히 경계해야 한다.(<毛詩大序>: 主文而譎諫, 言之者無罪, 聞之者足以戒.)"
는 것과 같은 것이다.
풍유시 중 가장 전형적인 것으로는 <신악부> 50수와 <진중음(秦中吟)> 10수를 들 수 있으며, 여기에서 거론한
중점적인 문제는 ① 백성들의 고통스런 생활상, ② 과중한 세금과 부역, ③ 권문세가와 귀족들의 사치와 낭비,
④ 세력자들의 권력남용과 횡포, ⑤ 쓸데 없는 전쟁, ⑥ 권력자에 아부하거나 위선에 찬 세상 인심, ⑦ 부녀자의
문제 등이다.(金學主, 李東鄕 ≪中國文學史Ⅰ≫, 韓國放送通信大學出版部, 1986. p322)
그러나 백거이는 강주로 좌천된 후부터는 <방어(放魚)>, <문백상(文柏牀)>, <심양삼제(潯陽三題)>, <대수(大
水)> 6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풍유시를 쓰지 않았으며, 시절을 감상하고 늙음을 탄식하거나 자식과 친구를 슬퍼
한 몇몇 시들 외에는 모두 한적한 생활을 표현하였다. 이와 같이 마음속에서 한적하고 쾌락한 생활을 희망했던
그는 이러한 마음을 주제로 삼아 주로 자연의 풍광(風光)과 마음의 평정을 읊은 시를 한적시라 이름하였으며 그
평가는 풍유시 다음에 두었다.
감상시란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실제로 한적시와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그러나 풍유시가 세상을 풍자하고
한적시가 허심탄회하게 자연의 풍광을 읊은 것이라면, 감상시는 인생의 경험에서 감정적으로 강렬하게 느껴지
는 것, 즉 인생에 대한 허무, 애상, 인정, 세정(世情), 추억, 우정 등에 관한 감회와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楊林
<白樂天과 그의 詩>, 서울대학교대학원, p26) 이것은 주로 노년기에 쓴 작품으로 그 분량은 매우 적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감상시 중에서도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 등은 창기들도 능히 암송할 수 있을 정
도로 시정(市井)에 널리 유행하여 천고의 걸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잡률시는 어떤 사물에 정감을 느끼고 흥취가 일어나서 짓거나 아름다운 형식과 격률에 치중한 시의 한 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에 속하는 작품으로는 격시(格詩)라는 형식을 포함하여 모두 2203수로 그가 분류한 시가
유형 중에 그 편수가 가장 많다. 그러나 사실상 잡률시 중에는 풍유시에 속하는 것도 있고 한적시나 감상시에 속
하는 것도 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집 15권을 처음으로 편집한 것은 헌종(憲宗) 원화 15년(815)의 일이다. 그때 그는 자신의
시를 상술한 바와 같이 풍유, 한적, 감상, 잡률로 사분하였고, 그후 목종(穆宗) 장경 4년(834)에 시문을 함께 담
은 ≪백씨장경집(白氏長慶執)≫을 편집했을 때도 여전히 이 네 가지 분류 방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문종(文宗)
대화 2년(828)에 ≪백씨장경집≫ 이후의 시문을 모아 후집 5권을 3차 편집하였을 때는 이미 있던 작품은 그대로
두고 새로운 작품만을 분류하면서 격시(格詩)와 율시(律詩) 두 종류로만 분류하였다. 그는 그러한 분류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는데, 율시는 이미 아는 바와 같고, 격시는 대체로 한위(漢魏)의 고시에 다른 다양한 형
식이 가미되어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는 일종의 고체시를 가리키는 것이다.
(劉本棟 ≪白居易≫, 中國歷代詩人選集 18, 林白出版社, 1978, 金在乘 <白居易의 格詩考> 中國人文科學 제3집,
1984, 참고)
백거이의 격시는 만년에 쓰여진 것으로 형식이 다양하며, 내용은 일상생활에서 느낀 정감과 당시의 생활상을 소
박하게 기록한 것으로, 관직생활, 술, 지족안분(知足安分)하는 낙천적인 생활태도를 읊은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
다. ≪백향산시집(白香山詩集)≫에서 격시라는 이름으로 분류된 작품은 모두 293수이며, 그의 나이 51세(장경
2년, 822)부터 71세(회창 2년, 842)까지 20년 사이에 쓰여진 것이다.
4. 백거이 시의 특징
백거이의 시가 당대 그 누구보다 많은 독자층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가 갖는 독특성 때문이며, 그것은
대체로 평이성, 풍자성, 사실성으로 귀납할 수 있다.
1) 평이성(平易性)
"백낙천은 시를 지을 때마다 한 사람의 노파도 그것을 이해하도록 하였다. '이해 못하겠습니까?'라고 물어보아
'이해하겠습니다.'라고 하면 그것을 기록하고, '이해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다시 그것을 쉽게 고쳤다."
<甌北詩話>: 白樂天每作詩, 令一老嫗解之, 問曰解否? 曰解則錄之, 不解則復易之.
여기에서 그가 얼마나 일반대중이 읽기 쉽도록 평이한 시어(詩語)를 사용하여 시를 지었는지 알 수 있다. 명대
(明代) 호응린(胡應麟)은 ≪시수(詩藪)≫ 권6에서, "낙천의 시는 세상에서 이르기를 얕고 속되다고 하는데 이는
뜻과 말이 합치되었기 때문이다.(樂天詩, 世謂淺近, 以意與語合也.)"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얕고 속되다"고 한
말은 곧 평이하다는 뜻이며, "뜻과 말이 합치되었다"는 것은 그의 시어가 복잡하거나 함축적이지 않은 직설적인
언어라는 뜻이다. 이러한 직설적인 언어 구사가 가장 잘 나타난 시가 바로 풍유시와 <비파행>, <장한가> 등이다.
특히 그의 시는 장안(長安)에서 강서(江西) 3~4천리에 이르는 향교, 불사, 객사라든지 일반 서민, 승려, 과부, 처
녀들의 입에까지 회자하였다. 절간의 벽에 그의 시가 쓰여지고 <장한가>를 외우는 기녀가 술좌석에서 돈을 더
요구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의 시가 평이한 언어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2) 풍자성(諷刺性)
뜻이 과격하고 말이 질박한 것이 백거이 풍유시의 특색이다. 뜻이 과격하다는 것은 그의 시가 노골적인 풍자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데, 그는 이 점에 있어서 두보를 비평하고, 두보의 시 중에서도 "부귀한 집 대문에는 술과 고
기 냄새 진동하는데, 길가에는 얼어죽은 시체가 나뒹군다.(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는 것과 같은 사상만을 취하
여 그의 풍유시를 써 나갔다. 이러한 특성은 그의 풍유시 172수 가운데 매우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그가
당시의 정치나 사회를 풍자한 것은 바로 그의 문학 주장의 실천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풍자성을 가진 그의 풍유
시는 일반 서민의 입장을 대변하여 그들의 고통을 노래하였기 때문에 대중적인 사랑을 더욱 많이 받을 수 있었다.
3) 사실성(寫實性)
백거이의 시 3800여수는 모두 그가 일생동안 겪은 생활의 기록이며 당대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반영한 한 폭의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당기(唐紀)≫에서는, "헌종 원화 2년에 백거이는 악부 및 시 100여
편을 지어 시사를 풍자하였다.(憲宗元和二年, 白居易作樂府及詩百餘篇, 規諷時事.)"라고 하였고, <여원구서>에
서는, "문장은 시대에 부합되게 지어야 하고 시가는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시사를
풍자하고 시대나 시사에 부합되게 지어야 한다는 것 등은 바로 백거이 시의 사실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상생활과 시사를 이탈하지 않고 현실을 충실하게 노래한 그의 사실적 시가창작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출처 : 카페 칠불사 (이뭣고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