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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古文學/散文, 小說

女戎說

by 柳川 2019. 6. 28.
                   女戎說 /동명집 제23권(詩諷 · 懲篇二) /진 헌공〔晉獻公〕
 
 
진 헌공(晉獻公)은 여희(驪姬)의 참소를 듣고 따라서 아들을 죽이고 화란을 불러와, 그 화가 5대 동안이나 연이어지게 하였습니다. 이에 〈여융설(女戎說)〉을 지어 경계로 삼게 하였습니다. 그 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옛날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회계산(會稽山)에 붙어살다가 범려(范蠡)와 대부(大夫) 종(種)의 계책을 써서 저라(苧羅)에 살던 서시(西施)라는 여인을 얻어 오왕(吳王)에게 바쳤습니다. 그러자 오왕이 크게 기뻐하고는 날마다 서시와 더불어 놀면서 밤새워 술을 마시며 정사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이에 나라가 조석 간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객 가운데 비유공(非有公)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간언을 올리고자 하니 오자서(伍子胥)가 죽음을 당한 것이 겁나고, 간언을 올리지 않자니 나라가 망할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이에 비유공이 들어가서 오왕을 뵙고는 은미하게 풍간(諷諫)하였습니다.
“왕께서는 남융(男戎)과 여융(女戎) 얘기를 아십니까?”
그러자 오왕이 말하였습니다.
“과인은 들어 보지 못했다. 무엇을 일러 남융이라고 하는가?”
“날이 시퍼런 칼이 앞에 있고 긴 창이 뒤에 있으며, 화살과 돌이 번갈아 가면서 쏟아지고 흐르는 핏물이 시내를 이루는 것이 바로 남융입니다.”
“그럼 무엇을 일러 여융이라고 하는가?”
“붉은 입술에 하얀 치아와 고운 이마와 그린 듯한 눈썹을 가진 얼굴로 긴 소맷자락을 휘날리고 악기를 뜯는 것을 바로 여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참으로 융(戎)이 될 수가 있다. 그런데 여융은 무슨 말인가?”
“이름은 비록 여자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의 나라를 해치므로 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융에 관한 말이 옛날에도 있었는가?”
“전(傳)에 있습니다.”
“들어 볼 수 있는가?”
“그렇습니다. 신이 한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그 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말희(妺喜)라는 여자는 유시씨(有施氏)의 딸입니다. 하(夏)나라의 왕 걸(桀)이 유시씨를 정벌하자, 유시씨가 말희를 바쳤습니다. 걸왕이 말희에게 빠져들어서 날마다 음탕한 짓을 하자, 백성들에게 해독이 미쳤습니다. 백성들이 그 해독을 참지 못하고 걸왕과 함께 망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탕왕(湯王)이 드디어 걸왕을 정벌하였습니다. 걸왕과 말희가 남소(南巢)로 도망쳐서, 하나라가 드디어 망하였습니다.
 
그 후 600여 년이 지난 뒤에 상(商)나라에 이르러 달기(妲己)의 일이 있었습니다. 달기란 여자는 유소씨(有蘇氏)의 딸입니다. 상나라 임금 수(受)가 유소씨를 정벌하자, 유소씨가 달기를 바쳤습니다. 상나라 왕이 오직 달기의 말만 따르면서 기이한 기교와 음란한 놀이를 만들어 달기를 기쁘게 해 주었습니다. 포락(炮烙)의 형벌을 만들어서 웃게 하고, 미미(靡靡)의 음악을 만들어 밤새도록 풍악을 울리며 즐겨, 음란하고 포악함이 걸왕보다 더 심하였습니다. 이에 무왕(武王)이 800명의 제후들을 목야(牧野)에 모이게 하고는, 이어 맹서하여 말하기를 ‘암탉은 새벽에 울지 말아야 한다.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삭막해진다.[牝雞無晨 牝雞之晨 惟家之索〕’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드디어 은나라를 정벌하여 멸망시키니, 주왕(紂王)은 스스로 불타 죽었으며, 태공(太公)이 달기를 참수하였습니다.
 
그 뒤에 257년이 지나서 주(周)나라에 포사(褒姒)의 일이 있었습니다. 포사라는 여인은 포인(褒人)의 딸입니다. 포인이 죄를 짓고는 주나라 유왕(幽王)에게 딸을 바쳤는데, 유왕이 그 여인에게 폭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신후(申后)를 폐하고 포희(褒姬)를 세웠으며, 태자를 폐하고 포희의 아들 백복(伯服)을 세웠습니다. 당시에 포희가 안에 있었고 간신(奸臣)인 황보(皇父)가 밖에서 용사(用事)하였으므로, 천하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였습니다. 이에 해와 달에 일식과 월식이 일어났고, 산이 무너지고 하천이 고갈되었습니다. 큰 우레와 지진의 변괴가 나왔으며, 〈백화(白華)〉ㆍ〈첨앙(瞻卬)〉ㆍ〈소반(小弁)〉ㆍ〈청승(靑蠅)〉ㆍ〈절남산(節南山)〉ㆍ〈우무정(雨無正)〉ㆍ〈정월正月)〉ㆍ〈시월지교(十月之交)〉의 시(詩)가 지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왕은 경계하지 않고 거짓 봉화를 올려서 장난질을 치면서 포희를 웃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견융(犬戎)이 쳐들어와서 여산(驪山)에서 유왕을 시해하여 주나라가 드디어 동쪽으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8년 뒤에 위(衛)나라에서 선강(宣姜)의 일이 있었습니다. 선강은 제(齊)나라의 여자입니다. 위 선공(衛宣公)이 아들 급(伋)을 위하여 제나라에서 며느리를 들였는데, 며느리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이 취하고자 하여, 하수(河水) 가에다 누대(樓臺)를 지어 놓고 선강을 맞이하였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신대(新臺)〉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선강이 수(壽)와 삭(朔)을 낳았습니다. 삭이 선강과 더불어 선공에게 급(伋)을 참소하여 적(賊)으로 하여금 급을 죽이게 하였는데, 수(壽)와 급이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슬퍼하여 그들을 위해 〈이자승주(二子乘舟)〉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선강이 또 공자(公子) 완(頑)과 더불어 음란한 짓을 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순지분분(鶉之奔奔)〉을 지어 읊었습니다.
선강은 미색이 아주 빼어났으며 복식도 아주 성대하였으나 짐승만도 못한 행실을 하였습니다. 나라 사람들이 그 옷은 아름다우나 그 행실은 더러우므로 그를 위하여 〈군자해로(君子偕老)〉란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선강이 죽은 뒤에 적인(狄人)들이 위(衛)나라에 들어가 위나라의 임금인 의공(懿公)을 죽였습니다. 의공은 혜공(惠公) 삭(朔)아들입니다.
 
그로부터 58년이 지난 뒤에 진(晉)나라에서 여희(驪姬)의 일이 있었습니다. 여희는 여융(驪戎)의 여인입니다. 진 헌공(晉獻公)이 여융을 정벌하고서 여희를 얻고는 장차 부인(夫人)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사소(史蘇)로 하여금 길흉을 점쳐 보게 하였는데, 사소가 구화(口禍)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헌공이 듣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여희는 과연 세자(世子)인 신생(申生)을 참소하여 죽였으며, 이오(夷吾)와 중이(重耳) 두 공자(公子)를 축출하고 자신의 아들 해제(奚齊)를 세웠습니다. 여희의 여동생 역시 탁자(卓子)를 낳았는데, 헌공이 졸한 뒤에 진나라에서는 해제와 탁자를 조정에서 살해하였고, 여희를 시장에서 매질하여 죽였습니다. 진나라는 이로 인해 수십 년 동안 크게 어지러웠는데, 문공(文公)이 진나라로 들어가 안정시켰습니다.
 
그로부터 63년이 지난 뒤에 진(陳)나라에서 하희(夏姬)의 일이 있었습니다. 하희라는 여자는 정 목공(鄭穆公)의 딸이며, 동궁(東宮)인 자맥(子貉)의 동생이며, 진나라의 대부인 하어숙(御叔)의 아내이자 징서(徵舒)의 어머니입니다.
어숙이 죽자 진 영공(陳靈公)이 대부인 공녕(孔寧)과 의행보(儀行父)와 어울려 하희와 간통하였습니다. 진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미워하여 〈주림(株林)〉의 시를 지어 읊었습니다. 영공은 공녕과 의행보 두 사람과 더불어 모두 하희의 속곳을 속에 입고 조정에서 장난을 쳤습니다. 설야(洩冶)가 이에 대해서 간하자, 두 사람이 설야를 죽였습니다.
영공이 하씨와 더불어 술을 마실 적에 두 사람이 함께 마셨는데, 술이 얼큰해지자 임금과 신하가 징서를 놓고 희롱하였습니다. 임금이 신하에게 ‘징서의 모습이 네 모습과 비슷하다.’라고 하자, 신하는 ‘징서의 모습이 임금과 비슷합니다.’ 하였습니다.
징서가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영공을 활로 쏘아 시해하였습니다. 초 장왕(楚莊王)이 그 소식을 듣고서 진나라를 정벌하여 징서를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고, 진나라를 현(縣)으로 만들려고 하다가 간하는 말을 듣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로부터 52년이 지난 뒤에 제(齊)나라에서 당강(棠姜)의 일이 있었습니다. 당강이라는 여자는 제나라 동곽언(東郭偃)의 여동생이며, 당공(棠公)의 아내입니다. 당공이 죽은 뒤에 최저(崔杼)가 아내로 삼았는데, 제 장공(齊莊公)이 그가 미색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그와 간통하였습니다.
장공이 일찍이 최저의 집에 갔을 적에 그의 아내와 더불어 희롱하였는데, 최저가 문을 걸어 잠그고서 군사를 일으키자, 장공이 대(臺)에 올라가서 군사를 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며, 맹약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사당에서 자살하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장공이 담을 넘어서 도망치려고 하였는데, 최저의 군사들이 마침내 활을 쏘아 장공을 시해하였습니다. 장공이 죽은 뒤에 최저는 벽제(辟除)도 하지 않고 갑병(甲兵)도 세우지 않은 채 단지 하거(下車) 10승(乘)만을 가지고 장공을 장사 지냈습니다.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뒤에 초(楚)나라에서 진녀(秦女)의 일이 있었습니다. 진녀는 초 평왕(楚平王)이 태자인 건(建)의 아내로 삼기 위하여 진(秦)나라에서 맞아 온 여자인데, 평왕이 비무기(費無忌)의 말을 듣고서 스스로 아내로 취하였습니다. 비무기는 태자가 즉위한 뒤에 자신을 죽일 것이 두려워서 다시 태자를 참소하니, 평왕이 비무기의 말을 믿었습니다. 이에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오사(伍奢)가 평왕에게 간하자, 평왕이 노해서 오사 및 그의 아들 오상(伍尙)을 죽였습니다. 오상의 동생인 오원(伍員, 伍子胥)이 오(吳)나라로 도망쳐서, 오왕(吳王)을 꾀어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오왕이 한수(漢水)에서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다섯 번 싸워 이겨서 영(郢)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초나라의 소왕(昭王)은 도망을 치다가 오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힐 뻔하였습니다. 오원은 소왕을 잡으려고 하다가 잡지 못하자, 이미 죽은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낸 다음, 배를 밟고 눈을 뽑았으며, 매질을 300대나 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초나라는 거의 망할 뻔하였는데, 초나라의 신하인 신포서(申包胥)가 7일 동안이나 진(秦)나라의 조정에 가서 통곡하여, 진나라 군사를 빌려 와 초나라를 구원하고 오나라를 쳤습니다. 그러자 오나라 군사들이 이에 돌아갔습니다.
 
이상에서 말한 여덟 가지 사례는 모두 여자로 인해서 화를 불러온 것인데, 그 화가 이와 같이 컸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여융(女戎)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오왕이 두려운 기색으로 말하였습니다.
“여융의 해독과 남융의 해독을 비교해 볼 때 어느 것이 더 심한가?”
이에 비유공이 답하였습니다.
“여융이 더 심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남융은 바깥에서 치는 데 반해 여융은 안에서 치는바, 그 느슨하고 위급함이 같지 않습니다. 지금 뛰어난 장수로 하여금 수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한 성을 공격하게 한다면, 그 승패는 기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말희(妺喜)나 달기(妲己)와 같은 여자가 국내에 있으면, 그 나라는 반드시 망합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나라의 근본은 임금에게 있고 임금의 근본은 마음에 있는데,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으로는 여색만 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옛날의 어진 임금은 여색으로 경계를 삼지 않은 경우가 없었습니다. 진 문공(晉文公)이 남위(南威)를 얻고는 3일 동안 조회를 하지 않았다가 밀쳐 내어 멀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초 장왕(楚莊王)이 진(陳)나라를 정벌하고서 하희(夏姬)를 들이려고 하자, 신공(申公) 무신(巫臣)이 간언을 올려 저지하였습니다. 이 두 임금이 오패(五覇)에 들어서 이름을 후세에 드리울 수 있었던 것은 여색을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아, 여융의 피해가 이렇게까지 크단 말인가. 경계해야겠다.”
그러자 객이 자리를 피하면서 두 번 절한 다음 아뢰었습니다.
“처음에는 왕께서 경계하지 않았으므로 감히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왕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실로 만대의 무궁한 복입니다. 신은 곧바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왕께서는 멀리해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다시 가까이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이에 오왕이 말하였습니다.
“무슨 말인가?”
“신이 듣건대 월왕(越王)이 저라(苧羅)에 살던 서시(西施)라는 여인을 찾아내어 왕께 바쳤다고 하는데, 그런 사실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있다.”
“그렇다면 신의 말이 역시 마땅하지 않습니까.”
“비록 그를 궁중에 두기는 하였지만, 과인은 미혹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대가 여융에다 비긴 것 역시 지나치다.”
“황공합니다만, 이것이 바로 왕께서 미혹되신 것입니다. 무릇 미혹된 자는 미혹된 줄을 알지 못하고, 꿈꾸는 자는 꿈을 꾸는 줄을 알지 못하며, 취한 자는 취한 줄을 알지 못합니다. 깨어난 뒤에야 미혹된 줄을 알지, 미혹되었을 적에는 미혹된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깨어난 뒤에야 꿈꾼 것을 알지, 꿈꾸는 동안에는 그것이 꿈인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깨어난 뒤에야 취한 줄을 알지, 취했을 적에는 취한 줄을 모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걱정거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비웃을 줄은 알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줄은 모르는 것입니다.
 
걸왕(桀王)이 말희에게 빠진 것에 대해서 주왕(紂王)이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달기에게 빠진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비웃는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주왕이 달기에 빠진 것에 대해서 유왕(幽王)이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포사에게 빠진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비웃는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유왕이 포사에게 빠진 것에 대해서 위 선공(衛宣公)ㆍ진 헌공(晉獻公)ㆍ진 영공(陳靈公)ㆍ제 장공(齊莊公)ㆍ초 평왕(楚平王)이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들이 선강(宣姜)ㆍ여희(驪姬)ㆍ하희(夏姬)ㆍ당강(棠姜)ㆍ진녀(秦女)에게 빠진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이 비웃는다는 것은 몰랐습니다. 오직 다른 사람을 비웃기만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비웃은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다른 사람에게 비웃음을 당했던 것입니다.
가령 말희에다가 달기를 비기어 보고, 달기에다가 포사를 비기어 보고, 포사에다가 선강ㆍ여희ㆍ하희ㆍ당강ㆍ진녀를 비기어 보았다면, 하ㆍ은ㆍ주 삼대(三代)는 반드시 망하지 않았을 것이고, 위(衛)나라는 반드시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고, 진(晉)나라는 반드시 어지러워지지 않았을 것이고, 제(齊)나라는 반드시 화살을 쏘지 않았을 것이고, 초(楚)나라는 반드시 그 묘가 파헤쳐지고 그 시신이 매질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은나라가 거울삼을 것이 멀리 있지 않으니, 바로 하후의 시대에 있도다.〔殷鑑不遠 在夏后之世〕’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왕과 초 평왕과는 시대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초 평왕의 화는 우리 선군(先君)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왕께서는 반드시 초 평왕에 대해서 비웃으실 것입니다. 진녀(秦女)에 대해 비웃으면서 월녀(越女)에게 미혹되셨으니, 신은 후세 사람들이 대왕에 대해 비웃는 것이 대왕께서 지금 초 평왕에 대해 비웃는 것과 같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진녀라는 여인은 초 평왕이 태자(太子) 건(建)을 위하여 맞이해 온 여인인데, 그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취했으니 그 무도함이 극에 달하였다. 이 때문에 시신에 매질을 당하는 화를 당하였던 것이다. 과인이 월녀에 대하여 역시 그와 같이 하였던가? 그대가 그것과 비교하면서 같다고 하는 것 역시 지나치지 않은가?”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바름과 바르지 않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까. 역시 미혹된 것에 대해서만 논할 뿐입니다. 신이 진달한 여융은 모두 여덟 가지입니다. 임금이 신하의 아내와 간음한 것이 둘이니, 진 영공과 제 장공이 그런 경우입니다. 아들의 아내와 간음한 것이 둘이니, 위 선공과 초 평왕이 그런 경우입니다. 걸왕이나 주왕ㆍ유왕ㆍ진 헌공에게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도 그런 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미혹된 것은 똑같습니다. 미혹되면 망하는 법입니다. 반드시 진 영공이나 제 장공이나 위 선공이나 초 평왕과 같은 일이 있은 다음에야 난망(亂亡)이 따른다고 한다면, 걸왕이나 주왕은 반드시 망하지 않았을 것이고, 유왕은 반드시 죽지 않았을 것이고, 진 헌공은 반드시 어지러워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그대는 어떻게 과인이 월녀에게 미혹되었다는 것을 아는가?”
“대왕께서는 지난날 사람들을 뜰에 세워 놓고 출입할 적에 반드시 대왕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으니, 뜻이 원수 갚는 것을 잊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뜻을 가다듬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므로, 월나라를 부초(夫椒)에서 패퇴시켜 취리(檇李)의 원한을 갚았습니다. 그런데 월녀를 얻은 뒤로는 월녀에게 푹 빠져서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서 고소대(姑蘇臺)를 쌓고 관왜궁(館娃宮)을 짓고 춘소궁(春宵宮)을 세우고, 청룡주(靑龍舟)를 띄우고서 날마다 월녀와 더불어 물놀이를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여러 신하들이 감히 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간한 자는 오직 오자서(伍子胥) 한 사람뿐이었는데, 대왕께서 그를 죽여서 시신을 강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니 미혹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옛날에 걸왕(桀王)이 용방(龍逄)을 죽였고 주왕(紂王)이 비간(比干)의 배를 갈랐으며, 진 영공(陳靈公)이 설야(洩冶)를 죽였고 초 평왕(楚平王)이 오사(伍奢)를 멸족하였으며, 제 장공(齊莊公)이 안영(晏嬰)의 간언을 거부하였고, 주 유왕(周幽王)이 가보(家父)의 시를 잊었으며, 진 헌공(晉獻公)은 사소(史蘇)의 경계를 소홀히 하였고, 위 선공(衛宣公)은 신대(新臺)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악을 고치지 않고 오직 여색만을 탐하다가 끝내는 난망의 화를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앞 수레가 엎어진 것을 보면 뒤 수레는 경계해야 한다.〔前車覆 後車戒〕’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삼가시기 바랍니다.
신이 듣건대 월왕(越王)은 껄끄러운 섶에 누워서 자고 쓰디쓴 쓸개를 맛보며, 뜨거운 것을 손에 쥐고 있고 찬 얼음을 가슴에 품고 있으며, 죽은 자를 조문하고 산 자를 위문한다고 합니다. 대왕께서는 음란하게 놀기를 이와 같이 하고 월왕은 고생을 하는 것이 저와 같은데, 와신상담을 하고 있는 월나라가 음란하게 놀기만 하는 오나라를 친다면, 신은 아마도 승부가 이미 결정 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과인의 나라는 지형이 험하고 군사가 아주 많은 데 반해 월나라는 아주 작은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대왕의 말씀은 잘못되었습니다. 옛날에 걸왕은 사해(四海)를 다 차지하여 나라 안에는 하수(河水)ㆍ제수(濟水)ㆍ태화(太華)ㆍ이궐(伊闕)ㆍ양장(羊腸)의 험고함이 있었는데도 탕왕(湯王)이 겨우 70리의 땅을 가지고서 걸왕을 멸망시켰습니다. 걸왕의 군사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그 지형이 험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겨우 70리의 땅을 가진 자에게 병탄된 것은 말희(妺喜)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월녀로 인한 폐해는 말희로 인한 폐해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오나라의 세 강(江)이 비록 험고하기는 하지만 이궐이나 양장보다 험고하지 않으며, 병갑(兵甲)이 비록 많기는 하지만 온 천하의 군사들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월나라의 땅이 비록 작기는 하지만 70리는 훨씬 더 됩니다. 그런데 대왕께서 믿는 것은 양장의 험고함보다는 못하며, 천하의 군대보다는 적습니다. 이에 반해 깊이 총애하는 자는 미색이 말희보다 못하지가 않으며, 소홀히 여기는 것은 70리가 훨씬 넘는 월나라입니다. 그러니 역시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대는 물러가라. 과인이 잘 알았다.”
그 뒤에 오왕은 밥을 먹어도 맛이 없고, 밤에도 편히 못 잔 것이 여러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내 그 말을 쓰지 않았다가 월나라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옛사람의 말이 있으니 ‘어진 이를 존경하되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하라.〔賢賢易色〕’라고 하였다. 오나라 왕이 만약 이와 같이 하였다면 어찌 고소대(姑蘇臺)에서 목숨을 잃었겠는가.”
하였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난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부인네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亂匪降自天, 生自婦人〕”라고 하였습니다. <大雅/蕩之什/瞻卬)

이어 사(辭)를 지어 붙였는데, 그 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深山大澤,                                깊은 산과 크고도 큰 못이 있으면
實生龍蛇.                                그 안에는 용과 뱀이 사는 법이네 
女戎禍晉,                                여융의 화 진나라서 일어났을 때 
其兆齒牙.                                참소하는 데서 조짐 싹이 텄다네 
彼女戎者,                                여융의 화 일어나게 했던 여자는 
艾封人之子耶.                           그건 바로 애봉인의 딸이었다네.
 
 

 

東溟集

 

17세기 우리나라의 문학사(文學史)와 사상사(思想史)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는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의 詩文集.

 

명종조의 권신인 정순붕의 고손. 동명이 살았던 시대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이 이어지던 국난기(國難期)와 그 이후의 북벌운동(北伐運動)이 벌어졌던 우리 민족의 시련기였던 만큼, 《동명집》은 그 당시 우리 역사를 증언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동명집은 3회에 걸쳐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초판(自撰本)은 전해진 것이 없고 중판본은 남구만에 의하여 간행된 <동명선생집>으로 이를 초간본이라(11권 3책 또는 11권 4책)한다. 세 번째 문집은 초간본이 간행된 지 24년 뒤인 1711년(숙종37) 남구만의 교정을 거쳐 동명의 후손인 정수곤(鄭壽崑) 등에 의해 총 26권 8책으로 간행되었다. 여기에는 악부(樂府)와 시(詩) 및 초간본에는 빠져 있던 문(文), 중요 저술 가운데 하나인 〈시풍(詩諷)〉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서 부록(附錄)의 형태로 동명의 동생인 정성경(鄭星卿)의 《옥호자유고(玉壺子遺稿)》, 정인경(鄭麟卿)의 《남악유고(南嶽遺稿)》 및 동명에 대한 만사(輓詞), 제문(祭文), 언행록(言行錄)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을 흔히 중간본 《동명집》이라고 한다.

 

14세인 1610년(광해군2) 별시 초시(別試初試), 15세에 사마 초시(司馬初試)에 입격하고 이후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들어가 큰 기대를 받았다. 동명은 독서에 심취하여 다양한 서책을 읽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기(史記)》는 중요한 애독서였으며, 이때의 독서 경험이 그의 일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0세에 〈검부(劍賦)〉를 지어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가행(歌行)과 악부(樂府)의 작품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33세인 1629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1632년에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관북 지방을 순행하면서 많은 변새시(邊塞詩)를 지어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광해조가 혼탁하다 하여 벼슬을 하지 않다가 인조반정 후 벼슬에 나가 효종때 예조참판을 끝으로 세상을 마쳤다.


 

 

[주-D001] 진 헌공(晉獻公)은 …… 하였습니다 : 

여희(驪姬)는 진 헌공의 총희(寵姬)이다. 헌공이 여희를 총애한 나머지 태자 신생(申生)을 폐하고 그녀의 소생인 해제(奚齊)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여희가 신생을 모함한 결과 신생이 끝내 자결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아들 중이(重耳)와 이오(夷吾)가 망명하였으며, 결국에는 헌공이 죽은 뒤 해제도 살해되었다. 이 일로 인해 진나라는 오랫동안 어지러워졌다. 《史記 卷39 晉世家》

[주-D002] 여융설(女戎說) : 

여융은 여인으로 말미암아서 일어나는 재앙을 말한다.

[주-D003] 오왕(吳王) : 

이 부분의 소주에 “어떤 본에는 오(吳)라고만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주-D004] 비유공(非有公) : 

동명이 이 〈여융설〉을 지으면서 만들어 낸 가상 인물이다.

[주-D005] 말희(妺喜) :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총희(寵姬)이다. 걸왕이 말희를 총애하여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었는데, 경궁(瓊宮)과 요대(瑤臺)를 만들고, 고기 산과 고기포 숲을 만들었으며, 배를 띄울 만큼 큰 술 연못을 만들어 놓고 말희와 즐기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史略 卷1 夏后氏, 殷成湯》

[주-D006] 상(商)나라에 …… 있었습니다 : 

달기(妲己)는 상(商)나라 주왕(紂王)의 총희이다. 주왕이 달기를 총애하여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를 걸어서 숲을 만들어 놓고는 밤새도록 잔치를 벌이면서 즐겼으며, 황음(荒淫)을 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史略 卷1 夏后氏, 殷成湯》

[주-D007] 포락(炮烙)의 형벌 : 

주왕(紂王)이 만든 잔혹한 형벌로, 구리 기둥에 기름을 바른 다음 그 아래에 숯불을 피워 달구어 놓고 죄수가 맨발로 기둥을 오르다가 숯불에 떨어져 죽도록 하는 형벌이다.

[주-D008] 미미(靡靡)의 음악 : 

주왕이 만든 음탕한 음악으로, 《예기(禮記)》에 “주(紂)는 음악을 ‘북쪽 변두리의 음탕한 소리[北鄙靡靡之聲]’로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주-D009] 무왕(武王)이 …… 하였습니다 : 

《서경》 〈목서(牧誓)〉에 나온다.

[주-D010] 주(周)나라에 …… 있었습니다 : 

포사(褒姒)는 주나라 유왕(幽王)의 총희이다. 유왕이 포사에게 혹하여, 여간해서는 웃지 않는 포사를 한번 웃기기 위하여 거짓으로 여산(驪山)에 봉화(烽火)를 올렸다. 사방의 제후(諸侯)들이 참으로 난리가 난 줄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다가 헛걸음을 하자, 그제서야 포사가 웃었다. 그 뒤에 정작 외적이 침입하였을 적에는 봉화를 올려도 제후들이 믿지 않고 군사를 보내오지 않아 국도(國都)가 함락되었다.

[주-D011] 위(衛)나라에서 …… 있었습니다 : 

춘추 시대 위나라 선공(宣公)이 그 아들 급(伋)을 위하여 제(齊)나라 여인 선강(宣姜)을 맞이하였다가, 미색(美色)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이 차지하고 싶어서 하수(河水) 가에 신대(新臺)라는 누대를 짓고 그를 맞이하여 수(壽)를 낳았다. 선공이 선강의 소생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는 욕심에 당시 태자로 있던 급(伋)을 죽이려고 계략을 꾸몄다. 급에게 백모(白旄)의 부절(符節)을 들고서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한 뒤에, 도적을 국경에 매복시켰다가 부절을 든 사람을 죽이게 한 것이다. 수(壽)가 그런 계획을 사전에 알고는 급에게 가지 말라고 권하였으나, 급이 듣지 않으니, 수가 몰래 부절을 훔쳐 먼저 국경에 도착해서 급 대신에 자신이 죽었다. 그 뒤에 선공이 죽고 어린 혜공(惠公)이 즉위하였는데, 그의 서형(庶兄)인 공자 완(頑)이 적모(嫡母)인 선강과 간통하였으며, 혜공의 뒤를 이은 의공(懿公) 때 나라가 적(狄)에게 망하였다. 《史記 卷37 衛康叔世家》

[주-D012] 진(晉)나라에서 …… 있었습니다 : 

여희(驪姬)는 진 헌공(晉獻公)의 총희이다. 진 헌공이 처음에 제강(齊姜)과 간음하여 태자 신생(申生)을 낳고, 융(戎)의 두 여인을 맞아 중이(重耳)와 이오(夷吾)를 낳고, 다시 여희를 얻어 해제(奚齊)를 낳았다. 여희가 헌공의 총애를 믿고 제 아들을 세우려고 신생을 죽이고 중이와 이오를 추방한 다음, 순식(荀息)을 시켜 해제에게 전위(傳位)하도록 하였다. 해제가 임금 자리에 오르자 대부로 있던 이극(里克)이 해제와 순식 및 여희의 여동생이 낳은 탁자(卓子)를 죽이고서, 진(秦)나라에 있던 이오를 맞이해 와 임금으로 즉위시키니, 이 사람이 혜공(惠公)이다. 혜공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인 어(圉)가 진(秦)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중 도망쳐 와 임금 자리에 즉위하여 회공(懷公)이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진(秦)나라에서 화를 내자, 당시 19년 동안이나 국외로 떠돌고 있던 중이(重耳)가 진(秦)나라 군대를 앞세우고 귀국하여 회공을 죽이고 임금 자리에 올라 진나라를 안정시켰다. 이가 바로 춘추오패(春秋五覇) 가운데 하나인 진 문공(晉文公)이다. 《史記 卷39 晉世家》

[주-D013] 진(陳)나라에서 …… 있었습니다 : 

하희(夏姬)는 정(鄭)나라 출신의 미인으로, 처음에 진(陳)나라 대부 어숙(御叔)의 아내가 되었으나 행실이 부정하여 진 영공(陳靈公) 및 그의 신하인 공녕(孔寧)ㆍ의행보(儀行父) 등과 간음하였는데, 이들 세 사람이 조정에서 하희와 더불어 술을 마시다가 하희의 아들 징서(徵舒)를 앞에 놓고 심한 농담을 하였다. 이에 징서가 분노하여 영공을 활로 쏘아 죽였다. 초 장왕(楚莊王)이 이를 빌미로 진나라로 쳐들어가 하씨 일족을 죽였다. 그러면서도 초 장왕은 하희의 미모에 혹하여 하희를 맞아들이려 했는데, 대부 무신(巫臣)이 간해서 맞아들이지 못하고는 하희를 연윤(連尹)인 양로(襄老)에게 주었다. 양로가 죽은 뒤에 하희는 정나라로 돌아갔다. 초나라 장왕이 죽은 뒤에 공왕(共王)이 즉위하여 무신을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무신은 온 가족과 재산을 다 가지고 떠나가, 정(鄭)나라에 이르러 하희를 데리고 진(晉)나라로 도망갔다. 《春秋左氏傳 宣公9年, 成公2年》

[주-D014] 설야(洩冶) : 

진 영공(陳靈公)의 음란한 행동을 간하다가 죽은 진나라의 대부인데, 이에 대해 공자가 “《시경》 〈대아(大雅)〉에 ‘사벽(邪辟)한 사람이 많은 세상에는 자기의 법을 세울 것이 없다.[民之多辟 無自立辟]’라고 한 말이 설야 같은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宣公9年》

[주-D015] 제(齊)나라에서 …… 있었습니다 : 

당강(棠姜)은 춘추 시대 제나라 당공(棠公)의 아내이다. 제나라의 대부인 최저(崔杼)가 당공이 죽어 조문하러 갔을 때, 당강을 보고 혹하여 아내로 삼았다. 제 장공(齊莊公)도 당강의 미모에 혹하여 밀통하였는데, 이를 안 최저가 격노하여 자신의 집으로 장공을 초대하여 주연을 베풀고는, 부하들을 시켜 활을 쏘아 죽였다. 최저는 장공을 시해한 뒤 장공의 이복동생인 공자 저구(杵臼)를 추대해 임금으로 삼았다. 이 사람이 바로 제 경공(齊景公)이다. 《春秋左氏傳 襄公25年》

[주-D016] 초(楚)나라에서 …… 있었습니다 : 

진녀(秦女)는 진(秦)나라 여자이다. 초 평왕(楚平王)이 태자인 건(建)의 아내로 삼기 위하여 진녀를 맞아 왔는데, 간신인 비무기(費無忌)가 평왕에게 진녀를 취하라고 부추기니, 평왕이 취하였다. 비무기는 태자가 즉위한 뒤에 자신을 죽일 것이 두려워서 다시 태자를 참소하였다. 이에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오사(伍奢)가 평왕에게 간하였으나 평왕은 오히려 노하여 오사와 그의 큰아들 오상(伍尙)을 죽였다. 작은아들인 오원(伍員), 즉 오자서(伍子胥)는 오(吳)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로부터 9년 후 오자서가 오왕 합려(闔廬)를 도와 초나라의 도읍 영(郢)으로 쳐들어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300대나 매질해 원한을 풀었다. 이때 친구인 신포서(申包胥)가 너무 심하게 한다고 꾸짖고는, 진(秦)나라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였는데, 진왕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신포서가 담장에 기대어 서서 음식도 먹지 않고 밤낮으로 7일 동안 통곡을 하자, 진왕이 감격하여 초나라를 구제해 주었다. 《史記 卷66 伍子胥列傳》

[주-D017] 진 문공(晉文公)이 …… 멀리하였습니다 : 

남위(南威)는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미녀이다. 진 문공이 남위를 얻고 3일 동안 정사를 게을리하다가 마침내 그를 멀리하면서 “후세에 반드시 여색으로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戰國策 魏策》

[주-D018] 은(殷)나라가 …… 있도다〔殷鑑不遠 在夏后之世〕 : 

《시경》 〈대아(大雅) 탕(蕩)〉에 나온다. 이 시는 은나라의 후손은 의당 하(夏)나라가 멸망하게 된 원인을 거울삼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을 읊은 것이다.

[주-D019] 부초(夫椒) : 

월(越)나라가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한 곳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哀公) 1년 조에 “오왕 부차가 월을 부초에서 패배시켰다.[吳王夫差 敗越于夫椒]”라고 하였다.

[주-D020] 취리(檇李) : 

대본에는 ‘携李’로 되어 있는데, 《춘추좌씨전》 정공(定公) 14년 조에 의거해 바로잡았다. 취리는 월나라가 오나라를 격퇴시켰던 곳이다.

[주-D021] 태화(太華)ㆍ이궐(伊闕)ㆍ양장(羊腸) : 

태화는 중국의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로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화산(華山)을 말한다. 이궐은 옛날 주(周)나라의 관새(關塞)로,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낙양시(洛陽市)에 있다. 양장은 산서성(山西省) 태항산(太行山)에 있는 험난한 고개인 양장판(羊腸坂)을 말한다.

[주-D022] 옛사람의 …… 하였다 : 

《논어》 〈학이(學而)〉에 나오는 말이다.

[주-D023] 난은 …… 것이다〔亂匪降自天 生自婦人〕 : 

《시경》 〈대아(大雅) 첨앙(瞻卬)〉에 나온다. 이 시는 주공(周公)의 후손으로 대부(大夫)가 된 범백(凡伯)이 무도한 유왕(幽王)을 풍자한 노래이다.

[주-D024] 애봉인(艾封人)의 딸 : 

진 헌공(晉獻公)의 총희인 여희(驪姬)를 가리킨다. 진 헌공이 진 목공(秦穆公)과 함께 여융(驪戎)을 정벌하고서 미녀 한 명과 옥환(玉環) 두 개를 얻었는데, 진 헌공은 미녀를 취하고 진 목공은 옥환을 취하였다. 그 미녀는 바로 여융국의 애(艾) 땅에 봉해진 사람의 딸이었으며, 진(晉)나라로 들어온 뒤에는 헌공의 총애를 독차지해 화를 일으켰다. 《莊子 齊物論》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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