浮碧樓
李穡
昨過永明寺、 어제 영명사에 갔다가,
暫登浮碧樓。 잠시 부벽루에 올랐다.
城空一片月、 성 위에는 조각달이 떠 있고,
石老雲千秋。 조천석은 천년의 세월을 말해주네.
麟馬去不返、 기린마는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데,
天孫何處遊。 천손은 지금 어느 곳을 노니는가?
長嘯倚風磴、 길게 휘파람 불며 돌다리에 기대니,
山靑江自流。 산은 푸르고 강물은 절로 흐르네.
☞ 永明寺
부벽루(浮碧樓)의 서편 기린굴(麒麟窟)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31본산시대에는 평안남도의 사찰을 관할하였던 본산이었다. 동명성왕의 구제궁(九梯宮) 유지에 392년(광개토왕 2)에 창건하고 아도화상(阿道和尙)을 머물게 하였다 한다.
그 뒤 고려시대에는 선종·숙종·예종·인종·의종 등이 대동강에 용선을 띄우고 노닐다가 이 절에서 휴식을 취하며 헌향하고는 하였다. 특히, 예종은 1109년(예종 4) 4월에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을 개설하였고, 5월에는 절의 중창을 명하기도 하였다.
1663년(현종 4)에는 총섭(摠攝) 자평(自平)이 당우를 모두 중수하였고, 1703년(숙종 29)에는 구관(句管)이 득월루(得月樓)를 보수하였으나, 1894년(고종 31)의 청일전쟁으로 몇 칸의 당우만을 남긴 채 모두 불타버렸다.
1911년 이 절은 서도(西道)의 본산이 되었고, 1920년 31본산 중의 하나가 되었는데, 이 절과 소속 말사들은 『화엄경』을 근본경전으로 하고 칠조(七祖)가 전수한 종의(宗義)를 이어가는 것을 규범으로 삼았다. 이 때 용반(龍般)이 주지로 취임하여 수년 동안 사찰을 일신시켰으며, 1922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하고 당우 및 요사채를 새로 짓기도 하였다.
李仁老의 破閑集(卷中 22)에, 學士 金黃元이 영명사에 갔다가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이라는 한 련을 얻었을 뿐, 시상이 고갈되어 그 시를 완성하지 못하고 통곡하며 내려왔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石老 : 朝天石.
동명성왕이 이 돌을 타고 상제님께 조회했다고 하며 삼국유사에는 조천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조천석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외에도 제왕운기, 신증동국여지승람. 규원사화등에서도 같은 기록이 나온다.
“道士等行鎭國內有名山川 古平壤城勢新月城也 道士等呪勅南河龍 加築爲滿月城 因名龍堰城 作讖曰龍堰堵 且云千年寶藏堵 或鑿破靈石<俗云都帝嵓 亦云朝天石 蓋昔聖帝騎此石 朝上帝故也>” [삼국유사 권제3, 11장 앞쪽, 흥법 3 보장봉노보덕이암]
磴 : 돌비탈길 등. 돌비탈길, 돌다리. 돌사다리. 개울물이 붇다. 늘다. 불어남.
[해설]
고려 후기에 이색(李穡)이 지은 한시. 오언율시. ≪목은시고 牧隱詩藁≫ 권2에 실려 있고, 그 밖에 ≪동문선≫ 권10, ≪기아 箕雅≫ 권5, ≪대동시선≫ 권1 등에도 전한다. 내용은 부벽루에 올라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의 고사를 회고한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조화있는 묘사를 통하여 수준높은 한시의 세계를 과시한 작품이다.
이색의 시편(詩篇) 중에는 이 밖에도 <독두시 讀杜詩> 등 명작이 수없이 많지만, 특히 이 <부벽루>는 그의 시를 대표하는 절창으로 꼽히고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서예가였고 화가인 신위(申緯 : 1769 ~ 1845)는 정지상(鄭知常)의 <송인 送人>과 이색의 이 <부벽루>를 비교하여 한 마디로 ‘위장부전요조랑(偉丈夫前窈窕娘 : 대장부 앞의 요조숙녀)’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