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樹後庭花
陳叔寶
麗宇芳林對高閣、 꽃 숲속 장귀비의 전각 임춘 고각을 마주하고 있는데,
新妝豔質本傾城。 단장한 아름다운 모습은 경국지색이로다.
映戶凝嬌乍不進、 문에 어른거리는 미인이 나오지 않는 것은
出帷含態笑相迎。 장막 안에서 나와 웃음띈 모습으로 만나려 함인가.
妖姬臉似花含露、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은 꽃이 이슬 머금은 듯,
玉樹流光照後庭。 고운 자태에 흐르는 빛이 뒷뜰에 비추는구나.
花開花落不長久、 꽃이 피고 지는 것 오래 가지 않으니
落紅滿地歸寂中。 가득히 진 붉은 꽃 적막 속으로 사라지겠지.
[해설]
〈玉樹後庭花〉라 하며, 후인들은 이를 ‘亡國之音’이라 칭한다. 남북조시대에 陳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陳叔寶(553 ~ 604)가 빈객을 맞아 貴妃 등과 즐겁게 잔치할 때마다 貴人과 女學士와 빈객들에게 시를 지어 서로 주고받게 하였다. 그중에 더욱 아름다운 시를 뽑아 가사로 삼고 노래를 지어 아름다운 궁녀 수백 명으로 하여금 노래 부르게 하였는데, 〈옥수후정화〉는 그 악곡 중의 하나이다.
그에게 원래 기녀출신인 장려화(張麗華)란 후궁이 있었는데 장귀비는 키가 7척이고 아름다운 미모와 요염한 모습에 사람을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어 조회 때에도 후주와 함께 정사를 논했다고 하며, 수(隋)나라의 대군이 이르렀을 때에도 궁중에 주악을 울리며 무녀들이 춤을 추게 하고 있었다 한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이 이를 망국의 노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악학궤범에 후전(後殿) · 후정화(後庭花), 북전(北殿)이라하여 고려 충혜왕(忠惠王)이 뒤뜰에서 여자들과 어울려 불렀다고 전해지는데 조선 세종 때 폐지되었다고 한다.
이어 성종 때 성현(成俔)이 왕명에 의하여 악가(樂歌)를 개산(改刪)할 때, 조선창업을 송축한 가사로 개작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향악공(鄕樂工)을 뽑을 때 시험곡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시인 杜牧은 진후주(陳後主)의 고도(故都)를 지나다가 '商女不知亡國恨 隔江猶唱後庭花' 장사치 계집들은 나라 망한 한도 모르고 강가에서 아직도 후정화(後庭花) 노래를 부른다.고 하는 泊秦淮(秦淮河에서 정박하여)를 지었다 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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