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四五. 韓世家[襄王] 襄王四年, 與秦武王会臨晉. 其秋, 秦使甘茂攻我宜陽. 五年, 秦抜我宜陽,1) 斬首六萬. 秦武王卒. 六年, 秦复與我武遂. 九年, 秦复取我武遂. 十年, 太子嬰朝秦而帰.2) 十一年, 秦伐我, 取穣.3) 與秦伐楚, 敗楚将唐眛.
양왕 4년에는 진 무왕(秦武王)과 임진(臨晉)에서 회맹했다. 그해 가을에 진나라가 감무(甘茂)를 시켜서 한나라의 의양을 공격했다. 5년에는 진나라가 한나라의 의양을 함락시키고, 군사 6만 명을 죽였다. 진 무왕이 죽었다. 6년에는 진나라가 한의 무수(武遂)를 다시 돌려주었다. 9년에는 진나라가 다시 한나라의 무수를 빼앗았다. 10년에는 태자 영(嬰)이 진나라에 입조(入朝)하고 돌아왔다. 11년에는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해 양(穰)을 빼앗았다. 진나라와 함께 초 나라를 공격해, 초 나라의 장수 당매(唐昧)를 격퇴시켰다.
十二年, 太子嬰死. 公子咎、公子蟣蝨争為太子. 時蟣蝨質於楚. 蘇代謂韓咎曰:「蟣蝨亡在楚, 楚王欲内之甚. 今楚兵十余萬在方城之外,4) 公何不令楚王築萬室之都雍氏之旁,5) 韓必起兵以救之, 公必将矣. 公因以韓楚之兵奉蟣蝨而内之, 其聴公必矣, 必以楚韓封公也.」韓咎従其計.
12년에는 태자 영이 죽었다. 공자 구(咎)와 공자 기슬(蟣蝨)이 서로 태자 자리를 다투었다. 이때 기슬은 초 나라에 인질로 있었다.
소대(蘇代)가 한구(韓咎)에게 이르기를 “기슬이 초 나라에 잡혀 있는데, 초 나라 왕은 그를 돌려보내고 싶어합니다. 지금 초 나라 군사 10만여 명이 방성(方城) 밖에 있는데, 당신은 왜 초 나라 왕에게 옹지(雍氏) 옆으로 만호의 성읍을 만들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나라가 분명히 군사를 일으켜서 옹지를 구원할 것이고, 그대는 장수가 될 것입니다. 그대는 한과 초 양국의 군대를 이용해 기슬을 도와 그를 데려오면, 그가 필경 당신의 말을 들을 것이므로, 초와 한 나라 경계의 땅을 당신에게 봉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한구가 그 계획에 따랐다.
楚囲雍氏,6) 韓求救於秦. 秦未為発, 使公孫昧入韓. 公仲曰:「子以秦為且救韓乎?」対曰:「秦王之言曰『請道南鄭、藍田,7) 出兵於楚以待公』, 殆不合矣.」8)公仲曰:「子以為果乎?」対曰:「秦王必祖張儀之故智.9) 楚威王攻梁也, 張儀謂秦王曰:『與楚攻魏, 魏折而入於楚, 韓固其與国也, 是秦孤也. 不如出兵以到之,10) 魏楚大戦, 秦取西河之外以帰.』今其状陽言與韓, 其実陰善楚. 公待秦而到, 必軽與楚戦. 楚陰得秦之不用也, 必易與公相支也.11) 公戦而勝楚, 遂與公乗楚, 施三川而帰.12) 公戦不勝楚, 楚塞三川守之,13) 公不能救也. 窃為公患之. 司馬庚14)三反於郢, 甘茂與昭魚15)遇於商於, 其言収璽,16) 実類有約也.」公仲恐, 曰:「然則柰何?」曰:「公必先韓而後秦, 先身而後張儀.17) 公不如亟以国合於斉楚, 斉楚必委国於公. 公之所悪者張儀也,18) 其実猶不無秦也.」於是楚解雍氏囲.19)
초 나라가 옹지를 포위하고, 한나라가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진나라가 한나라를 도와 출병하지 않고, 공손매(公孫昧)를 시켜 한나라로 가게 했다.
공중치가 말하기를 “그대는 진나라가 한나라를 도와줄 것 같습니까?”라고 하니, 소대가 대답해 말하기를 “진나라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정(南鄭), 남전(藍田)을 지나서 초 나라로 출병해 그대를 기다리겠다.’라고 하셨으니, 단지 언행이 일치하지 않을까 염려될 뿐입니다.”라 했다.
공중치가 말하기를 “그대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하니, 소대가 대답해 말하기를 “진나라 왕은 반드시 장의(張儀)의 낡은 수법을 쓸 것입니다. 초 위왕(楚威王)이 양(梁)을 공격할 때, 장의가 진나라 왕에게 아뢰기를 ‘초 나라와 함께 위(魏)나라를 공격하면 위나라는 꺾여서 초 나라에 항복할 것이고, 한나라는 본디 그의 동맹이니, 진나라만 고립될 것입니다. 출병해 그들을 기만시키면 위와 초 나라가 크게 싸울 것이고, 진나라는 이를 이용해 서하(西河) 밖의 땅을 탈취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지금의 상황이 바로 진나라가 거짓으로 한나라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이니, 그들은 실질적으로는 암암리에 초 나라와 우호를 다질 것입니다.
그대는 진나라 군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초 나라와 가볍게 교전하십시오. 초 나라는 암암리에 진나라가 그대를 위해 출병하지 않을 것을 알고, 가볍게 그대의 군대를 대할 것입니다. 공이 전쟁에서 초 나라에 승리하면, 진(秦)나라는 공과 함께 초 나라를 통제할 것이고, 삼천(三川) 지역까지 위세를 떨친 후에 돌아오십시오. 공이 전쟁에서 초 나라에 승리하지 못하면, 초 나라는 삼천 지역을 봉쇄해 지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대를 도울 방도가 없습니다. 저는 사력을 다해 그대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사마경(司馬庚)이 세 차례에 걸쳐서 영(郢)을 드나들고, 감무와 소어(昭魚)가 상(商), 오(於)에서 만나서, 말로는 군부(軍符)를 거두어들여 초 나라의 한나라에 대한 공격을 금지시키기 위함이라지만, 실제로는 다른 약속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공중치가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했다.
소대가 대답해 말하기를 “공께서는 반드시 한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진나라를 뒤에 생각해야 하며, 본인의 책략을 먼저 고려한 연후에 장의의 권모술수를 생각하십시오. 공께서는 즉각 제, 초와 연합하면 제와 초는 분명히 먼저 공에게 국사를 맡길 것입니다”라 했다. 이때에 초 나라는 옹지에 대한 포위망을 풀었다.
蘇代又謂秦太后弟羋戎20)曰:「公叔伯嬰恐秦楚之内蟣蝨也,21) 公何不為韓求質子於楚?22) 楚王聴入質子於韓,23) 則公叔伯嬰知秦楚之不以蟣蝨為事, 必以韓合於秦楚. 秦楚挟韓以窘魏, 魏氏不敢合於斉, 是斉孤也. 公又為秦求質子於楚,24) 楚不聴, 怨結於韓. 韓挟斉魏以囲楚, 楚必重公.25) 公挟秦楚之重以積徳於韓, 公叔伯嬰必以国待公.」於是蟣蝨竟不得帰韓.26) 韓立咎為太子. 斉、魏王來.27)
소대는 또 진 태후(秦太后)의 아우 미융(羋戎)에게 이르기를 “공숙 백영(公叔伯嬰)은 진, 초 양국이 기슬의 귀환을 지지할까 두려워하는데, 공께서는 어찌해 한나라를 대신해 초 나라에 질자(質子) 기슬을 귀환시키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초 나라 왕이 기슬을 한나라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공숙 백영은 진, 초가 기슬을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으므로, 반드시 한이 진, 초와 연합하게 할 것입니다.
진, 초가 한나라를 끼고서 위나라를 궁지에 몰면, 위나라는 제나라와 감히 연합하지 못할 것이고, 이에 제나라는 고립될 것입니다. 공께서는 또다시 진나라를 위해 초 나라에 기슬의 귀환을 청하고, 초 나라가 승낙하지 않으면, 한나라의 원한을 사는 것이 됩니다. 한나라가 제, 위를 끼고서 초 나라를 포위하면, 초 나라는 반드시 공을 중시할 것입니다. 공께서 진, 초의 권위를 등에 업고 한나라에 덕을 쌓는다면, 공숙 백영은 반드시 공에 의지해 국정을 운영할 것입니다.”라 했다.
이렇게 했지만 기슬은 끝내 한나라로 귀국하지 못했다. 한나라는 구(咎)를 태자로 삼았다. 제와 위 나라 왕이 한나라를 방문했다.
각주 1 正義括地志云:「故韓城一名宜陽城, 在洛州福昌県東十四里, 韓宜陽城也.」 2 集解徐広曰:「與秦会臨晉, 因至咸陽而還.」 3 正義穣, 人羊反, 鄧州県也. 郭仲産南雍州記云:「楚之別邑. 秦初侵楚, 封公子悝為穣侯. 後属韓, 秦昭王取之也.」 4 索隠方城, 楚之北境. 之外, 北境之北也. 正義括地志云:「方城山在許州葉県西南十八里. 左傳云楚大夫屈完対斉侯曰『楚国方城以為城』, 杜注云『方城山在南陽葉県南』.」 5 集解徐広曰:「在陽翟.」正義括地志云:「故雍氏城在洛州陽翟県二十五里. 故老云黄帝臣雍父作杵臼也.」 6 集解徐広曰:「秦本紀恵王後元十三年, 周赧王三年, 楚懐王十七年, 斉湣王十二年, 皆云『楚囲雍氏』. 紀年於此亦説『楚景翠囲雍氏. 韓宣王卒, 秦助韓共敗楚屈丐』. 又云『斉、宋囲煮棗』. 皆與史記年表及田完世家符同. 然則此巻所云『襄王十二年, 韓咎従其計』以上, 是楚後囲雍氏, 赧王之十五年事也. 又説『楚囲雍氏』以下, 是楚前囲雍氏, 赧王之三年事.」 7 正義南鄭, 梁州県. 藍田, 雍州県. 秦王言或出雍州西南至鄭, 或出雍州東南歴藍田出嶢関, 倶繞楚北境以待韓使而東救雍氏. 如此遅緩, 近不合於楚矣. 8 索隠殆不合於南鄭. 9 集解徐広曰:「祖者, 宗之習之謂也. 故智, 猶前時謀計也.」 10 索隠到, 欺也, 猶俗云「張到」. 然戦国策作「勁」, 勁, 強也. 11 索隠言楚陰知秦, 不為公用, 亦必易為公相支拒也. 12 正義施猶設也. 三川, 周天子都也. 言韓戦勝楚, 則秦與韓駕御於楚, 即於天子之都, 張設救韓之功, 行霸王之跡, 加威諸侯, 乃帰咸陽是也. 13 正義楚乃塞南河四関守之, 韓不能救三川. 14 集解徐広曰:「一作『唐』.」 15 集解徐広曰:「楚相国.」 索隠戦国策謂之昭蹴. 16 劉氏云「詐言昭魚來秦, 欲得秦官之印璽」. 収即取之義也. 17 正義先以身存韓之計, 而後知張儀為秦到魏之計, 不如急以国合於斉楚. 18 正義悪, 烏故反. 公孫昧言公仲所悪者張儀到魏之計, 雖以国合於斉楚, 其実猶不軽欺無秦也. 19 集解徐広曰:「甘茂傳云『楚懐王以兵囲韓雍氏, 韓使公仲告急於秦, 秦昭王新立, 不肯救. 甘茂為韓言之, 乃下師於殽以救韓也』. 又云『周赧王十五年, 韓襄王十二年, 秦撃楚, 斬首二萬, 敗楚襄城, 殺景欠』. 周本紀赧王八年之後云『楚囲雍氏』, 此當韓襄王十二年, 魏哀王十九年. 紀年於此亦説『楚入雍氏, 楚人敗』. 然爾時張儀已死十年矣.」 正義自此已上十二年, 並是楚後囲雍氏, 赧王之十五年一段事也. 前注徐広云「『楚囲雍氏』之下, 是楚前囲雍氏, 赧王三年事」, 徐説非也. 徐見下文云「先身而後張儀」及「公之所悪者張儀也」, 言張儀尚存, 楚又両度囲雍氏, 故生此前後之見, 甚誤也. 然是公孫昧卻述張儀時事, 説韓相公仲耳. 20 集解徐広曰:「号新城君.」 索隠羋, 姓;戎, 名. 秦宣太后弟, 号新城君. 21 索隠按戦国策, 公叔伯嬰與蟣蝨及公子咎並是襄王子. 然伯嬰即太子嬰, 嬰前死, 故咎與蟣蝨又争立. 此取戦国策説, 伯嬰未立之先亦與蟣蝨争立, 故事重而文倒也. 22 索隠令韓求楚, 更以別人為質, 以替蟣蝨也. 正義為, 于偽反. 後同. 23 索隠質子, 蟣蝨也. 正義質子, 蟣蝨. 蘇代令羋戎為韓求蟣蝨入於韓, 楚不聴. 公叔伯嬰知秦楚不以蟣蝨為事, 必以韓合於秦楚. 「楚王聴入質子於韓」當云「楚王不聴入質子於韓」, 承前脱「不」字耳. 次下云「知秦楚不以蟣蝨為事」, 重明脱「不」字. 24 索隠令羋戎教秦, 於楚索韓所送質子, 令入之於秦也. 25 正義言韓合斉魏以囲楚, 楚必尊重羋戎以求秦救矣. 26 正義自此已前蘇代數計皆不成, 故韓竟立咎為太子也. 27 正義蘇代為韓立計, 故得斉、魏王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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