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四五. 韓世家[釐王] 十四年, 與斉、魏王共撃秦, 至函谷而軍焉. 十六年, 秦與我河外及武遂. 襄王卒, 太子咎立, 是為釐王.
14년에는 한나라 왕과 제와 위 나라의 왕이 합동으로 진나라를 공격해,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러서 병력을 주둔시켰다. 16년에는 진나라가 한나라에 황하 이남 지역과 무수를 주었다. 양왕이 죽고, 태자 구(咎)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희왕(釐王)이다.
釐王三年, 使公孫喜率周、魏攻秦. 秦敗我二十四萬, 虜喜伊闕. 五年, 秦抜我宛.1) 六年, 與秦武遂地二百里.2) 十年, 秦敗我師于夏山. 十二年, 與秦昭王会西周而佐秦攻斉. 斉敗, 湣王出亡. 十四年, 與秦会両周閒. 二十一年, 使暴■3)救魏, 為秦所敗, ■走開封.
희왕 3년에는 공손희(公孫喜)로 하여금 주(周), 위(魏) 나라 군을 이끌고서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진나라가 한나라 군 24만 명을 격퇴시켰고, 이궐산(伊闕山)에서 희를 포로로 잡았다. 5년에는 진나라가 한나라의 완성(宛城)을 함락시켰다. 6년에는 진나라에 무수 지역 2백 리 땅을 떼어주었다. 10년에는 진나라가 한나라의 군대를 하산(夏山)에서 격파했다. 12년에는 진 소왕(秦昭王)과 서주(西周)에서 회맹해, 진나라를 도와서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나라가 패배하자 제 민왕(齊湣王)이 도망쳤다. 14년에는 진나라와 동주, 서주 사이에서 회맹했다. 21년에는 폭원을 시켜서 위나라를 구원하게 했으나, 진나라에 패배해, 원이 개봉(開封)으로 도망쳤다.
二十三年, 趙、魏攻我華陽.4) 韓告急於秦, 秦不救. 韓相国謂陳筮5)曰:「事急, 願公雖病, 為一宿之行.」陳筮見穣侯. 穣侯曰:「事急乎? 故使公來.」陳筮曰:「未急也.」穣侯怒曰:「是可以為公之主使乎? 夫冠蓋相望, 告敝邑甚急, 公來言未急, 何也?」陳筮曰:「彼韓急則将変而佗従, 以未急, 故复來耳.」穣侯曰:「公無見王, 請今発兵救韓.」八日而至, 敗趙、魏於華陽之下. 是歳, 釐王卒, 子桓恵王立.
23년에는 조와 위 나라가 한나라의 화양산(華陽山)을 공격했다. 한나라가 급히 진나라에 알렸으나, 진나라가 구원하지 않았다.
한나라의 상국이 진서(陳筮)에게 말하기를 “일이 급하니, 공이 비록 병중이나, 밤을 새워서 진나라에 한번 다녀오십시오.”라고 재촉했다. 진서가 양후(穰侯)를 만났다. 양후가 말하기를 “일이 급합니까? 그러니 그대를 보냈겠지요.”라고 하니, 진서가 말하기를 “급하지 않습니다.”라 했다. 양후가 화가 나서 말하기를 “그대가 이와 같이 말하면서 그대 나라 왕의 사신이라고 할 수 있소? 대저 한나라의 사신은 왕래가 빈번한 법인데, 이는 우리나라에 다급한 상황을 알리려고 하기 때문이오. 그대가 와서 급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요?”라고 하니, 진서가 말하기를 “한나라가 다급해지면, 입장을 바꾸어서 다른 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것입니다.
상황이 급하지 않기 때문에 제가 다시 한 번 온 것입니다”라 했다. 양후가 말하기를 “그대는 진나라 왕을 만날 필요가 없소. 지금 출병해 한나라를 구원하겠소.”라고 하고, 8일 만에 진나라 군이 와서 조, 위 나라의 군대를 화양산 아래에서 격퇴시켰다. 이해에 희왕이 죽고, 아들 환혜왕(桓惠王)이 즉위했다.
각주 1 正義宛, 於元反. 宛, 鄧州県也, 時属韓也. 2 正義此武遂及上武遂皆宜陽近地. 3 正義音捐. 韓将姓名. 4 正義司馬彪云:「華陽, 山名, 在密県.」鄭州管城県南四十里. 5 集解徐広曰:「一作『筌』.」 索隠徐広云一作「荃」. 戦国策作「田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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