孔方傳
林 椿
孔方字貫之, 其先嘗隱首陽山, 居窟穴中, 未嘗出爲世用。始黃帝時稍採取之, 然性强硬, 未甚精鍊於世事。
帝召相工觀之, 工熟視良久曰, “山野之質, 雖藞苴不可用, 若得遊於陛下之造化爐錘間, 而刮垢磨光則其資質當漸露矣。王者使人也器之, 願陛下無與頑銅同棄爾.” 由是顯於世。後避亂徙江滸之炭鑪步, 因家焉。
父泉, 周大宰, 掌邦賦。方爲人, 圓其外方其中, 善趨時應變, 仕漢爲鴻臚卿。時吳王濞驕僭專擅, 方與之爲利焉。虎帝時海內虛耗, 府庫空竭。上憂之, 拜方爲富民侯, 與其徒充鹽鐵丞僅同在朝, 僅每呼爲家兄不名。
藞 : 물놀이할 약. 물놀이하다. 맞지 않는 모양. 苴 : 속창 저/거친거적 조/마름 차/두엄 자/얕볼 사/나라이름 파.
臚 : 벌일 려. 벌이다. 진열(陳列)함. 살갗. 가죽. 아랫배. 하복부. 펴다. 차례대로 늘어놓음. 傳하다. 行하다. 붙이다. 旅祭.
공방의 자는 관지(貫之)이며 일찌기 수양산에 숨어 굴 속에서 지내며 세상에 나와 쓰인적이 없었다. 애초에 황제(黃帝)때 잠시 사용되었던 적이 있으나 그 성정이 굳세기 때문에 정련되어 세상일에 전혀 쓰이지 못했다.
황제가 상공(相工 : 대장장이)을 불러 보게하였더니 상공이 한참 들여다보고 말했다.
"이것은 산야(山野)의 성질을 가져서 거칠고 사용하기 적절치 않지만, 폐하께서 조화를 부리는 풀무와 망치사이에 두어 때를 벗겨내고 연마하여 빛을 내게 한다면 그 바탕이 점차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왕이 되는 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적재적소에 쓰게 하는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무딘 구리와 같은 것으로 여겨 버리는 일이 없으시기 바라나이다."
이리하여 세상에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 후에 난을 피하여 강변의 숯화로(대장간)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살게 되었다.
아비는 천(泉)으로 주나라의 태재(大宰)였는데 나라의 세금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방(方)의 생김새는 밖은 둥글고 가운데는 네모이며 시대에 따라 변화를 잘하여 한나라 때 벼슬하여 홍려경(鴻臚卿)이 되었다. 당시 오왕(吳王) 비(濞)가 교만하고 참람하여 나라 일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방은 그와 한패가 되어 이득을 보았다.
무제(虎帝 : 武帝)때에는 나라가 혼란스럽고 나라의 창고가 텅 비었었다. 황제가 이를 걱정하여 방에게 부민후(富民侯)를 제수하고 그 무리인 염철승(鹽鐵丞) 근(僅)과 함께 조정에서 일하게 했는데 근은 항상 방을 형이라 부르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方性貪汙而少廉隅, 旣摠管財用, 好權子母輕重之法。以爲便國者不必古在陶鑄之術爾。遂與民爭錙銖之利, 低昂物價, 賤穀而重貨, 使民棄本逐末。妨於農要, 時諫官多上疏論之, 上不聽。
方又巧事權貴, 出入其門, 招權鬻爵, 升黜在其掌。公卿多撓節事之, 積實聚斂, 券契如山, 不可勝數. 其接人遇物, 無問賢不肖, 雖市井人, 苟富於財者, 皆與之交通, 所謂市井交者也。
時或從閭里惡少, 以彈棋格五爲事, 然頗好然諾, 故時人爲之語曰, “得孔方一言, 重若黃金百斤.”
廉隅 : 품행이 바르고 절개가 굳음. 염치. 摠 : 모두 총.
錙 : 저울눈 치. 저울눈. 무게의 단위. 6수(銖), 8수 또는 6냥(兩), 8냥 등 여러 설이 있음. 적은 양. 근소함의 비유.
銖 : 무게단위 수. 무게의 단위. 1냥(兩)의 24분의 1. 아주 적은 양. 무디다. 둔함. 錙銖 : 아주 가벼운 무게를 이르는 말. 아주 작은 양.
末 : 士農工商의 끝인 商을 말함.
방은 성격이 탐욕스럽고 추잡하여 염치가 없었는데 재물을 모두 관리하게 되자 본전과 이자의 경중을 저울질하는 법을 좋아하였다. 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은 반드시 예전처럼 질그릇을 굽거나 쇠를 주조하는 방법에만 있는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백성들과 아주 작은 이익을 다투고 물건의 가격을 낮추어 곡식을 천시하고 재화를 소중하게 여겨 백성들로 하여금 근본을 버리고 맨 끝의 상(商)을 좇게 만들었다. 농사를 방해하여 때때로 간관들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논했으나 위에서 듣지 않았다.
방은 또 재빠르게 권세있고 귀한 가문을 섬겨 그 집안에 출입하면서 권세를 구하고 벼슬을 파니 벼슬을 올리고 내치는 일이 그의 손안에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공경들이 절의를 굽혀 그를 섬기게 되었는데 재물이 쌓이고 세금이나 뇌물을 거두어 문서와 증서들이 산처럼 쌓여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가 접하는 사람이나 인물을 대함에 있어서도 현명하고 어리석음을 묻지 않고 시정사람이라 할지라도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면 모두 그들과 사귀고 통하니 이른바 시정의 교제라는 것이다.
때로는 거리의 불량한 젊은이들과 어울려 바둑을 두고 노름하는 것을 일삼아 승락하기에 매우 거침이 없어 당시 사람들이 그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방의 한마디 말은 그 무게가 황금 백근과 같다."
元帝卽位, 貢禹上書, 「以爲方久司劇務, 不達農要之本, 徒興管榷之利, 蠹國害民, 公私俱困。加以賄賂狼藉, 請謁公行, 蓋‘負且乘, 致寇至’ 大易之明戒也, 請免官以懲貪鄙。」
時執政者有以穀梁學進, 以軍資乏, 將立邊策, 疾方之事, 遂助其言, 上乃頷其奏, 方遂見廢黜。
謂門人曰, 「吾頃遭主上, 獨化陶鈞之上, 將以使國用足而民財阜而已。今以微罪, 乃見毁棄, 其進用與廢黜, 吾無所增損矣。 幸吾餘息, 不絶如線, 苟括囊不言, 容身而去. 以萍遊之迹, 便歸于江淮別業, 垂緡若冶溪上, 釣魚買酒, 與閩商海賈拍浮酒船中, 以了此生足矣. 雖千鍾之祿, 五鼎之食, 吾安肯以彼而博此哉! 然吾之術, 其久而當復興乎。」
蠹 : 좀 두. 좀. 책, 옷, 사물 따위를 쏘는 해충. 좀먹다. 해치다.
負且乘致寇至 : <周易 繫辭上傳 雷水解卦 63.>에 나오는 문구. 負는 소인의 일이고 乘은 군자의 기물인데 짊어진 자가 기물에 올라타면 자신의 물건이 아닌 줄 알고 다투어 빼앗고자 한다. 그러므로 '짊어지고 오르면 도둑을 불러들인다.'는 것.
陶鈞 : 도기를 만드는 녹로. 천하를 잘 다스리다. 인재를 양성하다. 別業 : 휴양을 위해 주변 경관이 좋은 곳에 따로 마련한 집. 별장.
閩商 : 복건성일대의 상인. 海賈 : 바다위의 상인.
五鼎 : 대부의 제사에 다섯 개의 솥에 소‧양‧돼지등 다섯 종류의 고기로 만든 음식을 바친 것. 영전하는 것. 성대한 음식.
원제가 즉위하자 공우(貢禹)가 글을 올렸다. "방이 오랫동안 힘들고 바쁜 일을 맡아왔으나 농사가 근본임을 두루 통하게 하지 못했고 다만 장사치들의 이익만을 일으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쳐 공사(公私)가 모두 곤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뇌물이 횡행하고 청탁이 공공연히 행하여지고 있어, 대체로 '등에 지고 올라 타서 도적이 이르게 한다.' 는 것으로 주역에서 분명하게 경계하는 것입니다. 부디 그의 관직을 면하시어 탐욕스럽고 추한 자들을 징계하시옵소서."
당시 정권을 잡은 자중에는 곡량(穀梁 : 春秋)을 공부하여 출사한 자가 있어 군수물자에 관한 일을 임시로 맡아 변방을 지키기 위한 방책을 세우다가, 방이 한 일을 미워하여 그 말을 거들었다. 위에서 그 주청을 받아들여 마침내 방은 내침을 당했다.
그가 문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잠시 주상을 뵙고 오직 천하를 다스리시는 주상께서 마음을 바꾸시어 나라의 물자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들의 재물이 풍부해지기를 바랬을 뿐이다. 이제 작은 죄로 버림을 받았으니 그가 기용되고 내침을 당하는 일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없을 것이다. 다행히도 나에게 숨이 붙어 있고 실오라기와 같이 끊어지지 않았으니 입을 묶고 말을 하지 않는다면 몸을 보전하고 떠날 수 있을 것이다. 부평초가 떠다니는 것처럼 바로 강회(江淮)의 별장으로 돌아가 약야계(若冶溪)에 낙시줄을 드리우고 낚시를 하면서 술을 사서 민상과 바다위의 상인들과 더불어 배에 술 싣고 떠돌다가 이렇게 삶을 마치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비록 천종의 녹을 받고 오정의 음식을 받는다 할지라도 내가 어찌 그것이 좋다하고 이것과 바꾸겠는가! 그러나 나에게도 재주가 있으니 오래 되면 마땅히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晉和嶠聞其風而悅之, 致貲巨萬, 遂愛之成癖, 故魯褒著論非之, 以矯其俗。唯阮宣子以放達, 不喜俗物, 而與方之徒杖策出遊, 至酒壚, 輒取飮之。王夷甫口未嘗言方之名, 但稱‘阿堵物’耳, 其爲淸議者所鄙如此。唐興, 劉晏爲度支判官, 以國用不贍, 請復方術, 以便於國用, 語在『食貸志』。
時方沒已久, 其門徒遷散四方者, 物色求之, 起而復用。故其術大行於開元ㆍ天寶之際, 詔追爵方朝議大夫少府丞。
嶠 : 뾰족하게 높을 교. 뾰족하게 높다. 뾰족하게 높은 산. 산길. 고개. 산마루. 악보이름.
和嶠(? ~ 292) : 서진의 관료로 때를 잘 맞추어 재산을 긁어모아 왕이나 공에 필적할 정도였으나, 성품은 매우 인색하였다.
阮宣子 : 阮脩를 말함. 항상 걸어 다니면서 돈 1백 전을 지팡이 머리에다 걸고 다녔다. 주점에 이르면 혼자서 실컷 마셨다.
그는 비록 당세의 부귀(富貴)한 자라도 즐겨 찾아간 일이 없었다. 이에서 장두전(杖頭錢)이라는 고사가 생겨났다. (세설신어>
王夷甫 : 중국 위진(魏晉)시대의 선비 왕연(王衍). 평생동안 속된 것을 싫어하여 돈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세설신어>
王夷甫雅尙玄遠, 常嫉其婦貪濁, 口未嘗言錢字. 婦欲試之, 令婢以錢遶牀, 不得行. 夷甫晨起, 見錢閡行, 呼婢曰, 擧却阿堵物.
진(晉)나라의 화교(和嶠)가 그 소문을 듣고 그를 따라서 거만금의 재산을 모았는데 그를 아끼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리하여 노포(魯褒)가 글을 지어 그를 비난하고 잘못된 풍속을 바로 잡았다. 오직 완선자만이 거리낌없이 활달하게 지내며 속물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방의 무리와 더불어 지팡이를 짚고 놀러 나가서 술집에 이르면 그 때마다 술을 마셨다. 왕이보는 방의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으며 다만 '아도물(阿堵物 : 이것들)이라 일컬었을 뿐이었는데 공방은 깨끗한 자에게 있어서는 이와 같이 비천하게 여겨졌다.
당나라가 일어나자 유안(劉晏)이 탁지판관이 되었는데 나라에서 쓸 물자가 넉넉하지 못하자 황제께 방의 방법을 다시 쓰자고 청하여 나라의 형편을 좋게 하려고 하였으며 그 말이 식대지(食貸志)에 실려있다.
그때 방은 죽은지 이미 오래되었고 그 문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그들을 찾아 다시 기용하였다. 그리하여 그 방법이 개원, 천보시절에 크게 행하여졌으며 조서를 내려 방에게 조의대부 소부승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及炎宋神宗朝, 王安石當國, 引呂惠卿同輔政, 立靑苗法, 天下始騷然大困。蘇軾極論其弊, 欲盡斥之, 而反爲所陷, 遂貶逐, 由是朝廷之士不敢言。司馬光入相, 奏廢其法, 薦用蘇軾, 而方之徒稍衰減而不復盛焉。方子輪以輕薄獲譏於世, 後爲水衡令, 贓發見誅云。
史臣曰: “爲人臣而懷二心, 以邀大利者, 可謂忠乎? 方遭時遇主, 聚精會神, 以握手丁寧之契, 橫受不貲之寵, 當興利除害, 以報恩遇。而助濞擅權, 乃樹私黨, 非忠臣無境外之交者也。”
方沒, 其徒復用於炎宋, 阿附執政, 反陷正人。雖脩短之理在於冥冥, 若元帝納貢禹之言, 一旦盡誅, 則可以滅後患也。而止加裁抑, 使流弊於後世, 豈先事而言者, 嘗患於不見信乎!
송나라 신종 때 왕안석이 국정을 맡으면서 여혜경(呂惠卿)을 이끌고 함께 정사를 도와 청묘법을 시행하자 천하가 어지러워져 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소식이 그 폐단을 극력히 비판하고 그들을 모두 배척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모함을 받아 축출당하자 이로부터 조정의 인사들이 감히 말을하지 못했다. 사마광이 재상이 되자 그 법을 폐기할 것을 주청하고 소식을 천거하여 방의 무리가 점점 쇠약해지고 다시는 성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방의 아들 륜(輪)은 경박하여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후에 수형령(水衡令)이 되었다가 장물(贓物)이 적발되어 죽음을 당했다.
사신(史臣)이 말했다. "남의 신하된 자가 딴 마음을 품고 큰 이익을 보려고 하는데 충성스럽다고 하겠는가? 방이 때를 만나고 주인을 만나 정신을 집중하여 정녕코 좋은 인연과 손을 맞잡고 외람되게 헤아릴 수 없는 총애를 받았으니 마땅히 나라에 이익이 되게 하고 해로움을 제거하여 은혜에 보답하였어야 했다. 그러나 오왕 비를 도와 권력을 마음대로 하고 사사로이 당을 만들기에 이르렀으니 충신은 경외(境外)의 교분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어긴 것이다."
공방이 죽자 그 무리가 송나라때 다시 기용되어 정권을 잡은 자들에게 아부하여 오히려 바른 사람들을 모함하였다. 비록 길고 짧은 이치가 아득히 먼 하늘에 있는 것이지만 만약 원제가 공우의 말을 받아들여 하루아침에 모두 주살하였다면 후환을 없앨 수 있었다.
그러나 단지 제재하고 억누르기만 해서 후세에까지 폐단이 이르게 했으니 어찌 일보다 말이 앞서는 자가 미덥지 못한 것을 항상 근심하지 않겠는가!
[해설]
임춘(林椿)은 고려 전기 김천 지역에 기거한 문인.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고려 건국 공신의 자손으로 한림원학사를 지낸 큰아버지 임종비(任宗庇)에게 학문을 배웠다. 문헌을 상고하면 의종 무렵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입신할 것을 표방하여 무신란 이전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나 20세 전후에 무신란(의종24년, 1170)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으며 겨우 피신하여 목숨은 부지하였다.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을 통해 여러 번 정권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뒤 경기도 장단(長湍)[현 파주시]으로 내려가 실의와 곤궁 속에서 방황하다가 요절하였다.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漢文)과 당시(唐詩)에 능하였으며, 이인로가 그의 유고를 모아서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6권을 엮었다. 麴醇傳, 孔方傳이 실려있다. 또 이인로는 파한집(卷下)에서 두차례에 걸쳐 임춘의 일화를 소개하며 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실었다. <파한집 권하 8, 25.>
孔方傳은 전(傳)의 형식을 빌어 돈을 의인화한 것이다.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권5와 『동문선(東文選)』 권100에 실려 있다. 제목의 ‘공방’은 엽전의 둥근 모양에서 공(孔)을, 구멍의 모난 모양에서 방(方)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공방의 조상은 수양산 굴 속에 숨어 살았고 세상에 나와 쓰여진 적이 없었는데, 황제(黃帝) 때 처음 채용되었다. 그의 아버지 화천(貨泉)은 주나라의 재상으로 나라의 세금을 담당하였다. 공방은 그 생김이 밖은 둥글고 안은 모나며, 임기응변을 잘하여 한(漢)나라의 홍로경(鴻臚卿)이 되었다.
그러나 공방의 성질이 탐욕스럽고 더러워, 돈을 중하게 여기고 곡식을 천하게 여기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근본(농사)을 버리고 장사 잇속만을 좇게 하였다. 또, 인물을 대함에도 어질고 불초함을 묻지 않고 재물만 많이 가진 자면 가까이 사귀었다.
그러다가 그것을 미워하는 이의 탄핵을 받고, 드디어 쫓겨나게 되었다. 당나라·송나라 때 다시 그의 무리와 아들이 채용되었으나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임춘은 무신란을 만나 겨우 도망하여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극도로 빈한한 처지에서 불우한 일생을 마친 인물이다. 따라서 돈을 소재로 취한 것은 그의 곤궁했던 삶과 관련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의 생활에 돈이 요구되어 만들어져 쓰이지만, 그 때문에 생긴 인간의 타락상을 돈의 속성과 관련이 있는 역대의 고사를 동원하여 결구(結構)하였다.
작자가 작품의 말미에서 사신(史臣)의 말을 빌려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이익을 좇는 자를 어찌 충신이라 이를 것인가. 공방이 때를 만나고 주인을 만나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으니, 응당 이익을 일으키고 해가 됨을 덜어 그 은덕에 보답해야 할 것이거늘, 권세를 도맡아 부리고 사사로운 당(黨)을 만들었으니, 충신은 경외(境外)의 사귐이 없다는 것에 어그러진 자이다.”라고 한 평결(評結)은 이 글의 주제이다.
즉, 공방의 존재가 삶의 문제를 그릇되게 하므로 후환을 막으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다. 난세를 만나 참담한 가난 속에 지내다 일찍 죽고 만 작자의 돈의 폐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음백과}
이 글은 서진(西晉)시대의 문신이며 학자인 노포(魯褒)의 전신론(錢神論)과 더불어 돈을 주제로 쓴 글이다. 노포는 전신론을 통하여 화폐권력과 화폐숭배를 풍자하였다. 두 사람 사이의 시대는 서진(265 ~ 316)으로부터 고려 중기(이인로의 생애가 1152 ~ 1220였는데 비슷한 연배로 추정됨.) 까지 1,000년에 가까운 년대의 차이가 나며 우리나라와 중국이라는 무대도 다르다. 다만 사회가 혼란했던 점에 있어서는 같다. 당시 서진은 팔왕(八王)의 난과 영가(永嘉)의 난으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하였으며 사회가 어지러워지자 노포는 이름을 숨기고 은자(隱者)로 살았다. 그에 반해 임춘이 살았던 시대의 고려는 무신의 난으로 사회가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으며 난으로 가문이 화를 입었고 후에 벼슬하기를 원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우한 생을 살다가 30대 후반에 요절하였으니 살아간 상황도 매우 다르다.
시공을 초월하여 두 사람이 쓴 공방전과 전신론을 비교하며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